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열방을 향한 노래)

작년 10월, 찬양과 경배의 밤 집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서 곡을 하나 주셨다. 시편 67편 1~7절 말씀에서 영감을 받았다. 본래 이 말씀은 김진호 목사의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에게 큰 복을 부으시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 비추사 주님의 구원을 온 세계에 알리소서”라는 곡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 그래서 온 세상에 그 복을 알리게 된다는 그런 이미지가 강했다. 어느 날 이 구절을 끝까지 묵상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날에 모든 열방과 민족들과 모든 땅들의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게 될 강력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열방을 향한 찬송시가 눈에 들어왔다.
이 찬양을 작년 10월 23일 찬양과 경배의 밤 주제곡으로 정하고 예배 때마다 불렀다. 필자가 본 교회에 온지 8년이나 되었는데 공연도, 집회도 아닌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자체 찬양모임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보다 예배하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을 회개했다.
 
많은 이민교회들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교회도 지금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필요한 때이다. 금융위기의 타격으로 휘청한 이후 오랜 동안 어려움을 겪어왔다. 이웃교회 아니 한인교회들 가운데 우리교회가 겪은 길에 들어선 교회가 한 둘이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다. 왜 영광스러운 교회가 재정적 어려움에 힘을 잃어야 하는가? 어느 날 기도하면서 이것이 재정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전 교우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그 얼굴빛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재정의 불편을 불평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우들이 서로를 긍휼이 여기고 인애를 회복(호 6:6)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는 어느 덧 사랑이 동기가 아니라, 내가 맡은 봉사의 일과 책임감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데 익숙해져있다. 아무런 일이 없어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으로 달려 나오는 순수함이 그립다. 내가 맡은 담당 순서, 봉사의 자리가 없어도 그저 하나님을 예배하고 내 마음을 쏟아놓고, 겸손히 회개하고 나를 드리는 그 자리를 사모하자.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에 타고 있을 때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내 죄로 여기고 눈물로 기도했던 느헤미야의 마음을 품자. 그럴 때 그 얼굴빛을 비추사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얼굴빛이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누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라. 1절에서 왜 그냥 ‘하나님의 빛으로’가 아닌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추신다고 했겠는가? 바로 그 얼굴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얼굴빛이 우리에게 반사되어 만방에 주의 구원을 알리게 되는 것이다. 빛을 비추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다. 그래서 주의 구원을 ‘만방에 알게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만방 중에 알리소서’(v2)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열방을 통치하시는 주께서 황무한 이 땅을 다스리신다. 그 결과 ‘모든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v5)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v6)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v7)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제 나 자신은 물론 우리 교회가 열방을 향한 복음의 빛을 높이 드러내고, 생명을 구하는 열정이 다시 한 번 뜨거워져야 할 때이다.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럴 때 교회가 살아나고, 교회가 살면 개인과 가정과 사회도 살아난다. 
 

[이유정] 변화를 이루는 3단계

2011년 새해가 벌써 3주째이다. 바뀐 것은 숫자 하나뿐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것에 대해 새로움을 기대한다. 시인 겸향 이병한은 새해의 의미를 말하면서 지난해를 옛 것으로 규정하는 자에게만 새해가 된다고 했다. 옛 것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더 이상 옛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사야서 43장 18,19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라” 말씀 하셨다. 숫자 하나에도 과도한 새 일을 기대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표출된 약속의 말씀 앞에 잠잠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서는 새로운 변화를 위한 몇 가지 단계를 가르쳐준다. 첫 단계는 과거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고 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두운 기억, 슬픔, 실패, 상처, 쓴 뿌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자아, 이것이 죄성을 지닌 인간의 적나라한 실체이다.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시고, 하나님은 아예 과거를 잊으라고 반복해서 명하신다. 과거에 붙들려 있으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새 일은 새 터전에서 해야 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낡은 과거에 연연하면 제 아무리 큰 비전과 새 일을 꿈꾸더라도 결국 실패하고 만다.

둘째 단계는 새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다. “보라!” 하나님은 명령만 하지 않으셨다. 공수표를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한 번 말씀하시면 절대자의 무한하신 의지를 사용해 반드시 이루는 분이시다.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v19) 이 땅에서 새 일을 이룰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새것이 아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 1:9-10)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우주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광야에서 길을 내시고, 사막에서 강을 내시는 분이시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시다. 위대한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가 말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위대한 일을 이루시는데 3가지 단계가 있음을 발견했다. 첫째는 불가능한 단계, 둘째는 어려운 단계, 마지막으로 가능케 하신다.” 당신의 삶에 광야가 있는가? 하나님은 그곳에 길을 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사막이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그곳에 강이 흘러넘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누리는 단계이다. 43장 20절은 말한다.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만 누리고 즐기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모든 것에 충만하시다. 물을 내시고 강을 만드시고, 홍해를 가르시고, 바위에서 물이 솟는 기적을 베푸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것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구속하신 구속주이시다. 이것이 기적이다. 세상에 수많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 중의 기적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 존재, 가치, 신분 모든 것이 옛 사람에서 새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올 한해도 광야 같은 삶에 길을 내고, 사막 같은 인생에 강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기대하자. 쓰라린 과거를 잊고, 새로운 변화를 풍성하게 누리는 독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선교보다 예배가 궁극적 목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고상돈은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 올랐다. 출발한 지 무려 7시간 20분간의 사투 끝에 해발 8,848m 세계 최고봉을 정복한 것이다. 등정을 마치고 본부를 향해 무전으로 “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이다.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고 했던 당시의 말이 유명하다.

인류는 산을 정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 정복은 산을 지배하기 위한 정복이 아니라 인간의 끝없는 가능성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했다 해서 인간이 이 산을 다스릴 능력은 없다. 정상은 목표의 끝이다. 그곳에 오르면 있을 것만 같은 행복은 사실 신기루이다. 마침내 정상에 도달해보면 여전히 또 다른 산봉우리에 걸려 있는 무지개와 같다. 그래서 차라리 누군가가 말한 “산이란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것이 아니요, 보듬고 만끽하려 찾아가는 것”이라는 표현이 훨씬 가슴에 다가온다.

존 파이퍼는 그의 책 《열방을 향해 가라》에서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교가 아니라 예배라고 했다. 1장 첫 단락부터 나온 그의 주장이 섬뜩하다. “선교는 교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자요 개혁신학의 기수인 그가 한 말치고는 사뭇 도발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에 100퍼센트 동의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피조된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게 하기 위함이다. 파이퍼가 말한 것처럼 궁극적인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 시대가 끝나고 구속받은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될 때 선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 필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예배는 영원하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선교로 알고 뛰어왔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선교에 교회의 재정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교회로 여겼다. 물론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본질인 예배를 놓치면 위험하다. 그동안 지상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지상명령이라는 높은 산봉우리의 정상을 향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다. 영혼을 살리는 선교를 성과 지향적으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인 지상명령을 결코 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이 유언을 더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선교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만끽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 97:1)

새해가 밝았다.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를 밝히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이다. 내 삶의 이유를 발견할 때 우리 삶에 열정의 불이 타오른다. 존 파이퍼의 말처럼 “예배는 선교의 연료요, 목표다.” 올해도 많은 교회가 선교에 큰 비중을 두고 새해를 연다. 선교가 선교되기 위해서 예배를 살려야 한다. 예배의 불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강력한 사랑의 연료 되어 선교의 불길이 피어오르게 될 것이다. 결국 선교의 목표는 모든 열방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예배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정] 외로웠던 첫 크리스마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부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총독 구레뇨는 명을 내려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등록해야 했기에 요셉과 마리아도 유대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로 올라갔다. 갑작스레 방문한 수많은 여행자들 때문에 숙소를 찾다 못해 결국 마구간에 기거해야 했다. 그 초라한 말구유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왕 예수가 탄생한 것이다. 왕의 탄생 치고는 외로움 그 자체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선지자 없이 400년을 지내던 때라 메시아 대망사상(Messianic Expectation)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세였다. 한 예로 메시아의 탄생지가 다윗의 동네라는 예언 때문에 베들레헴에는 결혼하지 않고 메시아를 낳겠다는 처녀가 수백 명이었다는 전례도 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메시아 대망 기운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던 사회 분위기에 비해 정작 아기예수 탄생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참담할 정도로 외면 일색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네 종류의 반응을 발견한다. 첫째, 매우 적대적인 경배자 헤롯왕이다. 헤롯왕은 박사들에게 말했다. “아기를 찾거든 내게도 알려 주시오, 그러면 나도 가서 그분께 경배하겠오.” 그러나 헤롯의 속셈은 다른데 있었다. 아기가 발견되자마자 죽일 계획이었다. 그분께 경배하겠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에 불과했다. 헤롯은 다윗 왕 이래 가장 강력한 왕이었지만 당대에 가장 악독한 왕이었다. 자기 지위를 넘보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였다. 탱크로 시위대를 깔아 뭉게고, 그들에게 로켓을 발사했던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 같은 사람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명예와 권력 때문에 예수를 핍박하는 자들이 있다.

둘째, 자신의 지위 때문에 회피한 경배자 종교지도자들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 해박한 자들이다. 메시아가 태어날 장소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헤롯왕이 질문했을 때 일말의 지체 없이 관련 성구(미가 5장 2절)를 언급하며 베들레헴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과 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를 경쟁상대로 삼았다. 한해를 살면서 자신의 기득권과 욕심에 눈이 멀어서 예수를 부인하고 외면한 한 일은 없었는가?

셋째, 무관심으로 회피한 유대 백성들이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새로 태어난 유대의 왕께 경배하러 왔다는 소문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메시아 기대감으로 들떠있던 백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롯왕의 시기심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박해와 손해를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정작 메시아 예수를 찾아 경배하는 일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이들과는 대조적으로 동방박사들은 최고의 경배자들이다. 먼 나라에서 별 하나 의지해 갖은 고생 끝에 메시아를 찾았다. 아기 예수께 드린 예물도 아무런 대가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더욱이 황금, 유향, 몰약은 범상치 않은 선물이다. 황금은 가장 귀중한 가치를 의미한다. 이것은 왕에게 적합한 예물이다. 유향은 아라비아나 아프리카에 있는 유향나무의 분비액을 말려서 만든 향으로 향료나 제사 때 사용되었다. 이것은 제사장에게 적합한 예물이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거나 사형수들의 마취제로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의 죽으심을 예표하는 선물이다. 이 예물들은 각각 그리스도의 왕권과 제사장직과 죽으심을 상징한다. 어떻게 동방박사들이 이런 예물을 준비했는지 놀랍기만 하다. 성령의 감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경배를 마치고 이들이 한 일은 헤롯의 부탁을 무시하고 꿈속에서 본 지시대로 몰래 유대를 빠져나갔다. 참으로 사심 없는 진정한 경배자들이었다.

오늘의 크리스마스는 아기예수에 대한 경배보다는 목적과 대상도 없이 떠들고 흥청거리는 즐거움과 쾌락이 주를 이룬다. 사람들은 자신의 바쁜 일 때문에, 자신의 안락과 쾌락 때문에 예수 경배를 뒷전으로 미룬다. 동방박사들과 같은 참 경배자보다 헤롯이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 같은 거짓 경배자들이 더 많은 세상이다. 성탄이 3일 남았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마음을 더 이상 외롭게 하지 말자. 아무런 사심 없이 경배의 최고봉을 보여준 동방박사를 본받아 아기 예수께 가장 귀한 예물을 준비하자.

– 이유정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이유정] 크리스마스 남우 조연상



해마다 성탄 시즌이 오면 늘 동방박사를 묵상하곤 한다.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탄생한 바로 그날, 이 지구상에는 오직 두 부류의 조연이 있었다.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이다. 그 가운데 후자는 독특하다. 이들은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먼 동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해 긴 여행길을 떠났다. 동방박사를 뜻하는 영어 매기(Mage)는 먼 옛날 바사와 메대 나라의 제사장을 의미한다. 이들은 백성들 가운데 가장 높은 교양을 지닌 천문학자였고, 왕실에서 왕의 고문, 또는 왕자들의 선생이기도 했다.

어느 날 박사들은 이상한 한 별을 발견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이 별을 예수 탄생과 연계 해석했을까? 고대 근동 아시아에는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점성술과 천문학이 상당한 과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이들은 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기에 당시의 모든 문헌들 속에서 별에 관한 자료를 모두 수집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이스라엘 근동 아시아 지방에 퍼져서 디아스포라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이들의 특징은 가는 동네마다 회당을 지어 놓고 예배를 드렸다. 박사들은 이 회당을 통해 다니엘의 예언이나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각종 예언을 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천문학과 유대 자료를 통해 이들 마음에 모종의 감동을 주셨다. 이방나라의 점성술가인 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종종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통해 자신의 일을 이루신다. 발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당시 국제적으로 알려진 점술가였다. 그도 한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사이비 점술가가 되었다.(신명기23:4,5) 구약성경에 발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예언한 내용이 나온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민수기 24:17) 학자들은 이 구절을 예수 탄생으로 본다.

그러나 발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에 의해 움직였던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쓰임 받는 축복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자기 길’로 갔다.(민 24:25) 그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죄 가운데 빠뜨렸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때때로 우리도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 길로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인을 보고 이를 자신들의 명예나 부의 기회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모르게 그 별을 좇아 외롭고 긴 여행을 떠났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예루살렘 성에 있던 사람들은 목동 외에는 아무도 그 별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왕은 물론 성경학자, 제사장,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다른 별에 비해 밝았고 움직이는 별이었기에 조금만 신경 쓰면 볼 수 있었다. 그 뿐인가? 이스라엘에 도착한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찾고 있습니다.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공공연하게 묻는 바람에 당시 정계와 예루살렘 성은 발칵 뒤집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 외에는 그 누구도 별에 대해 관심 없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을 찾는 자도 없었다. 참으로 대조적이다. 먼 이방나라에서 온 학자들의 수고와 열정에 비해 정작 메시야를 그토록 열망하던 유대 종교지도자들, 백성들은 이상하리만치 철저하게 무관심했으니 말이다. 만일 크리스마스 아카데미 영화제 같은 것이 있었다면 이 동방박사들에게 최우수 조연상이 돌아갔을 것이 틀림없다

지난 한 해 동안 이 땅에 오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투자했는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해도 그분께 경배하고자 하는 그 마음 하나로 세상 명예와 유혹을 얼마나 포기했는가? 별 하나에 목숨을 걸고 먼 이방 땅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크고 작은 하나님의 사인이나 주의 음성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성탄의 계절,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의 별에 흥청대기보다 동방박사의 별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 이유정 목사

[이유정] ‘미리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인다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인 ‘감사의 힘’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500만 명이 시청하는 미국의 인기 TV 뉴스 프로그램인 <인사이드 에디션>의 진행자 데보라 노빌입니다. 그녀는 위대한 성공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소한 습관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연습하라고 합니다. 감사의 대상이 3가지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둘째는 세상을 향해, 마지막으로 나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로버트 에몬스 교수에 의하면 하루에 5번씩 감사의 말을 쓰는 사람들과 전혀 감사의 말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완전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5번씩 감사를 표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도 확연하게 줄고, 건강에도 큰 차이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할 때 우리를 살리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감동을 잘 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감동으로 감사하면 상대방에게도 그 감동이 전달됩니다. 웃음을 줍니다. 웃을 때 우리 몸에 좋다는 면역성이 있는 앤드로핀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감동을 받을 때는 앤드로핀 보다 5천 배나 강력한 다이도르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이 감동 호르몬입니다. 이렇게 일반은총의 영역에서도 감사는 우리 삶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져다줍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감사할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인생의 에너지는 데보라 노빌의 ‘감사의 힘’이나 감동 호르몬과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제사장들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눅 17:14)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해서 성전을 향해 가는 도중에 모두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중 단 한 명 사마리아 사람만이 감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10명 중 한 사람만이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감사에 인색합니다.

감사를 방해하는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가 ‘근심’입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케 하나…”(잠 12:25) 근심은 감사가 아닌 번뇌를 낳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품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의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합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40%는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것이며, 22%는 안 해도 될 사소한 일이고, 4%는 우리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다”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걱정은 겨우 4%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Thank와 Think는 모음하나 차이입니다. 생각만 바꾸면 감사하지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환경에 고정되어 있을 때는 불평과 염려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께 고정할 때 감사가 시작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래서 바울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2008년 가을 어느 날 아침, 시편 138편을 묵상하는데 문득 다윗의 고백인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라는 말씀에 영감을 받아 곡을 썼습니다. 처음엔 그 의미가 다소 생소했는데 영어성경에서 풀렸습니다. “with my whole heart”, 즉 ‘내 모든 마음으로’ 하려면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생각보다 많아 깜짝 놀랄 것입니다. 

이 시의 구조가 독특합니다. 7절은 일종의 병행구입니다.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며…” 감사가 나오고 하나님의 응답이 뒤따릅니다. 일반적으로 곡의 후렴은 절의 결론입니다. 1절이 있기에 후렴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먼저 결론이 나옵니다. 즉 감사를 선포하고 후렴에서 감사의 조건이 나옵니다. 적어도 ‘감사’의 원리에 있어서 이 시의 구조가 맞습니다. 미리 감사는 하나님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바로 오늘부터 미리 감사하는 습관을 만들어봅시다. 그럴 때 이번 추수감사 연휴는 물론 우리의 인생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으로 넘칠 것입니다.



–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