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형]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참된 제자의 삶을 살수 있습니까


참된 제자란 아주 쉬운 개념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산상수훈의 8복에서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이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형성됩니다. 복의 개념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수 있도록 여건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여건들이 주어질때 다음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고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나열하고 계십니다.


“… the poor in spirit, …those who mourn, …the meek,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the merciful, …the pure in heart, …the peacemakers,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NIV)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태는 일시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이나,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해 잠시 마음이 겸손해지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과 연결이 될 때,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려 연결될 때, 즉 원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될 때에만 체험되어질 수 있는 상태입니다. 가난할 수 밖에 없고, 또 애통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재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고 비뚤어진 마음과 왜곡된 세상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입니다. 또 무서운 욕심과 야심 속에서 살고있는 잘못된 사람들의 핍박과 탈취에 선과 정의로 대항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천국의 소유자들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고 바로 복 받은 자들 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같이 제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쉬우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원인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 시점에서 제자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는 알지만 실천하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회피하여 첫 번째 문제로 다시 되돌아가 버립니다. “이해하지 못했다”라는 생각 뒤에 숨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단계”에 까지 갈 때에만 비로소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형성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실천 없이는 위에서 언급한 8복의 마음상태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변화하려면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그다음 순종이 이루어 져야 하는데 순종은 곧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운 방법을 택합니다. 즉 제자의 삶을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것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간혹 눈에 띄어도 참된 제자로서 세상에서 굳건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만나 볼 수가 없습니다.


실천하는 삶은 각 개인이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삶 입니다. 구체적 실천은 여러 가지로 표현될수 있으나 다음과 같은 2가지 공통점을 항상 내포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즉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일제자 삼는 일 입니다.


1.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닮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능동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마5:13-16). 수동적으로 겁에 질려 악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사랑과 정의로 악을 맞서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혹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이를 능동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데는, 즉 소금과 빛의 역할을 못하는 데는 3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ㄱ. 세상의 핍박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와 정직, 순결과 자비를 따라 생활할 때 세상에서 손해를 보고, 혹시 이런 우리들의 행위가 다른 사람들의 이권에 부딪치게 될 때는 가책 없는 핍박이 가해져 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증거가 저항을 받은 것도 바로 종교적 문제보다는 이런 세상적 이권의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입니다. 마6:25 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고 하시지만 결국 우리들을 제자의 삶에서 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은 바로 세상에서의 “상대적” 생존 문제입니다.


ㄷ. 세상에 대한 욕심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지만 (마6:19-24)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열심히 제자의 길을 가다가도 친구중 누구 하나가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뒷걸음질하는 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제자의 삶을 살려면 위의 세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곧 두려움, 염려, 그리고 욕심 입니다.


2. 제자 삼는 일은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고 또 제자를 양육하도록 돕는 일 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게 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듯이 우리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제자 삼는 일 보다는 종교적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의 임무/의무를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십니다.


ㄱ. 참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고 순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세상적 복을 받기 위하여 계명은 지키려고 노력하나 참된 순종은 하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20)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말씀의 순종은 자신이 종교행위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행위가 아니고 자기가 예수님처럼 되고 다른 사람도 예수님처럼 되도록 도와주는 삶, 즉 제자 삼는 일 입니다.


ㄴ. 인간 앞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종교적 행위를 합니다. (마6:1-7)에서 언급하고 계신 것처럼 구제, 기도, 금식까지도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하여 행합니다.


ㄷ.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무시하고 (마5:22) 이웃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생각합니다. 즉 사람을 “정욕”의 대상으로 봅니다. 악한 자까지도 대적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시지만 (마5:44) 실질적으로 자신의 이권이 개입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열심히 봉사하며 안주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양육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참된 말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종교생활로부터 자유해야 하고, 사람의 평가에서 자유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제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로 합니다. 제자의 삶은 쉽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마7:14) 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르시기 때문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참된 제자, 즉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면서 생기게 되는 마음입니다.


[이일형]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단순한 “들러리”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면
우리는 단순한 “들러리”입니까?


성경은 (예: 이사야 43:7절, 골로새서1:16)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어느 정도 윤택한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크게 거침돌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수월함이 이런 사실을 크게 문제로 삼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인생이 힘들거나 특정한 목적이나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됩니다.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현존의 고통과 이에 따른 노력과 인내가 결국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한 들러리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연히 생겼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자체가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를 부여해 주기 때문 입니다. 이런 양면성에 자신이 어느쪽에 속하든지 관계없이 위의 질문에 대한 올바를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1)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2) 자신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1.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


인간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가치가 부여됩니다. 그러나 현존 그 자체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 용도에 의하여 가치가 부여됩니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피조물의 용도는 인간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모든 창조물 위에 창조하셨고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하나님이 결정하셔야 하는 인간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 결정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잘못된 자아상을 심어 줍니다. 우리는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에 대한 가치부여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인 인간의 가치부여까지 침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도를 얼마만큼 충족시키느냐의 기준이 아닌 인간 자신들의 용도의 가치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즉 능력 없이 세상을 가난하게 살기 위하여 창조 받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열심히” 살았다면 하나님께는 A 학점의 가치를 부여받게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가치기준으로 그런 사람에게 F 학점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A 학점의 가치를 부여받은 사람이 사람에 의하여 F학점의 가치로 대우를 받아 스스로 F학점의 가치를 가진자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간이 세상의 기준으로 이웃을 판단하며 그렇게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5:22; 약4:11-12).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주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어지는, 독립적 가치의 역량이 없는, 존재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사실이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자신이 타인에 자신을 억지로 높이려는 노력없이 하나님으로 부터 가치를 부여받게 되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교만한자, 자기 중심적인 사람들에게는 큰 거침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기 힘듦니다.


2.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 이해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을 살펴볼때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ㄱ.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활동하게 하셨습니다.무엇보다도 바로 이 선택권의 최고의 표현은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ㄴ. 하나님은 인간을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시편8편에세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합니다. 즉 존귀한 존재로서 비천하게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고 시기하지 않는, 자신의 본능에 사로잡힌 동물과 같이 않게, 존귀하게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께서 권고하신다고 하십니다. 즉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시고 방문하신다는 뜻입니다.


ㄷ. 우리의 뒤를 쫓아오셔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루셨습니다. 바로 타락한 인간의 육신의 모습까지 (요1:14) 우리를 쫓아 오셨습니다. 우리의 차원까지 낮아지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바꾸셨습니다 (요3:16).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시는 어떤 “신”의 모습과는 도저히 일치될 수 없는 행위입니다.


ㄹ. 영원한 삶을 예비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접적인 영역의 가장 깊은 곳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태양이 필요 없음은 하나님 스스로가 태양이 되시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계21:23). 태양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가능케 하는 Framework 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이 이 Framework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자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해 질 때, 인간이 원래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와 같이 회복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떠한 인류의 창조에 대한 이유도 그가 인간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합리화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식을 낳지만 일단 낳고 나면 자식을 위하여 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려고 생각하시는 그 순간부터 인간과 사랑에 빠지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은 바로 인간이 자신과 같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기준으로 도저히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예술품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까지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기울였을 정성과 섬세함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 우리의 눈, 눈매, 손, 손톱하나 하나 까지 정성 드려 창조하신 예술품입니다 (엡2:10). 이런 예술품을 우리의 타락한 가치관과 용도에 의하여 계속 평가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외모, 능력, 그리고 한 사람을 둘러쌓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한 사람을 대하고 속으로 판단하는 행위는 무서운 죄 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이러한 기준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한다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뜻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뜻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우주 한 복판에 세워진 하나님의 예술품, 즉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회복될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일형] 자유의지와 예정론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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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와 예정론의 대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우리의 인식의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크게 두 가지 장벽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로 “마음의 우둔함”입니다. 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원죄에 가려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또한 구원의 진리를 받아들인 자들에게는 죄성에 이끌려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거나 감소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진리에 대한 명암(brightness) 을 감지할 수 있는 인식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들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자의 경우 이 감지 능력은 전적으로 마음의 순수성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의하여 결정되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생각의 폭이 좁은” 결과입니다. “생각의 폭”은 어떤 현상의 넓이와 깊이를 보는 능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생각의 넓이”는 한 현상의 원인에 대한 이해와 또 그 현상의 파장에 대한 이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의 깊이”란 그 현상을 원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의 폭은 세상적 공부를 통해서만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관찰력과 많은 생각/묵상을 통하여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넘어설 때야 비로소 진리를 진리로 볼 수 있게 되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의 폭을 확장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외부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이는 결국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자 하는 끊임 없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 즉 묵상과 기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고정관념이 너무 깊게, 또 오래 간직되어질 때 점점 더 생각의 폭이 제한을 받게 됩니다.


진리는 유일하며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진리가 여럿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의 마음의 우둔함과 생각의 폭의 차이 때문에 성경을 여러 가지로 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이라고 해서 꼭 진리에 더 가까워지거나 생각의 폭이 넓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생각 없이 사상의 유행을 따라가는 자들의 생각을 진보적인 생각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릴 때 일찍 받아들여 자신의 생각이 형성되는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며 습득하는 것이 한 사람의 생각이 올바로 정립되는데 가장 귀중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입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동물들의 이름을 물어보신 하나님의 모습은 아담과 참된 인격적 교제를 원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가 궁금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인격적 교제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미리 정해 놓은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능케 하는 동시에 타락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모든 구원 얻을 자들을 “예정”해 두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9절-30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구원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을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의 표현인 “예정론”과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인정해야 할 사실은 위 두 가지 가르침이 다 “진리”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잠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경은 자유의지와 예정론 두 가지를 다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지 않게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의 폭”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생각이 시간에 대하여 자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모든 것이 가능하신 분이십니다. 시간에 대하여 논하기 전에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모든 것, 모든 상황을 활용하십니다.


Optimum Combination of Sequences of Human Decisions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시간에 구속받으며 계속되는 흐름으로 보지 않고 “짧은 토막의 시간들의 종합체”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짧은 토막의 시간들 안에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을 한다고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자유의지의 온전한 표현을 위해서는 각 토막까지 이르는 모든 과거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토막의 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모든 토막 안에 있는 인간의 지식이 동시에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한 인생의 토막 토막이 이와 같이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토막도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됩니다. 바로 이런 토막의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외부적 요소의 자극을 최대한 가하므로 그 토막의 시간의 종합체인 한 인간이 매 토막마다 올바른 판단하기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모든 combination 이후 가장 최고의 combination이 결정될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역사로 굳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외부적 가능한 방법들과 토막들의 최고의 combination 을 통해서도 자유의지에 의한 결정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도록 예정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굳어진 역사의 토막 토막을 연결하여 통과하는 “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대한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하에 “예정된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전도서 11장9절에서 청년들에게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모든 일을 하되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판단은 올바른 이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가 심판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매 순간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달려 있고 바로 그 결정에 따르는 행동에 의하여 우리가 심판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매 토막 토막마다 긴장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역사로 굳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일형] 청년시절에 갖기 쉬운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캠퍼스 사역 Q&A


청년시절에 갖기 쉬운 우상들은 무엇입니까?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하여 죄를 짖는 인간과 그 죄를 사하고 거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노력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 안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때 비로소 평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평화란 타락 이전의 창조질서와 일치되는 상태로서, 이에는 stability와 harmony의 두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즉 모든 피조물과 자신의 관계가 원래의 창조질서대로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조화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아무 양심의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온전한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신이며 그 결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게 되어 창조질서와의 일치가 파괴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우상숭배는 바로 절단된 하나님과 그로 말미암아 파괴된 자연과의 관계를 인위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 먼저 있어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먼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상의 그늘을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타락한 모습의 도피처로 또 창조질서와의 관계파기에 대한 대안으로 사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우상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의 성향(orientation)과 또는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에 대한 문제를 4가지로 요약한 부문이 에스겔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언약을 받은 백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서 행하는 일들은 마치 기독 청년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면서 세상 속에 빠져 사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고전6:19). 그리고 교회는 거룩한 작은 성전들이 모인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 나오는 환상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적용될수 있는 말씀입니다.


1. 달콤한 세상의 보상들


첫 번째 죄는 성전 북쪽 문 앞에 서 있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시키는 이 우상은 마치 하나님의 성전에 대항하여 직접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듯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리에 떳떳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세상을 하나님과 동등한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특히 성전 앞에 서 있는 우상을 우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주로 무의식 가운데서 우리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스스로 의식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하나님이 가장 중요하고 공부와 직장생활을 하나님께 대한 예배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실질적 동기(motivation)는 세상이 줄 수 있는 보상에 대한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공부에 실패를 하거나 직장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이 비관하며 좌절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공하면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이 교만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깊숙이 그리고 떳떳이 자리잡고 있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질투하신다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2. 불완전 하지만 눈에 보이는 해결책


두 번째 죄는 성전의 뜰 안에 있는 비밀공간에서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려놓고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고 있는 향로를 각기 손에 든 칠십인 장로들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위의 말씀은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 의식주 문제에 대한 불안과 자신들의 형편 (바벨론의 포로)에 대한 절망에서부터 유발되는 행위에 대한 묘사입니다. 손에 든 향로의 구름 같은 향연은 그들의 깊은 종교적 성향을 표현해 줍니다. 삶에 다가오는 무서운 풍파를 대하며, 또 미래 진로의 문제와 현재 대하고 있는 힘든 공부를 직면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보다는 종교적 행위로서 도움을 받으려는 인간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이는 마치 불공을 드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참된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을 찾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마치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면 해결될 것으로 여기는 도피행위와도 같습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종교적 성향도 행위도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근거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사랑)에 대한 절대적, 자신의 목숨을 건, 신뢰입니다.


3. 실제크기 보다 크게 보이는 세상의 아픔들


세 번째 죄는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의 입구에 앉아 있는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곡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울고 있음은 그들의 슬픔의 원인과 또한 그들의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 근원이 하나님과 동떨어져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


위의 말씀은 가족을 형성하고 번식하는 가운데 생기는 여러 가지 여인들의 슬픔에 관한 문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담무스의 부재로 인한 슬픔은 (i) 사랑의 실패(실연 당함)에서 오는 여인들(혹은 형제들)의 아픔, (ii) 결혼한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는 괴로움, (iii) 가정 파괴로 말미암은 상처, 그리고 (iv) 세상이 주는 향락에 대한 그리움 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첫 번째 세 가지 슬픔이란 곧 ‘인생의 고뇌’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 슬픔의 해결책로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또한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절망적 상태에서 그 아픔이 너무 커서 고침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과연 이 깊은 곳까지 미칠 수 있을까 의심하는 행위입니다. 네 번째의 경우는 삐뚤어진 마음의 성향 때문에 세상적 향락에 관한 그리움입니다. 이 또한 고침을 받아야 하는 죄 입니다.


4. 잘못된 곳에 투자하는 각자의 소망


네 번째 죄는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 오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떠오르는 태양)에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들이 강포로 그 땅에 채우며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고 있습니다.


위의 말씀은 종교 지도자들이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빛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태양은 열과 빛을 지구에 제공함으로 생태계 유지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태양은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떠오르는 태양은 새로 시작되는 권력의 중심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이런 행위는 (i) 세상에서 권력 있는 사람들과 밀착하거나 혹은 장래가 유망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ii) 교회의 (눈에 보이는) 양적 부흥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참된 목적과 그 수단이 뒤바뀐 상태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논문을 쓰는 학생들에게 하나님보다는 지도교수가 더 중요하고 크게 보이는 일,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상사가 하나님보다 더 능력있어 보이는 일들이 다 그 예들입니다. 젊어서부터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인맥을 만드는 일에 주력하는 행위도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타인을 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자신의 중요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 청년의 우상으로 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문제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삶의 구석구석에서 인정하고 신뢰하지 않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일 입니다.


Let us acknowledge the LORD;
let us press on to acknowledge him.
As surely as the sun rises, he will appear;
he will come to us like the winter rains, like the spring rains that water the earth. (Hos 6:3)


[이일형]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캠퍼스 사역 Q&A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신명기8: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을 낮추시고 굶주리게 한 후 만나를 먹게 하신 이유를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가르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보기 위해서 중요한 필요 조건인 것 같습니다. 낮아지고 굶주릴 때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 결여되기 때문에 그때 비로소 전혀 의식하지 못하던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시 여기던 일들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세상이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알게(믿게) 됩니다.


먼저 생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명은 피조물에게 있어서는 창조의 틀(framework) 안에서만이 설명될 수 있는 개념 입니다. 우리가 현존하고 있는 창조의 틀 안에서 원래 창조될 때 define된 기능을 발휘할 때 “생명이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은 원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인/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그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1:30; 2:7).


모든 생명체는 미리 규정된 범위 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사자는 하늘을 날수 없고 참새는 얼룩말을 잡아 먹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하나님께서 식물과 동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define) 하셨다고 설명하심으로 각각 창조 안에서의 주어진 활동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창1장).


생명이 창조의 틀 안에서 설명될 수 있듯이 생명의 유지도 창조의 틀에 의존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창조 안에서 음식을 섭취하고 신진대사를 함으로 생명을 유지합니다. 창조의 틀에서부터 자신에게 필요한 물질을 섭취하며 생존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설명하면서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를 만드시고, 기본 틀을 잡으시고 (이사야48:13) 마지막으로 그 틀 안에서 생명체들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1장). 이는 생명체가 창조 안에서만 존재하는 피조물의 제한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욥 38장).


창조의 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 같은 말씀이 모든 생명체의 생명을 공급하는 근원입니다 (요1:3-4). 그러므로 창조의 틀은 바로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자 곧 말씀의 작품입니다. 창조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즉 의지의 표현으로 지금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1:3). 그러므로 모든 생명체는 바로 하나님의 뜻의 계속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호흡하고 의식이 있다는 자체로 생명이 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람의 창조의 틀에서의 그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역할을 이행할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서 단순하게 호흡하고 의식이 있어도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생명이 의미하는 것은 원래의 생명의 뜻이 아니라 육신의 세계 안에서 국한된 생명의 개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신의 세계 안에서 만의 생활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세계는 창조의 틀의 subset 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창조의 틀에 맞게 규정된 인간이 subset에 국한되어 생활할 경우 창조의 틀의 생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세계 안에 국한된 의식이 창조의 틀 안으로 팽창하고 그 창조의 틀에 의해 규정된 생활을 하게될 경우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창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히11:1).


창조의 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있을 때 참 생명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세계는 잠시 있다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에 육신이 제한을 받고 살고 있지만 참 생명을 얻은 사람은 육신의 세계가 없어질 때 같이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입니다. 서로의 교통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까지 전달되는 것입니다.


참 생명은 말씀을 통하여 유지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절했음으로 육신의 세계에 국한되어 버린 인간의 의식수준에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이 세상에 없어지고 사단이 제시해 주는 세상의 형상이 인간의 의식을 점령해 버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인간의 육신의 세계 안에 표현되셨습니다 (요1:14). 그리고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길” 이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을 가르쳐 주는 분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진리”, 즉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붙어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공급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자신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빌3:9). 즉 육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의 identity를 이해하고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창조의 틀 안에서 자신의 참된 identity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육신의 세계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육신의 음식을 계속 섭취함으로 우리의 육신을 계속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제 원래의 창조의 틀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whole being이 음식을 섭취해야 합니다. 바로 창조의 틀의 음식은 창조의 틀을 유지하는 근원이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한 번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창조의 틀에서의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의 놀라운 보화를 질그릇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후4:7).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함으로 매일 나아가야 합니다 (히4:16).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의식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의 영역이 눈에 보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틀에 의하여 지배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까지도 온전히 지배하여 온전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생명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일형]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캠퍼스 사역 Q&A


십일조는 꼭 지역 교회에 바쳐야 합니까?


모세의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왕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탈취한 재물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성경 안에서의 십일조의 역사는 시작됩니다(창14:18-24). 야곱도 역시 벧엘에서 돌단을 쌓으면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언약하는 장면을 창세기에서 볼수 있습니다(창28:20).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고대 문명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이런 믿음의 조상들의 행동을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에 관한 유래나 특히 제사와의 관계에 관한 측면에 대하여는 정경 외의 전문 지식이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성경에 나와 있는 십일조에 관한 내용 가운데 핵심적인 부문 몇 가지만 살펴 보겠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서야 비로소 십일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매년 십일조를 바치고, 그 바친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기쁨으로 먹으라고 하십니다 – 희생 제사 식사(신14:22-27). 동시에 함께 유하는 레위인들, 곧 기업을 따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잊지 말라고 하는데, 이런 행위는 하나님 경외함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매 3년마다 각 성에 십일조를 쌓아 두어 레위인이나 고아와 과부들과 같은, 자기 몫을 생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충만히 먹을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십니다(신14:28-29). 그러면서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머지 11개 지파가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를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민18:20-29) . 그것은 그들의 노동, 곧 하나님의 제사를 수행하는 일에 대한 대가입니다. 특히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매 3년마다 바쳐야 하는 십일조에 대하여만 언급하고 있습니다(신26:12-15).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함과 동시에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히스기아왕 때에 잠시나마 다시 부활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총 유동적 재산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대하31:2-8).


그런데 (위에서 보았듯이) 십일조에 관하여는 두 가지 불확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십일조를 매년 드리는 것인지, 매 3년마다 드리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히스기아왕 이후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느혜미야는 십일조를 매년 바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봅니다(느10:35-39). 반면 아모스는 3년에 한 번 드리는 십일조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암4:4). 둘째는 십일조의 용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십일조는 확실하게 하나님께 바친 이후 레위인, 과부, 고아 및 체류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십일조를 바친 사람까지도 자신의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러 그룹들 간의 분배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사무엘상에 보면 이스라엘 왕을 세울 경우 십일조가 왕에게 바쳐지게 될 것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삼상 8:15-2). 오늘날과 비교하면 이는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세금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레위인들에게 주게 되어 있던 십일조의 일부도 그들의 수고에 대한 대가, 즉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한 대가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개념입니다(고전 9:3-5). 십일조는 또한 생활의 부족함이 있는 자들을 위함임도 분명합니다. 단, 이때의 부족함이란 자신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한 부족함이 아닌 경우에만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으로 오면서 십일조의 참된 개념이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지는데, 이는 곧 청지기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타락한 유대교의 십일조에 대한 관행을 모델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지도층은,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관계 없이, 모든 것을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해석하고 집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의 중요성 그 자체를 강조하기 보다는 율법의 참된 의미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을 강조하시며 십일조를 그런 테두리 안에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23:23-24). 이는 말라기에서 말하는 온전한 십일조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말3:8-12). 십일조는 단순한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올바로 관리해야 하는 “책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그 물질의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맡겨지는 물질을 잘 관리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바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든 적든 자신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 쓰고 나머지는 주인의 것으로 계속 간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부를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제외한 후 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율법의 참된 의미를 상실한, 마치 타락한 유대교의 관례와 같은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도 다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쓰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과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의미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은 또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과 “이웃을 위하여”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십분의 일을 의미하기보다는 수익의 십분의 일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십일조가 매년 혹은 매 3년마다 바쳐져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복음이 전파되어 제자들이 양육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정의가 실현되고 진실이 인정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사회 안에서도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십일조를 사용한다는 뜻은 구약에서 수 차례 언급된 것처럼 자신의 능력의 부족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사람들(예를 들어 고아와 과부들)과 또 세상적으로 금전적 보수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목회자, 선교사, 선교단체의 간사 등)을 위하여 사용하라는 뜻 입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십일조를 교회에 내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결국 십일조를 사용할 가능성이 항상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지역 교회가 참된 교회의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십일조를 자신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바쳐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개인적으로 아는 선교사를 지원한다든지, 캠퍼스 간사나 주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든지, 아니면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도 다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도 기본적인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기본적 유지도 힘든 경우라면 우선적으로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역 교회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기본이 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지역 교회에 십일조를 드리고 그 지역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관계하지 않는다면 이는 무책임한 신앙관입니다. 교회는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의 지체 입니다.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가 각 “마디 마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