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7] 어린이 코스타 스케치 (유치/유년)

[Kosta 2017] 어린이 코스타 스케치 (유치/유년)

    

발랄하게 율동을 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은 언제나 큰 즐거움입니다. 코스타는 아이들을 가진 부모님들이 하나님께 더 집중하도록 돕기 위해서, 또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집회 기간동안 많은 시간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돌보아 줍니다.

이러한 사역 뒤에는 수많은 선생님들의 수고와 땀이 있습니다. 반응없는 아이들을 위해 에어콘도 잘 되지 않은 공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물을 연신 마셔가며  과장되게 ‘망가지는’ 선생님들의 수고에 갈채를 보냅니다. 이 아이들에게 코스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수님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경험하는 축복의 자리가 됨을 믿습니다. 그것이 이렇게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상급이라고 믿습니다.

 

[Kosta 2017 – 새내기 강사] 박흥식 교수

[Kosta 2017 – 새내기 강사] 박흥식 교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게 된 박흥식입니다. 저는 1990년부터 독일에서 유학했는데, 당시 미주 코스타 소식을 종종 들으며 참 부러웠습니다. 유럽에도 비슷한 조직이 생겼지만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늦게라도 코스타에 참석하여 젊은 시절의 아쉬움을 달래고, 또 여러분들과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얻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박흥식 교수님 부부이십니다.)

저는 대학시절 이동원 목사님께서 시무하셨던 서울침례교회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며, 대학과 학문세계가 복음의 사각지대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학문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길을 걷고자 학부 졸업 후 독일로 유학했으며, 괴팅엔 대학교에서 중세 상인길드 연구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신라대학교 역사교육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2003년부터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는 중세 말기 유럽을 연구하는 역사학자인데, 중세 상인길드, 도시, 흑사병, 중세와 근대 초기 교회 등에 대한 논문들을 써 왔습니다.

한국에서는 100주년기념교회에 출석하며,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양화진연구원 및 문화원 원장으로 섬겼습니다. 여러 해 청년부 구역장으로 섬겼고, 청년학교라는 것도 만들어 2년간 청년들과 함께 어울리며 밀도 높게 삶과 비전을 나누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2017년에는 연구년을 맞아 아내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에 머물며 기독교세계관대학원대학교(VIEW)에서 강의와 저술활동에 힘쓰고 있습니다.

– 이번에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남긴 것: 500주년의 성찰” 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시는데요, 그 주제에서 나누고 싶은 신앙의 메세지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처음 뵙는 분들에게 거창하거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개신교회가 2017년을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 기념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현재 교회와 사회에서 많은 비판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지만, 질적으로 새로워질수 있는 모멘텀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500주년 기념일은 루터의 개혁을 중심으로 제정한 것이기에 그 기념일을 계기로 루터가 이룬 성취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소위 ‘성공한’ 종교개혁운동에만 시선을 고정하기때문이기도 합니다. 루터를 영웅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시 교회와 개혁가들을 통해 무엇을 하셨는지 주목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카데믹한 글에서야 하나님을 주어로 둘 수 없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늘 하나님을 주어로 삼으려는 태도가 절실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루터의 성공에 도취되기보다는 종교개혁이라는 긴 여정을 균형있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루터 이전에 발데스, 위클리프, 후스 등 선구자들이 교회를 비판하며 개혁의 길을 개척해 왔던 점에도 함께 주목해야 합니다. 또 앞선 ‘실패자’들과 달리 루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는 인쇄술과 세속제후의 보호라는 두 전제조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개혁을 위해 특별히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루터 개인의 업적으로 찬양할 일이 아닙니다.

루터는 1) 신앙에 있어서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이다, 2) 선행이나 공로 같은 종교적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3) 세례받은 모든 자가 사제이며, 평신도도 성경을 해석하는 자유를 누린다고 강조하는 등 중세적인 교권주의를 부정하고, 결국 유럽의 개혁세력 모두가 수용하게 된 개신교의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그 절정은 평민들이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여 종교개혁 정신을 구현한 일일 것입니다.

저는 루터의 이런 업적은 충분히 강조하고 평가하되, 그가 개혁의 추진 과정에서 범했던 실수들도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루터는 당시 개혁세력의 실질적인 좌장이었지만, 칼슈타트를 비롯한 여러 개혁가들을 포용하지 못했습니다. 성찬에 있어서 그와 해석을 달리하는 스위스 개혁가들과 연대하지도 용납하지도 못했습니다. 농민전쟁이 발생했을 때, 루터는 농민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했고, 정의와 공의의 문제를 외면했습니다. 그 후 종교개혁운동이 세속권력의 보호에 의존하게 되어 불철저하게 진행된 요인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유럽 사회에서 주변인으로 가장 열악한 삶의 조건 하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가 보여주었던 반유대주의적 태도와 행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개신교회의 출발을 이해하고 설명해주는 일종의 거울이지만, 무비판적으로 따를 전범이 아닙니다. 그는 실수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다시 요약하면, 종교개혁은 복음을 재발견하여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였지만, 루터의 개혁은 미완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1520년대 중반 이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루터파가 새로운 종파로 인정받는 것 자체를 종교개혁의 목표인양 추구했지만, 그것은 종교개혁의 바른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분열이 민족적, 국가적 분열을 강화시켰고, 나아가 신구교 사이의 종교전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도 반성해야 합니다. 개신교회는 지난 500년간 홀로서기를 해 왔고, 한국교회도 130년 이상의 역사를 갖게 되었는데, 과연 그 여정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내부에서 종교개혁의 중요한 사상으로 강조되었던 만인사제론이 실질적으로 실천되지 못하고 목회자 중심의 교회로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한국이라는 다종교사회에서 개신교회가 마땅히 종교로서 기대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세상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개교회성장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 등의 산적한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미국 코스탄들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이 시대에 가져야 할 고민과 삶의 자세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교수님의 생각을 나누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제가 미국 코스탄들의 삶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해 피부에 와 닿는 조언을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청년들에게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두 가지 정도 드리고 싶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우리는 이중적 귀기울임이라는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과업으로 부름받았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는 그 말을 성경과 더불어 세상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것이 경건의 전부는 아니며, 세상 속에 거하며 하나님과 이 시대의 필요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이며, 보편적인 문제를 늘 후순위로 미루면서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을 좁은 범주에 가두려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기도제목을 공공의 문제로까지 확장해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는 혼자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향점이 같은 다른 이들과 네트워킹하면서 함께 협력하여 일하는 방식을 익히라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이런 조언들은 사실 제 스스로의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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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러분의 강사님께서 미국 코스타에 처음 오셨습니다. 그분들 중 몇분들을 모시고 인터뷰 형식의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 일환으로 준비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Kosta 2017 D4] 성경강해 3

[Kosta 2017 D4] 성경강해 3

베드로전서 2:11-12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 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 강해 마지막 시간인데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는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우리 한국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지나왔습니다. 그러한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회피하고 싶은데 교회 다니며 종교 생활을 통해 현실을 잠시 잊고자 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한국인들의 믿음이 현실도피적인 면이 많습니다. 어떻게 믿을까, 어떻게 성경을 공부할까, 어떻게 교회 행사를 세련되게 치를까의 고민은 많았지만 어떻게 일상을 살 것인가의 고민이 부족했습니다.

행위, 행실, 실천… 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저 립서비스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말하는대로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믿는대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지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세상은 말로 변하지 아니하고, 묵묵한 행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나그네 백성으로서 무엇을 행동할까요? 세가지만 나누고 싶습니다.

1. 배타심을 넘어 환대의 사람이 되자.
2. 짐을 가볍게가자
3. 경계를 가로짓는 자로살자

 

1. 배타심을 넘어 환대의 사람으로 사는 나그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가 본 환상이 나옵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잡아먹어라.”

베드로에게 이방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거룩함을 오염시킬 수 있는 배척의 대상이었는데 이제 그들을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라 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용납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배타심을 넘어 환대의 사람이 되기 위해 먼저 언어의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나그네로 이 땅을 사는데 우리는 언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 합시다. 그리고 영어공부 열심히 합시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경제/문화/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양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을 환대하기 위함입니다.

주변인이 되는 경험은 낮은 자들과 연대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런 버팀목이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되고, 설 자리가 없이 소외된 자들에게 설자리가 되어줍시다.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연약한 이들을 위해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 줍시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건 아니건, 힘든 일이 있을 때 외로울 때 쉼이 되줄 것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눔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재능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감사를 나누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나누는 것입니다.

 

2. 가볍게 사는 나그네

짐을 줄여야 합니다. 우리가 물건을 소유하지만 그 물건이 우리를 소유하기도 합니다. 많이 가지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에 적게 가지고도 만족하며 사는 모습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가나공방을 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나무라는 자연친화적인 소재를 가지고 사람의 실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튼튼하고, 아름 답고, 저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무 뿐만 아니라 버려지는 많은 소재들을 이용해서 업사이클링도 합니다. 지금 제가 착용하고 있는 벨트도 자전거 타이어를 이용해 만든 것입니다.

나그네는 남겨놓고 가는 것이 많으면 안됩니다. 떠난 뒷자리가 깔끔해야 합니다. 가볍게 떠날 수 있도록 흔적을 적게 남기고 갑 시다. 조금 덜 먹고, 덜 쓰고, 대신 많이 나누며 사는 그런 나그네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이 강림하고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성도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필요한대로 나누었다고합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에 대해 어떤 마 음을 가져야 할까요? 나누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아킬레스 건은 무상으로 나누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의 재능, 지식, 물질, 하나님께서 모두 청지기로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나의 이익을 위해 움켜쥐어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세상과 나 누시기 바랍니다. 섬김의 도구로 여러분의 재능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저는 9학년 7학년 두 딸아이들을 가을부터 홈스쿨링을 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있고, 값비싼 학군에 묶이지 않아도 되겠지요.

3. 화해하게 하는 직분의 나그네

첫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듯, 우리의 정체성이 제사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후서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 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과를 따지지 않으시고, 화해의 말씀을 우 리에게 맡겨 주심으로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

제사장은 본질적으로 이쪽 저쪽 망가진 관계를 회복시키며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요, 거류민으로 산다는 것, 우리가 이 땅에 제사장의 정체성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화해케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이 세상이 규정해 놓은 경계를 가로지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이 십자가는 고린도후서 5:17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화목의 십자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하는 남자와 여자일 수도 있고, 남한과 북한일 수도 있고요, 백인과 흑인일 수도 있 고, 부모와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망가진 관계를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의지해 망가진 관 계들을 화해시키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저는 몇해 전 부터 북한 신의주에서 한국 부산까지 판문점을 통과해서 자전거를 타는 꿈을 꾸어왔습니다. 이번 9월에 저는 자전거를 타기 위해 북한에 갑니다. 2017 코스타 오전 성경 강해 (셋째날) 페이지 8 / 10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는 아니고, 평양에서 판문점까지 자전거를 탈 예정입니다. 판문점에서 길이 막히면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 판문점에서 서울까지 자전거를 탈 예정입니다.

누군가가 왜 이런 일을 했냐고 묻는다면 고린도후서 5:17을 말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쟁과 다툼이 있는 이 세상에서 화해시키는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그네, 거류민이 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구경만 하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 뒤돌아보면 평화와 생명이 꽃 피워져야 합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실천해 나갑시다. 세상을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제사장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모였지만 이제 내일이면 각자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제사장입니다. 돌아가서 각자의 자리에서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며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는 제사장 나그네로 살아갑시다.

사람이 간다는 것은 더욱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이제 이 자리에 잠시 모였던 제사장들이 삶의 현장으로 파송되어 흩어질 때 여러분이 있는 그 자리가 때로는 믿음 때문에 불이익 이 있고 고난과 갈등도 있지만, 평화와 생명, 사랑이 풍성하게 그리고 늘 행복한 길은 아니지만 흔들리면서, 그렇게 묵묵히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갑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에 흘러 들어오게 하는 통로로 사십시다. 마치 모래시계의 잘록한 허리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틈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흘러들어오도록 통로가 되는 그런 존재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제가 있는 자리가 그리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고 낙심하지 맙시다. 주변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여러분의 여정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동행이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Kosta 2017 D4] 책의 용도

[Kosta 2017 D4] 책의 용도

책은 ‘읽기 위한 것’이라는 부담감을 버리고, 책은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 좋은 책은 내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용도에 맞는가 하는 것이다. 고전은 읽어야 한다는 부담은 있는데, 읽지는 않고, 그냥 꽂아두는 책인데… 새로운 고전의 기준은 ‘곧 절판될 책’이다. …

목요일 오전 책소개를 시작하며 참가자들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강성필 교수님의 농담의 일부입니다. 강교수님은 ‘고전’ 몇권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책의 용도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셨습니다.

1.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 (존 스토트)
섬타고 있는 형제/자매에게 그 책을 옆에 끼고 다가가서는 “미정 자매, 읽어 봤어요?” “아니요.” “이책은 절판이야.”라고 말하면 미정자매는 “이 형제가 나를 위로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난생 처음 절판된 책을 가지고 와서 다가오는 사람에 대한 신선함. “이 책 한번 볼래요? 나는 이 책을 볼 때마다 유정자매가 생각나.” 느끼하지만, 확 다가와요. “빌려줄까?” 그럼 미정 자매가 빌려 달라고 합니다. 근데 책 갈피에 한장이 꽃여 있습니다. 그 쪽지 안에 “다양한 예수님 더 다양한 유정 자매”라는 노트가 적혀있습니다. 자매들은 이 형제에 대해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오빠, 오늘부터 Day 1″. 이 책 한권을 사면, 10번 이상을 만나야 알수 있는 형제, 자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유진 피터슨 “메세지”
성경 같지않은 성경같은.. 절판위기에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이 책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중요한데요, 다섯권의 책을 집 안 여러군데 펴 놓으세요. 여기저기 펴놓는데, 예언서는 꼭 화장실에 아주 무심한 듯이 툭 던지세요. 정돈된 느낌을 주면 안 됩니다. 그리고는 교회 형제, 자매들을 초대합니다. 화장실에 갔는데 예언서가 있어요. 미정 언니는 화장실에서 볼일 보면서 예언서를 읽는다. 조원들은 미정 자매를 향한 리스팩트가 막 생깁니다. “다 읽으셨어요?” 라고 물어보녀, “이 책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야. 필요할 때 잠짠잠깐 보는 것야”라고 대답해줍니다. 그러면 ‘리스펙’이 마구 생깁니다. 청년부 형제 자매에게 리스펙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

3. 구원이란 무엇인가? (김세윤)
짧고, 창세기에서 바울 서신까지 구원에 대해서 쓴 힘이 넘치는 글입니다. 하지만 내용보다 용도가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책을 사신 분에게 개인적으로 나누어드리겠습니다.

4. 내년에 또 고전 책소개 부탁을 받으면…
고민하면서 서점을 둘러보는데ㅎ 서점에서 보물의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내년되기 전에 절판될 확률이 매우 높은 책들입니다. 주로 이번에 코스타에 오신 강사님들의 책입니다.
‘오후 5시에 온 사람’ (송병주). 이 책은 “오후 6시에 온 사람”이 나오면 바로 절판입니다. 누가 iPhone 6가 나왔는데 5를 사겠어요.
‘거북이는 느려도 행복하다’. 누군가가 ‘토끼는 빨라서 행복하다’ 가 나오면 곧 절판. 이런 책들을 조원들이 집에서 보는 순간 – 리스펙스~.

5. 김동문 선교사님의 책. 절판될 이유가 없는데 벌써 절판.

6. ‘로마서 강해’ (김도현). 정말 좋은 책인데.. 중요하지 않다. 화장실 앞에 툭 던저 놓으면 리스펙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책을 사서 집에 늘여 놓으면, 책들이 한번 여러분에게 말을 걸거에요. “한번 읽어볼래?”


깊이 있는 ‘고전’ 보다는 피상적인 인터넷의 채팅을 점점 더 선호하는 세대에게 좋은 책을 알리고 선택하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세대에게 조금이나마 ‘고전’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려는 강교수님의 노력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