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속도보다 방향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을 잃었다. 김남준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배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 인구 천만의 한국사회가 이럴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삶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전하는 삶은 원래 미움 받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눅 21:17)이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도전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그 도를 넘는다. 사회로부터 듣는 개독교 운운은 그 자정능력을 잃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회중 예배의 거룩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주 몇 번씩 만나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신과 뜻을 사회에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매주 만나는데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감화 감동하시는 성령 앞에 어떻게 순종하지 않고 내 기분, 내 감정, 내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존재로 살수 있단 말인가?

신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오늘 교회가 이 예배의 능력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 번 만나면 해결될 것을 각종 훈련과 세미나, 교육과 학교에서 해결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봉사와 훈련의 짐이 너무 과하다. 
 
그 많은 예배 외에도 서너 가지는 기본인 봉사에 각종 위원회 회의, 행사 준비, 리더 훈련까지 받으니 매 주일마다 초죽음 아닌가? 그러니 막상 세상에 나가서 희생하고, 핍박을 견디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단과 싸워야 할 에너지는 바닥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과 동화되는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왜 오늘 교회가 이처럼 바빠졌는가? 왜 교인들은 목사들이 바빠야 안심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컨퍼런스도 없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12명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균형이 무너졌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인간의 소통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뜻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표준새번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다. 수직축은 하나님과의 만남, 수평축은 신자, 비신자, 세상과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 두 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우선순위priority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다. 
 
이 우선순위에 예배의 본질이 있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다른 것도 다 무너진다. 하나님사랑 없이 이웃사랑도 없다. 하나님께 사랑의 힘을 공급 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 해결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본질과 핵심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쁜 것, 비본질적인 것,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잠시 미루자.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한국병을 거절하고 여백의 미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적 감수성을 살리자. 속도보다 방향에 목숨 걸자. 교회의 체질을 이벤트, 일 중심에서 예배 중심으로 바꾸자.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유정] 나르시즘 콤플렉스 극복하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그리스 전설 가운데 자신의 미모에 너무 반한 나머지 매일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결국 못에 빠져 익사하고 마는 나르키소스 여신 이야기가 나온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Alchemist는 나르키소스보다 더 한 강적을 보여준다.

오스카 와일드의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여신들이 호숫가에 왔다.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여신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놀란 여신들은 호수의 반문을 의아해 했다.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울고 있는 거예요.”

우리 시대를 사는 현대인은 세속화의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나르시즘이 주는 마취제에 도취되어 상처 입은 미소를 짓고 있다. 추구하는 가치도 이웃과 함께 하는 삶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가꾸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어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자기중심성egocentrism이라고 한다. 자기중심성은 아동심리학 용어로서 아이들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성향을 일컫는다. 삶의 책임을 지고 인생을 주도적으로 영위해야 할 성인이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 같은 어른으로 사는 모습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4월, 타이거 우즈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사과하는 장면을 애틀랜타 공항의 TV 스크린에서 보았다. 깜짝 놀랄 섹스 스캔들로 때문에 세상을 실망시켰던 그가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자리였다. 그는 부적절하고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고백했다.

그때 내 귀를 사로잡은 한마디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준 사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그 대신 나 자신만을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위해 충분히 헌신했고, 이루었으며, 그래서 그 만큼 내가 즐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의 위험성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인기로 인해 얻은 돈과 명예로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의 육체적인 향락에 쏟아 부은 것이다. 자기가 돌보아야 할 아내와 가족, 후원자, 주니어 하이 골프 학교, 친구들, 업계 종사자들을 생각하지 않았다니 얼마나 이기적인 삶인가? 이것이 바로 세상문화가 “자신을 기쁘게 하라”고 가르치는 삶의 결과 아닌가? 현대인은 언뜻 보면 정상인 것 같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온통 자기 관심사에 빠져있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즘’Narcissism 콤플렉스에 절어있는 21세기 문화의 단면이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였던 프리츠 쿵켈은 자기중심성으로 인해 병든 4가지 비극적 자아중 하나를 ‘스타형 이상성격’이라 했다. 이들은 어떠한 대화나 만남이든지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고 찬사를 끌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예배는 이처럼 세속화에 물든 이기적인 본성, 메뚜기 신드롬, 나르시즘, 자아도취, 자기중심적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고 있거나, 무력하게 무릎 꿇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력 있고, 매력적이며 패기에 찬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도전하는 현장이다. 그 결과 자기중심성에 물든 우리의 자아가 하나님 나라의 건강하고 강인한 영적 존재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돈 많이 벌어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인생역전은 바로 자기중심적 자아가 이타적인 희생적 자아로 변화되는 것이다.

– 이유정 목사


[이유정] 만들어진 신과 구속하는 신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시 10:4)

예배는 드리는 자보다 드릴 대상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 날 많은 예배가 ‘드리는 자’의 경험 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에 대해 소홀히 할 때 두 가지 위험이 생긴다. 하나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무신론적 공격에 대해 아무런 변증도 못하는 무력한 감상주의에 빠지고 만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서부터 하나님은 없다는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반 기독교적 운동과 학문이 일어났고 최근 그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현대 과학자 가운데 기독교 신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공격한 자가 있다. 진화 생물학자로서 옥스퍼드대 석좌교수인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의 2006년도 저작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은 만감을 교차하게 하는 책이다. 《이기적 유전자》로 전 세계 과학과 종교계에 파란을 일으켰던 도킨스의 신작인 이 책은 뉴욕타임즈 연속 베스트셀러로 세간에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일면 의미 있는 도서이다. 무신론자인 저자는 기독교의 치부를 기독교인 대신 파헤쳐 주었다. 돈 주고도 못할 대단한 과업을 엄청난 시간을 들여 헌신적으로 연구해주었고, 문학적으로 나름 가치 있는 글로 남겨주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기독교인들이 깊은 반성과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친절하게 제공해 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빌려서라도(?) 읽을 필요가 있다. 책이 두꺼워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한 편, 이 책은 3가지 의미에서 슬픈 책이다. 기독교의 환부가 생각보다 심하게 곪은 것을 보여준다. 고름이 터져 다른 이에게 악취를 풍긴다. 만용을 넘어 자만에 빠져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독교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어떤 종교라도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갱신을 추구하지 않으면 부패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슬픔은 기독교 환부에 대한 그의 전투적 태도가 어딘가 어설프다. 옥스퍼드 대 역사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도킨스의 신》에서 밝혔듯이 도킨스는 이미 《이기적 유전자》때부터 뛰어난 과학의 보급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벗어났다. 그는 난폭한 반종교적 논객이 되어 자신의 입장을 논증하기보다는 설교하고 있다.1)

즉 도킨스는 진화 생물학 분야에서는 지적으로 활기 넘치는 무신론자이지만 기독교에 대해 논의하면서는 갑자기 전면전을 치루기 위해 과장, 단순화, 허위진술까지 일삼는 학생 토론클럽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맥그라스의 《도킨스의 신》은 사실《만들어진 신》이전의 책들인 《이기적 유전자》와 《눈먼 시계공》에 대한 맹점을 차분하게 지적해 준 대단한 역작이다.

또 하나의 슬픔은 이토록 남의 종교의 치부를 드러내기 위해 대단한 헌신과 노력을 기울인 도킨스에게 깊은 연민의 정을 느낀다. 그는 기독교의 음지에는 박식하지만 양지에 대해서는 심하게 무식하다. 평생 남의 뒷얘기나 가십거리를 들춰내는데 열심인 불쌍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인생의 환희와 기쁨, 감사와 행복은 쓰레기 같은 단어들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인 그가 왜 굳이 이렇게 어두운 그늘과 냄새나는 썩은 고깃덩어리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실재로 그가 다룬 기독교의 치부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쉽게도 가십성 기사요, 인터넷에 떠다니는 싸구려 재료들에다 과거의 케케묵은 논쟁이 상당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체험해보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직접 체험해 보기 전에는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는 귤의 생김새, 색깔의 종류, 원산지, 재배방법, 유통과정, 그리고 귤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요리에 대해 얼마든지 연구하고, 책도 쓸 수 있다. 그러나 직접 그 귤을 먹어보기 전에는 결코 귤의 맛을 알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종교, 체험하지 않은 기독교에 대해 제아무리 많은 객관적인 자료와 주관적인 느낌을 논해도 결국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래서 수사학적인 기교와 문장의 전개방식은 현란할지 모르나 그 말에 힘이 없다. 가슴에 남는 감동과 삶을 움직이는 지혜가 없다.

참으로 아쉽다. 남의 집 쓰레기나 뒤지며 더러운 냄새에 인상 찌푸리고 격분하는 지성이 아니라 인류의 희망과 꿈, 헌신과 평화, 화목과 하나 됨, 희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람들의 머리보다 가슴을 움직이는 감성과 지성을 조화한 창조적인 지성이 되어줄 수는 없을까? 언젠가 그가 기독교의 진수를 제대로 경험하고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후속 탄으로 책 한 권 써주었으면 참 고맙겠다. 《구속하는 신 the God Deliverer》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1) 알리스터 맥그라스, 리처드 도킨스 뒤집기 – 도킨스의 신 (서울 : SFC, 2007), p. 31.

[이유정] 일꾼과 예배자

작년에 한빛지구촌교회 예배사역 7년 만에 4개월 안식을 가졌다. 지쳤던 심신도 회복하고 지난 사역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예배 공부를 위해 도미한지 10년, 한 분야에서 10년 집중하면 맥이 뚫린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예배의 맥이 보였다.

이 깨달음을 바탕으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 진행될수록 예배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 눈이 뜨였다. 예배공부 4년에 전임 예배목사 7년 된 자가 예배에 무지하다면 문제 아닌가? 그러나 예배를 몰라서가 아니다. 지식과 정보가 없어서도 아니다. 기술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예배의 본질에 목숨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반성했다. 예배보다 예배드리는 일에 더 열심을 냈다. 비본질적인 것에 바빴다. 일 때문에 가정도 희생시켰다. 아내가 수없이 지적했는데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완벽주의, 일중독이란 말도 들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은 것을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예배 행위자체를 예배로 착각한다. 예배 세미나에서 만난 찬양팀원들에게 종종 듣는 말이 있다. “주일 날 찬양 봉사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하나 때문에 교회 나올 때가 많아요.” “찬양하고 단에서 내려오면 예배에서 내 역할은 끝났다, 내 할 일 다 했다는 안도감만 남아요.” 일반 성도들도 비슷한 고백을 한다. “주일날 교회 오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죠. 예배시간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거룩한 기대감보다는 솔직히 집사로서 마땅히 성수주일 해야 하는 의무감이 앞섭니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을 구하는 마음을 찾으신다. 예수님께 마음을 온통 빼앗긴 사랑의 열병에 빠진 자를 찾으신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눅 10:2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는 행위로 끝내고,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에게 마음을 다 빼앗긴다. 하나님을 배제한 사랑은 우상숭배로 빠진다.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길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신적 사랑이 넘쳐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

이것이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즉 우리가 예배할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우리가 예배할 때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흘러나온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는 이 순서가 뒤바뀌었다. A. W. 토저의 말처럼 ‘예배자보다 일꾼이 많은 시대’이다. 하나님을 ‘일손이 부족해서 쩔쩔매는 공사판의 감독’[footnote]A. W. 토저, 이것이 예배이다 (서울: 규장, 2006), p. 66.[/footnote] 정도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 심각한 착각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원한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삶의 현장에서 따로 시간을 내서 성경공부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는 자꾸 예배라는 것을 어떤 행위로 규정하려고 한다. 예배는 행위 이전의 문제이다. 마음의 문제요 본질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예배행위는 껍데기다. 예배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사는 것이다.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부, 직장에서 커피를 타는 사무원, 길거리의 청소부 등 어떤 직종,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행하는 것이다.

17세기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평범한 주방 일을 하면서 당대의 영적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로렌스 형제(Br. Lawrence)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좋은 모델을 보여준다. ‘주방성자’로 불리는 로렌스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프로그램으로 체험할 수 없으며, 반복되는 연습을 통한 삶의 습관이라고 했다. 즉 임재란 하나님이 언제나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만 영혼의 관심을 집중하는 것이다[footnote]로렌스 형제, 하나님의 임재연습 (서울: 좋은씨앗, 2008), p. 18.[/footnote].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 없이 ‘내’가 팔팔하게 살아있다. 내 관심사가 하나님보다 우선한다. 교육도, 훈련도, 전도도, 선교도, 심지어 예배조차도 하나님 임재 없이 ‘일’로 행해진다. 예배자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일만 하는 사람은 나무, 풀, 짚을 쌓아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불로 심판할 때 다 타버릴 것들이다. 하나님은 일꾼보다 예배자를 찾으신다. 그 예배자를 통해 하나님 자신이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이유정] 인스턴트에서 깊이로

인스턴트에서 깊이로
 

현대인은 편리함이 편안함보다 우선하는 문화에 젖어 산다. 그 중의 하나가 인스턴트 문화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세 가지 적을 소음, 성급함 그리고 번잡함으로 보았다. 정신의학자 칼 융 (Carl Gustav Jung)은 바쁜 것은 사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 바로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공격하는 바쁜 도시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악질이다.

이런 초고속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도시인에게는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 그만이다. 그뿐인가? 사람들은 편지보다 이메일을 선호한다. 미국은 해마다 줄어드는 우편물 때문에 수백 년 역사의 우체국이 위기를 맞고 있다.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사이월드나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온라인을 통한 인스턴트 대화로 변하고 있다.

요즘 한국의 1318세대[footnote]대흥기획이 만들어 낸 용어로써 13~18세에 해당하는 세대를 지칭한다. 대홍기획에서는 1318세대를 WANT(Wide Active New Teenager)세대로 명명했다. 1993년 이후 출생자로 현재 13∼18세의 중·고등학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WANT세대란 명칭은 이들 1318세대가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을 주도하고(Wide),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거침없이 넘나들며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행동하며(Active), 새로움과 다양함을 열망하는 새로운 십대(New Teenager)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 광고기획사에서 1318세대, 1924세대 같은 조어를 만드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모습도 보인다. 경향.com 기사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2006. 5. 23자) 참조.[/footnote]는 ‘문자’에 살고 ‘메신저’에 죽는다. 한 통계[footnote]대홍기획이 2005년 10월부터 2006년 3월까지 6개월간 서울에 거주하는 13~29세의 남녀 600명을 대상으로 개별 면접 조사한 결과이다.[/footnote]에 의하면 이들은 단 1초의 기다림도 지겨워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조사 결과 청소년의 평균 텍스팅(texting) 시간이 하루 네다섯 시간이 넘는다. 인터뷰한 중학생은 “하루 종일 문자 안 보내고 수다 안 떨고 메시지 안 보내는 시간은 2시간도 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단다.

오늘의 대중문화는 깊이보다 인스턴트에 열광한다. 데이비드 웰스의 언급처럼 현대의 신기술이 기존의 기술을 점차 빠른 속도로 대체하면서 제품 수명의 주기가 급속히 짧아졌을 뿐 아니라 삶 속에서 영원함의 자취도 대부분 사라졌다.[footnote]데이비드 웰스, 윤리실종 (부흥과개혁사, 2007) p. 47.[/footnote] 이제 빨리빨리 문화를 한국병으로만 치부하기[footnote]민경배 교수는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인의 공통된 특성이지만 기성세대가 성과에 집착한 ‘빨리빨리’라면 10대들의 성향은 반응을 빨리한다는 의미에 가깝다고 했다. 경향.com 기사 참조[/footnote]에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사물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파악하고 존재를 지엽적이 아닌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능력을 무너뜨렸다. 리처드 포스터는 이를 피상성의 수치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즉각적인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footnote]피처드 포스터, 영적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1986) p. 13.[/footnote]

세상은 감각을 터치해줄 사람을 찾지만 오늘 우리는 깊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즘 기독교 출판도 깊이 보다는 감성터치 작가가 인기이다. 목회자의 설교도 깊은 복음의 진수보다는 감성을 터치해야 인기가 있다. 신앙도 인스턴트 신앙을 추구한다. 영적 성숙도 3개월 숙성반처럼 단기에 드러나는 실적이 나와야 한다. 교회도 초고속 성장이라야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기독교가 거꾸로 가고 있다.

거꾸로 가도 근성이 필요하다. 한번은 연어 떼의 일생을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본 일이 있다. 수천, 수만 킬로미터의 바다 여행 끝에 세차게 흘러내리는 민물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알을 낳고 죽는 거대한 연어 떼의 본능을 보면서 비록 동물이지만 그 근성 만큼은 인간보다 위대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연어들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거친 세파를 거슬러 올라가는 근성과 다음 세대를 위해 수만 킬로를 준비하는 깊이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다.

영적성숙의 동의어는 깊은 영성이다. 성숙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인생 전체의 여정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인스턴트 성숙이란 있을 수 없다. 오늘의 예배 문화도 인스턴트에 절어 있다. 단 한 번의 예배로 최고의 예배자가 탄생해야 할 것처럼 몰아간다. 물론 한 번의 예배가 중요하다. 사울은 한 번의 예배 실패로 하나님의 축복의 대열에서 낙오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예배로 신앙의 전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장차 망하게 될 죄악의 도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떠나는 한 순례자의 여로를 장엄한 서사시처럼 그려낸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그의 인생 마지막까지 가는 길목마다 고뇌, 회심, 전도, 박해 등 다양한 국면을 경험한다. 이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예배는 이러한 인생여정의 가장 중요한 동반자일 뿐이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삶의 깊이와 여백을 누리며, 예배를 축으로 인생 전체를 관망할 줄 아는 깊이 있는 기독교인, 깊이 있는 목회자, 깊이 있는 예배인도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


[이유정]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

추락하는 것에 날개가 있다1)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여행가 한비야가 그의 책《그건 사랑이었네》2)에서 고교시절 미국인 선교사에게 받은 시를 소개했다.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때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3)

나도 짧은 인생이지만 여러 번 낭떠러지를 경험했다. 17년 교회 생활의 끝에 나는 자살을 생각하는 대학 2년생 젊은이로 무너지고 있었다. 인생의 도피처로 들어간 군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직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날개를 달아주셨다. 군 생활 2년 동안 기타하나 메고 3사단 전역을 돌아다니며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찬양 군종조 활동을 했다. 한국에서 미국에 건너올 때도 10여년의 기독교대중음악(CCM) 사역의 끝에서 영적 침체를 경험하며 헉헉거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예배회복’의 부르심으로 날개를 달아 미국으로 건너왔다. 

유학 와서 1년 지나니 한국에서 가져온 재정이 바닥났다. 빈털터리 일보직전, 4시간 반 떨어진 이민교회에서 주말 사역 요청이 들어왔다. 분쟁의 어려움을 찬양으로 극복하려는 염원이 있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한국에서 찬양사역 전문가로써 10년 넘게 사역했던 내 마음이 밑바닥까지 무너져 내리던 기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광야 같은 시간을 통해 나의 내면을 다루셨다.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사역하면서 나도 모르게 높아져 있던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은혜를 누렸다.

미국생활 10년의 마지막 3년 간 나는 다시 한 번 낭떠러지로 나를 밀어내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왜 영광스런 주의 몸 된 교회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하나님께 불평도 많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 광야 같은 기간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는 욥의 고백처럼, 오히려 우리를 정금처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광야 학교 레슨 기간임을 깨닫게 되었다. 

광야의 헬라어 ‘에레모스’의 의미는 적막하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 물과 식물이 없어 살 수 없는 ’황무지’, 황폐하여 주민이 떠나버린 유기된 땅이다. 한홍은 《거인들의 발자국》에서 이 광야를 자신의 자아가 부서지는 곳, 교만과 독선이 녹아내리는 곳,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한 공격을 당하는 곳, 끝없는 방황 속에 탈진되는 곳,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곳,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생각이 전혀 먹히지 않는 곳, 한없이 외롭고 한없이 서러운 곳, 서글픈 마음이 드는 힘든 곳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엘리트는 고급 시설을 갖춘 명문 학교에서 나올지 몰라도 리더는 반드시 광야라는 학교를 통해서 빚어진다고 했다.

사무치게 동감이 되는 말이다. 성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그 광야학교를 통과했다. 40년 동안 광야에 도피해 있던 모세, 10년 넘게 엔게디 광야를 도망 다닌 다윗, 애굽의 밑바닥을 죄다 경험한 요셉이 그랬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30세까지는 야전경험을 하시지 않았는가? 

이 광야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나를 정금같이 단련하셨다. 겸손하게 만드셨다. 전경일은 그의 책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에서 한 산악인 친구가 한 말을 소개했다. “넘어져 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정상까지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말 그대로 나는 낭떠러지를 경험하지 않고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새로운 빛을 발견했다. 광야 같은 10년의 끝자락에 허락된 안식월 4달 동안, 나에게 새로운 날개가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깨달음의 산물이 바로 곧 출간될 책 《존재를 살리는 예배의 힘》(가제)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떨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쉬운 말로 표현하면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목사는 《고통에는 뜻이 있다》에서 이를 ‘변장된 축복’이라 말했다. 고난  자체의 문제를 보지 말고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 중요한 핵심이다. 때때로 우리를 낭떠러지로 몰아가시지만, 결국에는 창공을 날도록 날개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한다.            

– 이유정 목사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


<주>
1) 오스트리아 여류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은 그의 시 ‘유희는 끝났다’(Das Spiel ist aus)에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는 표현을 썼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 추락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추락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미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는 의미로 본다. 이문열은 동명의 제목으로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썼는데 젊은 날의 광기어린 사랑을 그린다. 이 책에서는 ‘추락하는 것에 있는 날개’를 끝 모를 추락, 즉 죽음이야말로 인간이 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풀었다. 나는 바하만의 의미로 이 제목을 붙였다.

2)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 p. 89. 한비야는 그녀의 나이 35세에 배낭하나 달랑 메고 7년간 세계여행을 한 여행가이자 작가이고, 월드비전 긴급 구호팀장으로 뛰기도 한 독특한 분이다.

3) 한비야가 이십대 초반, 자신에게만 모든 문이 닫혀 있는 것 같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세상이 합심해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힘들어 하던 시절이 있었단다. 여고시절 영어성경반을 가르치던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던 글, 일기장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맨 앞장에 써 놓았던 시. 이 순간 정신없이 담금질을 당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나누고 싶다고 소개한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