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정] 예배의 힘

“이제부터 너희에겐 세 가지 자유가 없다. 첫째 자유, 둘째 행동할 자유, 셋째 웃을 자유!”

1983년 초여름, 삼 사단 백골부대 신병교육대에 도착하자마자 매섭게 생긴 교관이 던진 서리에 찬 말이다. 눈썹까지 내려온
모자를 눌러쓴 조교의 검게 그을린 얼굴 때문인지, 그 밑에 겨우 보이는 하얀 눈은 마치 독수리의 날카로운 눈빛처럼 매섭게 빛났다.

“뒤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말이 떨어지자마자 30여명의 신병은 연병장을 구르기 시작했다. 조교는 뙤약볕 무더위에 아랑곳 않고 어리벙벙한 신병들의 사회티를 벗겨내기 위해 군기를 잡는데 혈안이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쓰러져 거품을 정도였다. 2시간 넘도록 연병장을 뛰고, 구르는 동안 문득 이제 나는 이상 마음껏 자유를 누릴 있는 사회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자리에 있었던 30여명의 신병은 이제 사회와 격리된 군인인 것이다. 그래서 이등병으로 입대한 모든 대한한국 남자는 사회에서 가졌던 모든 지위, 출신, 배경, 교육, 신분을 떠나군인이라는 새롭고 동등한 지위로 바뀐다. 그래서 장관의 아들이건, 시골 농부의 아들이건 똑같은 입장에서 똑같이 훈련받고, 기합 받고, 차례를 받는다. 

예배의 현장도 마찬가지이다.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가치가 동등하다.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건 공사판에서 흘려 일하는 막노동 일꾼이건 상관없다. 대기업 최고 경영자이건 이십대 비정규직 사원이건 상관없다. 사성장군이건 환경미화원이건 상관없다. 순간 모두가 동등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뀐다. 이것이 예배의 힘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려주신 예배의 그림이 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_ 4:23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예배에 대해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예배의 본질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에 어떤 대상이 따로 없다. 있다면 가지이다. 그것은 아버지께 드릴 있는 성도의 지위이다. 바로 하나님의 자녀 말이다. 그래서 예배자의 조건은 하나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_ 1:12

예배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 지위와 학력이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이상 예배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사회적 능력과 부가 사람을 차별한다면 이상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향해형제자매라고 부르는가? 예수를 머리로 몸을 이룬 지체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결코 상상할 없는 평등의 패러다임이다.

그래서 예배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권력투쟁, 빈부격차, 상하계급, 인종차별의 검은 파워를 일순간 지워버린다. 모든 관계, 모든 입장, 모든 스타일, 모든 인종, 모든 형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한다. 그래서 땅에서 회중 예배 현장만큼 감사와 기쁨, 사랑과 평화, 치유와 회복, 자유와 해방, 신뢰와 소망의 함성이 터져 나오는 곳은 없다.

예배는 어떤 지위, 계급, 빈부, 종족의 사람이라도 담아낼 있다. 그것이 바로 예배의 그릇이다. 예배의 넓이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넓이이다. 예배의 높이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신 예수님의 높이이다. 예배의 깊이는 모든 진리를 꿰뚫는 성령님의 깊이이다. 예배 현장에 살아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뛰어넘으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_ 55:8,9

가슴 벅차지 않은가? 통쾌하지 않은가? 세상의 어떤 허울도 통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본질 자체가 인정되는 현장, 모든 가식과 껍데기, 위장과 술수가 통하지 않는 준엄한 정의가 살아 있는 , 모든 미움과 시기, 분쟁과 갈등, 경쟁과 시비가 힘을 잃고 섭씨 수천 도의 십자가 용광로 사랑으로 녹아버리는 , 연금술의 지존인 아버지 하나님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빚으시는 신비의 현장이다. 바로 그곳이 예배의 현장이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배의 그림이다.

[이유정] 예배와 격리된 회중

최근에 출간된 책 한권을 소개한다. CCM 아티스트인 마이클 카드의 ‘애가’(A Sacred Sorrow)이다. 번역은 ‘많은물소리’ 편집자인 황병구씨이다. 다음은 그 책의 일부이다. 

“주일 아침 나는 회중 가운데 서 있다. 방금 시작된 예배는 곧 ‘무르익는다.’ 내 곁에선 내가 알고 또 신뢰하는 사람들이 경배의 경험 속으로 ‘들어간다.’ 몇몇은 손을 든다. 모든 회중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기에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또 어떤 이들은 눈을 감는다. 나를 둘러싼 이 사람들은 모두 내 친구이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이다. 이들은 내가 도달해 보지 못했고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깊은 곳까지 달 수 있는 이들이다. 20분쯤 지나면 경배의 시간은 마무리된다. 내가 느낀 것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생긴 다리 통증뿐이다. 우리는 모두 앉아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를 들을 준비를 한다. 

지금 이런 사실을 독자들 앞에 시인하는 것이 내겐 참 부끄러운 일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주일 아침마다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다. 비로소 자리에 앉을 때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아무에게도, 특히 하나님께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반갑게도 이제야 끝났군!’ 여전히 다리에 통증을 느끼며 좌석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사막에서 혼자 한참을 헤맨 느낌이다. 군중 한가운데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종류의 예민한 외로움이다. 그 사막은 역설적으로 파릇파릇하다. 다른 이들의 예배로 인해 새순이 돋아났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동일하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치밀한 교제를 함께 나누었던 이들 한가운데서 나는 혼자 격리된 느낌이다. 그들은 내 주위에서 기뻐하며 생수를 마시지만 나는 암당하고 좌절스러운 갈증 속에 남겨진다.”

이 글은 경배와 찬양에 대한 마이클 카드의 예배 경험담이다. 동감이 되기도 하지만, 게 중에는 “마이클 카드 같은 훌륭한 CCM 찬양사역자에게 어떻게 경배와 찬양 시간이 지루할 수가 있지?”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다. 종종 백발이 성성한 어른들이 오히려 젊은이들 보다 더 신나게 찬양한다. 그런가 하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모던 워십보다 전통 예배의 장엄한 파이프 오르간이나 조용한 찬송가를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마이클 카드는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고백했다. 

“나는 속으로 그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꾸며내고 있다고 정죄했다. 내가 도달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그런 친밀함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죄라는 것은 물론이고, 내 판단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깊고 진정한 예배에 들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진실, 가치와 같은 본질의 문제에는 의외로 관대하면서 외형, 스타일과 같은 비본질의 문제에 목숨을 거는 경향이 있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의 진정성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가의 이슈가 아니다. 형식과 스타일의 문제도 아니다. 흑백 논리로 따질 수 없는 본질의 문제이다. 스타일과 형식, 음악과 문화를 뛰어넘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예배의 본질을 붙잡아야 한다.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에 타 없어져도 끝까지 남는 것, 아무런 예배도구가 없고, 아무런 형식, 심지어는 음악이 없어도 붙잡아야 할 마지막 한 가지 본질,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장엄하고 거룩한 형식의 전통예배라 할지라도, 첨단 멀티미디어와 완벽한 음향, 미디어 시스템을 갖춘 현대예배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었다면 헛것이다. 예배 후 그날 깨달은 말씀대로 살고 싶은 아무런 열망이 없다면 죽은 예배다. 기독교 최고 가치인 예수의 십자가 사랑에 감격한지 10분도 안 되서 식당에서 먼저 좋은 자리 잡으려고 다툰다면 영적 분열 증세이다. 하나님보다 찬양팀의 화장, 옷맵시, 설교자의 억양, 머리 스타일, 성가대의 곡 스타일, 재미있는 광고만 더 머리에 남는다면 장례의식에 불과하다. 그날 회개한 죄 문제에 대해 결연한 의지로 돌아서겠다는 열망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가짜 예배이다. 예배 때 열정적으로 부른 찬양 가사와 6일간의 생활이 전혀 다르다면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예배이다. 이런 예배는 결단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가 아니다.

[이유정]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작곡 배경

최근에 어노인팅 대표 박철순 간사가 안식월을 맞아서 저희 집에서 1주일 정도 머물
습니다. 덕분에 한국에 있을 때도 갖지 못한 진한 교제를 10년 만에 누렸습니다.
지난 20년간 예배사역의 현장 밑바닥부터 오직 예배 하나로 달려온 그의 삶이 오늘의
어노인팅을 있게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한국의 예배찬양 운동이 지역교회 현장보다는 패러 처치 중심인 것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니다. 예배신학은 지역교회 예배의 특징을 공동체적 영성으로 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예세미나, 컨퍼런스 주제들이 예배자의 개인적인 삶이나 예배의 본질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7년간 언투유 예배사역은 공동체적 영성과 사역의 체질을 회복하는데 주력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번 박철순 간사와의 만남을 통해 개인, 공동체를 포괄하는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예배 언어에 눈을 떴습니다. 그 이후 제가 쓴 예배 곡의 가사들은 예배의 본질에 다가선 언어들로 채워져 가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곡이 오늘 소개하는 ‘주의 성로 가는 길’입니다.
 
최근 우연히 2005년 1월에 쓴 ‘기쁨’이라는 시를 찾았습니다. 주일 찬양 프로그램 디자인을 하면서 쓴 시였습니다.
 
“주의 성소로 가는 길, 주께 예배하는 시간, 주께 다가가는 시간, 주의 말씀 듣는 시간,
주를 묵상하는 시간, 주가 베푸신 잔치에 참여하는 시간, 그 날개 그늘아래 거하는 시간…
(중략) 이 모두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저의 기쁨입니다.”
 
지나간 시를 묵상하며 문득 지난 10여 예배사역의 현장에서 경험한 예배의 기쁨들이 하나 피어올랐습니다. 보통 곡을 쓸 때 제 영혼을 뒤흔든 말씀 또는 경험에 의해 영감이 떠오릅니다. 이번에는 시의 첫 줄인 ‘주의 성소로 가는 길’ 한 문장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기쁨이 새로운 예배언어로 물 흐르듯 흘러 나왔습니다.
 

최근 미국 경기침체가 갈수록 심화되면서, 한인들의 재정적 압박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졌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실물경제는 교우들의 삶의 현장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교회도 함께 힘겨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이 주는 무거운 짐과 개인적인 고뇌의 마음을 모두 모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곡이 이틀 만에 탄생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이나 사역 현장에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과의 사귐이 지속적으로 일어나예배 언어들이 풍성하게 개발되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

[이유정] 커피전문점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

지난 3월 말, 정신없이 돌아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속에서
영주권 분실로 귀국 일정이 한 두주 늦춰진 붕뜬 상황에서
사랑하는 교회와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10년의 세월이 주는 단절감에 어디를 가나 낮선 건물과 도로,
새로운 시설들이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방문 2주째 화요일, 대사관에서 기대했던 출국 일자 답변을 듣지 못해 낙망해 있던
날…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2주 만에 저녁 약속 전 두 시간 넘는 여유가 있었고
허탈한 제 발걸음은 인근의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향했습니다.
재미있는 영화 제목들이 눈에 띄었으나 다 바람 같았습니다.
 
무엇을 볼까 10여 분간 씨름하다가 표사는 줄에도 섰지만
결국 마음이 내키질 않아
포기하고 바로 옆에 있는 영풍문고로 향했습니다.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아주 작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인재연습”이라는 고전입니다.


17세기 프랑스, 주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수 많은 신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로렌스 형제의 편지 내용입니다.
이 책을 들고 서점 안에 있는 작은 커피전문점 구석에 앉아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보통 삶이 최고조에 있을 때나 최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분주한 집안 일, 지친 사회 활동, 일상의 단조로움 속에서
심지어는 교회 사역이라는 종교적 활동 속에서도
일에
파뭍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로렌스 형제는 수도원 한구석에 있는 허접한 주방일을 십 수년 하면서
바로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도 시간이 다른 시간과 다르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회나 일상의 모든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읽어 내려가다 제 마음을 때린 구절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영적 생활을 시작할 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살피고
돌아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모든 멸시를 받아 마땅하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자격도 없으며
온갖 불행과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해도 마땅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상황을 겪으면서 우리는 건강을 잃고 내적, 외적으로 몹시
괴롭겠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겸손케 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차후에 사람들로부터 괴로운 일이나 유혹, 반대

그리고 반박을 당하더라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 오히려 순수하게 그 일들을 감수하고 감당해야
한다.” (p. 52,53)
 
허탈감에 정신줄 놓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선택한 영화관람 발걸음…
한국 오면
영어의 스트레스를 벗어나 편하게 한국 영화 하나 보고 싶었던 작은 바램…
그것 마저 내려놓았을 때 하나님께서 제 영혼에 맺혔던 앙금
하나를 풀어주셨습니다.
 
지난 10여일간 한국 땅의 예배회복을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면서 드러난 열매들을 보면서

제 안에 의로운 삶, 거룩한 삶에 대한 일종의 영적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주께 헌신하는 나름 ‘의인’의 간절한 바램을
외면하시고
왜 이런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시는지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있었는데
로렌스 형제의 이 평범한 문구 하나에 제 마음이 녹아
내렸습니다.
높아졌던 제 마음을 겸손케 하시는 성령의 깊은 터치를 경험했습니다.
로렌스 형제의 추구처럼, 소란스럽고 복잡한 일상의
한 커피전문점 공간이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워진 눈물의 은혜를 겸험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바쁘고 급한 일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한 색다른 은혜의 시간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유정(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CCM 듀엣 좋은씨앗)
 

[이유정]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해마다 봄, 가을이면 교우들의 당면 과제, 교회의 필요 등을 고려하여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들이 특새의 주제를 고르기 위해 고심합니다. 특별히 올 가을은 ‘전 세계 증시 공황상태’, ‘금융공룡 리먼 브러더스의 부도’, ‘1930년 미국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위기’,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한국 상황도 ‘환율 폭등’, ‘코스피, 코스닥지수 연중 최저점 경신’, ‘주가 18년 공든 탑 1년
에 무너지다’, ‘실물경기침체’ 등 연일 최악의 보도가 미디어를 장식해 왔습니다. 그 영향으로 미주 한인교회들 마저 헌금이 급감하는 등 ‘불황 찬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은 특새의 주제는
의외로 쉽게 결정되었습니다. 처음 이 주제가 추천되었을 때에 예년과는 달리 모두들 이견 없이 찬성했습니다. 주제는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근거로 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입니다.

보통 한빛지구촌교회 특새 주제는 잘 알려진 찬양 곡 제목과 연결되어
결정되곤 합
니다. 예를 들어 “너는 내 것이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약한 나로 강하게”, “주만 바라볼지라” 등 모두가 잘 알려진 찬양곡 제목들과 동일하지요. 매일 새벽마다 통일된 주제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동일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교우들은 일주일 내내 진한 은혜의 감동에 젖어
곤 한답니다.

이번에도 ‘부르짖으라’는 주제의 곡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고 또
찾아도 적당한 곡이 없었습니다. 70년대 옛 복음성가인 “부르짖으라 내 응답하리라”는 곡이 그나마 알려져 있었으나,
너무 옛 스타일의 조용한 곡이라서 특새에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또 뜨인돌과 최덕신의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라는 곡은 말씀을 그대로 표현한 수준 있는 곡이지만 이른 새벽
교우들이 소화해 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바로 곡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 기도부
탁을 했습니다. 본래 강한 영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동기부여가 있어야 곡을 쓰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든든한 기도의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하루 정도 예레미야 33:2-4절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다녔습니다.

다음날 찬양 준비하던 늦은 저녁, 후렴 부분의 멜로디가 떠올랐습니다. 평소 제가 쓰는 화성이나 멜로디 스타일이 아니어서 쓰고 나서 무척 생소했고, 또 불러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계속 멜로디가 맴돌아서 후렴을 중심으로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로마서 8:35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우리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극한 상황이더라도 예수의 사랑을 끊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말씀을 근거로 1절 가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습니다.

“고통과 시련이 내게 닥쳐와도 나는 쓰러지지 않네.
누구도 우리를 주사랑 안에서 끊을 수
없네.”

이는 어찌 보면 다급하기까지 한 주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의 현대적 상황을 표현하는
가사였습니
다. 수천 년 전의 텍스트(text)를 오늘의 콘텍스트(context)화
하는 것이 설교론의 핵심 이슈인 것처럼, 곡
을 쓰는 저에게 성경구절의 현대적 적용은 작곡할 때마다 항상 우선적인
과제입니다. 곧 2절이 흘러 나
왔습니다. 조금 더 적극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은 변하고 날 배반하여도 예수는 변치 안네.
우리도 십자가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승리해.”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인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를 중심으로 후렴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묵상해보니
사실 이 말씀을 더욱 권위 있게
하는 말씀은 2절이었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
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이 말씀을 여러 번역본으로 비교정리해서 “땅을 만드신 주, 세상의 주관자, 통치하시는 왕, 그 이름 여와”로 정리되었고, 이 가사를
강조하기 위해 브리지(bridge)로 표현했습니다. 브리지 부분의 음악 양
식은 행진곡 풍으로 했습니다. 이
브리지의 가사 초본을 보신 장세규 목사님께서 제안하신 아이디어로
동일한 멜로디에 가사
“나를 지으신 주, 내 삶의 주관자, 다스리시는 왕”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면
브리지는
자연스
럽게 “주가
말씀하시네~”
고백으로 전조 되어 한층 고조된 후렴으로 연결이 되도
편곡을 했습니다.

결국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기도로 완성된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주제곡에 대한 반응이 의외로 좋습니다. 특히 가사에 큰 힘을 얻는다는 반응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렇게
힘든 때에 이 찬양이 한국교회에서
많이 불릴 수 있도록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모 집사님의 격려도 감사했습니다. 아무튼 이 곡으로 이번
특새는 주제 찬양도 없는 썰렁한
특새로 남지 않아도 되었고, 더 나아가 많은 분들의 기도로 우리의
고백과 상황에 맞는 찬양으로 매일 새벽을 깨우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하지
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이유정] 거룩한 영적 낭비

2006년
코스타에서 자주 들었던 문구 중 하나가 ‘영적 낭비’이다. 30명이나 되는 많은 강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영적 포텐셜에 비해 일주일
동안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주강의 한번, 또는 강의 몇 번에 상담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것도 사례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가족
등록비까지 책임지고 자비량으로 섬기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있는 말로 들린다. 실제로 한국, 연변,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 오신 강사들의
경우는 거의 10일 정도가 강의 몇 번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것을 낭비가 아닌 거룩한 투자로 본다.

사도행전
8:26이하를 보면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이상한 명령을 내리신다. 명령의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라는 것이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전 지역으로 흩어졌고, 아직 회심 이전의 사울은
보이는 교회마다 파괴하고 성도들을 붙잡아 감옥에 넘기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복음전도 사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으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대의 위기였다. 그런
긴급한 상황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사막 길로 무작정 떠나는 것은 시간낭비는 물론, 뻔뻔스러운 도피로 보일 수도 있다. 태풍으로 교회가 침수되어
정신없을 때 교회의 지도자가 갑자기 성령께서 지시하신다고 먼 시골로 떠나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나 빌립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했다. 사막 길에서
당시 에티오피아 여왕 밑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큰 권세를 지닌 내시를 만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까지 주게 된다. 이 내시는 분명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선교사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빌립도 나타나, 카이사랴에 이르는 모든 고을에서 선교활동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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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에 못 미친다. 이사야 55:8,9에서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고 했다. 코스타에서는 4번의 저녁집회가 있다. 미주에서 경험하기
힘든 천여 명의 예배자들이 드리는 감격적인 예배의 향연이 매일 저녁 드려진다. 1,000여명이 뛰면서 드리는 열정적인 찬양과 선포되는 복음의
메시지를 상상해보라. 그 안에는 20대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소명, 평신도와 목회자, 교파와 교회,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진정한 찬양과
예배의 축제가 드려진다. 진정 천국의 모형 아닌가? 이 예배를 통해 올해도 1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고, 200명 넘게 2년 이상 단기선교에
헌신했다. 그뿐이 아니다. 성인 참석자 반이나 되는 500여명의 학생들이 강사들과의 일대일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 최고의 상담실이
코스타 내내 운영된다. 우리 인간 편의 ‘낭비’가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결실’로 바뀌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
유학생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
이처럼
1
세대가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낭비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눈물과
땀과
사랑을
투자하는
나라가
있었는가?

결과,
자신의
편의와
안락을
포기하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미지의
땅을
향해
회중의
5
분의
1

자리를
박차고
무대
위로

나아가는

장엄한
광경을
상상해보았는가?
2006

현재

세계

16

지역
,
남미,
러시아,
남유럽,
북유럽,
토론토,
밴쿠버, 시카고
,
인디아나
폴리스,
북경,
상해,
동북차이나,
일본,
대만,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에서

거룩한
영적
낭비’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23

,
이처럼
말도

되는

영적
낭비’를
감히
꿈꾸고
이를
실행에
옮겼던
우리의
1
세대
영적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영적
축제는
지금까지

땅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그분들에게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이유정
목사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좋은씨앗(C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