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호] 지난 코스타에서 받았던 어떤 목사님의 편지

이코스타 2003년 11월

그 런 다음에 악마는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주겠다. 이것은 내게 넘어온 것이니,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것이니, 내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누가복음 4:6-8, 표준 새번역)


하 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사람이 대신 가져가는 것.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는 최초의 반역이자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전략이다. C. S. Lewis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장(章)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가장 큰 죄.” 마귀가 우리를 넘어뜨릴 때 쓰기 좋아하는 최선의 무기는 바로 교만이라는 실탄이다. 그는 여간해서 이 실탄에 쓰러지지 않았던 이들을 본 적이 없을 정도이다. 다행히 예수님께서 최초의 유혹에서 승리의 모본(模本)을 보여주셨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행스러워 할 뿐이다.


찬 양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는 입장에 서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최대의 무기 역시 바로 교만이라는 무기이다. 해가 지날수록, 찬양 인도자의 입장에서 사람들 앞에 서는 시간이 많아지고 길어질수록 나에게도 똑같은 유혹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을 항상 경험한다.


지 난 2003년 시카고 코스타에서 나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친필의 편지를 받았다. “찬양팀 박목사님에게, 저는 *** 교회를 섬기고 있는 *** 목사입니다. 많이 망설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저는 지난 9*년부터 Kosta-USA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올해까지 *번을 참석하고 있는 나름대로 Kosta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번 찬양팀이 제일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가진 팀이라고 여겨집니다. 진심입니다… 이번 찬양팀을 보면서 찬양과 찬양팀이 예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중략) 전혀 개인적인 느낌과 의견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한번만 깊이 생각해 봐 주십시오. 어제 저녁 마지막 찬양은 좀 오버했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그것은 찬양이 너무 현란하고 요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제 조금씩 나이가 먹어 가는 사람이지만 찬양할 때 소리치고 춤을 추며 빠른 템포로 드럼을 치지 않고는 토해내고 표현해 낼 수 없는 감동을 인정하며 인정할 뿐만 아니라 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어제 찬양과 연주의 중심에 누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찬양이 과연 Praise the Lord 였느냐, 아니면 Praise the Music and the music play 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버했다는 것은 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오버는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취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시 어제 찬양과 연주는 자신과 자신들의 연주에 취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혹시 어제 찬양과 연주를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여러분의 현란한 그리고 탁월한 연주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와 같은 오류는 저와 같은 설교자들도 일상적으로 범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하고 은근히 설교자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후략)”


목 사님의 편지는 세 번째 날이었던 수요일 밤에 있었던 ‘찬양의 밤’ 시간에 마지막 피날레 곡으로 “Romans 16:19 Says”를 부르면서 젊은 사람들과 그야말로 헤드 뱅잉(Head banging)까지 해가면서 격정적으로 마쳤던 그 순서를 보시고 돌아오셔서 쓰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마지막 시간에 앙코르를 외쳐대는 사람들의 호응에 발맞추어 의자까지 들었다 놓았다 하는 쇼(?)를 연출했던 나의 모습을 확연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편지가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쓴다는 목사님의 편지는 비록 코스타가 지난 몇 달 후에 누군가의 손을 통하여 전달되어 읽어보게 되었지만, 내 삶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편지가 되었다. 답장을 통해서 나는 목사님께서 설교자 자신에게도 이러한 똑같은 유혹이 찾아옴을 진솔하게 표현해 주신 마음에 감사 드리며 늘 하나님 앞에서 오버하지 않으며 그저 질그릇처럼 소담하게 주님의 위대함만을 담아내는 사람이 되겠다고 감사의 편지를 드렸다. 요즘 그 결심을 잘 지키고 있는지 오늘 생각해 보니 여전히 오버하는 삶의 순간들이 참 많았다는 것을 느낀다.


요 즘 우리 교회에서는 지난 두 주 동안 계속해서 인터넷이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해서 여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사무실 집사님의 말씀을 들어보니 누군가의 컴퓨터 내에 들어온 웜 바이러스가 교회 내 모든 인트라넷에 일으킨 현상이라고 문단속 잘하고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를 들었다. 그런데 지난주일 아침 컴퓨터를 켜보니 또 인터넷이 안 되는 것이었다. 주일에만 켜는 도서관 컴퓨터나 다른 부서의 컴퓨터에 숨어있던 이 녀석들이 컴퓨터를 켜는 순간 다시 또 인트라넷에 퍼져서 일어난 일임이 분명했다. 해결책은 그 문제를 일으킨 본래의 컴퓨터를 찾아낸 후에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돌리고 돌려서 완전히 사멸시킬 때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씀이 내겐 내 안에 숨어 있는 가장 큰 죄, ‘교만’이라는 웜 바이러스를 말씀하시는 이야기로만 들린다.


음악인의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찬양, 설교자의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설교. 이 두 가지는 목사로서 또 예배 인도자로서 늘 조심하고 명심해야 할 웜 바이러스(Worm Virus) 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박성호] 월드컵 세대를 향한 작은 생각

이코스타 2003년 9월


얼 마 전 내가 살고 있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에서 활동하는 몇몇의 청년사역자들과 오랜만에 깊은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우리는 청년 사역에 관한 이런저런 고민들과 생각들을 나누다가 주제는 어김없이 예배와 찬양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한 선배는 이렇게 그의 고민을 표현했다. “우리 시대에는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고 자신의 젊음을 돌아보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의 N세대들에게 그러한 정서를 강요하거나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80 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닌 한 다른 선배는 이런 고민을 나누었다. “요즘 불리는 찬양들을 보면 도대체가 단조, 마이너(minor) 찬양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같이 밝고 분위기 띄우는 찬양들이에요. 때때로 그런 찬양곡조들은 우리의 다른 정서를 나타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와 동시에 나는 이렇게 반론했다. “요즘 세대의 문제는 단조로 부르지 않아도 자기들의 마이너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데 있지요.” 우리는 어설픈 웃음으로 서로의 정서가 동감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맞 다.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상당히 독특하면서 전무후무한, 그래서 나와는 얼마든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세대와 함께 부대끼며 사역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모든 새로운 세대는 전무후무한 세대가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또 이렇게 생각한다. 해 아래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또 어디 있겠느냐고.


79년도에서 84년도에 태어난 젊은이들과 함께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이제 거의 만 일년이 되어 간다. 간접적으로 지켜만 보거나 그냥 넌지시 건너뛰어서 생각하던 이들의 삶의 방식(Lifestyle)을 좀더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때론 당혹감이 들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하던 순간이 많이 있었다. 자유로움을 주지 않으면 거의 질식할 정도로 힘들어하고, 단체적인 행동이나 막무가내의 의사결정에 대해선 거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을 나는?월드컵 세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2002년도에 한반도를 붉게 물들였던 그들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엇박자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사귐이 매우 익숙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강한 비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는 이들이 초등학생이던 92년경부터 지금까지 댄스음악이 주류음악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들과 함께 하는 예배 시간에 나는 항상 볼륨이 좀 크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고 멜로디 위주의 흐름보다는 비트가 강한 리듬섹션이 강한 찬양이 이들에게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볼륨을 좀 줄일 수 없겠냐?’는 고리타분한 부탁은 눈치를 보며 좀처럼 하지 않는 편이다. 나 역시 밝고 강한 찬양을 주로 인도하는 편이기에 이들 역시 나를 같은 편 정도로 생각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심정일까. 그러나 역시 나는 ‘부흥’의 정서와 단조음악의 정서를 이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선배들의 연민 어린 마음을 읽어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늘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축제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서 삶의 고백과 성찰이 담긴 묵상적인(Contemplative) 찬양을 기대하는 것이 나의 심정이다. 나 역시 그러한 묵상적인 찬양이 갈급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들뜬 금요일 밤의 열기가 아니라, 잔잔하게 가라앉은 어느 화요일 아침의 찬양을 함께 퍼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장 바닥의 번잡함과 들뜬 마음뿐만 아니라, 적들의 화살을 피해가며 동굴 안에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찬양으로 퍼낸 다윗의 영성을 퍼내어 찬양으로 연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사랑하는 ‘월드컵 세대’에게 기대하는 또 한가지의 부탁과 바램이 있다면 그것은 평생동안 계속 되는 나의 고민과 비전일 테지만, 우리 민족(Korean 혹은 Corean)의 정서에 흐르고 있는 그 어떤 물줄기가 있다면 이제는 이들에게서 바로 그 정서와 물줄기를 담아 낼 수 있는 찬양이 어서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보아’라는 가수의 국제화를 기뻐하며 과연 이것이 우리 민족음악의 미래이기를 기대하는 것만이 대세일까.


이 들의 음악이 얼터너티브 계열의 대학로에서 들려지는 거친 롹음악일 수도 있겠고, 홍대 앞 전위적인 음악 카페에서 들려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건 간에 송창식이나 강산에의 포크 음악에서 느껴지는 어떤 민족적인 동감, 혹은 조수미의 아리랑이나 백남준의 비디오에서 느껴지는 고급문화로 덧입혀진 조선의 정서, 아니면 고형원의 ?부흥?을 부르며 시대의 아픔에 동감하던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쏟아내던 어떤 부르짖음이 담긴 그런 찬양이길 바란다. 더 이상 ?서편제?의 성공을 생각하며 순수민족음악만이 진정인 것처럼 강요하는 것도 힘들다고 본다. 70년대에 태어난 나 역시 솔직히 고백하자면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음악을 밥먹듯이 먹고 듣고 호흡하며 자란?다른?세대이기 때문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나는 그러나 윌로우 크릭 스타일의 예배만이 최상의 예배인 것처럼 호도 되는 안타까움을 나타내 본다. 윌로우 크릭의 예배는 베이비 버스터 세대인 백인 중산층들을 타겟(Target) 삼아 시작했던 전략적인 예배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의 예배를 걱정하며 담아낼 새 부대와 새 술을 기다려 본다.

[박성호]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찬양을 이야기 하자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2003년 코스타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7월, 위튼 칼리지 에드만 채플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의 벅찬 함성 소리와 도전적인 메시지들의 파릇파릇함, 채플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이들에게 찾아가 만지시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감동이 나의 영혼 깊숙이 또 다시 이번 코스타를 기다려지게 한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바쁜 매일 매일의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 보내는 나로서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는 지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재 충전시키시며 억수로 쏟아 붓는 폭포수와도 같은 시간들이다. 찬양 사역을 맡게 된 지난 3년 동안은 아무래도 받을 은혜보다는 해야 할 일과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많이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코스타를 통해서 내 영혼에 채워진 감동과 결심들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붙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도 햇수로 7년째가 되어가면서 집회에 참석하는 나의 마음 자세도 많이 타성에 젖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늘 다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은 코스타를 처음 경험하면서 내 영혼에 채워졌던 숨 막힐 듯한 그 감동의 시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또 수많은 새내기 코스탄들에게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살던 얼마 전 나는 무작정 웹 서핑을 하던 중에 어느 한국에 있는 교회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보기도 게시판에서 ‘우리 딸이 이번 여름에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제목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 등뒤에 흐르던 소름 끼치는 듯한 감동과 한줄기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을 기도의 제목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말씀이 좋은 사역자들과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찬양 팀을 구성해서 집회를 진행하기 때문에 집회에 감동이 있는 것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어머니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의 범벅으로 드려진 기도들이 하늘의 보좌를 열며 집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원천적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삶으로 인정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코스타의 찬양 팀을 기획하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권력이요 특권이다. 코스타라는 집회의 성격이 전국에서 모이는 각 지역교회에 속한 학생들의 수련회이기 때문에, 그 집회의 찬양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국가대표 선수단’이라는 헛된 환상을 심어 줄 사탄의 공격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집회 시간 중에서 자주 눈에 띄고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사역이다. 자연히 우리의 영원한 ‘자칼 형사’인 사탄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유혹과 달콤한 무기를 가지고 찬양 사역자들의 영혼을 삼켜버릴 심정으로 덤벼들고 있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찬양 사역 팀에서 3년째 이름을 드러내고 사역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 석자가 알려지게 되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과 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코스타의 ‘꽃봉오리’와도 같은 이 사역에서 물러나서 어디론 가 옮겨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올해 역시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 팀으로 같이 섬기고 싶다’는 적잖은 형제/자매들의 연락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의 마음 마저도 괜스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낫 놓고 ‘아 그게 기역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첫해 2001년 찬양 팀의 기억들과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주제와 어우러졌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 속에 경험했던 섬김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다시금 첫 마음으로, 새해 첫날 찬물로 세수하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음악성과 인기와 그 모든 아지랑이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의 그 모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소담한 마음으로 다시금 찬양을 준비하며 그 분께 올려 드릴 때 흥건히 받아주실 아버지의 품을 다시금 기대하며.

[박성호] 소담한 찬양이 울려 퍼질 2003년 코스타를 꿈꾼다

이코스타 2003년 6/7월호

2003년 코스타가 어느덧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2002년 7월, 위튼 칼리지 에드만 채플에서 울려 퍼지던 찬양의 벅찬 함성 소리와 도전적인 메시지들의 파릇파릇함, 채플을 가득 채우며 수많은 이들에게 찾아가 만지시던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감동이 나의 영혼 깊숙이 또 다시 이번 코스타를 기다려지게 한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이겠지만, 바쁜 매일 매일의 수많은 사역들을 감당하면서 보내는 나로서는 코스타와 같은 집회는 지친 나의 영혼을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으로 재 충전시키시며 억수로 쏟아 붓는 폭포수와도 같은 시간들이다. 찬양 사역을 맡게 된 지난 3년 동안은 아무래도 받을 은혜보다는 해야 할 일과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럴 기회를 많이 놓치긴 했지만, 어쨌든 코스타를 통해서 내 영혼에 채워진 감동과 결심들은 오랜 시간동안 나를 붙들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이제는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도 햇수로 7년째가 되어가면서 집회에 참석하는 나의 마음 자세도 많이 타성에 젖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늘 다시 기억하고 다짐하는 것은 코스타를 처음 경험하면서 내 영혼에 채워졌던 숨 막힐 듯한 그 감동의 시간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또 수많은 새내기 코스탄들에게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그것뿐이다.


바쁜 일상생활에 묻혀 살던 얼마 전 나는 무작정 웹 서핑을 하던 중에 어느 한국에 있는 교회의 웹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중보기도 게시판에서 ‘우리 딸이 이번 여름에 시카고 코스타에 참석하는데 거기에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라는 간절한 어머니의 기도제목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때 내 등뒤에 흐르던 소름 끼치는 듯한 감동과 한줄기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곳곳에 숨어 있을 기도의 제목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말씀이 좋은 사역자들과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찬양 팀을 구성해서 집회를 진행하기 때문에 집회에 감동이 있는 것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들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 어머니와 같은 이들의 땀과 눈물의 범벅으로 드려진 기도들이 하늘의 보좌를 열며 집회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원천적인 근원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과 삶으로 인정하고 낮아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참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코스타의 찬양 팀을 기획하고 팀을 구성하는 것도 어찌 보면 권력이요 특권이다. 코스타라는 집회의 성격이 전국에서 모이는 각 지역교회에 속한 학생들의 수련회이기 때문에, 그 집회의 찬양팀을 맡게 된다는 사실은 일종의 ‘국가대표 선수단’이라는 헛된 환상을 심어 줄 사탄의 공격이 늘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집회 시간 중에서 자주 눈에 띄고 조명을 많이 받기 때문에 시선이 집중되는 그런 사역이다. 자연히 우리의 영원한 ‘자칼 형사’인 사탄은 늘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유혹과 달콤한 무기를 가지고 찬양 사역자들의 영혼을 삼켜버릴 심정으로 덤벼들고 있는 것 역시 받아들여야 할 사실이다. 찬양 사역 팀에서 3년째 이름을 드러내고 사역하다 보니 어느덧 나도 모르게 나의 이름 석자가 알려지게 되고, 또 그렇게 알려지는 것을 즐기게 되고, 나에게 찾아오는 유혹들과 도전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각하기에는 이제는 코스타의 ‘꽃봉오리’와도 같은 이 사역에서 물러나서 어디론 가 옮겨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올해 역시 ‘이번 코스타에서 찬양 팀으로 같이 섬기고 싶다’는 적잖은 형제/자매들의 연락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는 그런 시간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의 마음 마저도 괜스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고 있는 내가 싫어진다. 생각해 보면, 그냥 낫 놓고 ‘아 그게 기역자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첫해 2001년 찬양 팀의 기억들과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멋진 주제와 어우러졌던 그 모든 감동의 순간 속에 경험했던 섬김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다시금 첫 마음으로, 새해 첫날 찬물로 세수하던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음악성과 인기와 그 모든 아지랑이 같은 것들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주님 한분 만으로 만족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의 그 모든 첫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소담한 마음으로 다시금 찬양을 준비하며 그 분께 올려 드릴 때 흥건히 받아주실 아버지의 품을 다시금 기대하며.

[박성호]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찬양을 이야기 하자


전쟁의 시간에 부르는 한줌의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셀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편 46편)


3월17일 저녁 8시, 부시 대통령의 최후통첩(最後通牒) 연설이 전세계에 방송됨과 동시에 그동안 우리 모두가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전쟁이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최후통첩으로 던져준 시간이 72시간에서 48시간으로 줄었다는 것만 예상과 달랐지 사실 모든 내용은 언론이 예상했던 것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는 느낌이다.


이번 전쟁은 나의 마음을 참으로 무겁게 한다. 얼마 전부터 담당하게 되어 내가 사역하고 있는 대학부에 소속된 3명의 젊은이들은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파병되어 지금 쿠웨이트에서 전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자기의 양들이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나가서 외로이 떨고 있는데 안타까워 하지 않는 목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목자일 것이다. 그중의 한 형제는 얼마 전 싱가폴의 어느 해안을 배로 지나가고 있다며 ‘바그다드의 지상군으로는 아마도 최초로 투입되는 부대의 소대장으로서 자신이 부대원들을 두려움 없이 잘 인도할 수 있도록, 또 생화학 무기가 사용되지 않도록 제발 기도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른다.


때를 잘못 만난 까닭에 이제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가야 하는 수많은 젊은 군인들, 가공할 만한 최첨단의 무기와 폭탄에 의해 희생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수많은 이라크의 민간인들, 바그다드 인구의 반 정도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는 어느 기사를 읽은 나의 마음은 더더욱 아프다. 과연 전쟁을 불가피하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던 지난 수개월 동안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게 동시에 오버랩 되는 이라크의 정유 탱크들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미사여구로 치장된 연설문 속에 담긴 꿍꿍이속을 짐작하는 나의 마음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9.11사태 이후 딕 체니 부통령이 가장 많이 읽고 연구했던 분야가 ‘로마제국의 흥망성쇠’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지금 부시 행정부가 밀고 나가는 모든 대외적인 추진력의 향방은 과연 아메리카 제국이 계속해서 앞으로도 세계 최고의 열강으로 커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 속에 시작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라크, 이란, 그리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2001년의 국정연설에서 이미 이번 전쟁의 서막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때 이라크에 대해 걸고 넘어졌던 알 카에다와의 관련성 이야기는 전쟁을 시작하는 지금 쑥 들어가고 없는 것이 내게는 신기할 뿐이다. 한반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또한 이번 전쟁이 어쨌든 끝나고 나면 지금 북한에 대해 걸고 있는 정치적인 시비가 다시금 링 한가운데로 올려져서 이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격전장으로 치닫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걱정한다.


매일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하고 성경공부 모임을 주도한다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의 이야기는 혹시나 아랍인들의 눈으로 볼 때 사악한 근본주의자 기독교인들이 시작하는 아마겟돈 전쟁으로 비추어 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앞으로 계속될 중동과의 분쟁을 통해서 13억 모슬렘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왜곡되고 복음의 문이 더더욱 닫히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마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에 벌어진 상처의 골이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깊게 남아 있는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으로 요즘 마음이 매우 무겁다.


사담 후세인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들도 결코 편한 것들은 아니다. 생화학무기가 없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다는 그의 말이 사실일지 아닐지는 이제 곧 알게 될 것이라 치더라도, 바그다드의 병원과 학교 등의 민간인 시설에 민간복을 입은 군인들을 배치하여 끝까지 결사항전 하겠다는 이라크 측의 성명은 결코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편으론 쿠르드족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교회에서 있었던 선교대회에서 우리가 입양했던 종족이 바로 이 쿠르드족이었기 때문에 내게 더더욱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북 이라크 지역에만 5백만명의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는데 이들이야 말로 후세인 정권의 몰락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던 것이 아닌가. 이번 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에게도 그토록 목이 마르도록 기다렸던 민족 해방과 새로운 쿠르드 국가의 건설이 꽃피게 되는 것은 아닐지 기대하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사실이 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터키 정부에게 눌려서 살던 쿠르드 족들까지도 다들 북 이라크 지역으로 이주해 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꿈에 젖어 있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이란과 이라크와의 분쟁 속에서 미국과 서방이 개입해 왔던 중동의 80년대 정치사를 공부해 보려다 그냥 덮어 버렸던 것도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였다.


“이방이 훤화(喧譁)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6절) 본문은 딱 요즘의 중동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에 하나님이 언제 소리를 발하셨다고 지금 시편 46편의 기자는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이방과 왕국은 이스라엘인들이 아닌 다른 이방인들만을 말하는 것일까. 기독교인 부시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나라’에 속한 아랍 국가들만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8-10절) 이 말씀은 무슨 말인가.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고? 이라크 군이 들고 있는 초라한 장총들을 생각하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이 자랑하는 최첨단의 무기들- 스텔스 비행기와 각종 신형 폭탄들, 지하벙커를 뚫고 지나가서 통신기기들만을 감지해서 폭파시키고 통신수단을 두절시키는 폭탄과 무인정찰기, 목표물의 범위가 10미터를 벗어나지 않는 최첨단 폭탄 등- 이 모든 것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깊이 드는 것은 잘못된 착각일까.


과연 하나님은 이 광기(光氣)의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분일까. 이런 상황에 노래는 무슨 노래? 무슨 찬양은 찬양? 어떻게 시편의 기자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10절) 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었을까.


지금까지 지나왔던 인류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수백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십자군전쟁이 비 서구인들에게 준 아픔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서구 기독교 백인들이 외치는 그들만의 하나님도 아니요,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만을 편애하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중동의 모슬렘 국가들을 쳐 죽여야 할 사탄의 무리들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도 아니요, 시편 46편의 고백처럼 활과 창과 수레의 힘만을 믿고 까불대는 모든 바벨탑의 후예들에게 참된 메시지를 던지며 다만 하나님 그분만을 경외하며 그분이 주시는 참된 평화의 소식을 고대하는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나타내시고 드러내실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하나님은 미국 편도 아랍국가 편도 아니시다. 대한민국 편도 북한 편도 아니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이 모든 정치, 사회, 경제학적인 이념과 이해관계를 뛰어 넘어 모든 열방이 주를 보며 주 앞으로 나아올 때까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실 분이시다.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어찌해 볼 수 있다는 헛된 자만심이 꺽이는 그날이 오면 이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될 것이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모든 열방들이 주를 알게 되는 그날이 어서 오기까지 이 찬양의 메시지를 외치며 불러 보리라.

[박성호] Nunc Dimittis- 서툴지만 길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Nunc Dimittis- 서툴지만 길게 예배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가복음 2:29-3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오 스 기니스의 ‘소명’이란 책을 보면 재즈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색소폰 연주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에 관해 언급하는 부분이 있다. “유명한 색소폰 연주자였던 존 콜트레인도 이와 매우 비슷한 말을 했다. 1950년대 초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거의 죽을 번 했다가 가까스로 건강을 회복한 후 마약과 술을 끊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그의 최고의 재즈 연주 중 몇 가지는 그 이후에 이루어 졌는데, 그 중 하나가 ‘지극히 탁월한 사랑'(A Love Supreme)으로서 32분간 정열을 쏟아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자신의 영혼을 그 분께 바친 연주였다. 한번은 콜트레인이 매우 뛰어난 솜씨로 ‘지극히 탁월한 사랑’을 연주한 다음 무대에서 내려와 색소폰을 내려놓고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란 말 한마디만 했다. 콜트레인은 그 곡을 그 때보다 더 완벽하게 연주할 수는 없으리라고 느꼈다. 그의 전 생애가 그 열정적인 32분간의 재즈 기도를 위해 살았다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는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Nunc Dimittis(Release me). 참으로 멋진 말이라 생각했다. 길지 않은 인생. 짧고 굵게, 그리고 구차하지 않게 주님 앞에 멋지게 한번 사용되고 나서는 장엄하게 마감하는 인생.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젊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비겁하게 하루하루 연장하는 시한부 환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예정일을 앞두고 주소록을 정리하는 사람의 심정으로 나의 인생을 떳떳하게 드리고 싶었다. 이만하면 후회스럽지 않게 남들에게 내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발자국 하나 남기고 싶었다. 곡을 쓰고 찬양을 하는 나로서는 그게 아마도 멋진 앨범 하나 정도가 아니었을까. 재니스 조플린이나 커트 코바인처럼 몸 안에 가진 정열을 어찌하지 못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던 젊은이들이나 아니면 윤동주나 전태일처럼 불꽃같은 인생으로 사라진 젊은이들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내 인생의 불꽃이 될만한 불꽃 하나 가지고 있는지. 활활 한번 타오르고 나서도 후회스럽지 않은 인생이 되고 있는지 고개를 떨구곤 한다.


서른이 넘도록 무엇 하나 남기고 가는 것 없는 것 같아 아쉬워지곤 한다. 서태지가 나와 같은 동년배인 72년생이라는 사실이 그렇고, 칼빈은 스물여섯에 ‘기독교 강요’를 출판했다는 사실이 그렇고, 역사를 채워간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20대 초반에 인생을 헌신하여 19세기 대 선교의 시대를 열어갔다는 사실이 그랬다. CCM 쪽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데뷔하는 음악인들이 다 형들 누나들인 것만 같았는데 요즘에는 나보다 나이 든 사람이 오히려 눈에 띄는 것 같다. 왠만한 단체나 교회의 워십 리더들이면 요즘엔 어지간히 ‘라이브 워십 앨범’을 출반해서 자신의 프로필에 들어가는 모습이 괜스레 밉사리 보이는 것은 분명히 열등감일 게야. 오 주여, 콜트레인이 남겼던 그 한번의 연주처럼 내게도 “눈크 디미티스”하고 외치는 날은 과연 오겠습니까.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바로 그 말씀이 내게 위로가 되곤 한다.



눅 2:25-32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 하니.”


시 므온. 한평생, 아마도 60-70년 동안 변변한 대접이나 화려한 주목 없이 평생을 그저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을 한 늙은이. 떠오르는 스타 선지자들을 지켜보며 살았을 그의 삶이 때론 무료하고 지극히 평범함 속에 갇혀 버린 인생이었으리라. 그런데 바로 그런 늙은이에게 한 특권이 주어졌다. 바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대면할 수 있는 특권이다. 눈크 디미티스! Paid-off! 기나긴 빚쟁이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 수표를 보내는 사람의 후련한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50년 분단의 아픔 속에서 드디어는 반세기만에 기다렸던 아들을 상봉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요 즘 가수의 인생이 6개월이라는 농담이 있다. 그래서 한 두 곡이라도 뜨는 날에는 열심히 방송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고 불러주는 곳에는 무조건 가서 인기가 식기 전에 본전이라도 건지자는 생각들이 팽배 하다고 한다. 태양이 지기 전에, 장이 파하기 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남은 하나의 물건이라도 더 팔려 하는 보따리 장사처럼. 내 마음속에 혹시라도 이러한 보따리 장사의 마인드가 자리 잡지 않았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이제 와서 조금씩 깨닫게 된다. 나의 인생은 One-Night-Stand가 아니라 Long-Run 해야 한다는 사실을. 뛰어난 음악성으로 주목 받는 찬양 사역자가 아닐지라도, 서툴지만 잠잠히 그저 매주 만나는 한 회 중들을 고요히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모시고 들어가는 예배 인도자가 되고 싶다. 늙은이 시므온에게 아마 반드시 있었음 직한 흰머리와 수염을 간직하며 롱런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