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2009 – 강사 인터뷰] 한철호 선교사

1. 한철호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지만 처음에는 성탄절에만 선물 받으려고 교회 나갔는데, 고등학교 때 선배의 등쌀에 밀려서 교회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쁜 여학생들도 많고 해서 계속 나가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그 회심의 경험이 생생합니다. 어느날 기도회를 하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엄청난 감격으로 다가왔고 나도 모르게 회개와 내 삶을 그 분에게 드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저희 집과 교회가 담 하나 사이로 연결되어있었거든요! 대학에 들어와서는 IVF를 통해서 말씀에 대한 깊이와 헌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번에는 후배들의 등쌀에 밀려서 IVF 간사가 되었고, 그 후 18년간 한국IVF 캠퍼스 간사와 졸업생담당대표간사로 섬겼습니다. 캠퍼스 간사로 섬기면서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배우게 되었고, 졸업생사역을 하면서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일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IVF의 국제본부 사역인  IFES의 아시아권 사역자로 섬기면서 세계선교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고,  2000년 부터는 선교한국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재 선교한국 상임위원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선교한국은 2년 마다 열리는 청년선교대회를 주도하는 운동입니다. 매번 5천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모이고 선교한국을 통해서 많은 선교 헌신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내와 두 딸이 있습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제가 만나는 사람 마다 피곤하다고 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래서 쉼이 필요합니다. 이번 수련회도 참가자들에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쉼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전할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분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피곤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쉼을 허락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쉬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세상의 무리들, 즉 세상의 온갖 필요와 문제를 가지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시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천명을 먹이시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이 잘 이해되지 않았고, 그래서 대들기 까지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오천명을 다 먹일 수 있는 200 데나리온이나 되는 엄청난 돈을 다갖고 그들에게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것, 즉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을 드릴 때, 기적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엄청난 과제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선교지와 우리의 일터와 학문현장과 가정과 세상에 엄청난 필요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 모든 필요를 채울 모든 자원을 우리가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의 작은 것들을 그리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도전 받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들이 마음 한편에는 그 일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힘들고 벅차고 그래서 감히 도전하기 두려워하거나 주저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많은 도전들 앞에서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역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십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있는 작은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 믿음의 역사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소망하고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3. 이번 코스타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거나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감당하기 벅찬 주제 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거슬러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용기를 가진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은 때로는 우리가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그렇게 엄청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만드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풍조와 힘이 제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서는 세상은 바다의 물 한방울이며, 태산의 먼지에 불과합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 입니다.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간다면 때로는 속도가 느리고 불편하게 간다고 할지라도 그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지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4. ‘선교한국’의 책임을 맡고 계신데요, 어떤 비젼을 갖고 계신지.

코스탄들이 그 비젼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부터 130년 전 한국에 복음을 전하러 온 아펜셀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나이가 25세였습니다. 하나님은 세계가 복음화 되어지는 일을 위해 항상 그 나라의 젊은이들을 사용하셨습니다.저는 이와 같은 일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 지난 20년 동안 한국에서 수 많은 선교사들이 나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젊은 청년시절에 선교에 대한 도전을 받고 헌신하고 준비하여 나간 분들입니다. 이러한 일에  젊은이들을 선교에 동원하는 선교한국이 그 역할을 감당했다고 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선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잘 준비된 헌신된 젊은 선교 헌신자들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가치보다 하나님의 가치를 더 우선시 하고, 세상에서의 명성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열방에 알려지길 소망하는 준비된 젊은이들이 필요합니다. 지난 15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서구의 청년 지성인들로 하여금 세계복음화의 비전을 보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제 남반구 선교시대의 선두에 서있는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동일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5. 근래 한국 기독교에 대해서 반성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타문화와 타자를 존중하는, 무례하지 않은 기독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요?

상식은 기독교 진리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배타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사상을 포괄할 수 있는 참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기독교의 유일성을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문화 안에 전달할 수 있는가 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자꾸 기독교가 무례하게 전달되는 것은 복음이 선포로만 전달되고 삶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삶으로 전달하는 일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인내와 배려와 상호 존중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고전 13장에 나온 사랑의 정의는 상대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지 않고 오히려 상대에 대한 태도의 문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부분에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기독교가 그 나라의 문화와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문화를 변혁해 가지 않으면 그 기독교는 곧 소멸되고 맙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한국 문화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문화를 변혁해 갈 것인가, 아니면 한국 사회와 계속 물과 기름과 같은 상태로 가다가 한국 사회로부터 배척 당할 것인가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 비록 한국교회가 대통령을 배출하기도 했지만, 한국 사회는 한국 교회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본래적으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김수한 추기경의 선종 후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반응에서 보여진 것처럼, 단지 최근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척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1980년대에만 해도 없었던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1980년대 보다 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무례하다고 지탄을 받는 것은 단순히 복음 전파의 열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난 얼마간 보여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비상식적인 태도와 발언 때문입니다. 몇몇의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한국교회 전체가 배척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지도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겸손하고 섬기는 지도자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와 같은 사역의 존재는 더욱 중요합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기획기사] 세상의 악, 하나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세상의 악, 하나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주권이 적용된다면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통, 고난을 하나님은 허용하시는가? 세상의 수많은 악과 무질서, 그리고 세상 나라의 번창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용기를 가질 있을 것인가?

욥의 용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주권은 전제되어 있다. 심지어 사탄의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욥은 하나님께 항의한다,그리고 하나님은 대답한다. 욥의 항의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기다렸다가 대답하신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에게 닥쳤던 일들에 대한설명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대답은 욥과의 관계에서 과거에 있었던 많은 일들, 그리고 과정에 형성되었던 믿음과 신뢰에 대해 지적하신다. 우주와 세상의 운행은 욥이 이해할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하나님은 욥에게 이해할 있는 사실들을 알려주시고 과거에 그에게 쌓인 믿음과 신뢰를 다시 되살아나게 하신다. 지적인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 고통 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세상의 악을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의 악과 악의 결과에 의한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신가. 세상에서 생기는 절망과 고통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인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죽음을 경험하실 예수님뿐 아니라 그와 완전한 일체를 이루고 계시던 성부 하나님도 죽음을 경험하신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은 성부 하나님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악의 결과인 죽음을 스스로 감당한 사건인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을 당하신, 고통을 직접 경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어떤 고통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이 주는 용기 하나님 나라의 운행의 구체적인 원리에 대해서 우리는 없다. 우리들의 지적인 한계로 역사와 사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발전되어가는지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것은 지적인 동의가 아니고 영적인 결단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관심이 있으신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이라는 ,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그런 믿음의 근거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고 승리를 향한 역사의 발전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하에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믿음으로 산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의 근원이자, 용기가 드러나는 태도이자, 세상을 향한 비젼이다. 평화의 예수를 경험한 사람들은 용기를 있고, 세상의 악을 향해 용기있게 나아갈 있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대안으로 용기있게 초대할 있다. 예수의 평화의 삶이 약함과 고통의 삶으로 보이지만, 삶이 참삶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것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상담실] 이성교제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이성교제

“멘토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제 막 이성교제를 시작한 코스탄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힘들지만, 이성 관계는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제가 사귀기 시작한 사람은 저와 성격이 정반대라 서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의사소통하는 게 좋을까요. 이성 교제 과정에서 꼭 알아봐야할 점이 무엇일까요.어떻게 상대방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혹, 사이가 좋지 않아지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결혼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커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지 고민됩니다.”

이성교제. 쉬운 일이 아니죠? 사실 막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는 상대방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다툼은 거의 없죠. 그러나 데이트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눈에 콩깍지가 벗어지고, 다른 점이 발견되고 이때부터 다툼이 시작되죠. 이는 종종 이별로 발전하기도 하구요. 우리는 ‘달라서’ 싸운다고 하지요. 하지만 달라서 싸우는 일은 거의 없어요. ‘몰라서’ 싸우는 거지요. 남자와 여자는 원래부터 달라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요 의도이죠. 그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게 될 때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죠.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정식은 첫째,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배워야 하며 둘째, 나와 다른 것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라는 대명제를 받아들이고 셋째, 나의 방식이 아닌, 상대방의 방식을 배워서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전달하고 넷째, 상대방과 달리 나에게만 있는 강점으로 상대방을 돕는 것이에요. 그 결과 두 사람은 하나 될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알맞은 짝이 되기 위해 성장해가는 과정이에요. 이렇게 차이들을 조율하는 과정 속에서 사실과 거리가 먼 정보들이 입력되고 이것이 오해로 발전하게 되는 거예요. 왜곡된 생각들을 지워내고 사실이나 진심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죠. 이 때문에 ‘결혼은 길고 긴 대화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어요. 먼저 남녀대화의 차이를 배워서 상대방의 언어로 말해야 해요. 인격을 다루지 말고 사건을 다루며, 과거를 다루지 말고 현재를 다루고, 상대방의 생각을 듣고 동의한 후에 나의 생각을 말하며, 감정통제가 불가능할 경우는 문제를 다루지 말고 감정을 다루는데 중점을 두고, 정 통제가 되지 않으면 타임아웃을 선언하기로 약속을 하세요. 하지만 결론은 하나에요. “진정성” 진심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없어요. 이성 교제시 알아보아야 할 것이 있냐고 하셨죠? 나이(Age) 물어야죠. 배경(Background) 확인해야죠. 성격(Character) 따져야죠. 학위(Degree) 아무나 안되죠. 경제(Economy) 많으면 좋지요. 그래서 ABCDE…Z(zeal) 그러다 보면 날새겠죠. 하나만 알아보세요. ‘평생 날 사랑해 줄 사람인가?’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아냐고요? 고린도후서 13장은 사랑은 오래참고….. 바로 거기 답이 있어요. 끝까지 읽어 보세요. 이기적이지는 않은지? 내게 무례한 짓(?)은 안 하는지? 쉽게 성내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인도? 이번에는 내가 물어보죠? 올림픽 경기에 금메달을 놓고 다투는 두 선수가 있었죠. 둘 다 크리스천이었어요. 둘 다 기도해요. 이번에 금메달을 목에 꼭 걸게 해 달라고. 하나님은 누구 기도를 들으셨을까요? 당연하죠. 땀을 많이 흘린 자의 기도를. 그래서 기도는 행동이다는 말이 있어요. 하나님의 뜻, 하늘에서 날벼락 치듯, 로또 복권 당첨되듯 오지 않아요. 그래서 멈춰 서 있는 차의 핸들을 꺾기보다 달리는 차의 핸들을 꺾는 것이 쉽다고 하죠. 움직이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발견되지요. 가보지도 않는데 표지판이 보이나요. 달려봐야 시속 몇 키로로 달려야 과속이 아닌지 또 몇키로로 남아 있는지 갈림길에는 어김없이 그 표지판이 있을거에요. 헷갈릴 때면 무조건 달리지 말고 멈추어 보면 되죠. 그리고 나면 목적이 표시판이 반드시 있을걸요. 아 참, 이런 이야기 아세요?


남녀 한 쌍이 소개팅으로 만난 다음 근교 신도시 식당 촌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출발하고 난 후 이내 속도를 내자마자 ‘오토 도어 록’이 찰칵 하고 잠기는 순간, 여자 분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달리는 차량 안에서 문을 열려고 낑낑대다 꿈쩍도 않자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남자분도 놀라서인지 말까지 더듬어 가며 도어 록에 대해 설명을 했다. “아, 제 차는 60킬로(속도) 넘으면 안전 때문에 문이 잠겨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는 더욱 얼굴을 붉히면서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저 몸무게 60킬로(체중) 안 넘거든요.” 이거 실제 이야기에요. 데이트할 때는 이런 이야기 많이 나누세요. 심각한 사람은 절대 아니에요. 유머가 있는데 사이 나빠질 전혀 없죠.사이가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도 팔자네요. 사람이나 찾아보고 그런 소리 하세요. 착각 또 있어요. 상담실은 문제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그 사람 진짜 문제 있는거 아시죠. 코스타는 강의와 선택식 강좌 기도등의 영성 프로그램과 함께 상담을 통해 참가자들을 전 인격적으로 섬기는 탁월한 집회죠. 인생 선배와 단 둘이 만나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한 시간, 붙잡으세요.


상담디렉터로 섬기는 송길원 김향숙부부 (하이패밀리)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신원하 교수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신원하 교수 – 심화 세미나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1. 신원하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린시절 거의 늘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새벽마다 들으며 자랐습니다. 남들보다 신앙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셈이지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고 결국 신학교를 갔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줄곧 신학교로 부름을 받아 지금까지 16년 동안 기독교 윤리학과 관련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 분야에 나름대로 글도 써 왔고 비중있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코스타 초청을 받고 이번에 참석하게 되어 기쁘고, 기대가 큽니다. 

2. 이번 세미나 강의의 주제가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Vandalism of Shalom: The Seven Deadly Sins)’입니다. 일곱가지 대죄는 복음주의권에서는 좀 생경한 개념인 것같습니다.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교만(pride), 시기(envy), 분노(anger), 나태(sloth), 탐욕(avarice), 식탐(gluttony), 정욕(lust)-은 4세기 말 사막 수도사들로부터 중세 교회를 거쳐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온 목록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끊어버려야 할 큰 악으로 규정한 죄들의 목록이지요. ‘오직 성경’의 구호를 내세운 개신교회는 이것들의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죄론을 소홀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후 개신교회들이 부쩍 이 주제에 관심을 고조해 오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목사들의 강단에도 환영 받는 설교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싸우고 버려야 할 죄의 목록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갖추고 입어야 할 덕(virtue)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환언하면 이번 강의의 주제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덕, 성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덜 강조되고 경시되어온 측면이 많은 이유가 기독교인의 성화보다 일차적인 구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데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이신칭의를 강조한 개신교회가 덕(virtue)사상을 강조하면서 믿음보다 행위 그리고 성품을 중시하는 이 교리를 그다지 강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핵심교리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또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4. 한편, 어떻게 은혜를 강조하는 관점과 기독교인의 덕을 강조하는 관점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기독교 윤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직설법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즉 그 명령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성경적 프레임이 분명해진다면 덕을 갖추는 삶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지요. 오히려 은혜로 죄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원하여 덕스러운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시 119:32). 

5.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 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 관련하고 계신데요, 한국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기윤실의 접근보다 좀더 급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한국 기독교인의 신행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찍이 한미준(한국기독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통계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교인의 윤리의식과 불신자의 그것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너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같은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자기들과는 다른 뭔가 고상한 삶을 바랐지만, 지금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 상태인듯합니다. 천주교회는 국민으로부터 점점 신뢰를 받고 교인도 늘어가는데 개신 교회는 그와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얻으려면 교회다운 모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권력, 돈, 성공에의 욕망이 교회의 짠 맛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힘없음, 약함은 교회가 추구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약 초대교회의 예수 운동, 제자운동은 철저히 십자가, 낮아짐, 힘없음을 추구한 운동이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따르고 ‘지적인 제자훈련’ 만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때입니다. 현재의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회적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윤실도 어쩌면 느리게 가는 길인 것이지는 모르지만 다시 교회의 본질회복 운동, 신뢰회복 운동, 정직 운동 등에 다시금 강조를 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것이 다소 개인적 미시적 접근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급진적(Radical)인 방법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문제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갖고 여론을 만들어가고 윤리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계속해 가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6. ‘전쟁과 정치’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로서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떤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 지성이며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이만열 교수는 현재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정교분리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 일치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지난 참여정권 때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부쩍 시청 광장과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십자가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현 정권에 들어와서는 정반대로 친정부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너무나 조용했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말리곤 했습니다. 어떤 신학적 근거로 시민 광장에 나와서 교회가 교회이름을 걸고 소리를 발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특정 정권을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설명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적 성찰 없는 정치적 행동에 많은 의식 있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이면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신학자들과 40-50대의 중견 목사님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개혁연대와 같은 의식 있는 목사님들의 활동들이 좋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라온 지역, 문화, 환경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상도 남자가 서울여자를 만나 깊이 사귀다 보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여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살피고 진단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연애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게 되면 그만큼 유익이 크지요. 교과서만 줄줄 외우고 문제집만 푸는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뒤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그것들을 다룬 뛰어난 소설/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벅찬 희열, 기억하시는 지요? 마치 눈이 열리는 듯하고, 새로운 의식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지요.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익숙해져 있는 현실, 가치의 세계, 그리고 추구하는 목표가 진정 가치 있고, 젊음을 바칠만하고,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여러분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과 다른 가치, 세계 그리고 그것의 빛을 통해 비춰볼 때 비로소 그것들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쟁이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철저한 유대주의자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삶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혀져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이제 기독교 신앙, 가치, 세계관에 자신을 열고 한번 활짝 자신을 노출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번 코스타 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왔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왔든지 이번에 기독교 복음의 세계에 한번 흠뻑 자신을 적셔보는 그런 구도자가 되어 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강사 인터뷰] 정민영 선교사


1. 정민영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정민영 선교사입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www.wycliffe.net) 한국지부(GBT: www.gbt.or.kr) 소속으로 인도네시아의 한 부족말로 신약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했고, 현재는 국제위클리프 부대표로 비서구 선교운동을 촉진하고 돕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2. 오늘 설교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설교 제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평안” (빌 4:4-7)입니다. 평안(Shalom)은 구원의 본질입니다.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결과 이웃(세상)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평안(구원)의 유일한 조건은 그리스도이지 환경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상황적이 아니라 역설적입니다. 마치 아가페의 사랑이 “OO 때문에”(because of)가 아닌 “OO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인 것과 같습니다. 감옥에 갖힌 바울이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하는 역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합니다. 진정한 ‘가진 자’의 여유인데,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3. 이번 코스타 주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생각하시거나 느끼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복음의 본질과 직결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역설적입니다.상황을 초월한 전천후 평안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구별되는” 참된 평안입니다. 바울은 “염려”와 “기도”를 대조하면서 상황(역경)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권합니다. 처방은 우리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상황이나 환경을 바꾸기보다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시는 것이지요: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Hudson Taylor는 말합니다: “진정한 평안은 고통의 부재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이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역설적 기쁨, 전천후 평안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설명하는 좋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4. 근래 한국 기독교에 대해 반성하면서 기존의 선교방식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요, 선교사님은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요.
Christianity Today라는 기독교 잡지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2007년 발생한 세계교계 및 선교계의 제1대 사건으로 꼽았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 선교운동의 당면현안과 과제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한민족 선교운동이 단순히 열정만 앞세우기보다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필요를 깨우치셨다고 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민족 선교운동의 청지기 시대가 도래하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5. 타문화/타자를 존중하면서 기독교 신앙이 전달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 성품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단연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호전적 접근, 즉 십자군의 방법을 경계하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전도와 선교가 “영적 전쟁”인 건 사실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역설을 이해하지 못하면 호전적이고 무례한 기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은 십자군이 아닌, 십자가의 도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감옥에 갖힌 바울이 권하는, 겸손하고 온유한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도록 권합니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인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 역시 호전성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차별화(거룩)을 의미합니다. 전도와 선교의 동기는 사랑인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코스타 보이스 2009 – 기획기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용기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새번역)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자신들이 믿는 삶의 방식에 충실하게 살아가겠다는 의지이다. 예수님처럼 소외받고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 사람의 가치를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 원수에게 마땅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보다 원수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을 해나가겠다는 강한 신념이자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용기있는 행동에 세상은 흔히 무시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에 약한 자의 모습을 띄는 그리스도인들이 용기를 소유할 있는 근원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부활 세상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그의 메시지를 부인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의 복음의 진실성을 변호했고 그를 참된 주로 인정하셨다아울러 부활은 새창조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사망을 이긴 사건은 땅에서 그분의 새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사건이다. 예수는 부활할 모든 육체의 열매가 되신 것이며,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창조물임을 선언한 것이다.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이 옳은 것임을 있고, 그분이 남기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신할 있다. 동시에 부활로 시작된 새창조의 삶에 믿음으로 동참할 있다. 이원론적인 태도를 넘어서 창조질서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용기를 가질 있다.

숨어있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발전이 더디어 보일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 4:26-28) 천국운동의 시작은 조용하고 비밀스럽게 이뤄진다는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천국은 시작이 조용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아무나 쉽게 있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겨자씨 알이 밭에 심겨졌다는 것은 이미 천국이 땅에 임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내적 성장과정을 거친 천국운동은 마침내 외적으로 크게 드러나게 되는데, 마치 겨자씨가 자라나서 다른 나물보다 크게 되어서 공중새들이 가지에 깃들이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속성을 알려줄 아니라 나라의 발전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있게 해준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 예수님이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점차 발전하여 이땅에서 완성되어 간다. 종국적으로새 하늘과 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 완성될 하늘과 ’, ‘새예루살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기대하시던, 하나님, 인간, 모든 만물 간에 창조질서가 완성된 모습이다. 우리가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로부터 의도하셨던 완성된 평화’(Shalom) 거할 것을 믿을 있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질 있을 것이다.

약한 곳에 거하시는 (Tabernacling) 성령 마르바 던의 설명에 따르면 약함 속에서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하나님은 약함 가운데 거하시고 (dwelling/residing)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다. 그리고 약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시고, 약한자의 약함을 통해 세상의 권력의 강함, 그리고 그들의 부정의를 부끄럽게 하신다. 하나님의 강함이 우리들의 약함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약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용기를 가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