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훈] 오아시스

이코스타 2003년 3월호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해 상점마다 예쁘게 포장한 여러 종류의 초코렛과 사탕들이 눈길을 끕니다. 그 예쁜 상품들에 현혹되어 나도 누구에겐가 선물을 하고 싶어져서 여러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상업적으로 변모한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많지만, 평소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들에게 달콤한 언어를 보내는 날로 생각한다면 소박하게 사탕 하나, 초코렛 하나쯤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너무나 많은 상상과 고찰, 경험담과 나름대로의 설명들이 있지만 쉽게 알 수도 없고 잡히지 않는 것이 사랑에 대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얼마 전 본 영화 한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창동감독의 ‘오아시스’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보고 나니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한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 하고 느낌을 갖게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주인공 남자 종두는 좀 모자라는 청년이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인물입니다. 가정과 직장이 있는 형의 교통 사고를 대신 뒤집어 쓰고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이사해서 집을 찾지도 못해 동생을 통해 귀가하지만 가족들도 골치거리인 그를 그다지 반기지는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집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스웨터가 전부입니다. 자신을 달가와 하지 않는 가족들이나 자신이 대신한 옥살이에 대해서도 그는 별 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그가 유달리 희생적인 인품을 가졌다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챙길 만한 자의식이 없는, 생각이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의 냉대와 모욕적인 말에도 실없이 웃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무심할 정도로 모자라지만 낙천적인 성품을 가진 것이지요.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자신은 가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달팽이 집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딸을 만나게 됩니다. 종일 햇빛에 거울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라는 아가씨이지요. 얼굴은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리며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공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종두는 공주에게 예쁘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섬세한 감정을 가진 어엿한 여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공주에게 호감을 갖고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 종두와 공주가 즐기는 데이트는 일반 정상인들의 만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갑니다. 영화 속에서 공주가 자신을 건강한 여자로 상상하는 장면들에서 그녀의 바램과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빠도 그녀를 버리고 이사가고 가정부는 그녀를 속이며 존재 자체를 무시하지만 종두를 통해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갑니다. 여기서 종두가 그녀를 선택하고 예쁘! 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에게 높은 도덕적인 의식이 있거나 차원 높은 윤리관이 있기 때문은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 방금 전에 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에 나갔었답니다.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참아서 담배를 여러 개 계속해서 피고 있었는데 한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왜냐고 물었죠. 한나가 뭐라는 줄 아세요? 오, 세상에…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면 아줌마가 아프게 되지 않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이죠.“ 그녀는 다시 울먹이느냐고 목이 메인 것 같았다우.


창밖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그림에 비쳐서 무섭다고 공주가 말하자, 종두는 그림자를 지우는 마술을 걸어 줍니다. 종두의 서툰 주문에 그림자가 지워지면 공주는 행복하게 잠이 듭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은 마법에 걸리는 일’이라는 해법이 읽혀집니다. 객관적으로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공주의 외모나 서투른 언어가 종두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은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종두에겐 공주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내겐 너무 예쁜” 아가씨로 보이는 것이지요. 종두에게 눈이 어떻게 되었냐 거나 판단력을 의심하며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는 흔한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겠지요. 친남매간에도 소통이 어렵건만 종두는 공주의 모든 의사 표현을 알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들 사이엔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두가 걸어준 마술은 공주의 두려움, 그림자라는 어둠의 세력을 지워 줍니다. 사랑은 닫혀 있던 공주의 언어와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종두에 의해서 언어가 되었고, 밝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절실한 사랑은 세상사람들 눈에는 그릇되고 뒤틀린 관계로 보여지고, 사랑의 행위는 폭력으로 보여집니다. 종두나 공주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항변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기에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무자비하게 습격(?) 당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해와 강제력도 그들의 사랑을 막지는 못합니다. 종일 햇볕이나 바라던 공주는 종두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방 청소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생활을 하고 있게 됩니다.


종두는 편지에다 “공주님이 싫어하는 콩밥이 이젠 저도 싫어졌사와요”라고 써 보냅니다.


사랑은 닮아 가는 것, 같은 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마음인 것을 이렇게 알아 가는 것이지요.


사랑은 지독한 마법에 걸리는 일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사랑해요”라는 단순한 주문만 외우면 엄청난 마술이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빛이 들어와 불안과 절망이 기쁨과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는 우리의 외모나 조건도 상관없이, 추악하고 끔직한 죄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우리에게 빠져 있는지, 늘 아름답고 귀하다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힐난과 비웃음을 보낼지라도 나와 그의 사랑만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대는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이시훈]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사람

이코스타 2003년 2월호

크리스마스를 앞둔 며칠 전부터 일기 예보에서 비가 내릴 거라고 보도했습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기대하지 못하고 있던 우리에게 하늘에서 아름답고 탐스런 눈꽃송이를 뜻밖의 선물처럼 듬뿍 내려주어, 마음을 무척 들뜨게 만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무언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마저 갖게 하는 오후에 손님이 한 분 찾아 오셨습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P부인이었는데 기쁨이 가득 찬 밝은 얼굴로 들어오자마자 저를 다정히 안아 주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지난 저녁 그녀와 그 가족들이 경험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좀더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그녀가 제게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아들네 집에 갔었다우. 우리 큰아들 말이야, 얼마 전 목사 안수 받고 다음달부터 켄터키의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전에 말했죠? 그래서 이곳의 집과 모든 일들을 정리해 나가면서 온 가족이 기도로 준비를 하고 있지. 그 아인 참 신실해요. 며느리도 그렇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이 진실한 아이들이지. 그 애가 소명을 받고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을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 가족 모두는 기뻐하며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두손들어 환영했었다우.


아무튼 그 집에서 어제 작은 파티를 열었다우. 동네 이웃들을 몇 가정 불러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하며 미리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거였지. 그런데 바로 이웃의 두 집은 전혀 믿지 않는 가정들이라 우린 특별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맞았지요.


한 가정은 남편은 오지 않았고 부인과 세 명의 아이들이 왔는데, 초저녁인데도 그 여자는 술에 취해 있는 거 같았다우. 머리와 옷매무새도 흐트러져 있었고 산만한 태도와 말할 때마다 술 냄새마저 풍기고 있었으니까. 나와 남편은 좀 당황했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아주 다정하게 그녀와 아이들을 대하더구만. 아이들도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처럼 단정하지 못한 차림새에 버릇없는 행동이 몸에 배어 있는 것 같았어.


그 여자의 이름은 수전이었는데 아이들 이 식탁에서 예의 없이 구는 것을 보면서 좀 부끄러워하며 “ 이 동네에서 십 년이 넘게 살았지만 우리 가족이 초대받은 건 처음이에요. 우린 남들과 어울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답니다.” 라고 말하더군. 다섯 가정의 이웃과 우리 부부, 아들네 가족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어요.


참, 내 손녀 알죠? 한나 말이유. 올해 다섯 살이 되었는데 그 앤 정말 특별하다우. 맑은 두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천사를 만나고 있는 것 같지. 게다가 그 어린것이 두 손을 꼭 쥐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아마 하나님도 그 애의 기도는 다 들어주실 것 같아. 그 아인 정말 축복이야, 암 하나님의 선물이고 말고. 아,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흐를 뻔했네. 한나 이야기만 나오면… 호호.. 늙으면 다 이런다우.


식사를 마치고 케잌을 돌리고 있는데 수전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군. 멀리 가는 것 같진 않아서 그냥 모른 척 하고 다른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 아이들은 지하실에 내려가서 장난감과 놀이 기구들을 가지고 서로 잘 어울리며 놀고 있었구. 얼마 후 수전이 들어왔는데 눈물을 글썽이며 자리에 앉는 거야.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해서 모두 그녀를 향해 시선을 집중했지. 수전은 한 동안 울음을 억제하고 나서야 말문을 열었다우.


“ 방금 전에 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에 나갔었답니다.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참아서 담배를 여러 개 계속해서 피고 있었는데 한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왜냐고 물었죠. 한나가 뭐라는 줄 아세요? 오, 세상에…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면 아줌마가 아프게 되지 않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이죠.“ 그녀는 다시 울먹이느냐고 목이 메인 것 같았다우.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에게도 사랑 받아본 적이 없었답니다. 남편은 거의 매일 때리고 욕을 퍼붓곤 해요. 몸에서 피가 나고 다쳐도 우리 아이들은 저를 걱정하기는 커녕 더러운 욕을 하거나 웃으며 놀리기만 해요. 그 아이들도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기 때문이겠죠. 다 내 탓이겠지만….


난 늘 술에 취해 살아요. 그렇지 않으면 한 시도 견딜 수가 없거든요. 이웃들도 모두 다 저를 무시하고 경멸해요.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도 않고 마주치는 것조차 싫어하지요. 상점에서도 제가 지나가면 의심스런 눈으로 제 뒤를 보는 걸 느낀답니다. 아무도, 아무도 절 사! 랑하지 않아요. 전 그냥 그 상태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거구요. 그런데 한나가 저를 보고 사랑한다는 거예요. 저 예쁘고 귀한 아이가 저처럼 냄새나고 지저분한 사람을 말이지요. 오, 세상에.. 저를 사랑한다구요!!“ 수전은 기쁨과 슬픔이 겹쳐서 소리내어 울었고 방에 있던 모두가 훌쩍이기 시작했다우.


누군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우린 다 따라서 찬송을 시작했지. 이웃 집 부인이 수전을 끌어안고 낮게 기도를 시작했고 누군가는 “수전, 사랑해요”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우. 어제 우린 정말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우. 난 믿어요.
수전이 머지않아 하나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깨달을 거라는 걸.



이야기를 마친 P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저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커다란 선물을 듬뿍 받은 것 같습니다. 가슴 가득 즐거움이 차 오르는 것을 느끼며 창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얗게 눈 덮인 저녁이 너무나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위해 한 밤에 몰래 다가올 것 같은 저녁입니다.

[이시훈]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이코스타 2003년 1월호

2002년 한 해 동안 매달 집계되는 도서 베스트 셀러 목록에 지속적으로 높은 순위에 오르는 책 중에 탁닛한 스님의 ‘화( anger )’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 해 동안 그렇게 많이 읽히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고 보니,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라는 부제가 눈을 끕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내적 감정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인생에 아주 커다란 장애로 삼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첫 장의 소제목 ” 눈을 돌리면 화나는 것 투성이다.”라는 문장은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퍽이나 공감이 가는 말인 것도 같습니다. 작고 사소한 일들의 어긋남에서 오는 짜증에서부터 삶 자체를 흔들 정도의 분노를 느끼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과 사람들에 대해서 화나는 마음을 품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살펴보면 우리의 생활 반경을 둘러싼 모든 것이 삶의 도전을 요구하며 극복해야할 벽으로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달콤한 아침잠을 방해하는 밖의 소음, 출근길의 정체된 차량, 일터에서 받는 온갖 스트레스, 가족 간의 갈등, 세대 차, 사회에서 느끼는 불평등, 범죄에 대한 불안, 경제적 압박감, 불투명한 미래, 환경 오염, 건강의 악화, 신문을 가득 채운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비리….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를 화나게 하고 지치게 하는 것 투성이인 것 같아 특정한 대상도 없이 증오심과 적개심을 마음 한 구석에 키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탁닛한 스님은 시기, 절망, 미움, 두려움은 모두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독이며 이 모든 것들을 합친 것이 ‘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화를 마음에서 제거하기 위해 호흡법, 보행법, 내면과의 대화등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이것을 폭발하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걸으면서 분을 삭히는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원인을 살피기 위해서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는 실제적인 방법이 무척 효과적이고 유용할 것 같다는 공감을 느끼게 됩니다. 화를 참고 삭히면 마음의 병으로 남고 그 상처는 육체의 건강마저 위협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또한 진심으로 화해하지 않은 분노는 마음의 가시로 남아 자신과 남을 날카롭게 상처 입히고 마는 경험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젠가 더 심하게 곪게 마련이니까요.


저는 이 책에서 제시하는 화를 이끌어 안고 제거하는 훌륭한 방법들과 그것으로 인해 인격의 변화와 관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적인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좀 더 나아가서 화를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우리가 성내고 분노하는 많은 이유가 인간의 권력의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타인의 행동이나 의식, 내 뜻 때로 순종하고 따라주지 않는 하급자나 자녀, 세상이 나를 인정하고 내 위주로 변화되어지면 좋으련만 세상은 나를 보고 변하라하니 화가 나는 것이지요. 동료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나의 강한 의지만이 내게 중요하게 느껴지고 나의 유익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세상은 정말 짜증나고 답답한 곳이 되어 버립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나의 유익을 빼앗으려는 적인 것만 같이 느껴지지요.


현대 영화들을 보면 많은 영화 속의 주인공들이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가치관을 가지고 논리적인 개연성이 없이 행동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계획이나 감정을 건드리는 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고, 나의 존재만이 절대 가치라는 듯한 유아독존의 주인공이 가혹하게 화를 발산할수록,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지경이니 비판적인 반성의 여지가 없겠지요. 타인의 인격과 존재에 대한 관심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게 스러지는 엑스트라에 대한 기억만큼 미미한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포함된 아주 작은 범주 외의 타인들을 마치 정물처럼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이라고 까지 분석되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만 왠지 서글픈 느낌마저 드는군요.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 염려하거나 폐를 끼칠까 조심하는 등의 배려심은 훈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촌이 잘되니 기뻐서 미소가 번지는 마음이라면 질투에서 시작된 미움과 화를 염려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타인의 갖고 있는 관심사나 목적이 나와 상반되는 것일지라도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면, 나와 다르다는 것, 나의 유익이나 편리에 장애가 된다는 것 때문에 불쾌하고 좌절을 느끼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녀가 갖고 있는 장래 희망이 내가 꿈꾸는 것과 너무 다르다거나, 지금 보여주는 성과가 나의 기대와 너무 동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저 자신 얼마나 자주 분개하고 성을 내는지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이의 마음 속에 있는 소박한 꿈을 귀하게 여기며 개성과 능력을 인정하고 그 범위에 눈 높이를 맞추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가 아이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할 때만 그 일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화를 내거나 품는 일은 우리의 욕망, 권력의지,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힘과 질서가 있으며 어떤 목적을 위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당장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서 조급하게 반응하기보다는 기다리며 지혜를 구하는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무질서와 오염으로 뒤덮인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곳임을 발견하는 순간 이곳은 아름다움 정원이 되는 것이지요. 나의 시각과 행동과 마음이 어떤 수행으로 변할 수 있다면 저는 기꺼이 깊숙한 곳에라도 뛰어들고 싶습니다. 타인을 위해 내 유익을 포기하고 마음이 더 아플 수 있다면, 하루라도 분을 내지 않고 공감과 연민의 감정으로 남을 이해할 수 있다면 …..


주님께서 내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불 속에 던지라고 하신 말씀은 거짓되고 상한 부분을 완전히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나와 너와 그리고 그들이 세상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발견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성스러운 속성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형상인 사랑의 능력을 깨달을 때 내가 변하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저는 경험하고 믿고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은 모든 것을 치유하고 감싸며 모든 것을 이루며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무한한 힘인 것입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린도 전서 13 : 4,5 )


이미 우리 손에 모든 해답이 주어진 것 같군요. 서로 사랑합시다.!!

[이시훈] 기도

이코스타 2002년 12월호

당신께 가기 위해
나의 두 손을 버립니다.
세상을 향해 활짝 벌려 있던 두 손을
거침없이 던져 버립니다.
때론 두 세상을 가늠하기 위해
한 쪽씩 나누어 디디고 있던
나의 두 발도 버렸습니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눈과 귀 마저 불 속에 던져 버리고 갑니다.


아직도 나를 아프게 하는 가시가
내 안에 있기에
헛되고 헛된 지식과 의문의 짐들을
내게서 떠나 보내기 위해
머리를 지우고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께로 가는 나는 온몸 지워지고 남은
불붙는 심장 하나,
당신의 커다란 마음에 합하여질 작은 조각입니다.


나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몸은 불살라 던지었고
내 마음은 당신께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느끼게 하소서.
듣게 하지 마시고
헤아리게 하지 마시고
다만 느끼게 하소서.


이제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지 마시고
나를 통하여 그냥 넘쳐나게 하소서.

[이시훈] 너 자신을 알라

이코스타 2002년 11월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일컬어 ‘산파술’ 또는 ‘상기술’이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주고받는 문답식의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어떤 설명 없이도 스스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이미 있는 기억이나 지식, 지혜를 이끌어 내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며 교육인 것이지요. 즉 그 안에 있는 인식과 지적 능력을 스스로 이끌어 낼 수 있는 독특한 교육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미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우리 안에 이미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인식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외침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무지함과 그릇됨에 대해 자각하라는 의미와 우리 안에 있는 위대한 속성을 발견하라는 두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부정적인 의미로 적용되는 일이 대부분이라 안타깝습니다만…

저는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티벳의 언어에는 ‘자기 혐오’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이 그런 의미에 대해서 상당히 의아하게 생각한다는 글을 읽으며 약간의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불성(佛性)이 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존재를 혐오할 수 있냐는 설명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는 자주 제 자신에 대해서, 인간의 속성에 대해서 실망을 하기도 하고 좌절과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아마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자의식을 느낀 경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저는 제 믿음의 순전성을 스스로 점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내가 믿는 것은 인간과 멀리 떨어진 초월의 존재인가, 인간 안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존재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진지한 반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고 그들의 안에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믿고 있는가 반추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혐오나 자존심의 결여 상태에 빠진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삶에 대한 열정이나 의욕을 상실한 채 어둠 속을 헤매게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부족하고 그릇된 모습에 대한 불만으로 추구해야할 무엇도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야말로 가장 불행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내 안에는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는 자의식은 자기를 스스로 발전시키고 성숙시키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론가들이 흔히 기독교는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무력한 삶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천국관을 잘못 이해하여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역사의 넓은 길목에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거대한 시체가 가로막혀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철학관과 천국을 사모하는 기독교의 신앙이 삶을 의미 없는 허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상세계가 이데아의 거울이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천국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려함이라는 의미를 다시 새겨보면 매우 다른 결론을 얻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신 것은 빛을 주러 오신 것입니다. 자기의 안을 비추고 밝게 바라볼 수 있는 빛을 주심으로서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 존재인지, 삶이란 얼마나 축복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는 것이지요. 나의 살아가는 모습이 비록 죄와 허물로 어리석은 말과 행위를 범하고 살지만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만들어진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으면 모든 시각이 매우 긍정적이고 성실한 자세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위에서 이 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천국의 실현에 동참하는 것은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허무주의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강조한 아름다운 삶과 영혼의 정화는 철학을 통한 인식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이지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펼쳐 주시는 세계는 매우 실천적이고 적극적인 현실세계인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은 바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축복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극적이고 역동적인 삶의 모험이 충만한지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아름답고 정교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우주를 지배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받고도, 대우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손에 쥐고도, 내 주제는 얼마나 보잘 것 없고 형편없는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나태에 빠질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 땅에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삶을 살면서 매일 감격과 감사를 느끼는 삶은 무엇을 가졌는가와 비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비록 어렵고 힘들고 불우할 지라도, 내가 정말 형편없는 인격과 능력을 가졌다할지라도 나를 너무나 사랑하여 목숨을 주시는 그분을 통해 힘을 얻고 긍정적인 인생관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힘없고 지혜도 없지만 내 안에 계신 분을 통해 세상 어떤 지식보다 더 큰 지혜를 얻게 되는 경험은 하나의 기적이고 비밀입니다. 현실에서 다 이루지 못한 삶이 천국에서 완성된다는 꿈마저 있으니 이것은 어리석고 가엾은 자의 허망한 도피의식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기쁨과 믿음인 것이지요.

저는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과 좌절하지 않는 꿈에 대한 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울하고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을 걸곤 합니다. 너 자신을 알라. 너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천국의 열쇠를 가진 자, 내 안에 우주를 이미 품고 있는 자. 세상이 아주 다르게 보여지고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노래가 절로 나오는 순간입니다.

[이시훈] 말씀의 육화(肉化)

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어린 형제 둘이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중간에서 설득하고 말리려해도 둘 다 고집을 꺽으려 하지 않습니다. 갖고 싶은 욕망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나섭니다. “애들아, 평소에 엄마나 아빠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가르쳤지? 서로 양보하라고 했지.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늘 말하건만 너희는 어찌 그리 서로 위하고 사랑할 줄을 모른단 말이냐?”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에 아이들은 잠시 주춤하고 서있겠지요. 하지만 잠시 후 다툼은 다시 시작됩니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개입을 합니다. “형인 네가 양보해라” 또는 “동생인 네가 차례를 기다려라.”

형이 양보하고 나면 동생은 금새 얼굴이 밝아지지만 한쪽에 물러선 형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엄만 왜 동생만 사랑하는 거죠?” 동생이 양보해도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겠지요. 물건을 갖겠다는 욕망이 이제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질투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는 벌을 주거나 둘을 앉혀 놓고 긴 이야기로 훈계를 하기도 합니다. 영리한 아이들은 이내 반성을 하고 서로 사과를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일로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곤 합니다.

카인은 하나님께 왜 아벨만 사랑하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심중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보다는 아벨의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는 하나님께 질투하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질투하여 죄를 공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탐욕,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질투. 살아 숨쉬는 동안 우리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본능이기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인간이 이룩하는 문화적인 환경과 지적인 산출은 무언가 이루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상승하려는 의지와 경쟁력도 질투심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릇되고 지나친 욕망과 시기심은 온갖 인간의 범죄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 자신을 스스로 자제하고 길들여야하는 것이 모든 종교와 도덕의 과제가 되어 온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라, 사랑을 실천하라, 배려하고 격려하라, 양보하고 겸손하라….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한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들어 왔는지 모릅니다.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라는 책제목처럼, 어릴 때부터 귀에 익어온 말들입니다. 모든 책들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에 대해 말해 주고 모든 종교는 선한 마음과 영혼에 대해, 삶의 결과에 대해 말해 줍니다. 진리는 간단한 명제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과 선포를 통해서도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에 늘 좌절하게 되니까요.

어머니가 화를 내며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사랑과 자비심이 생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불교에서는 타인의 상황을 자신에게 감정 이입시키면서 자비심을 유발시키는 수행법(통렌명상)을 통해서 선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따끔한 지적을 받거나 어떤 상황을 통해 스스로 깨닫고 뉘우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정신적으로 지적(知的)으로 각성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에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우리의 본능적인 막강한 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너무나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당장 자신의 유익과 편리함, 자아의 완고함에 이끌릴 때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숙고하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며 또는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를 상기하며 행동을 반성하고 매순간 다짐하고 결의하는 것인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아, 미워하고 시기하지 말라고 했지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의 전(全)존재가 변화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지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나의 본질이 바뀌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의지, 시기하지 않겠다는 결단, 분노하지 않고 인내하겠다는 노력이 아닌 것이지요. 내 안에 사랑이 넘쳐서 절로 분함과 시기함이 없어지는 것, 모든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여지는 것.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될 때 그의 강한 사랑의 힘이 나의 그릇됨을 감싸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 닮고자 노력하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이미 계셔서 그분의 속성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신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훌륭한 교리와 치유로도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변환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나의 혈관과 골수에 흐르는 삶, 나의 몸이 그분의 형상으로 다가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내게 해를 입히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어떻게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고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나의 수행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몫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발견하고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모두가 경험하는 가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