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제 7 떡 – 천국투자(2) – 가난의 복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누가복음 6장 20절)
(Blessed are you poor, for yours is the kingdom of God)

(1)



평양과기대 프로젝트는 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민족회복 운동이다.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북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어서기 위한 자생력을 주기 위함이요, 장차 한 민족으로서 우리와 함께 일할 동북아 시대의 인재를 키우는 대학을 짓자는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려고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하며 물질 후원을 호소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돈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기게 되었다. 돈버는 일과 무관하게 지난 10년을 살아오던 사람이 갑자기 어떻게 돈을 모아야할 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의 굶주리는 동족들을 향한 사랑을 호소하는 것이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그동안 돈을 쓰기만 하던 삶에서 돈을 모으는 삶의 방식으로의 일종의 방향 전환(?)을 하게 된 셈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이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고 뜻밖의 후원자들을 통해 감격스런 헌금을 받는 일도 생겼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신의 떡을 지키려는 이기적인 마음들을 녹여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 속에서 돈을 둘러싼 어려운 문제들이 얼마나 산적해 있는지도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다. 한국의 정치경제계에는 어마어마한 천문학적 액수의 정치자금이 불법적으로 오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산적한 물질적 부가 이렇듯 좋은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에는 좀처럼 쓰이기가 쉽지 않음도 깨달았다. 다시금 돌이켜 돈의 문제, 물질의 문제, 떡의 문제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돈과 부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취급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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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원과 개인 구원의 문제는 성경에서 다루는 두 가지 중심축이지만, 각 교단과 신학자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과 시각의 불일치를 낳는 핵심 쟁점이기도 하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영적 복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쪽과, 현실 사회의 왜곡된 정치 경제적 상황으로부터 소외된 민중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사회 복음을 더 중시하는 다른 한 쪽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이다. 과연 성경은 서로 섞일 수 없는 복음의 두 가지 다른 요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이 두 진영 사이에는 도무지 타협할 수 없는 평행선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 모두 결국은 떡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배고픈 자에게 떡을 주자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우리가 가진 우리가 더 받은 물질적 부와 우리가 먼저 받은 영적 풍성함을 나누어주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결국 다 같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자는 같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기에 우리에게는 육체의 떡과 영혼의 떡이 함께 필요하다. 우리는 그 어느 하나도 경시하거나 도외시할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그 두 가지 떡을 함께 주어야만 한다.



지난 18, 19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발명된 수많은 기계들은 사람의 육체노동을 대치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킴으로써 우리 인간의 먹는 문제, 떡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육체노동에서 소외된 인간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통한 부의 편중화라는 사회 현상 속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어 더 심각한 경제문제를 양산하게 되었다. 인간이 창출해 내는 부가가치는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의 산물로 급격하게 전환되었고, 지난 20세기를 휩쓸었던 전자/반도체 혁명에 의해 인간의 지식과 감성이 상품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 지식 사회와 감성 사회를 거치면서 인간의 문화 활동이 삶의 중심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먹는 문제 즉, 입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우리의 눈과 귀가 또 다른 욕구를 발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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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은 더 이상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의 문제이다. 사회 일각의 부유층은 물질적 부가 넘쳐나서 온갖 사치를 일삼으며 성인병과 비만에 시달리고 있는가 하면, 소외된 빈민 계층에서는 TV 드라마 속의 화려한 장면들을 물끄러미 넘겨다보며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려움 속에서 더 큰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화 정보화의 영향으로 지구촌의 소식이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세상 속에서 이 문제는 한 국가 내에서 뿐 아니라 국가간에서도 마찬가지로 부각되고 있다.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 사이의 간격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데, 부자 나라는 공룡처럼 비대해지며 더욱 자신의 체중 늘이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헨리 조지가 예언한 진보사회 속에서의 빈곤 현상이 가일층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1)



이는 영적인 부요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나라는 복음이 넘쳐나서 식상한 가운데 영적 불감증에 빠져 있는가 하면, 이웃 나라에는 평생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의 분배, 즉 떡의 분배는 성경의 최대 관심사다. 구약에서부터 복음서와 서신서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말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타락한 인간 사회에서 발생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도무지 피면하기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인간의 타락상은 어떤 도덕 철학과 정치 제도와 경제 시스템을 동원하여도 만민이 함께 잘 사는 지상 낙원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지나 온 역사는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 2 법칙처럼 우리를 따라다닌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하던 예수의 예언은 적중하였다.(14:7) 가난이라는 질병은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불치병으로 역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그 가난의 정도는 시대를 따라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떡을 나누는 삶에 대한 강한 도덕적 책임이 부과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크리스천들은 항상 가난한 자에게 눈길을 돌리며 그들에게 떡을 들고 나아가도록 부름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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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예수는 자신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나사렛 성전에서 이사야서 61장의 말씀을 낭독함으로 자신의 사명을 천명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복음의 대상인 가난한 자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가난이 무엇인지부터 먼저 이해해야 한다.



첫째, 가난은 영적인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둘째, 가난은 물질적 궁핍 상태를 나타낸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은 영적, 육적 가난을 총칭하고 있다. 예수는 이 총체적 가난을 치유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가난의 문제를 예수가 얼마나 중요시 했는지 하는 점은 그의 공생애 기간 가르침을 집약한 설교로서 잘 알려진 산상수훈의 첫 말씀(누가복음에서는 평지 설교라고 알려진……)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천국 선포였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제일성(第一聲)이 바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예수에게는 모든 사역의 초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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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태복음의 산상설교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선포인데 비해 누가복음의 평지 설교는 보다 직설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던지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수의 관심사가 영적, 육적인 가난을 모두 포괄하고 있음이 암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대상을 어느 한쪽에 지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깔려있다. 실제로 영적 복음만을 중시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더 인기가 있고, 사회 복음을 중시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누가복음이 더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 주로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향한 영적 윤리적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에 반하여, 누가복음의 가르침은 배고픈 무리들을 향한 복음이요 사회정의를 일깨우는 직접적인 설교의 성격이 더 강하다.(마태복음에서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3인칭으로 묘사하고 있는 데 비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천국이 너희 것임이라고 2인칭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유의해 보라.) 그러나 복음의 총체성은 그 어느 한 쪽도 무시할 수 없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가난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결핍상황을 통칭하는 말이다. 가난이란 하나님께서 창조 시 사람에게 주시기로 작정하셨던 그 아름다운 환경, 보시기에 완전했던 에덴의 풍요에서 벗어난 모든 조건을 지칭한다. 타락의 순간……. 실낙원의 순간, 인간에게 엄습한 전면적(全面的)인 결핍 상태가 곧 가난인 것이다. 모든 부요의 근원이요 원천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그 순간, 우리는 영적 가난, 육체적 가난, 사회적 가난, 환경적/생태적 가난에 직면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인간의 역사에는 영적, 육적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의 기나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은 전 인류가 가난한 자가 되었다. 영적, 육적인 궁핍함 속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웅크리고 있는 자들……. 그들을 살리기 위해 예수가 왔던 것이다.



예수는 전 인류 앞에 서서 엄숙히 선언한다.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노라. 가난한 자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자신의 가난함을 인정하고 복음을 받으라. 그리할 때, 너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선언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산상수훈의 팔복 중 나머지 칠복은 가난한 자들에게 임할 천국의 복에 대해 부연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가난의 총체성은 사람들에게 세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포로된 자



둘째, 눈먼 자



셋째, 눌린 자



이것은 선악과에서 나타난 세 가지 죄악상을 그대로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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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음직 하고> : 우상 숭배와 탐심에 사로잡힌 자들



<보암직 하고> : 명예욕에 눈먼 자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 권력욕에 억압된 자들




, 돈과 명예와 권력욕에 묶인 노예 상태로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에게 참 자유를 선포하고 영적인 눈을 새로 뜨게 하기 위해 예수가 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천국이 임하게 된다. 구약시대에 천국도래의 표상으로 주어졌던 희년, 은혜의 해처럼……. 모든 억압된 자들과 노예들이 해방되고 빼앗겼던 토지가 다시 원 주인을 찾아 되돌아가는 것, 이 희년이야말로 오직 은혜로 임하는 기쁜 소식이요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는 천국이었던 것이다.(2)



이것이 장차 우리가 소유할 종말론적 천국의 작은 모형이었고, 지금도 복음이 임하는 곳마다 벌어지고 있는 현세적 천국이기도 하다.



 


(3)



평양과기대를 위해 뛰어다니던 지난겨울 두 달간, 강남의 한 커피샾에서 코스타 강사로 알게 된 P목사님을 우연히 만났다. 뜻밖의 만남에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갑자기 주일 말씀 부탁을 받게 되었다. 상가 2층의 자그마한 교회였지만, 성도들이 뜨겁고 목사님과 한 마음이 되어있는 아름다운 교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니 말씀이 살아 역사함을 느꼈다. 평양과기대를 위해 특별 헌금까지 해 주시는 그 교회 성도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남기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려는데, 어느 아주머니께서 급히 달려오더니 하얀 봉투를 전해주었다. 아마도 예배시간에 돈이 없어서 급히 돈을 구해 오신 모양이었다. 그분이 가시자 옆에 있던 목사님께서 저 여 집사님은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시는 분이예요라고 조용히 일러주셨다. 봉투 안에는 빳빳한 새 돈 60만원이 곱게 들어있었다. 그 돈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형언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아픔처럼 밀려들었다.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었던 과부의 두 렙돈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들의 헌신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들은 가난하기에 천국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부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동족의 굶주림 앞에서 외면하는 그들이 진정 예수의 제자들인가? 한국 사회의 부유층으로 올라갈수록 크리스천의 비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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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 선포된다. 이 말은 가난한 자들이야말로 복음의 수혜자요,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하여 도무지 의지할 데가 없는 자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오직 하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그들에게는 복음의 말씀이 힘 있게 역사한다. 이들은 복음의 정적(靜的) 수혜자들이다. 복음을 받을만한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 공급되는 생명의 떡과 육신의 떡은 그들을 굶주림에서 해방시킨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복음이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에는 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유한 자는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또 부자란 누구인가? 부자에도 역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째, 영적인 부자 : 종교인, 지식인, 도덕철학자, 대학교수 등등……. 뿐만 아니라 선교사나 자선사업가라 할지라도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 교만한 사람들이다.



둘째, 육적인 부자 : 백만장자, 억만장자, 복부인, 대기업 사장 등등……. 뿐만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라 할지라도 물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 탐심을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은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아니 불가능하다. 얼마나 어려운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예수는 비유로 말하고 있다.



예수의 이 말에 제자들은 놀라고 낙심한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반문한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던 사람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예수는 그들을 향해 단호하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고 말하는 것이다.(7:21-3) 너희는 하나님 뜻을 행하기 위함이 아니라 네 뜻을 위해 그 일들을 했노라. 그리고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6:24)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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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예수는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천국행을 가로막고 있는 우상을 먼저 제거하라는 요청인 것이다. 그 요청을 바리새인과 부자 청년은 거절하였다. 그러나 마태와 삭개오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베드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의 동적(動的) 수혜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비록 교만하고 탐심에 가득 차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부()를 복음을 위해 기꺼이 던져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예수의 제자도는 자신이 지닌 것들을 던져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Give)’는 한 단어로 압축된다.



주기 위해 온 사람 예수, 자신의 모든 것, 온 몸과 살과 피를 던져 생명을 살린 사람 예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단호하게 같은 인생을 살도록 요청한다. 떡의 인생, 떡을 던지는 인생, 가난한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는 그런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620-38절에는 어떻게 주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주는 것의 미학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첫째, 그 대상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에게 떡을 받아야할 가난한 자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며 모욕하며 핍박하고 더러는 우리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원수들일 수도 있다. 그들을 향해 선대하고 사랑을 베풀며 축복하고 대접하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말이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해 떡을 주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요 죄인들도 그리하는데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느냐고 반문까지 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가 그리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 그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그렇게 자비하라는 요청이다.



둘째, 주되 돌려받을 생각을 말고 그냥 주라. 아울러 보상과 칭찬을 받을 생각조차 말라고 경계하고 있다. 사람에게 칭찬 받을 생각을 아예 버리라는 말이다. 그리해야 하늘의 보상과 칭찬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셋째, 주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며, 정죄하지 말고, 모든 것을 용서한 후에 주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참 베품이 이루어진다. 비판과 정죄와 용서치 못하는 마음을 지닌 채 주는 것은 위선이요 거짓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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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주되 마음껏 후하게 담아 주라.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라고 명하고 있다. 줄때 헤아리는 마음으로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헤아리는 그 헤아림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후한 상급을 원한다면 그만큼 후하게 베풀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조금씩 가난해진다. 그리고 복음의 정수와 핵심을 배워가게 된다. 예수를 통해 나타난 베품의 미학, 다 주어버림, 철저히 가난해지는 삶에 대해 알아가게 된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저들은 진정 예수의 제자들이다 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기적을 보게 될 것이다.(3)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에게는 가능한 일이었기에……. 다 주어버리고 마침내 가난해진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위로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8:29-30)’



주의 제자된 우리들이, 오늘날 영적, 육적 가난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묵상해야할 말씀은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가난한 자들에게 선포했던 바로 그 가난의 복음이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9)>



가난의 복음은, 가난한 자와 가난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 모두에게 복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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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와 빈곤>, 헨리 죠지, 무실(1989)



(2)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홍성사(2003)



(3)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영봉, IVP(2003)

[정진호] 제 6 떡 – 천국 투자 –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흐르는 강물 앞에 서서 떡을 던지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 일년 이년그리고 십년 이십년을 하릴없이 떡을 떼어 강물 위로 띄어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일까?



(1)



예수의 인생은 한 마디로 떡의 인생이었다.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했던 사람예수. 그는 세상의 떡으로 와서 떡의 인생을 살았다. 자신의 살을 떡으로 떼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 자신의 삶을 나타내는 영적 은유였다. 영적, 육적으로 굶주려 죽어가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는 작은 떡을 하나 취하여(taken), 하늘을 우러러 그 위에 축사한 후(blessed), 그 떡을 쪼개어(broken)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며(given) 많은 무리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도록 명한다. 그 장면은 장차 걸어가게 될 자신의 인생과 제자들을 통해 다시 전개될 생명 역사를 선포하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오병이어는 성경 전체의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되고 연출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하나님 손에 붙들려 인생을 살았던 분(taken)이다. 세례 요한 앞에 무릎 꿇어 세례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여 축사함을 받았으며(blessed), 그 받은 능력으로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며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broken), 마침내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나 생명의 떡으로 만민에게 나누어주신 분(given)이다. 오병이어는 작은 떡 하나로 수많은 무리를 먹여 살리는 예수의 인생을 표현한 한편의 모노 드라마였을 뿐 아니라, 그 기적을 체험한 제자들 마다 예수의 인생, 곧 떡의 인생을 살도록 다시 초청하는 영적 암시이기도 하다. Taken-Blessed-Broken-Given의 인생, 이 네 가지 동사로 이루어진 떡의 인생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다.



떡의 존재 가치는 먹히는 데에 있다. 자신은 조각조각 찢기고 씹혀서 사라지나 그것을 먹는 사람을 배부르게 하여 살리는 것, 그것이 떡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된 우리들도 그 같은 떡의 인생을 살도록 요청받는다. 한 조각의 떡이라도 더 먹으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이 세상 속에서 거꾸로 자신의 떡을 떼어 죽어가는 자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제자된 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떡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종종 우리는 앞의 두 가지 동사 Taken-Blessed의 자리에 머물기는 좋아하나 뒤의 두 가지 동사 Broken-Given의 인생을 살기는 싫어한다. 우리는 하나님 손에 붙들려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 가운데 축복의 자리에 나아가기를 기뻐한다. 교회 안에서 말씀으로 찬양으로 기도로 예배자의 복을 누리기는 좋아하지만, 교회 밖의 삶 가운데 자신의 떡을 떼어 산제사(living sacrifice)로 나누어주는 일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예수는 우리가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으로 드러나기를 원한다. 변화산상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라 명한다. 우리가 산 속의 수도자나 교회 안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하고 부패한 세상 속에서 한줄기 빛으로 살아가며 예수 안에 감췬 비밀 그 기이한 빛을 선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이 교회 안에 갇혀서 그 많은 은사들을 소진하며 세상을 멀리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은 소멸되어 버리고 세상은 여전히 부패한 모습으로 결코 변혁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그리고 세상의 떡, 육신의 썩어질 양식을 우상으로 삼아 살아가는 그 모습대로 똑같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세상은 비웃고 손가락질 할 뿐이다. 너희들이 말하는 그 사랑이 어디 있느냐? 너희가 우리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라고 말이다.



(2)



평양과기대 건설을 위해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자 20039월에 연변과기대에서 프로젝트팀을 구성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팀의 책임을 맡아 여러 교수님들과 팀웍을 이루며 일을 하는 가운데, 인간적인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에 대해 조금씩 하나님이 보이시는 환상과 비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 년 전 연변과기대를 세우고자 하던 때의 추억을 회상해 보았다. 1990년 코스타에 참석하여 김진경 박사의 강의를 듣던 중 나에게 다가왔던 그 비전. 두 개의 나무 기둥 사이에 <연변조선족기술대학건설부지>라고 적힌 현수막만 보이는 텅 빈 민주벌판의 사진을 보여주며 함께 가서 일할 사람을 찾던 동키호테 같은 그 어이없는 초청이 나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던 그 시절, 세상 가치관이 허물어지고 난 후, 과연 어떻게 앞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야할지 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하던 나에게 중국에 있는 200만 우리 조선족을 위하여 그리고 13억 중국인과 북한 동포를 위해 대학을 짓겠다는 그의 말은 마치 한줄기 전율처럼 내 영혼을 흔들었다. 그때 내가 받았던 감동은 대학이 지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저렇게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충격이었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전 인생을 걸고 투자하는 사람들그것이 바로 내가 만난 예수의 표상, 그리고 내가 따라가야 할 예수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연변과학기술대학…… 정말 도무지 될 것 같지 않았던 그 일을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던가? 그러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 히브리서 111절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에 헌신하고 투자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과거의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여들었던 그 땅 황량한 만주 벌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늘, 상전벽해라는 옛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에스겔의 골짜기와 같았던 북산가 언덕 공동묘지 터 위에 연변과기대의 아름다운 캠퍼스가 어엿한 실상과 증거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1,600명의 학생과 200여명의 전문인 사역자가 모인 기적의 공동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배출한 2,000여명의 졸업생들이 얼마나 놀라운 열매와 씨앗을 전 중국 대륙에 뿌리고 있는지…… 기적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KBS 인간극장의 PD로 잘 알려진 김우현 감독이 연변과기대에 취재차 와서 학생과 교직원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비디오에 담아 보내왔다. 장차 다큐멘타리로 방송작품을 제작하고자 준비하는 가운데 시험적으로 만든 소품을 보내온 것이다. 그 안에는 연길 시내의 택시 운전사가 바라본 과기대 교수들의 모습, 아침 일찍 새벽 교정에서 QT를 하다가 맞닥뜨린 세 한족(漢族) 여학생의 유창한 조선말 인터뷰, 북한 사역에 헌신하여 일하다가 돌아온 졸업생 부부의 감동적인 간증, 결장암 말기의 진단으로 중국과 한국의 병원에서 포기했던 학생을 미국 디트로이트의 원종수 박사님께 보내어 기적적으로 살려온 이야기, 기독교에 배타적이던 공산당원 여학생이 교수님들의 부모와 같은 사랑에 감동하여 마음 문을 열게 된 간증, 마치 사울처럼 예수 믿는 후배들을 핍박하던 청화대학 출신의 엘리트 부부가 연변과기대에서 예수를 영접한 후 서울대학에서 유학하고 다시 돌아와 교수로 함께 일하는 모습, 졸업을 앞둔 여학생이 교수님들에 대한 감사와 학교를 떠나는 아쉬움을 눈물로 고백하는 이야기, 찬양 사역 하는 학생들이 하덕규 집사님과 모임을 가지며 꿈과 비전을 나누는 모습들…… 코스타 초창기의 찬양 사역자였던 조현직 교수님이 YUST 학생 까페 <낮은음자리>에서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감동의 장면들이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지난 10년간의 눈물어린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그리고 전도서 11장의 말씀이 떠올랐다.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다시 찾으리라.(전도서 111)



(Cast your bread upon the waters. You’ll find it after many days.)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 앞을 스쳐 흐르는 존재의 강물, 역사와 시간의 강물 앞에 서 있는 그런 인생들인지 모른다. 그 강물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영혼들이 내게 다가왔다가 더러는 스쳐 지나간다. 그 존재의 강물 위로 내가 가진 떡을 떼어서 던지라고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 행동, 나와 내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먹어야할 그 떡을 떼어서 흐르는 강물 위에 던지는 그 어리석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할 때, 언젠가는 반드시 내가 투자한 그 떡의 몇 배로 아니 육십 배 백배로 도로 찾을 그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약속이다.



1학년 처음 입학할 때 딱딱하게 굳어진 경계의 눈빛으로 교수를 바라보던 그 투박한 학생들의 마음이 4년이란 강물을 흘러 지나가면서 과기대 교직원들이 던진 그 사랑의 떡을 받아먹고 변화되어 따뜻한 가슴과 생명의 눈빛을 지닌 아름다운 모습으로 졸업을 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볼 때, 우린 그 약속의 성취를 맛본다. 작년 졸업생들을 내보낼 때, 사은회에서 받았던 감격을 반추해 본다. 졸업을 앞둔 학부 학생들이 사은회를 하겠다고 교수님들 가족을 모두 초대했다. 며칠 전부터 학교 강당을 빌려 무슨 준비를 하는지 끙끙대더니만, 마침내 그날이 왔다. 강당으로 들어가 보니 교수들을 위해 정성스런 테이블이 마련되고 다과와 함께 아기자기한 풍선 장식으로 꾸며놓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 조선족 학생들의 순박한 마음이 느껴졌다. 졸업생들은 보이지 않고 무대 앞의 휘장이 가려져 있더니 잠시 후에 불이 꺼진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노래 선율이 흐르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신사복을 입은 남학생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두 줄로 갈라져서 무대 앞으로 나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놀라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감사의 글을 낭독하고 모두 앞에 나와 큰절까지 한다. 뭉클  그리고 눈물



 




사랑하는 교수님들께:



과기대에서 저희가 보낸 지난 4년의 시간은,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 순간들이였습니 . 하나하나 방황하는 우리의 심령에 눈물과 피땀으로 새로운 꿈을 심어주신 교수 님들, 감사의 언어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해 한해 지나면서, 커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교수님들한테는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제 이해할 것 같 습니다.



한알의 씨앗은 떨어져, 썩은 후에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를 위 한 그 아낌없는 배려는 언젠가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아닐지라도, 또 혹시 지금은 너무 실망스러울지라도 우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아니 비전이 있기에 그 밝은 곳으로 열심히 달리겠습니다. 비록 어둠속에 서 가끔 슬피 울고 있던 우리의 모습이 있었고, 인생의 지루함 속에서 방황하는 우 리의 영혼이 있었고, 길을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우리의 발길이 있었습니다. 지만, 그때마다 따뜻이 잡아주시던 교수님들의 손을 기억합니다, 그때마다 같이 울 면서 위로해 주시던 교수님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때론 잘못한 우리에게서 너무 실망한 나머지 화내시던 교수님들의 모습도 기억합니다. 그때는 더러 불평과 원망 을 품었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교수님들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젠 우리의 마음을 합하여, 교수님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



교수님들의 꿈은 꼭 이루어질 것이며, 우리는 우리의 꿈을 안은 채, 사회로 발걸음 을 디디게 될 것입니다. 비록 시작은 미미하지만 신실한 꿈과 진실한 마음, 참된 자세로써 작은 일을 큰 일로 만들 것이며 큰 일을 기적으로 만들겠습니다. 우리의 학교가 세워진 것은 기적입니다. 교수님들께서 여기에 오신 것도 기적입니다. 우리 가 여기에 하나로 모일 수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하지만 가장 가장 놀라운 기적은 바로 교수님들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젠 교수님들께서 우리에게 남겨준 그 과제를 우리가 스스로 메고 가야할 시간이 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뼈가 세월속에서 한줌의 흙이 되고 우리의 이름이 사람들속에 묻혀서 아주 사라진다 하여도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외 침은 하늘의 저편 끝까지 남아있을 것입니다. 교수님들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이 땅에 진리, 평화, 사랑 이 세 마디가 영원히 메아리치게 될 것입니다.



99학번 졸업생 일동


(3)



한자어로 사랑이라는 말을 나타내기란 쉽지 않다. 남녀간의 사랑, 부모의 사랑, 국가를 향한 사랑 등 이 모든 의미를 애()라는 한 글자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 앞에 다른 수식어를 붙여 사랑의 종류를 구분한다. 자기애(自己愛), 부부애(夫婦愛), 민족애(民族愛), 인류애(人類愛), 등등……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아가페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할 말을 찾기는 더욱 어렵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이 있다. 자기 몸을 죽여서 인()을 이룬다는 말이다. 이 말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있을까? 흔히 지하철역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죽은 사람을 가리켜 살신성인을 이룬 의인이라고 칭찬한다. 물론 아름다운 귀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용기에 가깝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은 즉흥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계획된 것이며, 많은 고민과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도무지 사랑할 만한 구석이 없는 죄인들을 향해, 아니 자신을 욕하며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 원수의 무리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결단한 그 너그러움의 극치…… 그래서 그 사랑을 가리켜 인애(仁愛)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룬 예수를 향해 인애하신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이다. 온 몸으로 인애를 이룬 그 사랑, 자신의 몸을 산산이 찢어 생명을 살린 그 사랑, 그것이야말로 살신성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 사랑, 아가페 사랑은 절대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 없다. 철학적 자아성취를 위한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 사랑은 몸으로 부딪히는 사랑이다. 아니 피를 흘리며 내 살점을 떼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랑이다. 아니 내가 정녕 죽지는 못할지언정 반드시 손해는 보아야하는 그런 사랑이다. 희생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인 것이다.



평양과기대를 짓겠다고 미국과 캐나다 한국의 여러 교회와 단체를 방문하며 호소하는 가운데, 최근의 북핵 문제를 둘러싼 미행정부의 민감한 분위기 그리고 한국의 지난정권의 퍼주기식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보수진영의 거센 목소리와 그에 따른 경색된 정국과 민생 경제의 불안감등이 가중되어 북한을 돕기 위한 마음들이 굳게 닫혀있음을 느끼게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크리스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답답함을 느낀다. 우리 크리스천의 사랑이 언제부터 계산적인 주고받는 사랑이 되었는가?



세상 사람들은 시류를 좇아 행동한다. 어쩌면 당연하다. 그것을 가리켜 전도서 기자는 풍세를 살펴보는 자, 구름을 바라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전도서 114). 그들은 항상 바람과 구름의 향방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다. 주식과 부동산 동향, 정치권의 세력판도와 경제 지수를 살펴보며 자신의 떡을 불리기에 골몰한다. 외풍이 불어오고 먹장구름이 끼면 지금은 씨를 뿌릴 때가 아니야 하며 파종치 아니하고 거두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람과 구름은 항상 방향이 바뀌고 또 잠시 있다가 사라짐을 모른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이렇게 질책하신다. ‘너희가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아느냐? 그것도 모르면서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어찌 안다고 하느냐?(전도서 115)’ 그리고 다시 명령하신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도서 116)



크리스천의 사랑은 조건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싶을 때,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할만한 학생들을 사랑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아무리 말썽꾸러기고 반항적인 학생일지라도 그의 영혼을 향해 말없이 묵묵히 떡을 던지다 보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언젠가 열매로 돌아온다. 졸업할 때까지 교수들의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학생이 오히려 사회 속에 나아가 그 큰 사랑을 깨닫고 자신의 변한 모습을 담아 편지를 보내올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제자가 더 헌신적으로 일하고 모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흐르는 강물에 떡을 던지는 그것뿐이다. 떡을 던지는 사랑은 은사가 아니라 주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 가운데 사랑의 은사를 주시지 않은 까닭은 우리의 희생을 통해 사랑을 이루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에서 아들을 희생시킨 그 큰 사랑을 깨달아 배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 없는 사랑은 허사에 불과하다.



아내가 가끔 넋두리를 하듯, 자신이 독립운동가 남편을 만나는 바람에 고생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과연 그렇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가 지금 중국과 북한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인 독립운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이 싸움에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과거 일제시대 때 자신의 일신의 안락을 포기하고 재산을 털어 이 만주벌판으로 달려와 독립운동을 하였다. 대성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같은 학교를 세우고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내었다. 그 당시 크리스천의 비율이 전체 국민의 1%정도 밖에 안 되었던 것에 비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헤아려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3.1운동 발기인 33인 중 절반이 크리스천이었다. 유관순이 크리스천이었고 저항시인 윤동주가 크리스천이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여러 주역들과 조만식, 김구, 이승훈, 안창호 같은 분들이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그리하였기에 그 당시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으며, 수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떡을 던져 희생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북한의 형제들을 향한 사랑도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북한에 대학을 지어서 그 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장차 통일 시대를 준비하고 동북아의 큰 역사를 이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비전이다.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가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청년들을 위해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작은 떡을 떼어 자신을 희생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가장 확실한 투자는 영원 속에 약속된 천국 투자이다. 평양과기대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물줄기를 만드는 그 일을 앞에 두고,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민족 공동체의 장래를 생각하며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강물 위에 우리들의 떡을 과감히 던져야할 시기임을 느낀다.


[정진호] 제 5 떡 – 광야의 축복 –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크리스천으로서 만나의 체험이 있는가? 하늘에서 공급되는 광야의 떡, 만나…… 떡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나를 알 필요가 있다. 만나를 알기 위해서는 광야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광야 체험은 반드시 홍해 체험에 이어서 따라온다.


우리 가족이 미국과 한국에서의 삶을 접고, 중국으로 들어간 사건은 적어도 우리 부부에겐 영원히 기억되며 자손들에게 들려줄만큼 깊고 생생한 홍해바다의 체험이었다. 그러나 홍해 바다를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듯이 과연 우리의 믿음이 홍해를 건널만한 믿음이었는가 반문해 본다면 그렇지 않았음을 곧 깨닫는다. 10년전의 그 결단을 두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부의 믿음에 탄복하며 더러는 칭찬한다. 그 당시 반대하고 이해 못하던 가족과 선후배들 조차 이제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심지어 부러워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당시의 연약했던 믿음으로 어떻게 그 홍해를 건넜는지 기억하고 있는 우리는 그같은 칭찬을 들을만한 사람도 아니며 그런 믿음을 가진 적도 없음을 솔직히 고백해야만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히 11:29h)”다고 기록하지만, 그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미루어 살피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수시로 모세를 두고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갈 것?요구하던 그 믿음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강제로 등 떠밀어, 뒤에서는 바로의 군대가 무섭게 쫓아오고 앞에는 홍해바다가 가로막힌 절체절명의 순간을 연출한 후에, 어쩔 수 없이 건너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세월이 지난 후에 오히려 슬쩍 “너희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칭찬해 주시는 것이다. 자식을 세워주는 부모의 마음이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 깊이 물든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돌려 애굽을 떠나도록 하는 것은 바로의 마음을 돌리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애굽에 내려진 12가지 재앙은 비단 바로의 마음을 두렵게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도록 허락하기 위한 것 뿐아니라 함께 그것을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죄와 욕심에 깊이 물든 인간들이 자기가 누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행각 아래 들어누워 동냥으로 살아가던 삼십팔년된 병자는 죄와 죽음의 족쇄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표상이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 낫고자 하는 노력도 소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노예적 근성에 물든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자리는 최소한 자신들이 먹어야할 끼니를 제공하고 비를 피할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안전한 장소처럼 느껴졌고 오랜 습관 속에서 그들은 오히려 그곳을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이미 죽을 수 밖에 없는 심각한 병에 걸린 병자라는 사실은 일상 속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요행히 물이 동할 때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속설은 그들이 베데스다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구실에 불과했다. 따라서 몸을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삼십팔년된 병자에게는 자신이 병을 고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연못에 들어감으로 자신은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체념이 그를 묶어두고 있었다. 오직 그의 관심은 그 자리를 고수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할 떡을 구하는 것, 그것 뿐이었다. 이 상황 속에서 그가 자신이 누웠던 자리를 들고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만나는 방법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예수를 만나는 체험, 그것은 바로(Pharaoh)의 통치와 바알(Baal)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에게 임하는 해방 선언이다. 떡의 노예로 살아가던 자들을 향해 외치는, 자유인으로의 부르심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흘린 피를 통해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너머선 후,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은혜의 체험이다. 아직 자유인이 되기에 불충분하며 부자격하며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오직 예수의 피로 자유인으로 법적 선언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홍해 바다는 십자가 안에서 누리는 일회적인 구속의 사건일 뿐아니라 앞으로 지속적으로 임할 광야 생활에 대한 시작의 종소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법적인 자유를 너머서서 생활 속의 자유인이 되는 것은 지속적인 훈련을 필요로 한다. 광야 생활, 그 특별한 체험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배워간다. 떡으로부터의 자유…… 그것은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기도 하다. 떡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자녀들이 누릴 권리이기 때문이다.


우상이 되어버린 떡에는 힘이 있다. 떡이 우상이 되면 스스로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은 떡에 예속된 노예로 전락한다. 주종관계가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떡을 숭배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떡은 단순한 물질을 너머 인격적,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한다. 예수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가 그당시 사람들이 섬기던 물신(物神) 맘몬(Mammon)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떡은 더 이상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또한 파멸로 인도하는 영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피조물에게 속박을 느끼는 순간부터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온 자유의 영을 받아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와 철학에서 이 문제를 끊임없이 다루어 왔다. 어떻게 떡의 속박에서 벗어날 것인가? 떡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불가(佛家)에서는 무소유(無所有)를, 도가(道家)에서는 무위(無爲)을 이야기한다. 떡을 외면하든지 떡을 무시함으로써 떡을 초극(超克)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자가 적극적 도피라면 후자는 소극적 도피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다르다. 떡은 경계의 대상도 경시의 대상도 아니다. 떡은 떡일 뿐이다. 떡은 떡으로서의 존재가치를 지닌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홍해를 향해 떠나라 하는 것이다.



(2)


해방의 기쁨은 잠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 앞에는 광야가 펼쳐진다. 광야는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오고 곧바로 모세를 향해 원망의 목소리를 발하게 된다.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고 회상하기 시작한다. 비록 노예생활이었지만 애굽의 고기가마 옆에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던 기억이 나는 것이다. 그들의 원망에 하나님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다. 도저히 광야에서 기대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아침마다 만나를 내리시는 것이다.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 진주처럼 빛나며 꿀처럼 달콤한 그 만나를 처음 대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어떻했을까? 만나는 단순한 일용할 양식 그 이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내는 세미한 음성이요 속삭임이었다. 너는 내 것이라… 내 백성이라… 이제 내가 너를 먹이고 돌볼 것이다 하며 어루만지시는 임마누엘의 체험이었다.


중국으로 가기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마침내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평소에 우리 가족을 아껴주던 한 여집사님이 집을 찾아왔다. 아이와 아내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해주던 그녀는 일어나면서 하얀 헌금 봉투를 내놓았다. 처음 당해보는 일이라, 나는 그 봉투를 받아들고 일 순간 무척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의 고마운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한편으론 야릇하게 마음이 상했다. 마치 내면 깊숙한 곳에 감추어두었던 남에게 보이기 싫은 치부가 들어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건드려서는 안될 내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은 아주 묘한 느낌이 들었다. 예민한 아내 역시 그 느낌을 받았는지 집사님이 집을 떠나자마자 곧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엉엉 우는 아내를 안아주며 토닥거려 달래는 동안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인생이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그동안 살아오면서 나와 내 아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던 그 아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그 땅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내의 울음 앞에서 초라해지고 상실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그 순간 어디에선가 은은하게 내면의 깊은 곳을 어루만지며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다.
“진호야, 많이 아프냐?”
내가 아내를 달래며 어루만지는 그 손길로 하나님이 나를 만지고 계셨다.
“그 자존심, 네가 빼앗기기 싫어하는 그 자존심도 이제 나를 위해 내려 놓아라.”
그리고 출렁이는 감동으로 위로의 성령님이 찾아오셨다.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이제 앞으로는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난 10년간 신실하게 지키셨다. 그 신실한 하나님을 체험했기에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또 다른 10년이 두렵지 않다. 연변과기대의 모든 재정은 전 세계에 흩어진 동역자들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진다. 해외에서 들어간 교직원 역시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연변과기대의 교직원들은 반드시 자신의 가정을 후원할 후원자들을 스스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른이 너머 늦깍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탓에, 교회 배경도 별로 없고 동역자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처음 작정하고 기도했던 만큼의 후원자를 정확히 붙여주셨다. 더러는 세월이 지나남에 따라 열정이 식은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기억속에서 잊혀져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 새로운 단체와 개인들을 붙여주셔서 항상 우리가 필요한 만큼의 물질로 채워주셨다. 북경의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만나서 사귀게된 L박사님은 우리 가정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 주었다. 초창기 연변과기대의 재정상황은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아서 우리 가정의 후원계정을 통해 학과 살림을 운영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자신 역시 내 구좌에 잔고가 남아있는 한 그것을 어떤 모양이든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 공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재정보다는 개인 재정을 써서 활동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 당시는 항상 마음 속에 넘치는 은혜가 있었기에 풍성함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일로 출장을 가도 내 구좌에 돈이 남아있는 한 으례 자비로 다녔고, 주말마다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먹이는 것이 너무나 기뻤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했고 항상 감사했다.


삼년 후,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한동대에서 연구년을 가질 때, 한국에 IMF 사태가 터졌다. 나는 마침 한국서 월급을 받게 되어 그 어려움을 무사히 통과했지만 중국에 남아있는 동역자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별히 한국에서 건너간 가정들은 후원이 끊기고 대폭 삭감되었다. 그들의 어려움을 전해들은 나는 어려운 가정 한 가정을 택하여 익명으로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 도움 이전에 한 몸을 이룬 지체와 동역자의 어려움을 함께 느끼기 위한 내 마음의 표시였다. 그러던 중 우리 가정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 가정의 재정 상태도 악화되었다. 어느 달은 마침내 (-) 밸런스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자 먼저 떠오른 것이 우리 가정도 이렇듯 힘든데 어떻게 남을 도울 형편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후원회에 연락을 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더 답답하고 불편했다. 이 작은 어려움에 쉽사리 흔들리는 내 자신의 믿음없음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며칠을 기도하는 가운데 다시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믿음으로 다시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후원회에 재차 연락하여 그 가정 돕는 것을 계속하겠다고 부탁했다. 그러자 다시 평화와 기쁨이 밀려왔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달부터 우리 가정의 재정은 신속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매년 돌아가면서 한 가정씩 돕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에 오기 전에는 대학 강의와 개인 렛슨으로 항상 자신이 번 돈을 충족히 가지고 살아가던 아내가 중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겪어야 했던 어려움 중 하나가 재정문제였다. 이제는 항상 모든 재정을 남편에게 의존적으로 타서 생활할 뿐 아니라 그나마도 항상 부담감을 가지고 물건을 사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사 그 당시 연길의 백화점에서 무엇 하나 사려고 해도 살만한 물건도 없었지만, 미국과 한국서 자기가 벌어서 원하는대로 쇼핑을 하고 지내던 그녀에게는 그 생활이 여간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제대로 발휘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자신이 받고 있는 렛슨이 얼마나 값비싸고 소중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더러는 약속 시간을 안지키고 빼먹거나 하면, 아내는 집에 돌아와 공연히 나에게 종알대곤 했다. “이 녀석들이 도대체 뭘 몰라도 한참 몰라. 미국서 한 타임 렛슨에 백불씩 받던 그 비싼 렛슨을 자기 맘대로 빼먹고…”
그러나, 기특한 것은 지난 10년간 더러는 힘들어 해 가면서도 그 공짜 렛슨을 한번도 멈추지 않고 꾸준히 제자들을 키워냈다는 것이다. 아내에게도 홍해를 건널 때 자신이 받았던 은혜가 얼마나 컸던지, 만나는 모아두어서는 않된다는 점과 거저받은 것을 거져 주어야한다는 광야생활의 원칙만은 분명히 서 있었던 것 같다. 오직 그날 먹을 양식을 그날 공급해주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훈련, 광야의 만나는 우리 부부의 물질관을 서서히 바꾸어가고 있었다.



(3)


모든 종교에서 출가(出家)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소명(召命)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출가와 성경에 나타난 출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불교의 출가가 세상의 모든 명예와 소유와 욕심을 버리고 속세를 떠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유를 지닌 채 떠난다. 어디 그 뿐이랴? 싯달타는 왕자의 지위와 처자를 모두 버리고 속칭 속세의 인연을 모두 끊고 집을 나섰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모든 소유뿐 아니라 아내와 조카까지 데리고 집을 나선다. 불교의 출가가 속(俗)을 버리고 성(聖)을 취하는 것이라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적 출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삶의 방식과 거처를 옮길 수는 있어도 성속(聖俗)의 구분이 있을 수는 없다.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떠나는 장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소명 앞에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전환한 것이지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교적 출가와 동일시 할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도 사역 현장에 아내를 데리고 다녔음을 기억하라.(고전 9:5) 또한 예수가 제자도를 가르칠 때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9)”고 하신 말씀이나, 누가복음 14장에서 부모, 처자, 형제,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며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도 의미를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제자가 된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 모든 것 보다 복음이 우선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복음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없다는 말이다. 복음은 곧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소유 가치도 생명가치 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수님 특유의 강조적 어법이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가족과 소유를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라는 불교적 출가의 개념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소유를 인정하되 그 소유를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도록 생명 가치 앞에서 상대화 시키는 것이다.


떡을 의식적으로 물리적으로 멀리하는 불교식 출가라면 오히려 문제는 쉬워진다. 그러나 기독교의 출가는 떡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의 부르심이기에 더 어려운 것이다. 그곳에는 내가 스스로 취하는 떡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광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비로소 떡으로부터의 자유케 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배워가게 된다. 그것도 한 두해가 아니라 사십년 간을 말이다.


떠나는 연습은 우리 인생에 항상 유익을 준다. 이사를 가건 이민을 가든 혹은 유학을 위해 새로운 소망을 품고 떠나든지 살아가던 거처를 한번씩 정리해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하다. 묵은 삶의 찌꺼기와 먼지들을 털어내고 내가 진실로 가진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중간 점검이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불필요한 혹은 있으나마나한 것들을 껴안고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이시는 비전을 따라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딛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던져준다. 그것은 마치 영원을 향해 장막을 옮기는 순간을 미리 약간 체험해 보는 것과도 같다. 세상적 물질 가치의 덧없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소유를 초월한 존재의 세계로 발길을 돌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10년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들이 있다. “노후 대책은 어떻게 할거냐?”, “앞으로 자녀 교육은 어떻게 책임질거냐?” 그 질문들 앞에서 당황하며 두려움에 싸인 아내와 아이를 안쓰럽게 돌아보던 생각이 난다. 성령께서 담대한 용기를 주셔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미 사후대책이 다 마련된 사람인데 왜 자꾸 노후대책 노후대책 합니까?”라고 반문했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에도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타고 다니던 차를 처분했다. 중국으로 이삿짐을 부치고 난 후 이튿날 아침, 텅빈 아파트에 기대어 앉아 세 가족이 서로의 얼굴을 물끄럼이 쳐다보던 때, 갑자기 밀어닥쳤던 상실감과 두려움을 잊을 수 없다. 마치 내 것인양 붙들고 살아오던 모든 것들을 청산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손에 우리 가족의 전 존재를 의탁한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사실 그 순간 우리가 떡의 문제를 초월한 사람들이었다면 마땅히 평온과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를 개인적으로 친히 찾아오셔서 세미한 음성으로 위로 하셨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 말씀이 우리 부부를 여러 가지 어려움과 폭풍우 속에서도 지난 10년간의 광야 생활에서 흔들림없이 지켜주었다. 자기 소유의 차 없이 집 없이 살아가는 연길의 삶 속에서 나그네의 자유함과 천국의 소망을 배웠다. 큰 아들 다니엘은 반듯하게 잘 자라 주었고, 보석 같은 둘째 아들 데이빗을 얻었다. 비록 세상적인 건강보험(health insuarance)은 없었어도 10년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노후대책이 세워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은 더욱 투터워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리실 때, 약속하신 40년 광야생활에서 뿐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가서 첫 유월절을 지킨후 그 땅의 소산을 먹기까지 닷새간 더 만나로 먹이셨던 그 세밀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며 끝까지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알아간다.(수 5:12)


광야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나는 축복의 통로이다. 하나님만 바라는 삶… 그 속에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떡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다.

[정진호] 제 4 떡 – 가치 역전 – 온 우주와 한 생명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 그것이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당신은 진심으로 그렇다고 믿고 있는가? 생명의 가치가 땅에 떨어지고 돈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강물에 던져 죽이는 이 기막힌 세상에서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가? 한 쪽에서는 OECD 가입국임을 내세우며 기독교의 기형적(?) 급성장으로 세계적인 초대형교회가 즐비하고 세계선교의 중심국가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나라가, 다른 한쪽에서는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 세계적인 낙태 왕국, 고아 수출국으로 오명을 떨치며 생명가치를 우습게 만드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온 우주와 한 생명…… 과연 어느 것의 가치가 더 큰 것인가? 광대무변한 엄청난 우주 속에 한 점 티끌만도 못한 지구라는 작은 별 안의 한 귀퉁이에 살고 있는 ‘나’ 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그와 같은 상념 속에 빠져들게 되면 한 생명이란 정말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20세기 우주론의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던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상태 가설(Steady State Theory) 사이의 치열한 공방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을 대표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대폭발 이론은 물질(物質)이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이 아니라 시공간의 시작과 더불어 “창조(創造)”된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대폭발 이론이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가정 속에서 성서적 창조(創造)에 대한 단서와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면, 정상상태 이론은 우주가 영원 전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자연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끝없이 순환하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정상상태로 그저 존재해 왔다고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자연적 개념을 송두리째 뒤흔들며 등장한 것이 대폭발이론이다. 그 효시는 1929년 허블(Edwin P. Hubble)이 천체망원경으로 행성간의 적색편이 (赤色偏移)(1)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제기된 우주 팽창설에서 찾을 수 있다. 대폭발이론은 그 후 1940년 가모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우주가 시간과 공간도 없는 절대 무(無)의 한 점에서 마치 폭발하듯이 엄청난 에너지로 팽창하며 물질을 생성시켰다는 가설을 함축하게 된다. 이 논쟁은 1965년 미국의 전파 기술자 펜지아스와 윌슨이 우연히 발견한 우주배경 복사선(2)에 의해 대폭발이론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며 두 사람은 엉겁결에 노벨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는다.


우주(즉 시간, 공간, 물질)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은 광대무변하다고 생각되어온 고전적인 우주관에 여러 가지 혼란을 안겨준다. 시공의 시작과 팽창, 그 안에 흩어져 있는 행성들 사이의 끝없이 멀어지는 간격들, 빛의 속도로 팽창하는 우주의 끝, 그리고 그 경계, 우주의 크기, 우주의 나이 등등 이상한 생각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폭발이론에 근거하여 현재 모든 행성간에 멀어지고 있는 속도를 역산하여 계산한 우주의 최대 나이는 200억 년으로 추정되고 있고, 우주의 크기는 200억 광년이며 그에 따른 우주의 크기는 2,000조 Km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 무려 1,000억 개의 은하와 각 은하마다 다시 1,000억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고 우주 천문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1022 개의 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많은 숫자이다. 그래서 자고로 도무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를 가리킬 때 밤하늘의 별보다 많다고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상대론의 세계는 우리들이 지닌 절대적 우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많은 착각과 오해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빛이 있으라” 하는 그 말씀의 선포와 함께 섬광과 같이 터져 나와 빛의 속도로 퍼져가던 태초의 신비 속으로 접근해 가면, 시간은 정지하고 공간은 한 점으로 축소되며 물질은 무한의 에너지로 변하게 된다. 도대체 그 상황 속에서 시간의 길고 짧음(長短)이나 공간의 크고 작음(大小)이나 물질의 많고 적음(多少)이 무슨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리 손에 쥘 수 있는 흑연 한 덩어리 12g 속에 온 우주의 별의 숫자보다도 더 많은 6.02×1023개의 원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 하나의 원자 속에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소우주가 존재하고 있다. 큰 빌딩을 짓는 설계도면 보다 최신의 반도체 칩 안에 숨어있는 고도의 지식과 설계가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임을 생각한다면, 생명이 없는 무생물적 거대 우주를 만드는 설계보다도 한 생명을 만드는 설계의 지식이 훨씬 더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대 가치는 우리 인간의 눈에 비치는 물리적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피조물의 가치는 같은 피조물인 인간의 판단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창조주의 지식과 지혜에 의해 결정된다. 자연과학과 신앙의 세계는 모두 경이(wonder)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자연의 신비로움 앞에 절대자의 존재를 느끼며 겸손할 수밖에 없는 대과학자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저울에 온 우주와 한 생명을 달아 비교해 보면, 우리 인간의 눈에는 거대해 보이는 우주도 한 생명 안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는 도무지 못 미치는 왜소하고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된다.


* 물질의 가치에 대하여 성경은 긍정적으로 말한다. 영적인 세계만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자나 불교도처럼 물질을 악하다고 반대하거나 물질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여 무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직 물질이 곧 존재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우상시하는 유물론자처럼 물질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균형 잡힌 시각으로 가르치고 있다. 물질은 반드시 있어야하는 것이기에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경제 원리를 신구약 성경이 모두 다루고 있다. 물질 역시 선하신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에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셔서 아름답게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것이기에 그 존재 목적 자체가 선한 것이고 또 그 안에 합당한 가치가 담겨있다. 단지 타락한 인간이 피조물인 물질을 마치 하나님처럼 숭배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뿐이다.


물질 가치를 우상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물질 의존 심리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물질이 그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기에 물질이 없으면 존재의 불안감에 휩싸인다. 물질이 곧 구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돈이 하나님이요 예금 통장이 곧 구세주요 그 속에 들어있는 잔고의 높낮이가 바로 충만함과 능력을 가져다주는 성령에 해당한다.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면 그들은 안심한다. 그러나 통장이 가벼워질수록 그들은 존재의 위협을 느낀다. 모든 일상사가 카드결재에 의해 진행되고 속속 현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현대인에게 은행 잔고에 의해 심리적 안정감이 좌우되는 이 증상(banking balance symptom)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크리스천들에게도 이 증상은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입으로는 예수를 주(主)로 인정하고 또 “주님 사랑해요…”를 목놓아 외치며 찬양할 지라도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참 주인은 여전히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배고픈 무리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먹인다. 오병이어에는 단순한 육신의 떡을 공급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 기적의 이면에는 물질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창조주의 신성을 나타냄으로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구속(救贖)하여 해방시키고자 하는 메시아적 소망이 있었다. 과연 오병이어의 기적은 로마의 압제와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메시아의 소망을 다시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무리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줄 경제적 메시아로 로마의 통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곧바로 취한 행동은 예수를 잡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몸을 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본심이 오병이어의 기적 속에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참 메시아로서 예수를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떡의 속박(束縛)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유함과 하나님을 진정 경배하고 찬양하고자하는 예배자의 마음보다는 오히려 예수를 언제든지 자신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은행 통장이나 현금지급기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물질 우상 숭배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어제 먹은 떡을 상기하며 또 다시 예수를 찾아 나선 무리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마침내 반대편 가버나움에서 예수와 제자들을 만난다. 반갑게 달려오는 그 무리들을 향해 예수는 단호한 어조로 질책하며 말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장 26절)”


현대의 기독교가 물질주의 우상 숭배에 빠지면서 예수를 자신이 원하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도깨비 방망이 정도로 전락시키는 기복신앙이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질책은 주식과 부동산 시세를 따라 표류하는 오늘날의 표면적 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그 당시 갈릴리 호숫가의 유대 백성들처럼, 곤고한 일상의 삶 속에서 물질을 찾아 건강을 찾아 더 나은 행복을 찾아 예수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이 진정 찾아 헤매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메시아의 표적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떡 한 조각의 꿈을 꾸고 있는가?


예수는 그들을 향해 도전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장 27절)” 네 육신을 위한 일, 썩어질 것들을 위한 일을 위해 쫓아다니지 말고 영원한 것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다. 뜻밖의 질책에 당황한 무리들은 예수를 향해 반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말하는 썩지 않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쩌면 스스로 열심 있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천에게도 동일하게 떠오르는 질문일 수 있다. 내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일만을 하는 전담 사역자로 나가는 것입니까? 선교지로 내 삶의 거처를 옮기는 것입니까? 구제 사업을 위한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파격적인 대답을 던진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그 어떤 일보다 앞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일은 그 후에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생명의 떡(the bread of life)으로서 소개한다. 하늘에서 내린 참 떡 예수… 세상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온 떡 예수… 그리고 자신을 먹으라고 말한다. 참 생명의 떡 예수를 먹으라는 것이다.


물질가치가 생명가치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 김동호 목사의 설교는 논리적 설득력을 지니면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단순 명료함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그 점에서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탁월한 설교가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value system)의 전환에 대해 그가 설교한 내용 중 특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다. 작은 가치에 묶여 있는 사람은 더 큰 가치를 깨달아 소유할 때에야 비로소 작은 것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백 원짜리 동전을 꼭 쥐고 안 놓으려는 어린아이는 아무리 만 원짜리 지폐를 주고 바꾸려 해도 그 손을 펼치지 않는다. 그가 백 원을 버릴 수 있기 위해서는 만원의 가치를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30, 40대 명예퇴직자가 늘어나면서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생겼다. 로또(Lotto) 복권이 유행하면서 한탕으로 인생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평생을 벌어도 도저히 가질 수 없는 물질을 단숨에 얻어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고 싶다는 욕망… 그와 같은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나방처럼 자신의 인생을 헛된 도박과 사행심리에 내던져 자신과 가정을 파괴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다. 오늘밤도 라스베가스의 밤은 불야성을 이룰 것이며, 세계 도처의 도박장과 마작판과 경마장과 각종 투기 전에서는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비참한 인간들의 비극적 인생극장이 연출되고 있다. 단지 그들뿐이겠는가? 물질에게 예속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크리스천도 포함되어 있다. ‘양수집병’이라는 말이 있다. 욕심을 내어 떡을 두 손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 현대인들이 움켜진 두 손에는 썩어질 육신의 떡이 있다. 그들을 그 사망의 늪에서 구해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떡을 먼저 발견하는 일이다. 그 가치를 깨달아 알고 그것을 취하여 먹는 것이다.


30살에 만난 예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떡을 발견하여 그 엄청난 가치를 깨달아 알게 된 사건, 그것은 내가 쫓아가던 인생의 방향과 구도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고 말았다. 세상의 떡을 쫓아 어떻게든 남보다 더 좋은 학력과 더 낳은 자리와 더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 치달아 가던 내 인생이 충격적인 그의 말에 멈추어 서고 말았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그리고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내 인생역전을 꿈꾸며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며 기도했다. 인생의 모드(mode)를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작업에는 적어도 두 가지 단계가 필요했다. 첫째는 내 손에 있는 떡을 놓는 일과 둘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떡을 붙드는 일이었다. 내 손에 이미 있는 떡을 놓는 일조차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그것은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향해 생명의 떡을 붙드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용기를 넘어선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내가 이미 소유한 것을 내놓은 것은 용기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만, 아직 내가 소유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야말로 믿음을 필요로 한다.


내가 예수를 믿고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예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였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서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다.(요 6:39)”라고 하신 그의 말씀처럼, 나는 나를 보내신 그의 뜻 가운데 내 인생을 새로 발견코자 했다. 그 당시 내 삶의 초점은 교회 고등부와 부부성경공부와 그리고 직장 성경공부를 통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안타까움에 가득 차 있었고,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살리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훈련과정, 그 가운데 나타난 비전이 중국과 북한, 그리고 연변과기대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장차 내가 만날 중국과 북한의 청년들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었다. 그 무렵 새벽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는 아직 한번도 가본 일 없는 중국의 만주 벌판을 헤매고 다녔고, 신기하게도 한번도 본 일도 없는 조선족 청년들의 영혼을 향한 눈물의 기도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떡 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가치를 붙드는 일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직장을 그만두고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이국 땅 중국을 향해 내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들어간 사건은 확실히 내 인생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사건이 되고 말았다. 직장 선후배, 부모형제, 일가 친척들, 교회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단한 그 사건을 두고, 그 당시 우리 가족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혹은 측은한 눈으로 더러는 그 용기와 믿음을 가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공존했다. “당신 나이가 지금 몇인데, 낼 모래면 40이 될 사람이 이제 직장을 그만둔단 말이냐?” “노후 대책을 생각해 보았느냐?” “예수를 믿어도 정도껏 믿어야지. 정신 나갔냐?” “왜 죄 없는 어린것을 데리고 가 고생을 시키려고 하느냐?” (그 당시 그토록 말리던 사람들이 1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우리 가족의 결단과 선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더러 친구들 중에는 만나면 그 당시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는가 하고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생긴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감사할 일이다.) 아무튼, 우겨 쌈을 당하는 그 답답함과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생명의 떡 되신 예수, 딱딱한 무교병을 씹으면서 묵묵히 한 발자국씩 홍해바다를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한 생명의 가치가 온 우주보다도 크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에 예수를 따르던 열두 제자들은 늘 책망을 받았다. 수가성에서 배가 고파 행로에 지쳐 주저앉았던 예수는 절망 속에 살아가던 한 여인 사마리아 여인을 혼신을 다해 구원한다.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가지고 왔던 물동이를 팽개치고 마을로 뛰어가는 그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수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길 없는 제자들은 마을에서 구해온 떡을 예수께 드리면서 잡수시도록 권한다. 그러나 예수는 그 제자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그 떡을 거절한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제자들은 수군거리며 그 사이 누가 다른 양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의아해한다. 제자들은 온 우주보다도 더 귀한 한 생명을 구한 전도자의 마음을 몰랐다. 생명 가운데 찾아오는 영적인 배부름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예수의 이 표현이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사실 예수는 그 순간 배가 불러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육신적으로는 배가 고파 있었으나, 수가성 여인의 구원받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육신의 배고픔은 우주의 경계 바깥으로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도무지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처음 중국서 첫 제자를 얻었던 날, 나 역시 동일한 체험을 했다. 너무나 기쁘고 배가 불러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기가 싫었다. 이 경험이 있어야 한다. 온 우주를 바꾸어도 줄 수 없는 한 생명의 가치를 깨닫는 경험. 이것이 우리들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생명가치를 물질가치와 맞바꾸는 일. 그 가치역전이 곧 참된 인생역전이다.



(1) 우주가 팽창할 때 나타나는 도플러효과로 인해, 중력이 큰 별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파장이 긴 붉은 색 쪽으로 몰리는 현상. 영국의 천체물리학자 에딩턴 경에 의해 일식 현상 시 나타나는 적색 편이 현상이 관찰되어 일반상대성 이론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공간의 모든 방향으로부터 같은 강도로 들어오는 전파. 파장 0.1 mm 20 cm에서 관측되는 마이크로( 0.01 %)파로 그 높은 등방성(等方性)으로 미루어, 어느 특정한 천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생성 시 대폭발에 의해 발생했던 빛의 흔적이 우주공간에 충만된 전파로 남아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진호] 제 3 떡 소알에서 소돔까지 – 도시 지향적 인간형, 롯과 그의 아내

 

성경에는 정말 귀중한 것을 버리고 도시(都市)에 속한 문화와 향락을 좇아가다가 화를 당한 한 가정의 불행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가운데 롯만큼 여러 번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도 그 기회를 포착하지 못한 인물도 드물다. 롯은 우상(偶像)의 도시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의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과 일찍 아버지를 여읜 롯 사이에 부자지간과 같은 정으로 맺어져 있었던 까닭도 있었겠지만, 롯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도 간과해선 안 된다. 아무튼 그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아브라함의 집에서 살게 되는 큰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란 모태신앙의 축복을 누린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기근을 피해 아브라함과 롯이 애굽으로 이주했을 때, 롯은 이방의 도시문화가 가져다주는 풍요와 안락함의 단맛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곳에서 롯은 청년 시기를 보내며 연애를 하고 아내를 얻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길 뻔한 위기를 넘긴 아브라함은 오히려 바로의 궁에서 수많은 소유물, 즉 육축과 은금을 이끌고 애굽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소유물의 넘치는 풍요로 말미암아 롯은 아브라함과 다투게 된다. 육축으로 인한 하속들의 다툼이 심해지자 마침내 아브라함은 친아들처럼 키워왔던 롯과 갈라서는 길을 택하고 만다. 행운이라 생각되었던 물질의 축복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만 것이다. 지금도 재물로 인해 친밀했던 가족 사이에 금이 가고 때론 원수지간으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골육간에 헤어지는 아픔을 삼키며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조카에게 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었을 때, 롯은 애굽 시절을 회상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버리고 요단 동편의 성읍을 선택한다.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롯에게는 이미 삼촌에 대한 양보심은 뒷전이었고, 메마른 땅 가나안보다도 물이 넉넉히 차 있는 비옥한 땅 요단 들판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롯이 요단 들을 바라보았을 때의 심정을 표현하여 ?마치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1310)고 기록하고 있다. 어쩌면 그의 내면에는 애굽의 피난 시절 누리던 도시의 안락함과 화려함에 대한 그리움이 잠재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눈을 자극했던 것은 바로 도시 생활에 대한 향수였던 것이다. 하루 속히 지긋지긋한 유목민 생활을 벗어나 독립하여 도시로 가서 살자고 충동질하며 옆에서 부추긴 것은 롯의 아내였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의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은 작은 성읍 소알이었다. 비록 작은 도시였지만 도시 생활을 시작한다는 기쁨에 젖어 그들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떠났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를 사모하던 그들은 요단 평지에 속한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죄악의 도시 소돔성으로 들어가고 만다.



인간적인 꾀로 당시에는 자신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준 듯이 보이던 선택이 세월이 지나며 결국 어리석은 선택이었음이 판명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롯은 요단 동편을 택한 후 거친 유목생활에서 벗어나 도시생활로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꾸게 되었다. 당시의 대도시요 화려한 문화도시 소돔으로 들어간 그 가정은 뜻하지 않은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된다. 창세기 14장은 그 당시에 벌어졌던 여러 도시간의 치열한 전쟁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 당시 시날 평야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종주국 엘람의 그돌라오멜에 반기를 들고 반역 전쟁을 일으킨 다섯 도시가 있었다.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 이 다섯 도시가 더 이상의 조공을 거부하며 독립 전쟁을 일으킨다. 이에 맞서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 네 도시가 반격을 가하여 반란군과 연합군 사이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단순한 육적 전쟁이 아니라, 셈의 장자였던 엘람(10:22)을 통해 믿음의 정통성을 이어오던 종주국에 대해 맞서고자 하는 영적 반역 전쟁이었다. 그 결과는 반란군의 대 참패로 끝나고 소돔왕 베라는 재물과 사람을 모두 빼앗기고 롯은 전쟁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된다.



그 당시 전쟁 포로에게 내려지던 풍습에 따라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롯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조카 롯이 당한 비운의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조카를 구하기 위해 삼백 십팔 인의 훈련된 부하를 이끌고 야간 기습을 감행하여 포로와 재물을 전부 찾아온다. 이때 만일 롯이 정신을 차렸다면 죄악의 도시 소돔을 떠나 아브라함과 화해하고 재결합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롯은 여전히 소돔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임박한 죄악의 도시로 다시 돌아가고 만다.



소돔을 심판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알게 된 아브라함은 자식처럼 키운 롯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중보자로서 하나님과의 끈질긴 설득 작업에 나선다. ?만일 소돔 땅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 도시를 멸하시겠습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의인들을 위해 그 도시를 구원해 주심이 마땅치 않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던 아브라함은, 물론 용서하겠다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대답 앞에 자신을 잃고 의인의 수를 감소시킨다. 사십 오, 사십, 삼십, 이십, 십까지 내려가던 중 그 대화는 갑자기 끝이 난다. 많은 경우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한 소돔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소돔에 의인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몇 명이? 아홉명? 다섯명? 아니면 한 명? 의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무시하셨을까? 그보다 롯은 과연 의인이었는가? 그는 의인이었기에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대화 가운데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소돔 안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음을. 그래서 그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롯을 구원해 주신 것은 순전히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통해 베푸신 은혜일 뿐이다.



창세기 19장은 심판이 임박한 소돔성의 전야에 전개되는 롯의 가족을 둘러싼 삶과 죽음의 변주곡을 숨막히게 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소도미스트(sodomist, 소돔사람들, 곧 동성연애자)라는 단어가 말해주듯이 온갖 음욕과 육욕이 들끓는 남색(男色)의 도시 소돔에서 롯은 최후의 전령으로 파견된 두 천사를 부지 중 나그네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젊고 아름다운 두 청년이 롯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들은 소돔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그의 집을 둘러싸게 된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존귀성을 찾아보기 힘든 소돔인들이 두 나그네를 자신들의 육욕의 재물로 내놓으라고 아우성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소돔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머리 위에 머무르며 얼마나 오래 참아왔던가를 엿볼 수 있다.



도대체 롯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가리켜 성경은 의인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벧후 2:7-8) 롯은 아브라함의 장막에서 자란 사람이다. 물론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것을 어려서부터 배워 알았던 사람이다. 그의 마음에는 믿음으로 인한 선한 양심이 있었다. 그랬기에 소돔 땅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온갖 음란한 행실로 인해 그의 심령이 상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 같은 환경은 롯의 도덕성과 성결성을 크게 해치고 손상하였을 것이다. 두 천사를 내놓으라고 소리치는 폭도들에게 정혼한 자신의 두 딸을 대신 내어주겠다고 제의를 하는 아버지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일 수가 없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음란의 환경에 오래 노출되면 그의 영이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양심이 무뎌지게 마련이듯이 이미 롯의 양심과 판단력은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마침내 천사들에 의해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성읍을 곧 떠나라는 권고와 함께 그에 속한 모든 식구들에게도 그 소식이 전해진다. 소돔성을 떠나라는 구원의 메시지는 롯의 사위들에게는 어처구니없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작 롯 조차도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단을 못 내리며 머뭇머뭇 지체하다가 마침내 새벽 동이 틀 시간이 되고 말았다. 곧 시작될 유황불의 심판을 앞두고 하나님은 은총을 더하셔서 천사들이 강제로 롯과 아내 그리고 두 딸의 손목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는 황급한 명령 앞에서 롯이 보인 태도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린 그 순간에 있어서도 롯은 머뭇거리며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들의 피신처를 삼게 해 달라고 안간힘을 쓰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19:17-22) 작은 성읍 소알은 과연 어떤 도시인가?



롯은 산으로 피하라는 명령을 두려워하여 작은 성읍 소알로 자신의 가족이 피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간절히 구하였다. 소돔을 창졸지간에 떠나야했던 롯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신뢰보다는 최소한 소알 정도의 도시가 되어야만 자신들의 가족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어리석은 생각이 앞서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시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어리석은 자의 기도이지만 간청하는 기도를 뿌리치지 않고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마치 창세기 4장에서 살인자 카인의 간청을 들으사 그에게 표를 주시고 생명을 구원토록 하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억하셨음은 물론이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 그 질주의 순간에도 롯의 아내는 두고 온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아 비극적인 소금기둥이 되고 만다. 롯이 두 딸과 함께 소알에 들어서는 순간 해가 솟았고 유황불이 비같이 하늘에서 쏟아져 소돔과 고모라는 마침내 멸망당하고 만다. 멀리서 바라보니 마치 옹기점 연기처럼 치밀어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원자폭탄이 투하된 이후에 피어올랐던 버섯구름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창세기 19장을 통해 보면, 이 날 멸망당한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 뿐인 듯이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신명기 2923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멸망당한 성은 아드마와 스보임을 포함한 네 개 성읍이었다. 이 도시들은 창세기 14장에서 종주국 엘람 왕에게 영적 반란을 일으켰던 다섯 도시 중 네 도시였고, 오직 소알 만이 그 심판에서 제외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소알 역시 이날 멸망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도시였으나 롯의 간청으로 말미암아 한 도시가 구원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천사들이 산으로 피신하라고 권할 때는 절대 못 가겠다고 버텼던 롯이 가까스로 얻은 새 삶의 거쳐 소알을 버리고 스스로 다시 산으로 도망가고 만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 멸망당하는 것을 체험한 롯은 비슷한 죄 속에서 살아가는 소알 역시 언제 멸망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아야만 했던 카인의 심리 상태……. 이미 롯에게는 은혜를 받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못하는 카인의 불신앙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롯이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롯에게는 더 이상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두 딸과 함께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굴혈인(掘穴人) 되어 폐인과 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던 그는 자신이 이미 음욕의 제물로 내어주었던 두 딸로 하여금 근친상간의 불륜을 저지르게 하여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결국 처절한 멸망의 인생으로 끝을 맺고만 롯……, 도대체 그의 문제는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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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KBS 인간극장의 책임 PD로 이름이 알려진 김우현 PD가 자신이 운영하는 버드나무(www.birdtree.net)의 촬영 제작진을 이끌고 취재차 연변과기대를 방문하였다. 그 일행 중 하나로 김동호 목사님의 둘째 아들 지열이가 함께 와서 우리 집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다니던 한동대학을 그만 두고 영화 제작에 꿈을 품고 한국종합예술대학 영화과에 다시 입학한 독특한 친구다. 그래서 그런지 예술적인 끼가 있어서 아내와 금새 잘 통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 집에 들어와서는 아내가 꾸며놓은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고는 대뜸 한다는 소리가 ?사모님은 파리에서 사는 것이 어울릴 분인데, 연길에 사시는군요.?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이 아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는지 퇴근 후에 보니 얼굴이 시무룩해 있었다.



중국 생활을 시작한 이후 아내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채워 주지 못하는 연길의 열악한 문화 환경이었다. 간혹 자기는 뉴욕 맨하탄에서 살아야 할 시티 걸(city girl)인데, 남편을 잘못 만나서 이곳까지 왔노라고 투정을 하곤 했다. 유일한 문화 생활이라고 해야 고작 틈을 내어 영화를 빌려 보는 것인데, 미국 영화는 왜 그리 보스톤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많은 지. 영화를 보다가 보스톤 중심가와 찰스 강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나오면 다시금 옛 향수에 젖어서 눈물을 글썽일 때가 많았다.



보스톤의 아름다운 추억 중 하나는 금요일 저녁의 부부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말씀으로 한창 깨우치던 때라 그 시간이 꿀처럼 달고 기다려졌다. 더욱 좋았던 것은 성경공부가 끝나고 다과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모여 앉아 담소하며 주말을 만끽하던 그 여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이 되면 자연스레 남자들은 남자들끼리 학업이나 스포츠, 세상 정치 이야기로, 또 아내들은 자기들만의 가정 화제로 모여 앉아 수다(?)들을 떨곤 했다. 유학생 아내들의 그 당시 가장 큰 관심사와 화제거리는 남편의 학위가 끝난 후 어디로 직장이 구해지는가 하는 것과 돌아가기 전에 미국서 어떤 살림살이를 장만할 것인가에 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어떻게든 남편이 서울에 직장을 구하기를 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매가 힘주어 하는 이야기가 우연히 귀에 들려왔다. ?나는 대전까지는 참을 수 있어도 그 이하는 절대로 안돼.?라고 했던 것 같다. 아마 농담으로 한 것이었겠지만, 그 한 마디 말속에 크고 화려한 도시에서 살고 싶어하는 여자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롯의 아내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나와 아내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우리 부부야말로 롯과 롯의 아내의 삶을 살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을 어찌하여 하나님이 이곳까지 끌고 오셔서 강제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인생을 살게 하셨는지은혜일 뿐이다. 롯의 아내만큼이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여자. 온갖 세간으로 우아하게 집안을 꾸미며 살아가고 싶어했던 여자. 그리고 고급 백화점에서 자기 맘에 드는 의상으로 마음껏 쇼핑을 하며 살고 싶었던 그녀가 연길이라는 새장에 갇혀버린 것이다. 백화점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생일 선물을 사줄 것이 없어서 중국식 주방용 식칼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시절. 먼지 바람과 연기에 휩싸인 추운 겨울 거리에 겹겹이 입은 내복과 파카 이외에는 아무런 옷이 필요 없는 도시. 그 새장 안에 갇혀서 아내는 보스톤을 꿈꾸며 눈물 흘렸다. 그토록 화려한 도시의 문화 생활을 그리워하던 아내도 십년이라는 세월 앞에서 나이가 들어가고 점차 체념의 세월을 살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지고 왔던 살림살이와 옷가지들을 지난 10년 간 계속 줄이고 버리고 남을 주는 바람에 이제는 단촐한 세간과 여기 저기 고장난 전자제품들 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오면 이상하게 까페 분위기가 난다고 한다. 그것은 안타까움으로 배어있는 아내의 문화적 체취일 뿐이다.



화려한 연주자로 대형 교회의 파이프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아내. 독주회와 청중의 박수갈채에 익숙하고 바하와 오르간이 우상이었던 아내에게 연길 생활은 그녀가 원하던 음악과 문화를 빼앗아 갔다. 피아노 앞에서 딩동거리는 반주자 양성, 유행가를 가르쳐야 하는 수업시간, 초라한 키보드로 반주를 하는 예배 시간, 그 모든 것이 괴로웠다. 그런 그녀에게 이상하게 학생들은 감동을 받는다. 예배가 끝나면 속도 모르는 분들이 그녀에게 찾아와 반주에 은혜 받았다고 진심으로 인사를 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아내는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그 세월이 이제 10년이 흘렀다. 어느 날 저녁, 아내를 위하여 이웃에서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빌려와 함께 보았다. 홀러코스트의 잔혹한 장면에 눈쌀을 찌푸리던 그녀는 간간이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 피아노 선율 때문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끝까지 영화를 보았다. 클라이막스에서 자신이 학생 시절 가장 잘 치고 좋아했던 곡을 주인공이 치기 시작했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무엇에 홀린 듯이 듣고 있던 그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마치 석고상처럼 굳어져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양 손가락을 펴서 내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피아니스트도 오르가니스트도 아니라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어느새 변해버린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자각하고 울음이 터진 것이다.



그러던 아내를 지난여름 아주 오랜만에 보스톤에 데려갔다. 고색창연한 아치형 교회 건물과 현대식 빌딩이 조화를 이룬 보스톤의 아름다운 시가지는 여전히 청명한 하늘 햇살 아래서 신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보스톤이었기에 아내가 오랜만에 마음껏 만끽하기를 내심 기대하였는데이상하게도 아내의 반응이 신통치가 않았다. 보스톤 이야기만 나와도 가슴이 설레던 그녀가 정작 보스톤 땅을 밟고서도 심드렁하여 별로 웃지도 않았다. 자기도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이제 하나님이 자기 마음속에 있던 보스톤에 대한 그리움마저도 거두어 가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옛날에 그녀가 다니던 학교는 한번 데리고 가야할 것 같아서 후배의 라이드를 받아 찰스 강변을 따라 보스톤 대학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건물들을 찾아갔다. 어린 다니엘을 뒤에 태우고 차를 몰며 바삐 다니던 거리의 옛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피곤한 듯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그녀가 오르간 독주회를 했던 마쉬(Marshy) 채플 앞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그곳은 한번쯤 들려보아야 할 것 같아서 강제로 손목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엄숙한 채플 안은 십여 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고풍스런 분위기 속에 남아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이 전면을 감싸고 우리를 맞이했다. 중앙 복도를 가로질러 앞자리에 앉아 잠시 기도를 하였다. 옛날 아내가 이곳에서 연주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어린 다니엘을 데리고 뒤에서 기다리며 나도 모르게 웅장한 오르간 음악에 심취하곤 했던 시절. 그녀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조심스레 단위에 올라가 오르간을 기웃거린다. 아마 다시 한번 쳐보고 싶겠지그러고 있는데, 사찰 집사인 듯한 분이 다가와 아내에게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는다. 아내가 자신이 이 학교 학생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오르간을 잠시 만져보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하였다. 흔쾌히 허락하는 너그러움그녀는 미끄러지듯 오르간 의자에 앉았다. 잠시의 침묵중국에 처음 이삿짐을 풀던 날 가지고 간 연습용 전자 오르간으로 정신없이 바하를 쳐대던 아내의 뜨거운 열정이 떠오른다. 그녀의 절반 인생과도 같았던 바하. 또 다시 바하를 치려나?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조용한 찬송가 반주였다. 잔잔하면서도 힘있는 찬송가를 메들리로 치고 있는 그녀의 성숙한 모습에서 십 년의 세월 속에 감추어진 눈물이 느껴졌다. 오르간 선율 속에 담긴 그녀의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와 내 가슴에 안기기 시작했다. 저러다가 또 울지어떡하나걱정하고 있는데갑자기 뚝 그치며 그녀가 일어섰다. 울음이 터지기 직전에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꺽어버린 것이다. 안심안도눈시울이 붉어진 아내의 어깨를 감싸고 나오는데 그녀가 정말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



걸어가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아내가 그동안 가르친 제자들이 인근 도시마다 교회의 반주자로 활동하고 있고, 그 중에는 오르간을 배우고 유학을 다녀와서 중국에서 최초의 전문적인 오르간 반주자를 꿈꾸는 제자도 있다. 언젠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아내의 눈물이 씨앗이 되어 자란 그 제자들에 의해 중국의 교회가 부흥하고 곳곳에서 찬송이 차고 넘치는 그날이 왔을 때, 후세 사람들이 아내가 중국 교회 음악의 어머니였다고 기억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그녀의 거칠어진 손가락 마디를 꼭 잡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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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롯,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며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었던 두 사람. 소유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하여 가는 곳마다 전 재산을 이끌고 다녔으며 재물로 인해 다투어 갈라지기까지 했던 그들. 창세기 18장과 19장에서 부지중 나그네를 대접하여 천사를 맞이하는 모습조차 두 사람은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묵상 중에 천사를 맞이했다면, 롯은 사람들이 바삐 드나드는 성문 앞에 앉았다가 천사들을 영접한다. 그리고 그들은 천사들을 집으로 안내하여 떡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라가 고운 가루를 반죽하여 떡을 굽는데 비해, 롯은 직접 급히 무교병을 굽는다. 아마도 그의 아내는 다른 사업(부동산 투기와 주식투자?)에 바빴던지 갑작스레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불청객이 불편하여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를 피했던 모양이다. 두 가정의 식탁과 떡. 그러나 그들이 베풀었던 식탁은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천사를 대접한 그 떡의 식사를 기점으로 두 가정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식사 후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아들 이삭의 잉태에 대한 축복의 예언을 받게 되지만, 롯과 그의 아내는 소돔 땅을 속히 떠나라는 심판의 메시지를 듣게 된다. 아브라함의 식탁은 풍요와 평화와 웃음이 넘치는 식탁이었지만, 롯의 식탁은 멸망을 앞둔 자가 지닌 불안과 조급함과 메마름의 식탁이었다.



롯과 롯의 아내…… 이들은 무엇이 문제였을까?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가운데 보인 롯의 태도, 결국은 소금기둥이 되고만 롯의 아내의 행동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묶고 있었던 것은 재물과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였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들이 소돔으로 이사가게 된 배경 속에는 처음부터 화려한 도시 생활을 사모하며 남편을 부추기어 소돔으로 옮겨가자고 졸라대었을 롯의 아내의 역할이 있었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사라와 롯의 아내도 표면적으로 보면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아브라함의 가정은 남자가 그 가정을 이끌고 다녔다면 롯의 아내는 그 아내가 주도권을 쥐고 이사를 다닌 것은 아니었는지?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언 141)?는 말씀처럼 한 집안이 사치와 화려함을 좋아하는 여인의 어리석음 때문에 멸망의 길로 간 것이다. 그저 편안한 도시의 삶에 이끌리며 도시가 아니면 살기를 꺼려했던 롯과 그의 가족의 도시에 대한 우상 숭배가 그 가정의 멸망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자신의 직장을 구하는 젊은이들이 직장 자체의 질과 삶의 가치를 따지기 전에 직장의 소재지가 어디인가에 따라 판단기준을 두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는 목회지나 사역지를 정하는 경우에도 이와 같은 도시 혹은 대도시 지향적 사고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롯과 롯의 아내, 그들은 다름 아닌 도시로 도시로 불나방처럼 몰려드는 현대의 도시 지향적 인간들의 전형(典型)이다. 복의 근원 아브라함의 장막을 마다하고 멸망의 도시 소돔으로 나아간 롯. 시편 4920절에서 이르기를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도시의 삶 자체가 특별히 악하다든지 벽지(僻地)의 삶을 권하든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소돔성의 롯이 그러했듯이 향락적이고 부패한 도시문화에 무방비적으로 노출되어 오염된다면, 혹은 도시가 가져다주는 여러가지 안락함과 문화적 편이(便易)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가리는 우상이 된다면, 그곳은 이미 중립지대에서 벗어난 곳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인정되고 선포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산촌 벽지이건 니느웨 성이건 우리는 마다하지 않고 그분의 부르심에 응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영원히 사모하는 하나의 도시가 있을 뿐이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21:2)>


[정진호] 제 2 떡, 떡 한 조각과 팥죽 한 그릇 – 필생의 선택 – 존재냐 소유냐?(2)

소극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흔히 운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미 정해져 버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더러는 체념한다. 운명적인 팔자를 타고났다고 생각하면서도 미래의 일을 또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점이나 사주를 보고 별자리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다.


적극적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기에 자신의 노력과 선택에 의해 운명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자신의 선택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이들은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여 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인생이 그래도 전자보다는 나아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설자리가 없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자리에 피조물 또는 자기 자신이 우상으로 들어 앉아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굴레 속에 던져진 인간에게 순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세계관의 문제이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라는 광고 문안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순간의 선택이 인생을 지배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의 시간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결국 위의 두 가지 인생은 그들이 지닌 세계관이 닫힌 세계관이냐 혹은 열린 세계관이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닫힌 세계관을 지닌 사람은 운명론자 또는 숙명론자가 되고, 열린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더러 인본주의자가 되어 적극적인 인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열린 세계관을 지닌 사람일지라도 그 선택의 기준이 인간의 야망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때 그 결과는 오히려 멸망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적극적인 인생을 펼쳐가던 재벌 기업가의 참담한 말로를 우리는 심심지 않게 목격하게 된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인생을 인도해 가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이 인생의 주관자요 파란만장한 한 사람의 인생도 결국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언뜻 보면 크리스천의 세계관은 닫힌 세계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것도 하나님을 택하든지 아니면 떠나든지 하는 가장 큰 선택권마저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생각하면 크리스천의 세계관은 열린 세계관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크리스천의 인생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신의 선택, 즉 섭리와 자유의지 사이의 미묘한 긴장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며 순간을 살아가는 것 같은데,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이 그것을 이끌어간다는 모순성? 지구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인간이 지구의 공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듯, 우리 인생의 절대 기준은 더 큰 척도 안에서 운행되고 결정되고 있다는 인식…… 그러나 그 속에서 누리는 선택의 자유와 중요성은 지구의 공전 궤도마저 바꿀 수도 있다는 역설로 강조해도 좋을지?


크리스천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을 믿는다. 인생의 순간들을 결정하는 자신의 자유 선택권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오류 투성이의 삶 속에서도 그것을 선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손길을 아름다운(?) 간섭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간섭이란 곧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간섭하듯 옳은 길로 인도하는 포괄적 배려를 뜻한다. 이 같은 설명에 즉각 반발하는 무신론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오히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악과 재앙과 전쟁을 그대로 방치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니 신의 간섭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고 거꾸로 신이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반증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 오해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자녀가 잘못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손을 들어 야단치는 성미 급한 부모가 아니다. 오히려 자녀의 잘못을 알면서도 스스로 깨달아 돌이킬 때까지 일정 기간을 인내하며 지켜보는 지혜로운 부모에 가깝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모순과 전쟁들은 하나님이 원했거나 행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한 길을 선택한 인간들이 자초한 죄의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며 내버려둔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간섭은 인간의 역사와 운명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지닌 신비스런 질서와 오묘함…, 물 한 방울 눈 한 송이에도…, 무질서해 보이는 나노 원자의 세계 속에서도 또 다시 나타나는 새로운 질서와 소우주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세계 전체를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한다.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 간섭의 손길이 없다면, 천체계를 운행하는 행성들의 모든 중력장과 빛의 세계를 지배하는 전자기장이 사라지고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의 세계가 일시에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이처럼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도 하나님의 침묵 속에 더러는 하나님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영역이 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후에는 그것마저도 간섭의 결과였음을 깨달아 알 수 있을지라도,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묵묵히 바라보며 우리 인간에게 전적인 선택권을 허용하는 부분이 있다. 마치 선악과의 선택처럼, 그들의 전 인생의 결과를 뒤바꾸는 엄청난 선택…… 다시 말해 필생의 선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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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시인과 촌장으로 활약하던 <가시나무>의 가수 하덕규씨가 얼마 전 학교를 방문하여 시와 노래로 어우러진 가을밤의 아름다운 콘서트를 가졌다. 토크쇼처럼 진행된 콘서트에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하며 아름다운 시어로 작사된 노래를 불렀다. 순수 담백한 가사를 생동감 넘치는 선율에 담아 읊조리는 음유시인의 고백을 들으며 지난 날 내 모습을 또한 반추하게 되었다. 우연히도 하덕규씨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58년에 태어난 개띠 인생으로 어둡고 답답했던 시대를 집나간 개처럼 방황하며 살았던 동지였던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니 더욱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동일한 고민으로 살아가고 있을 나의 제자들이 눈에 뜨여 그들에게도 연민의 정을 느꼈다.


나의 대학생활은 인생의 비전도 삶의 목표도 찾지 못해 고민하며 괴로워하던 허탈한 시간들로 점철된 시절이었다. 마치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에 나오는 13인의 아이들처럼 어디를 향해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며 그저 남들이 뛰니까 안 뛰면 불안해서 막다른 골목을 향해 달려가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외적으로는 군사독재의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어디론가 탈출구를 찾아야만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하덕규씨는 자신의 음악세계에서 몸부림치며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의 세계로 빠져들었을 것이고, 나는 내 취향에 맞지 않는 전공을 멀리하고 문학과 술과 여자로 도피처를 찾고자 발버둥치는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도피의 세계 속으로 점점 깊숙이 빠져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더 내면의 허무감은 심연처럼 깊어만 갔다. 육체와 정신의 황폐함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내려갔을 때, 탕자의 어렴풋한 옛 기억 속에 남아있던 아버지의 집이 떠올랐고, 마침내 하나님을 더듬어 찾게 된 것이다. 그것마저도 그와 나는 닮아 있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던 그 시절, 그 황폐해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가 부른 노래가 바로 <가시나무> 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뺐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 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인생을 돌아보기에는 아직 마흔 다섯의 내 나이가 충분치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지나온 시간들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간섭의 흔적들을 분명히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이 자리의 나를 만들어왔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목표와 비전이 없이 술에 취해 그저 친구들의 의견에 휩쓸리며 주관 없이 살아가던 나를,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마다 하나님이 조금씩 그 방향을 간섭하여 이곳까지 이르게 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문과 취향의 적성을 지닌 내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고등학교 시절 짝 친구(1)를 따라 이과를 선택했고 뜻하지 않은 공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공학박사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문과 취향적 인생을 섞어서 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선택한 친구는 의사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언제나 찾아가면 반겨주는 마음의 고향처럼 남아 있으니 결코 손해 본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방황하며 1년을 보낸 나는, 어느 겨울 아침, 술에 만취한 상태로 쓰러져 있다가 친구(2)의 전화를 받고 부스스 깨어났다. 계열별로 입학하던 때라 그 날이 전공학과를 정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피곤한 몸을 추스려 할 수 없이 집을 나섰다. 등교 길에 우연히 한 고등학교 동창 친구(3)를 만났다. 자기와 함께 같은 과로 가자고 권유를 하였다. 청동기 시대 이후로 마침내 금속의 전성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그는 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그의 주장이었지만 다른 전공을 선택할 특별한 생각이 없었던 나는 아무 이유도 없이 처음 들어보는 금속공학과를 택하였다. 그러나 전공을 선택한 후에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고민은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왜 공부해야 하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카프카와 까뮈의 노예로 남아 있었다.


친구(4)와 친구(2)의 소개로 재학 중 두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지금은 원숙한 여인들이 되었으리라 짐작하지만 사실 그 시절에는 풋내기 여학생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들과의 심각한(?) 연애 행각으로 금쪽같은 대학 시절을 모두 맞바꾸어 날려 버렸다. 그녀들과의 사랑만이 내가 처한 허무와 절망의 늪을 빠져나갈 유일한 비상구라고 그 시절 생각했었다. 실연의 상처로 헤매던 아무 희망 없었던 대학 졸업반 시절, 나는 군대를 마지막 도피처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잊고 현실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그러나 학수고대 현역 입영날짜를 기다리던 중 느닷없이 보충역 편입통지서를 받고 허탈해 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해에,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났던 58년 개띠들 중에 유난히 현역 입영 대상자가 많아서 그런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고 후에 누군가에게 들었다. 사실 그런 신빙성 없는 이야기조차 나에게는 절망과 분노만 안겨다 주었다. 그 시절은 정말 한 가지도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는 개 같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방위병으로 동사무소에 배치받아 근무하였다. 똥개처럼 이리저리 채이며 정신적 육체적인 밑바닥 인생 체험을 하였다. 민원 창구에 앉아 몽롱하게 주민등록 초본을 떼어 주던 나른한 여름날 오후였다. 마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오처럼 이유 없는 살인의 충동이 느껴지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또 다른 친구(5)가 자기와 함께 대학원 시험을 치자고 권유했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찍이 던져버렸던 교과서들을 주섬주섬 챙겨서 대학원 입학 준비를 시작했다. (이쯤에서 내가 밝혀둘 것은 대학 시절 나의 별명이 피노키오였다는 사실이다. 학교 가던 중 여우의 꾐에 빠져 옆길로 샜던 피노키오처럼 나는 내 주관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항상 친구들이 말하는 대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곤 했다. 지금 와서 또 생각해보니 친구들에 의해 휩쓸리는 인생을 살았던 내가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자신 있게 이야기하며 그들의 인생 행로를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Anyway…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릴 지 모르겠다. 그 이듬해, 함께 대학원을 가자던,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 했던 그 친구는 떨어졌는데 나는 이상하게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계획에 없던 학문의 길에 나서게 된다. 역대 대학원 입학생 중 기록적인 최하의 성적으로 입학하여 교수님들을 놀라게 했다. 지도 교수를 정하는 면접 중 내가 신청했던 교수님이 내 성적에 놀라며 박사까지 계속 공부할 의향이 없으면 나가달라고 했다. 그 말에 오기가 생겨 끝까지 공부하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나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금속공학과에서도 밑바닥을 돌던 내가 지도교수의 주문에 따라 갑자기 기계공학과 대학원 과목을 전부 택하여 들었다. 옛날 명문 K 고등학교에서도 수재로 이름을 날렸고 20대에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돌아온 그 당시 나의 지도 교수님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 대한 편애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눈 밖에 난 채로 입학을 한 나는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리고 첫 학기에 전 과목 A+의 성적을 따냈다. 그러나 그것은 공부를 위한 공부라기보다 망가져버린 내 인생에 대한 분노와 나를 무시하는 세상을 향한 복수와 야심을 불태우기 위한 교만한 몸짓이었던 것 같다.


바닥에서 정상으로 올라버린 내 성적에 놀란 그 교수님은 이제 오히려 나를 무척이나 편애해(?) 주셨고, 급기야 어느 날 나를 불러 박사과정을 위해 국비 유학 시험을 보라고 권유하게 된다. 당신이 국비 유학시험의 출제위원으로 뽑혔는데 새로 만들어진 우리 분야에서는 나밖에는 붙을 사람이 없으니 시험만 보면 된다는 것이었다. 유학에 대한 새로운 꿈을 안고 열심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그 해부터 국비 유학 시험의 전형 조건에 대학 시절의 성적이 B학점 미만인 사람은 시험 칠 자격이 없다는 새로운 조항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지도 교수님은 얼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더니 그럼 자기 밑에서 빨리 박사를 마치고 미국의 Post-Doc. 과정으로 떠나라고 했다. 박사과정에 진학한 후, 예수 믿는 여자… 지금의 아내 최문선 동무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나는 3년 만에 국제 저널에 논문을 4개 발표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내가 만일 현역병으로 군대를 갔다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을지? 박사과정으로 바로 유학을 떠났다면 아내를 만날 수 있었을지? 학위 과정으로 미국에 왔다면 그렇게 깊이 신앙생활에 빠져들 수 있었을지? 나를 믿음으로 인도했던 신앙의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 그리고 마침내 코스타 집회를 통해 인생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 여러 가지 생각이 감돈다. 그토록 하기 싫었던 전공공부를 끝까지 하도록 만들어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되었던 것이 지금 와서 얼마나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 내가 전공하게 되었던 재료공학/기계공학을 접목하는 특수한 분야가 이곳 연변과기대에서 초창기 교수요원이 부족했던 그 시절 얼마나 유용하게 잘 사용되었던지? 그리고 나의 문과적 취향으로 인해 과학사 과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음악하는 아내를 얻은 것이 이곳에서의 사역에 얼마나 큰 도움과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 속에서 빈틈없이 준비되어 왔던 일임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하나님은 젊은 시절 방황하던 나의 그 모든 일 가운데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고 준비하게 하셨으며, 그리고 때를 따라 내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사람과 환경을 통해 특별한 방법으로 간섭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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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간섭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할지라도, 내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로에서 내가 스스로 결단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한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국 땅 중국, 그 낯선 곳을 향해 나의 사랑하는 가족을 이끌고 삶의 거처를 옮겼던 그 사건이었다. 그것은 진정 아브라함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었고 체험이었다.


성경에 나타난 대조적인 인물들 가운데… 아벨과 카인, 야곱과 에서, 아브라함과 롯, 다윗과 사울 등 우리에게 교훈과 경종을 주는 인물 쌍 들이 있다. 비슷한 환경에서 태어나 분명 하나님을 알고 자라난 사람들이었는데 어째서 한 사람은 영광과 축복의 반열에, 다른 한 사람은 모멸과 멸망의 길에 들어섰는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무엇이 그들을 갈랐을까? 분명한 것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 반드시 완전한 의인이요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선택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벨의 삶에 대해서는 성경에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서 차치한다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야곱과 다윗은 그들의 인생 속에서 많은 허물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성격적 결함이 있었으며, 떡의 문제 즉 물질과 여자 혹은 명예심에 의해 다투기도 하고 시험을 받아 유혹에 빠졌던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이었고, 그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떡 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택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소유보다 존재를 더 귀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졌던 그 귀중한 장자권을 육신의 정욕에 따라 떡 한 조각과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다. 구약시대의 장자권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을 이어갈 권리를 의미하기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요 백성이 되기 위한 영생의 선택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만홀히 여긴 에서는 떡 한 조각을 소유하려다가 영생을 놓쳐버린 망령된 자가 되고만 것이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났던 아브람과 사래는, 중도에 정착했던 하란 땅에서 살아가던 중 다시 한번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두 번째 부르심을 받는다. 문화 도시 하란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던 그들에게 앞길을 알 수 없는 척박한 새 땅을 향해 다시 떠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 사이에는 그 문제로 인한 부부싸움도 많았을 것이고, 하란에서 모은 많은 소유물들과 그곳에서 쌓고 누렸던 커리어들을 두고 떠나기 아까워서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택했던 것은 그 많은 소유물들을 바리바리 싸서 낙타 등에 싣고 기나긴 대상 행렬을 이루며 사막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창 12:5) 마치 우리 부부가 10년 전 눈물의 기도 가운데 40피트 컨테이너에 각종 세간과 피아노 오르간 등 그 많은 이삿짐을 싣고 중국 땅을 밟았던 것처럼. 아브람과 사래에게 소유의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요, 그것을 초월한 인생을 살았던 것도 아니지만, 그들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던 것은 그 모든 소유의 문제보다도 하나님의 기업을 향한 부르심을 더 소중히 여겼던 그들의 믿음과 순종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축복을 누린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것은 바로 우리를 소유의 굴레에서 이끌어 내어 영원한 존재의 세계로 옮기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다. 영원한 기업을 향한 그 목소리를 우리는 소명이라고 부른다. 그 음성이 들릴 때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그리고 조심해야 한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떡 한 조각으로 인해 영원한 기업을 놓치는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우리 인생 속에 나타나는 필생의 선택 앞에서 깨어 있도록.


초창기에는 항상 한국으로 돌아갈 궁리만 하며 살던 아내가 최근 들어서는 마침내 이곳에 마음을 붙였는지 아니면 체념을 했는지, 이제는 연길이 자기가 살 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속으로 흐뭇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아내의 취향대로 깔끔하게 꾸며놓고 안정된 생활 공간을 갖게 되었다. 예민한 성격의 아내에게는 그것도 그런 대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평양 프로젝트의 일을 맡게 되면서 아내는 몹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마치 10여 년 전 포항에서의 악몽이 되살아난 듯, 안절부절못했다. 지금 당장 어딜 떠나는 것도 아닌데,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켜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날 저녁, 크게 한바탕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왜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하느냐고. 왜 당신은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만 맡아서 하느냐고. 이러다가 결국 옛날처럼 또 떠나자고 할 것 아니냐고… 이제 자기는 다시는 아무데도 떠날 수 없다고. 이제 겨우 마음 잡았는데… 엉엉… 아내는 한번 울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 끝날 때까지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냥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완전히 어린아이처럼 쏟아내야지만 겨우 마음이 풀린다. 아내의 울음을 바라보며, 내 안에도 두려움이 생긴다. 정말 이곳은 우리에게 하란 땅일까? 가나안이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내처럼 예민한 여자가 이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어쩌면 맞을지도 몰라… 또 다시 떠나야 한다면? 겁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니 만일 평양에 대학을 세울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북한의 청년들을 가르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어떤 떡 조각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일이고 나를 향해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업이 될 것이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그 일을 이루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연변과기대에서 이루었던 기적같이… 제2의 출애굽처럼 수많은 무리들이 짐을 싣고 홍해바다를 건너 평양 땅을 향해 움직여 가는 새로운 환상과 기적을 바라본다. 오 주님! 그 일을 이루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