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범] 디아스포라의 기도

아빠, 아빠가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에요.
하나님, 우리 아빠 대신 내가 대신 죽을수 있어요?
Daddy, I love you. Are you alright?


지난 내 인생 가운데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고 느꼈을때에, 내가 내 부모님들을 떠난후 이땅에 내게 허락하신 소중한 공동체인 내 가족들이 내게 들려준 위로와 사랑의 언어들이다.


Brian, our company need you more than you need.
You are our prayer.
God never ever give you up


조국을 떠나 이땅 미국에서 나의 인생의 절정기를 보내며, 나의 삶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나의 직장 AT&T Office에서, 3달만의 오랜 병상에서 다시 돌아온 그날, 나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환영하던 동료들과, 그리고 세계 방방곡곡에서 나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 해준 분들의 그 사랑의 Message를 나는 오늘도 있을수가 없다.
또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의 사랑하는 지체들과 청년들의 끊이지 않는 사랑의 기도가 내게 진정한 기도의 위력을 체험케하신 하나님의 인도 이셨다.


남의 신발을 신어 보지 않고는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속담에 있었던가.
많은것을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부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앞으로의 나의 삶를 통하여 그 하실일을 기대해보는 과정이었을까? 4년전 갑작스런 뇌종양의 발견으로 살아있는것이 여기까지만 일수도 있다는 생각과 육신의 연약함과 그 어려움과 그리고 건강함의 축복, 또 과거 45년간 내가 누렸던 많은것들에 대한 생각을, 이제 내가 그 신발을 신어 보고서야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울러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내게 많은것을 알게한 내 조국 한국은 우리가 모두 겪었던 여러가지 어려움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것을 바라게하는 믿음을 갖게 하였고, 과정의 소중함보다는 결과를 우선으로 생각하며 빨리 빨리라는 문화적 유산의 관습을 이 땅 미국에서는 삶을 통하여 인내와 기다림을 을 알게 하시고 과정과 정직의 소중함을 깨달아 변화의 성숙으로도 바꾸어 옮겨 주셨다.


이제 이런 소중한 삶의 체험을 통하여 깨닫게 하신 많은것들로 지나온 시간보다는 앞으로의 남은 삶을 이땅 미국에서 그리고 또다른 어느곳에서 나의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살것인가를 생각케 하여 주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이땅에서의 삶의 목적과 하나님이 누리게 하여주실 이땅에서의 행복외에 또다른 소망과 축복을 을 어느곳 누구에게나 말할수 있게 하실줄로 믿는다.


나를 낳아준 부모님과 함께 했던 25년간의 조국에서의 삶, 제한되었지만 익숙했던 많은것들이 나를 감싸고 있을때, 더 단단하여 깨어질수 없는 상황이 오기전 내 조상과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새로운 땅 미국으로 옮겨 흩어지게 하심을 경험 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그 햇수 만큼의 시간을 이땅에서 그리고 여러곳에서 보내게 하시고 내게 많은것을 보고 경험하게 하셨다.이제 돌아보면 내가 스스로 상상하고 계획할수 없었던 디아스포라의 삶의 여정 이었다.


부모님들을 통하여 믿음의 유산을 얻게하시고 하나님을 일찍 알게 하시고, 또 믿음의 공동체를 통하여 소중한 만남인 귀한 믿음의 선배들로 부터 양육 받고 도전 받게 하셔서 스스로 예수를 주라 고백케 하신 그 하나님의 계획이, 이곳으로 흩어 옮기신이후 이곳 이민교회에서 후배들을 사랑하며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게 하여 주심으로도 인도 하셨다.


내게 주신 가정을 통하여 예수를 섬기는 또하나의 가정 공동체를 이루어 내게 맡기신 자녀들을 하나님의 사람들로 양육케하시는 일도 맡기셨다.
이곳 미국에서 좋은 환경과 여건으로 인하여 자신이 소수민족인 한국인이라는 Identity와 우리가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성장하기엔 여러가지가 쉽지 않았다. 함께 예배하며 기도하는것을 소중하게 보여야 했고, 이곳에서의 삶가운데 나의 어려움과 실수와 직장에서의 모든 문제들을 자녀들에게 고백하고 도움울 구하는 일을 하여야만 했다.
자녀들에게 직장에서의 Meeting 때 준비할 Presentation material도 보여주고 교정도 받았고, Speech 연습도 아이들 앞에서 하곤 했었다. 신문과 잡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영어로 설명하여 주는 연습 대상이었고, 그들은 내게 Sports, Movie를 Update해주는 귀한 Entertainer 가 되어주어 어떤 모임에서도 내가 대화에 참여할수 있도록 하는 그런 도우미와 나눔의 대상들 이었다.
내가 교회에서 교사로 Mentor로 섬겼던 학생들과 청년들이 이제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와 함께 교제하며, 또 우리 자녀들의 선배로 Mentor로 아름다운 관계를 연장하는것을 보며나 실수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방정식을 보게하셨다.


미국이 아닌 다른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느낀점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온 한국인에 대한 좋은 Respect를 경험한적 이 많은데, 이것은 미국이 강대국이며 영어의 상업적 가치뿐만 아니라,흩어져 있던 한국인이기 때문에 가질수 있는 여러가지 소중한 복합적 가치임를 알수 있었다.
이곳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라나는 우리의 다음세대들과 이 곳에서 젊은 시기에 학업과 훈련을 받는 청년들이 이세대에 모세의 마지막 사역40년을 위하여 모세를 궁중과 광야에서 지내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시며 하나님의 장막을 넓히시며,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쓰실 또하나의 목적 있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계획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한다.


갈렙이 이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라고 가도하던 그 기도가 우리의 육신적 나이와 환경이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청년들이 잊지말아야할 디아스포라의 기도이다

[이영길] 디애나대학 어느 코스탄 교수의 이야기

우리들의 삶은 “이야기”로 표현되어질 수 있으며, 우리의 이야기는 또한 삶의 모습을 잘 조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는 삶에 의미를 가져다 주며,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누군지를 깨닫게 되기도 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야기를 아주 잘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참으로 위력이 있기 때문이다. eKOSTA에서 내게 글을 부탁할때도 “…. 몇몇 코스탄들의 이야기들을 실어 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 복음에 빚진자로서 … 이땅의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가정, 학교, 직장등에서 격게되는 고민과 갈등을 나누어 주시면…”이라고 하였다. 즉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것이다. 내게는 예수님 때문에 할이야기가 많이 있음으로 쾌히 털어놓아 보겠다라고 답하였다.


나의 이야기


본래 나는 운동선수 였다.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초등학교 (당시 국민학교) 2학년때 부터 빙상을 시작하여 한국체육대학졸업할때까지 앉아 있는 시간 보다 뛰거나, 자전거 타거나, 얼음위에 서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다른 운동선수들과 같이 수업을 거르거나 오전수업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고등학교시절 학교에 나간 날 수는 한달이 채되지 않을정도로 운동만 하였다. 따라서 운동으로는 제법 유명해져서 나를 나로 정의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운동선수” 였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운동선수=무식한이”로 정의되어 지는 상황이었기에 누가 무식하다는 말만 내게 사용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두들겨 패는 자존심에 큰 문제가 있는 젊은 이였다. 그 자존심의 문제는 운동선수로서 “1등 제일주의”로 남을 이겨야만 살아 남는 세계관을 형성 시켜 주었다. 그같은 정신으로 나는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그덕분에 예비고사 (지금의 학력고사)는 점수와 관계없이 빙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은 별 불편함 없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고등학교 1학년때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방침에 따라 고3학년때에는 남들과 같이 시험은 보아야 했고 에비고사에서 나는 120점의 점수를 받았다. 그점수는 당시 그냥 아무거나 찍으면 나올 수 있는 점수 였던것 같다. 왜냐하면 매 과목당 2-3분 걸쳐 다 응답을 하여서 받은 점수 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나는 그렇게 소원하던 1980년 동계올림픽을 나갈 수 없게 되자 운동을 그만두고 갑자기 교수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워낙 기초가 없었던 지라 나는 병원에 몇번 입원할 정도로 “무식하게” 공부하였다. 덕분에 연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원과정중 한번 더 입원했는데 고향인 원주 연세대학 병원에서 나의 병을 다룰 수 없다고 하여 서울대학병원으로 진급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서울대 병원에서 한달을 누워 있으며 젊음을 누워지내기가 너무 한심해 우연히 당시 지하실에 있던 교회에서 예배드리게 되었고 건강을 달라고 “무식하게” 기도 했다. 은혜로 수개월개월 후인 1984년에 미국의 University of Oregon으로 유학오게 되었다. 아름다운 Eugene에 도착하자 마자 주변에 “예수쟁이”들이 벌떼 처럼 달려 들었다. 특히 Nevigator아이들이 많이 못살게 굴었지만, 모국에서 처럼 사람을 구타할 수 없어 많이 참았다. 덕분에 예수님을 많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김치찌개를 아주 맛있게 끊여 대접하는 한국교회에 음식때문에 정기출석 하였다. 그당시 나는 교회 예배하러 간것은 결코 아니었고 한국식당쯤으로 생각 하였다. 제법 단골손님이 되자 교회에서는 나를 서리 집사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 직분을 제대로 감당해 보려고 성경공부를 부지런히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즈음에 예수님을 잘 믿고 있었던 아내를 여름방학중 모국에서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다. 집사라 믿음이 좋은줄 알고 결혼했던 아내는 결혼후 바로 내게 믿음이 없음을 알고 새벽기도를 하며 나를 위해 중보하였고, 나는 그런 아내를 심하게 핍박하였다 (핍박속에 구타는 없었음을 명시한다). 여하간 공부를 열심히 한덕분에 1990년초에 여가학 (Leisure Sciences) 분야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국에서 직장을 빨리 잡아보려고 졸업도 하기전에 귀국하였다.


당시 여가학 박사가 참 드물었던 지라 쉽게 교수자리 잡을 수 있을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출신학교가 운동은 잘하지만 공부로 별로 유명세가 없는 지라 나는 모 여자전문대학교 야간 수업에서 교양과목 하나를 가르치며 나머지 시간을 집에서 아이를 보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아기를 키우고 밥만하던 아내는 귀국전부터 연세대학에서 강의자리를 여러개 받아놓은지라 나는 아내를 외조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놀이터에 아이를 데리고 가면 아빠는 나 하나였고 엄마들의 눈총은 나를 얼마나 부끄럽게 하였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낮추심이 그곳에서 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을 그당시에는 몰랐었다. 낮추심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시는 방법이었고, 그것은 아내의 기도 응답이었다. 당시 아내는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같은 미국으로 다시 보내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를 만들어 달라고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The University of Georgia로 Post-doc하러 오게 되었고, 그곳에 있던 몇몇 형제들의 열성어린 중보와 섬김, 아내의 기도 등으로 어느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마음 활짝 열고 영접하게 되었다. 캠퍼스 산책중 갑자기 그동안 귀로 듣고 간간히 성경공부를 통해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성경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오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기쁨을 체험하였다. 나의 죄가 하나님께 얼마나 죄송했던지,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나를 대신 하여 돌아가셨다는 사실로 인해 나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울고 웃는 미친사람처럼 캠퍼스를 걷다가 결국은 창피하여 연구실에 들어와 하나님께 감사와 회개기도를 한참드렸다. 학자로서 느낌보다는 사실을 중요시 하는 사람이었지만 성경의 내용들, 특히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 참으로 분명한 사건으로 깨닫아 지는 은혜를 체험하였다. 그뒤 나의 세계관은 온전히 바뀌고 성경은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계속 다듬어가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의 성공을 무섭게 추구하던 사람이 남을 사랑하고 섬기는 기쁨을 서서히 체험해 가고 있었다.


그뒤 Florida International Univeristy와 Ohio University 에서 각각 3년씩 교수로 보냈다. 특히Ohio University에서는 이근상 목사님의 스파르타식 성경공부, 전도훈련, 새벽기도 등으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처음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했고 훈련 받았다. Ohio University에서 2년째 되던해 지금 재직하고 있는 Indiana University에 교수채용 공고가 났었으나 새벽기도하던중 하나님께서 계속 남아있으라는 인도함 으로 지원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자훈련을 계속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고 순종하였다. 인디애나대학은 사실 나의 분야로서는 미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라 이미 다른 사람을 채용했다라는 소식을 학회에서 들었을때는 순종을 잠시 후회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소위 내노라하는 좋은 학교는 기존의 같은 전공 교수가 은퇴하거나 그가 다른 대학으로 옮기지 않는한 다시 교수채용기회가 없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한학기에 3-4과목 가르쳐야하는 Ohio 대학이 주님께서 나를 있으라 한 대학이기에 그곳이 제일 좋은 대학이라고 믿으며 기쁘게 남아 있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즉 “좋은대학의 교수”라는 육신의 정욕을 믿음으로 포기한것이었다.


나는 계속 제자훈련 받으며 그곳 생활을 철저히 즐겼다. 성경공부와 새벽기도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이 었는지 모른다. 그러던중 3년이 다 채워지기도 전에 Indiana University에서 편지가 왔다. 지난해 오기로한 교수가 계약서에 사인을 하였지만 오기를 거부해서 다시 교수채용을 하니 응모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시 기도하며 인디애가 가는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일까 여쭈는 가운데 평안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마침 구약과 신약을 개관하던 성경공부의 교제도 거의 끝나는 상태이기도 했다. 나는 지원 하였고, 인터뷰하자는 제의를 한달뒤 받았으며, 그뒤 학교로 부터 공식적인 Offer를 받았다. 그러나 제의를 그자리에서 수락하지 않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려고 1주일의 시간여유를 부탁했다. 뛸듯이 기뻤지만 나와 아내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 하려고 금식하며 기도했다. 6일째 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었으나 7일째 여호수와 1장의 말씀을 통해 떠나도 된다는 하나님의 “결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뒤 이곳 인디애나대학에 와서 한인기독 학생회 (Indiana University Korean Christian Fellowship 혹은 “목요모임”)의 지도교수를 하며 매주 목요일 학생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매주 30-40분의 설교를 맡고, 그 설교를 위해 매주 10-20시간을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한다. 강의 준비는 몇시간 안해도 지난 여러해 동안 했던 것이고 평소 늘 책과 논문을 읽고 새로운 글을 늘 쓰고 있었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말씀준비는 늘 힘들다. 그러나 힘든 말씀준비는 교수로서, 미국에 사는 “이방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내는 귀한 방편이 되었다. 오하이오 대학에서 tenure를 받았지만 금년 이곳대학에서 다시 tenure를 따낼 수 있었던 것도 말씀준비하고 설교하며 받은 하나님의 은혜덕분이 었다.


지금까지는 나의 짦막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죄인이었던 때의 나의 모습이 있고, 구원 받는 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구원 이후에 어느 목자의 헌신어린 제자훈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캠퍼스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 죄인이었을때의 삶과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간단히 이야기를 하였지만 1984년 유학온 이후의 이야기는 20년간 이방에서의 삶에 대한 재빠른 요약이다. 나는 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eKOSTA에서 요청한 몇가지 주제를 다룸으로 나의 이야기를 좀더 정리해 보려 한다.


이방에서의 삶


삶의 환경 측면에서 보면 미국에서의 삶은 흘어진 나그네의 삶, 즉 이방 삶이다. 언어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에 있어서 우리와 친숙한 한국의 삶의 환경과는 참으로 다르다. 뿐만아니라 백인중심의 사회에서 얼굴 색갈이 백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면 소수민족에 속한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소수민족의 삶이기도 하다. 물론 미래의 미국은 소수민족이 현재의 다수인 백인과 비슷해질것으로 추정하는 자료들이 많이 있지만, 과거와 오늘의 현실로 보면 미국에서 공부하거나 살고 있는 우리는 소수에 속한다. 특히 유학생 시절 언어가 능숙치 못해 어려움 많던 시절에는 어른인데도 언어의 수준을 나이 수준하고 비슷하게 맞추어 대하려는 백인들을 대한적이 있다. 따라서 이방의 삶은 매끈한 삶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껄끄러운 삶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신앙의 측면에서 보면 낮설고 광야같은 이방의 삶은 우리의 신앙을 단련하는 훈련장소 같다. 평소 의지하던 부모, 형제, 친척이 이곳에 없으며,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즉 의지할 곳이 별로 없는 광야 같이 황량한 곳이다. 특별히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머리가 비상하지 않은 나같은 사람에게 학업이나 교수의 삶은 결코 안락한 삶이 아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의 뒤에 서고 싶지 않고, 앞서자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능력이 부족한 나는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뿐아니라 미국에서 학생으로나, 교수로서 다수인 백인을 섬기며 이끌어 나가려는 삶은 늘 편안 하지만은 않다. 지난해 이곳 캠퍼스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신 높은뜻 숭의교회의 김동호 목사님은 신앙생활을 “유격훈련장”으로 비유 하신적 있다. 나는 현재 매학기당 두과목씩 강의 한다. 그외 박사논문 지도 및 학생 상담, 여러 회의 등 분주한 교수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매주 목요일 말씀을 전해야 하기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성경을 보면서 말씀을 준비해야 한다 (두과목 강의 준비보다 거의 두배의 시간이 들때가 많다). 때로는 지역교회 및 다른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수양회 강사 혹은 지역교회 목사님 출타시 가끔 말씀을 전하는 역할로, 그리고 내가 속한분야의 주요학술지의 편집장으로, 1,500명 교인이 나오는 미국교회의 장로로, 세아이의 아빠로,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는 아내의 동업자/동역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 적힌 모든 역할은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단순한 일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조금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김동호 목사님이 삶은 유격훈련장 으로 비유하셨을때 나는 크게 “아멘”하였다.


복음의 차원에서 보면 이방의 정의는 갑자기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 믿지 않는 이들이 이방인이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된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을 감싸주고, 사랑하고, 섬김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현장이다. 믿는 자들이 미국에서 유학하며 이방백성들, 즉 복음에 눈먼자들, 세상 성공과 물질의 욕심이라는 교도소에 같인자들, 상처로인해 억눌리고 삶을 절뚝거리며 사는자들은 복음으로 자유케 해야하는 귀한 사명을 가진 제자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다.


정체성


미국에서 태어난 우리아이들, 특히 대학진학을 앞둔 큰 아들과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딸아이의 경우 한때 정체감의 혼돈으로 힘들어 한적이 있다. 영어는 미국아이들 같이 하고 미국에서 17년, 14년 살았지만 얼굴은 동양사람이기에 온전히 미국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도 아닌 “between and betwixt” 혹은 “limbo”의 상태인 자신의 정체감을 놓고 고민을 털어놓은적 있다. 앞으로 결혼을 반드시 한국사람과 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묻는 아이들을 대하며 정체성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아이들에게 꺼내 놓았다.


나는 한국인이기에 앞어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나를 나로 정의해주는 정체감은 그리스도인으로 표현되어 져야만 한다. 아이들에게도 그들이 민족적 차원에서는 한국인임을 분명히 인지 시키지만, 정체성의 문제에서는 그들이 Christian (두아이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임을 강조하였다. 결혼도 한국사람, 백인, 흑인과 결혼하지 말고 좋은 그리스도인과 하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같은 설명은 아이들을 자유케 한것 같았다. 다시는 정체성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감사히 여긴다. 예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현재의 삶속에 교만할 필요도 없고 비굴할것도 없어졌다. 교회에서 미국인 형제.자매들을 대할때도 인종을 먼저 보지 않고 “그리스도인”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혹 인종 문제로 인해 나와 벽이 있을지 몰라도 내가 그들을 대하는데는 큰 장애가 없다. 내게 있어 그들은 백인도, 흑인도 아닌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 첫날 학생들에게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반드시 발표한다. 그리해야 믿는자로서 예수님이름 때문에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표해야 매번 강의를 철저히 준비할 수 있고 또 학생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강의 첫날에 이렇게 발표한지 약 10년이 되었지만 어느누구도 이같은 발표로 인해 시비를 걸고 나온이는 아직 한명도 없다. 오히려 나를 좋은 교수로 인정을 해주어서 금년에는 Trustee Teaching Award까지 받았다.


고민과 갈등


흩어진 나그네의 삶, 그리고 선택된 백성의 삶은 하나님과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안되는 긴박한 영적전쟁속에서 살아가는 삶 같다. 따라서 순간순간 기도하며, 말씀으로 온전히 서 있지 않으면 일시적 편함을 위해, 외로움을 달래기위해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려고, 혹은 잠시의 성공을 위해서, 잠시 예수님을 부인하고 세상과 타협하며, 혹은 세상에 속한 것에 예배하며 살아가려는 모습으로 변화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고 있는 중간에도 나는 이같은 영적전쟁을 체험하였다. 아내는 이곳 Bloomington지역에서 The UPS Store라는 조그만 사업을 하고 있고, 남편인 나는 동업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사업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 있기에 동업자가 아니라 동역자라는 관점에서 서로를 대한다. 이곳 지역사회에서 사업을 하지만 우리들은 늘 캠퍼스로 들어오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꾸준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이곳 학생회관에 있던 The UPS Store가 5년 계약을 마치면서 학교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인디애나 대학에서는 비슷한 업종을 계속해서 학생회관에 유치하려고 사업계획서를 받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하였고 마감시간 2시간을 앞두고 있던 때에UPS본사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간 아무말 없다가 갑자기 학교에 제출하는 사업계획서는 본사의 차원에서 허락을 내려야 지원할 수 있다고 무작정 통보하는 것이다. 우리는 준비한 것을 그대로 제출하였고, 그들은 약 30분 후에 응답을 하였다.


응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계획서에 적힌 사명진술 (Mission Statement) 가운데 잠언 11: 25절 말씀인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는 말씀을 빼어야 사업계획서를 허락해준다는 것이다. 굳이 성경말씀을 그곳에 적지 않고도 말씀대로 살면 문제가 별 문제가 없겠지만, 우리는 이미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고 그 말씀을 사업의 근본 사명으로 하고 있는 터이라 말씀을 뺄 수 가 없다고 맞섰다. 당연히 UPS는 허락치 않는다라고 더 강하게 맞섰다. 말씀을 시키는 대로 빼버리고 그냥 말씀대로 사업을 하면 되지 않겠는냐 하는 유혹이 나를 엄습했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그같은 행위는 일본사람들이 한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에게 강요했던 “신사참배”와 다를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순간을 영적전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는 사업계획서는 내지 않겠다라고 했다. 한편 하나님은 지혜를 주셔서 마감시간인 오후 5시전 대학의 담당자에게 전화로 문제의 진상을 설명함으로 제출날자를 하루 연장하였다. 바로 그때 UPS에서는 전화가 왔고,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삭제한뒤 우리를 대신해서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고 통보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날 오후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우리의 계획서를 학교가 검토할것을 요청하며 제출하였다. 한편 학교측이 우리의 계획서가 아닌 UPS회사의 계획을 선택할 경우 우리는 학생회관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통보하였다.


흩어져 살고 있는 선택된 백성들이 받게 되는 갈등은 배경만 다를뿐 나와 아내가 체험한 영적 전쟁과 별 다름 없는 비슷한 성격의 것이다. 돈을 하나님 대신 잠시 섬기는것, 학위를 하나님 대신 섬기는 것, 육신의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잠시 버리는것, 직장을 얻기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등지는것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잠시의 성공을 위해 세상과, 악한 세상의 영과 타협하고 만다. 복음을 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학생활중, 나그네의 삶인 광야의 삶속에서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된다.


이야기를 마치며


나의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채 살던 운동선수의 삶으로 시작하여 미국에 유학와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알게됨으로 이제 선택된 백성으로, 복음에 빚진자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로 마치고 있다. “쥐뿔도 가진것이 없으면서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좋아서 살아가냐?”라고 묻던 어머니는 2003년 미국 방문중에 구원받고 지금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1995년 나의집을 방문 하였던 여동생 역시 “오빠와 언니는 무엇때문에 저렇게 기쁘게 살지?”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가 귀국을 며칠 앞두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지금 지구촌 교회에서 주일학교 선생으로 섬기고, 자신의 시어머니를 전도 하여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 그외 여러 학생 및 방문 교수들을 도처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지금 그리스도인이 된 형제.자매들이 여럿이 있다. 이들은 또 여러 곳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박사학위 마치고 교만의 어둠속에 살던 나를 하나님의 흩으심으로 조지아와서 하나님을 만나고, 이제 대학 교수라는 직업을 주셔서 아직 은혜에 이르지 못한자를 향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높여드림으로 나의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김은영]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살며
생각하며

남들도
다 그러는데 뭐

크리스천으로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 유학시절
코스타 96에 참가했을 때 세미나강사 중 한분이셨던 엄기영 목사님께서 하신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라는 강의에서 인상깊게 들은
부분이 떠오른다. 엄목사님은 교회가 금연, 금주운동이나 하고 바른생활 책에 나오는 삶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타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면서 크리스천의 다른 점은 내 안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여 그 분이 원하시는 삶을 찾아가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고자 하는 것
이라고 하셨다. 한 마디로 세상적인 기준이 어떻든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것이다. 새봄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명령하신 삶을 살고 있는지 부끄러움만 가득하다.

소위 “바르게” 혹은 “떳떳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가장 걸리적거리는
종목이 “남들도 다 하는” 부분이다. 항상 지적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불의와 뒷거래가 너무나 당연시되어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바보취급 당하고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에 정직하지 않고 떳떳하지 못한 방법의 유혹을 받게
되는지 모른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수를 써서” 조금이라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에 대한, 속칭 잔머리는
누구나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살다보면 몸에 배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 이런 근성은 유학시절에 더 많이 나타나는데,
유학생들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그곳을 만끽하고 일종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에 대해 이상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한국보다 앞선 경제와 문화에 대한 컴플렉스일까? 아니면 비싼 등록금을 내는 데 대한 분풀이일까? 그것도 아니면
남의 나라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단순한 무감각일까? 게다가 유학시절에는 한푼이 아까운 때이니 돈과 관계된 것이라면 서슴지 않고
거짓말과 불법을 저지른다.

유학시절 나는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이 어떠 어떠한 편법을 사용하면
세금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서로 가르쳐 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유학생들이 자동차보험료를 적게 내기 위해
심지어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하여 기혼자의 보험료를 적용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명백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소하게는 금지되어
있는 지역에 들어가 나물을 캔다든가, 어찌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실제로 큰 이득을 얻는 것도 아닌 불법들을 아무
감각없이 행한다. 실은 이런 일은 미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한국인이 가는 곳엔 어디나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독일유학을
마치고 왔는데, 자기가 살던 지역은 야생동물들을 위해 베리(berry) 종류의 열매를 따지 못하게 되어 있어 그것들이 강가에
잔뜩 열려 있었는데 그걸 따다가 과일주를 담곤 했다고 말했다. 따지 못하게 되어 있는 걸 따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그는 다들
그렇게 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 다들이란 게 전부 한국사람들이죠?”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여 주었다. 마치 나는 매우 정직하고
똑바르게 산다는 듯이.

미국유학 마지막 무렵 어느날 나는 Kinko’s에서 복사를 하다가 누군가가
복사기 옆에 내려두고 간 counting machine을 발견하였다-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내가 유학할 때만 해도
복사 체인점인 Kinko’s에서는 이 counting machine을 복사기에 꽂고 원하는 만큼 직접 복사를 한 후 그것을 계산대(cashier)에
들고 가면 거기 나온 숫자대로 복사비를 계산하여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그 counting machine엔 숫자가 ‘4’로 나와있었다.
그걸 보면서, ‘어떤 양심없는 인간이 치사하게 넉 장 복사하고 돈도 안 내고 저걸 여기 내려두고 갔나’ 하는 멸시의 마음이 생겼다.
다음 순간, 거의 책 한 권은 될 법한 많은 분량을 복사하러 간 내 머리에 번개같이 스친 부끄러운 생각이 있었다. 이거 다 복사하고
계산할 때 저거 가져가면 넉 장 값만 내겠네? 아, 나도 내가 비웃던 사람 중 하나에 불과하였다. 아니, 그는 넉 장 값을 떼어
먹었지만 나는 약 백장 값을 떼어 먹을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더 가증스럽다.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은 언뜻 명확하지 않아 보일 지도 모른다. 성경책에
인생살이의 모든 경우가 미주알 고주알 적혀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지표가 되는 거대한 원칙들을 성경을
통해 이미 가르쳐 주셨고 또 그의 속성을 아는 우리들은 순간 순간 냉정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기준에서의 선(善)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분명 타지(他地)이고 미국의 법이나 상식에 우리는 민감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네 나라에서만 착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남의 나라에선 조금 맘대로 해도 된다”라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으실 거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큰 이득이 아닌 것들, 설사 큰 이득이라고 하더라도 워낙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손해보는
듯한 느낌이 좀 감소되어 줄까? 율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나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그리고 나
자신도 밝아지는 마음을 갖기 위해 조그만 일에도 하나님의 기준을 생각하고 자제하여 산뜻한 봄을 맞이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