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록] 방황하는 소명

2010 KOSTA/USA 시카고 집회에서 있었던, 소명을 주제로 한 김동록 박사의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김동록 박사로부터 최근 근황과 세미나 후기를 들어 보았습니다.

제 소개부터 하죠. 이름은 김동록이구요, 시애틀에서 영상처리 소프트웨어 일을 하는 공돌이입니다. 신앙경력은 30년, 취미는 성경공부입니다. 미국 온 지는 20년 되구요. 89년에 University of Washington으로 전기공학을 공부하러 왔습니다. 코스타는 2003년부터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 들어가기 : 미래를 생각하다
비전과 소명은 같은가? 비전과 소명이란 말은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비전이나 환상은 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계시는 미래일 수도 있고, 현재일 수도 있고,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역사적인 사건, 구속적인 사건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의 역사를 이야기하십니다. 소명은 비전 이후에 일어나는 구체적인 삶의 양식에 대한 초청을 자신의 삶에 겸손하게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 환상(비전)을 보여주셨을 때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죠. 비전과 소명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주로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와 세계관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이 미래에 대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의 개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소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로 인해 타락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속, 다시 회복시킨다)은 세상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것인데 여기에서 기독교인의 소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심을 너무 기울이다 보니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라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다시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자는 맥락에서 소명을 생각할 때, 과연 이 세상이 마지막에 없어질 것인가, 마지막에 없어질 세상이라면 굳이 회복시킬 이유가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함께 정리해봅시다.
‘소록도에 가고싶다’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수용되어 치료를 받는 소록도에 한 집사님이 새벽기도를 가는 길에 취재기자가 질문을 합니다. “집사님, 무엇을 위해 기도를 합니까?” 저는 당연히 그분이 당신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떨어져 있는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기도요? 당연히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하지요”라는 대답이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장례를 치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제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 곁에서 살아야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 분들의 소망은 죽으면 천국가서 예수님하고 사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줄 수 있는 소망이 과연 이것 밖에 안되는가 하고 생각하니 답답해졌습니다. 이 이상한 천국은 과연 가는 곳인가인요?  ‘돌 아갈 내고향 하늘나라’,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죄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저 천국에서 날 기다리네’ 등 찬송가의 가사도 우리가 죽어서 가야 할 곳으로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등의 말들도 천국을 죽으면 가야하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우리 삶에서 끊어지고 내세에 이루어지는 불연속적인 모습으로 생각했을 때 심각한 오류들이 생깁니다. 기독교의 주된 목적이 과연 천국행일까요? 오히려, 기독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후에 영혼이 천국에 도달한다라는 것은 부활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죽었다는 의미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해봤을 때 부활은 육체적인 부활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얘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보다는 영지주의의 부활같은 느낌을 줍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종말이 결국은 창조질서의 궁극적인 소멸이겠습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렇게 좋아하셨던 하나님이신데, 이 세상을 소멸시키실 것일까요? 뭔가 맞지 않습니다. 이런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천국을 상상할 때 너무 영적인 내세를 상상하게 되고, 기독교의 가치관은 영적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원론적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극단적인 반대도 있습니다. 부활에 반대했던 사두개인 같은 경우, 너무나 현실적이 되어버려서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런 불연속성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근거없는 것이 됩니다. 저는 이 강의를 통해 미래에 대한, 천국에 대한 기초를 쌓고 소명으로 넘어가려 합니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땅’, ‘하늘과 땅의 겹침’ 등의 개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톰 라이트가 쓴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IVP)’를 참고해 주세요.
천국, 하나님 나라
‘천국’은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로 천국(Kingdom of Heaven)으로 다른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천국’과 ‘하나님 나라’는 다른 것 같지만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먼저 이해해 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린 지 400년이 되었고, 예루살렘도 지리적으로 회복되었지만, 그들이 갈구했던 통치권은 여전히 이방인들에게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그리스, 이집트, 앗수르, 로마를 거쳐 계속 이방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통치하심의 개념은 굉장히 중요한데, 성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출애굽때 구름기둥, 불기둥과 함께 성막 위에서 이스라엘이 봤던 하나님의 영광과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나타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포로기 이후에는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다시 나타날 여호와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으로 메시아가 오셔서 (마치 다윗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독립적인 왕권을 회복되고, 이방 나라가 징벌되고,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종말)은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로 오셔서 직접 통치하시고, 메시야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서 왕권을 회복하신다는 점에서는 하나님 나라에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마지막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라고 했던 마르다의 고백을 보면 마르다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불연속성이 있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면에서는 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는 천국’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그런 연속성을 어떤 방법으로 보여주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겉으로 보기엔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 사상(메시야의 도래,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심, 공의와 평화가 충만함)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와 비슷했지만,  사실 그 내용은 달랐습니다. 산상보훈에서처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성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시고 하나님 백성을 다시 규정(define)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셨을 때 벌어진 성전 청결사건은 상징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자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약에서도 많은 예언자들이 행위를 통해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겔 (1년 넘게 왼쪽, 오른쪽, 옆으로 누워서 쇠똥을 구워 먹어야 했음)과 에레미야(멍에를 메어야 했음)의 예를 통해서도 상징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전제사를 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징적으로 율법의 마침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만찬에서 제자들과 함께 성찬을 하시며 내 피와 살을 언급하시는 모습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define)것을 상징합니다. 성령을 받은 교회가 연약한 가운데 섬김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하나님 나라는 분명히 무력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심으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권세에 대적해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늘 세상의 방식과 달랐습니다. 에세네파는 은신했고, 바리새파는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종교적으로 몰입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꿈꿨지만,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셔서(병고침, 죄인과 함께 하심)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이나 헤롯당처럼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당국자들 (authority)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시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의도하였다기 보다는,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있는그대로 표현했을 때 이 세상 권세가 견딜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하셨습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열심당원과는 달리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세상 권세와 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 죄의 용서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 권세를 파함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할 수밖에 없는 ‘악’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악’을 해결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그 악을 눈 앞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도 사랑하셨고, 악을 악으로 대적하여 또 다른 악을 만드는 결박을 용서라는 은혜로 끊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적용해보면, 우리가 상대방을 용서하면 나와 상대방을 얽매고 있는 악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 부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기 직전에 마르다가 한 고백 (“마지막 날 부활때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처럼, 1세기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 메시아가 오실 때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에 대해서도 연속성(육체의 부활)과 불연속성(육체의 변화)의 개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부활이 역사의 마지막에 일어날 거라고 생각을 했고, 예수님은 역사의 중간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날 (소멸이 아닌 마지막날입니다)에 일어나리라고 믿었던 부활이 그 중간에 예수라는 사람에게 일어났음을 다메섹 도상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민하며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already but not yet). 앞당겨진/이미 시작된 종말이었습니다. 유대교배경을 가진 바울에게 있어서 종말은 결코 단절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날 이뤄질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시작한 것(Here and now)을 의미했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는 연속적인 것입니다. 역사의 진행은 계속되지만 (연속성), 메시아는 오셨고 (세상 권세를 이기셨고), 현재는 궁극적인 종말, 하나님 나라의 도래 (비연속성)를 향해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빈무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무덤이 비어 있었는데, 이것은 실제로 육체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영으로만 부활하셨으면 죽음을 완전히 이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인 중에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는 장면이나, 마지막에 하늘로 올라가신 장면에서 예수님이 가지신 transphysical한 모습이 보이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에서는 비연속성이 보입니다. 여기에서 하늘과 땅에 대한 유대인의 개념을 알아보겠습니다. 유대교/기독교에서 얘기하는 하늘과 땅은 범신론(하늘과 땅은 처음부터 하나고 모든 물질/사물에 신이 있다)과 이신론(하늘과 땅은 별개고 창조주는 만들고 난 후 관심없이 내버려 둔다)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과 다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같이 존재하는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나타나셔서 이야기하시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상징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야곱의 사다리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이 땅과 접해있고 존재하는 하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성막에 나타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고, 율법을 주신 일 가운데서 우리는 하늘과 땅 모두에 존재하시며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늘과 땅은 하나가 됩니다. 구약의 모델로서 ‘성전’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그 하나됨의 상징입니다. 신약 전반에 나타나는 ‘교회와 성령의 거하심’이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내려온다’는 표현은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물리적으로 이 땅을 비우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새로운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과 땅이 여전히 맞물려 겹쳐있고, 그분이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올라가신 예수님을 대신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오류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이원론(현재의 시대와 다시올 시대의 구분)이지, 존재론적 이원론 (악한 땅과 선한 천국)이 아닙니다. 영광된 미래를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롬 8:18, 빌립보서3:21). 영광된 미래를 현재에 옮겨 사는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1장). 기독교에서의 종말은 이 세상의 페기나 소멸이 아니라 세상이 부패와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미래가 이런 연속성을 이야기 하는 거라면, 우리는 현재 처한 상황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이 새로운 미래 세계를 앞당기는 일에 참여할 강한 동기을 부여받게 됩니다.
2. 방황하는 소명
우리가 들어온 소명에 관한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현재에 뿌리박고 연속성이 결여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청년집회에서 “비전/소명을 가지라”고 강조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소명을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큰 꿈을 꾸라”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공부 잘 해서 교수, 의사, 판사, 부자가 되야 한다는 목표주도형(goal-driven) 인생이 우리 삶의 표준이 되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이고 성경적으로 장려된 삶이라고 배워왔습니다. 탁월하거나 튀어야 하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목적이며 성경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하라, 충성하라는 이야기는 성경에 있지만, 탁월함은 내가 삶에 충성을 할 때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부산물일 뿐입니다. 세상 가치관에 물든 우리는 탁월하지 않을때 우리 자신을 실패한 인생이라고 간주합니다. 마냥 성실한 삶이 성경적인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하시는가 하는 관점에서 나 자신을 드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성실함을 성경은 원합니다. 또, 비전으로 포장한 무기력함도 연속성이 결여된 모습입니다. “저는 아직 비전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함부로 비전을 가지면 야망이 될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저에게 비전을 주실 때까지 저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는 교회 청년부나 교회 community에 참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기력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비전으로 포장한 변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좀 민감한 주제인데, 학문, 직업이 소명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보통 학문, 직업을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은 소명이다’라고 말한 캘빈 이후로 이 생각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업이 소명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직업이든지 우리가 열심히 하면 소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어그러진 세상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직업에 대한 관점은 원래 창조질서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신성한 축복이었습니다. 작은 일을 축복과 은혜로 여기고 충성히 해야하는 근거와 의미를 제공해주기도 했지만, 죄로 왜곡된 세상에서 노동과 일이 필연적으로 세상권세와 접촉하게 될 때 더 이상 낭만적으로 해석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직업이 선택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닌데다 우리의 생존문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직업과 진로를 선택할 때 취향, 성품, 적성을 따지게 될 선택의 여유가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그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하신다면 큰 축복을 받은 거지요). 제 생각에는, 직업이 주는 세상권세와의 struggle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을 살아가는 가에 소명이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질문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께서 나 대신 벌을 받으셨기 때문 (대속설)이라는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온 세상을 구출하시고 획복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반항으로 생긴 타락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반항하는 인간을 노예로 삼아 계속 타락된 상태로 있게 하는 악의 세력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관점이 있습니다. 직업이 소명이라는 관점도 마찬가지로, 성실하게 일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어그러진 창조세계를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으로, 이 세상권세를 길들이는 현장으로 직업을 삼았을 때 직업이 소명이 됩니다.
3. 현재적 소명
절망적인 상황들이 있습니다. 쳇바퀴 같이 돌아가는 일상, 경제적 육체적인 어려움, 실연,어려운 학업,실업의 문제 등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성경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하루만 지나면 없어지는 만나가 있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가 왜 하루면 없어질까요? 하나님께서 저장하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예수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주기도문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는 분명 미래에 대한 걱정입니다. 반면 주기도문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날그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secure 해주시기를 간구하라는 현재의 삶에 대한 기도입니다. 현재의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제 1 계명입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이미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이미 주어진 계명을 소명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 특별한(specific) 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specific 한 것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명을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계명을 현재적 소명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 상에서 보면 왜 현재가 중요한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현재 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나의 최선이 아닌 하나님의 최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온 맘과 뜻을 다해 충성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의적으로 이 사실을 외면하면서 우리 소명을 다른 곳에서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찾으려고 애를 씁니다. 현재적 소명을 놔 두고, 미래적인 것을 그릇되게 찾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해왔던 소명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위에서 말씀드렸던 하나님나라의 현재성, 연속성을 무시한 뭔가 왜곡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성경이 견지하는 미래적 소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방향이나 진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는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미래적 소명을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경은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소망’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대신에 현재적 소명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으로의 초청’이 미래적 소명입니다. 저와 성경공부를 하셨던 분이 잘 지적해 주셨해 주셨던 바울의 예를 들겠습니다. 바울의 ‘로마도 보아야 하니라’는 비전이 언제 생겨났겠습니까? 1차 전도여행 전부터 생겼겠습니까?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충성되게 수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바울의 눈을 열어 그런 비전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성경에서는 미래에 대해 믿음으로 걸어가라(walk by faith)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는 백성은 방자하거니와’라는 잠언의 구절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비전, 소명이 있어야지”라고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방자한 이유는 현재적 소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엘서에는 ‘너의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늙은이는 꿈을 꾸며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꿈을 꾸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요엘 2:15의 ‘회개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재적 소명이 바로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할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인 현재성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의 소명도 결코 현재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냥 공허하게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적 소명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새 피조물’입 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시고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현재에 살도록 초청을 받은 것입니다. 죄사함을 누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그리고 이미 다가온 종말을 현재에 앞당겨주신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불연속성을 예견하는 연속성을 가진다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 현재적 소명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출 3:5)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 불이 붙었지만 타지않는 떨기나무를 보고 가까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수시로 옮겨다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곳에 4-5년 이상 머무르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이동이 많은 삶을 살아나갈 때 나그네의 삶을 사는 양 스스로를 비견합니다. 나그네의 삶이 성경적인 용어라서 그 표현이 멋있을지 몰라도, 대부분 우리는 헌신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변명하기 위해 나그네의 삶이라고 하지 않는지요? 직장에서 임시고용인들은 헌신도가 떨어집니다 (요즘이야 직장 잡기가 힘드니까 제 비유가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는 그런 임시 고용인의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선 땅에서 거룩함을 찾아야 합니다. 나그네라는 표현은 헌신하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변명의 용도가 아니라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그 안전을 의탁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재를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루지 않는 것이 현재적 소명의 요소입니다.
또 현재적 소명에서 ‘창조적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선행을 하거나 남을 보살피는 행위는 우리로 하여금 보람을 느끼게 하고 그것은 우리 삶에 중요한 활력소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즉 남을 도와준다든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어떤 보람을 느낌으로써 내 삶의 의미를 갖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 행위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식입니다. 아무 행위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어떻겠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유대인 포로캠프에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어떤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내가 소록도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면 어떻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요. 이때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아주 소박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것 자체로 내 삶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출 3:5)를 다시 생각해 보면, 창조성을 가진 현재적 소명은 내가 선 곳에서 거룩함을 찾는 것입니다. 아침에 반복하는 행위들(세수,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는 것, 화분에 물을 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삶이 피조세계에 담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현재의 삶에 있는 거룩함을 찾는 삶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의 삶에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어항의 물고기에게 밥을 주며 피조세계를 다스리라 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그 깨끗한 물을 써서 세수할 수 있음이 감사하고, 또 그 투명한 물이 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갈 때 느끼는 그 신선함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느낍니다 (뭐 매일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자주 그렇답니다). 가령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경우, 아이들처럼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좋고, 가르칠 때 교사로서 더 배우는 것이 있어서 좋다고 흔히들 말씀하시지만, 어떻게 하면 주일학교를 더 좋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궁리를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거룩한 행위 안에 우리가 같이 들어간다면 놀라운 창조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재적 소명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적 제자의 삶’. 제자의 삶은 곧 성품을 연습하고, 용서를 선포하며 사는 삶, 세상 권세를 대적하는 삶입니다. 성품의 연습에 대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은사로서의 성품이 계발되지 않은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밀리고 밀려서 직장, 소명을 얘기할 때마다 좋은 자리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하고 얘기하곤 하는데, 무엇이 된다는 것이 꼭 소명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소명은 어떤 사람이 된다는 것에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새포도주 비유에서 가죽부대가 견디지 못하고 터지듯이,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권세가 견디지 못해야 합니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가 보통 개인적인 소명으로 접근을 하는데, 공동체적인 (현재적)소명을 지향하며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소명공동체가 없으신 분은 소명공동체를 꿈꾸시고,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소명이 없다면 공동체가 공유하는 (현재적)소명을 기대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성품을 연습하고, 또 용서의 선포로 이 세상권세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이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교회를 향한 비전이었습니다.
4. 맺음
음유시인인 T.S. Elliot은 ‘The Rock’에서  “Where is the Life we have lost in living(우리가 사느라고 읽어버린 우리의 삶은 어디 있을까)?”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goal-driven 인생을 살고 탁월성을 추구해가면서 바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이제 우리가 높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같이 따라가야 하는지 우리 인생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 겠습니다.
“네가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에서 물론 여러가지 해석을 할 수 있겠지만, 불 붙어 타지 않는 떨기나무가 모세 자신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모세의 마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desire를 여전히 품고 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불러 내셨습니다. 신을 벗고 (상전에게 표하는 극도의 순종을 보여줌) 순종하는 모습으로 가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인도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 현재적 소명에 충성하는 가운데 기초가 다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KOSTA에서 김동록 박사를 만나보았습니다.  

코스타 이후의 강사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씨애틀 근처의 몇 군데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동지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코스타 전후로 잠시 쉬었던 만남과 교제를 다시 하면서 서로 돕고 좋은 아이디어를 내고 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지요. 제가 직접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또 최근에 달라스(시카고 코스타 4지역)에서 새로 시작하시는 성경공부가 있는데 그분들과 함께 교제할 수 있어서 제게도 무척 격려가 됩니다. 또 그동안 읽지 못했던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욕심만 많아서 그런지 진도가 나가질 않네요. 그동안 모르고 지냈던 성경의 진리를 하나라도 더 알고 (뭐 전하기까지 해야하겠지만) 싶은 욕심이 끝이 없어요.
강의에서 (시간상의 이유로, 혹은 다른 이유로)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곳에 나눠주세요.
복음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가지는 폭발적인 능력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힘들어요. 저희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말씀이 저희 잠재의식속에 내재되어 있어서 항상 기독교가 이세상 권력에 정면 대결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지요. 근데 만약 그 말씀이 헬라어 용법에 맞게  “내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 아니라”고 해석이 되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이 왜 그토록 자신과 하나님 나라가 너무 일찍 드러나는 것을 말렸을까요? 그저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으로만 포장되어 와전되기를 우려하셨다고 보기에는 미흡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드러났을 때 정치적 세력의 핍박이 너무 일찍 닥쳐오기를 우려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말씀을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면 그런 우려가 필요없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믿기로는,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짓누르는 권력과 가치관에 온 몸으로 정면 대적하면서도 오히려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핍박을 받아내시고 용서하심으로 그들의 속박을 끊어 버리시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내가” 어디로 갈까, “내가” 무엇을 할까라고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앞길에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그 왕되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새로운 가치관이 젊은 분들의 장래를 설계하는 기본 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시게 된 동기와 강의제목을 ‘방황하는 소명’이라고 정하게 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제목이 굉장히 attractive 합니다. 
사실은 저 자신이 방황했었거든요. 강의에서 이야기한 비전을 핑계한 무기력함은 제 모습이었습니다. 유학 온 동기나, 유학와서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지역사회, 교회, 이웃섬김에 대한 모든 일에 눈과 귀를 막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이라는 핑계로 10년을 보내었지요. 전혀 현재적이지 않았고 왜곡된 미래상을 가지고 있었어요. 한국으로 교수직을 받아서 금의환향하고 학교 캠퍼스에서 기독교 동아리 지도교수가 되어서 학생들 지도하는 그런 꿈을 꾸었지요. 꿈이 순진한 만큼 제 삶도 순진하리라 만큼 이기적이었지요. 연구실에 처박혀 정신없이 일하다가 어느날 번뜩 제 삶이 성경적인 소명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주변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조심스럽게 확인을 해보니 과연 제 생각이 비전이 아니었던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헤맨 것이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거의 대부분)  유학생이나 청년기독교인들이 같은 오류 안에서 인생을 고민하고 있더군요. 이런 강의를 하도록 해주신 것을 제가 허비한 것을 갚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특히 소명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요
소명이 전 생애를 통해 지속되어야 하는 엄청난 것이란 부담감을 내려놓으시면 좋겠습니다. 변할 수 있고 또 변해야하는 것일테니까요. 굳이 예를 들자면 마치 소명을 3-4년 전심을 다해 노력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그 무엇으로 생각하시는 정도로 봐도 되겠어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는 또 그때 가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고. 저는 그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예언자적인 상징을 통해 이 세상의 권세와 가치관(사단의 세력에 잡힌 권세)을 향하여 “너희 나라가 아니란다. 하나님나라가 이런 특질과 능력을 가지고 있단다”라고 하면서 세상권세를 길들여 가는 비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역을 하나하나 선포해 나가면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업들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정직함, 아무도 노래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해 나가는 작업들인데, 매주하는 작은 성경공부, 그리고 그 구성원에 대한 아무도 모르는 속타는 기도와 돌봄 등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지만 이를 행하는 나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이 늘 함께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권세와 가치관을 거스리기 떄문입니다. 우리의 앞길에 대한 고민이 이런 길을 걸어나가기 위함이라면 숨겨진 영광된 가치와 비밀스러운 기쁨이  있지 않겠습니까 (밭에 숨겨진 보화)?

인터뷰 – 김영훈 교수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김영훈 교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김영훈 교수는 1990년 부르심을 받고 거리 선교를 나섰으며2002년 Over-the-Rhine Living Water Church를 개척하였다. 2006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서울대와 University of Florida를 졸업하였으며, 1988년부터 University of Cincinnati의 교수로 재직중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시겠어요?
80년대 초에 유학을 나왔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물리학 난제를 풀겠다는 야망을 품고 1988년에 신시내티대학에 물리학과 교수로 갔습니다. 교수로 있을 때 어머니께서 신시내티로 오셨는데 교회를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침 집 바로 뒤에 있는 교회가 있어서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한국에 돌아가시기 전 마음의 소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일주일에 한 시간을 내어 교회에 함께 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가긴 했지만, 교회에 10분 늦게 갔다가 10분 일찍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아내와 함께 교회를 다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왜 교회에 나가야 하느냐고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아내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 기쁨이 있는데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때마침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였는데 아내는 부흥회 기간 동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믿지 않겠다고 담판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김홍도 목사님이 오셨는데 목사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로 들리고 않고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 인생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예수 이름을 부르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에 전 예수님의 이름을 외치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내 안의 모든 상처가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흑인지역에서 영혼 구원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일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말씀이 믿어지고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다 예뻐서 길가다가 그들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이후 기회가 되어 한 흑인 동네를 운전해서 들어갔는데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 흑인들을 보고. 그때 하나님이 이 목적이 있어서 미국땅에 나를 부르셨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역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요?
그들을 전도하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기도만 했습니다. 전도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폴이라는 동역자를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우리를 전혀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복형사인 줄 알고 몸을 수색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저희 아내들이 함께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사역이 잘 되었습니다. 우린 적어도 매주 토요일마다 전도를 나갔는데 그때 우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11년 동안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기도를 하면 비가 멈춰서 우리가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있나요?
지금 저흰 폴 부부와 함께 공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에겐 절제된 생활공간이 필요한데 청소하는법, 빨래하는 법, 음식 만드는 법, 아이 돌보는 것 그리고 돈 쓰는 것도 가르쳐야 합니다. 한 달에 20%를 준다고 해도 저축을 못 합니다. 그들은 5년 후를 보지 못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작년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셔서 중국인 인턴 1명과 백인 선교사 부부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올해 그 친구들이 떠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새로운 손길들을 보내 주실지 기대됩니다. 선교사들이 안식년 때 저희와 함께 1년 정도 함께 살며 섬기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저희 공동체에 치료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예배 드리고 기도하다 보면 많은 치료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공동체를 어떻게 돕고 있으며 재정은 어떻게 충당되는지요?
우리는 그들의 사정과 필요를 잘 압니다. 그래서 음식과 침대를 사주거나 병원에 데려가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돈을 주지는 않습니다. 빚을 진 느낌을 그들이 가지지 않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옥에 가면 우리가 보석금을 지불하기도 합니다. 재정적으로는 따로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직장을 그만두었지만 동역자 폴은 하버드 의대 교수로 10년을 있었고 좋은 조건으로 신시내티에 오게 되었습니다. 전 여전히 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코스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은?
9.11때 아내가 충격에 빠진 미국인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겠다고 미국교회를 갔습니다. 슬픔과 낙심에 빠진 그들을 보며 아내는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당신의 조상이 한국으로 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슬픔 가운데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 청년들이 눈을 떠서 한국을 넘어 멀리 All the Nation을 부유케 하는 비전을 품었으면 합니다. 우린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데 다양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갚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Calling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행하면 됩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며 의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 – 황병구 편집장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황병구 편집장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코스탄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전 올해로는 네 번째 시카고 코스타에 왔습니다. 지역교회 예배 사역에 대해서 두 번 강의했었고, 시간경영에 대한 강의는 2007년에 이어서 이번이 두번째네요. 현재 제가 하고있는 일은 비영리 컨설팅입니다. 조직, 경영, 재무 이런 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고, The Bright Foundation (한빛누리) 선교 재단의 실무책임자로 있습니다. 하나 추가하자면, 월간 복음과 상황의 편집 위원장도 겸하고 있습니다.
제어계측 공학을 전공하시고, 공연 연출, 컨퍼런스 운영, 이벤트 기획, 글쓰기, 노래 짓기, 프로듀서 일, 컨설팅 등 정말 많은 일을 해 오셨고, 흔히 말하는 career를 여러 번 바꾸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이런 결정들을 하셨는지요?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진로문제로 상담요청하는 분이 꽤 있었어요. 제가 롤모델이 되기에는 조금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이 되고 심지어는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진로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은데, 자기가 충분히 기도하고 계획한 대로 성실하게 하나님 뜻을 따라가는 케이스가 있는 반면, 저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도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할 것 같습니다. 전공과는 관계없는 첫 직업을 가졌었고, 코보의 사전조사에는 빠졌었지만, 한때는 노동조합 사무국장으로도 일했었는데요, 기독교인으로서 노동조합 사무국장 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지요? 제가 택했던 진로들은 대부분 저의 본성과 반하는 선택이었는데, 그것은 마음에 약간의 부담을 주신 바를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선택지를 주셨을 때, 이를테면 나의 본성에 반하는 선택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하는 부담으로 쉽지 않은 선택들을 반복해왔던 것 같습니다. 저의 케이스를 따라 하지는 마시고 그 정신을 존중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자주 바꾸는 게 능사가 아니고 긴 호흡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분들도 있어야겠고 나의 원함보다는 나의 본성에 이끌리기보다는 그 반대의 선택을 고려해서 기도해보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학문과 신앙의 통합 혹은 일과 신앙의 통합은 크리스천들이 끊임없이 고민하는 주제이고, 매일 당면하는 문제입니다. 본부장님의 이력을 보면, 정확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기독교 서클안에 계시다가 점점 비기독교 서클과의 접점을 넓혀 나가고 계시다는 느낌이 듭니다. 코스탄들의 대부분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career를 시작하고, 그 안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일과 신앙의 통합” 을 미리 고민하셨던 신앙의 선배로서 조언을 부탁합니다.
우리들의 일과 신앙을 통합하는 문제는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해보아야 하는 부분인데 그것은 마치 우리의 성화의 과정과 비슷하게 ‘늘 이루어가는 중’이라고 보는 것이 정직한 답변이 아닐까 합니다. 도성과 도성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볼 때, 인위적인 통합보다는 통역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성에 대해 다른 도성에 사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나님의 도성에 거하기만 한 사람들도 다른 도성에서 일하는 이들에 비해 언어체계, 사고체계, 인적관계망이 서로 달라서, 그 가교를 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bilingual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그들의 언어로 설명해주면 좋겠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나 궁금증들을 우리의 언어로 이해해 주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이를테면 교회생활을 하더라도 우리는 형제, 자매와 같은 우리만의 언어체계가 있는데, 비단 그런 것뿐만 아니라 인문학, 철학, 과학, 경영학적인 모든 언어에 있어서 우리의 가치를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도록 지평을 넓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신앙서적, 성경을 비롯한 인문학, 철학, 과학 서적 등 여러 서적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가 하는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반박하기 위해 자연과학과 사회적 진화론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처럼요. 기독교인이면서 철학자이신 한 교수님의 증언 속에서도, 어떤 이슈를 놓고 자신의 학생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질 때면 은근히 크리스천들의 논리가 빈약한데 특히 그들만의 리그에서만 통하는 언어로 논쟁을 벌일 때 안쓰러웠다고 하십니다. 우리 안에 감격과 선포가 있어야 하지만 전략적인 bilingual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시간관리에 대한 세미나를 맡으셨습니다. 90년대에 크리스천 사이에서, 시간관리라는 주제가 특히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세대가 바뀌었으니, 시간 관리를 말하는 context도 달라졌을 텐데요. 혹 차이가 있다면 시간관리의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세미나를 듣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세미나 소개도 함께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세미나를 처음 시작할 때 늘 참석자들에게 일종의 양해를 구합니다. 세미나 제목만 보고 낚여서 오신 분들은 힘드실지 모른다고요. ‘그리스도인들의 시간관리’라는 타이틀을 보고 ‘난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도 해야 하는데 한정된 시간에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오신 분들은 다 낚였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난 왜 이렇게 형제, 자매 돌보는 일에 시간을 많이 빼앗겨서 내 앞가림도 잘 못하나’ 또는 ‘남들처럼 꼼꼼하게 플래너를 정리하고 하는 건 내 체질이 아닌데’ 오히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분들은 약간의 해방감을 얻으실 수 있는 강의입니다. 90년대 이전 ‘7 habits’가 모든 사람의 표준이 될 때 우리에게는 일종의 자성이 필요했었습니다. ‘7 habits’는 귀한 가르침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추종하는 사람의 동기는 바로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앞서 갈까였는데 남들보다 앞서 가는 또 하나의 동기는 일종의 승리주의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겨야 한다, 승진해야 한다, 학위를 따도 좀 먼저 따자, 취업해도 고액연봉이 좋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목적과 동기에 있어서 약간의 윤색만 됐을 뿐 동일함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의 패러다임은 조금 달라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의에서 동기의 문제를 다룹니다. 왜 시간을 다루려고 하느냐는 거지요. 제 강의는 시간강의의 탈을 쓴 ‘제자도 강의’이고 자기계발을 빙자한 ‘자기 부인’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제가 관계중심 시간경영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은 시간관리는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생살이도 나홀로 인생살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의 시간관리에 있어서 인격적인 부분에 좋은 기록을 남기고, 인생을 가꾸어 나가는 내용을 책과 강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기꺼이 낚이실 분들만 오시길 바랍니다.
코스타의 지난 24년간의 동력을 꼽자면, 복음, 민족, 선교, 삶과 신앙의 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대에 코스타가 잃어서는 안 될 것과 바뀌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질문을 주셨네요.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을 이야기하자면, 코스타의 귀한 전통 중 하나가 대단히 자발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자발성이 신앙 선각자들의 기여도 있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시다는 유학생들의 자각과 젊은이들의 자기인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끌고 온 동력이나 에너지도 학생들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느새 코스타가, 우리가 가서 은혜 받고 공급을 받는 곳, 가서 기댈 곳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코스타 참석하시는 분들이, 코스타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라는 인식과 우리가 일구어나가야 할 다음 과제를 바로 우리가 직접 여쭈어야 한다는 사명감보다는 영양가 있는 연합수련회로 안착할 가능성이 있어서 조금 더 ‘젊은 세대들의 자발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40-50대 리더쉽들이 대외방향성 있는 정신과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20-30대의 목소리 또한 반영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잃어서는 안 될 것은 ‘빚진 마음’입니다. 유학할 수 있는 지적능력도 주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먼저 맛볼 수 있는 여건과 기회도 허락하시고 TOP까지는 아니더라도 저희가 적어도 중간리더쉽까지는 할 수 있는 목표와 능력을 주셨잖아요. 빚진 마음을 잃지 말고 혹 리더가 된다면 홍정길 목사님 말씀처럼 섬기는 리더쉽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두번째 세번째 포지션에 머물 수도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우리가 상위 2-5%권에 들지 않고 다른 95%의 삶과 비슷해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빚진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경쟁에서 이긴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유일하게 이어 줄 수 있는 사람들 역시 빚진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터뷰 – 서재석 대표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서재석 대표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서재석 편집장님, 오랜만에 코스타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코스탄들에게 하시는 일과 더불어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다섯 회 연속 코스타를 왔다가 7년 만에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IVP 와 복음과 상황에서 일하다가 2004년도부터는 Young2080 이라는 청년들을 돕는 단체에서 출판과 행정을 맡고 있습니다. 이번에 와서 그리스도인의 책읽기에 대해서 강의하고 또 여러 스태프들과 교제하고 참가자들과 대화하는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오랫동안 문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출판계를 지켜보시면서, 변화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지금 현재 한국의 출판시장, 특히 기독교 출판시장은 10년 넘는 장기 불황을 맞고 있어요. 기독교 인구가 줄어든 원인도 있지만 기독교 서적은 늘어가는데 출판은 부실한 상황입니다. 특히 한국교회의 청년들은 오랫동안 기독교 도서를 읽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오랜 생활을 해 왔는데, 필요한 기독교적 지성을 많이 쌓기 위해서는 책읽기와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 성장과 자기 훈련을 해 나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코스타에서 다양한 책들을 접하고 추천받고, 코스타 이후에는 그 책을 읽고 정리하고 또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 또는 소그룹에서 나누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던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포스트모던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사실 신앙적으로는 포스트모던시대를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포스트모던시대에 역시 중요한 것은 크리스천 베이식이 아닐까요? Q.T나 기도 또는 자기 훈련을 겸한 독서생활. 이런 것들로 크리스천 베이식을 든든히 하는 것이 역시 포스트모던시대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상황에서 편집장으로 일하셨습니다. 복음과 상황이 생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사회의 이슈들을 치열하며 고민하는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것 같습니다. 현재 상황은 물론 복음과 상황이 시작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다를 텐데요. 요즘 시대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도전은 무엇일까요? 이를 위해서 어떤 일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며, 기독교계가 그 일들을 어떻게 하면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온라인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양하게 자기 목소리를 표출하는 시대가 되다 보니, 잘 걸러지지 않은 채로 여러 의견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가운데에서 ‘복음과 상황’이라는 잡지는 15년이 넘도록 기독교 복음주의권의 사회참여라던지 또는 복음주의적인 생활과 활동을 많이 강조했는데 여전히 그럴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과거에 비해서 한국교회의 상황이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복음과 상황’ 같은 목소리를 내는 약간 중도적이면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잡지나 오피니언들이 필요한데, 청년들이 관심을 갖고 그런 분야의 좋은 필자로 개발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90년대 이후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점점 개인주의화 되고 물신주의로 나아가게 되면서 교회 안에서 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졌어요. 자신이 가진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주일예배 정도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그런 것은 굉장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특별히 코스탄들은 그런 경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섬김과 희생을 개발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25주년이 되어 코스타의 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 민족, 땅끝’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복음과 민족, 땅끝이라는 이슈에 코스타가 끼친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평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건설적인 비판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국 코스타의 25주년은 기념비적인 행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른들이 뒤에서 후원을 해주셨지만 이름도 빛도 없이 섬겨주신 간사님들과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특별히 코스타를 통해 은혜를 받고 자각한 분들이 후배들을 섬기는 이런 전통이라든지 정신은 굉장히 놀랍습니다. 모국교회에서도 이런 운동은 찾아 보기 어렵기에 오히려 역수출되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태평 박사님도 코스타 보이스에서 말씀하셨지만, 하나의 조직이나 기관이 20-25년 되면서 하나의 터닝포인트를 맡게 되는데 이런 시기를 어떻게 건설적으로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와 같은 시카고 코스타의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면 좋겠고, 특별히 복음적인 면을 더욱 강조해서 믿지 않는 분이나 신앙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와서 복음의 기초를 다시금 쌓고 회심할 수 있는 장이 계속 열렸으면 좋겠어요. 특별히 신앙적인 기초가 있는 분들은 더욱 튼튼해지셔서 그것을 자신의 학문영역과 신앙생활 또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섬길 것인가 깊이 고민하는 코스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에 책읽기에 대해 세미나를 해 주시는데 세미나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약간 우스갯소리지만 사실 코스타에는 정말 뛰어난 간사님들과 찬양팀 그리고 좋은 소그룹 멤버들과의 환경 속에서 다른 때보다 조금 업그레이드된 듯한 분위기 속에 저희가 있게 되는데 한 주가 지나 다음 주 이 시간이 되면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곳에서 홀로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스타에서 받은 좋은 영향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기도와 QT 같은 기본적인 신앙생활 뿐 아니라 코스타에서 소개받고 구입한 책들을 계획을 세워 천천히 읽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좋은 저자들 또는 관련된 주제별 책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별히 30-40 권의 중요한 책 리스트를 자료와 함께 소개할 계획인데 이번 코스타에서 혹은 다른 방법으로 구입하셔서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특히 책읽기가 자기 자신을 더욱 성숙시켜 나가는 밑 재료가 되고 특별히 다른 사람을 위한 귀한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포스트모던 세대에게 특별히 소개해주시고 싶은 책이 있나요?
저자들 가운데는 고전적으로 훌륭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저자들이 많은데요, 저는 개인적으로 존 스토트 목사님이나 유진 피터슨, 필립 얀시, 이런 분들을 좋아하고 이런 책들이 여전히 많이 읽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포스트모던시대를 맞이해 많은 emerging writer 들이 있는데 그중에 브라이언 맥클라렌이라는 분이 쓰신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이 온다’ 라는 책은 이전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책인데요. 특별히 믿음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포스트모던시대의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는 좋은 책이기 때문에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책을 관심 있게 보라고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집회에 참가한 코스탄들에게 좋은 조언 한 말씀 부탁하겠습니다.
우리가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신앙을 갖게 되지만, 신앙이 자라는 것은 공동체적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단 한 사람만이 모든 은사를 소유한 것이 아니고 또한, 아무런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없기에 내가 가진 은사로 기꺼이 도움을 줄 필요가 있고 또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을 필요가 있어요. 서로 함께 성장하고 함께 자라간다는 의식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신이 속해있는 소그룹이라던지 자신의 지역교회나 캠퍼스 공동체에서 필요를 발견하고 돕기도 하고, 또 자신이 가진 은사는 과감하게 발휘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 윤영관 교수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윤영관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윤영관 교수님 안녕하세요, 코스탄에게 간단히 본인소개 부탁합니다. 그리고 코스타와의 인연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윤영관입니다. 지금 현재 한국에서 미래의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반도평화연구원’의 원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코스타와는 인연이 깊은데 제가 유학생활을 하며 영적으로 성장하는데 코스타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국 코스타를 참석한 횟수는 올해로 네번째인데
요, 일본 코스타에도 한번 참석했었습니다.
교수님께서 평소에 학문과 신앙의 통합,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과 참여에 대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교수님으로서 가르치며, 한반도평화연구원 원장으로 일하시며 이를 실천하고 계신데요.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끊임없는 고민이기도 하고, 올해 주제와 연결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회 참여’에 있어서 교수님의원칙이 있으신가요?
코스타 참가자들이 주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분들인데 각 개인이 공부하고 있는 전공분야를 통해 어떻게 섬길 수 있을 것인가 연구해 보면 길이 다 열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제가 공부하는 국제정치학이 중요한 수단을 제공한 것처럼요. 성경을 보면 ‘화평케 하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에 근거해서 남북한 간에 어떻게 평화를 달성하고 통일의 길로 나아갈 것인가 그런 문제 의식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런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국제정치학이라는 분야가 중요한 도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제가 공부하고 있는 국제정치학뿐 아니라 이공계열, 경제학 또는 다른 사회 인문학을 하는 분들 모두 그 전공을 통
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 섬길 수 있을까 연구를 해본다면 각자 제각기 다양한 모습으로 섬길 수 있는 길이 보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과 삶과 그 신앙이 아우러질 수 있는 그런 접합점이 모색될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안함 사태가 조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매스컴에서 전달되는 한국의 모습은 “의견이 극단적으로 양분화 되어 있다.” 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이 사건을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라볼 때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좋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남북의 평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에 앞서서 더 중요한 어떠한 궁극적 목표는 남북의 화평 혹은 평화인데 이것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 특히 천안함 사태를 그 예로 볼 수 있겠는데 우리는 단호한 의사를 표명하고 단호한 메시지를 북한 당국에 보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 당국이 ‘다시는
이런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겠다.’ 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여야 합니다. 강력한 의지를 전달하지 못한다면 북한 당국에서 더욱 빈번하게 이런 일을 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 측의 지나친 과잉반응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반도의 평화를 해칠 우려가 있다는 거에요. 한반도의 현명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국민의 강력한 의사는 전달해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무리하고 강력한 대응은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에 적절한 선에서 대응을 해야 합니다. 천안함 사태가 어떤 형태로든 종결을 위해 남북은 더욱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상호이익이 되는 어떠한 접합점들을 찾아서 접촉을 늘리도록 협력을 강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수님께서 탈북자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탈북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바람직한 대처와 접근 자세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탈북자는 한국사회에 어느 소외계층과도 다른 측면이 있어요. 그들은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장경제에 적응해야 하고 민주주의에 적응해야 하는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는 기간에는 상당한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어요. 그런 특수한 상황을 우리 사회가 이해하고 한국 사회에서 순조롭게 적응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이에 대한 국민의 인식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만 명 가까운 탈북자들을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돕지 못하고 포용하지 못하면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요. 통일을 위해서라도 탈북자들을 잘 포용하고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도록 지원하는 노하우를 취득하고 경험을 쌓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의 기업들은 이분들의 노동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통일 이후의 기업활동을 더 잘하기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는 자세로 고용하고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을 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또 그렇게 노력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정부도 보조금을 지원하고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탈북인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통일 이후의 북한지역에 투자하고 통일 시대의 기업을 희망하는 분들에겐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더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세미나를 올해 맡아 주셨는데요, 세미나 소개를 간단히 해주실수 있으세요?
한반도 평화의 문제는 국제정치와 깊숙이 연관되어 있기에 현재 국제 정세를 개괄적으로 요약할 생각입니다. 국제 정세하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에 대한 요약과 북한의 핵개발이나 천안함 사태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한 북한 내부의 상황과 딜레마를 다룰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기독교입장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할 것인가? 요약하는 순서로 세미나가 진행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25년을 바라보며, 코스타에 해주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미국에 살며 공부하는 과정에서, 분단과 갈등이라는 아픈 상처의 현장 가운데 있는 한반도의 현 모습을 깊이 묵상하면서 기도해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여기에 남아서 생활을 하든지 한국에 돌아가든지 여부에 관계없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영적인 부흥의 터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지난 25년처럼 앞으로 25년 또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어떠한 영적인 부흥의 터가 되고 부흥의 리더쉽을 행사할 수 있는 코스타가 되어주기를 희망합니다.

인터뷰 – 김태평 목사

KOSTA/USA-2010 Chicago 코스타 보이스에 실렸던 김태평 목사님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코스탄들에게 간단히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습니다.
저는 미국 코스타를 처음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코스타가 좋아서, 코스타에 오는 식구들을 만나고 교제하기 위해서 오고 있는 김태평 목사입니다.
코스타와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처음에 코스타에 오시게 되었나요?
1982년에 유학을 나와서 성경공부 모임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1984년부터 모임의 다른 분들과 함께 워싱턴 지역을 미국의 영적인 예루살렘으로 삼아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86년에 워싱턴지역에 젊은이들을 위한 수양회가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고, 이것이 저희 기도의 응답일지 모르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클리블랜드에서 여덟 분과 함께 코스타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렇게 집회에 참석하며 코스타가 하나님께서 귀하게 만드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그 이후에 코스타에 계속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럼 1회 때부터 계속 참석하신 건가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번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것을 제외하고 계속 참여하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시면서 이렇게 계속 코스타에 참석하시려면 쉽지 않으셨을 텐데 우여곡절은 없었나요?
아버님께서 위독하셔서, 한국에 나가야 했던 해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번은 코스타가 열리는 주에 회사의 프로젝트 마감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회사에서 누구도 휴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직장 상사에게 휴가를 요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한 저는 회사의 사장님께까지 휴가를 요청했다가 결국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일 후에 기도하며,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저는 회사와 집회 참석이 둘 다 중요하고, 집회 참석이 회사 생활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필요를 채우기에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모두 희생하지 않고 잘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이런 생각에도 회사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휴가를 받지 못한 채 해고를 각오하고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제가 집회에 참여하기로 한 후 저 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팀 모두가 열심히 힘을 모아 일했고, 그 결과 프로젝트를 미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의 결과가 좋았던 것 물론입니다. 그 이후에 회사에서 제가 코스타에 참석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코스타의 지난 25년을 거의 다 지켜보셨는데요, 그동안 코스타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에 180여 명, 그리고 230여 명이 참석하던 코스타가 오늘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타가 한 영혼 한 영혼을 복음으로 품었고, 이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초창기에는 강사들이 밤새 모여서 집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거기서 나온 의견을 가지고, 다음 날에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해보기도 하고, 기존의 프로그램을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큰 역사를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이제는 이런 식으로 변화를 추구하기에 코스타의 규모와 조직이 커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령님의 역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멘토링과 상담 시스템도 생긴 것 같습니다.
25주년이 된 코스타에 제안하시고 싶은 점이 있나요?
지금까지 모든 것들이 다 좋지만, 굳이 제안하자면, 복음이 더욱 강조되었으면 합니다. 초반 미국 코스타의 예를 들자면, 집회 참석자의 삼분의 일정도가 복음을 접하고, 받아들이고, 이로 인해 삶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두번째로는 목회자들과 평신도 사역자들, 조장, 조원들이 함께 갈 수 있고, 지역 교회가 서로 더욱 좋은 방향으로 동역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지역 교회에서는 청년을 코스타 집회로 보내고, 청년들도 돌아가서 지역교회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의 부족함을 채워서 교회의 덕을 이루며 아름답게 함께 나아 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25년을 바라보시며, 코스타를 향해 기대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제가 경영을 공부했는데, 인간에게 수명이 있는 것처럼, 조직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보통 20년에서 25년을 조직의 수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100년을 가는 조직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직에 특이한 점은, 조직 가운데 지속적인 변혁과 진취가 있지만, 기본적인 가치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스타가 25년간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왔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왔기 때문에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길을 주의 깊게 따라갔으면 합니다. 코스타의 기본 가치인 복음과 학문을 가지고, 코스탄들과 그것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서 코스타에 주신 고유한 것들을 유지해 나갔으면 합니다.
한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1회부터 3회 정도까지 코스탄들의 뜨거운 고민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니, 제가 신학교에 가야 합니까?” 였습니다. 물론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이외의 길에 대한 말씀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코스타는 은혜를 받은 분들께 캠퍼스가 mission field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학문과 신앙의 통합을 고민하던 많은 학생에게 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포스트모던, IT 시대의 코스탄들에게 갈 길을 어떤 식으로 제시해야 할 가를 코스타가 고민하고 제시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