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섬기게 된 학생선교단체는 소위 끈질긴 성경공부로 유명한 곳이다. 성경공부와 독서모임, 토론등을 통한 기독지성인의 배출에 초점을 두고 사역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성경공부 교재도 많이 출간되어 있었고 그 덕을 톡톡히 보곤 했다.

많은 경우 교재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교재가 기초하고 있는 성경공부 방법론을 가지고 성경의 본문에 집중하는 성경공부를 하곤 했다. 당시 신대원을 다니기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고 막 배우기 시작한 성경해석학과 그것이 실제로 쓰여지는 현장에서의 성경공부의 열매들을 보면서 감격해 하곤 했다.

리더들과의 성경공부를 위해 어떤 학기는 주말 지역교회의 파트타임 사역을 마치고 저녁에 양복을 입은 그대로 학교 도서관을 찾아 공부방에서 마치 외판원이 물건 팔듯이 ^^ 그렇게 어색한 복장으로 성경공부 그룹을 인도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이리저리 강의실을 건너뛰며 그 날 마쳐야 하는 성경공부에 소위 목숨을 걸었다. 미국대학은 한국대학과 달리 동아리방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라고 스스로 위안을 주기도 하지만..

지금도 그때 함께 수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던 학생리더들의 수고에 참 감사한다. 그런데 2-3년의 시간이 지나면서 한가지 발견하게 된 것이 있다. 매 학기마다 그 학기에 집중하는 주제(예: 순종, 헌신, 기쁨)가 있어 설교라든가 성경공부, 심지어 2nd activity까지도 학기 주제에 맞추어 일관성을 가지고 사역하려고 한 것은 좋았는데 특히나 성경공부와 관련하여서는 그것들이 하나로 꿰어지는 연결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절감한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한 주제에 대하여는 나름 올바른 이해와 해석, 적용점을 찾는데 그것이 성경전체나 혹은 복음과의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리더들, 학생들의 어려움을 목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일종의 하이브리드(그때는 그런 용어자체가 일반화되지는 않았지만) 방식을 사용하여 교재와 본문 중심의 성경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재 중심의 소그룹은 최소화하고 본문 중심의 그룹을 주축으로 삼되, 그 본문은 성경의 어떤 책 하나를 집중적으로 파고 드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당시 집중적으로 선택한 책이 마가복음(혹은 요한복음), 에베소서, 갈라디아서였다. 우리 그룹의 특성상 2-3년이면 대부분의 멤버가 바뀌는 현실을 감안하여 캠퍼스에 머무는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이(나름대로 내린) 결국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7:2-3에서 “영생(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되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는 모르더라도 복음서 하나를 제대로 공부하고 나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 대하여 대략적인 이해를 갖는 경험들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어떤 경우에 요한복음은 자그마치 1년 반을 걸려서 마친 적도 있고 멤버에 따라서는 한 책만 공부하다가 졸업하고 나간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올바른 방법이라 믿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리더쉽에서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intention and attention principle)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캠퍼스 사역에서의 성경공부만큼 이 원리가 적절하게 요구된다고 믿는다.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을 선택하여 그것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갈수록 복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또 복음을 모른다고 젊은 세대를 향하여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복음을 접한 세대가 물려 주어야 할 영적 유산이라고 믿는다.

[안상현] 유학생 사역: 첫걸음이 중요하다

유학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계획은 빨리 학위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석사과정도 M.Div가 아닌 MA를 먼저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학으로 석사를 하기에 아무래도 사역 경험들이 필요할 것 같아 지역의 이민교회에서
파트타임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좌충우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와준 교사들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려해 준 교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러던 중 한 지역교회에서 중고등부 전도사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한 영혼을 바라보는 나의 영적 시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린 한 영혼, 한 영혼을 말씀으로, 인내로 섬긴다고 하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나는 M.Div를 고려하고 현장에서의 사역을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은 자연히 대학생들을 품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힘든 시절을 겪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당시만 해도 “캠퍼스”에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당시 이민 교회들의 관심이 그리 많지 않던 때였다. 모든 사역이 그렇겠지만 캠퍼스 사역 역시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일단은 자신의 은사나 적성을 바탕으로 그에 적절한 교회/단체등에서 사역하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개인적으로는 열정적이기 보다는 좀 차분하고 사색적이기를 바라는 성향이 많기에 그런 색깔(?)을 가지고 사역하는 단체에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직접적으로 접하게 된 학생선교단체가 바로 IVF였다. 당시에 남가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의 남가주 지방회라는 이름으로 UCI, El Camino collge, Cal State in Long Beach, 그리고 UCLA에서 KIVF가 활동하고 있었다.

S 목사님으로 부터 접하게 된 존 스토트의 많은 책들이 내 신학적인 밭을 일구는데 일조했다면, 그 존 스토트가 활동했던 IVF와의 만남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요, 만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시 같은 대학원을 다니던 1.5세 가운데 T 형제와의 만남은 본격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연결된 계기였다. 그러나 캠퍼스 사역에 관심이 있다는 나의 말에 보인 T 형제의 첫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데(단 한 마디였다. “쉽지 않아요!”) 지금 돌아보면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이었는지 충분히 수긍이 간다.

캠퍼스 사역은 쉽사리 덤빌 수(?)있는 현장은 아니다. 너무 겁을 내고 두려워 뒤로 물러설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덥석 발을 담글 수 있는 곳도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나 ‘지속성’의 주제와 관련하여는 더욱 그렇다.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오랜 인내와 겸손이 필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처음 T 형제의 소개로 만난 지역대표간사님이었던 H 간사님과의 만남은 그 후로도 내가 캠퍼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배워 나가는데 있어서 좋은 토대를 놓기에 충분했다. 베테랑 간사님이었던 그 분의 경험과 간사 회의때마나 나누어 주던,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직접 수리하시면서 타시던 빨간 니산 센트라 안에서 나눠 주시던 귀한 말씀들이 생생하다.

지금 돌아보면 바로 그 세사람, S 목사님, T 형제, 그리고 H 간사님과의 만남은 큰 축복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캠퍼스를 마음에 품으며 기도하는 수많은 미래의 동역자들, 혹은 캠퍼스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동역자들, 특히나 한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속에서 캠퍼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동역자들에게는 먼저 자신의 부족함과 훈련받아야 할 부분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것을 채워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눈을 부릅뜨고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간청하고 도움을 요청해 보기를 바란다. 

그것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처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등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첫걸음이 됨을 믿는다.  

[안상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서…

eKOSTA로 부터 정기적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한참이 지났다. 이제는 마감의 기한도 한참 넘어버린, 그래서 eKOSTA도 포기한 지금에야 글을 올리면 좀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부탁받은 캠퍼스 사역을 글로 옮겨보려 한다. 워낙 글재주도 없고, 사역도 특별한 것이 없는지라 그냥 내가 사역을 시작한 때부터 있었던 일들을 기억나는대로 적어보려 한다. 그래서 혹여나 캠퍼스 사역의 현장에 있는, 아니면 캠퍼스 사역을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에게 조금이나마 서로 공감하고 격려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가족은 내가 국민학교(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 6학년때 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6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겨울 방학에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내게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 특별한 경험을 더욱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처음 간 교회 수련회였다. 그 당시 가장 컸던, 그리고 유명했던 금식 기도원에서의 수련회는 내게 충격이었고 늘 선하게만 보이던 교회 여자 선생님의 울부짖던 통곡과 회개의 기도는 내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으며 나로 하여금 두려움 반, 기대반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3개의 다른 교회를 다녔다.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두번째 교회로는 어떤 이유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고 두번째 교회에서 세번째 교회로는 아시는 친척이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을 하시는 바람에 가까이 사는 친척된 도리를 하느라 옮겼었다.

세 교회 모두 소위 동네 교회들이었기에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의 과정들을 거칠 수 있었고 또 친척이 담임 목사로 계시던 교회에서는 개척교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고등부 회장도 하면서 마치 신앙이 탄탄한 아이처럼 그렇게 착각하며 교회 생활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님의 큰 딸이던 누나는 당시 대학 4학년으로 CCC 멤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누나 덕분에 CCC의 행사에도 참석하며(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나름 신앙을 ‘키워’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나 아주 이원론적인 삶을 살았는데(물론 그때는 그런 용어조차도 몰랐지만) 신앙생활이란 주일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당시 많은 고등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소한 일탈행위를 일삼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전기에서 믿었던 대학에 떨어지고 후기를 가야하나,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부모님이 제안하신 신학대학은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에(물론 지금은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지만..^^) 입학을 하고야 말았다.

내키지 않은 공부를 하려니 결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당시에는 당구장과 술집이 학교보다도 더 친숙한 곳이었고 신앙이 자라기는 커녕 요즘 용어로 Silent Exodus(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에 빗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졸업과 동시에 교회/신앙도 조용히 떠난다는 것을 표현한 용어)의 무리에 끼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생이라는 내 겉모습은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 주일학교 총무, 성가대원이라는 자리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나 역시 부모님의 입장,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교회를 다녔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참을 쓰느냐 하면 당시에 내가 다녔던 교회들, 혹은 나와 같은 신앙의 여정을 겪은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신앙적으로 많이 아프고 고민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아니 신앙을 넘어서서 인생이란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이 많았는데 그 질문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가이드해 줄 사람을 찾질 못했다. 내가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그래서 방황하면서 대학부 모임에 거의 나가질 않았는데도 중학교때부터 알아오던 교회 선배들, 대학부 전도사님들/목사님들은 왜 내게 대학부 모임에 나오지 않는지, 혹은 따로 만나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캠퍼스 사역을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분명 캠퍼스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원래 길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찾기가 힘든 법이다.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누군가 ‘내가 그 쪽으로 이미 가봤는데 아니더라. 이 쪽으로 한번 가봐’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경험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신앙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몇 마디 어줍잖게 알고 있었던 신앙지식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대학생때의 나처럼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 속이라도 털어놓으면 그걸로 시원하겠는데 그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조용히 울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작은 바램을 가지고 캠퍼스 사역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