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혁]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말라”(수 23:5-6).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는 칼럼을 본회로 끝맺고자 한다. 특별히 미국이나 타국에 이민을 고려하며 고민하고 있는 유학생들을 주 대상으로 썼던 칼럼이었기에, 고국에 돌아가서 직장을 얻길 원하거나 그래야만 되는 유학생들에게는 다소 공격적이요 이해하기 힘든 글이 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생들은 고국을 떠나 타국의 문화속에 살면서, 타국에서 자신과 고국과 세계를 바라볼수 있는 눈이 열린 사람들이다. 자신의 밖에서 자신을 보길 원하며 또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수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유학생이 보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을 향한 시각과 사고의 폭은 필연적으로 넓고 깊어야 할 것이다. 미국에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들이 크리스천으로서, 미국 땅에서 어떻게 삶과 예배의 균형을 유지하며 승리하는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해 썼던 수많은 논제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들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 논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정직하고, 성결하게,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Integrity를 갖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기로 결단하라”는 촉구는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보다는, 도리어 고국에 돌아가는 유학생들에게 더욱 간절히 부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강력으로 무너뜨려야할 여리고성들은 미국보다는 우리의 고국땅에 더 많은 것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태평양을 건너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더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건너야 될 요단강 건너기가 될 수도 있겠다.


다시 여호수아서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자. 이민자의 땅이 저들과 저들의 자손이 진정으로 차지하는 땅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나누어 보자.


아이성은 정복되었다. 거의 모든 가나안 지방을 결국 정복되게 된다. 정복이 완료된 후에, 요단의 서편과 동편에 걸쳐서 가나안 지경을 12지파에게 분배하며 그들의 기업이 되도록한다 (수13-19장).


저들이 기업으로 분배된 땅을 차지하며, 실제로 저들의 땅이 되게하기까지는 감내해야 될 책임과 지켜야될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을 잡고 생업의 터전을 마련한 유학생 크리스천들은, 이제 막 12지파에게 분배되었던 것과 같은 기업을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그 기업의 약속이 진정으로 유학생 이민자의 것이 되어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 자손들이 번성하기까지는 꼭 지키고 따라야 할 약속의 말씀이 있다. 즉 “나와 내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수24:15)는 가나안 땅의 이민자였던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백이 유학생 이민자들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브온 거민에게 속지말라


기브온 거민이 속임수를 써서 이스라엘 백성과 화친의 언약을 맺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여호와께 묻지 않고, 그들과 화친의 언약을 맺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그것으로 인하여, 가나안 족속의 완전정복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흠집을 내게된다. 뿐만아니라, 이 실수에 기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먼 훗날에 큰화를 입게된다. 다윗왕 시대에 까닭없이 삼년간의 기근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고통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사울이 기브온과의 언약을 어기고 기브온 사람을 죽인 것을 인함이라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14).


새로운 직장을 미국에서 얻게되고, 열심히 일하여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이민생활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이민생활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민생활을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나서, 이민 생활에 적응할 때쯤이면, 자칫 자만심에 빠지기 쉽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거민에게 속은 것같은 실수를 저지르기가 쉽다. 항상 화친하자고 유혹하는 물질, 명예, 학문과 교만이라는 기브온 거민의 속임수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이 속임수를 바로 분별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분별하고, 항상 하나님께 묻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여호와께 묻고 새로운 진로를 결정하며 나아가게 되면, 때론 더딘 것 같으나 가장 믿을만한 이민길이 된다. 쉬지말고 기도하며, 항상 하나님께 묻고 나아가는 길이 가장 쉽고 탄탄한 이민길이다.


영주권 취득 – 첫 번째 기업(Inheritance)


아직도 정복하지 못한 지역이 남아있긴하지만, 정복한 땅들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주어 이제 저들의 기업이 되게하라고 한다 (수13-19장). 유학생 이민자들이 하나님께 받아야할 첫 번째 기업은 취업에 이어서 미국의 영주권 취득이 될 것이다.


대학이나 연구소, 또는 기업에서 tenure position을 얻었든지 또 임시직을 얻었든지간에, 유학생 이민자가 가장 먼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미국내에서 자신의 거주신분을 확정시키는 일이다. 결국 미국 영주권은 이민자로 살기 위해서 얻어야 할 첫 번째 기업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미국이민을 고려하며, 몇 년간의 임시직이나 방문고용직에 취업하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는 길을 가장 우선적으로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유학생 출신의 박사후 연구생이나 임시직 취업자들은 취업이 시작되면 본인의 거주신분 조정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연구 못지않게 자신들의 영주권 취득에 즉각 골몰하는 중국 및 인도계 유학생들의 지혜를 한국 유학생 이민자는 꼭 배워야 될 것이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중국 및 인도계 유학생의 이민 개척정신이 대학생 수준이라면, 한국유학생은 이제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대체로 영주권 신청이나, 시민권 신청은 이민전문 변호사를 통하여 하는 것이 통례인데(자신이 직접 할 수도 있음), 능력있고 신뢰성있는 이민변호사의 선택은 무척 중요하다. 제한된 시간과 싸우며, 거주 신분조정을 확정하고자 할 때, 책임감있고 신뢰성있는 이민변호사의 조언과 도움과 서류작성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유학생활중에 전공한 전공분야의 취업을 통하여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 제일 바람직하긴 하지만, 다른 수많은 합법적인 방법이 있음을 숙지하고, 이민 변호사와 상담하면 좋을 것이다. 만일 학위취득 후에 미국 이민과 해외취업에 뜻이 있다면, 유학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좀더 적극적으로 영주권 취득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다.


새로운 직업관


우리의 고국에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뿌리를 둔 관념적인 선비주의와 권위적인 관료주의가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본다. 미국에 수년간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한 한국유학생들도 예외는 아니다. 전공분야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한국유학생들은 고국이나 미국에서 대학교수의 직업을 얻기를 원하는 듯싶다. 물론 가르치고, 연구하고, 창의적으로 학생을 지도하길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학교수는 어디서건 권장할 만한 직업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미국에서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모든 전문직 종사자에게 인기있는 직업이거나 선망이 되는 수입 좋은 직업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대학교수직을 얻기가 쉽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학교수나 전문연구직은 도리어 개인의 적성과 개성에 따라 선택되어야 할 직업이라 생각된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기 원하는 한국유학생들의 직업관에 관한 새로운 의식구조와 인식의 변화가 절실히 요구된다. 대학교수직이나 전문연구직보다 더 좋은 직업과 기회가 즐비한 미국에서, 수입도 낮고, 일도 힘든 대학교수가 선망이 될 이유는 별로 없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능한 직업의 다양성을 적극 고려해야 될 것이다. 교수나 연구직 말고도, 수입도 좋고, 평생 자기계발도 할 수 있는 전문직이 얼마든지 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고국에서 굳어진 전통적인 직업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물론 고국에서 직업을 찾는 사람도, 관념적인 선비정신과 권위적인 관료주의적 직업관으로는 이제 세계속에서 경쟁하는 한국인으로 살기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평생에 보장된 안정된 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지 이미 오래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위해서라면, 한달에도 몇번이고 기업을 통합하고 쪼개는 것이 다국적 미국기업들의 실상이다. 기업을 위한 고용인의 기여도와 분야에 관계없이, 미국의 전문직 종사자의 60%가 기업의 통폐합 때문에 해고를 당하거나 타의적인 이직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고자하는 거의 대부분의 유학생 이민자들도 몇번의 해고나 타의적 이직을 꼭 경험하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새로운 직업윤리가 이민자들을 압박해 온다면, 이를 대처하며, 뛰어넘고, 새롭게 적응하고자하는 정신력을 갖는 자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해고사태도 많고, 상응하는 재취업의 기회도 많다. 따라서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별로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미국에서 박사보다 더 좋은 석사학위


내가 이미 박사학위 소지자요 또 대학의 현직교수인 까닭에, 논란의 여지가 있긴하지만, 미국에 유학하는 거의 모든 한국유학생들이 박사학위를 취득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히 미국에 취업이나 이민을 하고자하는 유학생들은 석사학위 취득 후에, 미국에서의 더 많은 취업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일이다. 박사학위 수학능력과 자질은 논외로 하더라도, 박사학위를 취득하려면 시간도 오래걸릴 뿐더러, 이에 상응하여 학위취득 후에 기득권자가 되던 시대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더 이상 존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이든, 학문이든, 예술이든간에 공급과 수요의 균형적인 원리를 깨뜨리기는 쉽지 않다. 가정과 사회에 책임있는 크리스천 전문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얻게될 전문직업의 안정적인 수요와 공급의 균형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수년간 부모와 고국에서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받고, 힘든 유학생활을 감내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한 많은 유학생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전문성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가슴 아픈 일이다. 최근 보고된 바에 의하면, 많은 해외 학위취득자들이 고국에서 전문직업을 얻지 못하고 택시운전자들의 직업을 빼앗고 있다고 하니, 이는 결코 생산적인 해외유학 투자라고 볼 수 없다.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곧 미국직장에 취업을 하는 것은 전공분야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여러면에서 장점이 있다. 특별히, 수년이 더 걸리기는 박사학위 과정을 고려한다면, 석사학위 취득후 취업은 궁극적으로 박사학위 취득자와 동등하거나 아니면 더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자 한다면, 박사학위보다 석사학위로 더 취업하기 좋은 분야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직장을 얻고자하는 경우, 석사학위 취득 후의 취업은 다음과 같은 여러장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권장할 만한 것이다.


첫째, 미국에서는 석사학위 취득자가 박사학위 취득자보다 취업이 쉽고 기회가 많다는 점이다. 박사학위 취득자는 대학교수나 회사나 연방정부의 제한된 연구직에만 고용이 필요하지만, 석사학위 취득자는 비전문적이든 연구직이든 더 많은 고용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 2년이라는 짧은 수학기간 때문에 부모님의 경제부담도 줄이고, 경제자립을 속히 이룰 수 있다. 취업후 몇 년간 일하며 경제자립과 실제적인 경험을 한후에, 본인이 원하면 부모의 도움없이 박사학위 수학을 계속 할 수도 있다.


셋째, 기업의 창업(start-up company)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가질수 있다. 몇 년의 미국 직장생활 후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곧 창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마도 박사학위를 취득할 만큼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창업한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이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특별히 미국에 정착한 한국유학생 출신 이민자는 자신이 창업하고, 기업가로 성공한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중국계 및 인도계 유학생 출신 이민자와 비교해 볼 때, 한국 유학생 출신 이민자의 창업은 너무도 미미한 편이다. 미국에 정착하고자하는 수많은 한국계 유학생 출신 이민자들이 이제 눈을 돌려, 창업에 새롭게 도전하였으면 한다. 좋은 아이디어와 열정만 있으면, 수많은 정부지원 무료 창업자금이 널려 있다는 것에 눈을 뜨기 바란다. 유학생 이민자들이 이제 창업을 좀더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라고 권면하고 싶다. 어느 이민 사회이든 경제를 장악함이 없이는 결코 바른 주인행세를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계 미국이민자 협회(ACO)에서 주최하는 Chinese American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Korean American의 꿈을 심어 줄 수 있는 더 많은 프로그램들을 지원하는 길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부터는 많은 유학생 출신 이민자와 기업가들이 한국유학생과 Korean American 젊은 세대에 적극 투자하여, 하나님 나라와 이민세대를 위한 큰 꿈을 키워주는 많은 지원 프로그램들을 개발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네가 개척하라


각 지파에 분배한 땅을 소유하는 것은, 그저 가나안 지방의 지도에 선을 그어서 지파의 기업이 되게하는 것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던 듯싶다. 이스라엘 지파들은 계속적으로 그 곳 땅에 사는 거민들을 쫒아내며, 자기분파의 땅이 되도록 개척하고 일구어야 했던 것이다. 예를들면, 에브라임 산지를 기업으로 받은 요셉의 족속은 자신들이 큰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좁은 땅을 분배받았다고 여호수아에게 항의를 한 듯하다. 이에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 스스로 개척하라”(수17:15)고 책망하면서, “그 산지가 네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한자라도 네가 능히 그를 좇아내리라”(수17:18)고 권면하고 있다. 그저 기업으로 받았다고 저들의 땅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지키고, 개척하여 그 지경을 넓혀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약속 가운데에, 미국 이민자로서 생업의 터전을 얻은 유학생 이민자들은 이제 막 미국 땅에서 기업을 얻은 셈이다. 기업의 약속이 저절로 요셉지파의 분깃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유학생 이민자는 삼림이라도 올라가 스스로 개척하여, 하나님께 받은 기업이 자신과 후손들을 위한 분깃이 되도록 힘써 개척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땅의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 주신지 오랜 후에, 이제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은지라, 온 이스라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과 유사들을 불러놓고 그들에게 마지막 부탁의 유언을 남기게 된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한 그 땅들을 차지하게 될 것이니, 꼭 힘써서 말씀을 지키며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니 말라고 부탁한다 (수23:1-6). 오직 스스로 조심하여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라고 권면하며, 여호수아는 자신과 자신의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다(수24:15). 여호수아는 자신이 죽은 후에 미래의 세대를 생각하며 유언과 같은 다짐과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막 가나안 땅에 이민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어느곳이든 이민 1세는 고난의 세대이다. 이민 1세는 수많은 고난을 감내하고서도, 새땅에 태어나는 새로운 세대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세대이다. 소수점이하로 나누어진다는 이민 1세, 1.5세 및 2세간의 세대차이와 의사소통의 간격은 여느 동질문화 속에 늘상 존재하는 그런 세대차이와는 다르다. 나이와 문화와 언어의 3중적인 격변을 단번에 격게되는 이민 세대간의 갈등을, 나는 격변적인 갈등이라고 분류하고 싶다. 이런 격변적인 갈등을 넘어서,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자손들에게 여호수아처럼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고 보여주고 또 가르칠 것인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염려하였던 것처럼, 미국에서 어떻게 우리의 자손들이 믿음을 지켜서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이 되게 할 것인가? 이는 한인 이민자들의 가장 중요한 기도의 제목이다. 모이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며 여호와 중심으로 살고자 했던 한인이민 1세들의 굳건한 믿음의 유산을 미래의 세대에 걸쳐 어떻게 전수해 줄 것인가? 지금 우리는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때이다. 한인 이민교회와 크리스천들은 당면하는 수많은 이민자로서의 힘든 삶과 싸우면서도, 어떻게 하면 다가오는 세대의 Korean American 크리스천들이 “오직 여호와만 섬기게” 할 것인지 여호수아만큼이나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다.


결론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의 유언과 같은 권면과 부탁을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수24:24)라고 다짐한다. 이에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큰돌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워서 “증거의 돌”로 삼는다. 즉 우리 자손들은 만대에 걸쳐 “오직 여호와만 섬기자”는 언약을 하고 이의 증거하기 위해 세운 돌이다.


나는 최근에 청교도들이 미국 이민의 첫발을 내디뎠던 Massachusettes주의 Plymouth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Plymouth에는 미국 이민의 첫발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기념물이 많이 있지만, 특히 “Plymouth Rock”이라는 돌은 대서양을 건넌 첫 이민선인 Mayflower에서 내린 청교도들이 미국대륙에 첫발을 디딘 돌이라고 하여, “1620”년이라고 새겨놓고 저들 선조의 이민사를 기억하고 있다. 별로 크지 않은 돌이지만, 미국 첫 이민을 기념하며, 미국 이민정신의 원류를 기억토록 하는 “증거의 돌”인 셈이다. 물론, 이 Plymouth Rock 자체보다는, 그 돌을 볼 때마다 그 돌에 담겨진 청교도들의 이민 개척정신을 기억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있는 Korean American은 거의 3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이제 미국의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느곳에서나 Korean American을 쉽게 만나게 된다. 몇 사람만 모이면, 교회를 개척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일한 민족, 위기 앞에서 쉽게 단결하는 민족, 그러면서도 열심히 서로 싸우는 민족- Korean American!. 짧은 미국 이민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능가하는 억척스러움으로 미국에서 번영하는 자랑스런 민족이요, 또 후세대의 교육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지혜로운 민족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축복받은 민족이다. 그러나, Korean American의 이민사는 그러한 현세적인 성공과 억척스러움만 가지고는 올바르게 쓰여질 수도, 결코 세대를 넘어 지속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Korean American은 다가올 세대와 무엇으로 언약을 삼고, “증거의 돌”을 세울 것이며, 미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진정으로 차지하는 이민사를 쓸것인가? 가나안 땅에 이민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쓴 이민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할 때”에만 바르게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배웠다. 이제 우리는 눈을 열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아주 멀리 수백년 후를 바라보며 온세계를 품에 안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Korean American의 다가올 세대와 하나님 말씀으로 언약을 세우되, “Korean American과 그집들은 여호와만 충심으로 섬기자”라고 증거의 돌 위에 써야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한민족을 세계 각곳에 복음을 들고가는 이민자로 흩으셨다면, 주님께서는 분명히 흩어진 한국 이민자를 통하여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실 것이다.

[안종혁]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 이민자의 여리고성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6:20)”


여호수아서에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그곳 거민과 가축까지 진멸하고서, 여리고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놀랍기도 하지만, 때론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서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를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따라 타국에 정착해야 하는 유학생 이민자들은 그곳 거민을 여호수아에서처럼 진멸해야 될 것인가? 물론 그런 말씀은 아니다.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눈앞에 나타나게될 여리고성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무너뜨려야 될 것인지를 본 컬럼을 통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


여리고성은 어디에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에서 새삶 일구기는, 새로운 간척지로 이주해간 철거민의 새삶 일구기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수 없는 전투를 감내하며, 새삶의 터전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절박한 생존의 문제를 앞에 둔 두려운 삶이었던 것이다.


10여년전에 나와 함께 공부하던 유학생동료들은 거의 모두가 고국에서 직장을 얻고 돌아가버렸는데, 나만 홀로 미국에 이민자로 남게되었다고 생각이 되었을 때 가졌던 그 불안함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학위를 끝내고, 아직 영어로 말하고 듣기도 자유롭지 못한 그때에, 대학의 조교수로서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학부 Senior 강의를 첫강의로 맡았다. 그 첫 강의 시간에 나 자신이 들어도 잘 이해가 안되는 영어로 횡설수설 한시간을 떠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땀이 난다.


미국이라는 새땅에서 가족과 함께 새 삶의 터전을 잘 일궈야된다고 굳게 다짐하며 나아갈 때마다, 언어의 장벽, 문화와 관습의 이해부족 및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의 결여는 나를 가장 괴롭히던 장벽이요 넘기 힘든 견고한 성처럼 보였다. 뿐만아니라,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던 이 장벽과 견고한 성들은 틈만나면 나를 공격하여 낙심하게 만들곤 하였다. 오늘날 이민생활을 시작하는 유학생들이 넘고, 극복해야 할 첫 번째의 여리고성이란 바로 새땅에서 새삶을 일굴때에 우리를 낙심케하는 이런 문화와 환경의 장벽이 아니겠는가? 미국땅에서 새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있어서, 생업 속에서 극복하고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성은 지금도 수없이 존재하는 셈이다.


뿐만아니라, 뉴에이지 운동과 종교의 다원화 현상으로 여리고성에 살던 거민들이 보여주었던 영적 혼탁함이 이민자들이 사는 곳마다 넘쳐나고 있으며,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 사회가 불문율처럼 받아드리고 있는 동성연애의 합법화, 이혼의 범람, 마약의 홍수, 성적타락, 종교의 다원화 및 뉴에이지 운동으로부터 우리와 우리의 자녀를 어떻게 지키며, 어떻게 저 혼탁한 것들로부터 이땅을 자유롭게 할 것인가? 이제 우리가 파해야 할 견고한 두 번째 여리고성은 바로 우리를 유혹하여 하나님께부터 멀어지게 할 수있는 이런 영적인 혼탁함이다. 신명기 20장 16-18 말씀에서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신20:18)”라고 하셨다.


우리의 실제적인 절망감은 이러한 외적인 영적 타락함을 우리가 쉽게 고칠 수도 또 극복할 수도 없다는데 있다. 물론 끊임없이 이 세상이 이러한 타락함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되며, 하나님이 언젠가는 꼭 회복시켜주시리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영적 혼탁함으로부터 우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내면세계를 어떻게 지킬것인가 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생각해보면, 첫 번째 여리고성과 달리, 이 두 번째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은 결국 우리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의 혼탁함에 물드는 것을 막기 위해, 여리고성의 모든 거민을 진멸하시도록 요구하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있는 영적 혼탁함과 죄악의 여리고성과 그 거민들을 진멸하기까지 내몰아야 할 것이다.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서 여리고성의 모든 것을 네 손에 붙였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군사는 여리고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세동안 돌았다. 제 칠일에는 성읍을 일곱번 돌고,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며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까지도 만반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을 여리고성의 거민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이적이 무엇인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그 크신 권능으로 드러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의 상식과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여리고성은 무너졌던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의 무너짐을 위하여 육체로 싸우지 아니하고, 그들이 싸웠던 병기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었다(고후10:4-5). 즉 모든 이론과 세상의 지식을 파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승리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이 새로운 이민생활 속에서 만나게되는 문화와 환경의 외부 변화에서 오는 두려운 여리고성과 외적 영적 혼돈과 혼탁으로부터 와서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성은 오직 하나님의 강력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이민생활속에서 참 자유와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강력을 소유하는 길은 오직 유학생활과 이민생활 중에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에 바른 관계를 유지할 때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갖게되는 문화와 언어의 장벽에 대한 두려움은 곧 무너지게 될 것이며, 주님의 말씀안에서 내면세계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 질서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 그분이 여리고성의 진을 파하는 우리의 강력이요, 꿈(vision)이시기 때문이다.


아간의 Integrity의 부재


여리고성 함락의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유다 지파의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취하지 말라고 한 여리고성의 함락과 함께 바친 물건을 취하는 범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된다. 이는 곧 쉽게여겼던 아이성의 첫 공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삼십육인이 죽는 징벌을 받게된다. 이 패배는 단순한 것 같으나, 앞으로 다가올 수 없는 이방족속의 도전을 생각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낙심케하고 근심스럽게 하기에 족한 돌발적인 사건임이 분명하였다.


아간은 외투한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내어서 그 물건을 장막에 가져다 감추었다. 광야를 지나며 입었던 옷들은 비록 헤어지지는 않았지만, 맵시나 모양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멋있게 장식된 아름다운 외투 한벌을 보는 순간 너무도 입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은덩이와 금덩이를 보는 순간에, 가나안 땅이라는 새로운 이민처에서 새 삶을 일구며, 자녀를 길러야될 가장으로서 아간은 새 출발을 좀더 넉넉하게 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몰래 가져다가 자신의 장막안에 숨겨둔 그 귀한것들을 누가 알 것인가? 장막에 머물때마다 수없이 가나안 이민생활의 아름다운 모래성을 쌓고 허물면서,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아간은 하나님의 베푸시는 기적의 역사를 광야를 건너며 몇번 보긴 하였지만, 다 그건 우연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혹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었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또 멸시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지파를 여호와 앞으로 나오게 하고, 하나님께 범죄한 지파와 족속을 찾기위하여, 지파를 뽑고 또 족속을 뽑을 때도, 아간은 하나님께서 결국은 자기를 뽑으리라고 끝내 생각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차라리, 지파 뽑기가 시작될 때에 선뜻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자복하고 나섰더라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끝내 아간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지 못하였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탐욕의 죄로 양심의 눈이 멀어버린 탓이었을까? 아간은 끝까지 하나님의 실패를 기다렸다. 하나님이 실수하시기를 말이다. 그러나, 결코 실수하거나 실패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결국 아간은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숨겨둔 것들과 그의 아들과 딸 모든 가족 및 그의 장막의 모든 것들과 함께 아골 골짜기로 끌려가서 불사름과 함께 돌무더기 속에 가나안 이민의 꿈을 허망하게 묻어야 했던 것이다.


탐욕은 죄악에 이르는 디딤돌이요,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다. 미국 직장생활에 제일 중요한 것은 정해진 법과 규범을 준수하며,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을 얻는 것이든지 승진이든지,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이루어가야 하는 사회이다. 복권에 당첨됨이 없이는, 누구도 부정한 방법으로는 일확천금을 얻기가 어려운 사회이다. 아무리 능률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회라고 할지라도, 역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법칙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동일하다. 특별히, 미국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요구되는 제일 중요한 성품이 있는데 바로 “integrity”이다. Integrity라는 의미에 꼭 부합되는 한국말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 의미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정직하고 신뢰할만한 성품으로서 지, 정, 의가 조화를 이룬 성품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아마도 미국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이는 미국 땅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과 세상에서의 삶이 일치하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틀림없이 그들이 일하는 직장과 사회에서 integrity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불법과 편법으로 위기를 넘기면서, 권모술수로 살아남고자 하는 자는 분명히 미국직장에서 결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정직하지 않으며, 진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바닥이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대학에서도 자기이득에 부합하면 어제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미국 교수를 여럿 보았다. 모두가 우둔하며 속아주는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integrity가 결여된 사람이라고 주위의 동료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된다. 물론 그런 사람은 언젠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쓸리움을 받는 것을 볼 것이다.


아간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서 삶속에서 신앙의 integrity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뽑힐때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integrity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온 가족과 더불어 죽음을 면치 못하였던 것이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을 평가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해서이지 결코 크리스천의 신앙심을 통하여서가 아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자는 다짐은, 즉 세상의 삶속에서도 integrity를 갖자는 말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믿지 않는 자들이 크리스천의 integrity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 아니겠는가? Integrity는 미국 직장과 이민생활에서 필요한 크리스천의 빛과 소금이요, 균형있는 예배와 삶의 열매인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에 더하여, 유학생은 학업에 충실해야하고, 이민자는 이민생활에 충실해야 하며, 이민목회자는 이민자의 영혼을 돌보는데 충실해야 할 것이다. 이 integrity의 결여 때문에, 이민사회와 이민교회,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아마도 이 시대에 한국이민 크리스천에게 가장 요구되는 삶은 바로 integrity를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끝까지 단창을 잡아라


이스라엘의 회개함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여호수아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아이로 올라가라 하시며, 아이성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여 주신다(수8:1).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이성의 교훈은 아무리 우세한 힘과 전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땅을 그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수한 실력과 전문성을 가지고 새로운 이민생활을 시작한다고 할지라도, 이민하는 그 땅을 하나님께서 저들의 손에 붙이지 않는 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또 아이성 정복의 전략을 다시 세운다. 전략은 성공하였고, 이스라엘이 거짓 패하여 광야길로 도망할새, 성문을 열어놓고 모든 아이와 벧엘족속이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 내가 이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수8:18)”하신 말씀에 따라, 단창을 든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일어나 성읍을 점령하고 불을 놓았다. 이에 놀란 아이성 사람들이 돌이켜 왔으나,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수8:26)”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키라”는 말씀은 복병이 일어나도록 하라는 신호일수 있기에, 여호수아는 그저 한번의 신호로 단창을 들어 아이성을 가리켰어도 무방할뻔 하였다. 이미 복병은 일어나 아이를 공격 할테이고, 하나님께서 승리는 약속해주신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거민을 진멸하기 까지 단창을 잡아든 손을 거두지 않고 아이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는 출애굽 후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때와 비슷하다. 그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아말렉과 싸울때에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그래서 아말렉을 쳐서 파할때까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아론과 훌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한후, 그 둘이 모세의 손을 들어 올려서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하였다.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출17:14)”라고 하셨으니, 지금 아이성을 공격하며 여호수아는 그 때 모세에게 보여주었던 “여호와 닛시” 와 끝내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모세가 보여주었던 “최선의 노력”의 신앙의 모범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여호수아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말씀에 따라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이 성취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민생활과 직장생활의 승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에 의지하며, 여호수아처럼 최후의 승리가 있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에 있다고 하겠다. 육신적으로는 아프게 저려오는 단창을 든 손을 거두고 싶었을 여호수아였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결코 편안함과 안일함에 안주할 수 없었던 여호수아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일을 조금만 하다가도 안되면, 하나님의 섭리로 돌려버리며, 쉽게 포기해 버리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여호수아가 보여주었던 진지한 삶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여기서 예수 안에서 최선을 다하면 꼭 자신이 원하는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는 식의 “성공의 공식”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크리스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들의 삶에서도 유익한 결과를 언젠가는 얻는다는 것은 말씀에 의지하여 장담할 수 있다(히11:6).


이민자로서 주어진 직장의 업무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고, 예배생활에만 열정적인 크리스천이 있다면, 균형있는 신앙생활을 해야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삶의 중심과 최우선의 위치에 주님을 모시고 또 인정하는 것이야 필수적인 크리스천의 기본신앙이다. 어떠한 상황과 여건하에서도 최선을 다한 후에 얻어진 일의 결과와 응답에 대하여는, 만족할 만한 것이든 아니든간에 주님의 결정에 순복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이미 선포되었는데도, 이의 성취를 위한 전략도 없고, 최선을 다함이 없이 게으르고, 또 시간을 아낄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런 실패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돌리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인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크리스천은 무슨 일이든 주어진 사명에 끝까지 단창을 잡았던 여호수아처럼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어진 결과가 무엇이든간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충고는 아무리 권면하여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기


심지 않으면 거둘수가 없다. 생명의 씨앗 뿌리기가 그렇고, 세상의 삶이 그렇다. 미국은 다민족이 함께 모여사는 melting_pot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누구도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유럽의 백인들이 먼저 이민와서 개척정신을 주장하며 기득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흑인은 노예로 팔려온 선조들의 눈물과 회한과 땀으로 얼룩진 곳에서, 끝내는 인권운동을 통하여 쟁취한 자유와 번영을 주장하며 살고 있다. 중국인은 미국의 동서를 잇는 철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예처럼 팔려온 선조들의 기득권 속에서 곳곳에 차이나 타운을 형성하며 살고 있다. 거의 모든 미국의 이민자의 삶속에는 그들만이 주장하는 기득권이 있고,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민자는 무엇을 가지고 미국의 번영을 누리고 나누며 살 수 있다고 주장할 만한 기득권이나 권리가 있는가? 백년전의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은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긍지요 자랑일 따름이다. 1960년대 마틴 루터 킹목사 주도하에 일어난 인권운동의 결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도 유색인종 분리정책은 많은 동양계 이민자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에 사는 minority들이 그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신들을 희생하며 싸울때에, 우리 한국이민자는 거의 참여함이 없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미국땅에서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득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굳건한 신앙외에 별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별로 심은 것이 없는 곳에서 지금 당장 우리가 풍성함으로 거두길 원하는가? 모든 언론은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다고 쓰고 있으며, 또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관한 극단적인 발언은 어느 곳에서든지 생존을 즉각적으로 위협하는 폭탄과 같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시안계 이민 유학생들이 직장에서, 그들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인종차별의 벽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유학생 이민 가정들이 넘어야하고 정복해야할 여리고성과 아이성이 수없이 산재해 있음을 본다. 진급에 누락되어 분노하고, 열심히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너무 쉽게 해고되어서 낙망하는 동양계 유학생 이민자를 지금도 본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는 것이지,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여호수아처럼 끝까지 단창을 잡고 최선을 다하여 살기로 한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어떠한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는 이민자 가 깊게 생각해야할 선택이다. 심지 않은데서는 결코 거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안종혁]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수5:15).


들어가는 말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라는 연재 칼럼 중, 지난 회까지는 미국에서 직장을 찾고자 하는 경우에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제 이미 job offer를 받고서, 미국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자 할 때에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될 것인가에 관하여 논의하여 보기로 하자.


본 칼럼을 몇회에 걸쳐 연재로 쓰는 중에, 미국에서 직장을 얻기 원하는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다. 몇몇은 본 칼럼에서 도전 받고서 미국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다고 감사를 표명하는 형제자매들도 있다. 감사한 일이나, 본 칼럼을 통하여 내가 분명히 해두고 싶은 점이 있다. 본 칼럼은 미국에 이민을 하거나, 또 직장을 얻은 것이 더 좋다 또는 싫다는 식의 혹자가 말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나 반미주의’ 또는 ‘국수적인 민족주의’등에 관한 논쟁은 나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확실히 해두고 싶다.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거역할 수 없는 새로운 이민 생활과 외국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되는 고민스럽고 절박한 문제를 신앙의 눈을 통해 조명해 보고 싶을 뿐이다. 새로운 땅을 바라보며, 여호수아가 경험하였던 고뇌를 생각하며, 미국에 유학하는 한국 유학생 형제자매의 현실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고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외국에서 직장을 찾거나 학위취득 후에 직장을 찾는 고민은 마찬가지이며, 직장 찾는 방법은 다르더라도 원론적인 상황과 접근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거룩할 수 없는 땅에서 신발을 벗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었다. 하나님의 임재로 거룩해지는 어느 땅에서든지, 겸허하게 주님앞에서 종으로서 신발을 기꺼이 벗고, 주님을 참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자만이 새로운 환경에서 승리할 수 있을것이다.


길갈에 세운 열두돌 기념비


다시 여호수아서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보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들어서자마자 요단강은 약속처럼 갈라졌다. 얼마나 기쁘고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이었겠는가.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의 가운데에 굳게 섰고, 백성들은 감사에 벅찬 가슴으로 요단을 건넜을 것이다. 지난날 광야에서 수없이 겪었던 고생이 단번에 보상이 된 듯이, 지난 모든 고통들을 이 순간에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아마도 미지의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생업을 위한 새로운 직장을 얻게된 유학생 이민자와 그 가정의 기쁨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할것이다. 그 어렵게 생각되던 job 인터뷰를 잘마치고 job offer를 받아냈다는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할 것이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부족한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감사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감사도 할 것이다. 지난 수년동안 유학생활을 되돌아보면 감회가 깊어지기도 할 것이다. 힘든 학점이수, 연구, 연주 및 작품발표 준비로 마음 졸이며 밤을 세웠던 수많은 날들이 벌써 언제이었나 싶기도 할 것이다. 다시 유학생활의 광야로 되돌아가라면 자신이 없지만, 그 광야의 훈련을 지난 것을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도 할 것이다. 첫 열매는 하나님 것이라고 설교하시던 목사님의 말씀에 다소 부담을 느끼면서도, 벌써 전문인으로서 받게 될 첫 봉급을 나누어 쓸 계획에 마음이 분주해 진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감사함은 언제나 오래 지속적이지 못하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저들이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지키시며, 만나를 공급하시고 저들의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곧 잊어버릴 것을 말이다. 감격스럽게 마른땅을 건넜던 요단강의 기적을 곧 잊어버릴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열두지파에게 부탁하여 요단강 가운데와 길갈에 요단의 물이 끊어진 표징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저들이 자자손손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와 보호하심을 기억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 감격의 순간에는, 무거운 기념비의 돌을 지고 나오는 일조차도 기쁜일이었을 것이다. 요단 가운데에 돌을 세워서 표징을 만들고, 또 길갈에 세울 돌을 들고 나오는 열두지파의 대표들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을 것이다. 길갈에 열두돌로 기념비도 세우고, 요단을 마르게 하신 하나님의 능하심을 되새기며 자손에게 이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를 가르치자고 몇번이고 다짐도 해두었을 것이다. 아무리 다짐을 했어도, 저들은 금방 길갈에서 다짐하였던 감사의 맹세를 잊어버리고 만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하는 죄된 본성은 변하지 않은 탓에,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평지에 이르게되면 너무도 쉽고 빠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이다. 새로운 진로의 두려움 때문에, 요단강만 건너게 해주시면 주님을 위하여 무엇이나 하고싶던 감격도 금방 시들해져 버리기 쉽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 속에 힘겨운 유학생활의 광야를 지나, 길갈까지 이르렀던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 선배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지금 보고 있는가?


저들은 요단강을 건널 때 가져가서 길갈에 세워야 할 기념비의 돌을 잃어버리고 간 연고요, 또는 가지고 갔으되 바른 기념비로 세우지 못한 탓일 것이다. 요단을 건너며 가지고 가야되는 돌은 “주께 감사”의 돌이다. 비록 길갈에 세운 돌에 문비로 쓰진 않았지만, 평생에 결코 잊을 수 없는 “주께 감사”를 그 돌에 새기고, 때만 되면 길갈의 기념비로 되돌아와서 그 “감사”를 되새기며, 주께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헌신”으로 돌을 닦아야 할 기념비가 아니겠는가?


학위와 직장때문에 얼마나 울고 웃었는가? 하지만 이제 그 학위와 좋은 직장을 얻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광야를 지나서, 학위취득과 새로운 전문직업을 얻은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것을 누가 부당하다고 할것인가? 마음껏 감사함으로 기쁨을 누리자. 그러나, 나는 “누구 때문에” 오늘의 새 길을 얻게 되었으며,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게 되는가? 조용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얻은 답을 길갈의 기념비에 꼭 새겨두고, 게으름과 교만이 싹틀 때마다 찾아와 읽어야 할 기념비가 바로 길갈에 있는 것이다. 자녀들에게도 그 기념비에 적힌 기적과 감사를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요, 세대를 넘어 변함없이 한결같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길갈의 기념비로 돌아가보리라고 다짐해 두자.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기쁨도 잠시였다. 길갈에 기념비를 세우긴 하였지만, 가나안 이방족속과 싸우게 될 일이 벌써 걱정이다. 이미 요단강을 마른땅으로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본 가나안 이방족속들은 하나님의 능력 앞에 겁을 먹고 있긴 하지만, 언제 저들이 싸움을 걸어올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광야에서 출생하여, 거친 생활에 잘 훈련된 젊은 용사들이 몇 만명이나 있지 않은가? 지도력이 출중한 여호수아는 다가올 이방족속과의 전쟁에 승리할 전략을 충분히 세워 놓았을 터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 중 할례를 받을 수 없었던 모든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먼저 받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 위급한 상황에서 이 얼마나 부당하신 명령인가? 옛날 야곱 할아버지와 그 자녀들이 막내딸 디나로 인하여 히위족속 에게 수치를 당했을 때, 히위족속의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고서, 낫기를 기다리던 저들을 습격하여 진멸시켰던 할례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도 수없이 들어온 터였다(창34:1-31). 지금 상황은 그보다 더 급박한 상황인데, 싸울 수 있는 젊은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가나안 이방족속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용사가 무장하고 밤낮으로 지켜도 부족한 터에, 거의 모든 남자들은 할례를 받고 며칠동안 낫기를 기다려야 한다니 참 걱정스러운 일이다. 히위족속의 이야기가 자꾸 마음을 괴롭히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하신 방법이다. 그 분은 항상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살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아야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합당한 성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다짐이 먼저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풍요로움을 다 갖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이방족속이 섬기는 더러운 우상들과 타락된 세상욕망 속에 이스라엘 백성이 동화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아니 저들로부터 성결하게, 썩지 않는 소금처럼 구별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가나안 땅을 축복으로 누리기 전에 먼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시라는 고백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할례”가 아니였을까?


광야의 유학생활 시절중에는 연구 및 강의조교로 받았던 적은 장학금이라도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 받게되는 거액의 연봉에 비하면, 그것은 참 쥐꼬리만한 것이었다고 생각이 되기 시작한다. 이제 물론 부모님께 미안하게 마음 조리며 받았던 생활비 보조도 더 필요없게 될터이다. 아니 도리어 지금 이미 연로해지신 부모님을 도와드릴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뻐서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몇 년간 속을 썩이던 고물차도 이제 새차로 바꾸고, 그 지겨운 아파트 생활도 청산하고 정원이 있는 새집도 사 볼 작정이다. 정원은 몇 에이커 좋을까가 궁금하고, 익히 들어왔던 것처럼 집 앞뒤의 잔디 깎을 일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이미 보랏빛 장래가 열린 듯이 보인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새로운 직장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아직도 미숙하기만한 새로운 땅에서의 직장생활에서 다가오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잘 처리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얻은 직장인데, 성공적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내가 무엇인가 준비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한다. 생활은 자꾸자꾸 숨쉴 틈도 없이 바빠져 가고 있다. 점점 기도하기가 재미없어지고, 예배생활이 다소 느슨해진다.


수많은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직장을 얻자마자,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쉽게 빠져버리 거나, 힘든 세상의 일들에 파묻혀 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실로 가슴 아픈일이다. 이제 세상 속으로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파송을 받아 나간 저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쉽게 빠져 버린다면 어찌될 것인가? 세상에 살되,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동화되지 않고, 어떤 경우에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구별되어, 인내하며 살고자하는 결단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직장을 찾아 떠나는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의 할례가” 아니겠는가?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에 굳게서서,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크리스천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그러한 크리스천 몇 명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이 세상의 도시와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고자하는 결단의 마음으로 세상 속에서도 구별되게 살고자하는 전문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복음은 빛이나고, 그 사회는 아름다워 질 것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스라엘 백성은 새로운 땅에서 할례를 행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 이제 점령해야 될 여리고가 가까워져 가고있는데, 여호수아는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된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하여 행하였다. 이 말씀과 상황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셨던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와 비슷한 말씀과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을 여호수아에게 다시 하시면서 그에게 용기를 주려 하셨을 것이다.


가나안 땅은 가나안 이방족속이 사는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땅이었다. 그런데 그곳이 어떻게 거룩한 곳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때문이다. 새로운 이민 생활을 시작하게될 새땅은 어느곳이든 우상과 죄악이 가득한 거룩할수 없는 땅이다. 그러나 우리가 새롭게 정착하며 살 땅이 어느 곳이든, 하나님이 임재하심이 있으면 거룩한 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처럼 우리 모두도 그 거룩한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신을 벗을 수밖에 없는 것이며, 벗어야만 되는 것이다.


예수 전도단의 창시자인 로렌 커닝햄은 “네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이렇게 풀고 있다.



“맨 발이 되라고 하는 것은 겸손의 표시로서, 나의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맨발로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시 오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되시는 우리 예수님과 함께 열방을 소유할 뿐아니라,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권세를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또 우리에게 이 모든 것보다 가장 큰 특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세상을 취해 이기는-을 약속하셨다.”


이민 생활과 새로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이 세상을 취해 이기기를 진정으로 원하는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땅을 거룩하게 여기고, 겸손하게 그 땅에서 신발을 벗고 살아야 할것이다. 자신의 능력과 취득학위로 되는 것이 아니요, 진정한 이민생활의 승리는 주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실 때 얻게 되는 것이다. 이민하여 사는 그 곳이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이 되게하고, 겸허하게 주님 앞에 자신의 신발을 벗고, 주님을 내 삶의 진정한 주님으로 섬길 때에 승리가 보장되는 것이다.


맺는 말


성경에서 보면, 실패하는 이민자와 승리하는 이민자가 있다. 미국 이민에서도 승리하는 이민 백성(족속)과 실패하는 이민 족속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곳이 어느 곳이든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이 어느 곳이든 주님의 종으로서 여호수아처럼 주님 앞에서 자신의 신발을 기꺼이 벗는 삶은 승리하는 이민자의 삶이다. 그것은 그 간에 수고하여 얻은 전문인의로써의 전문성을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새롭게 허락된 땅에서 더욱 철저히 전문성을 발휘하고, 또 그 전문성을 통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하며, 더불어 온몸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끝내 두고 온 애굽의 기억들을 계속 그리워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땅에서 기꺼이 신발을 벗을 수 없는 자는, 언제나 떠도는 이민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민자의 삶을 살 것인가는 이민자의 선택에 달려있다. 자의든 타의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는 한국이민자는 지금 자신들이 사는 곳을 어떻게 생각하며 살고 있을까? 미국이나 제3국에 새로운 직장을 찾으며 이민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이여, 어느곳이든 거룩한 땅에서 신발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여호수아처럼 살자. 주님이 승리케 하실 것이다.


[안종혁] 요단에 들어서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요단에 들어서라



“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수3:8)


들어가는 말


모맥 거두는 시기에 요단강의 물은 강언덕까지 넘쳐흐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강을 건너기도 쉽지 아니하려니와, 또 건넌다고 한들 수많은 가나안 이방 족속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사도 있고 장정도 많지만, 수많은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데리고 미지의 땅으로,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나가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얼마나 기대와 함께 두려움과 갈등이 있었을까? 밀려오는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숨소리마저 죽이며, 묵묵히 요단강을 향해 걸어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열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여호수아는 아직도 구체적인 요단강의 도강 계획을 온 백성에게 말하지 않고, 다만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의 뒤를 좇아 요단에 들어서라고만 이르고 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요단강 위에 보트를 띄우든지, 아니면 임시 다리를 놓는다하여도, 그 많은 백성이 건너기에는 며칠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한명도 불평없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며 묵묵히 나아갔던 것이다. 즉 모든 지도자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가는 “믿음과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의 고된 영적 및 육적 훈련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순종하며 용기있게 나아가는 것만이 저들이 좇아야 할 참 길임을 이미 터득하였던 것이다. 요단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수아가 말한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는 말씀 중에서 그 기사를 예견하고 볼 수 있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을까? 하나님이 행하실 요단강을 가르실 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간적인 인식의 범위를 넘는 기적이다. 그러나 저들은 40년전 출애굽 시에 홍해를 가르며 건넜던 기사에 대하여 부모로부터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 홍해처럼 분명히 갈라지리라는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을 따라 요단강을 향하여 과감히 나아갔던 것이다.


미국 이민을 고려하고 또 타국에서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의 마음도 요단강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큰 기대에 차 있으면서도, 자신이 없고 또 용기도 없을 수도 있다. 대학에 교수로 지원할지, 회사나 연방정부의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가야할지, 또는 어떤 교향악단에 입단해야 될지가 모두 불투명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지난 칼럼에서 썼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계속적인 주저함과 생각함만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으로 나아가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즉 이스라엘 백성처럼 언약궤를 맨 제사장을 따라 요단에 들어서는 실행의 용기가 필요하다.


개척정신


우리가 갈 길을 알지 못하고, 이전에 지나보지 못한 인생길을 가는 것은 위험하고 두려운 일이다. 더욱이 남이 가보지 아니한 길을 가는 것은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 인생길을 가는데 실제로 가장 무서운 적은, 실패를 두려워하여 어떤 일을 아예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 무기력함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에서도, 한 달란트 받았던 자가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마25:25)라고 변명하였을 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주인의 책망을 듣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유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 인도함에 따라 믿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용기이다. 오늘도 미국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기본정신은 신앙의 자유와 정의를 찾아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지의 땅, 아메리카 대륙을 향하여 용기있게 항해하였던 청교도들의 “개척정신”일 것이다. 대서양의 거센 파도와 질병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청교도들이 미지의 땅 플리머스(Plymouth)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혹심한 추위와 배고픔뿐이었지만, 저들은 먼저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오랫동안의 농경문화와 유교문화의 전통에 길들여진 한국 젊은이들에게, 아마도 가장 낯설고 두려운 단어는 “개척정신”이라는 말일 것이다. 미국에 공부하고있는 많은 다른 나라의 유학생들과 비교해 볼 때,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특히 부족한 것은, 믿음에 의지한 “창의적인 개척정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믿음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용기있는 “개척정신”을 가졌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크게 쓰임을 받았던 것을 성경이 잘 증거해 주고 있다. 한국이 좁은 것은 불편스럽지만, 새로운 세계와 환경의 변화를 통한 도전적인 삶의 개척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에 의지한 “개척정신”은 바로 이민과 타국취업을 고려하는 유학생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기본정신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한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던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며 책망하셨다. 때론 실수하고, 실패하고, 주어진 달란트를 모두 잃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용기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사용하며 나아가는 신앙의 “개척정신”을 갖는 종을 더욱 기뻐하신다.


진정한 순종은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과 믿음을 실행하는 용기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요단이 갈라지리라는 약속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려움 때문에 언약궤를 좇아 요단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사는 결코 볼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미국에서 직장을 얻어 보겠다고 수없이 말만하고 마음만 먹었지, 이를 적극 준비하고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 유학생이 있다면, 이제 용기있게 나아가는 “개척정신”을 먼저 갖도록 권하고 싶다. 이제 개척자 정신을 가지고 이민자의 땅에서 취업을 하겠다고 마음이 준비되었으면, 실제적인 취업정보 얻기, 이력서 작성하기 및 인터뷰 준비하기에 대하여 논하여 보고자 한다.


취업정보 얻기와 이력서 (Crriculum Vitae , CV) 작성하기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업이, 어느 곳에서 가능한가에 관한 취업정보는 미리 알아놓을수록 좋을 것이다. 대게 관련된 전공분야의 매거진(Magazine)에서 관련분야의 전공에 관한 취업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또 전공분야의 전문학회(Conference)에 가면 대게 많은 취업정보를 얻을 수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하여 관심있는 회사 및 학교의 구인광고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수시로 인터넷을 통하여 필요한 취업정보, 취업동향 및 요구되는 자격 등을 숙지해 놓고, 취업관련 서류를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도교수나 전문분야의 동료들에게 자신의 미래의 취업계획을 미리 말해두고, 관련정보가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해두는 것도 취업정보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직업소개소(Headhunter group)를 통하여 직장을 찾는 것을 부끄럽고, 불편스럽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특별히 취업의 문이 좁은 전공분야일수록 직업소개소에 본인의 전문분야와 찾고있는 관심분야를 미리 알려주면, 의외로 좋은 취업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기 바란다.


이제 전문직을 갖고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이력서(CV) 작성에 관하여 잠깐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력서는 바로 자신의 얼굴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미국에서 전문직 직업인에게 통용되는 이력서의 기본양식을 유지하며, 자유롭게 작성하면 된다. 한국에서처럼 획일적으로 인쇄된 이력서 양식이 미국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취업분야에 따라 요구되는 주안점을 융통성있게 바꾸어주므로써, 지원하는 회사나 대학의 인사위원들의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도록 작성하면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작성자의 이름과 주소, 학력, 직업 및 연구경력, 수상경력, 전문분야와 전문성, 발표된 연구논문이나 연주회 경력, 추천인등의 순으로 쓰면 무난할 것이다. 특별히 전문분야와 전문성은 본인이 전공한 분야와 더불어, 자신의 전공분야를 취업분야에 초점을 맞추어 작성해 주면 좋은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지난 칼럼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학교나 회사의 인사담당자나 인사위원들은 추천인에게 추천서를 써보내 줄 것을 요구하거나, 직접 전화를 걸어서 지원자의 자질 등을 꼭 묻는다. 따라서, 추천인의 이름을 쓰기 전에, 추천인에게 본인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의 양해를 먼저 구하는 것이 예의이다. 대학의 교수로 지원하는 경우는, 주로 창의력, 책임감, 강의능력 및 연구수행능력 등에 초점을 두고 추천서를 쓰도록 추천인들은 요구를 받는다. 회사의 연구원인 경우에는 주로 독창적인 연구수행능력, 책임감 및 팀웍 능력 등에 관하여 아주 꼼꼼하게 쓰도록 요구되기도 한다. 특히 미국의 취업에서는 필요와 공급의 원리가 잘 맞아야 하기 때문에, 취업분야에 따라 자신의 전공분야를 잘 적용시키는 지혜도 꼭 필요하다.


최근 미국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미국의 대학 교수로 지원하는 학위취득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의 모든 대학에서 요구하는 “강의계획서”와 “연구계획서”는 철저히 준비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 강의계획서나 연구계획서의 작성시 유의할 몇가지 중요점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대학은 학부강의가 중심인 “학부 중심대학”이 있으며, 또 학부와 대학원의 강의와 연구가 중심인 “대학원 중심대학”이 구별되어 있다. 먼저 자신이 지원하고자 하는 대학이 학부 중심인지, 대학원 중심인지에 따라,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의들과 중심되는 연구분야를 먼저 잘 분석해야 한다.


첫째, 강의 계획서는 본인의 학위과정 중 자신이 이미 들었던 강의 과목 및 강의 경험, 가르칠 수 있는 강의 과목(학부 및 대학원으로 분리), 새롭게 계발할 작정인 강의 과목 순으로 서술하면서, 1-2 페이지 정도 작성하면 된다. 특별히, 이미 지원코자하는 대학에서 개설된 강의 중 어떤 과목을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해 두는 것이 좋다. 또한 신임 교수로서 교육과 연구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하여, 새롭게 개발할 강의목록을 기술해 주어야 한다. 새로이 개발할 강의가 왜 중요한지를 강의할 내용과 함께 기술해 주면 좋을 것이다. 지원대학과 전공분야에 따라 차이는 있겠으나, 학부에서 1-2 과목과 대학원에서 2-3 과목을 새롭게 개설할 수 있다고 제안한다면 좋을 것이다. 물론 강의 제목과 함께 간단한 강의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해 주면 더욱 좋다.


둘째, 연구 계획서는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 전문성, 새롭게 시도할 연구분야, 및 연구비 수혜 계획 등의 순으로 서술하며, 1-2 페이지 정도 작성하면 될 것이다. 특별히 지원하는 대학의 기존 연구분야와 협력하며 활력을 불어넣으면서도, 자신의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창의적인 연구계획을 쓴다면 좋을 것이다. 거의 모든 미국의 대학원 중심대학은 신임교수의 연구비 수혜 가능성과 능력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전문 연구분야의 연구비는 어디에서 주로 나오는 지를 잘 알아둔 후에, 임용이 되면 어떤 기관에 연구비를 신청할 수 있는지를 간단히 서술해 두면 실제적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있다.


모든 작성된 서류는 심사하기에 명쾌하고 또 간결하도록 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또 오류가 없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하다. 지도교수나 미국 동료에게 마지막 교정을 받은 후에 제출하는 것도 좋은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인터뷰 준비하기


미국의 거의 모든 회사나 대학은 이력서의 접수가 시작되고, 관심있는 지원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인터뷰를 시작하게 된다. 대개 2-3명 정도가 최종 인터뷰에 초청되는 것이 상례이다. 따라서 인터뷰에 초청이 되면, 최종경선자 명단에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인터뷰는 주로 자신의 연구분야 발표, 관련된 장래 동료들과의 인터뷰 및 담소와 식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30분 간격으로 거의 하루종일 인터뷰를 하게된다.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전문분야의 연구발표이다. 특별히 자신의 연구분야의 넓이와 깊이를 동시에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대부분 한시간 정도의 전문분야 발표의 준비를 철저하게 해두고, 또 예상되는 질문의 답도 잘 준비해 두면 좋을 것이다. 한시간의 전문분야 발표가 인사위원들에게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특히 대학의 교수로 지원하는 경우에는, 전문분야의 발표시에 자신의 연구분야의 깊이를 보여주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겸손은 미덕이다. 미국에서도 자신의 충분한 전문성의 역량을 보여줌과 동시에 동료들의 연구 업적을 충분히 존중해 줄주 아는 겸손함이 큰 미덕이다. 특히 미국에서도 “겸손이 미덕”이라는 충고에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의아해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겸손은 실력이 있어도 없다고 해야하고 또 알아도 모른다고 해야 “한국적 겸손”이 된다. 그러나 “미국적 겸손”이란, 아는 것은 안다고 확실히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많은 동양계 유학생들이 때론 잘못된 서구문화의 이해로, 앞 뒤 구분없이 계속 아는 척을 해야 실력있다고 인정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이해이다. 그런 태도는 오만한 태도이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겠으나, 아직도 보수적인 학문중심의 전문가 세계에서는 그런 태도는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미국사회와 문화에 대한 격식있는 태도와 이해, 그리고 전문성에 대한 자신감은 인사위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인터뷰는 미국적으로 겸손하며, 부드럽게 그러면서도 자신감 있게 모든 대화를 진행해야 한다. 주로 모든 인터뷰의 인사위원들이 연구역량, 의사소통 능력, 예의범절, 사회성 및 개인특성 등을 잘 관찰한 후에 각기 개인적인 보고를 인사위원회에 제출하게되며, 인사위원회는 종합적인 평가에 의해서 job offer를 할 것인가 아닌가를 아주 공정하게 결정하게 된다. 인터뷰를 하고 돌아온 후에는 개인적인 인터뷰를 한 모든 인사위원에게 짤막한 감사의 e-mail을 보내는 것은 바른예의이다.


맺는 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 신대륙을 향하여, 목숨을 걸고 긴 항해를 결심한 청교도의 “개척정신”은 오늘도 미국을 지탱하는 기본 정신이다. 항해의 돛을 올려보기도 전에, 걱정과 염려와 불안으로 항해를 포기하는 자는 결코 새로운 세계를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한국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이미 태평양을 건너며, 이 희망에 찬 “개척정신”의 깃발과 돛을 올려 본 사람들이다. 요단 물가에 이르거든, 이제 요단에 주저없이 들어서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때에 비로소,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수3:15-16)에서 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은 갈라진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던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많은 한국유학생들은 미국에서 직장을 찾으면서도 자신의 이력서 보내기를 무척 두려워하는 것을 보았다. 요단에 들어서길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요단을 가르는 기적도 볼 수 없고, 요단을 건너는 축복도 누릴 수 없다. 행동하지 못하는 지성이 죽은 지성인 것처럼, 실행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과감히 이력서를 보내기 바란다. 실패를 두려워 말자. 인터뷰 초청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인터뷰 초청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며 줄곧 찾고 또 이력서를 여러군데 보내기 바란다. “개척정신”을 갖고 믿음과 용기로 나아가는 유학생 모두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보았던 요단의 가름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난 수년동안 미국학생들의 연구 및 취업을 지도해 오며, 또 신임교수 채용의 인사위원으로 일하면서 얻은 나의 경험이, 미국이나 또는 제3국에서 취업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도한다. 다만, 공학과 자연과학에 기초를 둔 나의 전문성과 경험이, 인문 사회과학과 예술분야를 전공하는 유학생들에게까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민과 타국취업을 고려하는 모든 유학생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취업준비라는 관점에서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칼럼에서는 인터뷰 후에 job offer를 받았을 경우, 어떻게 미국땅에서 새로운 직장생활을 준비하고 시작할 것인가에 관하여 여호수아의 말씀에 비추어 계속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안종혁]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유학생활 중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이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한 준비와 정탐을 마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스스로 성결케 하라고 부탁하고 있다. 즉 내일이면 여호와께서 요단을 가르시는 기사를 이스라엘 백성 중에 행하실 텐데, 성결하게 하여서 이 기적을 체험하기에 합당한 백성으로 준비하라는 명령이요 부탁인 것이다. “성결”이라는 말은 “거룩하고 깨끗함”이라는 의미인데, 즉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로 더욱 거룩해지며, 말씀에 따라 사는 행실로 말미암아 깨끗한 성도의 삶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실제적인 유학생활 중의 영성훈련에 관련된 성결한 삶에 대하여는 지난 몇회에 걸쳐 쓴 “유학생의 경건의 연습과 약속”이라는 연재 칼럼에 이미 썼으므로 참조하기 바란다. 유학생활 중의 성결한 삶은 유학생활 동안에 열심히 예배드리고, 주야로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고, 세상 가운데에서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자로 살며, 또 주님 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는 부단없는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서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 칼럼에서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영성훈련에 관한 성결보다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크리스천 유학생의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생각하여 보기로 하겠다. 특별히 미국은 하나님을 더욱 잘 섬겨보겠다고 신앙의 박해를 피해온 청교도들에 의해서, “In God we trust”라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 유일한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기초위에 세워진 미국이, 케네디 대통령 당시인 1962-63년에 공립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것을 금지한 이래, 이 나라는 1962년 이전에 비하여 몇십 배로 증가된 청소년 범죄, 이혼율, 마약중독, 동성연애 및 낙태의 합법화 등으로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현재 미국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추방하며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거의 모든 미국 문화와 관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한국문화에 깊은 뿌리를 둔 (나같은) 유학생 출신들은 이미 한국문화, 관습과 전통에 길들여진 눈으로 미국의 문화를 바라보려하기 때문에, 때론 당혹스런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되고, 또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게도 된다. 최근 “The Korean Christian Journal”(2001년 11월 25일자)에서 일리노이주 인권국의 이윤모 박사가 조사 보고한 “한인교인들의 신앙관, 참여, 교회의 안정성”이라는 소수인종 신앙생활 조사-비교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한인들은 교회와 의례중심의 신앙생활을 추구하며 개인 윤리관에는 더욱 투철하지만, 신앙의 생활화와 실천면에 타인종들(특히 흑인과 히스패닉 신도)에게 뒤떨어진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 동보고서는 “교회출석이 신자생활에서 필수적이라는 데는 한인들이 단연 타민족 그룹보다 압도적이며, 또한 성경 읽기와 연구의 필수성에서도 한인들이 단연 앞선다. 신앙관을 가정, 학교,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의 필수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흑인, 히스패닉 신도들보다 한인들이 뒤떨어진다”고 결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이민자나 유학생들이 바른 신앙관을 가정, 학교나 일터에서 실천하거나 또 사회정의 추구와 사회봉사에 참여하며, 성결한 크리스천의 실제적인 삶을 사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요단을 건너기 전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삶 속에서의 성결함을 유지하는 훈련을 유학생활 동안에 잘 해두어야 본격적인 이민생활을 시작할 즈음에, 요단강이 다시 갈라지는 하나님의 기사를 보는 인도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한국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장래 미국의 이민을 고려하며, 유학생활 속에서 이루어야 할 성결한 삶의 각 부분들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성결한 학업성적 관리


미국에서 들을 수 있는 제일 “모욕적인 말”은 아마도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미국문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위장하며 거짓말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의 전임 닉슨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 것은, 워터게이트에서 상대의 정보를 몰래 수집했다는 범죄보다는, 그 범죄를 감추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좀 우습기는 하지만, 지난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 사건도, 성추문 자체보다는 성추문 사건을 감추려고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느냐 안했느냐에 모든 조사와 논리의 핵심을 집중했다고 보면 옳다. 미국에서는 언제든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잘못을 시인하면 상응하는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또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저지른 잘못을 은폐하고 위장하기 위하여 하는 거짓말은 용서가 안 된다고 보면 틀림없다. 정직을 생명처럼 여기며, 정직한 자만이 인정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수많은 격언이 “정직하게 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직하게 살면 바보로 취급하는 사회도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언젠가 꼭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잘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의 성결의 덕목에 거짓 없는 정직함이 가장 중요한 덕목 중에 하나임을 누가 부인할 것인가?


정상적인 미국 학생들에게 학과의 시험 중에 컨닝을 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잘못된 행위이다. 자기 자신들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하는 것도 결코 눈 감아 주지 않고, 컨닝하는 학생을 윤리위원회에 즉각 보고하는 정의감을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최근 수많은 동양계 유학생들의 시험 중 컨닝 노력은 미국교수들의 마음을 심란케 하고 있는데, 크리스천 한국유학생들은 컨닝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학교에서 퇴교 당하는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많은 동양계 학생들은 서로의 숙제(homework)를 보여주고, 또 심지어 답을 그대로 베껴서 내는 학생들이 종종 있어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담당교수가 서로 토론하라고 허락하면 토론을 할 수 있으나, 토론조차 하지 말라 하면, 서로 토론하는 것도 불법이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친한 친구가 “take-home exam”(집에 가지고 가서 치르는 시험)의 답을 보여 달라고 하여 답을 보여주고 (사실 부끄럽게도 나도 그럴 뻔한 경험이 있다), 또 답을 본 친구는 take-home exam의 답을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여 퇴교를 당하기도 한다. 이는 미국학교의 성적관리 원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실수이다. 따라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숙제나, take-home exam의 답을 보여 달라는 불법적인 요구를 결코 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잠시 마음이 상할지라도 자기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결코 답안을 보여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 미국 학점관리의 기본 정의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함이 바로 크리스천의 성결이 아니겠는가? 결코 불의한 방법으로 취득한 학점으로는 요단을 가르는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 어렵다.


정직한 연구결과 보고


학문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수행하는 연구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바라며, 관련된 학계를 깜짝 놀랄게 할 만한 결과를 발표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연구조사한 자료의 분석이나 또는 실험한 연구 결과를 조작하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유혹이다. 또한 직장을 잡기 위하여,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싶은 욕망에 실험결과를 확대해석하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는 자신의 연구결과에 부끄러움 없이 솔직해야만이, 세대를 넘어서 그 업적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동양의 모나라로부터 유학오는 유학생들이 입학허가를 얻기 위하여 부정직한 방법으로 GRE나 GMAT, 또는 TOFLE 점수를 취득하며, 또 빨리 학위를 취득하고 취업을 하기 위하여 연구결과를 조작하고 있다는 소문은, 미국 대학교수들을 염려케 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있다.


일본의 유명한 모고고학자가 일본의 고고학사를 뒤집는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수 십년 동안 발표하여 자신의 학파를 구성하고, 국제 고고학계를 주름 잡았지만, 연구결과를 조작하여 발표하였다는 덜미가 잡히면서, 또 한 번 그의 부도덕성과 사기성에 세상이 놀란 사건이 최근에 있었다.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며, 처벌받아 마땅한 처사이다. 또한 최근 한국 모대학의 연구팀이 국제전문잡지에 외국연구자의 논문을 그대로 표절하여 게제된 사건이 발각되어서, 한국대학이 국제적인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이에 더불어 최근에 한국에서는 목회자들의 타목회자 설교표절로 논란이 한창인데, 성구 하나 또 문자 하나 바꿈 없이 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을 베껴서 자기가 영감을 얻은 설교처럼(다른 목회자의 설교집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설교하는 것도 부정직한 것이라고 나는 본다.


자신의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얻은 결과를 바로 해석하고 또 적극 방어할 수 있는 논쟁훈련은 전문가로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연구결과는 절대로 사실대로 보고하여야만 한다.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또 동서고금을 넘어서, 학문을 하는 사람의 학자적인 양심과 정직성을 생명과 같이 귀히 여겨야 될 덕목이며, 이에 관한한 단 한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는 처절함이 바로 학문의 세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가끔 남의 연구논문 결과를 표절하여서 말썽이 되는 학위취득자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표절한 논문결과로는 결코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축복을 누리기 어려우며, 언젠가 성결치 못한 행동 때문에 큰 댓가를 치를 날이 꼭 있게 된다. 연구결과의 보고에 부끄러움이 없이 정직하고 또 신실해야 할 것이다.


미국법 바로 지키기


미국 사람들의 준법정신은 참 놀랄 만큼 높다. 교통법규 준수, 줄서기의 습관화 및 기다림의 인내심은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는 미국민성이다. 금년 9월 11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는 미국 역사상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최대의 참상이다. 이미 미국은 9월 11일 이전의 미국이 아니며, 세계 각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에게 관대했던 나라가 더 이상 아님을 알기 바란다. 내 앞마당에서, 외국의 테러분자들에 의하여 수천명의 가족과 동료가 죽는 테러의 참사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백만명의 실업자가 생겨나고, 또 지금도 테러의 불안에 온 미국민이 떨고 있는 마당에, 법을 지키지 않는 유학생과 불법이민자들에게 자비를 보일 여력이 없다는 미국의 절박함을 모든 유학생이 피부로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미국내의 급변한 상황을 고려할 때, 추후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과 그 동반가족들은 미국의 이민법과 세법을 꼭 지켜야 될 줄로 안다. 실수로 이것들 중에 하나만 어겨도, 미국이민을 고려할 시에 바로 실격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취득한 유학 Visa의 종료일과 갱신여부를 바로 이해하고, 또 필요하면 종료전에 바로 갱신하여서 어떤 기간이라도 미국의 불법체류의 기록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이민법이 재정비되고 있는 중이니, 모든 유학생들은 각 학교의 외국유학생 담당자로부터 바뀌는 이민법의 바른 정보를 얻기 바란다. 또한 이민을 고려하는 경우에는 이민전문 변호사와 꼭 상의하면서 적법한 절차를 밟아야지, 결코 본인의 상식과 경험에만 의존하므로 자주 바뀌고 있는 이민 절차를 잘못 이해하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또 학위 취득 후에, 전문 분야에 따라 미국의 이민국에서는 외국 유학생들에게 약 1년 정도의 practical training을 허용하고 있는데, 학위취득 날짜에 맞추어서, 미리 practical training을 신청하여서, H-1 Visa를 얻고, 이어서 Green Card를 신청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지혜롭게 계획하고 또 적법한 절차를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에 하나는, 모든 미국인의 자발적이며 성실한 세금납부의무의 이행이다. 한국에서는 어떻게든 세금을 적게 내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듯하며, 또 그 방법을 교묘히 하여 속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불행히도 납세청에 탈세로 걸리면 재수없이 망하게 되는 경우이고, 안 걸리면 수지 맞는 경우이다. 그러나 미국국민은 탈세를 죄악이요 수치로 여길 뿐더러, 또 탈세가 발각되면 형벌은 감당키 어려울 만큼 무겁다. 이곳에서 탈세는 사랑하는 국가의 재정을 도둑질하는 비열한 도둑질이요,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부의 재분배를 빨아먹는 더러운 사기행위요, 양심을 팔아먹는 부도덕한 행위로 분류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이민하여 사는 한인 이민자들 중에서 상당수가 탈세함으로 돈을 벌었다고 회자되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이라면 걱정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특히 지방자치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는 이곳에서, 탈세를 하거나 또 세금을 실제보다 줄여서 보고하여 이득을 취하는 경우는, 소속한 사회에 기여없는 기생충같은 인생으로 간주되고 있다.


장학금을 수혜하는 유학생들은 합법적인 세금납부 혹은 면제신청을 꼭 해야 할 것이며, 또 연말 세금보고 시에도 합당한 세금보고서식을 사용하여 보고해야 할 것이다. 몇백불의 세금을 돌려 받겠다는 욕심과 유혹 때문에 미국 이민법과 세법을 어겨서, 결정적인 시기에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하기 바란다. 지금은 미국 이민법이 바뀌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미국에 세금을 내는 자만이 미국에 살 권리가 있으며, 또 불이익이 있을 시에 바르게 보호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을 바르게 또 자발적으로 낼 줄아는 일등 국민만이 그 나라를 일등국가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또 미국의 법을 바로 지키자.


부당한 뇌물은 죄악


교통법규의 위반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때론 부득이 경찰에게 교통법규 위반 티켓(ticket)을 받는 경우가 있다. 나는 많은 한인 유학생들이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은 경우, 경찰을 속이거나 또 어긴 사정을 왜곡 주장하여 벌금을 면제 받았다는 무용담을 수없이 들었다. 거기에 또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까지 덧붙여서 간증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만일 자신의 과속으로 교통법규 위반 티켓을 받게 되는 경우, 경찰의 교통위반 단속이 특별히 부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은 한, 과속은 자신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법을 어겨가며 과속하여 달려도, 경찰의 감시로부터 지켜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성경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유학생들의 부족한 주머니 사정이야 이해되긴 하지만, 과속해서 교통위반 티켓을 받았다면, 빨리 달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하나님의 경고로 알고 감사하게 벌금 내면 그만이요, 끝내 억울하면 법정에 가서 싸우면 된다. 교통위반 티켓 발급시, 동양계 학생들의 이상한 억지변명에 이미 신물나며 이골이 났다는, 경찰관의 농담에도 귀를 기울일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에 더하여, 한국에서 옛날에 있었던 관행처럼(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교통법규를 위반한 후에, 교통경찰에게 거래하자고 뇌물을 건넸다가, 도리어 혹을 붙이고 감옥에 간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야 될 것이다. 교통법규를 어기고서, 교통경찰관에게 거짓말로 어필하고, 우기거나 간청하는 크리스천이 되지 말자. 많은 유학생들이 한국에서 뇌물의 효용을 익히 배우고 자란 탓에 뇌물의 효용을 미국에 쓰려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미국에서 뇌물은 금물이요, 위법임을 알기 바란다. 물론 성경말씀에도 뇌물을 금하고 있다.


지난 수 년동안에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에 미 연방정부의 한 연구기관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수백만불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연구를 수행해오고 있는 한국계 미국교수를 알고 있는데,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매년 한두번씩 연방공무원인 담당 프로그램 매니저가 그의 연구실을 방문하여 연구실적을 평가하곤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이 방문시에 함께 먹게 되는 단 몇 불의 점심값 조차도 연방공무원들이 꼭 지불하고 간다니 모두가 놀랄 일이다. 물론 그렇게 큰 연구비를 받거나 또 연구수행 중에도 뇌물로 단 1센트도 쓴 적이 없으며, 또 써서도 안 된다는 것은 여러 유학생들이 실로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철저한 준법정신과 정직성은 미국 문화가 크리스천 문화에 근거를 둔 때문이며, 이것이 미국을 움직이는 참 원동력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뇌물이든 주고 받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결함을 더럽히는 죄악임을 알고, 요단을 건너는 기적을 보기 전에 넘어 질 수 있는 거침돌이 된다는 것을 알자. 물론 서로에게 이권이 관련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 사랑으로 주고 받는 선물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며, 또 적절한 값의 선물은 서로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니 권장할 만한 일이다. 미국 사람들은 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작은 감사의 선물을 나누기를 진정으로 즐긴다.


성적으로 순결하기


십여년 전만해도 미국에서 싱글 유학생을 보기가 드물었는데, 이제는 유학생의 주류가 싱글들이 되어가고 있다. 유학생 중심의 도시마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싱글들이 넘쳐나고 있다. 따라서 이 젊은 싱글들을 신앙적으로 잘 양육하고, 또 신앙 안에서 짝을 맺어주는 일은 이제 아주 시급한 과제가 되고 있으며, 매 KOSTA 년차 대회 때마다,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 짝 지어주기 프로그램(예를 들면 “박수웅과 함께”)이 아주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고, 퍽 고무적인 프로그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할 수만 있다면, eKOSTA의 Webzine에 크리스천 싱글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여서, 서로 예수 안에서 장래의 배후자들을 만날 수 있도록 시도해 보면 참 좋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 칼럼을 통하여 과감히 제안하여 본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영광을 위하여 크리스천 새가정의 탄생은 가장 축복할 만한 일이며,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에 바빠서 교제의 시간조차 충분치 않는 크리스천 남녀 싱글들이, 지역과 학교와 교회의 제한된 공간과 시간을 넘어, 만남의 장을 eKOSTA Webzine에 마련할 수 있다면, 일년에 한 번 뿐인 KOSTA 년차 대회시의 “박수웅과 함께” 프로그램을 연중무휴로 진행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다소의 부작용도 예견될 것이나, 싱글들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 및 담당유학생 지도자와 잘 협력하여 운영한다면, 도처에서 적절한 크리스천 배후자를 만나지 못하여 고민하는 수많은 결혼 적령기를 넘기며 안타까와하는 싱글 형제-자매들의 고민을 풀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점에 관하여 독자광장을 통하여 논의가 진행되었으면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최근에, 싱글들 중에서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 혼전 동거하는 사례가 늘어간다는 충격적인 보고는 극히 염려되는 일이다. 크리스천 유학생 중에서도 이런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하니 아연할 따름이다. 물론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살면서, 결혼 적령기의 싱글 남녀가 서로 결혼하고픈 정도로 사랑하기에, 아예 돈도 절약할 겸 혼전 동거하고픈 유혹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간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유럽의 특정지역에서 싱글 유학생들의 혼전 동거 생활은 이미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으며, 지역 목회자들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심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시편 119편 9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하리요,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말씀을 보면, 젊은이들을 어떻게 행실의 타락으로부터 지킬 수 있을까에 관한 시편기자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즉,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만이, 그 행실을 깨끗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공부하면서 이루어지는 싱글 남녀의 교제는, 이 시편 말씀에 따라 삼가며 진행하는 최고의 싱글 남녀의 교제의 장이 될 법도하다.


한마디로 어떠한 구실과 변명을 동원한다 하더라도, 싱글 유학생 남녀의 혼전동거는 결코 성결치 못한 행동이요, 더욱 크리스천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들 자신이나 그들이 속한 단체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경고와 징벌은 언젠가 눈물 없인 받을 수 없는 쓴잔이 될 것이기에, 모든 싱글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이점에 더욱 유의하여 성적으로 성결하게 살라고 권하고 싶다. 정히 자신의 믿음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속히 결혼한 후에 계속 학업을 진행할 것을 권면하고 싶다. 또한 여러분의 주위에 그러한 동료와 친구들을 보거든, 사랑으로 권면하고 기도해 주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따라 사는 성결한 생활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바란다.


물질의 성결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물질과 돈을 합법적으로 벌어서 마음껏 쓰는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인 줄 믿는 크리스천은 돈과 물질의 취득과 관리에 성결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하나님의 것을 잠시 위임받아 누리며 쓰고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원리에 따라 취득하고 또 사용해야 함이 합당하다고 본다.


하나님의 성결의 부탁을 저버리고 물질의 탐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산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요단을 건너기 전 이스라엘에게 성결을 부탁하고 또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할례를 행하여 성결을 부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간이라는 사람의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인한 성결치 못한 행동으로 인한 범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온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성에서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본인과 온 가족이 멸망받는 심판을 받았음을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수년전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미국의 소도시의 가난한 타운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한국이민자 한 분이 있었다. 어느날 이분은 재정적으로 무리를 하면서, 꿈에도 갖고 싶던 고급 벤츠 승용차 하나를 사게 되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과 인종차별의 편견의 벽을 뚫고 넘어온 고달픈 이민 생활을 뒤돌아 보며, 한국에서는 타기 어려운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는 맛이란 마치 신분상승이라도 된 듯이, 그간에 당한 모든 수고와 고생을 다 보상해 주는 듯 싶었다. 알아 주는 이 없는 이민생활의 열등감도 다소 극복이 되는 듯 싶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 그 고급 벤츠 승용차를 타고 가서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할 때에, 고객들 중에서 밖에 세워둔 벤츠 승용차가 당신의 차냐고 묻은 사람이 많았다. 좀 조심스럽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그후부터, 알아듣기 힘든 악센트를 고맙게도 잘 들어주며 친절하게 물건을 사주던 저들이, 이모 저모로 불평하기 시작하더니, 종내는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생명처럼 애지중지 여기던 고급 벤츠 승용차를 북북 긁어서 못 쓰게 해 놓고 말았다. 좀 과장이 섞인 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돈이 있으면 미국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분수를 모르는 한인이민자의 안타까운 이야기이며, 무엇이 미국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요, “미국적인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한국 이민자의 현주소를 담은 아픈 허상의 이야기이다.


특별히 미국 대도시에 거주하며 유학하는 유학생 중에 미국의 부호들도 나이가 들어서야 탈 수 있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돈을 향락과 소비에 쓰는 귀공자 유학생들이 많다고 하니, 이또한 분수를 모르는 한국 유학생의 희극적인 허상의 이야기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의 왕자도 아닌 주제에, 분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한국 유학생에게 미국사람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모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의 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탓이다. 한국의 부모가 부자이든 아니든 간에, 유학생 신분에 맞는 값싸고 실용적이며 튼튼한 승용차를 구입해서 타는 것이 바른 이치이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이 힘써 공부하여 장학금을 받으면서, 또 밤낮으로 일하여서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는 건실한 유학생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껏 격려와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물질에서 성결한 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와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자신의 물질의 근원적인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고 건실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오늘도 유학은 꿈에도 못 꾸고 열심히 일하며 수고하는 고국의 동갑내기 동료들을 생각할 때에, 옷은 검소하게, 아파트는 안전하고 가급적 싼 곳에, 자동차는 분수에 맞는 실용적인 것으로 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는 한국의 경제상황의 근본이유를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미국의 고등학생들조차, 분수에 넘치는 고급승용차를 타는 한국유학생에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는 것을 장래의 지도자들이 될 유학생들이 몰라서야 될 것인가? 여러분이 미국에 전문 직장을 얻게되어도, 결코 유학생 때의 생활수준보다 별반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미리미리 미국의 재정관리 방법과 “미국적 분수”를 배워둠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결하게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요단이 마른 땅으로 열려지는 기적을 보게 된다. 이와같이 모든 크리스천 유학생들이 영적생활에 성결되고, 또 생활과 삶 속에서 성결을 이루어서, 학위취득 후에 고국에서나 또는 미국에서 전문직장에 종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행로에서 열게 될 요단강이 갈라지는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는다.


본 컬럼에서는 미국이라는 이질 문화 속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한국 유학생들이 어떻게 실제적인 삶을 성결하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썼으나, 거의 대부분의 크리스천 유학생들은 본 컬럼에서 지적한 성결치 못한 행위와는 관련이 없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또한 나의 짧은 이민 생활과 경험으로부터 나온 견해가 다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또 특정한 그룹이나 개인을 향하여 편향된 공박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다음 회에서는 “요단에 들어서라”라는 제목으로 실제적인 미국 취업의 정보취득법, CV(이력서) 작성법, 강의 및 연구계획서 작성법 및 인터뷰 준비에 대하여 소개하고, 또 미국 취업의 문을 적극적으로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적극적이며 용기있는 크리스천 유학생의 취업 준비에 관하여 나누어 보기로 하겠다.


[안종혁]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

한국은 좁고 미국은 두렵다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


들어가는 말


본 칼럼은 유학을 마친 후에 장래의 진로로 고민하며, 이민을 고려하는 크리스천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쓰고 있다는 점을 먼저 다시 지적해 두고 싶다.


지난 호까지 두 차례에 걸쳐 썼던 칼럼에서 강조하였던 점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첫째 새로운 이민 생활의 결정은 자신의 욕망이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둘째 이미 이민 생활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또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당당하게 누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확실히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막 유학 생활을 시작할 때 가지게 되는 문화와 언어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도, 몇 년 후에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가면 잊어지겠지라는 소망으로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이민 생활이란 끊임 없는 긴장감 속에서 새로운 관습, 문화, 언어를 배우며 살아야 되는 고된 삶이요, 또 가까운 친지들을 떠나 살아야 되는 외로운 삶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 없는 이민 생활과 크리스천 이민자의 정체성이 결여된 (주로 추후에 갖게 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민 생활은 승리를 장담하는 이민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어렵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준비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서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고 또 응답하셨던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믿음의 사람이다.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중압감에 사로잡혀 두려움을 갖게된 듯 싶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는 말씀을 통하여 여호수아와의 동행을 약속하시므로, 그에게 담대히 맡은 소임을 감당하도록 하신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말씀으로 미지의 길을 가는 유학생 이민자들을 위로하시며 또 동행하심을 약속하고 있다. 여호수아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하심을 약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태도와 준비를 해야 되는 가를 배울 수 있다.


특별히 전문성을 갖춘 지성인으로서, 감성과 지성의 균형있는 신앙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유학생들에게, 여호수아의 태도는 본 받아야 할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데 매우 격렬한 전투가 다가 올 것을 예견하고, 백성들을 잘 준비시키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여호수아는 전쟁의 승리는 오직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은 사람이었지만, 믿음만 의지하고 준비없이 맨손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런 신앙인이 아니었다. 믿음과 행동의 조화를 이루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였다.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 미지의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인도 하에 네 가지의 중요한 준비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백성들에게 양식을 예비하고 또 용사는 무장하라고 요구한다(수1:11,14). 둘째는 정탐꾼을 보내어 여리고를 정탐한다(수2:1). 셋째는 온 백성에게 성결할 것을 부탁한다(수3:5). 그리고 넷째는 과감히 요단에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수3:8). 이제 미국 이민을 고려하는 유학생도, 마치 미지의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준비했던 네 가지 준비 과정들을 유학 생활 중에 실제로 적용함으로서, 다가올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도록 하자.


1. 양식을 예비하고, 용사는 무장하라(수1:11,14)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면 이방 족속과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리 하여 모든 백성에게 먹을 양식을 준비하라고 먼저 명령한다. 그리고 전투의 선두에 서게 될 루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의 용사들에겐 무장을 하라고 독려하고 있다.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며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는 군대는 필연코 군량미를 충분히 비축하고, 또 잘 훈련된 군사를 강한 마음과 좋은 무기로 무장시키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 아니겠는가? 미지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이룩하고자 준비하는 유학생의 마음가짐도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가짐과 비슷해야 될 줄로 생각한다.


2. 전문성은 양식


이제 조금 후면 배우고 훈련받는 유학 생활이라는 광야 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새로운 이민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될 형편에 곧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유학 생활 중에 양식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유학생이 유학 생활 중에 준비해야 될 양식은 바로 전문성에서 참 실력을 길러두는 것이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극복해 두는 것이요, 담대하고 성결한 신앙을 길러두는 것이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진짜 실력을 갖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말하면 미국 사회가 실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 지에 관하여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대학의 평가 기관에서 보고한 소위 미국의 일류 대학이란 곳에서 소정 기간 동안에 공부하고 학위를 취득하면 저절로 실력이 인정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좋은 대학에서 좋은 연구로 실력을 쌓으면 인정 받기가 유리하긴 하지만, 결코 한국처럼 소위 ‘학교의 등위’라는 것으로 개인의 능력을 일률적으로 평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여러분을 초청하게 될 대학이나 회사의 인사 위원회는 철저하게 여러분의 창의적인 연구력과 발표된 양질의 논문 또는 연구로만 평가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오직 전문가는 철저히 전문성으로 말해야 하고, 또 전문성으로만 평가될 따름이다.


3. 본토에서 고생하는 영어


영어는 미국 이민 생활에서 필수적인 무기이다. 대체적으로 한국 유학생들은 전문성에서는 좋은 실력을 갖추어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는 편이다. 그러나 영어 구사력에서는 거의가 자신이 없어하고, 이 부족한 의사 소통력이 마음을 항상 짓누르고 이민 생활을 고려하는데 겁을 먹게 하고 있다. 미국에서 수 년 동안 공부하고, 박사학위 논문최종 발표시에 머리 속에서 한국말이 영어로 통역되는 번역기를 거치지 않고 영어로 논문을 방어(defense)할 수 있는 유학생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솔직히 말해서, 인문사회 전공을 하는 극소수의 유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모든 유학생들이 학위논문 심사 발표시에 영어로 논문 발표를 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너무 과장된 판단일까?


비록 언어의 구조가 다르고 또 한국에서 말하기와 듣기 훈련이 부족하였다고 하더라도, 한국 유학생의 영어가 본토에서 심히 고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주위를 조금만 돌아보면, 왜 한국 유학생들이 영어를 정복하지 못하고, 취득한 학위만 달랑 들고서 한국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면서도, 한국 학생끼리만 모이고, 학교에서조차 서로 한국말만 쓰기로 철저히 단합이 된 탓이다. 어느 학교든 학생 식당에 가보라. 특히 점심 시간이면 유독 한국 유학생끼리만 모여서 떠드는 것을 보는 것은 다반사다. 점심 시간마다 자기 연구실의 미국 학생동료와 점심을 나누며 보낸다면 아마, 틀림없이 좀더 빠른 시간 안에 귀가 뚫리고 입이 열릴 것이다.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며 한국말로 담소하는 것을 나쁘다고야 할 수 없지만, 몇 년을 미국에서 공부하고서도 학생 식당 샌드위치 샵에서 샌드위치 하나도 제대로 시켜 먹을 수 없는 유학생이라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어차피 미국에 살면서 미국의 언어와 문화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삶이 이민 생활이다. 참석하는 한국 교회에서 맡은 직무에 소홀함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 번 쯤 인근 미국 교회의 수요 예배나 또 금요 성경공부에 참석해 볼 것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 미국 형제자매와 주안에서 좋은 교제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극복할 수 있는 참 좋은 대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추후에 선교 사역, 국제유학생 사역, 또는 Tent-maker 사역을 마음에 두고 있는 유학생에게는 영어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본다. 또한 영성이 풍부한 미국 목사님들이 전하는 말씀으로 새롭게 도전받는 것도 포기할 수 없는 유학 생활 중의 특권이요, 균형 있는 영적 양식을 먹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문성에서 참 실력의 양식으로 준비하고, 대화 소통에 자유로운 영어로 무장된다면, 이미 이민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는 양식과 무기는 일단 잘 준비된 셈이다.


4. 정탐하라(수2:1)


가나안 땅의 정탐은 여호수아에게는 만감이 교차되는 민감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믿음의 눈을 갖지 못했던 열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가나안 정탐 보고는,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훈련받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서 지금 요단강을 건널 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호수아는 다시 정탐꾼을 먼저 여리고성에 보내어서,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가나안 땅의 동정을 파악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여호수아의 정탐 결정을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그 누가 비난할 것인가?


5. 정보시대


결국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정탐꾼은 실패하여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더하여 주었지만, 두 번째 정탐꾼이 라합을 통하여 가져온 보고는 “온 가나안 거민의 간담이 녹더이다”(수2:24)라는, 승리에 자신감을 더해 주는 정보였다. 결국 정확한 여리고성의 정보는 이스라엘 백성의 사기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 그렇지”하는 믿음을 통한 승리의 확신으로 요단강을 건널 마음의 준비를 확신 시켜준 귀한 정보이다. 사실 “정보가 생명”이요, “정보의 시대”라는 말은 이미 여호수아 때부터 생긴 말인 셈이다.


이 시대는 정보의 시대이다. 더욱이 미국은 정보 활용의 첨단을 걷는 나라이다. 정보를 바로 얻지 못하고 또 활용할 줄 모르는 자는 결코 살아 남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하면서 미국은 어떤 나라인지,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잘 정탐해 두면 좋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지름길은 역시 매일 TV News를 보고, 미국 일간 신문과 시사 주간지를 읽으며, 또 라디오의 Talk Show를 듣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잘 이해한다면 또한 (앞서 말한) 영어를 잘 구사할 수 있게도 된다. 수 년 전에 미국에서 학위를 갓 마치고 직장을 찾기 시작하는 형제와 함께 미국의 고급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되었는데, 무슨 미국 음식을 어떻게 주문할 지를 몰라 당황해 할 뿐만 아니라, 웨이터의 질문에 계속 동문서답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았다. 단순히 미국 식당의 문화와 관습을 모르는 탓이다. 대부분의 대학이나 회사에 Job 인터뷰를 가면, 대개 저녁식사를 하면서 인사 위원들과 담소하는 시간을 꼭 갖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의 됨됨과 매너를 관찰하기 위함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기본적인 미국의 관습과 매너는 꼭 배워 두어야 할 것이다.


과연 몇 퍼센트의 한국 유학생들이 미국의 주요 일간 신문이나, 경제신문 또는 지방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들중의 몇 명이 미국 주요 TV News를 매일 정기적으로 시청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한국 식품점에 갈 때마다 한 팔 가득히 빌려오는 한국 비디오를 날 새워 보고서, 벌건 눈으로 “한국 풍속도”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려도, 미국 정치, 경제 및 사회 이야기가 나오면 몇 몇 정치 및 경제학도를 제외하고는 꿀먹은 벙어리가 대부분이다. 학과 공부와 연구에 바쁜 탓에 그까짓 것에는 별로 관심도 없고, 또 실제로 들어도 별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탓이라고 간주해 버린다면, 조만간에 앞에서 예를 든 유학생 형제처럼 당황스럽고 안타까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 경제와 사회의 구조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 결국 승리하는 이민 생활을 누릴 수가 없다. 미대통령의 국회연설이나, 상하원의 법안 통과 정보 등을 놓쳐 버리면, 대학교수나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다가올 세대의 연구의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되고, 연방정부의 연구비 투자 방향과는 반대로 연구의 방향을 잡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미국에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는 대부분의 교수와 연구원들은 워싱턴의 연방정부와 자기가 살고있는 주정부의 행정과 경제 동향에 정통한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미국에 이민하여 살고자 하는 유학생은 지금부터라도 매일 읽던 한국 일간지를 미국 일간지와 겸하여 읽도록 하자. 끝 없이 짝짓고 헤어지고 또 당짓기에 신물 난 서울의 정치 이야기도 알아야 하지만, 왜 미국 흑인의 90%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또 부시 대통령은 최근에 미국을 방문한 멕시코 대통령을 국빈으로 예우하고, 환대하였는지를 바로 알아야, 다민족이 어울려 사는 미국의 역학 구조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남의 허물을 잡기 위하여 정탐하고, 회사의 정보를 빼내어 팔아 먹는 사기꾼 정탐꾼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미국을 알고 또 이해하며 이민 생활을 잘 정착하기 위한 정탐은 부지런히 할 수록 좋다.


6. “라합”같은 친구


좋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물론 준비된 “라합”같은 믿음의 미국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것도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전문학회 모임은 대개 관광을 겸하여 할 수 있는 관광 도시에서 갖게 된다. 학회와 학술 발표회(연주회)에 좋은 연구 논문(연주)을 가지고 가서 발표하는 것은 자기가 속한 전문학회의 유명한 석학이나 최고의 연구가(연주가)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나는 감히 전문학회의 발표장은 새로운 신인 배우들이 스타로 탄생되는 연회장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연회장에서는 연회를 베푸는 주인이 으뜸이다. 전문학회 발표장(연주회장)에서는 논문 발표자(연주자)가 주인이다. 전문학회 발표장에 모인 수 백명의 참석자는 논문을 발표하는 사람 즉 연회를 베푸는 주인에게 눈을 고정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 때가 모든 참석자를 당신을 인정하고, 지원해 주는 친구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논문 발표(연주 발표)가 끝나면, 부지런히 그 분야의 전문가 참석자들을 찾아 다니며 논문(연주)에 대해 다시 토론하고 또 조언을 들음으로써, 참 기억하기 힘든 여러분의 한국 이름과 연구 업적을 기억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친구로 사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취업을 하려면, 지도 교수를 포함한 다른 교수(특히 재학하는 학교 이외의 대학)들의 추천서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승진이나 직장의 이동 때마다 이 추천서의 역할은 계속 증대되어 간다는 것을 꼭 알아 두기 바란다. 논문발표가 끝나자 마자 학회는 뒤로해 두고, 관광에 열중하는 유학생은 결국 연회를 베풀어 놓고 연회장을 떠나 버리는 주인과 같은 꼴이다. 이러한 학생은 틀림 없이 이력서에 써야 되는 추천인으로 자기가 졸업한 학교의 논문 심사위원의 이름만 기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결코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는 이런 이력소유의 지원자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대학 교수는 한국에서처럼 판에 박은 미사어구의 추천서를 결코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학생을 직접 평가한 사실대로 꼭 쓴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비록 자기 밑에서 학위를 받은 학생일지라도 말이다. 학위과정에 있을 때에 많은 명망있는 교수와 전문가들을 “라합”같은 좋은 친구로 만들어 두기 바란다.


결국 정탐을 잘하여 미국의 문화와 관습을 잘 이해하게 되면, 미국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자신감 때문에 여러분의 “간담은 더욱 강해진다”고 할 수 있다. 본 칼럼에서 지적한 것을 이미 잘 갖추고 새로운 미국의 이민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수 많은 유학생 출신 신이민 세대에게 갈채를 보낸다.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백성은 양식을 준비하고, 용사는 무장하고 또 여리고성의 정탐을 마쳤다. 이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백성을 성결케 하고, 요단강을 밟으라고 명령하셨다. 다음 회에서는 계속하여 여호수아의 요단을 건너기 위한 네 가지 준비 과정 중 셋째, “온 백성에게 성결을 부탁한다” 와 넷째, “과감히 요단에 들어설 것을 요구한다”를 유학생활 중의 준비 과정에 적용해 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