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젊은이가 우연히 검독수리 둥지를 발견했다. 심술궂은 그는 검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 꺼내 뇌조[footnote]들꿩과(Tetraonidae) 뇌조속(Lagopus)에 속한 뇌조는 날지 못하는 새이다.[/footnote] 둥지로 옮겨 놓았다. 알에서 부화한 뒤 이 독수리는 뇌조 새끼들과 함께 자랐다. 자신을 뇌조로 여기고 행동했다. 뇌조처럼 꼬꼬댁 소리 지르고, 벌레를 찾아 흙속을 뒤적였다. 날개에 비해 몸집이 비대한 뇌조는 몇 미터 이상은 높이 날아오를 수 없는 까닭에 새끼 독수리 역시 그 이상 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덧 힘차고 당당한 몸집으로 성장한 검독수리는 여느 때처럼 뇌조들과 함께 흙더미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때 한 그림자가 이들 위를 쏜살같이 지나갔다. 모두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창공 위에 검은 형체가 바람을 가르고 미끄러지듯 치솟고 있었다. “아! 정말 멋진 새로구나!” 검독수리가 탄성을 질렀다. “저건 독수리야!” 옆에 이던 뇌조가 알려주었다. “검독수리라고 부르지! 저 새가 바로 하늘의 왕이야! 저 독수리와 겨룰 수 있는 새는 없지.” 뇌조는 고개를 떨구며 한 마디 덧붙였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이들은 다시 흙더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이후 이 검독수리는 두 번 다시 하늘을 치솟는 독수리의 비상을 본 적이 없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검독수리는 평상시 뇌조가 뛰어오르는 높이 이상 결코 날아보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footnote]드와이트 에드워드, 내면의 혁명 (서울: 좋은씨앗, 2005), p. 17-18. 아메리칸 인디언들 사이에 전해오는 옛이야기[/footnote]
  
우리는 태어나면서 저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놀라운 계획을 갖고 태어난다.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실 때 그렸던 지위는 ‘왕의 가문’이다. 피조물을 지배하고, 관리하고,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사명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
  
그러나 어느 날 사단은 우리를 뱀의 둥지에 옮겨 놓았다. 그리고 우리의 지위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땅에 붙어서 땅의 것들만 꿈꾸도록 길들였다. 옆에 붙어서 평생 우리 귀에 대고 말한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왕의 가문이 될 수 없으니까.”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왕의 자녀의 신분을 모르고 마치 뇌조 나라의 검독수리처럼 그렇게 평생 흙더미만 뒤지며 죽어간다. 자신의 가치를 모르고 영적 거지로 산다. 그래서 인생의 좌표를 잃고 엉뚱한 쓰레기 더미에서 삶을 허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을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님으로 향할 때 우리의 눈은 하늘의 좌표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원래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였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 쓰레기 더미에서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살았는지 놀라게 된다.
 
검독수리도 자신의 본래의 신분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진짜 검독수리가 바람을 가르듯 창공으로 치솟는 모습을 보았을 때이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옆의 뇌조들이 단번에 그의 기를 꺾었다. “꿈도 꾸지 마, 너는 결코 저런 새가 될 수 없으니까.”
 
세상은 경쟁사회이다. 높이 오르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짓밟아야 산다. 자신이 못 오르면 다른 사람도 못 오르게 짓밟는다. 이것이 죄로 물든 이기적인 인간관계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경쟁에서 짓밟힌 사람들, 자신을 인생의 낙오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실재로 교회는 물론 집회나 세미나, 대학의 현장에서 삶에 지치고, 자신감을 잃은 분들, 미래를 불안해하는 사람들, 비전은커녕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우리의 이웃을 많이 만난다. 가정이 깨지면서 부부 관계가 무너지고, 자녀들의 마음이 찢기고, 피멍든 모습도 흔해졌다. 잘못하다간 저 뇌조 나라 검독수리처럼 지저분한 흙더미만 뒤적거리며 단 한 번도 뇌조 이상을 날 생각도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예배는 비상(飛翔)의 현장이다. 과거에 그 어떤 시궁창에 빠져 살았던지 상관없다. 예배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망각한 채 비대한 몸짓으로 벌레나 잡아먹던 우리가 일어나 하늘을 날게 되는 인생역전의 현장이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랄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독수리처럼 바람을 가르고 창공을 향해 치솟게 하신다. “청소년이라도 피곤하고 지치며 건장한 청년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나, 오직 여호와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_사 40:30,31, 현대인의 성경 
  
잭 헤이포드의 말처럼 예배는 하나님의 왕국과 능력이 교회 전체에 임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다.[footnote]잭 헤이포드, 경배 (서울: 조이선교회 출판부, 2002), p. 32[/footnote] 예배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회복은 인간의 상식을 뒤엎는다. 그 힘은 하나님 왕국의 권위에서 흘러나온다. 그 회복은 생물학적 나이나 육체적 힘으로 비교할 수 없다. 인간의 차원과 시야를 초월한다. 하늘로 비상할 때 이 땅에서 경험한 모든 수준을 일시에 뒤엎는다. 뇌조의 고정관념을 타파한다. 전혀 새로운 시야, 그러나 태초에 이미 우리 안에 있었던 관점을 회복한다. 하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왕의 시각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의 지혜로 행동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벧전 2:9 상반절)
  
그래서 우리는 예배 때마다 흘러넘치는 왕국의 권위로 왕 같은 제사장의 정체성을 회복한다. 왕의 지위를 되찾고 ‘거룩한 나라’를 꿈꾼다. 제사장의 신분을 되찾아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을 섬기고 다스릴 사랑을 충만케 채운다.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계 5:10)
  
이제 예배의 자리에서 회복된 왕국의 권위를 갖고 뇌조 나라의 잃어버린 제왕들을 향해 파송된다. 그 나라를 다스리되 세상의 힘, 폭력과 돈, 권력이 아닌 천국의 사랑, 섬김, 비폭력과 평화라는 새로운 권위로 다스린다. 자신이 죽고 남을 살리는 제사장의 권위로 다스린다. 그곳에서 만난 잃어버린 영혼들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초대한다. 저들이 또 다른 왕의 가문에 참예할 수 있도록. 
이유정 / 한빛지구촌교회 예배디렉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오직 주 만이’ 작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