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3) – 용서는 “하나님께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용서라는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어원을 보면 ‘나사’, ‘아피에미’ 즉, ’보내는 것’, ‘던져 버리는 것’이고 , ‘살락’, ‘카리조마이’ 즉, ‘자비를 베푸는 것’,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때 그 상처를 안고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누가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것을 던져 버려서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게 용서의 어원입니다. ‘던져버리는 것’, 그 어원을 기억하세요. ‘자비를 베푸는 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용서하는 것은 불쌍한 내가 당하고, 착한 내가 참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받으면 세상의 눈으로는 여러분이 복수할 권리를 갖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보내 버리고 던져 버리는 것이고, 그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믿음가운데 그 담대하게 자신감을 가질 만한 일인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moving on’하는 것입니다. 뒤돌아서서 잊어버려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처와 배신 이런 것들을 밑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저도 상처를 받고 용서하는데 일 년 반이 걸렸습니다.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는 일 년 반이 걸렸던 게 지금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아니까 5분이 걸립니다. 원칙을 생각하며, 날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니 5분 안에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부터 용서가 쉽지는 않지만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일기장에 써 놓고 계속 묵상을 하게 되는데 그러지 마시고 던져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자꾸 생각을 끄집어 내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생각을 끊어버리는 게 필요한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지만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혹이 어디로 들어오느냐면 생각으로 들어옵니다. 과거가 자꾸 묵상의 주제로 올라오면 생각의 주제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삼 분만 “초콜렛 초콜렛” 해보십시오. 초콜렛에 알레지가 있는 사람이 아닌 한 생각나는 건 초콜렛밖에 없을 것입니다. 상처를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 상처밖에 생각나는게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여러분에게 유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속죄양이라고 해서 양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광야로 보내 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과거의 상처들을 버리고 속죄하는 것처럼 양에게 그 상처들을 묶어서 다시 오지 못하게 보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여러분이 진, 큰 빚을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당하고 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진 빚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보내주고 과거를 잊어주고 잘못을 잊어주고 상대편을 자유케 해주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보내주는 것입니다. 놓아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빚을 없는 것으로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용서하지 않을 일을  용서해 주는 일입니다. 내가 혼자 조금 ‘오버’한 것인데 무조건 모든 사람을 용서해야 할 사람으로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선물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용서했을 때 여러분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만 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처를 받은 일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이유는 ‘은혜’, 또 다른 표현으로는 ’용서’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용서가 다른 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그 악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용서 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just maker’이기 때문에 하나님꼐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용서해야 할 때 너무 힘들지 않나요? 만약 상처를 준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괜한 고민을 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큰 그림을 보지 못할 때 제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당신이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용서는 선택입니다. 감정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감정은 한참  뒤에 오기에 용서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짚고 넘어갈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 중에 하나인데 용서와 화해입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input과 상관없이 던져주고, 버려주고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화해는 박수를 치는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데 한 사람이 용서를 하고 싶어도 상대편이 계속 상처를 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 주어야 하지만, 화해는 상대편이 죄를 인정하고 돌아와야만 가능합니다. 남편이 부인을 때리면 부인은 남편을 용서해야 하지만 abuse하는 관계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용서는 죄를 인정하지 않아도  해야 하는 것이지만, 화해는 상대방이 잘못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때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이상 나를 보여주고 상처를 주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닷가에서 예수님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 번을 확인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사랑하느냐?” 본인이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르쳐 주어야 상대방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화해에는 공평과 정의가 바탕이 되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강한자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용서하면 무언가 져준 것 같지만 강하지 않은 자는 결코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정의가 없는데 무조건 친한 척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4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의가 먼저 나와 있습니다. 진정한 화해는 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용서와 화해를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2) – 용서가 힘든 이유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둔한 분이면 잘 못 느끼실 수 있지만 민감한 분일수록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다니면서 훈련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녀오면 머리를 뜯고 싶은 적이 있지 않으세요?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정말 싫다.’한 적이 참 많습니다. 못 느끼시는 분이면 다행인데 여러분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있는 한 그런 상처들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게 되면, 한 번 찔리는 것도 아픈데 계속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사랑 받고 싶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인간관계 안에서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용서의 원칙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꼭 성경의 말씀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지만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이 있기에 맞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세상 학문도 용서가 얼마나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주는 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의 암발병률이 정말 높습니다. 암환자들이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코스타에 오시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오시는 것 일텐데, 여러분이 용서를 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따르지 못한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일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용서를 하면 내가 큰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정말 힘들 때 용서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일을 하셨을 때 스스로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처 한 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용서 받아서 행복하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파하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명감을 가질만한  일인데 왜 용서하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받은 만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는, 용서라는 것이 내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갚아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자연스럽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진짜 상처 받은 사람들 중에서 용서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된 성품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포도원지기’ 예화에서,  한 시에 간 사람, 두 시에 간 사람, 세 시에 간 사람, 여섯 시에 간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고, 또 일찍 온 사람은 더위에 오랜 시간 일했기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를 보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를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여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말이 싫었는데, 죄인을 위해서 오신 건 좋은데 “나 같은 의인은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에게 조건없이 선물을 주려는 것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여섯 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준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데,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온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용서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무마시켜주고, 무조건 변명해주고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넘어가고 당한 사람만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때리면 맞아주고, 맨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절대 화내지 않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여러분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 중 하나가 우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뒤집히는데도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신 사람은 ‘good person’이 아니라 ‘real person’입니다. 속은 그런 게 아닌데 기뻐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정말, 용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아프게 보시는데 공평함이나 정의가 없는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대충 넘어가고 남이 잘못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싫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아빤 술을 조금 하셔”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하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을 원하시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악을 선하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악을 선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해 뭐라고하는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는 상대편을  위해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해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화가 났을 때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루겠지만 여러분의 감정을 마구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창피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 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가 알콜 중독자인데 “아빠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가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서 그런 일을 지적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평화를 참 좋아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숨기는 것은 언젠가 다 터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침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사업에서도 그렇지만 문제를 모르면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면 정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흡연이나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은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이 미디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흡연 문제를 더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받고 부정한 일을 당해도 절대 화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이면 항상 순한 양 같아야 한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엡 4:26-27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원을 보면 “화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permissive imperativ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분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당한 분노를 허락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노하심과 우리의 노함과 차이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노할 상황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악한 상황을 봤을 때 노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는 분노보다 훨씬 더 intensive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일을 당하고 화를 낼 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봐”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노예를 만드는 것에 분노해서 평화적이지만 싸움을 해야 되는데, 정당한 분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게 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의 문제 중 하나가 가해자도 문제가 있지만 맞아주는 부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때리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봐가면서 괴롭히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 있을 때 stand up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셨지만 우리가 죄된 인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낼 때 성경적인 화냄인지 아닐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됩니다.  상황에 따라 화냄의 정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를 적게 내야 할 때도 있고 화를 크게 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 무제한 화를 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 안에서 분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당한 분노는 죄가 아닌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냥 “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뭐.”와 같은 식의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분노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감정 느끼실 때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 받은 감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용서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개념 중에 하나가 ’그 일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 성격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괜찮을텐데’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내 삶의 행복을 빼앗은 사람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심장을 주시고 사신 분들이기에 여러분의 고통을 절대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그것을 체험하실텐데 제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겠지만, 요셉도 만만치 않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를 팔았고, 종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보디발이 강간범으로 감옥에 보냈고,  감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당하고. 억울한 것, 속상한 걸로 따지면 요셉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행해진 일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좋게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힘을 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선하게 바꾸시지 절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안 할 때 ‘내가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 안하고 너를 꽉 쥐면서 너를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거야’ 라는, 약간은 masochistic한 즐거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 안 한 것이 웬지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서를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내가 희생자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용서를 안 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안 하게 되는데 문제는 용서를 안 할 때 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 못하고 미워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까지 놓치는 것은 두 번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용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는 것인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연속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게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갈등과 괴로움에 힘들고 고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만이라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quote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완벽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고 관계 속에 있으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사랑 밖에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라 무섭습니다. 여러분 싫어하는 사람과 있어본 적 있으십니까? 거기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정말 존중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니까 보내 주는 곳. 하지만 정말 무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완벽한 선인데, 하나님이 빠지시니까 모든 선이 빠지고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것을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오기에 우리가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상처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괜찮은  척 하는 것 아니고, 무조건 자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안 한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면  좋겠어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

[김정아] 치유의 길(용서) (1) – 용서는 왜 해야 하나요?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왜 용서가 힘든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내는 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과연 용서하기는  쉬운가?
1. 매우 쉽다
2. 쉽다
3. 어렵다
4. 매우 어렵다
5. 하기 싫다
6. 요나처럼 Just kill me.

답은 6번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 상처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가 있습니다. 친구가 펜을 하나 훔쳤다고 하면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상처를 줬다면 요나가 힘들었던 것처럼 굉장히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많이 안 받아보신 분은 1, 2, 3 중 하나라고 답하실 수 있지만, 여러분이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면 4, 5, 6중 하나라고 답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상처를 안 받으셨다면 굉장한 축복인데, 제가 예언을 할 텐데 여러분은 앞으로 살면서 반드시 상처를 받으실 겁니다. 이것은 저주를 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두 연약한 인간이고 나도 실수를 하고 남들도 실수를 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받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난이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보면 기정 사실입니다. 상처를 안 받아보신 분은 내가 왜 이 세미나를 듣나 생각하실 수 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시던지 남을 돕기 위해서 이것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C.S. Lewis가 말하기를 용서하기가 쉽고 아름답다고 하는 분들, 본인이 용서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정말 용서할 상황이 될 때까지는 참 아름다운데 내가 직접 하게 되면 정말 죽기까지 싫다는 말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믿을지 모르겠지만 ‘복수 가이드’라는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들어있는 시디를  팝니다. 이런데 은혜 받고 찾으시면 안 됩니다. 가짜 티켓을 판다든가, 차 옆에 생선을 넣어 놓는다든가, 칫솔을 변기에 담갔다가 다시 놓는다든가 하는 방법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게 되면 그것을 갚아주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런 복수 대행 웹사이트가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용서가 힘들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용서를 하기 힘든 이유 중에 복수를 하면 속이 시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수는 참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달콤해서 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용서가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부모님, 친구, 애인을 통해서 상처받은 부분을 해결하지 못해서 여기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크리스천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는데 왜 용서하지 못할까 자문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안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해 본 사람은 알지만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죽기보다 힘든 일입니다. 압사당한 개미 보이죠? 아픈 사람들은 어둠에 눌리듯이, 압사당한 사람처럼 아주 힘듭니다. 용서는 힘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아주 정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 기억하실  것은 제가 상담을 하면 “어쩌면 제 친구가 이럴 수 있어요”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용서는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괴롭히는 것은 금방 잊혀집니다. 그런데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은 교회 안이나 가족 안이나 나를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들, 나와 친한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나를 사랑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하는 것입니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이야기 한 것처럼 적보다 친구를 용서하는 것이 훨씬 힘듭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든 것 같습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의 교회 안에 있거나 가정 안에서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친한 사람만이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힘든데 여러분이 용서를 진짜 실천하려고 하실 때 큰 돌을 움직이는 것과 같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프고 당한 것도 어려운데 왜 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원하시는지 굉장히 의문이 생길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기억하셔야  할 것은 용서는 보통 우리가 남을  위해서 하는 거라고 생각을 많이  하는데 앞으로 한 시간 반 동안  설명을 드릴텐데 용서는 정말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걸 기억하시면서 이 세미나를 듣는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결국에는 여러분을 돕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원하실 때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기 때문에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믿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용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받고 아파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정상적으로 상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닮기 원합니다”라는 내용의 찬양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찬양 조심하셔야 합니다. 나쁜 찬양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다는 것인데 기억하셔야 할 것은 예수님의 성품 자체가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다른 도덕성이 아니라 내 자녀가 나를 닮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힘들어도 용서를 실행하셔야 합니다. 근데 제가 느끼는 것은 용서가 진리라는 것을 알고 나니 죽기만큼 싫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이 제가 상처를 받으면서 배운 것들이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할 실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점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대하고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라고 하면 친절하게 웃어주는  것 정도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랑은 희생입니다. 내가 편하고 싶고 더워서 에어컨 앞에 앉고 싶은데 친절하기 때문에 더운 곳에 앉는 마음과 내가 용서하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모인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닮기도 해야 하겠지만 또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용서하신 것과 같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겠다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결국 죄이거든요. 크리스천이라면 죄짓고 싶지 않잖아요. 성경에서는 남을 용서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 마음에 당한 것도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러분 조금 더 생각을 잡아 두시고 저와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죄라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야한 생각을 하는 것과 같이 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픈데 내 일 아니라고 아무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제일 어려운 게 이 말씀일 것 같은데요. 하나님이 조건을 다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거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마태복음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서도 반복하셨습니다. 반복하실 때에는 중요하다는 말씀인데, 내가 안하는 것은 괜찮은데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보니 그림이 확 달라보이죠. 함정에 빠졌다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건가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말씀이 다음 생각과 갈등이 됩니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는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지 헷갈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미 죄인되었을 때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럼 이 두 말씀이 갈등관계가 되는데 잘 생각을 해보면 이게 그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남이 싫은 마음을 꽉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제가 선물을 드리려고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여러분이 상처와 아픔을 잔뜩 들고 있으면 아무리 드리려고 해도 받을 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도 용서 받을 수 없겠다”는 말씀은 너희가 받을 손이 없다는 것이지, 하나님이 조건으로 두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손이 없어지는 것이 안타깝기 때문입니다. 날 위한 것이고, 죄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도 해야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3)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3) – 김현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첫째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성령을 모신 사람들이 예수를 알지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시기, 질투, 짜증, 불평도 많은 나약한 모습을 보고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생긴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령세례가 아닌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 있습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성령세례는 명령된 적이 없지만 성령 충만은 명령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며 성령충만하지 않은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엔 죄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고 하지요, 어떤 사람들은 술 취한 모습과 성령충만한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술 취하면 어떻습니까? 술 취한 모습은 ugly하지만, 성령충만은 질서있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단 한가지 공통점이 무엇이냐면, control입니다. 술취함은 술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성령이 나를 지배하시는 모습, 즉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장악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배를 내가 노저어 가는 것이 아니라 돛에 바람이 불어 바람의 힘으로 배가 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배는 바람이 control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가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미워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을 향한 미움을 내가 아무리 억제하고 내 힘으로 사랑하려 하지만 그것은 힘든 일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내  안에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미운 마음이 불쌍한 마음이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성령의 충만이 가장 중요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거기엔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공식을 말하는 것은 조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인격적인 분이기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을 들이대면 하나님도 꼼짝 못하고 응답해야 되는 것처럼 기도를 가르치는데 그것 또한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내가 성령님께 주도권을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 결과가 되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내 마음을 지배하시는 것을 실제적인 것이고 구체적으로 알 수있습니다.  
첫 번째는, 정말로 이를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시작한다면 그 자체가 성령충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모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속이 세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코스타에 오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이곳에 있는 동안 세상을 좀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우리의 삶 속에 많지 않습니다.  평소 삶을 살 때는 우리의 관심이 너무 흩어집니다. 우리 속에 세상과 자아로 꽉 차 있으면서 성령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는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다면 얼마나 주시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길 ‘하나님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으시겠는냐’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모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에게 사모함이 없을 때는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이제 감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강팍하고 메마른 마음과 육신으로 가득 찬 내 모습을 보며 믿음으로 구해야 하는데, 첫 번째 단계는 이것입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 내 안에 있다면 자백하고 토해내야 합니다. 
앞서 제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을 주 앞에서 애통해 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 자체가 강팍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럴 때는 여러분이 금식도 해야 합니다. 강팍하고 broken되지 못한 내 마음, 낮아지지 못한 내 자신을 볼 때, 한끼나 하루를 금식하면 좋습니다. 
또 각자 자신이 은혜를 받는 방법을 알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분들에게는 그것이 찬양입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반복하여 은혜의 찬양을 부르면, 마음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 안에 움켜지고 있던 욕심, 고집, 강팍함을 다 내려놓고 빈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 빈 마음을 품을때, 그리고 죄를 버리고 회개할 때, 주님 뜻대로 살겠다고 기도로 나아갈때 하나님이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갈 때 성령충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가요,  인격적인가요? 인격적입니다. 왜냐면 ‘사모함 –회개함-믿음으로 구함’ 은 기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실제로 움직이는지, 변화되는지를 내가 알아야 합니다. 나의 강팍함이 깨어지지 않아서 하루종일 근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가슴을 치면서 내 강팍함에 관하여 가슴을 치며 애통할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주님을 간구하면 주님이 우리의 심령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충만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롬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써 내 안에 육신의 생각을 죽이면 내 영이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성령의 인도에는 외적인 인도와 내적인 인도가 있습니다. 외적 인도는 전공, 학교, 결혼과 같은 문제의 선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외적 인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적 인도입니다. 내적 인도를 받는 상태는  내 마음을 하나님이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상태입니다. 내적 인도를 받고 있을 때 외적 인도가 가능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 마음이 없으면서 입술로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부분 자기 뜻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해주셨으면 좋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예를 들어 누구를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육적인 몸의 행실입니다. 내 속에 있는 sinful nature (육신이 아닌 우리 안에 있는 육신적인 성품과 생각)가 온갖 죄를 짓게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이 발동하여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데 내가 여기서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우리가 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내 안에서, 이 죄송이 잘못되었고 ‘시기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고 계속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데, 이제까지 여러분이 그렇게 몸의 행실을 죽여보신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님의 뜻과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죄를 회개하고 죄를 내 속에서 뿌리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되지요? 그런데 성령의 도우심을 좇아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내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될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훈련입니다. 그렇게 한 두 시간 간절히 기도할 때 갑자기 미워하던 사람이 밉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미워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내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며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합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는 동시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생각과 그 친구가 전화를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육신에 지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결심한다고 해서 바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갈등과 싸움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내 뜻대로 살고 죄를 지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한 번 꾹 참고 다시 용기를 내어 승리을 보십시오. 진정으로 용서하고 내 자아를 깨뜨려 보십시오. 이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일이 너무 많지만, 그때마다 주님께 순종하면 우리의 신앙은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이 좋습니다. 고난을 당한 사람은 짧은 시간에 자아가 깨짐을 경험합니다. 내 강팍함과 고집이 한꺼번에 무너져서 “하나님 살려주세요, 내가 잘못했습니다”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공부, 새벽기도,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도 이것이 육신의 행사, 즉 바리새인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남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하는 사람이 됩니다. 목사로서 그런 사람들이 가장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어지럽힙니다. 자기 혼자 잘 믿어서 다른 신자와 교인에게 상처를 주면 참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겸손해지시면 좋겠습니다. 자랑하려면 차라리 봉사 덜하는 것이 낫습니다. 
세 번째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면입니다. 내면이 바뀌고 성령님이 나를 다스리실 때 맺어지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열매와 장식의 차이를 아십니까? Christmas Tree위에 온갖 장식을 붙이지요? 이 나무와 장식은 ‘생명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이건 그야말로 장식일 뿐입니다. 떼어놓아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서 장식을 더덕 더덕 달고 있을때가 많습니다. 교회 직분이 장식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민 교회를 볼 때 권사나 장로가 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과 직분을 비교하고 불평하며 그렇게 장로, 권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리 중요한 가요? 그게 장식일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장로다’,  ‘회장이다…’하며 잘 믿는 척하는 것은 모두 장식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장식인지 열매인지 기가막히게 압니다. 열매는 내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솟아 나며, 내 속에서부터 나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리심으로써,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써 내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맺어지는것입니다. 즉 내가 점점 예수님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성내지 않고 유한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이것은 타고난 성품입니다. 어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 괄괄하고 화도 잘 내는 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타고난 성품이 아니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내가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성격이 유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화낼 때 보면 절대 유하지 않습니다. 단지 남보다 화를 덜 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자아가 건드려져 화를 낼 때 더 무섭습니다. 성격이 유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화도 잘내고 성격도 급하지만, 옛날과 비해서 정말 잘 참고 온유해졌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성령이 그 안에서 성령이 다스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그 안에 맺혀지는 예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맺히는데 오랜시간이 걸립니다. 기도원 같은 곳에 다녀와 은혜받았다고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것 아닙니다. 그것은 일주일도 가지 않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영적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육신을 쳐서 멸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랑을 실천하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이 나의 내면을 바꿔주시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를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게 맞아’, ‘예수 믿고 나서 정말 많이 바뀌었어’라고 주변에서 증거가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은사에 관해서는 성경에서 네 곳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 베드러전서 4장입니다. 이 본문들에 언급된 은사는 총 20여 가지 정도 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20여 가지가 은사의 전부가 아니라 대표적인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은사를 좁게 보면 이 정도가 전부라고 볼 수 있지만, 저는 은사를 넓게 보는 편입니다. 비록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진 재능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성령님께서 쓰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유익에 쓰인다면 그것이 은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적인 재능 자체가 은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어떤 것으로도 몸을 세우려고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가르치는 것, 구제하는 것, 자비, 섬김, 위로 등이 은사라고 합니다. 초자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 에베소서에 나오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자, 목사, 교사는 은사이기도 있지만 직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은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가 있고 가르침을 받아서 섬기는 자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은사는 초자연적인 은사가 많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보다 훨씬 넓고 다양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12장에 나오는 은사의 예를 들면 방언, 통변,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병 고침, 능력의 행함, 예언, 영의 분별이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에 대해 3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째 입장은 이 은사들이  사도시대에서 끝났고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고, 두번째 입장은 오늘날에도 이 은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입장은 이 은사들 뿐 아니라 초대교회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오늘날 다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저는 이 중간 입장입니다.
은사들이 사도시대에서 끝났다는 첫째 입장의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부인할 수 있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 입장이 틀렸다고 봅니다. 세 번째 입장은 사도바울이나 베드로와 같은 분들이 행했던 모든 능력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행했던 능력들은 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전권대사로 그리스도의 사도를 세우셨기에 초대교회 시대에는 사도의 말은 곧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도들에게만 주신 특별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에 반복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증거가 신학성경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사도와 선지자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서 ‘sign and wonder’라고 말할 수 있는 표적이 ‘말과 언어’를 통해서 오늘날 다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극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들은 말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베드로가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다비다가 일어났습니다. 바울도 유두보라는 청년이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는데 살렸습니다. 오늘날 그런 일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드물게 일어납니다. 또 병을 고치는 신유의 은사는 대부분 단계적으로 일어납니다. 한 번 안수해서 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두 번 세 번 반복적인 안수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행한 능력은 즉각 그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능력과 초대교회때의 은사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가 실제로 있습니다.  병을 고치는 은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기도할 때 고침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행한 것처럼 즉각적으로 그리고 원할 때 아무때나 나타나는 능력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은사를 생각하실 때 양쪽 극단을 배제하고 오늘날에도 은사가 다 있지만 이것이 사도적인 능력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때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생각해야 할 것은 은사의 목적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며, 은사에 귀천은 없지만 순서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2장을 보면 첫 번째는 사도요, 두 번째는 선지자요, 세 번째는 교사요 하는 식으로  순서가 나옵니다.  그래서 교회에 덕을 세우는 순서로 은사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은사는 절대로 우리의 신령함의 표지가 아닙니다.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제일 많았던 교회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보면 바울이 ‘너희가 육신에 속한자로다.’ 라고 책망합니다. 즉 은사는 많은데 성령충만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충만하면서 은사가 많았던 것입니다. 은사가 신령함 혹은 성령을 좇는다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은사가 주어진 후에 그 사람이 타락을 하더라도 그 은사는 계속 주어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유의 은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많이 타락하여 그 은사를 가지고 돈을 벌거나 또는 이단적인 발언을 합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그를 위험시하는데 여전히 그 사람이 안수를 하면 병자는 낫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나보고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자라야 들어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와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하지 않았나이까 하리니 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거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여기서 ‘너희가 언제 선지자 노릇했느냐? 거짓말 하지마라’라고 부인하신 것이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일은 다 인정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었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 성령을 좇아 행하는 증거는 열매입니다. 그렇다고 은사를 가볍게 여기고 소홀이 여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은사가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에 대한 나의 청지기적인 자세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감사히 받고 그것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에 사용하며 절대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은사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똑같은 은사를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주십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성령충만입니다. 그리고 이 충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나를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내가 매일 매일 죄와 싸워 이기고 거룩함에 이르고 사랑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 강의를 들으신 모든 분들이 성령이 충만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사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끝)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2) – 김현회



[2] 성령 세례
중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요점은 무엇이냐면 그 결과 우리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점을 강조하냐면, 다음 주제가 성령 세례인데, 성령 세례와 중생을 다르게 구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믿고 중생했지만 아직 성령을 못 받을 수 있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오류입니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영,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모두 성령님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기도 하고 예수님의 영이시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는 것은, 즉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지 않았다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로 믿고 주로 시인하는 것은 성령님으로 가능한 것이고, 내가 영적으로 거듭나서 내 안에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여기 ‘다’, ‘우리가’가 반복되는데 이 말은 성령 세례를 말하는데, 바울이 이 성령 세례를 말할 때 바울의 의도, 요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일이 오히려 교회를 둘로 나누는 현상을 보게 됩니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고, 받지 않은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를 믿고 중생을 하였어도, 성령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중생과 또 다른 사건으로 보는데, 어떤 신비적인 체험, 대표적으로 방언을 염두에 둡니다. 성령의 뜨거운 진동이 왔고 방언을 받았고 이런 체험을 받으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여 이렇게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을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중생을 했지만 예수님의 몸의 지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거듭났지만 성령을 받지 않은 지체가 있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을 마셨다는 말은 내가 성령을 소유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믿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 것이지, 일부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습니다. 신약에 세례에 대한 본문이 7군데 있습니다.  모두 종합해 보면 세례에는 4가지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주는 자, 세례받는 자,  세례의 매개체, 그리고 세례의 목적. 이것을 요한의 물 세례에 적용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의 물 세례에 있어서 주는 자는 누구입니까? 세례 요한입니다. 받는 자는 요한 앞으로 나오는 사람들, 세례의 매개체는 물, 세례의 목적은 죄사함.  그래서 죄사함을 받기위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령 세례입니다. 종종 우리는 성령 세례를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배푸시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배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에서 주시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받는 이는 믿는 우리 모두이며, 세례의 매개체는 성령,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는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며 성령 세례와 중생은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적어도 동시적 사건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은 성삼위 하나님이 다 함께하시는 일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이, 어떤 측면에서 성령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성령 세례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또 우리를 부르신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부르심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삼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함께하시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세례는 중생과 동일하거나 동시적 사건이고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마치 성령세례가 중생과 별개 사건인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 제자이기에 이미 구원은 받았지만, 오순절까지는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중생과 성령 세계가 두 단계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후에 성령을 받았다는 오순절 성령사건은 특별한 것입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한 번만 일어나는 단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성령이 아직까지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강림이 있자 술취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 설교를 합니다. ‘때가 제 삼 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선지자 요엘로 약속한 것을 성취한 것이다 – 말일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다.’  남종과 여종이란 말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란 뜻입니다. 남녀 차별없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영을 부어주시겠다는 그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으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 너희가 보는대로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다. 이것이 너희가 보는 현상이다.’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셔서 아버지로부터 받아 성령을 보내주신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성령이 임재하셔서 사역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에는 모든 믿는 자는 믿을 때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하자 유대인들이 ‘형제들아 우리는 어찌할꼬’하며 마음에 찔림을 느낍니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것에 대한 찔림이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날 오순절날 3000명이 예수를 믿고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죽인 것을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즉 예수를 영접하면 성령을 받으리라”고 선포합니다.  그 중간에 어떤 다른 것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나서 오전에 있었던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성경엔 그 기록이 없습니다. 그 3000명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join을 합니다 – 오순절이 교회의 출발이니까요.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증거는 무엇이냐면 기쁨의 충만이었습니다. 기쁨으로 충만하여 다 함께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떡을 떼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성령 받은 그룹은 2그룹입니다. 첫째로 사도들, 그리고 3000명. 그런데 두 그룹의 모습은 다릅니다. 하지만 똑같이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이후에는 성령님이 오셨으니깐 우리는 3000명에 해당되면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강림과 중생이 다르게 보이는 듯한 다른 본문은 사도행전 8장, 10장, 그리고 19장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하고 많은 사람이 믿자 세례를 줍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례를 받았는데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그들이 정말 예수 믿은 것을 확인 하고 나서 사도들이 안수하매 성령이 저들에게 임하노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분명히 오순절과 비슷하게 두 단계죠.  빌립이 전하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사도들이 안수했을때 성령이 임하고 방언도 하고 그런 여러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이렇게 보는것이 옳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라”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대는 같습니다, 다 유대인들이기에. 이 유대를 넘어서 제일 먼저 복음이 전파된 곳이 사마리아입니다. 먼저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와 유다는 원수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사마리아까지 전파되면 사마리아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받아드려야 하는데, 그러면 어떤 현상이 있어야 하면, 오순절이 한번 반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행 8장에서 나오는 사마리아판 오순절입니다. 그런 현상이 똑같이 일어나야만 ‘이들도 똑같이 성령을 받았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행전 10장에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비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을 ‘경건한 자’라고 했습니다.특별한 용어로써 Godly man이라고 합니다. 할례를 받지 않고 귀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고넬료가 기도하는 가운데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불러 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어 그곳으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가 환상을 봅니다.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엔 부정한 짐승이 잔뜩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어라’ 그랬더니 베드로는 그럴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정케한 짐승을 네가 부정타 하지 말라’ 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을 하여, 그들을 따라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듣는 중에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임하는데 오순절 사건과 같은 형태로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과 이들도 똑같이 받았으니 누가 이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금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도 오순절의 반복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이 유대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사마리아인에게 한 번 일어나고, 이방인에게 넘어갈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동안 유대인들이 너무나 견고하게 쌓아놓았던 민족적인 장벽, 유대인과 사마리아 관계에 장벽을 무너뜨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때 거기 몇 명의 제자들을 만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에 제자들의 반응이 ‘우리는 성령의 있음도 몰랐다’였습니다. 바울이 조금 의아해하여 ‘그러면 너희는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자 그들은 요한의 물세례만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하고 예언도 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인데 아직 성령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잘 보면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1. 믿을 때 성령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2.믿을 때 당연히 성령을 받는다.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볼 때 이상했던 건 믿을 때 성령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않았던 제자들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있음도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이전 18장에는 알렉산드리아라는 곳에 있는 아볼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볼로는 열심히 말씀을 전했지만 요한의 물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동역 하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 주의 도를 자세히 일러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오실 메시아를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요한이 자기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그가 메시아며 구세주라고 해던 것까지 안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던 것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중생과 성령세례는 같은 것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이 문제가 확실해질 것입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의 인치심.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시는데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보실때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의 소유라고 도장을 찍으신 것이며,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앞으로 우리가 장차 얻을 기업 – 상속 –하나님의 상속자, 얻을 기업의 보증이 되셨다라는 뜻입니다. Deposit/보증금으로 성령님을 모셨다는 뜻입니다. 인치심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예수 믿는 자 안에 불꽃이 타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령님이 있습니다. 성령님을 모시는 자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거듭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사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모시고 있는 성령님이 무슨 의미냐면, 마치 자동차를 살때 downpay를 하고 사는 것처럼 앞으로 나머지 것을 주겠다는 약속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그 새로운 세상을 상속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속 받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증하기 위해 우리안에 세로운 세대의 일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3가지 – 중생, 성령 세례, 인치심– 모두는 예수를 믿는 출발점에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출발점 사건의 공통점은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셔서 사신다, 곧 내주하신다고 말, 즉 In dwelling Holy Spirit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요즘 성령세례에 관하여 그릇됨들이 있어서 자꾸 예수를 믿는데 성령을 받지 못하고 second class Christian인것처럼 그렇게 구분하는 건강하지 못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할때 체험을 우선으로 하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을 좇아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맛보는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갈 때 우리 안에 모신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차 올 세상을 미리 맛볼 수 있는것입니다. (계속)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

[김현회]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1)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현회 목사님의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성령님과 그리스도인의 삶 – 김현회


서론 :
‘그리스도인’의 삶은 힘든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삶을 계속 사실 때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 진다.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성령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바른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보혜사 성령님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다락방 설교’ 혹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지신 장소가 다락방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요14:16).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인데, ‘우리 옆에 계시는 분’, ‘우리를 도와 주시는 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영어로는 comforter(위로자)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original 보혜사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original 보혜사는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상에 오셨을 때 육체를 입고 오셨기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으셨고, 그 때문에 오직 제자들과만 함께 있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영’이시기 언제, 어디서나 계실 수 있고 모든 믿는 자 옆에 계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님을 생각할 때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이유는, 우리가 성령님이 없이는 살 수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1) 성령님이 어떤 분이시며, (2)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 지를 알고, (3)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체험입니다. 성경과 체험은 배타적인 것이 아닙니다.
흔히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를 보면, ‘오직 성경’을 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령파’ 교회는 체험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런데 성경과 체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그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성경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에 관해 배울 때 일단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체험 속에서 확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체험은 매우 다양하며,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방언, 입신, 신유 등의 체험이 다른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체험을 보고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읽은 힌두교 신자의 글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명상’, ‘참선’의 기쁨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명상을 깊이 하다보면 내면 깊이 샘 솟듯이 기쁨이 끊임없이 솟아 오른다.’ 제가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은혜 받을 때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힌두교 신자라는 이유로, 우리가 ‘당신의 체험은 가짜야’라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체험은 진짜일 것입니다. 그 사람도 기쁨이나, 내적인 평화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은 성령님으로부터 온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기준이고, 체험은 기준이 아닙니다. 체험은 성경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하고, 분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그치는 것도 잘못입니다. 성경이 어떤 체험이 있다고 가르치면 우리는 그 체험을 우리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과 체험에 관계를 여러분이 잘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오늘 강의를 진행해보겠습니다. 체험으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질문이 있다면 성경에 비추어서 그 체험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사역: 중생, 성령세례, 인치심

[1] 첫째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사역은 중생입니다.

중생, 거듭남, 영어로는 re-generation인데 무슨 의미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요3:3-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니고데모라는 사람과의 대화 중에 나온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보니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니고데모가 만일 오늘날 교회에 찾아온다면 교회에서 굉장히 환영할 것 같습니다. 당신같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리고 니고데모 정도의 background를 가졌다면 교회에서 금방 장로도 되고 높은 직책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네가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갖고 있구나’.  또는 ‘네가 나를 알아보는 눈이 있구나’. 이렇게 칭찬하시는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볼 수 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고 율법에 통달했다. 하지만 너는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너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거듭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도, 예수님의 평가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질문을 합니다: “나처럼 늙은 사람이 어찌 다시 태어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니고데모의 말 자체가 영적인 것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다는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과거에 사람들이 이 말을 오해하여 물은 물 세례, 성령은 성령 세례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물 즉 성령’ 물과 성령은 같은 것으로 혹은 물은 말씀, 성령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에스겔서 36:25-27에 있습니다.

(겔 36:25-27)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간 상태에 있는데, 이들을 본토로 돌려 보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약속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본토로 돌아와도 포로가 되기 전의 영적 상태, 하나님께 불순종 하고, 우상 숭배하고 타락한 그대로 있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본토로 돌아가는 외적인 회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여기에서 물이 나옵니다. “내가 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씻겠다. 그리고 새 영을 주고, 나의 신을 –성령님을-주겠다.”  다시 말하면 속에서부터 새롭게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영- 너희가 성령님에 의하여 내면으로 부터 새로워져야 한다, 변화되어야 한다, 거듭나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기 전 영으로 죽었었기에, 죽은 영을 살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영으로 분리되어있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이며, 이것이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시 살리시는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정말 맞지 않습니까? 이제 니고데모의 현대판 인물을 생각해봅시다.  Richard Dawkins을 아십니까?  ‘God Delusion’이라는 책을 쓴,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론자입니다.  ‘God Delusion’이란 책에서 얼마나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책이  best seller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봤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도덕이 어디서 오는지, 인간에게 있는 옳고 그름의 의식이 어디서 오는지 그런 부분을 관심있게 봤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논리적으로 헛점이 많고, first class 책이 아니라 삼류 책이라고 느껴집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학자, 지식인들은 그 책이 무신론에 복음이나 되는 것처럼 환영합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은 점은 역시 영적인 것은 육신의 눈으로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적이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살리시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