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근상] 겸손한 예배자 vs 속물 예배자

이코스타 2004년 8월


예배안에서 우리는 많은 현상과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예배안에 찬양과 경배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그리 낮설지 않은 모습이다. 2주 전에 새들백에서 열리는 워십컨퍼런스를 다녀 왔다. 6월말에는 칼리지 코스타를 섬기고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그 후에 열린 이 워십컨퍼런스는 나로 하여금 예배와 찬양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불어 넣기에 충분했다. 첫 날 들어가는 순서부터 마지막 모든 순서까지,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일 저녁마다 준비되어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찬양팀들이 와서 예배와 콘서트(Festival)로 드려졌다. 전 세계에서 모인 3500여명의 사람들은 이들을 통하여 예배안에 깊숙히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보았다. 헌데 둘째 날, 기대치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젊은 대학층과 Youth들에게 인기있는 한 밴드의 시간이었다. 미국내에서 앨범을 5백만장이나 판매한 이 밴드를 편의상 J 밴드라고 하자. 개인적으로 나 역시 많이 좋아하고, 기대했던 시간이었다. 둘 째 날 저녁시간, 그리고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잡혀있는 이 J 밴드의 첫 멘트는 이것이었다. “내가 듣기에 너희들이 노래를 좀 한다는 데, 얼마나 하는 지 한번 들어보자”. 순간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갑자기 썰렁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왜냐하면 바로 앞 순서에 있던 다른 S 밴드의 멘트가 아직 사람들의 귀에 생생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 선 것이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저희는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허나,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같이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러한 S밴드의 멘트와 전혀 다른 J 밴드의 첫 멘트는 곧장 회중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워십컨퍼런스에 참석한 반 이상의 사람들이 순서가 끝나기 전에 나가 버렸던 것이다. 나 역시, 거기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곡들, 자기들만 아는 곡들을 연달아서 해 대는 이들에게 이미 겸손한 마음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세상에서 보여주는 한 공연뿐이었다. 우연하게 컨퍼런스에 참석한 한 미국인과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날 J 밴드만 유일하게 자기들만의 곡을 불렀던 밴드였다는 것이다. 다른 밴드는 회중들과 함께 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이 날 이 밴드의 태도는 교만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사 역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일로서 부담감으로 찾아 올때가 많이 있다. 늘 하는 것이기에 준비하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는 아직도 찬양인도를 하기 전에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 해야 할 정도로 긴장을 한다. 내 나름대로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할 때라고 할 그 시기는 두 가지 현상을 늘 생각하는데, 하나는 스테이지, 즉 예배를 드리는 무대에 익숙해져서 연예인처럼 행동할 때 나는 예배와 찬양인도를 그만 두어야 하고, 끝나고 나서 짐 정리를 할 때 하기 싫어서 도망다니기 시작할 때 나는 찬양인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게 처음 예배와 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신 좋은 선배들은 항상 그 일들을 마다 하지 않으셨다. 예수전도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찬양인도를 가르쳐 주셨던 고형원선교사님은 늘 허리에 통증이 있음에도 항상 무거운 것을 나르는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예배가 끝난 후에도 그 분은 예배를 계속해서 드리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 배안에서 찬양의 역활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많이 있다. 일단 나 자신부터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예배안에서 찬양이란 한 가지의 필요요소이지 절대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10년이 걸렸었다. 그 전까지 찬양인도자였던 나는 찬양을 인도하면서 가졌었던 모든 자존심이 한 번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순서를 위해서 예배가 존재한다고 믿는 분들이 계신다. 허나, 이러한 착각이 있는 이상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예배를 받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겸손한자의 예배를 원하신다.

[조근상]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서

이코스타 2004년 6월


지난 주에 새들백 교회를 갔었다.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우리 집에서 불과 1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였는데, 불행히도 캘리포니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리에 익숙지 않은 지라 몇 번이나 간다고 했었지만 가지 못하고 이번에 토요일 찬양 팀 연습을 마치고 갈 수 있었다.


좋은 예배를 드리고 나면 정말로 나의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내 자신이 예배의 감격 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신학적인 논의를 떠나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리고 나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러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부자동네에 돈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잘 해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전에 내 눈은 자연스럽게 새들백 교회의 예배인도자인 릭 무쵸를 보면서 그가 인도하는 찬양을 보면서 도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사십이 넘어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한다는 것은 한국적인 사고방식에는 이제 예배와 찬양인도는 그만 두고,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그 자리에 아직도 기타 통을 매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도전이었다. 예배와 찬양인도를 잘 한다고 하는 것 보다 “릭 무쵸”는 찬양인도를 할 대상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회중을 위한 배려와 그리고 회중 역시 인도자에 대한 신뢰가 느껴졌다. 물론 한 번 가 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릭 무쵸”의 새로운 앨범이 나온 것을 광고할 때, 소개해주시는 목사님이나 회중이 정말 축하해 주는 것을 보고 처음이지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많은 목사님들이 내게 조언을 해 주는 말씀이 있다. 기타 통은 30대까지 메고(예배와 찬양인도하는 것을 소위 딴따라식으로 표현해서), 그 이후에는 말씀을 선포해야 장래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 돌아서 보게 되면 그렇게 말씀하신 그 교회에서는 정말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대 부분의 교회의 예배와 찬양인도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영성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라고 말한다면 물론 노래를 잘 하는 것과 요즘은 밴드를 이끌 수 있는 음악적인 능력을 이야기 할 것이다. 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주 우선권이 바뀌지만 하여간 예배와 찬양을 인도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필수 요소이다. 결국 자연스럽게 세 번 째는 그에 따른 결과로서 모든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야 한다. 남녀 노소에 관계없이, 어느 상황에서든 예배와 찬양인도를 해도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그런 사람이 정말 몇 명이나 있을 까 생각한다. 그런 기준으로 예배와 찬양인도자를 뽑는다면 나는 아마 첫 번 째로 짤리지 않을 까 생각된다.


너무 인도자 쪽으로 치우쳐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찬양은 인도하는 사람에 따라서 많이 좌지 우지 되어 진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용하셔서 사역하시기 때문에 예배와 찬양인 도자는 찬양을 올바르게 소개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에 하나이다. 기름부으심은 예배와 찬양 인도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 곡을 해석하는 능력과 개인의 영성이 노래를 통해서 흘러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찬양은 상한 심령을 회복시키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며 하나님 아버지앞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 된다. 찬양이 일반음악과 다른 것은 이 부분이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음악회나 좋은 콘서트에 가서 여러분의 상한 심령이 치유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면 회개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볼만한 음악회에 참석한 적이 있는가? 좋은 음악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하고 감정을 풍요롭게 하지만, 진정한 찬양은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역할을 한다. 작년에 칼리지 코스타에서 예배드릴 때 “내 이름 아시죠-He Knows my name-Tommy Walker지음-천관웅역)라는 찬양을 할 때, 한번도 가르치지 않고 처음 연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회중들을 치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악기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기를 연주한 사람을 통해서 흘러가는 영적인 요소이다. 다윗이 하프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을 인도하는 자는 찬양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참 쓸데없는 데 관심이 많다. 찬양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찬양을 하는 대상이다. 허나, 우리는 찬양을 할 대상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가지는 근심걱정을 더 경배한다. 시편을 자세히 읽어 보게 되면 사실 시편기자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께 하소연을 하지만 결국은 찬양과 하나님에 대한 경배로 맞추고 끝을 맺는다. 이번 코스타 기간도 그러한 진정한 배와 찬양이 드려졌으면 한다. 미국 각지에서 모인 훌륭한 연주팀이 연주를 해서 찬양이 훌륭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제 거품을 좀 빼자. 단지 찬양팀만 기도해서는 부족한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는 모든 코스탄이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합당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예배한다면 이번 코스타기간은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번에 찬양과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을 때, 나에게 한 분이 보내 준 메일을 소개하고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Worship Intercessor(예배 중보자)
“그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시편 149:6


예배 중보자는 그들이 부르는 찬양과 노래 자체가 중보기도이다
예배 중보자는 한절의 노래를 계속해도 지루해 하지 않는다
때로는 같은 노래지만 가사를 조금 바꿔서 할 수도 있다
같은 노래를 반복할 때 그 가사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 한다


원수의 척추를 끊을 수도 있는 파워가 있다
이 예배 중보는 치유와 축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온다
단순히 화음을 만들어내는 성가대식이 아니라 군대의 강력한 노래를 만들어내어서 어둠의 영을 물려내고 치유를 가져오게 한다. 악한 영에 대한 제사를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박성호] 포스트모던 예배,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코스타 2004년 5월

미 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교회의 예배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어느날 한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기사의 제목은 “젊은층 중심의 미국교회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식 예배.” 포스트모던 이라는 단어와 예배라는 단어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기 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는 대신 관자놀이나 가슴에 손을 갖다대는 중세의 명상적 기도를 한다. 이른바 ‘떠오르는(emerging) 교회’로 불리는 포스트모던 세대의 교회들 일각에서 전통적 방식과는 다른 명상적 형태의 기도와 예배방식이 유행하고 있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교회들은 비제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교회로부터 ‘젊은이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라는 찬사와 함께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


지 금껏 미국 교회가 윌로우 크릭 교회나 새들백 교회의 모델을 따라 교회가 주는 구세대적인 이미지를 벗어 던지고 80년대 이후 계속해서 추구했던 모델, 그것을 편의상 구도자 중심의 예배(Seeker-sensitive worship)라고 한다면 이제는 그런 흐름에서 무엇인가 다른 하나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 2,30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겨우 교회에 데리고 간다고 치면 이들에게서 나오는 첫 반응은 ‘교회가 교회처럼 생기지 않았다. 무슨 교회가 마치 월마트 같다’고 하는 식이라는 것이다. 이전의 세대가 형식화된 교회의 예배와 종교적인 형상들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가지고 극도로 제도화된 것(established religion)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 떠오르는 새로운 세대는 오히려 종교적이고, 영적이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교회로부터 기대하고 나아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7,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던 세대에 비해 2000년대에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세대들이 영적인 문제, 초현실적인 문제에 관해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갤럽 조사는 이러한 현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2004년 2월25일 크리스찬 투데이에 실렸던 이 기사를 좀 더 인용해 보면 어떤 미국 교회의 예배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니애폴리스의 젊은 교회 ‘블루어’에서 열린 최근 토요예배. 대부분 20,30대인 교우들은 의자와 촛불로 채워진 공간 주위에 둥글게 둘러앉아 있고 한가운데는 존 뮤직 목사(37) 가 드럼세트 곁에서 3명의 음악목회팀과 함께 앉아 예배를 이끈다. 여기저기 각종 파이프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등불 아래의 벽들엔 옛 돌십자가와 석상들을 담은 슬라이드와 비디오 등이 비쳐진다. 탈색한 티셔츠와 블루진 차림에다 무스를 바른 머리 모양의 뮤직 목사는 설교 대신 회중들을 3대의 ‘임시제단’으로 초청한다. 제단 위엔 기도제목을 적은 카드뭉치가 놓여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단에 소속돼 있고 전통교회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복음적이지만, 동방정교회나 중세교회, 수도원 등의 고풍을 답습, 중세기도문, 기도 미로, 렉티오 디비나, 고대 성시, 명상문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매클러렌 목사(48세, 시 더리지 커뮤니티 처치)는 아메리카의 광대한 젊은층 인구를 겨냥한 선교적 목회를 “모국어와 모국문화를 사용하는 외국선교”에 비유한다.”

이 를테면 기존 극장 스타일에서 밝은 조명과 현란한 무대장치를 곁들여 현대식 록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젊은이 예배 스타일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촛불과 향내음을 풍기며 고풍스러운 기도문을 청바지 입은 목사와 함께 명상하며 교회의 주위를 돌며 기도에 열중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새로운 세대가 구세대와 어떻게 다른가,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하는가 묻는다면 쉽지 않은 답변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예를 들자면 구세대의 젊은이들에게 극복하고 타도해야 할 정치적 인물의 표상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표되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었다면 이 새로운 미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허황된 패권주의로 똘똘 뭉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 상징된다고 하는 차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던주의로 대표되는 모델이라고 한다면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포스트모던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차이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의 젊은이들로 비교해 본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통기타와 청바지 생맥주, 그리고 록음악과 댄스뮤직에 열광하며 머리에 무스를 바른 젊은이들에서 ‘싸이질’에 열중하며 개인홈페이지 파도타기에 매우 익숙한, 그러면서도 정치인들의 모습을 희화화한 시사합성 갤러리에 들락날락 하면서 낡아빠진 정치를 개탄하는 새로운 젊은이들의 출현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 런데 과연 붉은 악마와 함께 ‘대 한민국’을 외치며 월드컵의 신화를 이루어낸 이 포스트모던 세대의 모습은 한국 교회 어디에 서 있을까? 이들의 예배드리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IT 산업의 활황으로 대단히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즐기는 최고의 IT 강국 대한민국의 N세대들이지만 우리의 예배를 볼 때 아직 포스트모던 예배를 논하는 것은 좀 이른 감이 든다. 미국과 서구의 이 새로운 젊은이들처럼 촛불을 켜고 향내음을 맡으며 오래된 기도문을 따라하며 명상하는 예배를 즐기는 세대의 출현은 아직 우리의 현실에서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준비하는 것은 언제나 최선의 방어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난 부활주일 예배,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색다른 시도를 해보았다. 기존의 전통적인 부활주일 성가대 칸타타를 하되 젊은이 중심의 열린 예배 현실에 맞도록 예배를 디자인해서 칸타타 중간에 다양한 차원의 시도를 선보였었다. 이른바 다감각적인 예배(multi-sensory worship)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는 장면을 성가대가 부르는 사이, 영화 Jesus Film의 한 부분을 편집해서 회중들이 그 장면을 보면서 2000년 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동시에 음악이 끝날 무렵, 피가 잔뜩 묻은 옷을 입고 가시관을 쓴 예수가 채찍에 맞으며 뒤에서부터 앞으로 십자가를 질질 끌고 나아간다. 살을 에이는 채찍 소리와 함께 회중들은 강렬한 피의 색깔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가슴 아파하는 경험을 한다. 조용한 배경음악과 함께 예수를 군인들에게 넘겨주던 아픈 기억을 되새기는 가롯 유다의 처절한 간증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가 들고 있는 오랏줄 하나, 그 줄을 가지고 곧이어 그는 자살하는 비운의 결말을 택하지만, 죽음을 앞둔 마지막 가롯 유다의 말 한마디에 회중은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을 적신다. 동시에 새롭게 성가대의 찬양은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뭐 그런 진행으로 예배를 구성해 보았다. 결과는 대 만족이었다. 예배를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고, 행동하는, 인간의 모든 감각을 통해서 하나님을 묵상하는 그런 예배의 자그마한 효시(曉示)가 되었다.



앞 으로 우리 이민 교회와 한국 교회의 예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며 단순히 듣는 예배에서 다양한 차원의 감각적인 예배로 변해갈 것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 밖으로만 나가면 이 새로운 세대들은 이러한 다양한 다감각적인 문화에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도 사실상 냄새 맡는 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플래시를 보면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차 한잔을 바라보며 조용한 피아노의 배경음악과 함께 순차적으로 아름다운 시 한줄이 모니터를 가득 채우면서 그와 함께 나지막한 성우의 음성이 한꺼번에 올라오는 종합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본다. 단순히 종이에 쓰여진 시 한편을 보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도 이 시대를 준비하며 새로운 세대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요한 일서의 말씀은 말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한이 외친 세대와도 같이 우리 역시이 말씀대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기를 꿈꾸는 예배를 준비해야 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조근상] 중보기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지는 찬양

이코스타 2004년 4월

최 근에 탐 크라우터의 새로 나온 책 “예배자가 알아야 할 60가지 메세지”를 보면서 중요한 원리들이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몇 자를 적어 본다.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중보기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나 실제로 그 중요성을 알면서도 예배와 찬양팀에게 늘 부족한 것은 이 중보기도이다. 지난 몇 년간 코스타 찬양팀을 섬겨 오면서도 사실 가장 큰 부담감은 중보기도에 관한 문제이다. 어떨 때는 예배와 찬양을 인도하는 우리조차 중보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도를 할 때가 많은 것 같았던 것을 기억한다. 사실 찬양인도를 하는 팀은 중보기도를 위해 모였다기 보다는 음악적인 사역을 위해 모인 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러기 때문에 중보기도는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지 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중보기도에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감사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중보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은사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은사차원이 아니라 날마다 꾸준하게 하므로 하나님앞에서 자라가게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중보기도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찬양에 은사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중보기도에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해서 미안하지만 오랫동안 나에게 중보기도는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다. 예수전도단라는 선교단체에서 섬길 때에도 중보기도시간만 되면 나는 졸음의 영과 싸워야만 했다. 찬양을 인도하라고 하면 몇 시간이고 할 수 있었지만,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날이면, 어떻게든 빠른 시간 안에 해 치워야 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께서 중보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에 있는 동안 잠시 미국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한 교회의 영어권목사님과 교회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적이 있었다. 마침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교회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내 마음속에 영적인 부담감이 일어나면서 내가 만나는 존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기도방을 찾아서 기도하려고 했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서 들어간 기도방의 이름은 성경에서 모세를 도와 기도했던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은 아론과 훌 방이 있었다. 훌 방에 들어가서 이마에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몇 시간을 기도한 것 같았는데, 눈을 떠 보니 단지 1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목사님과의 약속시간이 되어서 올라가서 전화를 기다리는데 기도하는 동안 음성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음성메세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약속시간에 맞춰서 오다가 한강대교에서 불법 유턴한 택시와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차만 부서지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라고. 사고가 난 그 시간은 내가 훌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던 시간과 일치했다. 나는 그 시간에 기도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목사님과 나누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내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시기 원했던 것이었다. 그 후에 내가 인도하던 모임에는 중보기도 팀이 생겨났다. 사실 이전에 간사들이 중보기도를 해 왔었는데 따로 모임을 위한 중보기도 팀이 세워진 것이다. 그들은 찬양팀이지만 악기나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 모임시간 전부터 중보기도를 하면서 준비한다. 그 중보기도는 예배 안에서도 일어난다. 예배를 드리는 각 처소에서 그들은 중보기도의 사역을 한다. 그들의 찬양은 중보기도의 찬양이다. 우리의 모임은 이 중보기도팀이 생긴 이후로 모임 자체가 변화가 되었다. 단순히 찬양을 드리는 모임에서 찬양과 중보기도가 합하여 이루어진 온전한 예배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찬양팀 전에는 단순하게 모여서 기도를 하는 정도였지만, 중보기도팀이 같이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찬양팀이 가지는 고질병같은 기질들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우리 팀안에는 놀라운 간증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릴 때 찬양인도자는 먼저 하나님앞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단 1분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회중을 위하여 예배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원수인 사단은 이 시간을 가장 싫어한다. 작년 여름의 시카고 코스타의 중보기도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났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전쟁에는 찬양과 경배, 그리고 중보기도,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가 반드시 함께 해야 승리를 할 수 있다.


말을 맺도록 하겠다. “기도를 통해 예배를 섬기라.” 탐 크라우터가 강조했던 것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얼마나 자주 기도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기도가 쉽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경험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중보는 또 다른 무거운 짐에 불과할 것이다. 허나, 진정한 예배와 찬양을 드리기 원한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는 부족한다. 엎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나를 위해서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중보의 마음을 가지고 찬양한다면, 예배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함이 생길 것이다.



[박성호] 이승연 파문에서 보는 21세기 영성 관리와 찬양하는 삶

이코스타 2004년 3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이 승연과 네티앙엔터테인먼트의 기획 작품이었던 이른바 위안부 누드 파문이 기획사 본인들에 의해 원본 필름과 동영상이 불태워 지면서 일단 가라앉은 듯 하다. 네티앙엔터테인먼트 측에서 가졌던 지난 몇주 전의 기자회견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왔던 일들을 돌이켜 보면 눈앞에서 전쟁이라도 한 판 치루어 졌던 것 같은 느낌이다. 공연히 우리 아픔 많은 할머니들 가슴에만 대못을 박을 일들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론 네티앙 가입 탈퇴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네티즌들의 들끓은 반란으로 인해 영문도 모르고 고생도 많이 한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있다.


갑자기 자다가 두들기는 봉창소리처럼 모두가 알고 있는 이 이야기를 찬양을 이야기하자 칼럼에 쓰는 이유는?


이 번 이승연 파문을 지켜보면서 나는 나 자신의 내면 세계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한가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네티즌이라는 존재를 가볍게 여겼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교훈이고, 다른 한가지는 줏대 없이 이른바 여론의 물결에 휩쓸리다가는 정말 나의 내면 세계에 더 큰 코를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자 본주의와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가 빚어낸 불행한 만남이었던 이번 사건에 대해 나는 조금이라도 옹호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사태가 해결되고 마무리 된 지금, 이 사건을 지켜보는 입장에 있었던 나의 삶을 돌이켜 보니, 거기에는 깊은 공허만 남고 있음을 본다. 왜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왜 공허함만 남는 것일까? 정의를 실현시키고 옳은 일을 행했다고 하는 의협심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괜한 훔쳐보기와 엿보기를 했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는?


나 는 클릭으로만 정의를 행하고 있었다! 웹 서핑을 즐기며 클릭하면서 보았던 모든 기사들이 나의 정의로움과 연결된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게시판에 올라온 다양한 사람들의 분노와 질책과 야유와 독려를 보면서 나는 잠시라도 깊이 그렇다면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에는 어떤 일들이 나타나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웹 서핑을 즐기고만 있었던 것이다.


인 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나의 삶에 줄어든 결과가 있다면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나는 정보와 지식과 교양과 심지어는 영성마저도 인터넷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고 그 결과는 공허함이었다. 그것은 거짓이었던 것이다.


웹 서핑이 왜 책읽기를 대체할 수 없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나는 이렇게 내렸다. 웹 서핑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자기 기호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클릭 한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들면 단번에 Backspace를 눌러 버린다. 깊이 있는 사고와 되새김질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책읽기에는 깊이 있는 생각과 되새김질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내가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책을 한번 잡았으면 어느 정도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나는 웹 서핑을 하면서 오락 정도로 즐기고 있었지 삶의 깊은 공부와 생각하기는 하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내 마음을 관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마음 상태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서 생각하는 이른바 큐티일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의 영성은?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예 배를 인터넷으로 드리면 안 되는 것일까? 정답은 오프 라인에 있다. 삶의 현장에서 회중과 함께 드리는 예배의 현장성을 경험하고 함께 교제하며 그 안에서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예배할 장소가 없는 고립된 곳에 있다든지 하는) 예배와 찬양하는 삶에 관한 한 온라인에서 영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사역들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라는 뜻의 논지를 독자들께서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어 쨌든 중요한 것은 이승연 파문 이 마녀사냥이었던, 공의를 행했던 네티즌들의 운동이었던 간에 이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는 나의 내면의 삶에는 씁쓸한 오락으로 남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의로운 일을 행할 때는 오프 라인에서 행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박성호] 예배가 자꾸만 시각화 되어간다

이코스타 2004년 1월


종 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만일 서슬 퍼렇게 살아 있어서 요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면 맨 처음에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물론 그가 늘 다니었을 루터파 교회 말고 일반적인 현대 예배(Contemporary worship)에 참석한 소감을 물어본다면 말이다. 생각건대 충격,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가 애써서 없애 놓았던 각종 이미지와 아이콘, 상징물들이 그냥 창문에 붙어만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앞에 있는 커다란 화면에다가 큼지막하게 잘 보이도록 쏘아대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정도도 단순한 아기예수나 성모마리아의 석고상 정도라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온갖 ‘잡스런’ 영화 나부랭이랄지, 아름다운 풍경이랄지, 아니면 직접 예수가 되어서 연기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아마 충격도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번에 다시금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며 어딘가 대문에다가 내다 붙일 반박문의 첫머리를 이미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음 세대를 향한 준비를 갖추자며 장년을 위한 ‘현대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20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질 찬양과 경배 시간, 그리고 각종 드라마와 동영상, 자막과 예술적인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준비하는 다양한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 ‘현대 예배’에 몰두하는 요즘, 나는 ‘만일 마틴 루터가 내 옆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린다면 어떨까’는 질문을 해보면서 이 예배를 준비하곤 한다.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작했던 종교개혁의 거친 물결으로 시작해서 이루어 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심과 권위들은 2003년을 마감하는 오늘의 예배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담겨져 있을지 궁금한 요즘이다. 조금 오래된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설교자가 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높은 강단을 바라보면서 ‘회중들이 앉아서 얼굴 쳐다보려면 목이 좀 아프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높이 올라갔던 강단은, 요즘으로 바꾸어서 말하자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비쳐지는 설교자의 큰 얼굴 정도가 아닐까 하는 비교를 해본다.


확 실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예배가 말씀 중심의 듣는 예배에서 점점 더 시각화(visual)되어 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만족하지 않고 다차원적인 감각으로(multi-sensory) 나아가는 것이 우리 예배의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시 시각적이고 다차원적인 감각에 익숙해진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편한 방식의 예배를 더 선호하는 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두가지, 많아야 세가지 이상의 색깔이 들어간 교과서를 구경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정말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눈에 쏙 들어오도록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본다. 다 자기가 숨쉬고 있는 똑같은 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 따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예배의 흐름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막아야 할 퇴행적인 현상인가?


물 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시각화되어 가는 예배가 조심해야 할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배의 구경거리’를 많이 심어줌으로 인해서 예배 참석자들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른바 ‘예배의 엔터테인먼트’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자꾸 커져만 가는 설교자의 얼굴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 목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반드시 거두어 들여야만 할 것이다. 물론 워십 리더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고. 종교 개혁 당시의 지적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우상화되어 버리는 현상을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의 영성이 점점 퇴색되어 가기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배 잘 보았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어찌 예배를 볼 수만 있는가? 잘 드려야지, 아니 말 그대로 예배(禮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새 로운 현대 예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시각적, 청각적 매체를 통한 효과를 나는 거부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우리가 마틴 루터의 숨소리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귀한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요즘이다. 우리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만져주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성찬식에는 딱딱한 빵의 가련한 모습과 그윽한 포도주 냄새가 장소를 가득 채우는, 그 뒤에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동영상이 스크린에 가득 담기면서 고요한 찬양이 우리의 귓청을 자극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이끌어 가는, 그런 예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영성을 가르치는 파워 포인트 조작법’이란 이 세상에 없음을 기억하곤 이내 주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