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KOSTA/USA 참석자 좌담회 – 박소현, 조선우, 최장환, 황원태






eKOTSA: 안녕하세요.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조선우 자매 (이하 조선우):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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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조장을 했던 조선우입니다. 현재 필라델피아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고,
미국 온지는 3, 그리고 코스타는 두번째
참석했습니다
. 작년에는 조원으로 참석했구요.

박소현 자매 (이하 박소현): 안녕하세요.
저는 박소현이라고 합니다. 미국에 온지는 11년 되었는데, 처음 3년동안은 유학생이었고,
그 이후에는 주부로 있습니다. 현재 살고 있는 곳은 업스테이트 뉴욕이고,
코스타는 지금까지 세 번 참석했고, 그 중 두 번을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황원태 형제 (이하 황원태): 저는 황원태라고
합니다
. 12지역을 섬겼고, 박소현 자매의 남편입니다.
미국에 97년에 와서 12년째 살고 있고,
코스타는 두 번 참석했습니다. 작년에 이어 두번째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최장환 형제 (이하 최장환): 작년에 유학
나와서 현재는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 코스타는 이번이 처음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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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조장으로 섬겼습니다. 반갑습니다.

eKOSTA: 코스타 집회를 전체적으로 평가해주시겠습니까?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 특히 아쉬웠던 점을 건설적으로 비판해 주시길 바랍니다.



조선우: 주제에 있어서는 굉장히 필요하고, 적절했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특히 많은 유학생들이 미국에 와서야 처음으로 절망을
많이 경험하게 되는데
, 절망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의지하게 되고 세상에 평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교회 생활을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더라도,
영어를 잘 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잘 믿으면 일이 잘 될 거리고 믿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아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는 우리가 채워지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오는 것이며
, 평화는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오는 것이라는 메세지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집회 이후에 조원들과 나눔을 할 때에도 샬롬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눠지고 있구요.

그러나, 기도와 관련해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목요일 밖에 없었던 것이 아쉬웠습니다. 금식기도와 기도의
밤이 다 목요일이어서
, 화요일, 수요일에 기도 시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 조원들 중에는 새벽기도를 위해서 조용한 기도실을 기대했던 분들이 있었는데요, 가능한 방이 조별 중보기도실 뿐이라 오전 630분 이후에는
중보기도와 겹쳐서 조용히 기도에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 그리고 중보기도 신청했던 시간에 시끄러워서 기도하기
쉽지 않았고
, 한 번에 네 개의 조가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여섯 조 까지 함께 했던 부분이 아쉬웠습니다.

박소현: 주제에 관해서는 2007년부터 올해의
주제까지 연결이 잘 되었던 것 같아요
. 주제가 매년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2007년에 이 시대와 하나님의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다면, 2008년에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배웠고
, 올해는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를
배웠는데요
, 특히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용기있게 세상 나가는 자세에
대해서 배워서 좋았습니다
. 올해의 주제를 따로 떼어놓고 볼 때도, 나라를
떠나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실천 방안을 배운 것 같아서
, 주제가 잘 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eKOSTA: 주제가 전체 프로그램에 잘 반영되었다고 보시나요?

박소현: 오전 주제 강의의 경우, 손희영 목사님의
강의가 대다수 분들에게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하는 인상을 받았구요
. 저녁 집회 때 세분의 설교,
특히 복음을 소개하는 설교는 주제와 다소 거리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세미나의 경우 모든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전체적인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세미나 리스트를
볼 때에 주제를 프로그램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였습니다
.

황원태: 조장으로 훈련을 받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해서 그런지
집회 처음에는 주제가 잘 와 닿지 않았는데요
, 화요일과 수요일을 지나면서 주제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수요일과 목요일에는 주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잘 와닿았습니다. 조원들의 경우에는
조장처럼 주제를 미리 묵상할 시간이 없어서
, 처음에는 주제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궁금해 하셨는데
2,3
일 후에는 주제에서 연속성을 찾으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살아가는
것이 도전이지만 그 도전을 어떻게 감당해야하는지
, 어떻게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어서 좋았고요, 나중에는 조원들이 그런 평화를 누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


eKOSTA: 아쉬웠던 점은 없었나요?

황원태: 집회의 느낌이 전반적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구요, 작년에 비해서 올해는 차분했습니다. 주변에서도 그렇게들 평가하시는 것 같구요.
혹시 미혼 코스탄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그랬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찬양 시간에도
차분했고
, 전반적으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이 주제와 연관이 있는지
찬양팀이 바뀌어서 인지 잘 모르겠네요
.

최장환: 저는 이번에 처음 코스타에 참석해서 주제에 대한 연관성을 볼 수는 없었지만,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주제가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첫 참석이다
보니
, 코스타의 목적이 무엇인가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장 수양회에서
코스타의 목적이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길래 이런 프로그램과 일련의 스케쥴을 짰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그런데 아직 코스타의 목적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코스타 프로그램 중에 선교 헌신 시간도 있었고, 좁게는 하나님의 샬롬으로 승리하는
삶의 초청과 각자 위치에서 선교사적 삶을 사는 것을 초청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코스타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구현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고요, 통일성,
전체적인 흐름의 일관성이 다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힘드네요
.


eKOSTA: 전체집회 강의와 설교에서도 통일성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셨나요?


최장환: ,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강의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체적으로 주제가 잘 반영이
되었지만
, 한편으로 주제 강의를 제외하고, 요일이 지날수록 주제인 샬롬에
대한 강의 내용이 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 그리고 전체 집회의 강의를 맡으신 분들이
본인이 생각하시는 샬롬에 대해서 말씀하시다보니 중복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

조선우: 저도 샬롬이라는 주제가 잘 와닿았고, 조장 훈련 중 있었던 2주간 묵상과, 조장 수양회 말씀을
통해서 더욱 그랬습니다
.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처음 듣고 전체내용을 쉽게 이해하기에는 어렵고 추상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녹음된 CD를 가지고 있으니 다시 들어볼 계획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조원들이나, 교회에서 함께 간 분들이 가장 육체적으로 피곤해했던 시간이
오전강해 시간이었는데
, 그러다보니 주제가 가장 잘 전달되어야 했을 오전 강해시간을 통해 샬롬에 대한 이해가
코스탄들에게 잘 이뤄졌는지 확신이 없었습니다
. 아침 묵상이 잘 이뤄졌다면 그것을 통해서 각 조에서 주제가
잘 전달 되었겠지만
, 오전강해를 통해서 주제가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황원태: 손희영 목사님의 세번의 강의가 어렵고 추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강의 중에 드신, 구체적인 예들이 도움이 되어서 연속성이 있었구요. 샬롬으로 시작하여 용기로 잘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녁 설교 중에 최장환 형제가 말씀하신대로
각각 다른 강사가 오셔서 말씀하셔서 그런지 겹치는 부분이 있었고
, 연속성이 부족하였던 것 같습니다.
손희영 목사님의 말씀은 어려웠지만 연속성이 있었는데, 저녁설교에서는 그것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작년에는 두 분이 저녁 설교를 각각 두 번씩 하셔서 연속성 면에서 좋았습니다.
또 화요일 복음을 소개하는 구원초청 말씀에서는 복음의 핵심사항이 다뤄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유진소 목사님의 복음 세미나에서는 그 내용들이 잘 요약이 되어서 전달되었구요. 작년에
노진준 목사님 말씀이 무게가 있고 재미도 있었고
, 정민영 선교사님 말씀도 좋았는데요, 작년과 같이 두 번 두 번의 포맷이 좋은 거 같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둘째 날에 구원초청이
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셋째 날에 구원초청을 하고, 선교와 헌신에
대한 초청을 넷째 날에 하면 어떨까 제안해봅니다
. 조장으로서 첫 날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나를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 화요일 저녁까지 인도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소현: 손희영 목사님의 전체집회 설교는 역시 어려웠다고 생각하지만,
굉장히 어려운 주제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만큼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주제였구요
. 손희영 목사님의 첫번째 설교가 지난 코스타 주제와의 연속선 상에서는 이해가 좀 더 쉬운데,
올해 첫 참석자에게는 어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쨋날 구원초청 설교에
대해서는 흡인력이 있었지만
, 구원의 당위성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요약이 저에게는 “구원에 있어서는 중간 지대는 없다. 믿거나,
그렇지 않거나이다”로 요약될 수 있었는데 이 말씀이 도움이 되지만 구원 초청을 하는데 있었서는 구원이 왜 꼭 필요한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eKOSTA: 오후에 있었던 세미나에 대한 평가를 해주시겠습니까?

박소현: 세미나를 많이 들을 수 없었기에 전체 평가는 어렵지만, 저는 이일형 장로님의 예배에 대한 세미나, 코스타 간사님들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에 대해서 설명하신
세미나
, 그리고 F2를 위한 세미나와 그 세미나와 이어진
TM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지금 F2는 아니지만
오래동안
F2였기에 관련 세미나를 많이 들었습니다. 올해 기혼 코스탄이
늘었고
, 거기에 따라 F2 분들도 많이 늘었는데요, 그분들이 미국 땅에서 정체성이 약해서 상처 받기 쉬운 자리에 있는데, 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코스타에 와서 더욱 상처 받으시면 어떨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비율이 커졌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구요
, 그것이 단순히 그분들에 대한 측은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대부분 아이를 키우신다는 측면에서
, 올바른 신앙 안에서 건강할 때에 코스타 정신을 파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고 생각합니다
. 그런데 F2를 위한 세미나와
TM
세미나의 내용이 잘 짜여져 있다기 보다는 모여서 서로의 사정을 얘기하고 의견을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는데,
좀 더 창의적인 세미나가 준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황원태: 두 개의 세미나에 참석을 했습니다. 구원 초청을 받은 조원과 함께 구원에 관한 세미나에 들어가서 구원의 기본사항을 점검할 수 있어서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변명혜 교수의 자녀 교육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 구체적인 사례 가운데 자녀를 세상에 내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 아쉽게도 이번에는 세미나를 많이 듣지 못했는데요, 조에
아이들이 있고
, 세미나 시간에 아이들을 맡아주기 때문에 그 시간에 중보기도를 하기로 했는데,
약간의 혼선이 있어서 중보기도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조원들을 상담으로,
중보기도로 인도하느라 세미나에 들어가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것은,
해마다 인기 있는 세미나에 등록이 금방 마감이 되는데, 복수의 강사가 비슷한 세미나를
개설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고요
, 이번에 처음으로 전체집회를 mp3로 만들었는데, 세미나가 고음질로 녹음되어서 용량이 커졌는데요, 음질을 줄이면 용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

최장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세미나의
종류가 많다보니 처음 참석하는 입장에서 각 강의에 대해서
, 강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어서 처음에 세미나를
선택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 세미나 선택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이해 (2+1+1으로 관통하는 성경의 맥), 공학분야의
TM
과 학업과 교회 사역에 대한 세미나를 들었는데요, 강의 내용이 한결 같이 좋았습니다.
유학 올 정도이면 다 지성인인데 그 눈높이에 맟줘서 잘 해주신다는 생각을 했구요, 개인적으로도 세미나의 만족도가 높았습니다.

 

조선우: 제가 선택한 세미나의 경우,
거의 모든 세미나에 너무 적은 인원만 참가하시거나, 늦게 오시는 분들이 많거나,
들어오셔서 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선택한 세미나 몇 개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았는데
, 집에 와서 녹음 CD들을 많이 듣고 나서 보니,
제가 단순히 세미나 선택을 잘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미나 참여도가
낮았던 건
, 아이가 있는 기혼자 분들의 참여가 힘들었던 이유도 있지만요, 어떤 분들은 어차피 CD가 판매 되니까 안들어도 되겠다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또 시간을 초과하는 세미나도 좀 있었습니다. 전체 집회 때 세미나 참여를 좀 더
강조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 예를 들면 세미나 때 영상을 사용하시기도 하는데 CD를 통해서는 그것을 접할 수가 없고, 질문이 잘 안들리기도 하며, 질문을 직접 할 수 없는 단점과 같은 얘기를 해주어 세미나 참여를 더 활성화 시켜도 좋을 거 같습니다. 참여도가 낮을 경우 강사분들이 힘이 빠지는 거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박소현: 저는 코스타 운동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세미나가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 코스타의 궁극적인 목적이 궁금하시면, 이렇게 요약해서 해주시는 세미나를 듣는게 도움이 되는 거 같습니다. 훨씬 더 잘 알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

 

조선우: 저도 작년에 코스타가 어떤
모임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 그런 점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 같은데요, 세미나로 하시는 거 보다는 첫 날 오리엔테이션 때 간략히 소개를 해줘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장 수양회때 코스타 운동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듣고 작년에 처음 코스타에
와서 궁금해하던 부분들이 많이 해결됐습니다
. 그 소개가 전체 코스타로 확장되는 건 어떨까요.

 

eKOSTA: 그러면 이제 조활동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조선우: 저희 조는 너무 신앙적으로
헌신된 분들로 가득 차서
, QT 나눔이나 기도 나눔, 기도회가 굉장히
풍성했습니다
. 반면에 아주 헌신된 분들이 오셨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어떻게 전할까 고민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 전체적으로 조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적었습니다.
조장 모임 때문에도 그랬고, 밤의 조모임도 그리 늦게까지 할 수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내년에 다시 조장을 한다면, , 목 정도
밤에 강사분들을 초청해서 조모임을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 이번에는 아침 QT 시간에 강사 분들을 초청했던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희끼리 하면 답이 안나오는 부분에서,
강사분들께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셨습니다.

 

최장환: 저는 조모임이 너무 좋았는데요,
조편성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자녀가 있고 없고에 따라 스케쥴과
관심사가 완전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 저희 조는 아이 없는 부부가 세 커플, 있는 부부가 한 커플이었는데 아이 있는 부부는 약간 겉돌다시피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유무에 따라 조를 따로 나누는게 좋을 거 같습니다
. 또 한 친구는 본인만 학생이고 나머지는 직장인이라
어울리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 등록을 받으실 때 학생들 조에 가고 싶은지, 직장인의 조에 가고 싶은지 우선순위를 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등록시 조 구성에 대한 기호를
표시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

 

황원태: 저희는 작년의 경우,
반 정도 아기가 없었고, 반정도가 있었는데, 조모임이 잘 되었습니다. 올해는 아이가 다 있어서, 조모임이
힘들겠구나 싶었는데
, 의외로 잘 되었습니다. 아쉬웠던 건,
큐티를 저녁 조모임 때 나누자 하고 합의를 봤었는데요, 별로 안좋았던 거 같아요.
피곤하기도 하고 아침에 맑은 정신으로 묵상하는 것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저녁
때는 여러 가지
sharing을 하는건 좋은데, 말씀 묵상한 걸 나누기는
좀 힘든 거 같습니다
. 행정적인 면에서, 저희 가정들이 모두 같은 층에
있었고요
, 가운데 있는 라운지에서 조모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이들이 옆에서 놀기도 하고 들어가서 자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조장 핸드북에 보면 ‘따로 또
같이’ 라는 부분이 있는데요
, 저희는 자매들은 따로 한 번 모이긴 했는데 형제들은 따로 모이지 못했습니다.
아이들 있는 가정은 ‘따로 또 같이’가 좋은 생각인 거 같아요. 조장의 역할에 있어서,
조원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지 확인하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저희 조의
경우
, 목요일 밤에 새벽 3시까지 얘기한 결과, 한 형제가 그동안 교회에서 잘 섬겨왔지만, 사실은 구원의 확신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더 빨리 알았으면, 상담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고, 더 복음에 대해 깊게 나눌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조장들은 조원들의 영적인
상태를 빨리 확인하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

 

박소현: 아쉬웠던 점은,
아침에 아이들 맡기는 시간이 8:30이고 전체 집회 시간이 9:15라 현실적으로 그 사이에 큐티가 힘들었습니다. 기혼 자매들이랑 같이 큐티를 굉장히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안난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 아침 뿐만 아니라 모든 조모임 때 시간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항상 남았습니다

 

eKOSTA: 이어서 찬양, 금식기도, 상담 등 운영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박소현: 저는 상담이 코스타의 귀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좋은 상담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특히 부부가 같이 가서 상담을 받았을 때 도움이 많이 되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올해 찬양이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 같은데, 조금 신나는 노래가 섞여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

 

최장환: 저는 개인적 기도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금식 기도회나 기도의 밤이 있었는데, 그때는 전체적인
기도제목을 제시하고 같이 기도하는 방식이었죠
. 코스타의 주제가 시사하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대처해야 할텐데
, 개인적인 기도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
중보기도자들 한 사람씩 기도제목을 제시하셨는데, 그때마다 인도자들의 톤이 달라지고,
변화가 심하니까 기도하는데 맥이 끊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한 사람이 인도하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강사님들과 식사를 같이 하기 위해서 컨택하곤 하는데, 그 과정이 조장의 재량에 따라서 달라지는 점이 걸렸습니다. 어떤 조장은 여러 강사를 초청하고,
어떤 조장은 한 사람도 초청하지 못하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강사님들과의 교제,
식사, 저녁 모임에서 만남이 너무 규모가 없는 것같습니다. 상담의 경우처럼 제대로된 절차를 만들어서 조장들이 신청을 하고 강사님들의 시간을 배정하는 것을 건의드립니다.

 

eKOSTA: 강사님들 초청에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동의합니다
.

 

조선우: 사람들이 엑스포에 대해서 기대하는
점도 크지 않고
, 엑스포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많지 않고, 엑스포에서
부스를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도 적은 것 같습니다
. 개인적으로 전체 집회를 통해서 홍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상담은 예년처럼 너무 좋았고, 몇몇 조원들의 경우 정말 치유가
되었다고 했고요
, 자신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기도제목을 상담자들을 통해서 알게 되고 기도하게 된 점이 좋았던
것 같고요
. 약간 아쉬웠던 점은 장소에 대한 것인데, 저는 따로 상담실이
있었어요
. 그런데, 조원들이 식당 지하를 배정 받았는데,
너무 공개된 장소라서 상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개선 가능한 일있지는
모르겠지만
, 좀더 좋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원태: 찬양팀이 바뀌어서,
또는 주제곡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조금 조용한 곡 위주로 된 것같고, 엑스포는
좀 작아진 것 같고
, 상담은 처음 했는데, 참 좋았습니다.
광고를 더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상담자들에게 연결시키는 조장들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 기혼조에 속했지만, 싱글들이 숙소, 식사에 있어 불편한 점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중보기도팀으로부터 중보기도를
받은게 참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 릴레이로 하시는데 부담이 되시니까 미안하기도 한데,
시간을 정해서 또는 표를 만들어서 중보기도 받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조장님들이 멘토님들을 많이 만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장들이 어려운 점이 있을
때 멘토님들의 도움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eKOSTA: 내년의 주제가 ‘어그러진 세상,
하나님의 긍휼’로 발표되었습니다. 주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코스타가 비젼을 제시하고 이끄는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건의사항이 있으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선우: 코스타에서 내년 주제가 소개됐을
, 조원들이 ‘와 너무 좋다’라고 반응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샬롬이
파괴된 상태가 어그러진 세상이라면
, 이 상태에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은 예수님,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라고 할 때, 올해 주제와 잘 맞는 주제라고 생각하고요.
개인적으로 코스타가 저를 깨워주고, 파라다임 전환을 가져다 준 것 같습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주었다기 보다,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다시
확실하게 환기시키고
, 약간 잘못 알고 있던 것에 대해서 바르게 알도록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내년 코스타에 돌아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코스타가 복음주의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코스타에서 훈련받고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것이 코스탄의 소명이니까
, 내년 코스타에 동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좀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 내년에 다시 참석한다면 성장한 모습으로, 조원으로 갔다가 조장으로 간다든지, 코디로 간다든지 뭔가 성장하는 모습으로 참여하고 싶습니다.
건의사항은 11지역 같은 경우, 지역이 매우
넓어서 같은 지역에서도 어차피 지역 내에서 팔로우업 하기는 힘들거든요
. 조장 수양회에서 다양한 지역을 섞어서
하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

 

최장환: 매년 코스타 주제를 보면서
사사기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 사사기를 보면 비슷한 구조가 있지만 그것이 계속 반복되는데요,
주제도 약간 비슷할 수 있지만, 그것이 매년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관심있는 부분은 코스타 후속프로그램인데, 이런 후속 프로그램이 교회나 학교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과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지 더 고민하면 좋겠구요
. 코스타 마인드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것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 예를들어 코스타 복음주의를 중심으로 멘토님들이
주도를 해서 코스타 마인드를 되새기는 모임이 있어야하겠고
, 비슷한 관심 주제에 대해서 지식을 가지신 강사님들과
지속적으로 만난다든가
, 코스타 기간 중에 소개된 책들을 중심으로 코스타 마인드를 다지는 독서클럽을 운영한다든지
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황원태: 주제는 연장선상에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올해가 예수님의 평화니까 한 바퀴 원을 돈다는 느낌이 듭니다. 후속 프로그램은 조별 게시판을 신청했고, 개인적으로 원투원을 하려고 하고 있고요.
코스타에서 제공해주는 프로그램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박소현: 주제를 처음 봤을 때 받은
느낌은 주제가 부정적인 표현으로 시작되어서 마음의 부담이 되었습니다
. 저는 코스타에 참석할 때마다 삶이 변하는
것같거든요
. 그래서 다시 참석하고 싶습니다. 일회성 집회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 한 단계 도약을 위해 돌아가고 싶습니다.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 코스타가 고령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다 학생들이었는데, 참석하는 사람들이 코스타를 떠나지 않으니까 아이들의 나이도 많아지고
참석자들의 나이가 많아지는데
, 이게 바람직한 건지 약간 의문이 있어요. 코스타가 허락하는 범위에서 참석하고 싶습니다.

 

eKOSTA: 감사드립니다. 오랜 시간 좌담회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2강]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둘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2강(수요일)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c)



오늘 주제강의 두번째 시간에서는 이번
KOSTA
주제말씀중
[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말씀을 살펴본다.

고통의 시대

우리가 살아오면서 특히 예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라는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 고통, 재난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류의 연대성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서 이러한 아픔과 눈물을 끊임없이 경험하게 된다.

또한, 문화, 역사, 뉴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임을 발견한다. 물론,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움과 선함, 참됨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들어와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고, 그로 인해 수많은 , 반창조 혹은 반생명의 증상이 발생하여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속에서 구원역사를 이루어나가야 하므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의 비밀스런 은총을 부어주심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신다.

그러나, 세상의 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쁜 사건, 내가 지은 나쁜 죄가 아니라, 엄청난 세력, 유사인격 혹은 하위 인격처럼 거대한 사람과 같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창조세계와 인간을 파괴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를 통하여 악은 더욱 거대하고 강력해지고 있다. 과거에 비해 오늘날 악이 훨씬 강하고 많다. 활로 했던 과거의 전쟁과 단추 하나로 수십만명을 죽이는 현대의 전쟁을 비교해보라또한, 인간성의 황폐, 물질주의의 기승으로 사람의 가치가 그가 가진 물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되는 시대는 과거에 별로 없었다.

세상,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실 , 세상이란 무엇이고 이겼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해하자.

세상을 이겼다십자군 전쟁을 통해, 혹은 복음 전파로 이교도에 대한 승리 혹은 개종? 질병과 굶주림의 정복?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무엇을 이겼다는 것인가? 마디로, 죽음, 사망을 이기셨다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것은 단순히 분이 죽은 몸에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이
fact
이기는 하지만.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저주가 끝까지 계속되었을 일어나는 사람과 피조세계의 궁극적인 운명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 그것이 저주임은 어제 살펴보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우리들을 말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바로 저주
– curse
퍼붓는 것이 아니라
이다이것은 마치 태중의 아기가 탯줄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과 같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된 상태에서 영생의 복을 항상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인데, 탯줄을 스스로 끊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께서 이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결과로, 우리는 죽어가고 죽는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저주이다. 이로부터 모든 악의 증상들
미움, 증오, 시기, 질투, 폭력, 파괴와 같은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사랑해야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 그로 인한 극심한
죽을 같은
고통, 가난과 질병, 공해, 자원고갈, 환경오염 모두가 죽음의 증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인격적인 죄로 말미암은 것들, 이것을 사주, 확대 재생산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사탄이다. 그래서, 지구상의 악의 세력은, 모든 인간이 지은 죄를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사탄이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인간의 작은 죄로 시작된 모든 죽음의 증상은 사탄을 통해서 증폭되어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 그러하다.

, 모든 죽음의 증상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로 세상에 들어오게 것이다.   

살후
1
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실 때에
안식, 완벽한 샬롬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되어있다. 때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자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전까지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돌이켜 회개하면 샬롬을 회복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지만, 때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는 없다. 또한, 하나님과의 거리는 불가역적으로 무한히 멀어진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죽음의 증상에 고통스럽게 시달리다가 창조물로서의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되는 죽음을 맞는다.

죽음, 샬롬, 부활, 구원과 같은 성경의 위대한 언어를 이해할 , 도덕적 죄의 회개와 죄사함으로 국한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인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로 파괴되고 있을 ,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악을 몰아내시고 창조세계를 아름답게 샬롬으로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 꿈의 부분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러한 꿈이 이루어진 상태를 샬롬이라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이제 혼자 회개하고 구원받은 것에 만족하지 말고, 과연 우주에 하나님의 샬롬이 이루어졌는가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라는 의미는, 부정적인 세력의 극치, 악의 극치, 악의 세력의 궁극, 죽음을 이기셨다는 의미이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사역, 귀신을 쫓으심, 바다를 잠잠케 하심은 모두 예수님의 악의 세력을 잠재우는 능력을 보여준다.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하자. 내가 만지면 옮는데,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병이 낫는다. , 악의 결과, 죽음을 정복하는 힘을 미리 십자가 이전 부터 과시하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십자가에서 결정적이로 최종적으로 세력을 없애셨다. 십자가의 사건은 실제적, 역사적인 사건이면서, 동시에 상징적인 사건이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이며 악을 없애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 무엇이 있었는가? 로마정부의 하수인 빌라도, 식민통치 정부 헤롯왕의 하수인, 대제사장 무리들과 같은 권력자들이 모여있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죽이려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모든 세대의 권력자들, , 악한 정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강한 힘들을 상징하는 ,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주위를 포위했다.

그리고 유대인 군중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하나님없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다. 인본주의라는 말이 선한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모든 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을 지칭한다. 왜냐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있음, 내가 자신에게 하나님 노릇을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대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들이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 자녀, 아들이 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선포를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요한복음19:15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 소리쳤다. 창조해주시고 선택해주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있다고 하여도 믿을 없다고 주장하는 타종교, 이데올로기, 무신론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또한, 마태복음27:40에서, 유대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도전하였다. 이것은 사탄이 마태복음
4:6
에서 광야에서 예수님께 던졌던 도전이었다. 사탄의 강력한 세력이 마지막 순간까지 십자가를 애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악의 세력들, 인류 역사 이래 그리고 십자가 이전 모든 세대, 앞으로 모든 세대의 모든 악들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자기 존재와 인격의 안에 고스란히 받아서 죽음으로써 악의 무섭고 가공할 힘을 소진시켜 버리신 것이다.

십자가와 가시관 

십자가위에 가시관을 쓰시고 달려계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사형방법중 가장 잔인한 것이어서, 로마시민은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다. 국가반역죄인, 로마 황제에게 반란을 꾀한 자에게만 가했졌던 로마의 극형이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여러 날을 매달아 두면 서서히 피를 흘리며 팔레스타인 땅의 태양의 뜨거움과 밤의 무서운 추위가운데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형벌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독특하게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다.
가시 에덴동산에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이다.   세상의 모든 종류의 악의 상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쓰신 가시관은, 세상의 모든 악이 예수의 인격과 존재위에 얹혔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 마태복음27:51 의하면, 예루살렘 성소과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둘로 갈라졌다. 휘장은 마리가 당겨야 찢을 있을 정도로 두껍고 튼튼한 장막이었고, 금색실로  그룹, 하나님의 천사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룹은 창세기3:25, 하나님의 샬롬에서 인간을 추방하실 죄인은 샬롬으로 돌아올 없음을 지킨 문지기, 하나님의 천사이다. 성소의 휘장이 찟김으로 이제 문이 열린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샬롬으로 들어갈 있게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

나무에 달린 자마다
(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때문이다라고 십자가 사건을 해석하고 있다유대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모독죄였다. 유대의 율법에 의하면, 죄목에 해당하는 형은
돌로 쳐죽임을 당하는 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로 맞아 죽으시게 되면, 핍박받는 선지자로 인식되어 백성들의 존경을 받게 것이므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알고보니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네라고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려 죽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로마 반역죄, 유대인의 왕을 자처한다는 거짓죄를 덮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간교한 생각을 완벽하게 역이용하셔서 율법의 저주를 예수님께 부어서,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섭리의 도구로 활용하셨다.

부활로 성취된 샬롬의 시대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선포한 모든 메시지가 모호해진다. 따라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항상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죽으셨고, 장례까지 치루어져서
3
일이 되셨다. 육체가 썩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활하셨다
(
로마서1:3-4).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구속사의 단계를 보여준다. 처음 창조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까지의 창조의 시대, 육의 시대와부활 후의 시대, 시대, 영의 시대, 성령님의 시대인데, 영의 시대는 창조의 시대와 비슷한 점도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 하늘과 땅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통해서 영의 시대를 준비하셨고 여셨다. 그리고 들어가셔서 첫번째 주민이 되시고 우리를 초청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아직 실존은 들어가지 않았으나 주민등록이 옮겨진다. 우리의 실존도 언젠가 시대, 샬롬으로 충만한 나라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시대, 영의 시대는 예수님이 처음 오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불완전하고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역사 속으로, 미래에 있을 영의 시대가 부분적으로 침투해 들어온 이것이 바로 샬롬의 나라의 이중구조이다. 다시 오실 때는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릴 것이나, 중간, 재림 전까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것도 부분적으로 제한적으로만 샬롬을 누릴 있다. “Already,
But not yet”.

그래서 시대에는 예수님의 샬롬의 나라와, 살기등등한 세상나라가 겹쳐있어서 우리는 크리스챤이면서도 부득불 고통과 고난을 당한다. 그러나 악의 세력은 궁극적인 힘이 없다. 예수님께서 본질적으로 결정적으로 소진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 조상들의 죄로 인한 증상, 질병, 장애, 실패, 두려움, 자연재해, 사고등을 인류의 연대성가운데 우리도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최종적인 결과인 죽음이 완전히 소진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담대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2:14-15
인간의 실존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해준다.
죽기를 두려워 일생에 종노릇한다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고통을 경험할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떠올리고 두려워한다그것이 죽음의 증상이기 때문이다. 미움과 증오를 받을 , 모든 악의 현상을 경험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인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것의 가장 자명한 증거는, 바로 먹고 사는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확실히 소진시켰음을 믿게 되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나로 하여금 죽기를 두려워하게 했던 것들이 나타나면 이제 힘은 들지라도 두렵지 않다. 자유롭고 용기 있게 살게 된다. , 부분적인 제한적이나마 샬롬을 누리는 것이다. 영의 시대, 시대의 완전하게 누리게 샬롬의 열매, 맛배기를 누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너무 크기 때문에, 샬롬의 작은 부분이라도 우리 영혼에 오게되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충분히 살아지고 나누어 있게 까지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므로 너희는 담대하라 용기를 내어라 말씀하신 것이다.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자유함 누리게 된다. 가질 지라도 우리는 노심초사하면서 자기중심적으로 끌어당기면서 살기를 그만두게 되는 것이다빼앗아 먹기 위한 작은 탐욕으로 인한 다툼과 전쟁이라는 매임에서 우리는 해방된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가진 자유함과 샬롬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의 복지, 샬롬을 위해서 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샬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샬롬이 없는데 내가 죄용서 받았고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식의 구원의 개념은 일그러진 것이다. 나와 모든 사람이 전체성가운데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다

어떻게 구원을 구체적으로 누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타적으로 누리게 되는지는 내일 다루기로 한다.

[코스타 시카고 주제 강의 제 1강]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 (요 16:33 b)

 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컨퍼런스 첫째날에 있었던 손희영 목사님의 주제 강의를 eKOSTA에서 녹취한 것입니다.
 

제 1강(화요일):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나.(요 16:33 b)

같이 기도 드립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송축합니다. 할렐루야  영혼이 주님을 기뻐하며,
할렐루야 내 영혼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더욱 합당하신지
계시의 말씀을 통해 배우게 하시되, 비록 인간의 메신저를
통해 말하는 것일 지라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슴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3일 
동안 이번 코스타 수양회 중심 성구인,
요한 복음 16장 33절 말씀을 같이 강해하고 
살피게 됐습니다. 이 말씀 짧은 말씀이지만
부분으로
나눠서 중간 부분을 오늘 살피고, 그 다음에 마지막
부분을 내일 살피고, 오히려 첫번째 부분을 글피에
살피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헬라어 본문으로는 우리
한국 번역과 순서가 같지만, 우리가 생각해 볼 논리
순서를 조금 바꿔 봤습니다. 우리 본문의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시작,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아멘.

      제가 어떤 신문 칼럼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 누구도 누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 모두가  막고 타협 없이
자기 말이 옳다고 막무가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우리
정치가 그 꼴이다. 이쯤 되면 이 세상은 막가자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부터 그렇다. 자기만이 옳다며 자기를
따라주지
않는 세상에 혀를 찬다. 여당도 지리멸렬이다. 일도 많고 갈 길도 바쁜데, 집안 싸움에서 못 벗어
난다. 야당 역시 가관이다. 법치를 무시하고 거리에서
방황하며 죽은 전직대통령에게 기숙하는 수준이다.
교수 사회, 시민 단체, 각종 이익 단체들도 오로지 자기
주장에만 매달린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다. 모두가
서로를 못
잡아 먹어 야단이고, 조금만큼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체면불구 하며 으르렁 된다. 여기
저기서 적개심이 난무하고, 촛불이 횡행하며 서로의
생명 줄을
끊으려고 광적으로 돌진한다. 북한을 놓고 나라가 둘로
갈라지다 싶히 하고, 거기다가 남과 북은 이제 바야흐로
마주 보고 달리는 괘도에 올라 탔다. 안에도 적이고
밖에도 적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소통, 이해와
타협, 법치와 민주주의가 실종된 상태다. 이것은 정치
권력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기본이 무너진
상태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사회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가 무너진 상태이다. 우리에게는 제 삼의
길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리더십의 부재, 삼지 사방으로 흩어진
민심,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는 지도층의 욕심, 오직
반항과 파괴로만 일관하는 저소득측의 비 타협이 난무
하는 사회로는 바람직한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렵다.
우리는 우리를 만인대 만인의 싸움에서 구해줄 진정한
개도론자가 필요하다. (여러분이 이런 개도론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대모의 공포증 없이, 마이크의
소음 없이, 욕설 섞인 저주 댓글이 없이, 매일의 안정된
생활에 매진하는 화목한 사회에 살고 싶다.

      여러분 이게  한겨레 신문의 칼럼인지,
또 조선일보 칼럼인지 머리를 굴리지 마시고 그대로
잘 받아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인간 역사가 항상
그랬지만,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너무 각박하고 살기가
팍팍한 시대 입니다. 자본주의
한계가 드러났고, 그렇다고 공산주의 실험을 다시 해볼 없는, 아주 어려운 그런 상태 이죠. 여러분이 노인이 되는
40
년쯤 후가 되면은 국민의
5
명중의 한명이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국민
4
사람이 한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되는 그런 어려운 처지에요. 그런데 우리 나라는 출산율이
1.1
세계에서 가장 낮습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 그리고 어쩌면 시대를 책임지고 살아가야 여러분들이 과연 시대를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 여러분이 지금 공부를 하고 계시지만 이제 졸업을 하면 금방 조국 현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계 현실에 우리가 눈을 떠야 합니다. 늘어가는 지구촌의 인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 미래에 대한 통찰력은 어떠한지 인류가 역사 시작 이래 항상 추구해 왔던 샬롬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우리가 타락한 피조 세계 속에서 악에 지쳐 있는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 과연 세상을 이길 힘을 우리 스스로가 갖고 그런 용기를 다른 사람에게 있는 사람이 되야 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 주제가 샬롬 입니다. 샬롬은 평화 혹은 평강으로 성경에 번역이 되어 있고, 신약 성경에 주로 나오는 평화의 원어는 에이르네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피스죠. 평화, 평화라고 말을 하면 즉각적인 우리의 인식이 전쟁이 없슴, 편한 사이,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 혹은 어제도 우리가 배웠지마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피조세계와의 원만한 삼중구조의
관계를 우리가 평화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샬롬이라는
말은, 샬롬이라는 말은 히브리 말이에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샬롬은 조금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알아야만 이번 수양회 주제를 소화 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샬롬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
가지의 성경 언어를 먼저 조금 공부
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마음속과 머릿속을 싹 지우고
백지 상태로 만들고, 여기에 여러분의 개념을 한번
잘 써 보세요. 성경에는 초장부터 복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창세기 1 22절을 보면은 하나님께서 바다의 많은 생물들과 공중의 새들을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을 바닷물에 그리고 땅에 충만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1

26
절에서
28
, 유명한 인간을 창조하신 구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라고 말할 , 그것은 물론 뒷날 신학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라고 말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모습을 닮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그랬어요.

      그럴  우리를 복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 버리고 성경적인 개념의 복이 뭔가 blessing, 우리는  하면
금방 가지고 있는 기존 개념을 버리고, 복이라는 것은
새나 물고기를 비롯한 생명체, 모든 인간을 비롯한
인간과 동물과 같은 생명체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생명의 힘을 복이라 그래요. 사람을 중심으로 얘기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 답게, 가장 행복하게, 정말 땅속에서
물을 함뿍 빨아 들인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그 아름다움을
퍼센트
들어내기에 충분한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지금처럼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창조
하셔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많은 뜻이 있지만 크게  가지가
있어요. 한가지는 동상 같은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왕들이 자신의 통치권을 들어내기 위해서 자기 나라
곳곳에 자기 왕의 상을 둬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마다 나라를 왕이 다스리는 곳이구나이렇게 깨닫도록 것이 형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 그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 하신 후에, 물론 하나님이 다스리시지만 땅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리자로 세우셔서 다스리도록 작정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많은 생물을 창조 하셨지만, 중에
인간을 창조 하실 때에는 우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대권자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걸어 다닐 때 다른 많은 피조물들이 볼 때, 우리를 보고
생각하기를 ‘아 이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이구나’
깨닫도록 지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의 뜻이에요.

       한가지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 세분이 굳이 셋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완전한 연합과 완전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그렇게 재하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살려면 뭐가 필요해? 그냥은 안돼. 그냥은 안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있는 능력을 생명력을 주셔야 되요.
생명력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신비롭고 거대한 것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래서 복은 모든 생명체가 가장 복되고 가장 충만하게 가장 깊고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삶을 누릴 있는 모든 생명력이 복이라는 것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이라는 생명력을 부으실 , 우리들은 그로부터 많은 것을 produce 해요. 창출해요. 뭐냐 하면,
뭐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부터 육체적인 생명, 또 자손의
번성함, 또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 올 수 있는 능력들,
또 육체적인 힘, 성실함
, 지구력, 창의력, 집중력, 용기, 지혜, 모험심, 인내심, 희생정신, 용서하는 마음, 상상력, 심미적 능력, 열정, 동기, 의욕, 관대함, 지적 능력, 감성적 깊이, 의지력, 예술 감각, 뛰어난 운동 능력, 몸과 마음이 아름다움, 사랑과 인정 받음과 자존감과 존귀함과 원만한 인간관계, 그리고 초월적인 존재를 열망하고 나도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것들, 이게 뭡니까?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행복하게 있는데 필요한 삶의 자원들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이 부으시는 복이라는
부라카 라는 히브리말 ‘부라카’ 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 복중의 복, 복의 핵심은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복의 DNA에요. 세포가
있으면 세포의 생명을
DNA
주장하듯이, 복의
DNA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히브리 민족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함과
복을
받았다는 것을 같이 생각했어요. 창세기 26 28,9절에 보면은 이삭,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블레셋에 그랄 땅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블레셋 민족들과 갈들이 있게 되요.
그러나
오랜 갈들에 있다가, 나라의 , 아비멜렉이 찾아와서우리 이제 앞으로 사이 좋게 지냅시다.’? ‘내가 당신의 삶을 본즉,
당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보았소. 당신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이라는 말과
복을
받음이라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복은 그런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 인간의 조건, 인간의 조건은 처음에 복과  다음에
의로움과
, 번째는 하나님의 언약인데요. 의라는
말, 의는 한자말로 찾아 보면 ‘옳을 의’자, justice, 옳음,
옳고 그른 일이 있는데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선하고 틀리지 않은, 악하지 않은 어떤 것을 우리가 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요한 성경구절이 있죠. 로마서
3

23
4절에 보면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해요. 여러분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았을 , 구원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 용어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이라는
헬라말은 원래가 법정 용어에요. 그리스
, 로마 시대에 사용하던 법정 용어로써, 어떤 사람을 취조해본 죄가 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조치를 취한 다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을 무죄 선언 하는 것을 의롭다 함이라고 말해요. 그런 이제 전통 때문에 우리들이 로마서에 특히 나오는,
특히 로마서 5장 1절에도 보면
그런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원래 의롭지
않았어요. 우리가 의로운 것이 아니라 불의, 죄를
많이 졌어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대신
받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 없는 것으로 최종 판결을
하고 무죄 석방 됐다.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은 사실은 그것을 포함하고 훨씬 깊은 뜻이에요. 그것에만 머무르면 여러분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나서 내가 죄를 지으면 나는 죄인이 다시 됐다가 의롭게 됐다가, 왔다 갔다가 하느냐 그것이 아니고, 이것도 이제는 포기라는 개념에서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노트를 지운 다음에 새로 정리해 보세요. 의라는 말은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올바른 관계. 그리고 누가 누구에게 의롭다는 말은 내가 관계가 갖고 있는 관계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의부를 충실하게 감당할 의롭다라고 말해요. 예를 들면, 아빠 엄마는 자식을 돌보고 양육할 , 의로워요. 그러면 자식은 어떠한게
의로운가 하면은 아빠 엄마를 잘 의지하고 아빠 엄마
말을 잘 듣고, 그 혜택을 받아서 무럭 무럭 잘
자랄 , 의롭다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의롭다
라를 말은 철저하게 관계적인 말이지 객관적인 어떤
기준 이것은
옳은 것이다. 이것을 지키면 의롭고 그것을 지켜 죄를 지으면 불의 하다. 그런
개념도 물론 있지만, 훨씬 더 깊어요. 관계적인 개념이에요.
관계적인
개념.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께 못할 짓을 해도,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끊임 없이 우리를 우리에게 다가 오세요. 여러분이 인생에 많은 순간에 여러분의 인생을 계속 추적하시는 하나님을 계속 뿌리쳤지만 그러나 끝내 따라와서 여러분을 잡고 항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그 의로우심
때문에 여러분이 구원 받으신 것이에요. 그
의롭다는 말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셨잖아요. 창조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시고 사랑하여 주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로써의 모든 사랑과 복락을 배푸시는 관계적인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은 의로워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서 의롭다 함을 받느냐, 그분을 신뢰 하는 거에요.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짓고
하는 것은 그것은 두
번째 문제고, 훨씬 더 먼저, 그 하나님을 받아 들이고,
내 하나님, 내가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여러분은 의롭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은
여전히 많은 허물이 있고, 많은 죄를 지었고, 여전히 예수 믿고 나서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죄를 멈추지는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고 아무리 노력해도 선과 악의 변증법적인 이분론 속에서 뱅뱅 돌다가 죽게 됩니다. 살아 숨시는 동안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을 관계 속으로 집어 넣으셨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새로운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관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새로운 분을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은 떠났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관계가 있었어요. 관계를 아담 이후에 인간이 박차고 튀어 나와서 관계가 깨트려 졌는데, 관계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justify, 의롭다 함을 받는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 말할 수 없는 신실하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으로 일단 들어갔어요. 들어가면
, 설혹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관계가 다시 어그러져서 튀어나오는 법이 없어요. ?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너무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시는 너무나 댓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시금 돌아가 앉아 있는 하나님과 의의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관계를 조금 어려운 말로 성경에서 언약적 관계다 이렇게 말해요 언약적 관계. 언약이라는 말은 약속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나라말 번역 성경에는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썼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신약성경,구약성경은 옛날 약속, 새로운 약속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관한 책이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신약 구약을 갖고 계시죠. 그런데 언약이라는 말은 굉장히 기가 막힌 얘기에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약으로 있어요. 그 언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언약은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표현은 간단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 말은 출애굽기 19장, 레위기
26장 쭉 나오고 또 예레미야 31장,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
나오는데, 계속 나오는 말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원래
그러셨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인간이, 아담이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옛날에 한번 일어났던 유일한 사건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으며 모든
인간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슴을 나타내는 말이에요. 그래서 아담 이후에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스스로 박차고 나왔어요.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언약을 지키시는데 인간이 박차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역사 속에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을 택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스스로가 거부했던 하나님과
자녀의 관계를 회복해 나가십니다. 먼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에게 하시고, 그의 국가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태어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류에게 이제 혜택을 펼쳐 나가시는데, 항상 내용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에요. 말이 뭐냐?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말은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 그런 말이 필요하냐? 아담이, 우리들이 하나님 필요 없어 라고 말했거든요. 아담도 그랬고,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하나님께 대한 가장 죄송하고 가장 죄가 뭐였냐.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라는 것이에요. 죄라는 것은 여러분이
땅에
태어나 자라오면서 뭐 누구 나쁜 짓하고, 누구
미워하고,
누구 때리고 죽이고, 뭐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이런
것이 죄다. 이렇게 늘 배워왔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슴에 라는 말은 사회학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내포하지만 성경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항상 신학적으로 정의해야 해요. 뭐냐,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없다 그러고, 없다 그래요. 어떤 사람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믿기 싫다. 하나님
싫어, 그런 것들을 죄라 그럽니다.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은 하나님이 주시는 뭡니까. 복, 생명력을 받게 되요. 그런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 읽다 보면은 이상하다 내가 예수 믿지 않던 상태를 죽었다 표현하는구나. 물론 그때 내가 예수를 믿었지만 살아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죠.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지만
하나님이
계속해서 부어주시는 생명력 그로부터 복으로부터 계속해서 만들어 지는 생명의 자원들을 이상 받게 된 상태를 성경에서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그때까지 받았던 복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게
되는데,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아담이 마치 아담이 하나님을 떠났을 이미 받았으나 이상 공급되지 않는 복을 가지고 세상을 살았듯이, 우리는 엄마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런 상태로 태어나요. 말하면 죽은 상태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생물학적인 생명은 가지고 태어났지마는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요. 그래서
에베소서
2

1
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너희들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를 살리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적인 관계 속으로 복귀해서 원래 하나님이 주시고자
했고 또 인간은 그것을 받지 않으면 결코 인간답게
살수
없는
복과
생명력을 다시 받게 됐을 그것을 살았다라고
말하고 혹은 영생을 얻었다라고
도 말합니다. 같은 뜻을 구약에서는
주로 복이라고 말하고 신약에서는
주로 영생이라고 말해요. 영생이라는 말은 그냥 시간적으로 길고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영생이라는 말은 원래 문자적으로는 오는 시대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오는 시대라는 것은 우리 지금 타임 테이블로 말하면은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고, 그 이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지금 인간의 역사는 마감되고 새로운 시대를 여실 텐데, 그때 누릴 인간들의 삶 원래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시고자 했던 그때 그 풍성한 삶을
계속 누리게 될
텐데, 그 시대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지금 땡겨서 누리고 있어요. 그것을 이제 내일
우리가 다루게 될
텐데.

      , 그럼 이제 샬롬이 뭐냐 서론이 너무 길죠. 샬롬, 샬롬이라는 말은 우리 안녕하십니까, 굿모닝 하는 것과 같이 유태인들은 아침 저녁 만날 마다 샬롬
이렇게 말하죠. 아주
단순하고, 평화로은 좋은 관계 이런 느낌도 있지만 깊은 영적 의미는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은 그런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삶으로써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영생을 받아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속에 있어야 하고 언약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인간은 살아 있는, 정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놀라운 직분을 감당하기에
가능한
RESOURCE
받는 거에요. 그런데 인간은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아요. 창세기 2장 3장에 벌써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고, 반드시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 하셨어요. 그런데 샬롬이 뭐냐 하면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복과 생명력을 공유하면서 그게 같이 뿌리를 내고 같이 발을 담그고 살고 있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래요. 이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깊은 뜻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우리는 하나님의 복과 영생 없이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나만 받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은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공유 하면서 같이, 같이 복을 누리고 사는 상태를 샬롬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어 단어 중에서는
가장
맞는 말이 CONVIVIALITY 말은 원래 대잔치 마을 전체 사람이 같이
참여하는 잔치를 말합니다. 그런 뜻이에요. 아까 말씀드릴
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생명력을 받고
그분과 의로운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들은 소위 말해서
전인. 여러분 전인 교육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전인교육,
전인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INTEGRITY
있는 매사에 봐서 흠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학과 공부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음악도, 미술도 체육도 리더십도 가르쳐서 아주 근사한 사람을
만드는 것을 우리가 전인교육
이렇게 말하는데, 원래 그 전인이라는 말은
개별적으로는
완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뜻은 타인과 더불어서 살아가는 능력을 소유한 사람을 전인이라고 그래요.. INTEGRITY가 있는 사람. 그 전인들끼리
모여서 사는 삶을 샬롬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영어
단어로는 또 한가지 TOTALITY 전체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해요. 제가
여러분의 핸드북에 작은 글을 실어놨어요. 리코스 카잔차스키가 영혼의 자서전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을 써서 아주 불경스러운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러나 아주 진지한 구도자였어요. 이런 글을 좀 읽어
드릴께요. 이 사람이 밤에 꿈을 꿨어요. 크레타
사람인데 원래, 크레타 민요를 부르면서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동굴에서 노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소매를 걷어 붙힌
그의 손은 진흙투성이였다.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을 대더니 그는 엄격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노래는 그만해요 내가 일하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러면서 그는
두 손을 내 보였다. 뭘
빚으시나요? 내가 물었다. 보면 몰라요, 동굴에서 나는 구원 받은 자들을 빚어 낸답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외치는데 가슴속에 상처들이 다시 터져 나왔다. 리코스 카잔차스키는 그리스 정교가 국교인 크레타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을 했습니다.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 니체도 추종해보고 마르크스 공산주의도 추종해 보고 나중에는 불교에 심취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에 한이 맺힌 사람이에요. 그런데 동굴의 노인이 내가 진흙으로 구원 받은 사람을 빚어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놀라는 거에요. 누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니까 노인이
전체성을 파악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합니다. 전체성을 파악하고, 내가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반드시 모여 살수 밖에 없는 그룹에 사람임을 깨닫는
전체성
, 이것을 샬롬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의로운 관계, 그리고 동료 인간들 관계에도 의로운 관계, 머물러 사는 것이 이 샬롬인데, 샬롬은 그야말로 너무 너무 좋은 상태, 너무 좋은 상태여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명을 못하겠어요.
Too good to explain.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근접한 단어로는 창세기에 나오는 좋았더라 라는 단어 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일장을 보면은 하나님이 빛을 창조 하시고 다음 빛을 보시니
좋았더라
, 하나님이 바다와 뭍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그것을 보고 좋았더라,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음에는 심히 좋았더라. 이렇게 하시죠. 좋았더라는 히브리말로 토우브 라는 단어가 그런 뜻이에요. 토우브라는 단어, ‘좋았더라 이런 뜻입니다. 즐거운, 유쾌한, 좋은, 선한, 귀한,
탁월한
, 적적한, 올바른, 탐스러운, 준수한, 충실한, 후한, 선대, 총명함, 보배로운, 길한, 아리따운, 번영, 복지, 은총, 은혜 이런 뜻을 갖고 있어요. 이것이 샬롬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의 퀄리티에요. 단순히 전쟁이 없고, 사이 좋게 지내는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창조 하실 인간의 하나님 형상이라는 위대한 역할을 감당하고 살도록 지어진 인간들이 동료 인간들과 더불어 나위 없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치밀함 같이 완전히 연합되어 사는 그런 퀄리티의 삶을 샬롬이라고 그렇게 하고 원래 우리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어요. 우리가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도저히 옛날 일을 기억할 없을 만큼 됐지만, 그러나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언어 정리가 끝났고.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들어가겠어. 이건 짧게 끝낼  있습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너희가 세상에서, 세상이라는 단어와
고난
, 환란이라는 단어 가지를
잘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실 때에
너희가 세상에서 라고 말하실 때에는 굉장히
슬픔을 담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두시고 너희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 이렇게 말할 , 굉장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속에 있는 것이에요. 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실 때 그
모습이 아니거든. 너무나 깨지고,
너무나 망가지고, 너무나 왜곡되어서 샬롬은 커녕 샬롬의
정 반대인 죽음을 가지고 있는 그런 세상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가지
뉘앙스로 사용
되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말할
우리들은 그 세상이라는 말은 썩 부정적인 느낌을 주지
않죠. 그러나 요한복음 15장 18절 19절 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할거 없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 벌써 나를 미워했던 것을 기억해라. 너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자라면은 너희가 같은 부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않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나에게 선택을 받아서 빠져 나왔기 때문에 세상은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상당히 부정적이에요. 하나님이 너무나 아름답게 샬롬으로 창조하셨는데 그것을 인간의 범죄로 깨어버리고 살벌한 고통과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고통스러운 장소라는 뜻이에요. 동시에 세상은 하나님을 적대시 하고 하나님을 몰라라 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곳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있어요. 제가 사실은 이번 수양회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뭐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 조차도 하나님을 모르는 인본주의자들이 외치는 사회개혁을 부화내공 따라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제가 굉장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요. 여러분
여기에 아마, 우리나라 용어로 좌파들도 있을 거에요.
그 좌파들 제가 좀 구박을 할 것입니다. 물론 우파도
구박해요.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에요. 저는
민주당도 아니고 한나라당도 아니고 교회당입니다. 예배당이에요. 세상의 현실을 보는 해석은 비슷해요. 이세상이 악과 고난이 가득한 곳이구나.
이것을
우리가 회복하자. 우리가 탈피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세상이 원래 낙원이었던
때를 기억해요.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paradise 낙원.
그래서 낙원이 있었다가 상실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거기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무어냐 하면, 아담이
인본주의자였어요 처음에. 그리고 우리들이 예수 믿기 전에 우리들은 좋아하나 싫어하나 인본주의자에요. 말이 뭐냐 하면은
내가
하나님의 피조물로 태어나서 하나님 없이 살수도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 인간 이외에
초월적인 존재가 없슴
선포하는 존재를 우리는 모두다 인본주의자라 부를 있습니다. 휴머니즘, 인간이 궁극적인 존재이고 인간이 시작이고 끝이고 인간이 창조하는 가치가 최고라고 주장하는 것들이에요. 인간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냐 하면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은 비슷한데, 낙원 개념이 없어요. 대신에 이상향이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은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점점 진보하고 인간은 점점 진화해서 점점 좋아져서 마침내 지상 천국에 이르게 것이다. 이것이 유토피아라는 개념이에요. 현실을 보는 시각은 비슷한데, 그것의 해법이 달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원래 하나님이 주셨던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고 인본주의자들은 원래는 없었고 인간과 세상은 원래 굉장히 무지하고 원시적인 상태에서 점점 좋아져서 역사의 진보의 원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결정론적으로 인간은 지상천국, 유토피아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투쟁하고 우리의 삶을 받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에요.
굉장히
비슷하지만 철저히 다른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
청년들이 후자를, 인본주의적인 사회개혁 개념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아무리 숭고한 뜻을 품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던지고자 하는 열정이 있더라도 그것은 틀린 것이에요. 그러냐, 우리 인간이 낙원을 잃어 버리게 것이 하나님의 저주 때문이에요.
인간이 미개 했기 때문에,인간이 원시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저주하셨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창세기
3

17
이후에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저주 하십니다. 사탄, 뱀을, 사탄으로 상징되는 ,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너는 나의 명령을 어겼슴으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대리자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대단히
위대한 존재에요. 인간은 여러분이 상상하는 것보다 백배 배, 위대한 존재, 영광스런 존재로
창조됐어요. 그래서 하나님에 버금가는 그런
존재로 창조 됐는데, 그래서 창세기 2 초반부터 보면은 소위 에덴동산의 모습들, 너무나 풍성한 삶의 조건들, 그리고 거기에는 강이 흐르고
강에서 흐르는 4개의 강들이 지구를 덮었다고 말해요. 고대 세계의 세계관에는 강을 떠난 인간의 삶이란 상상 없었어요.
근데
그것도 무려 4개씩이나 있으니까 얼마나 완전한 삶인가. 거기에 보면 아주 좋은 질의 금이 생산되고, 여러 가지
보석이 생산되더라. 이런
얘기들이 창세기
2
초반에 나오는데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엄청난 직분에 걸맞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허락하셨슴이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좋은데, 그러나 너와 나와는 절대로 넘을
없는 한
개의 선이 있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는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모든 자유가 주어져 있지만 자유는 나에게 종속되어져야 한다. 라는 것이 선악과의 의미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그 의로운 관계 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을 violate할 때,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No Thank you 하는 것이에요.
하나님 관계 없슴 선포, 이것이
선악과 먹음이에요. 그럴 때 하나님이 저주를 선포 하십니다.
우리가 자꾸 이 성경에서 보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 하셔야 되기 때문에 인간세상에서
사용하는
language
사용할 밖에 없어요. 그러나 많은 언어들이 우리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언어로 복구해야 됩니다.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우리끼리 하는 저주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우리는 그냥
FFFFFXX
하는 말이 저주에요. 제가 있어요, 저는 누구보다 욕을 잘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거룩한 장소에서 수가 없어서 여러분의 풍성한 상상력에 맡기기로 하겠어요. 저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따가운 말을 붙고 이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 그럼 잘해봐라. 이거에요. Let him go, 그럼 한번 알아서 해봐라. 너가 없이 있다고? 너는 가장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복과
영성을 끊임없이 받아야 되는 존재인데, ‘나를 떠나서 있다고? 너가 스스로에게 하나님으로 있다고? 한번 해봐라
이것이
저주에요. 하나님과 멀어짐, 하나님과 멀어짐, 그래서 저주는 정확하게 보호의 반대말이에요.
하나님과 함께 함이 뭐라 그랬어요? 보호 하나님과
멀어짐을 저주.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학자인 김세윤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조그만 책자, 구원이란 무엇인가? 혹시 안본
계시면 보세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두란노에서 개정됐어요.
제가
두란노 책을 팔아줘야 되나? 거기에 보면 저주에 빠진 인간을 대지에서 뿌리 뽑힌 나무로 표현했어요. 나무가 있는데, 폭풍이 불어서 뿌리가 뽑혀 버렸어요. 그러면 나무는 금방 죽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무는 개월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누렇게 되고 메마르게 되고, 잎이 시들고, 마침내 죽습니다.
그런데 우리 영적으로 봤을 때는, 그 대지에서 뿌리가
뽑힌 순간 죽었다고 해도 되요. 그러나
아직은 살았다고 있어요. 그러나 죽을병에 걸려 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는 고난과 결핍들이 있습니다. 이세상에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이 바로 고난과
결핍, 죽음의 증상들이에요. 하나님의 저주에 빠진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복을
상실한 인간의 모든 결핍과 고난들의 증상들을 악이라고 그래요 .
Evil
그런 것이 이런 것입니다. 제가 열거할 테니까 잘 들어보세요. 불의, 탐욕, 시기, 질투, 증오, 살인, 다툼, 사기, 악독, 험담, 비방, 모함, 음란, 교만, 악을 도모함, 불효, 신의 없슴, 몰인정함, 무자비함,
이제 그것이 때를 지어서 그룹을 형성해서 서로 다투고 당파 짓고,
소외시키고 집단 이기주의, 공직자의 권력 남용,뇌물수수,
인신매매, 고문
, 인권유린, 전쟁, 인종청소, 인종 차별, 대규모의 기아, 전염병, 우리가 상상할 있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정신적인 물리적인 현상들, 개인과 집단의 부정적인 현상들이 전부다 악이라고 말해요 . 뿐만 아닙니다. 이것이 이제 크게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어요.

      아마 20세기에 가장 엽기적인 사건, 지금 동유럽에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에 일어났던 것일 거에요.
세르비아에는 정교도, 그리스 정교회가 자리 잡고 있고
크로아티아에는
침례교가 있었어요. 크로아티아의 침례교들을 죽이기 위해, 없애기 위해서 남자들은 죽이고 크로아티아의 침례교 여자들을 강제로 임신을 시켰어요. 그래서 종족을 말살하려고 시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들. 르완다의 후토와 투치족의 종족이 다른 종족을 완전히 명도 없이 하겠다고 나선 것들이에요.
2
대전 때 나치 독일의 600만 명 유태인들 학살 이라던지 또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실험은 약 1억
명 정도를 죽였어요. 1억
정도가 죽거나 유형을 당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1500만

정도의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죠. 흑인의 인종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요. 1차 세계 대전
때, 프랑스와 독일 국경의 베르뎅과
솜이라는 두 곳에서 1주일 동안 전쟁이 벌어졌는데,
독일군 50만
명과 프랑스군 45만 명이 죽었어요. 하루에 어떨 때는 4-5만 명이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 따라서
그 기관총 한
자루에 어이 없이 목숨을 잃는 그런
일이 발생했어요. 상상할 수 없어요. 역사책에서
읽으면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는 백만
가량의 가족을 생각해 보세요. 수백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에
한과
눈물이 어려 있는 곳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 라이프라는 사진 잡지에서 1 대전의 장면들을 search 것을
봤어요. 거기
바윗돌에 기념관에 바윗돌에 전사한 청년의 어머니의 말이 불어로 기록이 되어 있어요. 저는 불어를 모르니까 밑에 영어 번역을 보니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My son, 내 아들아, since your eyes were
closed, mine, 내
눈은, 내 눈이 감겨진 후로부터 내 눈은
한시도 눈물을 그쳐 본적이 없다. 역사책에서
보면 솜과 베르뎅 전투에서 45 50 명이
죽었다. 이렇지만, 그 깊이 들어가 보면은 수백만
명의
눈과 한이 어려 있는 이것이 인류의 역사에요. 악. 샬롬이
깨어진, 샬롬이 상실되고 샬롬이 해체 되어 버린, 인류의
현상이 그런 것이고 현재 여러분과
제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개인적과
공동체적인 삶의 부정적이고 팍팍한 모습들은 바로 샬롬이 실종된 상태입니다. 나의 힘과 의지로 어떻게 해볼 없는 불행과 비극이 굉장히 많죠. 태어날 때부터 몸과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질병으로 지체를 잃거나 상해서 연약함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음주운전 때문에 다친 사람들, 너무나 가난하게
태어나서 한번도 유복하게 살아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 임신되었으나 태어나 보기도 전에 성인들에 의해서 중지된 생명들, 공해 때문에 담배 한번 피워 보지 않고도 폐암을 걸린 사람들. 수백년전에 내가 가보지도 못한 나라에서 갖다 버린 산업폐기물 때문에 오늘날 내가 그 오염된 음식을
먹고 암에 걸리는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의 불행들이에요.
츠나미
, 2004년에
2007
년에 중국 스촨성의 지진, 이런 것들을 보면 한꺼번에 수십만 명이
죽어버려. 1755년 11월 1일에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일어난 지진
, 그날은 주일이었어요. 그 지진 때문에 평화롭게
교회당에서 예배
드리던 그 도시 인구 30만 명중
삼분의 일이 즉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럽에서부터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인간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이 그때부터 나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저주 때문이다. 나의 혹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인류 역사 내내 있었던 인간의 죄의 결과이기도 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탄의 . 우리가 타락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연계를 맡겨 주셨는데, 자연계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서
반항하기
때문에 생기는 모든 자연 재해,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지금 악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그래요
, 예수 믿어도 우리는 같이, 혹은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지 않는 자보다 많은 고난을 경험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병에서 났기도 하고 어려움에서 헤어나기도 해요.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개인들이 많이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세상의 고난에서 벗어 난다 그것은 거짓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여전히 환란을 당할 것이다. 물론 해법이 이제 내일과 글피에 나오게 되요. 그래야 되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연대성 때문입니다. 제가
2007
코스타에서 조금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은 인간을 그냥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아담 사람 안에 들어 있게 창조 하셨어요. 사도행전
17
장에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하나님은 사람으로부터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말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는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범죄한 걸로 카운트
됐다 이렇게 말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그거에요. 아담의 죄가 나에게 영향이 있느냐,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인류의 연대성의 원리, solidarity principle 이라
부릅니다. 하나다
,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가족에 태어난 가족이 있죠. 여러분이 선택합니까? 가족의 연대성 속으로 태어납니다. 태어나 보니까 아버지가 찢어지게 가난해요. 이거 뭐야 이거, 집에 태어날래. 꼼짝없이 그 가족에 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연대성의 원리에요. 기가 막히죠.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런
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은. 개인적인 문화, 개인주의적인
문화에 자란 우리들은 도저히 이해할 없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원래 가족으로 지어졌다. 지금은 너무나 커지고 많아져서 도저히 우리가 가족으로 생각할 없는데, 아니 하나님은 너희가 가족으로 지어졌다 말합니다.

      solidarity
principle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다른 모든 인류와 관계가 있어요.
너무나 약
오르게도, 너무나 약 오르게도 기독교에서 이것을 가르치지 못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이것을 먼저 선수를
쳤어요. 공산주의 선언, 세계 공산주의 선언의 중요한
내용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한 모든 사람들의 일은
나와 관계가 있다. 이것이 공산주의 선언입니다. 공산주의
, 사회주의는 우리가 무신론 적이고, 유물론 적이기 때문에 절대고 그것은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신앙과 병행할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중요한 진리를 자기들이 선포를 버렸어요. solidarity 그래서 인간의 연대성을
가장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고난의
문제 입니다. 내가 병들었어요. 병들었을까요? 그것은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간의 고난을 죄의 문제라고 말할 때, 나의 개인적인 , 일대일의 관계 속에서의 내가 고난을 겪는다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물론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굉장히 적은
것이에요. 굉장히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누가 고난을 겪을 가서
회개 하세요 이렇게 말하면 안되요. 그거 염장
지르는 거지, 아니 내가 암이 걸리고 막 이렇게 있는데,
집사님 아마 회개
죄가 있을 것입니다. 뭐 은밀한 죄가 있을 것입니다.
회개 하세요
이러면 안 되요. 그런 경우는 있지만 아주 드물어요.
인간의
대부분의 고난은 내가 지은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에요. 어떻게 아담의
죄이기도 하고 우리 조상
중에 누가 저질렀을 수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질병이나 사고나 공해나 자연재해나 그런데 내가 그걸 당해야 해,
왜 왜 당해야 돼요? 어쩔 수 없는 거미줄처럼 복잡 미묘하게
얽히고 섥혀서 우리가
추적할 수도 없는 연대성 속에 얽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연대성 속에 태어났다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아프게 가르쳐 주는 것이 인간의 고난의 문제에요. 그래서 여러분 고난이 아무리 작은 것이든, 아무리 것이든 간에 낙심하기 이전에 배우셔야 됩니다. , 인간은 하나이구나. 인간은 원래 샬롬으로 존재하도록 지어진 존재였구나 하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는 것이 여러분의 고난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이번 수양회를 거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남은 생애 동안
삶의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 이것은 다른 사람이 겪을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겪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 내가 겪는 고난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동료 인간들을 위해서 내가 샬롬을 회복하기 위해서 처해야 되는 고난이라고 조금씩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여러분은
성공한 것입니다.

      샬롬은 그런 것입니다.
내일, 모레, 샬롬의 회복에 대해서 말하겠지만,
너희가 세상에서 샬롬이 깨어진 결과, 고난을 당할 것이지만
이라고
말했고, 세상의 정체를 말씀 하셨어요.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말씀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샬롬을 복구하는
일에 들어가기 앞서서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고 고난을 겪을 , 우리가 가장 힘든 것이 그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면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도무지 뭘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것이에요. 그런 질문을 강하게 가지셔야 됩니다. 그래야만 이번에 말씀들이 많이 들어올 것이에요. 그러나 고난은 우리는 고난이 있을 고난 자체도 괴롭지만 괴로운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에요. 다음에 이유를 없기 때문이에요. 이유를 없기 때문에, 여러분 애기 낳는 고통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그러죠 제가 안 낳아봐서
모르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애기 낳는 고통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여러분
애기
낳는 산모들이 그토록 힘들어 하지만 애기 낳고 1년쯤 지나면 그러잖아요자기야 하나 낳을까?’
이러잖아요
. 그거 그래요. 고통이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에요. 의미 있는 고통이기 때문에, 그런데 내가 고난을 받을 때는 하나님으로 버림 받은 거 같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거에요.
Why? Why me?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런데 만일, 그 애기가
태어난다는 헤피엔딩처럼 우리도 고난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난을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견뎌 나갈 있다면, 그런 것을 두고 우리가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입니다. 고난에 존엄성 부여하기. 저는 되게 병약한 사람이에요.
60
평생 살면서 한번도 건강해 본적이 없어요. 최근에는 지병이 망막에 도져서, 눈을 수가 없어서 여기 참석할 있을까가 의문시 됐었어요. 저의 아이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심하진 않지만 장애가 있어서 학교를 제때 들어가지 못했어요. 우리 둘째 아이는 저희 도시에 지금
15
년째 살면서
high school
졸업할 때까지 학교를
7
번을 쫓겨났어요. 저의 엄마 아빠가 상당히 고학력자이기 때문에 저는 항상 이렇게 염려를 했습니다.
애가 태어나서 공부를 너무 잘하면 어떡할까 난 그런 거 못 봐주거든요. 그래서 얘야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려고 그랬어요. 근데 애를
낳아보니까 전혀 그런 말 할 필요가 없어요. 전혀 그런
말 할 필요 없이 충분히 못하기 때문에 고난이에요.
고난 아니, why me? 특히 한국 사회에서 한국은 다 학력을
중요시
하는 사회기 때문에 목사 자녀가 공부를 못한다는
굉장히
핸디캡이에요.
참 쪽
팔린
일이라고,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why me? 그러나 제가
그런 고난이 다른 인류가 겪는 하나님의 저주 때문에
겪는 샬롬이
깨어졌기 때문에 겪는 고난임을 알고 예수님이 친히 내려 오셔 고난을 자기 손으로 짊어지고 같이 당하심으로써 샬롬을 복구해 주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고난 받음이 불가피 하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 저는 고난의 존엄성을 부여했어요. 지금은 힘들지만 마음에 평화가 깨어지거나, 기쁨을 잃어 버리거나, 그러지 않아요. 제가 눈을 못보고 있을 , 어떤 분이 찾아 왔을 ,
그리 편안하세요?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아마 우거지 상을 짓고 있어야 마땅한데, 평화로워요, 기쁨이 늘 있습니다.
샬롬이. 왜? 그 고난은 샬롬을
이룸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여러분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해서 샬롬을 회복시키시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 하실 있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안에서 샬롬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있는 비결이 뭔가를 기다리세요.
사모하세요
. 여러분이 말씀은 기대해야 됩니다. 기대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밥도 야트막한 접시에는 요거밖에 안되지만
움푹
파인 그릇에는 머슴 밥처럼
많은 양이 들어가듯이, 여러분의 마음의 그릇을 움푹
파게 만드시고 끝날까지 말씀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네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땅의
실체를 바라봤습니다. 왜 이
땅에는 고난과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가득한지를 왜 그렇게 되는지를 저희들이 살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외 없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슴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무의미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회복하실 샬롬을
이룸에 있어서 이미
샬롬을 맛보기 시작한 저희들이 마땅히 주님의 발자취를 쫓는 저희들 신자들로써 겪어야 하는 즐겁게 때로는 내가 자처 해서라도
짊어져야
하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존엄성을 부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자리에 머리 숙인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비밀, 복음의 비밀, 믿음의 비밀을 깨닫게 도와 주시옵시고 십자가의 부활로 이루신 샬롬의 놀랍고 충격적인 임팩을, 그리고 또한 복을 이미 이땅위에서 당겨서 누리고 있는 누릴 있는 우리들의 복됨 놀랍기 그지 없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아 누릴 있는 귀한 기회로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홍정길 목사, ‘코스타 한계 인식하고 욕심 부리지 마라’

미주뉴스앤조이의 코스타관련 기사입니다.
원문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852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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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길 목사, ‘코스타 한계 인식하고 욕심 부리지 마라’
‘터닝 포인트 제공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2008년 07월 10일 (목) 12:02:53 [조회수 : 674]     박지호 ( simpro )      

          
 
      ▲ 홍 목사는 코스타가 “개인의 소명과 신앙을 발견하고 구도자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코스타의 산파 역할을 했던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그는 코스타를 향해 ‘복음 전도 집회’로서의 성격에 충실하라고 주문했다. 이것저것 욕심 부리지 말고, 제 역할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홍 목사는 복음주의자라 자칭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코스타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코스타가 세워지던 과정을 조곤조곤 설명하던 홍 목사는 뜻하지 않게 코스타가 세워졌고,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일이 커져버렸다고 회고하며 웃었다.  

“그때는 한 번 모이고 말거라 거라 생각했지 계속 모일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첫 수련회 때부터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부어주시더라. 그래서 다음해에 또 모이기로 했고, 그렇게 어느새 23년이 흘렀다.”

홍 목사는 “모든 사역이 자발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 코스타의 중요한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모든 것이 자원봉사 운동이다. 강사비도 없고, 차비도 없다. 보수를 받지 않고 섬기며 함께 참여하는 운동이다.”

지난 20년 동안 코스타에 어떤 열매가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홍 목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말을 이어갔다.

“지금 한국에 뜻 있는 단체에서 헌신하는 사람의 많은 숫자가 코스타 출신이다. 예를 들어 연변과학기술대학이나 한동대학을 일구어낸 주축들도 모두 코스타를 거쳐 갔다. 기독교 학문 연구회나 남북나눔모임 연구위원도 그렇다. 코스타 출신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요구하는데 결국 코스타 출신들이 그런 일을 해나가고 있다.”
 
한번 은혜 받고 끝나는 일회성 수련회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아예 코스타의 그런 한계를 인정하고 들어갔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터닝 포인터만 제공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코스타 모임을 하자고 하지만, 나는 반대한다. 자기가 속한 교회나 직장으로 돌아가야지 코스타라는 곳에 메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홍 목사는 오히려 연속성을 가지고 운동으로 이어가자는 목소리에 대해서 “운동은 운동으로 끝나야 한다. 한계를 인식하고 욕심을 부리지 말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홍 목사는 또 “여러 가지에 초점을 두면 신경이 분산된다. 우리는 복음주의자다. 개인의 소명과 신앙을 발견하고 구도자에게 복음 전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며 복음 전도와 해외선교를 위한 코스타의 역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코스타가 일회성 수련회 한계 탈피하려면’

미주뉴스앤조이의 코스타관련 기사입니다.
원문은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850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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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가 일회성 수련회 한계 탈피하려면’
우종학 박사, “현장의 고민 담지 않으면 복음 왜곡될 수도”
2008년 07월 08일 (화) 13:10:54     박지호 ( simpro )      

” 최근 통계를 볼 때 매년 70% 정도가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는 사람들이다. 풀어 말하면 70%는 코스타에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 코스타는 ‘한 번으로 만족되는 수양회’, ‘혹은 매년 똑같은 수양회’라는 것이다. 나는 코스타가 복음 전도 집회만으로 구성된다 하더라도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코스타가 복음 전도 집회만을 위한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는 않겠다.”

“화끈한 영적 샤워로 끝나버리는, 한 번 참석으로도 다 소화해낼 수 있는 내용의 수양회라면 말이다. 그러나 코스타의 목표가 복음화 된 유학생에게 기독교 세계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 연구와 신앙생활을 격려할 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삶의 현장에서 선교적인 활동과 봉사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면 일주일의 수양회를 통해서 이 목표의 성취가 어떻게 가능한지 평가해야 한다.…” (우종학 박사가 2001년에 쓴 ‘내가 본 코스타’ 중에서)

          
 
      ▲ 우종학 박사는 “삶의 각 영역에 대한 고민이 담겨지지 않으면 복음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며 “비록 코스타 수양회의 초점이 다른 곳에 있더라도 현장의 문제와 세계관의 훈련을 지속해서 담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0년 코스타에 처음 참석했던 우종학 박사가 코스타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해내며 내부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당시 그는 수련회 직후 “다시는 코스타에 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만일 코스타가 복음 전도 집회만을 하는 수양회라면 나는 한 번 이상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가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간사로 그리고 강사로 코스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생각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코스타가 변한 것일까.
 
우종학 박사는 예일대학에서 천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바바라’의 물리학과에서 거대 블랙홀을 연구하고 있다. 1999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코스타와는 2000년 처음 인연을 맺었고, 그해 가을부터 티엠(task-major의 약자 : 신앙과 전공의 통합의 일환으로 만든 사역) 사역을 맡아서 간사로 활동했다.
 
“처음 코스타에 참석했을 때 기대가 컸다. 대학원생 수련회라면 이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는 나름대로의 기대감이 있었는데 여지없이 깨졌다. 그저 대학생 선교단체 수련회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나는 코스타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웃음) 주제가 개인 영성에 한정되어 있었고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든가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조장이었던 우 박사는 조장 평가회에 참석해 “대학원생들이 모이는 모임인데 왜 교회 부흥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느냐? 삶의 현장에서 활동할 전문인들이 모이는 코스타는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만들어 갈 유일한 기회일 수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코스타를 떠났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우 박사가 내뱉은 쓴소리가 계기가 되어 우 박사는 코스타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코스타는 우 박사에게 간사로 사역할 것을 제안했고, 우 박사는 코스타가 하나님나라 운동의 장으로서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스스로 고민했던 부분들을 코스타에 담아내는 시도를 했다. 실제로 우 박사가 사역을 시작한 시점부터 코스타에 몇 가지 작은 변화가 생겼다. 그 중 하나가 전공 분야별로 깊은 차원의 논의와 운동을 이끌어내기 위한 티엠(task-major의 약자)이라는 사역의 등장이다.
 
“코스타 사역의 초창기부터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전공과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전문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왔다. 그 전에도 전공별 모임이 있었지만 더 강화된 의미에서 티엠 코스타 사역이 시작되었다. 삶의 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가치와 질서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유학생들을 준비시키고 돕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실패한 것 같다.(웃음)”
 
이번 2008년 프로그램에도 티엠 세미나가 한 순서를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시간 할애나 참석자의 숫자를 감안해볼 때 우 박사가 소망했던 그림보다는 기능이 축소된 셈이다. 우 박사는 이를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를 물었다.  

“코스타 수양회 자체가 전도와 선교 그리고 부흥 집회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코스타 수양회는 한마디로 ‘복음 전도, 선교 동원, 부흥  집회’였다. 어쩌면 그것은 유학생들의 필요에 의해 생긴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실제로 매년 참석자의 약 10% 정도가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약 10%정도가 타문화권 선교에 헌신한다. 그리고 더 많은 참석자들이 헌신을 다시 결단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그 다음 단계에 해당하는 ‘그러면 각 전문 영역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 것인가’의 문제에 무게를 두기가 어렵다. 작년부터 강사로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다른 강사들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음을 느꼈다. 특히 현장에서 전문인으로 활동하는 강사들은 코스타가 뭔가 다른 것들을 공급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현장의 문제가 더 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염려를 갖고 있다. 이 한계는 코스타가 어쩔 수 없이 지고가야 하는 짐이 아닌가 싶다.”

우 박사는 코스타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해 신앙과 학문의 통합을 위한 고민의 장으로서의 역할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했지만 코스타를 통해서 많은 유학생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영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며 코스타의 순기능이 결코 적지 않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미국에서 유학생들이 처해있는 영적 지형도를 보면 코스타의 현재 모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미국 전역에 흩어진 한인 교회들의 상황은 더없이 열악하다. 오랫동안 영적 갈급함에 굶주리던 학생들이 십여 시간씩 운전을 해서, 혹은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도 불구하고 주머니를 털어 회비를 내고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코스타로 모여든다. 고독과 상처의 문제로 패잔병처럼 코스타에 왔다가 복음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을 보는 일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코스타 참석자들이 처한 현실을 들여다볼 때 코스타의 이런 기능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지역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코스타가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이랄까. 안타깝지만 유학생들의 영적 필요를 무시할 수도 없는 상횡이다.”
 
코스타는 2005년에 20주년을 맞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더 이상 유학생과 비유학생의 구분이 불분명해졌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유학생들도 전부 한국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에 코스타는 섬겨야 할 대상을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새롭게 정의하고, 시대에 맞는 섬김을 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그는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코스타의 핵심가치가 희석될 순 있겠지만, 하나님나라라는 큰 흐름에서는 볼 때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20주년을 맞으면서 코스타가 추구했던 ‘민족’, ‘조국’이라는 개념이 코리안 디아스포라로 확장되었다. 예전에는 유학 생활을 마치고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섬기라는 측면의 강조가 의미 있었지만 이제는 많은 사람이 미국에 남게 되고 해외로 뻗어나가면서 민족과 조국이라는 영역으로 한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유학생뿐만 아니라 청년들도 사역의 대상에 담게 되었다. 물론 코스타의 사역 대상이 넓어졌다는 점 때문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이라는 가치는 더욱 옅어질 수밖에 없지만 다양한 계층의 한인 디아스포라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간다는 차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본다.”
 
코스타에 대한 우 박사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애증이다. 코스타에 대한 그의 애증은 무관심으로 가지 않고 대안 창출을 위한 고민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코스타가 직면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 박사는 코스타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 박사가 코스타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초기의 코스타가 일종의 신병교육대 역할을 했다면, 그것을 토대로 다양한 사역이 생겼으면 좋겠다. 부흥 집회와 복음 전도, 선교 동원 대회로 치르는 동시에 신앙과 삶의 통합을 모색하는 파생 사역이 생겨나야 한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그들이 삶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은 데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세상적 본성에 충실한 악착같은 사람들로 낙인찍혀 버렸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난다고 해서 하나님나라가 도래할까? 코스타도 마찬가지다. 삶의 각 영역에 대한 고민이 담겨지지 않으면 복음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 비록 코스타 수양회의 초점이 다른 곳에 있더라도 현장의 문제와 세계관의 훈련을 지속해서 담아내야 한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파생 사역을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 적용되는 하나님나라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켜나갈 수도 있고, 여러 전문 분야에서 좋은 롤 모델도 발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