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7 봉사자] 허건 전도사

[Kosta 2017 봉사자] 허건 전도사

My name is Kyeon Heo and I’m currently serving as the EM Pastor at New England Grace Presbyterian Church in Connecticut. I went to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for my undergraduate studies and spent 6 years in the corporate industry as a Multi-media Designer and an English Professor in Korea before attending seminary at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By His grace, I came to know the saving knowledge of Jesus Christ during my youth group days and is interested in long-term mission work overseas focusing on ministering to the youth and college students.
I first heard about KOSTA during the summer of 2008 where my senior pastor asked me to help with the “youth program” of KOSTA. Ever since then, myself along with two faithful brothers in Christ (Michael Chung and Tim Rhee) have been committed to serve each summer. This is our 10th year serving at KOSTA together and regardless of how many times we felt as though we won’t be able to serve year in and year out, God always helped us to remember the blessings that we experienced throughout the years, which keeps us as well as the volunteers coming back again and again.
I will never forget the first year we served together. We were just out of college and didn’t really know what we were doing. KOSTA placed the youth group in a small classroom upstairs at the SRC in Wheaton College. We barely had enough room to fit everyone into that small room and it was definitely a learning experience. However, throughout the 5 days of KOSTA, it was so clear and visible how God was moving and working in the hearts of not only the students but the staff as well as well during our prayer and worship times. It was through this very first KOSTA experience that taught me that despite my inabilities, despite my inadequacies, God is so much greater and He wanted use KOSTA  as an avenue to minister to each and every one of us.
I know KOSTA is predominantly a Korean-Speaking conference which I believe is great! However, ever since KOSTA began 30+ years ago, now I believe there are more and more predominantly “English-Speaking” people to which perhaps the conference can accommodate for.
I want to ask you to pray for the followings:
1. Please pray for the students. We have 30 students registered to be with us for the next five days and we simply desire for these students to hear God’s word and respond. May God open up and prepare their hearts!
2. Please pray for the speakers (Rev. Michael Chung, Pastor Tim Rhee, Pastor Jinu Yu, Pastor Daniel Song, Pastor Kyeon Heo). As we deliver God’s word, that He will empower us and speak through us the truth of God’s living word!
3. Please pray for the counselors and volunteers. That they may not get too caught up on “serving” the youth but also to get blessed as well.
[Kosta 2017 D3] 저녁 설교

[Kosta 2017 D3] 저녁 설교

룻과 나오미 입니다. 룻을 떠나보내려는 나오미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롯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세분의 액터들이 (나레이터, 룻, 나오미) 성경본문을 실감나게 연출했습니다. 정말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 같았습니다. 성경 봉독을 하고서 박수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나오미’께서 말씀하시더군요. ^^

룻의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하고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나그네의 이야기입니다. 본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는 나그네의 삶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가족이 고생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웃고, 울며 죽음을 경험하는 “보통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Paul Miller의 “A Loving Life”라는 책에 이렇게 소개가 됐었습니다.

엘리멜렉 Elimelech = 나의 하나님은 왕 God is My King
나오미 Naomi = 유쾌함 Pleasant, beautiful
말론 Mahlom = 약골이 weak, sickly
기룐 Chilion = 시들이 frail, pine away
베들레헴 Bethlehem = 떡이 있는 집 House of Bread
모압 Moab = 너의 아빠가 누구니? Who is your Daddy?

우리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정에 대해서 두 여인의 나그네 삶을 통해 보고 싶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기였고 여러 모양의 부정 부패와 죄로 가득한 때 였습니다.

나오미와 그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압은 베들레헴보다 더 힘든 곳이 되어버립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려움이 닥치고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과 고생을 피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동에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인부를 물었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1장은 흉년의 시작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추수 시작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너무 성급하게 자신의 인생을 보고 “마라”라고 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참을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자심에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기다림의 묘미를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확실한 것, 그리고 갖고 싶어하는 것을 위해 기다리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나님을 기다리는가? 인내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인내가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현재의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살며 거기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의 싸인을 발견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 인내의 기다림은 항상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 깊게 보며, 거기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의 첫 번째 빛 줄기를 보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여기서 저는 룻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치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이 가면 큰일 난다. 너의 신이 있는 곳으로 가라. 내 하나님이 네 인생도 망가트리실 거다.” 가짜 신은 진짜 하나님보다 훨씬 대하기가 쉽고 편합니다. 가짜 신은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 리얼 하나님을 좇겠다고 합니다.

룻은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6-19절). 그는 특별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에게 헌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겁니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서 자기의생명을 버리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룻은 나오미의 울부짖는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겁니다.

룻은 정말 어메이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과 헌신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찾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주제를 찾게됩니다.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헤세드 사랑은 one way love입니다. 어떤 반응이 온다 할 지라도 사랑과 헌신을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공허함을 젊은 이방인 며느리를 통해서 체위 주시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룻이 탈출구가 없는 사랑으로 나오미의 풍성함이 되고 다 쓰러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합니다.

룻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첫 5절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망가짐과 타락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죽음과 헤어짐을 경험하고, 힘없이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상황에 다다랐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지키고 나 살겠다고 떠나면 나오미는 죽을 것이다. 내가 희생하면 나오미는 살 수 있다. 그의 가난을 내가 짊어 메 야지. 그의 주변인 생활을 내가 살아 야지. 내가 나그네로 살아야지. 내가 그의 가난을 짊어짐으로 그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지.”

룻은 자기의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룻은 자기의 본향을 떠났습니다. 룻은 낮은 곳으로 갔습니다. 룻은 주변인이 되었습니다그는 고난의 종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했습니다. 룻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분명 주변인으로 사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그네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죄의 값을 치루고 끝까지 의리를 (헤세드) 지키겠다는 예수님의 헌신입니다.

룻이 가리키는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룻처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집을 떠나 (빌 2:6-7),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 나시고, 머리 둘 곳도,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마 8:20), 마침내 추방과 거절의 표지인 성 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히 13:11-12).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인류가 당해야 하는 추방, 곧 소외된 상태를 경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쫓겨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궁극적 출애굽이며 추방으로부터의 궁극적 탈출입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신 살아있는 증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화목하게 하실 것이며 (골 1:16-20) 다시금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계 21:1-8).

오늘의 주제는 “나그네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중요하지만 그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의 핵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핵심은 예수님이 주변인으로 오셨으니 나도 주변인이 되어야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도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The essence of being a Christian is that I’m in Christ.
My life is in Christ.
You are IN Christ.

예수님의 삶과 고통과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에 여러분이 속해 있습니까?
The heart of the gospel is that everything that is actually true of Christ is legally and really true of you if you’re a Christian.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믿음으로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Kosta 2017 Day 3] 코스탄의 ‘삶의 현장’ 2

[Kosta 2017 Day 3] 코스탄의 ‘삶의 현장’ 2

when everybody say you should ……..
넌 왜 나와 다르게 생겼어?
지금 너의 나이에는 결혼을 해야 하지 않아?
넌 여자인데 어떻게 하겠어 ?
아이를 낳고 그냥 쉬는게 좋지 않겠어?
I asked How I serve GOD?

오늘 우리는 김지선 목사님을 통해서 세상의 나그네 이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수 있을지를 고민한 증인된 삶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캐나다 유년 시절에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의 문제와 학교에서의 차별 그리고 주말에 교회에서 느껴야 했던 동양인 여성으로써의 차별의 벽, 그 모든것으로 인해 생긴 외로움과 괴로움 가운데에도 어떻게 그녀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수 있었을까요?

첫번째는 하나님의 사람과의 만남 이었습니다. 힘겨운 캐나다 시절에도 토론토 유년부의 목사님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 하시고 자신의 삶도 드려야 한다는 결단 가운데에 거하실수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자기 자신의 identity 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이 말한 나이와 인종과 성별의 선입견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게 평가 받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써의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인정한것이 그 힘의 원동력 이었습니다.

임신과 출산의 어려움 속에서 박사를 마친후에 미국에서 안수를 받기까지의 여러 힘든 여정 속에서 그리고 여전히 교회 안에서도 존재 하는 세상의 선입견과 반대 의견 속에서도 하나님과 시선을 맞추고 하나님이 기뻐 하실 일들을 항해서 그 걸음실을 매일 매일 디디시는 목사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 증인의 삶이 우리에게도 영향력이 임할것을 압니다. [기사제공: 박세희 간사]

[Kosta 2017 – 새내기 강사] 이태후 목사

[Kosta 2017 – 새내기 강사] 이태후 목사

 이태후 목사님은 미국 코스타의 완전 ‘새내기’는 아니시지요? 유쓰 코스타에서 두번 가량 섬기신 경험이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유쓰 코스타에서 섬기셨던 학생들를 이번 집회에서 보시면 무척 반가우시겠어요.
본인 소개와 미국 코스탄들에게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제 이름은 이태 입니다. 94년에 신학공부하러 미국에 왔다가 부르심을 받고 2003년부터 필라델피아 북부 흑인 빈민가에서 동네 목사로 그들의 이웃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몇가지를 나누어 주세요.  
첫째, 이 땅의 삶이 나그네 삶이라는 걸 인식하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영원한 그 나라이지요. 그걸 분명히 인식하면 이 곳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학위, 직장, 결혼, 가정….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해하고 그 분의 뜻을 알도록 이끌어주는 과정일 뿐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때로 이 부수적인 것들이 신앙생활의 목적인것처럼 살아가는 분들을 봅니다. 나그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목적지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지요.
둘째, 우리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 중 하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역지로 인식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부터 시작한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곳 마다 복의 근원이 되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비자로 살아가는 이 나라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을 산다면 우리의 존재가 이 땅에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 미국 코스탄들에게 도전하고 추천하고픈 삶의 자세, 활동 등이 있으시면 나누어 주세요.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해야합니다. 많은 한인 이민자들은 자신을 백인 중산층과 비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들처럼 사는 게 목표이고, 그들 거주지 근처로 이사가는게 한인 이민 사회의 전형적인 유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민자. 유색인종입니다. 백인 중산층의 눈에는 African American, Hispanic 보다 존재감이 없고, 같은 아시안 이민그룹 중에서 인도, 중국, 베트남 보다 영향력이 없는 집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백인 중산층에 러브콜을 보내지만, 그들은 우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색인종, 이민자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해관계는 사실이지 유색인종, 이민자들과 더 일치합니다.
대부분의 한인 이민자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자기 이해관계에 직접 연관되지 않는 한 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BLM 에 참여하는 한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코스탄들은 자신의 선택, 선호 여부와 상관없이 이 땅에 있는 한, 자신이 사는 도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자세 – Seek the shalom of the city – 를 가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인 사회가 갖는 배타성을 벗어나 인종과 종교의 담을 넘어 연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에 코스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드립니다.
한인 기독교인들 가운데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이렇게 세계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고, 세계 경제를 이끈다고 믿는 분들도 있습니다. 미국이 지금의 국력을 획득하기 위해 이 땅의 원주민들 – Native American – 그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미국 역사를 공부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잔혹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리스도인된 우리의 역할이 좀 더 분명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갈등하는 주류 백인 사회와 비주류 유색인종 사이에서 갈등을 해소하며 화해를 이루어가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닫혀있는 주류사회에 들어가려는 안스러운 노력보다는 그 바깥에서 주변인의 신분을 인정하며 오히려 그들이 못보는 문제들을 정확하게 진단하며 복음의 능력으로 평화롭고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에게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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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러분의 강사님께서 미국 코스타에 처음 오셨습니다. 그분들 중 몇분들을 모시고 인터뷰 형식의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 일환으로 준비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Kosta 2017 Day 3] 책 책!

[Kosta 2017 Day 3] 책 책!

두번째 책소기는 박영호 목사님께서 진행해 주셨습니다.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스의 ‘한나의 아이’를 비롯해 ‘기독교의 발흥’ (The Rise of Christianity (by Rodney Stark)), ‘조선의 작은 예수 – 서서평’ (백춘성), ‘눈뜬 자들의 영성’ (크리스토프 휴어츠), 그리고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 말고’ (로버트 N. 웬버그) 를 추천해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발흥’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초창기 아무도 기독교가 몇백년이 지나지 않아 서구세계의 가장 지배적인 종교가 되리라 예상을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제시하는 책입니다. 서서평 선교사님은 ‘나환자의 어머니’라 불릴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가진 것을 바쳤다고 합니다. ‘기도해 보라는 뻔한 대답 말고’에서 저자는 “마더 테레사와 한 주를 보낼 것인가, C. S. 루이스와 한 주를 보낼 것인가?”라고 질문하며 신앙의 열정이 논리적 해명과 이해에서 회복될 지 아니면 섬기고 사랑하는데서 회복될지 독자가 답을 찾도록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집회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로비에서는 풍성한 책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추천도서 및 많은 양서들이 자신들을 읽어 줄 (엄밀히 말하면 구입해 줄)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Kosta 2017 D3] 성경강해 2

[Kosta 2017 D3] 성경강해 2

뜨거운 찬양으로 오전 전체집회를 시작합니다. 전체집회 장소를 꽉 메운 참가자들의 찬양이 뜨겁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으로 오전 성경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2:11-12 (새번역)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 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 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저는 하나님과 대치상태에 있는 이 시대의 풍조로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의 길, 그것을 저는 높음을 향해 끊임없이 오르려고 하는 “상향주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중심을 향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가는 것, 그것이 성공이고, 우리가 사는 목적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교육, 스포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올라가는 것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히 “하향주의”입니다. 빌립보서 2:5-11을 들어 보십시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전율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움직인 동력이 되었던 그 마음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이라는 당신의 기득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그건 예수님께 억지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 마음이 예수님을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시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도 나그네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도 다 누리고 싶고, 그리스도인으로 누리게 되는 혜택도 다 누리고 싶다는데 있는 거겠지요. 그저 취미생활로 하는게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낮은 곳을 향한 나그네로 오신 그 분은 이 땅에서 철저히 주변인으로 사셨습니다. 벌거벗은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어머니가 이제는 마지막 보는 앞에서 생의 마지막을 또 다시 벌거벗기운채 죽음을 맞이하는, 생의 입장과 퇴장 모두 소외되고, 주변인이 된 그런 모습으로 우리 주님은 사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신 그 분이 한모금의 호흡이 절박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 거리 는 사형수의 모습으로 그 분은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하향성으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변인Marginality으로 산다는 것은 사회적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지향하 며 살까의 문제입니다.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을 마음에 품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규정하는 사회적 주변인이 되고자 일부러 애쓸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주류사회에서 영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규정한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의 구별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주변인이 된다는 것 그 자체는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로 할 때 주변인이 되는 것 은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틈 사이에서 Tension을 느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불이익과 삐걱거림을 경험하며 삽니다. 주변부는 결코 수치스럽거나 패배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역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처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때가 되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나그네 여정은 “이미”에서 출발해서 “아직”까지 가는 여정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상향주의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목수가 되기로 마음 먹은 몇몇 계기가 있는데 나누고 싶어요. 목회를 할 때 심방을 가면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손에는 툴박스를 들고 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목사님 그 때 오셔서 말씀 감사했어요,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목사님이 그 때 오셔서 고쳐주신 식 탁 아직도 잘 쓰고 있어요. 하시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또 한번은 멕시코 Tecate라는 곳에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거기 산동네에 참 열악한 환경에 사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보니 부 모님은 일 가시고 두 남매가 집에 있었는데 14살 누나는 이름이 크리스티나인데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마비여서 휠체어에 앉아 있고, 11살 남동생은 이름이 살바도르인데 뇌성마비였습니다. 나무를 가지고 현관 앞에 작은 벤치와 페티오를 만들었습니다. 다 만들고 나니 크리스티나가 패티오 위로 휠체어를 끌고 나와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지금까지 앞마당이 자갈 밭이어서 휠체어를 끌고 현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늘 캄캄한 집 안에만 있다가 휠체어를 끌고 현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 국경 철조망이 바라보이는 산꼭대기 집앞 나무 벤치에 앉아서 눈을 감고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 저렇게 행복해 하는 걸, 평생 목수로 살아도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장면에 물이 언제 포도주가 되냐면 정결예식 항아리에 담겨 있던 물이 혼인 잔치 자리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물이 포도주 로 변화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만 갖혀서 우리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만 고 여 있다면 결코 아무 맛도 없는 맹물일 수 밖에 없다고요. 항아리에서 물이 떠져서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있는 삶의 일상적인 현 장으로 옮겨질 때 상향주의, 경쟁에 시달려 흥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을 다시 축제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는 포도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길지 않은 이 땅에서의 나그네 여정 동안 물이 아닌 포도주로 살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2장 때문에 공방 이름을 가나 공방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꿈을 꿉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목회 안하고 목수하니까 행복하냐고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내 마음 속에 뿌듯함이 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으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향주의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눈빛이 맑고 깊습니다. 같이 있으면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있는 자리가 그리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고 낙심하지 맙시다.  주변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그리 멋있거나 매력 있는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 때처럼 목숨을 걸고, 핍박당하며 고 난당하며 가는 길도 아닙니다.

담담하게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믿음 속에 걸어가는 삶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돌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가 있지만 과정은 흔들리며 가는 길,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길이기도 하고, 효율성이 아닌 꾸준함을 요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나그네 여정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동행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