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6년 8월호
1. 피츠버그에 내리다.
1999년 8월 피츠버그 공항에 혼자서 처음 내릴 때만 해도 제가 교회에 가게 될 거라고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교회를 안다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드러내 놓고 싫어했으니까요. 그러다가, 2000년 8월 엄청난 교만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역사를 경험하고선 교회 활동에 깊이 참여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 피츠버그 한인 중앙교회 청년부 공동체에 대한 소개
제가 섬기고 있는 피츠버그 한인 중앙교회 (Korean Central Church of Pittsburgh, 이하 KCCP)는 주일 출석 인원의 약 절반 정도인 250 여명 정도를 ‘청년’으로 분류합니다. ‘청년’에 포함되는 사람은 일단 나이가 만 40세 이하의 대학생 및 대학원생, 포스닥, 직장인 등입니다. 이들 중 약 110명 정도가 매주 토요일 6시에 모이는 청년회 예배에 비교적 꾸준히 참석합니다. 6시에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6시 45분부터 약 30여분간의 찬양예배, 7시 반부터 10시까지는 조별 성경공부를 합니다. 각 조당 구성인원은 대체로 8-16명 정도로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공부 조는 克?싱글/매리드 등의 각 그룹 별로 편성됩니다. 학부 성경공부 조의 조장들을 위한 성경공부는 간사 역할을 하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하게 되고, 싱글/매리드 조의 조장들을 위한 성경공부는 부목사님이 담당하고 계십니다. 조 편성은 가을/봄/여름 의 각 학기 별로 약간씩 바뀝니다. 교재는 IVP나 프리셉트 등에서 나온 GBS 교재 중 성경본문에 충실한 것으로 해서 그때그때 저희 청년회 공동체의 영적인 상황에 적합한 것들을 조장들과 목사님이 상의해서 결정합니다. 좋은 교재가 많이 부족하여 언제나 아쉽습니다. 요새는 그래서 두어 개의 교재를 같이 놓고 본문 내용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교재를 조장들이 만들어 오는 방법을 취하기도 했었습니다.
3. 성경공부를 처음으로 해보다.
2000년도 봄에 생전 처음으로 접했던 성경공부는 참으로 신선했습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하시고, 인격적으로도 훨씬 성숙하신 분들이 진지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성경공부를 하시는 모습들이 저부터 (이전의 교만한 모습을 벗고)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을 되새기고 생각하면서, 그 말씀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들을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고 나누는 모습으로 풍성했었습니다. 그러한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 말씀이 제 자신에게도 달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 말씀들이 제 영혼도 하나씩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는 것을 또한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 또한 새로이 들리기 시작했고, 찬양 예배 역시 이전에는 지루했으나 점점 찬양들이 하나하나 마음에 들어와 박히기 시작했습니다.
4. 성경공부 조장으로서의 섬김 그리고 부어주시는 축복
2001년은 제 삶의 많은 부분이 바뀐 해 였습니다. 교수가 저를 본격적으로 다그치면서 몰아대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처음이니까 하면서 봐주는 모습이었는데, 더 이상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하나님 말씀 가운데 받는 은혜가 더욱 귀했고, 아무리 학교 일이 바빠도 토요 성경공부를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2001년도 가을 학기에는 한 선배의 권유로 드디어 조장으로 섬기기 시작했고, 그것이 훨씬 복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약 5년간 두 학기 정도의 공백을 제외하고는 계속 성경공부 조장으로 섬기게 됩니다.
처음이라서 그랬는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훌륭한 조원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존경스런 신앙의 선배들과 갈망함을 가지고 열심히 임하는 초신자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에서도 진지함을 결코 잃지 않는 분위기가 조원들 가운데에서 절로 우러나왔습니다. 그러한 분위기가 주는 편안함 가운데에서,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공부 시간시간 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는 지혜들이 있었고, 그것들이 조원들 안에서 생명의 양식으로 작용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매번 받았습니다. 신기하면서도 은혜로운 경험들이었습니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나누게 되는 기도제목들에서는 깊은 나눔들이 있었고, 그렇게 내놓은 조원들의 기도제목들을 주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조장으로서 너무나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조원들이 서로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는 것에 감사해 하며, 그 공동체 안에서 같이 성경말씀 나누고 같이 기도해가며, 하나하나 결국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같이 체험해 가면서 같이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조장들끼리 모여 부목사님과 함께하는 조장성경공부는 그 나눔의 깊이에 있어서 조원들과 하는 성경공부와는 비교가 안되었고, 고영양가 말씀의 집중 투입으로 인해 저의 영적인 성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체험들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고, 그 기쁨이 참으로 강해서 그 이후로 5년 정도 거의 끊이지 않고 조장으로 섬기었습니다. 결코 작지 않은 축복이었지만, 겨우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5.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 특히 힘이 되는 섬김의 축복
그 무렵 학교에서도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다. 과에서도 소문나게 깐깐한 제 지도교수님은 2001년도 12월에 제게 “네가 앞으로 박사과정을 계속 하더라도 잘 할 것 같지 못하니까, 다음 학기부터 다른 데를 알아보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신을 수습하고 교수님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부분에 대해서 차근차근, 잘 안되는 영어로 말씀을 다시 드렸더니 좀 생각해 보시더니 “한 학기만 더 두고 보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당시 제 일과는 아침 9시 반에 교수와 미팅, 10시 반에 처절하게 깨어진 모습으로 미팅을 마치고, 1 시간 정도 실험 준비, 간단한 점심식사, 그리고 12시 반 경에 실험 시작, 저녁 식사, 실험 계속, 새벽 4시 귀가, 다시 아침 9시반 교수와 미팅. 이런 스케줄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런 스케줄을 10개월 가까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게 지금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특별관리 대상이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한테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준 것이어서 감사하게 생각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육체적인 혹사였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는 열등의식은 끊임없이 저의 영혼을 잠식하려 했지만, 토요일 저녁마다, 찬양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서 겨우겨우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은 도리어 저로 하여금 섬김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보게 합니다. 학교 일은 잘리느냐 마느냐의 칼날 같은 능선 위를 걷는듯한 살벌함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교회에서의 섬김은 제게 학교에서의 일을 감당해낼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해 주는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2002년 봄학기에 그 축복이 제 학교 일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웠던 실험이 어쩌다 두 번 만에 실험결과가 잘 나와서 바로 논문을 쓸 수 있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8월에 스웨덴에서 열렸던 국제학회에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회에서 만난 다른 그룹 사람들과의 토론 가운데에서 제가 2001년도에 교수한테 저를 쫓아낼 빌미를 제공해 주었던, 마치 실패한 것 같이 보였던 실험의 결과가 사실은 맞는 것이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학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논문을 써서 제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 지도교수님은 박사과정을 마치는 데 있어서 필요한 논문 개수를 3개로 정해 놓으셨기에 2개를 한 해에 한꺼번에 제출했던 저는 1년 만에 박사과정 자격미달자에서 박사과정의 2/3나 마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2003년도 1월에 실험실 전체의 연구 방향이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저 역시 예외일 수는 없어서 이전에 경험이 없던 큰 장비를 가지고 연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만 당시의 저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해야만 했기에 많이 어려웠습니다. 이전같이 새벽 4시까지 일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매일 밤 11시, 토요일이나 주일에도 예배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실험실에 붙어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한 10 개월 정도 지속됩니다. 3월에 저한테 새로운 장비에 대해서 가르쳐 주던 다른 그룹 사람이 저지른 하나의 결정적인 실수로 인해 교수님이 제게 최후통첩을 하기에 이릅니다. 지도교수님이 저를 department head 앞에 데리고 가서 저로 하여금 각서를 쓰고 사인을 하게 합니다. 내용인즉슨 한번만 더 실수를 하면 쫓아내겠다는 내용이었죠.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살벌한 상황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도 교회에서 감당하고 있던 성경공부 조장은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그 섬김의 축복이 저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2003년도를 아무런 실수 없이 보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2003년이 지나 2004년으로 접어들면서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기 시작해서 교수님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2004년도 초에 마지막 논문을 제출하고 2004년도 12월에 박사 디펜스를 통과하면서 학위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저는 섬김을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저를 생각하면 제게 그러한 능력과 지혜는 처음부터 제 안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죠.
6. 새로운 섬김의 자리, 일대일
2005년부터는 PostDoc으로 일하면서 그 이전까지는 시간이없어서 엄두를 못 내던 KOSTA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KOSTA 에서 ‘조장’이라는 섬김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충 무엇인지 파악을 해보니, 교회에서 성경공부 조장으로 섬기는 것에 비해선 별 거 아니라 생각이들어 조장으로 자원합니다. 조장 코스타에서부터 받은 은혜와 도전은 실로 엄청나서, 돌아와서는 가을학기에는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봐야겠다는 의욕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가을학기부터 일대일이라는 것에 도전을 했습니다. 토요모임에서 조장으로 섬기면서 동시에 주중에 일대일까지 하는 것이 시간적으로 쉽지는 않았지만, 일대일을 통해서 새로이 깨닫게 하시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두란노에서 나온 교재를 바탕으로 하다 보니, 제 자신이 신앙의 기초부터 다시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 기초는 제게 새로운 힘이 되었습니다. 가을 학기 내내 해서 한 명을 마치니, 이 후배가 많이 고마워 하더군요. 저도 많이 뿌듯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그 기쁨이 은근히 대단했습니다.
맛들인 김에 2006년 봄학기에는 일대일을 두 명을 했습니다. 일단 한번 교재를 다 공부했었기에 준비하는데 비교적 적은 시간이 들 것이므로 두 명도 감당이 될 것 같았습니다. 물론 감당이 잘 안되어 힘들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7. 미완의 꿈, 캠퍼스 사역
KOSTA 2005에서 도전 받은 것 중, 다른 하나는 캠퍼스에서의 성경공부였습니다. 피츠버그 지역에서는 지역교회 기반의 청년 사역이 주류이지만, 캠퍼스에 교회에 나오기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라는 마음이 부담으로 많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없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루다가는 아예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아, 씨라도 뿌려보자는 심정으로 캠퍼스에서 혼자서 조촐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Christianity for Everyone’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교회 문턱을 높게 느끼는 사람들, 교회까지 가기엔 부담이 되는 바쁜 사람들,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 잘못 알고서 비판 정신이 많은 사람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전설같이 들리던 얘기들, 5-6개월 동안 벽 붙잡고 기도만 했다는 얘기를 거울 삼아, 기도만 하다가 피츠버그를 떠나게 되어도 전혀 상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과 3주 만에 한 영혼을 제게 붙여 주셨고, 지금 그 친구와 같이 일대일을 하고 있습니다. 질문만 많고 믿음은 없던 친구에게,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하나씩 하나씩 일깨워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의심으로 가득한 마음이어서 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마치 튕겨나오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이제는 어느덧 제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이 늘었습니다. 특히 두란노 교재를 가지고 3번을 일대일을 하면서 익히게 된 기초적인 내용들과 관련 성경구절이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이 친구가 제 앞에서 영접하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믿음도 연약하여 일대일을 계속 해 나가는 동안 이 친구의 믿음이 더욱 커나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영접을 시키고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과정을 처음으로 겪게 되었는데, 만나는 시간시간 마다 성령께서 제 영을 가득 채우고 말씀을 전하게 하시는 것이 느껴져서 긴장도 되지만 나태한 저에게 도리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갈망하는 마음은 있지만, 교회에 나가기에는 뭔가 부담이 있는 사람들이 캠퍼스에는 정말로 있었고, 그들에게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보다 활성화된 캠퍼스 사역의 꿈을 꾸어보지만, 이것은 제게는 미완의 꿈으로 남게 됩니다. 제가 8월 말에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친구도 더 가르칠 수 없게 되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인도하심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실제로 가을 학기부터 캠퍼스에서 모임을 시작하려는 움직임들이 교회 내에서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8. 맺으면서
교회의 어떤 집사님의 동생 되시는 분께서 한국에서 목사님으로 사역하시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인해 돌아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장례식을 치르러 한국에 갔다오신 이 집사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사실 평소에 그 동생 되시는 목사님을 안쓰럽게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던 동생이 왜 고생고생하는 목사로 살아가야 하는지. 하지만, 그 목사님의 장례식에 운집한 3천여 명의 인파를 보고, 그들의 통곡과 흐느낌을 보고선 생각이 바뀌셨다고 합니다. 자신의 동생이 옳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삶이 점점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7년 전 피츠버그에 내렸을 때에는 제가 이런 모습과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습니다. 그때 피츠버그에 내려서 교회에 안 나가게 되었다면, 떠날 때에 저의 떠남을 아쉬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같은 과의 몇몇 후배들 정도가 조금은 아쉬워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떠난다 하니 많은 분들이 아쉬워하시는 걸 봅니다. 제가 이 피츠버그에서 박사 학위 말고도 뭔가 의미 있는 삶을 보낸 것 같아 아쉬움 가운데서도 기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 삶의 순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섬김의 축복은 이제는 모든 섬김을 내려놓고 떠나는 마당에까지 유효하더군요. 한국에서의 새로운 자리에 예비해 놓으신 새로운 축복에 가슴 설레어 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