[이시훈] 쉘 위 댄스?

이코스타 2003년 10월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신선한 바람이 있는 초가을의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며 온몸으로 맑은 공기를 호흡하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손에는 작은 물병과 책 한 권을 지녔을 뿐이지만 마음은 천하를 가진 듯이 우쭐해질 지경입니다. 하늘을 들어 마신다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하늘을 마시고 나면 몸은 구름처럼 자유롭고 가볍게 대기를 춤추며 다닐 수 있겠지요.


커다란 나무의 뿌리에 걸터앉거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은 평화롭고 무언가 충만해지는 느낌이 밀려옵니다.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무척 인상적이고 특별한 시집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빨리 읽고 싶은 생각에 빌리자마자 근처 공원에 가서 자릴 잡고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시집에는 오십 여 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데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본다는 사람에서부터 대부분 평소에 시 쓰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자작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편집한 시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얇지만 그 내용이 두터운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를 쓴 이들은 모두 나이, 종교, 직업, 가족 관계, 인종, 주거지역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지만 유방암이라는 공통된 경험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여성들입니다. 유방암으로 투병하면서 겪는 고통, 소외감, 두려움, 수술 후에 찾아온 극심한 우울증, 상실감등에 대한 진솔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미지의 그들과 마음이 닿는 것만 같아졌습니다. 수유에 대한 행복한 기억, 가족들의 섬세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아서 스스로를 가둔 경험, 더운 여름 가발을 벗고 외출했다가 경험한 따가운 시선, 수술대 위에서 숫자를 세면서 점점 아득해져 가던 의식의 공포… 한 명 한 명의 시들 속에는 전혀 다른 시각과 경험과 감정들이 녹아 있어서 읽는 저의 느낌도 다양하게!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과장이나 거짓 없이 체험한 진솔한 내용들에서 받은 감동이 물결처럼 서서히 제 안에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집의 뒷부분에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위로 받고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는지, 만난 적도 없는 타인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담과 앞으로도 같은 질병으로 진단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속적인 교류를 하겠다는 계획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혼자 짊어진, 나만의 고통이라고 여겼던 일들을 타인들과 나누며, 그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동질 감을 통해서 슬픔과 어두움이 작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그들은 공유한 것이지요, 슬픔과 슬픔이 만나면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작아지고, 기쁨은 몇 배가 되어버리는 법칙은 우리가 체험하는 작은 기적 같은 일 중의 하나 같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모임, 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 장애 아를 가진 부모들의 모임 등 여러 종류의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상처의 공유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극한 비탄에 빠졌을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 나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인지, 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아무도 몰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고통만이 절실하고 태산 만하고 나만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아무도 이해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더 괴로운 것이 대부분의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런데 나와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나의 아픔을 정확하게 이해 해줄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이해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감정은 본능적으로 무척이나! 강렬한 욕구이니까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상처를 한 몸에 지닌 사내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결코 이해 받지 못했고 멸시 당했고, 가장 가까운 벗들로부터 배신당했으며 몇 푼에 팔려졌고, 온 몸이 찢기도록 매를 맞았고, 이 세상에서 가져본 것도 없이 누려본 것도 없이 가장 누추한 삶을 살다가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여러 형태의 상처와 아픔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내가 어둠 속에 숨어 울고 있을 때, 분노와 좌절로 비틀거릴 때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나의 아픔과 절박함을 이미 알고 있으며 ,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려는 깊은 사랑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그와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가 초대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서투른 스텝이 어느덧 우아하고 경쾌한 왈츠의 스텝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나는 고통을 잊어 갑니다. 나 또한 상처 입은 한 영혼에게 다가가 감히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손을 잡고 발 동작을 익혀 가는 동안 마음이 하나되어 두려움이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럿이서 함께 추는 춤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치유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음악에 이끌려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말하게 되겠지요.


“Hey, Shall we dance ?”


[이시훈] 싸이렌의 노래

이코스타 2003년 9월호



올 여름 많은 시간을 저는 바다에서 보냈습니다. 낚시에 재미를 붙여서 어쩌다 시간이 나면 선택의 망설임도 없이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바다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무척 더운 날 대낮에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서있기도 했고, 갑작스런 폭우를 만나 물고기처럼 젖은 채 낚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니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지식도 얻게 되더군요. 이를테면 가는 장소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의 종류가 다른 것과 물고기가 몰려드는 시간을 맞추는 것, 특정한 종류의 물고기가 좋아하는 미끼, 바다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시간과 고기떼의 움직임으로 그 깊이를 가늠하는 것까지 익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날은 손길이 분주할 정도로 물고기를 많이 잡기도하고, 어떤 날은 종일 허탕을 치면서 깜찍하게 미끼만 먹고 달아나는 피라미나 게 때문에 미끼 끼우기만 바쁜 날도 있고, 엄청난 대어를 만나 흥분하여 힘을 쏟으며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낚시 줄을 끊고 달아나는 놈의 꼬리를 바라보며 허탈해지는 경험도 몇 번했습니다.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연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욕심이나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바다에 자주 나가게 되면서 점점 낚시하는 일, 고기를 잡는 일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과 눈길을 빼앗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낚시 대를 던지기 위해 바람의 방향을 잡다가 바람의 부드러운 살결을 느끼며 할 일을 잊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시간마다 변하는 바다의 색과 물결의 모양을 넋 놓고 바라보는 일이 더 많아졌지요.



넓은 평면의 바다는 자칫 단순한 경치 때문에 지루할 것 같이 생각되어지지만 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바다는 얼마나 다른 얼굴과 표정을 보여 주는지 모릅니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바다의 붉은 수면과 해가 지는 저녁의 붉은 수면이 얼마나 다른 색조와 분위기를 그려내는지, 가슴 벅참과 어떤 애상, 희망과 애잔함, 신비함, 쓸쓸함.. 큰 감정의 기복을 일으키게 합니다. 해가 뜨거운 날 일수록 잔잔한 바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혀주기도 합니다. 더위로 인한 짜증이나 불쾌감이 부끄러워지는 것이지요.



깊은 밤이 되면 낚시하는 사람들의 수런거림이 물결 소리와 뒤섞여 묘한 화음을 이룹니다.



조명등의 빛을 받아 윤곽을 드러내는 물결의 하얀 포말의 움직임이 마치 살아있는 동물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다와 맞닿은 하늘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다투어 신호를 보내듯이 반짝이는지요 !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생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음성으로 들은 자는 얼마나 행복하고 가슴이 벅찼을지, 밤바다를 지키고 있는 제 자신이 최초의 인간이 되어 그 음성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오랫동안 전해오는 바다의 전설 중에 싸이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끝없는 바다의 지루함과 오랜 항해로 지친 어부들을 아름다운 목소리로 유혹하여 배를 암초에 부딪치게 하는 아름다운 인어 아가씨들의 전설은 언제나 우리에게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망망한 바다를 지도도 없이 별빛에 의존하여 길고 긴 길을 가는 어부들의 불안하고 지친 마음에 섬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모든 것을 잊고 홀려 따라갈 정도였나 봅니다. 지혜로운 어부들은 싸이렌의 섬을 지날 때 귀를 막았고, 율리시즈는 부하들에게 자신을 밧줄로 묶게 함으로써 무사히 섬을 지나쳤다는 전설을 기억합니다.



하루 종일 바다를 바라보며 그 변화와 느낌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있다보면 우리의 삶이 긴 항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면서 때로는 잔잔하고 지루한 노젓기를 계속해야하고 때로는 거친 풍랑과 어둠을 견디어 내면서 자신이 가는 길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수없이 자문해야 하는 항해 말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연의 섭리에 이끌려 가듯 운명의 행로에 순응해야하기도 하고, 순간마다 판단과 결단을 내리며 모든 상황을 극복하여야 하는 선장의 역할을 감당하며 내 삶의 배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어야 하기도 합니다. 때론 지치고 절망하며 노 젓는 손길을 멈추고도 싶고 난데없는 풍랑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수고를 멈추! ! ! 고 평안의 섬에서 쉬어 가라는 유혹이 나를 흔든다면, 그 아름다운 노래 속에 숨어 있는 쾌락과 죽음의 검은 유혹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 소리를 향해 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막막한 바다를 건너는 우리에게 다행히도 지도 대신 빛나는 별빛이 있기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목표를 향해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폭풍우에 별빛이 가리워도 우리 마음 속에 등대가 되어주는 그 빛은 변함이 없습니다. 싸이렌의 노래에 귀를 막은 어부처럼 자신의 몸을 기둥에 묶은 율리시즈처럼 말씀에 귀를 집중하고 십자가에 나를 묶는다면 어떤 세상의 유혹도 그릇된 가치도 초연하게 지나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배가 영원히 귀착할 그곳을 향해 가는 동안 돛대가 되어주시는 분, 그 분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향해할 수 있으니 우린 얼마나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것인 지요.



거대한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힘없고 보잘것없는 제 자신을 느끼면서 이렇게 작은 존재가 바다와 땅의 주권을 가졌다는 사실에 감격을 하곤 합니다. 그 넘치는 사랑이 물결처럼 내게 다가오기도 하고 바람결처럼 나를 어루만지기도 합니다. 깊고 아름다운 무한의 사랑의 바다에서 한껏 헤엄치는 은빛 물고기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이시훈] 천사와 씨름하는 사람

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키 크고 잎새 무성한 나무들이 무척 많아서 여름이 되면 곳곳에 울창한 숲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건너편의 집들이 사라진 아침을 맞으며 드디어 초록의 시절이 왔구나하는 감각적인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이른 아침 나무들 속을 산책하는 기분은 새로운 세상에 발을 딛는 기쁨을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숲 속엔 새로운 사회가 형성되어 나름대로의 질서 있는 살림을 사는 존재들이 느껴집니다. 나무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식량을 구하는 작은 동물들, 여유롭게 산책을 하는 노루 가족, 나무 밑둥에 기거하는 버섯이나 이끼류와 거기에 서식하는 곤충류등…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생물체들의 공동체를 목격하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경이로운 세계를 바라보곤 합니다.


들 토끼, 오소리, 고슴도치등의 작은 동물들을 아주 흔하게 보곤 하지만 가장 흔하고 가깝게 대하는 것은 다람쥐들입니다. 저희 아파트 주차장과 뜰에는 늘 다람쥐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마치 이웃의 한몫을 차지하려는 듯 행동합니다. 하루에도 두어 번 아파트 테라스에 올라와서 집안을 기웃거리는 당돌한 모습이 애완견 같습니다. 끼니를 손쉽게 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들은 숫제 단골을 정해 놓고 내 집처럼 찾아와 먹이를 청합니다. 바구니 따위를 내놓으면 새끼를 치고 아가들이 자랄 때까지 기식하는 영리한 어미들도 있습니다.


저희 집에도 그런 다람쥐 친구들이 있어서 그들이 땅콩을 가장 좋아하고 콘칩과 초코렛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늘 창가에 준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지난봄에 저희 집 테라스에서 새끼 세 마리를 출산한 어미와 아기 다람쥐들이 장난치며 노는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함께 여름을 맞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다 자란 아기 다람쥐들은 한 둘씩 어미를 떠나기 시작했고 어미도 다른 처소로 옮겨갔습니다. 그러나 요즘도 그 친구들은 끼니를 챙기러 거의 매일 저희에게 찾아옵니다. 어쩌다 오지 않는 날은 무슨 일인가 걱정도 되고 기다릴 정도가 되었지요.


그런데 야생해야할 그들이 사람들과 너무 가까워지면서 몇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주차장이나 차도에서 너무나 자주 발견되는 그들의 주검을 볼 때마다, 그들이 적응하기에 인간의 세계는 복잡하고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이 머물러야할 곳은 역시 안온한 숲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걱정은 그들이 그렇게 쉽게 주어진 음식에 길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힘들게 구한 열매 보다 사람들이 주는 고소하고 달콤한 먹이에 익숙해지고 나면, 거칠고 딱딱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애쓰려는 마음이 사라질까 하는 우려가 생깁니다. 자신이 속한 자연에 적응하지 못해 늘 낯선 세계를 기웃거리거나, 몸은 다람쥐인데 생각은 자신이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돌연변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됩니다.


얼마 전 시카고에서 타올랐을 열기가 그리습니다. 뜨거운 가슴과 정화된 영혼의 아름다운 모습들, 가슴 벅차게 밀려오는 소명감과 결의들… 지금쯤 사방으로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었을 코스탄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을 감격과 열의를 부러워합니다. 제 자신 신앙적인 나태에 빠질 때면 코스타 집회에서 보낸 시간들과 그 때의 영적 각성을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기도 합니다.


코스타에 다녀와서 그 감동의 시간이 얼마나 오래 내 삶에 영향을 주었고 신앙적인 결의를 지속시켰는가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고 냉소적인 감정이 생기기도 했고,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절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각종 부흥회, 찬양집회, 간증회, 중보기도 모임등에 참여하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곤 했습니다. 영적인 충만감과 다시 눈뜨는 듯한 기쁨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상황에 스스로 자문하며, 신앙적 자립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곤 합니다. 혹시 제 자신이 스스로 찾고 구하는 신앙적 진리보다는 쉽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 신앙의 열매에 익숙해져있는 것은 아닌가, 매일 매일의 일상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며 실천하는 신앙보다는 피상적이고 달콤한 감정에 더 매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 안에서 치열한 내적 전쟁을 치르며 얻어낸 말씀의 의미만이 내가 겪는 절망과 상처를 극복하게 해주며, 세상을 향한 힘과 비젼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단단한 신앙적 자아를 갖게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며 순간순간 들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여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은 오랫동안 다진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매일 밥을 먹으며 생활의 원동력을 얻듯 습관화된 큐티는 영적인 능력을 키워주며 늘 열려있는 마음과 감동을 줍니다.


초코렛에 길들은 다람쥐가 도토리를 구하기 위해 벌판과 나무 위를 오르는 일을 게을리 한 다면 그것은 자연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적응력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나무의 향내와 풀잎의 감촉에서 느끼는 기쁨을 잊은 다람쥐는 비록 벌판에 살고 있지만 이미 작은 틀 속에 갇혀서 사는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겠지요. 진리를 발견하는 기쁨은 들판을 달리고 높은 산을 오르며 자신 안에 있는 소리를 들을 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게 깨달은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입니다.


벌판에서 밤새도록 천사와 씨름하여 새로운 이름과 삶을 얻은 야곱을 생각하며 숲을 바라봅니다. 그가 끈질긴 씨름을 통해 드디어 하나님과 대면한 사건이 우리 모두의 삶에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이시훈] 그의 손길이 닿을 때

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대부분의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자신들이 활동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인정 받거나 널리알려지지 못했고 어려운 길을 걸었던 것에 비해, 피카소는 매우 젊은 시절부터 그의 천재성을 인정 받아 명예와 부를 누리며 왕성한 활동을 한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도 처음 파리에 와서 활동을 하던 이십대 초반에는 경제적으로 무척이나 빈궁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친구 막스 자코브의 좁은 방을 나누어 쓰던 이 년간, 먹는 것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밤새워 그림을 그리며 석유가 없어 한 손에 촛불을 들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의 뒷골목에 자리한 허름하고 더러운 건물에서 예술가, 행상인, 시인, 노동자 등의 온갖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공동생활을 하던 몇 년 동안에 그 유명한 청색시대가 구축되었습니다.(1901-1904)


삶에 대한 지치지 않는 탐구와 열정이 넘치는 이 젊은 천재 화가에게 가난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슬픔과 고통은 삶에 대한 명상의 기회와 깊은 통찰의 계기가 되어 그의 예술에 토양이 되어주었습니다. 깊고 차가운 청색으로 표현된 그의 작품들 속에는 우울함, 고뇌, 허무, 빈곤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서 바라보는 삶과 이웃들의 모습에서 발견한 삶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푸른색만큼 적합한 색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색 하나만으로도 그 명암과 톤을 달리함으로써 자신의 감정과 시각을 충분히 전달하는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됩니다.


그의 청색은 다만 절망과 우울함의 상징만이 아니라 그가 바라 본 새벽의 깊고 아름다운 하늘의 색이었을 것입니다. 어둡고 칙칙하고 비좁은 방에서 이젤도 없이 밤새 바닥에 허리를 구부리고 작업을 하고 난 뒤 창 밖을 보았을 때, 푸르고 깊은 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젊은 피카소가 느꼈을 감동을 상상해 봅니다. 가슴 깊이에서 서서히 번져 오르는 삶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벅차게 그를 사로잡았을 것 같습니다. 청색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관람하였을 때 제 자신이 느꼈던 감격은 “숨막힘”이라는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흐름, 삶과 죽음, 절망과 구원의 긴 서사가 한 화폭에 압축되어 있는 ‘삶’이란 작품에서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에 젖기도 했고, 비참한 현실을 대변하는 그의 청색 인물들을 보며 깊은 공감과 슬픔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빈 배 한 척만이 호젓이 떠있는 바닷가에 고개 숙인 여인이 어린 아이를 가슴 깊이 껴안고서 있는 작품 ‘ 바닷가의 여인과 아이’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암울하기만 합니다. 기도를드리는 듯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의 얼굴에는 수심의 그림자가 있고, 작은 아이는 엄마의 품에 곤히 잠들어 있습니다. 온통 푸르른 화면과 창백한 그녀의 얼굴과 손에 대비되는 붉은 꽃 한 송이가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녀의 모아진 손에 들려 있는 붉은 꽃만이 푸른 계열의 색조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아이를 안고 빈 바닷가를 거닐고 있는 여인의 상심과 슬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근심과 아이에 대한 간절한 소망.. 그 모든 것들에 대한 기도가 깊고 푸른 우울의 바다에서 홀로 붉게 피어난 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삶의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삶에 대한 관조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막막하기 만한 어두운 바다와 같은 삶의 한 복판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은 어둠과 완전히 구별되는 색조의 꽃을 피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시기에 피카소를 사로잡던 소재 중의 한 대상은 맹인이었습니다. 영양 실조와 질병으로 인한 실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대상이면서 또한 화가에게 절대적인 시각을 내면적인 시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하기에 적합한 모델 이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어둠, 절망, 빛의 상실을 의미하는 맹인의 모습에서 화가는 삶의 다른 부분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 맹인의 식사’라는 작품 속에 그려진 맹인의 움푹 패인 눈두덩과 가느다란 손가락은 지치고 고달픈 하루의 끼니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맹인 앞에 놓인 한 덩이의 빵과 작은 물병이 전부인 초라한 식탁에서 그의 고난과 덧없는 삶의 단면을 볼 수 있는데, 그의 여윈 손이 닿아 있는 물병과 빵은 푸른색의 전체에서 일탈한 붉은 색과 황금색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붉은 색과 노란 색을 통해 물병과 빵이 그에게 주는 의미를 이렇게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화가는 내면적인 시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비록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맹인은 손의 감각을 통해 빵과 물이라는 물질에서 생명의힘을 보게 됩니다. 그 맹인의 손길은 차갑고 우울한 세상에 색채를 더함으로써 생명의 끈을 잡게 하는 화가의 손길인 것입니다. 절망과 비탄으로 맞는 저녁 식사에서 더듬어 찾아 낸 물병과 한 덩이 빵은 그에게 생명을 약속하는 양식이기에 화가는 맹인의 손에 시각을 찾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림에 한해서 화가는 절대자이며 권능의 손길을 갖고 있습니다. 지치고 참담한 생활 속에서 상처 받은 인물들을 재현하고 그들을 통해 삶의 의미를 묻기도 하며, 그들의 삶의 방향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바닷가의 여인의 손에 아름다운 붉은 꽃을 그려 넣어 주거나 맹인의 가난한 식탁에 놓인 물과 빵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하면서 화가는 작품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누군가의 손길이 닿으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이 아름답게 채색되어지거나 삶의 꽃 한 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느낄 때가 없으신지요? 우리의 고난에의미를 부여하고 어둠에 빛을 주기도 하는 손길에 의해 내 삶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슬픔이 감사와 감격의 순간으로 바뀌어 버리는 그 따스한 손길을 경험하신적이 있으신지요?


세상이라는 넓은 화폭에 우리를 그려 넣고 그림이 완성되도록 다듬고 있는 그 손길 말입니다.

[이시훈] 감사의 이유

2003년 5월호

가끔 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나누는 친구인 한 자매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저는 이번엔 어떤 따뜻한 글이 있을까 기대를 하곤 합니다. 그녀의 글 속에는 제가 평소 깨닫지 못하는 감사의 의미가 늘 담겨있어 제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십여 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장애를 갖고 살게 된 그녀는 휠체어에 의지한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음악 듣는 것과 책 읽는 일을 무척 좋아하는 그녀의 감사는 자신이 가장 즐겨 하는 일에 지장이 없는 장애를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그녀의 감사는 어리둥절할 정도로 진실하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집니다.


성악가의 꿈을 키우던 젊은 시절 늘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콧대가 무척 높다는 평을 듣곤 했다는 그녀의 아름다웠을 시절을 상상해 보면 모란꽃이나 다알리아 꽃처럼 수려하고 당당했을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 그녀가 느꼈을 절망과 분노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처참했을지 마음이 아파 옵니다. 그러나 그녀가 보내는 편지에는 늘 밝고 온화한 모습만이 느껴집니다. 교만했던 자신을 겸손케 하시는 분, 쉽게 분노하고 모든 일에 성급하던 자신에게 인내를 가르치신 분, 헛된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된 가치관을 갖게 하신 분, 캄캄한 절망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내신 손길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언제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저 자신을 포함해서) 늘 불만 불평을 늘어놓는 일에 더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자신과 남들을 비교하며 상대적인 빈곤과 열등감을 이끌어 내어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분노를 품거나, 이웃의 작은 결함을 확대하여 자신의 열등감을 회복하려는 교만으로 다른 이들을 상처 입히는 행위를 알면서 모르면서 저지를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건강한 육신과 일용할 양식,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안전한 사회에서 이웃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느끼며,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덫에 걸린 채, 감사한 마음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한 가지를 성취하면 다른 한가지를 얻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안에서 샘솟듯 일어나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합니다. 감사보다는 원망과 탄식이 자주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자매가 음악을 듣다 말고 감격하여 써 보낸 편지에는 하나님이 그 음악가에게 주신 재능에 대한 감탄과 그 재능으로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한 감사, 자신의 귀를 온전히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책을 읽다 말고 써 보낸 편지에는 진리에 대한 온갖 질문과 온전한 판단력을 지켜주신 주님께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날씨가 궂으면 아파 오는 관절과 독신 생활의 외로움과 생활의 온갖 어려움을 통해 다른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감사마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훨씬 더 열악한 상태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곤 합니다.


분명히 내적인 갈등과 번민이 수없이 그녀를 괴롭혔을 그녀의 삶에 주님의 만지심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빛나는 감성을 대할 때마다, 그녀 안에 빛나는 소중한 무엇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통해 사모하는 것은 물질과 명예와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이 아니라 참된 지혜와 정결한 영혼에 대한 소망일 것입니다. 순수한 영혼을 느끼는 자는 현실에서 듣지 못하는 아름다운 소릴 들을 것이며,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나 홀로 드리는 기도 중에 간구하는 축복이 얼마나 즉물적이고 가시적인 안정과 가치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인지 가끔 반성하곤 합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고 정의로워지는 것, 나의 삶이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는 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변화되어 성숙한 영혼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획득이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절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사랑을 이끌어 내거나 진정한 평강을 누리게 하지는 못하므로 삶은 늘 공허한 상태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내 안에 성숙한 자아의 눈이 열리고 작고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를 느낄 때, 더불어 사는 사회, 아름답고 공평한 인간관계에 대한 적극적인 소망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부족한 환경 때문에 도전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아플 때 비로소 건강함에 감사하게 되며, 외로움은 벗과 가족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를 일깨우게 합니다. 각 지체마다 다르게 소용되어짐을 알기에 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됩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음은 범사에 그분의 손길이 닿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감사는 주님께 대한 우리 사랑의 표현입니다.


”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 송명희 시인의 놀라운 고백을 통해 감사의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다시 헤아려봅니다. ☆

[이시훈] 봄의 찬가

이코스타 2003년 4월호

지루하고 길게만 느껴지던 겨울도 시간의 흐름처럼 슬며시 사라져갑니다. 이른 아침에도 환하게 창을 밝히는 햇빛과 부드럽게 살에 부딪치는 바람, 먼 풍경 위로 번져 오르는 아지랑이가 봄을 알리고 있습니다. 겨우내 땅 속에서 얼어죽은 줄만 알았던 알뿌리들은 여리고 푸른 잎새들을 힘껏 내밀고, 여윈 나뭇가지들에서는 새 눈 터지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아 슬며시 다가가 귀를 기울여 봅니다.


두터운 눈 더미 아래 어둡고 차가운 땅 속에서 그 작은 뿌리가 어떻게 생명을 지키고 있었던 것인지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얼마 후면 제가 사는 동네에는 화사한 벚꽃으로 온 천지가 물들 것입니다. 벚꽃이 가득한 마당이나 거리에 서 있으면 내가 꽃나무의 한 부분이 되어 가는 것 같이 느껴져서 조용히 팔을 들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메마른 가지들의 어느 한곳에 그리 화려한 꽃이 숨어 있던 것이고, 작은 씨앗들 속엔 봄날의 훈풍이 숨어 있던 것인지. 마술사가 빈 보자기에서 비둘기와 꽃을 꺼내어 내듯이 문득 다가온 봄의 모든 징조들이 놀라운 선물로 느껴집니다.


어느 봄날 밤에 무심히 집 앞에 들어서다가 마주친 목련 꽃이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서 있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득해지는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비어있는 줄 알았던 뜰에 어느 날 갑자기 여러 색의 작은 꽃들이나 튜울립이 가득 피어 있어서 혹시 조화가 아닐까 의심하며 만져본 경험도 봄에 대한 작은 추억을 만들어 줍니다.


생명이 있다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 봄날의 특권이자 축복인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들뜨고 무언가 발산하고 싶어지는 힘을 느끼게 되는 순간 경쾌한 봄의 왈츠가 가슴에서 연주되곤 합니다. 얼음이 녹아내려 풍만해진 강물도 그 왈츠 리듬에 합세하여 박자를 맞추고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이런 날에는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특정한 대상 없이 사랑의 예감이 벅차 오르는 신비한 힘이 봄의 기운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지요.


캄캄한 어둠 속에 비추는 한줄기 빛이 일순간 어둠을 지워 버리고 얼었던 대지를 촉촉하게 녹여 버리는 것을 보며 결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곤 합니다. 숨어 있던 작은 동물들이 활개치며 분주하게 양식을 찾아 뛰어 다니는 것을 보며 생명의 힘은 무엇보다 강하다는 것에 감격 하게 됩니다. 겨울의 어둠과 추위가 없었다면 봄의 화려함이 그다지 빛나고 감격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삶의 역경과 고난 뒤에 찾아오는 성취가 더욱 감사하고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실 때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고 어둡고 절망적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그가 웃으며 십자가를 부수고 내려와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마음 속으로 무척이나 바라고 기대한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슈퍼맨처럼 지구의 회전을 되 돌이켜 시간을 뒤집어 주길 바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나약하게도 피를 흘렸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조롱하며 등을 돌렸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가 약속한 일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그의 말속에 숨어 있던 의미를 이해하거나 진심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이 다시 나타나 손의 못 자국을 보여 주었을 때의 광경을 상상해 봅니다. 놀라움과 의심과 두려움이 엄습했겠지요. 그리고 진정으로 사실을 이해하고 믿었을 때 비로소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기쁨과 경이에 젖어 뛰어 오르며 춤추고 노래했을 것입니다. 감격과 환희에 젖어 그들이 외쳤을 함성이 귀에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 그가 다시 사셨다. 죽음도 물리치고”.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믿을 수 없었던 일을 목격한 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부활의 축제에 우리도 초대 받았다는 약속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어느 날 문득 피어난 목련 꽃이 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겨울의 지루함과 추위, 모든 것이 잠들어 버린 막막함,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오는 봄날에 대한 기다림이 있기에 눈송이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듯이, 삶의 고난과 상처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길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의 약속이 있기에 기쁨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희망이 없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주님이 보여주신 고난과 순종의 길이 진정한 승리의 길이였음을 확신할 수도 없었겠지요. 세상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길을 바라보는 밝은 눈을 얻을 수도 없었겠지요.


바울의 고백을 바꾸어 봅니다. 나는 매일 매순간 죽노라. 그리하여 나는 매일 매순간 다시 태어나노라. 그와 함께 죽은 나를 버리고 그와 함께 다시 태어난 나로 사노라. 꽃잎이 땅에 떨어져 썩지만 이듬해가 되면 더 아름다운 꽃으로 다시 태어나 향기를 가득 품는 것을 벚꽃 나무 아래 서서 깨닫곤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 나의 그릇됨과 죄로 가득 찬 옛사람을 함께 죽이며, 그가 부활하실 때 새롭게 그를 닮은 나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