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늘 푸른 나무, 비탈에 서다.

코스탄 현장 이야기


늘 푸른 나무, 비탈에 서다.


용혜원 시인이 학교를 방문하여 <시와 음악이 흐르는 밤>이라는 문화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그 행사 준비를 하느라 아내와 더불어 내가 지도하는 <늘푸른 나무> 써클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시 낭송을 처음 해보는 아이들인지라 아름다운 선율에 감정을 넣어 서정적인 시를 읊조리는 모습이 어설프다. 그러나 그 서투름 속에 이곳 아이들의 소박한 심성들이 묻어있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몇 년 전 기억을 떠올린다.


(1)


“선생님, 큰일 났어요……”
내가 지도하는 서클의 남녀학생 둘이 얼굴이 사색이 되어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어도 그저 낙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그들 중 얼굴이 하얀 한 여학생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힘없이 내뱉는다.
“이제, 우리 서클은 끝장이야요.”
평소에 서클 활동에 적극적이고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던 그 여학생은 아예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글줄이나 좀 쓴다는 아이들을 모아서 문학 서클을 만들었다. 생각이 깊다고 자부하며 자존심과 개성들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만큼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면들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의 순수함이 그 모든 것들을 감싸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모아서 내면의 응어리진 것들을 글로 표현시키며 다듬어가려고 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대학 문화를 정신적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포부들도 있었다.


학교에 심어놓은 어린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늘 푸른 나무>라고 이름을 짓고 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푸르름을 잃지 않는 모임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처음에는 아주 소박하게 시작했다. 한 학기에 한번씩 겨우 겨우 자신들이 틈틈이 모아놓은 소품들을 발표하는 형편이었다. 첫 문집을 내었을 때에는 모두들 좋아했다. 두 번째에는 외부에서 작품 공모를 받아서 좀 더 세련되게 다듬었다. 편집하는 기술도 늘었고, 약간의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학교 내 다른 동아리들에 비해 유달리 단결도 잘 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동아리에 대한 사랑이 날이 갈수록 불붙는 것을 느꼈다.


대학 문화의 활성화를 위해 ‘문학의 밤’을 개최했다. 도무지 문학의 밤이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취지와 형식을 대충 설명해 주고 맡겨두었더니 아이들끼리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문도 구하고 밤을 새워 끙끙거리며 작품을 만들어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 성공이었다. 국제대학의 면모를 살려서 한국시, 중국시, 영시, 불란서 시들을 섞어 가며 시를 낭송하고 계절의 감각을 드러내는 수필을 빔 프로젝터를 동원하여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비추며 함께 낭독하기도 했다. 한국 대학생들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장르들도 등장했다. 문학 작품 중 한 토막에서 발췌한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멋진 해설과 함께 극화로 만들어 올리기도 하였다. 자신들의 캠퍼스 라이프를 코믹하게 엮어서 스크린 상에서 영상 드라마로 연출하기도 했다. 열렬한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문학의 밤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그 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늘푸른 나무> 동아리를 주도하던 두 학생이 있었다. 둘 다 문재(文才)가 있고 개성이 강한 아이들이었다. 그 중 U라는 학생은 사색적이면서도 언변이 뛰어나고, 행동이 약간 괴팍하며 야심이 있는 아이였다. M이란 학생은 이미 연변 일보의 신춘문예에도 당선될 정도로 시적 감수성이 탁월하며 미술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적 끼를 지닌 아이였다. 미남형의 U에 비해 M은 체격도 왜소하며 말주변도 없었다. 반면에, 학업 성적이 뛰어난 M에 비해 성적이 밑바닥을 돌고 있던 U는 평소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문학의 밤을 통하여 언변이 뛰어난 U가 사회를 맡으며 대중 앞에서 멋진 연기를 보이자, 마침내 전교적인 히로로 등장하였다. 어쩌면 뒤에서 실질적인 총 연출을 하며 더 많은 수고를 한 것은 M이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인기가 오른 U가 자신감을 얻으며 총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평소에 U를 얕보던 M은 크게 반발하며 반대편 후보의 참모로 뛰어들었다. M의 주장인즉, U는 결코 학생회를 이끌만한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클 내부도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그렇게 친하던 아이들이 서로에게 상처를 안겨주기 시작했다. 선거전을 치르면서 양 진영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다. 상대방에 대한 심한 인신 공격이 오가는 속에서 자신들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면의 치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거는 결국 U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누구도 진정한 승자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오욕과 수치의 상처들이 깊이 남았다. 두 학생 모두 비로소 자신들의 추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아연할 만큼 충격들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학교 기숙사에서 살인 사건이 날 뻔한 큰 소동이 벌어진 것이었다. 선거전에서 분노를 품은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의 머리를 칼로 세 번 찌른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선거를 치르면서, 선거전을 민주주의의 훈련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아직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완전히 맡겨 두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자유 경선에 의한 직접 투표를 진행하는 동안에 상대와 공대의 대표로 나온 두 후보자를 서로 지지하던 측근에서 심한 경쟁을 벌이게 되었고, 투표일을 앞두고 선거전이 더욱 혼미해지기 시작하자 양 진영에서 심한 감정적인 대립까지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가 근소한 차이로 한쪽이 패하게 되자 평소 술만 마시면 거친 성격이 튀어나오던 한 학생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상대방 진영의 한 학생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었다. 다행히 칼날이 빗겨 나가는 바람에 표피만이 크게 찢어지고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에서 생겨난 이 사건을 앞에 두고 우리 교직원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을 바로 가르치고 다스리지 못한 자신들을 회개하며 크게 반성하는 계기를 삼게 되었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이나 한족들은 무서운 문화 혁명의 회오리바람을 통과하면서 심성이 거칠어진 탓인지 한번 싸움이 일어나면 으레 폭력을 행사하며, 일단 증오심을 품게 되면 끔찍한 연쇄 복수극을 벌이는 것을 예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길에서도 칼을 휘두르는 장면들을 더러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강력 사건들이 빈번히 일어나는 연길시의 다른 곳에 비하여 연변 과학 기술 대학만은 그 동안 한 번도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연길시 공안국에서 조차 신기하게 생각하며 매년 감사를 표시하는 특별 구역이었던 것이다. 진리, 평화, 사랑의 교훈 아래 선생과 제자 사이가 다정한 부모 자식과도 같고 학우들 사이에 사랑과 우정이 깊기로 자부하던 우리 학교에서 발생한 일종의 살인 미수 사건이었기에 더욱 그 충격이 컸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사건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그들의 대립 양상이 단순한 단과 대학의 대결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연히도 두 대표 중 한 학생은 믿는 학생이었고 또 다른 학생은 믿지 않는 학생이 출마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학생들을 지지하는 학생들조차도 은연중 믿는 학생들과 믿지 않는 학생들로 갈라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믿는 학생의 승리로 끝나고 말자, 평소에도 믿는 학생들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던 상대편 학생들이 결과를 승복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던 것이다.


우리 교직원들은 이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믿지 않는 학생들에 대하여 소홀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기 시작했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 나름대로 학생들에 대하여 예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더러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소외된 학생들이 있어 왔으며 비록 고의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들에게 편애로 인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준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카인의 잘못을 두둔할 수는 없다.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여 최초의 살인자로 성경에 기록된 불행한 사람 카인의 경우는, 흔히 오해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편애에 의해 살인을 저지른 것이 절대 아니다. 카인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을 받았으나 그 마음속에서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여 스스로 하나님께 반발하고 동생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살인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성품을 지닌 우리 인간이 편애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리 공평한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을 주는 자나 그것을 받는 자가 모두 불완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편애로 인한 불씨를 일으킬 소지가 언제든지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비책은 한가지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그 방법대로 우리가 사랑하기 힘든 자부터 먼저 사랑하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에게 선대하며 우리를 죽이려 하는 그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기도하는 길일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학생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살인 미수 사건이기에 마땅히 형사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비록 그 행위는 용서할 수 없지만 한번 우리 학교에서 받은 학생은 끝까지 우리가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그에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결국은 일단 학교에서는 제적시키되 계속 돌보아서 그가 참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다.


고난 주간에 일어났던 사건이었기에 우리 교직원들은 십자가 앞에 모두 모여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



(2)


그 사건에 깊이 관여했던 <늘 푸른 나무> 써클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도 선거라는 일종의 정치바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다. 정치권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으신 어떤 교수님은 정치 마당에서 편이 한번 갈라지면 다시는 합치기 힘든 우리 민족의 근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평하면서 그들 사이의 우정은 이제 끝났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늘 푸른 나무>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이들을 그냥 해체시켜야만 하나? 심히 고민이 되었다.


마침 그 날은 예수가 돌아가신 성금요일이었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조차 바라보기 힘들만큼 어려운 자리였다. 한참 만에 말문이 열리면서 다시금 분노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학생 몇몇은 과거에 멋모르고 상대방을 잘못 판단하여 좋아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치를 떨며 분개하기도 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고 고개들을 내저었다.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무덤 속에 함께 모여 있는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용기를 얻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예수 십자가에 대하여 설명을 해 주었다. 그 이전에는 의식적으로 써클 아이들을 앞에서 한 번도 기독교에 대해 설명해 본 일이 없었다. 써클의 순수성을 지켜나가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중국 법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의 가로막힌 담장을 허물 다른 어떤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이야기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던 그 사람들과 그 여인을 용서한 예수의 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심히 반발하는 학생들도 섞여 있었지만, 그 시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느꼈다. 모두들 숙연히 듣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대방을 용서해야만 하는 그 아픔에서 오는 설움의 눈물이었다. 한참 후에 아이들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자신들끼리 그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 다음날 늘 푸른 나무의 어린 가지들이 다시 만나서 자신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아픈 절차들을 밟았다. U와 M이 다시 악수를 하였다. 그리고 부활의 주일 아침, <늘 푸른 나무>가 밝은 햇살 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정진호]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1)

코스탄 현장 이야기


산 위에 있는 동네 – 선구자의 땅


(1)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연길시 가장 북쪽의 북산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다. 앞에는 시가지가 한눈에 나지막이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시원한 들판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어서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는다. 처음 학교 부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연길 시에서는 시내 중심의 좋은 땅을 주려고 하였으나 김진경 총장이 당시 공동 묘지였던 이 언덕바지 땅을 극구 고집하였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묘지 터를 요구하는 김 총장의 생각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여 고개를 내 저었지만, 이제 학교가 완성되고 나서 이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과연 이곳이 명당(?) 중의 명당이라며 김총장의 앞을 내다보는 식견에 감탄을 하곤 한다. 더구나 오목한 분지를 형성하고 있는 연길 시는 여름에는 먼지와 바람이 거리를 휩쓸고 겨울에는 굴뚝에서 내뿜는 매캐한 석탄 연기 때문에 온 도시가 안개 속에 잠겨버리기 때문에 학교에 올라와야만 비로소 숨통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학교를 단장하는 분들이 학교 안팎에 온통 꽃길을 만들어 놓아서 계절마다 화사한 새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소나무로 일체 조경을 이루어 학교를 처음 찾는 분들도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이곳은 중국 속의 섬처럼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교정 바로 앞에는 푸른 잔디로 카페트를 깔아 놓았고 그 위에 멀리 두만강에서 옮겨다 놓은 큰 바위가 카메라를 의식하며 점잖게 놓여 있다. 연길시 어디에서도 아직은 쉽게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녹색 공간이기에 휴일에는 산책을 위해 학교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이 학교를 이렇듯 모든 사람들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 자리잡게 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회주의 나라 중국에 기적과 같이 세워진 학교—,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의 물결을 타고 최초의 중외 합작 대학으로서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세운 이 학교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는지, 이 곳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앞으로 중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낼는지 중국 사람들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학교에 봉사하러 온 외국인들이 모두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경계를 하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의 판단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이 학교를 중국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학교로 키워나가야만 한다. 이곳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리, 평화, 사랑의 교육이 실천되고 그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중국 다른 어떤 대학의 졸업생들과는 다르다는 좋은 평가를 받는 길만이 이 학교가 세워진 참 목적을 달성하는 길이 될 것이다.


만주 벌판의 강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학교 내의 모든 건물을 연결통로로 길게 이어놓았다. 이름하여 연변과기대의 만리장성이다. 그 복도마다 온통 조선의 정취와 풍습을 느끼게 하는 골동품과 장식류가 진열되어 있다. 장소도 절약할 겸 방문자 누구나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열린 박물관인 셈이다. 미술을 전공하신 총장 사모님의 정성이 담긴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분의 본업(?)은 식당 앞 슈퍼마켓 점원 아줌마이다. 총장 사모가 슈퍼에서 일하는 것을 미처 몰랐던 방문자들이 종종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일손이 부족한 대학의 구석구석마다 자원봉사자로 돕는 사모님들의 손길들이 이 대학을 만지고 있다.


아직은 도서관다운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임시 도서관의 열람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로 밤에는 식당을 자습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저녁 식사만 끝나면 학생들이 식당의 빈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밤 열두 시까지 조용히 공부하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기만 하다. 중국의 사회주의 교육 체제 내에서는 일단 대학에 합격하기만 하면 졸업 후에 국가에서 책임지고 학생에게 직장을 분배시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책이었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모습은 중국 대학에서는 여간해서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북산가 언덕에 높다랗게 세워진 학교—,
깜깜한 밤중에 환하게 불을 밝힌 도서관—,


갑자기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언젠가 활빈 교회의 김진홍 목사님이 조선족 사기 사건의 대책 마련을 위하여 우리학교를 방문하신 차에 교직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일이 있었다. 당신이 찾아오신 곳이 바로 선구자의 땅임을 의식한 그 분이 자기가 바로 선구자라고 하시며, 선구자의 뜻은 “선천성 구제불능성 자아도취증” 환자를 뜻한다고 하여 한바탕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와보니 김진경 총장님을 비롯하여 모두 자기보다 중증(重症)인 선구자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다시 한번 웃음바다를 만들었다.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북산가 언덕의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며 바로 이곳이 과거 우리 민족의 한과 쓰라림의 역사를 담고 있는 만주 벌판임을 실감하곤 한다. 과거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던 역사적인 배경은 차치하고서라도 나라를 빼앗겼던 근대사의 뼈를 에는 아픔들이 스며있는 땅이 바로 이곳이다. 그 시절 일본의 학정을 피해 개나리 봇짐을 지고 압록강 두만강을 넘었던 우리의 선조들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개간했던 땅들이 지금의 만주 곡창을 이루었던 것이다. 일본에 항거하여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고향산천의 부모 형제를 내버려둔 채 일신의 고초를 무릅쓰고 찾아 나선 독립투사들은 또 어떠하였던가?


그 시절을 향한 역사적 향수감에 젖어 한번씩 시간을 내어 찾게 되는 곳이 또한 인접해 있는 용정시(龍井市)이다. 연길에서 시골길을 삼십 분 남짓 차를 타고 가다보면 거대한 사과배 농장을 지나게 되고 올망졸망한 용정시 한 복판에 옛 대성 중학(지금은 용정 중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의 터를 찾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아로새겨진 시비 앞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에 대한 의미를 한참 묵상하다가 발길을 돌려 오르는 곳이 일송정(一松亭)이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뽑아버리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이미 제거되고 말았다는 역사 속의 소나무는 사라진지 오래지만 산꼭대기에 솟아있는 초라한 정자 옆에는 어느덧 새로 심은 작은 소나무가 한 그루 미래의 소망을 키워가며 자라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송정에서 사방으로 광활하게 내려다보이는 만주 평야와 그 속을 가로질러 흐르는 해란강을 굽어다보고 있노라면, 조선인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심장을 요동쳐 흐르는 한줄기 감개를 억제치 못하여 선구자라는 노래, “일송정 푸른 솔은—” 을 한바탕 외쳐 불러야 속이 후련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그와 같은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고 있기에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 만주 벌판에 대한 옛 향수를 자꾸 느끼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다. 정작 중국인들은 만주(滿洲)라는 말 자체를 과거 자신들이 일본에 의해 겪었던 치욕의 역사를 돌이키는 말로서 생각하여 듣기 싫어하며 쓰지 않는다. 더욱이 한국인들이 이곳이 바로 우리 조상 고구려 사람들의 영토였다는 것을 내세워 “만주도 우리 땅”이라는 등의 눈치 없는 소리를 하게 되면 비록 우리는 그것을 반 농담 삼아 하는 말일지라도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골적인 반감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다. 55개의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다민족 국가로서 소수 민족의 분리 독립이 국가의 존립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강 위구르족과 티벳족을 위시한 정치적 독립을 꾀하는 소수민족과 더불어 역사적 배경 속에서 향수를 느끼는 한국인들에 의해 조선족들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는 것이다. 비록 소수 민족의 인구 비율은 한족에 비해 10% 미만이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민족의 동향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중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 학교로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조선족 학생들 앞에서 내세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를 세운 목적 자체가 민족 운동을 하여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자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그와 같은 역사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승화시켜 재해석하게 된다.


중국 지도를 보면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우리 졸업생 중 하나가 중국과 한반도 지도를 보여주며 닭이 젖통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는 중국이라는 닭에게 복음의 젖을 먹이기 위해 하나님이 물려주신 젖통이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닭 주둥이에 매달린 먹이처럼 느껴지는 한반도가 조금은 처량하게 보이던 나는 기발한 설명에 귀가 번쩍 뜨이며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실로 이곳은 선구자와 독립투사의 땅이다. 어찌하여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사람들만이 선구자이겠는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보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땅, 미래의 대륙에 먼저 들어와 새 시대의 일꾼들을 양성하고 있는 이 학교의 교직원들이야말로 선구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찌하여 지난날 일제 치하에서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던 사람들만이 독립투사이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상실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일신의 안일함을 버리고 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묵묵히 일하고 있는 우리 교직원들이 바로 독립투사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예수를 위시한 지난날의 선구자와 독립투사가 모두 그리하였던 것처럼 이들의 가슴속에도 고향 땅을 떠나올 때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손가락질과 조롱의 남모르는 아픔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독립투사들의 희생과 땀과 피에 의해 나라가 회복되었듯이 그리고 그 후에야 그들을 회고하는 시비가 세워진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그날 천국에서 이들을 위한 기념비가 찬란하게 세워질 것을 믿는다.

[정진호]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코스탄 현장 이야기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때때로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들과 친해지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 자라면서 공산주의자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의식 교육을 받아왔던 반공 세대인지라, 처음에는 마음 한 구석에 그들을 향한 왠지 모를 거부감과 배척 심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는 얄팍한 학생들보다는 신실하게 공산당에 충성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정직하며 믿음성이 가는 재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더러는 공산당에 평생을 바쳐온 나이 든 중방 영도 중에는 도무지 예수 믿는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인격과 합리성을 지닌 존경스러운 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봉사하며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공산주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결코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마르크스 자신이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으니 그 뿌리가 맞닿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던 인물로서 소학교에서부터 가르치며 숭상하는 뢰봉(雷鋒), 열악한 산간지역에서 티벳인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숨진 공번삼(孔繁森)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의 교과서적 인물로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세워져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능가하도록 삶으로 부딪혀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들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1)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일로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長春)시에 출장을 갔다가 K 대학에 있는 조선족 교수 S씨를 방문했다. 그는 일전에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우리학교에서 계절학기 과목을 한 과목 맡아 강의를 한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 그 시각에 S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기계공학과의 교직원들을 상대로 매주일 있는 공산당 정치학습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무실과 같이 여러 교수들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따끈한 중국 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리니 S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마치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출장에 관련된 도움을 잠시 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시내로 나왔다.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푸짐한 진짜(?) 중국 요리를 시켜놓고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조선족 학자들이 그러하지만 그들에게는 험난한 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선조의 후예라는 강한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한편 그들도 약한 인간인지라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경제적 열등의식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S교수는 성품이 소박하고 일단 우리학교에서 한달 이상을 한솥밥을 먹었던 과거가 있는지라 비교적 격의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술이 한두 잔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요즈음 자신이 가정에서 처한 가장으로서의 딱한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S 교수는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교수로 평생을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세우며 비교적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아내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더니 대학 교수인 자신보다 돈을 더 잘 벌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의 위치가 돈밖에 모르는 자식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는 못난 가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괴로움 때문에 요즈음 자신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 자기와 가까운 친구가 느닷없이 성경책을 한 권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그 책을 만지는 것도 겁이 났는데, 차츰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과기대에서 만났던 교수들의 얼굴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도무지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지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자기도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때마침 내가 찾아오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을 나에게 붙여주셨음을 깨닫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조금 더 오르더니 그는 우리 학교를 방문하던 시기에 자신이 받았던 충격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한달 간 가르치는 동안에 중국에 그런 대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표정과 웃음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중국 아이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이나 외국서 온 교직원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노교수들 조차도 자기를 보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도무지 중국의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 며칠간은 S교수는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대로 피우던 담배꽁초를 복도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다녔는데, 가만 살펴보니 복도가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교수가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난 이후에 이분이 마침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본질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공산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도 현상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종교 역시도 인간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결핍 현상이며, 공산주의 세계가 도래하면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S교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열렬히 신봉하고 배웠으며 지금까지 가르쳐 오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또한 이 학교를 움직이고 있는 외국 교직원들이 모두 자원 봉사자로서 중국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온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놀라움은 가중되었다. 자신이 우습게 여기고 비판하여 왔던 기독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교직원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항상 기쁨과 웃음에 찬 생활들을 하며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자신이 지난날 그렇게 꿈꾸었던 공산주의 사회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패한 공산당의 모습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오던 그가, 자신의 청춘을 바쳐 신봉했던 공산주의 이론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S교수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과연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신념과 공산주의 이론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그가 도달한 한가지 결론이 있었다. 취중에 그가 고백한 내용은 이러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고, 공산주의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것밖에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차 시간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2)


연변 과학 기술 대학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북한 과학자들이 대여섯 명씩 방문하여 학교 기숙사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북한이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비극적 분단 역사의 족쇄를 찬 채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안고 지내던 우리 교직원들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스스로 찾아온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세계에서 온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잘못하면 그것이 모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들이한 그들의 입장을 어렵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편하게 대화할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김진경 총장의 제의로 시작한 것이 “밥 먹이기 릴레이 작전”이었다. 더러는 보름씩 또는 한 달씩 머물다 가는 그들에게 교직원 가정에서 돌아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여 풍성한 음식으로 융단 폭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그 첫 스타트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다. 즉흥적으로 일을 잘 벌이는 김 총장이 북한 손님들에게 남조선 동무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를 하고서는 돌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두 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으니 “당신 말고 애인동무 바꿔.”하는 김총장 특유의 카리스마가 튀어나왔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갈 터이니 저녁상을 잘 차려 놓으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내가 시장으로 이리저리 총총걸음을 오가며 황망히 움직여 겨우 저녁상을 마련하자 곧이어 김총장 내외와 함께 빼빼 마른 북한 사람 다섯이 들이닥쳤다. 학자들 사이에는 항상 그들을 감시하는 지도원 동무가 한 사람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조선 괴뢰 집에 오니 기분이 어때요? 하하하…” 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일부러 흩뜨리는 김총장의 유머에도 여전히 조심스레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이 없던 그 얼굴들…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식사 후에 아내가 오르간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르간의 페달을 신기한 듯 웃으며 구경하던 그들이 귀에 익은 가락이 흘러나오자 곧 얼굴이 풀어져서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까지 부르는 감격을 맛보았다. 김진경 총장은 북조선 동무들이 아무 격의 없이 우리 남한 형제의 가정을 방문하여 이렇듯 화기애애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며 즐긴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손님이 떠나고 난 후 뒷정리를 하던 우리 부부는 집안에 걸어놓았던 십자가가 사라진 것을 알고 순간 깜짝 놀라 긴장하였다. 알고 보니 북한 손님이 온다니까 그 당시 소학교 2학년 짜리 아들 다니엘이 겁을 먹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내어 자기 침대 이불 속에 감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였었다. 그러나, 분단의 오랜 장벽도 같은 민족의 언어를 타고 흐르는 촉촉한 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타고 얼어붙은 감정의 실낱같은 물줄기가 녹아 흐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서로 간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함께 어울러져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 부르는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3국에서 남한 사람과 접촉만 하여도 큰일 나는 줄로만 알던 그들이 우리의 가정들을 속속들이 방문하여 함께 웃으며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게 한 민간 외교의 쾌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특별히 오간 이야기조차 없다. 그냥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로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마 사모님들은 쌀을 씻으면서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말은 안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사는 모습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끼마다 기도하며 식사하는 우리들을 통해 어쩌면 식탁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를 그들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학교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이면 교수와 학생들이 어울려 운동장을 뛰는 모습들…, 활짝 핀 얼굴로 웃으며 지나가는 복도의 학생들…, 매일같이 뷔페 식으로 누구나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그곳에서 교수와 학생이 항상 함께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러움과 충격의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정해진 한 달이 지나고, 돌아가야만 하는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환송 만찬이 베풀어졌다. 사모님들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들을 한아름씩 받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은 인사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후에 뜻밖에도 그들 중 한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 고백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를 보았습니다.”

[정진호] 시온의 대로(Pilgrimage)

코스탄 현장 이야기


시온의 대로(Pilgrimage)


얼마 전 우리는 학교 내에 새로 지어진 교직원 숙사로 이사를 했다. 중국에서 벌써 세 번째 집을 옮긴 셈이다. 아직 건물 주변이 정리가 되지 않아 흙길이고 어수선한 가운데 있지만 집안만은 아내의 억척스런 손 맵시로 단장되어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우리 학교 건축과 교수님들의 설계와 시공으로 직접 지어진 아파트이기에 연길시에서는 보기 드문 세련된 구조가 마음에 든다. 큰 아이 다니엘은 이사 온 날 자기 방을 둘러보며, “아빠, 이 집은 한국 아파트랑 비슷하다. 그지?” 하며 좋아했다. 중국에서 아주 눌러앉게 될까봐 그것이 두려워 이사가는 것을 반대했던 아내도 막상 이사를 하고 보니 새집이 무척 좋은가 보다. 프로판 가스로 온수기를 연결하여 부엌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하였더니, 설거지하는 것이 마냥 신나고 즐거워 보인다. 그 동안 한기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찬물에 손을 담그게 하여 거칠어진 손등을 때때로 펴 보이며 “오르간만 치던 손을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어…” 라며 눈을 흘기던 것이 생각난다. 새로 마련한 소파가 너무나 좋은지 하루에도 몇 번씩 일부러 앉아보며, “야, 참 좋다. 여보 나 소파 잘 바꾸었지?” 하며 눈치를 보며 내 동의를 구한다.


출장을 다녀오던 날, 연길 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기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듯이 전전긍긍하더니, 내게 상의도 없이 소파를 바꾸었다고 마침내 실토를 하는 것이었다. 근 10년간 포항서 가지고온 세간사리를 그대로 지니고 살다보니, 여기저기 낡고 고장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냉장고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TV 화면도 찌그러지기 시작하고, 소파는 여기저기 다 떨어져서 보기 싫은 속살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소파를 바꾸자고 그녀가 몇 번 운을 띄웠지만, 아직 앉는데 지장없는 걸 왜 바꾸냐고 일축했었다. 깔끔하기로 유명했던 아내의 눈에 그 소파가 얼마나 보기 힘이 들었을까? 그 동안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 집안 정리가 끝난 후, 아내가 아끼는 오디오 세트와 CD들을 마저 정리하고 새로 단장된 거실에서 아내가 틀어주는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스트레오로 듣고 있으니 정말 여기가 천국이구나 싶을 정도로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가 문득 10년 전 생각이 떠올랐다.


중국으로 떠나기로 결정한 후, 나는 힘들어하는 아내를 데리고 서둘러 여기저기 중국에 관련된 단기 훈련을 받으러 다녔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강사로 등장한 중국 사역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중국은 언제 추방당할지 모르는 나라이니 짐을 많이 가지고 갈 생각을 말고 양손에 가방 두 개만 들고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기가 아끼던 살림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지는 듯 한숨만 쉬고 있었다. 자기의 손때 묻은 가구며 주방기구 오디오 세트 피아노 오르간을 모두 두고 가야 한다니…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 저녁때만 되면 그녀는 가장 센티멘탈한 음악을 골라 틀어놓고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생활과 음악들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다가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뜨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서 사역을 한다는 어떤 분이 우리가 중국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소문으로 듣고 우리 집을 갑자기 찾아왔다. 아내의 고민을 듣더니, 무슨 말이냐? 가방 두 개만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가 된 사람들이니 중국을 사랑할 수 없다. 중국을 모르고 그저 허튼 소리들을 하는 사람들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 집에 있는 물건은 모두 싸들고 가라. 쓰레기통 하나도 중국에서는 다 쓸모가 있으니 버리지 말고 전부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아내는 힘을 얻어 열심히 이삿짐을 싸게 되었는데, 나중에 중국에 도착해 보니 바쁘게 짐을 싸다가 정말 쓰레기통 안의 쓰레기까지 몽땅 가져왔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내의 약한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위로하시려고 친히 보내신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오랜만에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1994년 7 월 11일, 이삿짐 컨테이너가 중국을 향해 떠나갔다. 그 안에는 지난 결혼 10년간 아끼며 가꾸고 쌓아 왔던 우리 가족의 애틋한 살림살이들이 전부 실리어 있었다. 밤 열시나 되어서 끝난 작업 후 차가 막 떠나려고 할 때, 빈집을 한바퀴 둘러보던 우리는 발코니 한구석에 큰 더미로 쌓여진 빈 상자들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언젠가 이사갈 때 쓰려고 보관하여 오던 미국서 가져온 온갖 가전 제품들의 오리지널 박스들이었다. 시간에 쫓긴 일꾼들이 미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모든 이삿짐을 새로 포장하여 실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자들을 보는 순간 아내는 갑자기 그것들을 모두 싣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나중에 중국서 돌아오려면 그 상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삿짐을 가득 실은 차에는 더 이상 짐을 실을 공간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직감했다. 이 빈 상자들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 . 떠나려던 차의 문을 도로 열고 나는 이미 실린 물건들 중 몇 박스를 끄집어내리고 빈 상자들을 싣게 하였다. 일꾼들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빈 상자 안에 담긴 아내의 울음 섞인 소망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우리는 깨어났다. 넓고 환한 사각의 빈 공간 안에 갑자기 남겨진 우리 세 식구는 망연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니엘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더니 갑자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것이 배고픔의 울음이 아니라 아이에게 밀어닥친 어떤 불안감의 표출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이를 달랜 후, 주스 한잔을 먹여 학교에 보냈다. 사방을 둘러보던 아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린 이제 몸뚱이 셋과 가방 세 개만 남았군요.”


그날은 다니엘의 마지막 등교일이라 우리는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사서 들고 아이의 학교로 향했다. 포항제철 서 초등학교의 교정은 한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꾸벅꾸벅 졸며 평화로운 자태로 우리들을 맞이했다. 아름다운 교정과 깨끗한 편의 시설들이 시야로 파고들며 내 가슴을 사정없이 찔러왔다. 천진 무구한 어린이들이 법석대는 책상 사이를 누비며 과자를 나누어 준 후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교정을 나섰다. 담임 선생이 귀띔하길 다니엘이 줄곧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자기가 4학년이 되면, 서 초등학교로 다시 전학 올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자동차로 아이와 아내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사무실로 향하려 하자, 참고 있던 눈물이 사정없이 쏟아지며 운전대의 핸들을 가리우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을 안겨다 준 내 자신이 하염없이 미워졌다.


하루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우두커니 책상에 앉아 있는데 아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의 목소리가 의외로 평화스러웠다. 아내는, 오후 내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던 그녀에게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강하게 역사하시며 위로하셨다는 사실을 내게 알리고 싶어 전화를 한 것이었다. 마음의 고통 가운데도 입 속에서 “목마른 사슴”의 찬송이 이상하게 끊이지 않아 그 가사의 귀절이 담긴 성경을 찾아보던 중 시편 42편 5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말할 수 없는 평강으로 채우시더라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그 구절을 찾아보고 싶어서 옆에 놓여 있던 성경을 무심코 펼치는 순간, 할렐루야! 어쩌면 이럴 수가—, 바로 시편 42편이 단번에 펼쳐지면서 과거에 줄쳐 놓았던 5절이 내 눈에 튀어 오르듯 다가서는 것이 아닌가?



<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나는 눈물이 쏟아지며 하나님의 강한 손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강하고 깊은 위로가 파도처럼 출렁이며 내 영혼 깊숙이 밀어닥쳤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기에 한 순간도 우리를 놓치시지 않으시고 돌보시며 이렇듯 등뒤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시지 아니한가? 이런 생각과 함께 그분의 임재하심이 피부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이 구절이 이제 중국을 향해 떠나가는 우리 가족에게 주님께서 친히 주신 위로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다. 앞으로 어떤 고통과 실망의 순간들이 닥쳐오더라도 오직 이 말씀 하나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라는 주님의 애정 어린 당부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날… 포항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 부부는 빈집에서 평화로 가득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삿짐 콘테이너가 학교에 도착하던 날,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세간에 그것을 지켜보던 다른 동역자들이 “아니 M으로 온 사람들이 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왔느냐?” 며 나무라듯 말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내는 자기는 필경 이런 곳에 올 사람이 못 되는데 잘못 왔다며 금새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창세기 12장 5절의 말씀을 읽던 중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때,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났다는 대목을 읽으며 크게 위로를 받게 되었다. 그 당시 아브라함과 사라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과 고민들이 마치 우리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면서, 그들도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에게 이삿짐이 많다고 반문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말았지만 아내와 나는 아직 중국에 남아있다. 아내는 자신이 아끼던 그 살림들이 볼모가 되어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지난 세월을 힘들게 그러나 기특하게(?) 살아내었던 것이다.


처음 정착 당시, 그 동안 살았던 쾌적한 환경을 버리고 조금이나마 열악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부부에게는 행운이었고 좋은 훈련기간이었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히기 쉬운 우리의 연약한 마음을 주님께서 강제로 다스리시며 참 영원한 것을 사모할 수 있는 마음으로 조금씩 변화시켜 주셨던 것이다. 그 시절의 뜨겁고 순수했던 마음이 오히려 그리울 때도 있다. 어떻게 그 시절의 아픔과 어려움을 통과했는지…. 모든 것이 그분의 은혜일 뿐이다. 중국에서 처음 살던 집과… 94년 겨울을 회상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걸어 내려오면 약 30분쯤 걸리는 ‘뻬이따’라는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연길 시내에서도 가끔 택시 값을 더 달라고 하는 변두리지만, 아파트들이 비교적 새로 지은 곳이 많고 시장도 새로 생기고 집 앞에 버스 종점도 있어서 주거지역으로는 오히려 적당한 곳이다. 저희 학교는 인적이 드문 언덕바지에 우뚝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학교 버스로 학생과 교직원들을 수송하는데, 교통편이 여의치 않을 경우는 걸어서 내려오곤 한다. 저녁 무렵 학교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짙은 안개에 싸인 연길시 전체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연길 시는 맑은 날은 먼지와 바람이 많아 호흡을 곤란케 하고, 비만 오면 온통 진창으로 변하여 보행을 어렵게 한다. 가장 힘든 것은 수도만 틀면 뻘건 흙탕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인데, 그나마도 자주 끊어져서 아내를 낙담케 한다. 아내는 지난여름 내내 물과의 전쟁을 치렀다.


이곳의 겨울은 한국에 비하여 한달 가량 빨리 찾아와서 한달 늦게 끝이 난다. 매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운데 단층 벽돌집들마다 달린 굴뚝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꾸역꾸역 밀려나오고 있다. 겨울만 되면 몇 미터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 연기가 가득 차서 연길시가 ‘연기시’로 바뀌고 만다. 집 근처에 다다르면 길가를 따라가며 시장 바닥의 온갖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양고기 꿰어서 꼬치를 굽는 사람들과 모락모락 향긋한 연기를 뿜는 만두집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조선말을 모르는 한족에게 손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하여 만두를 한 봉지 산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퇴근길에 군것질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오시던 생각이 난다. 한국서 차를 몰고 다니다 보니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옛 기억들이다. 습관적으로 혹시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뒤를 살핀 후에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다. 이곳은 한국서 온 사람들을 전문으로 터는 강도들이 많아서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에는 늘 조심해야만 한다. 현관 앞에 늘어선 자전거 숲을 헤치고 5층까지 칠흑같이 캄캄한 계단을 더듬어 올라간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면 반가운 두 얼굴이 나타난다. 아파트 문이 뒤에서 철컹 닫힐 때 비로소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빛의 세계로 들어선 것을 깨닫고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


개화초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문화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며 편한 생활을 하였던 기록을 읽으며 비판하였던 것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이해할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먼저 오신 어떤 분이 이곳에서의 생활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은 자기 집뿐이니 최대한 편안하게 꾸미라고 충고하신 뜻도 이제 어렴풋이 이해가 간다. 맡겨진 직분 때문에 더러는 편안한 생활 공간조차도 가슴속의 찔림이 되어야하는 심령을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다보시는 주님만이 아실 것이다.


새 집에서 첫 날 밤을 지내고자 침대에 누우니, 집이 너무 좋아서 그런지 아내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마치 집안에 갇혀 지내다가 10년만에 외출을 한 여자의 기분인 듯 싶다. 새 집으로 이사만 와도 이렇게 좋은데 나중에 천국에 가서 우리가 느끼게 될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뒤척이던 아내가 불안한 듯 입을 연다. “여보, 우리 너무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아니에요?” 아내에게는 사도 바울의 말씀으로 안심을 시키며, 비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 속이든 일체의 비결을 배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었지만, 내심 어쩌면 아내의 말이 옳을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안락함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가 더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믿는 자들의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말한다. 크리스천은 이생의 장막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거할 주의 장막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하신 것이 생각난다.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사셨던 분… 그분에게는 이 세상에는 마음둘 집이 없었다. 어디로 가든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는 제자들마저도 그분의 마음을 위로하여 빼앗지는 못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나그네길에는 항상 눈물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을 통과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 오직 성령만이 함께 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이후에는 반드시 천국의 영광이 따라온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주님, 이 밤에 오직 주의 궁정에 거하기를 사모하시던 예수님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시옵소서.(2002.2.24)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pilgrimage)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편 84:4-7)

[정진호] 옛 술과 새 술 (1)

코스탄 현장 이야기


옛 술과 새 술


(1)


중외합작 대학으로서 중국측 조선족 교직원과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우리 학교의 형편상, 대내외적인 행사 때마다 만찬 석상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그런데 그때마다 거의 예외 없이 술잔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게 된다. 외국에서 건너온 우리 학교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한결 같이 지독한(?) 예수쟁이들이니 술을 입에 댈 리 없고, 추운 지방에서 독한 술을 입에 달고 생활하던 조선족 분들은 으레 끼니 마다 반주를 곁들여야 하는 것으로 풍습을 지키고 있으니 양 진영의 문화적 이질감이 심각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곳 조선족들의 술 습관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예전에 술꾼으로 행세하던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가끔씩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연출되곤 한다. 보통 조선족 사회에서는 대략 점심시간에 식사하러 나가서 얼근히 취한 후에는 집에서 한 두 시간 휴식을 취하고 들어오거나 내키지 않으면 아예 샤발(중국말로 퇴근이라는 뜻)을 해 버린다. 그러니, 우리 학교에 들어온 이후로 한국식으로 점심시간을 정확히 지켜가며 일을 하는 풍토 자체도 그들에게는 쉽게 받아 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자기들끼리 식사하러 나갔다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들어오던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일과 시간에 술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또한 느끼기에 그 버릇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차차 고쳐지게 되었다.


그러나 모처럼 만에 함께 하는 저녁식사 모임이 있을 때에는, 그 동안 억눌렸던 술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듯 외국인 교직원들에게 술잔을 마구 권해오는 것이었다. 더구나 남녀 평등의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익숙해진 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술잔을 돌려가며 차례로 한 마디씩 인사말을 하는 것을 술자리의 예절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호의에 한사코 거절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얄밉고 도무지 되먹지 못 한 족속들로 비쳤으리라는 것도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일단 한잔을 받기 시작하면 옳다구나 덤벼드는 그 술 세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외방 측 교직원들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모질게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니 개교 초창기에는 술로 말미암아 서로 얼굴 붉히고 좌석이 서먹서먹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별히 중국측 부총장이나 당 서기와 같은 나이 많은 영도급(중국에서는 지도자를 영도자라고 함) 인사들이 건네주는 술잔은 거절하기도 민망하여 속으로는 미안한 감정이 여간 쌓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감정들을 해소라도 할 요량으로 가끔 집에 초대라도 할라치면 또 걸리는 것이 그놈의 술이었다. 이곳의 풍습을 따르자면 손님을 초대해 놓고 술을 내놓지 않는 것과 주인이 술잔을 비워 대접하지 않는 것은 전혀 예의에 어긋난 것이라 하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중국측 부총장과 더불어 타지에서 온 조선족 교수들을 몇 분 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는데, 밥상을 앞에 두고 술 내놓으라고 몇 번 고집을 피우더니만 기분이 상하였던지 식사가 끝나자마자 횅하니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우여곡절 가운데 몇 년을 지내다 보니 미운 정 고운 정들이 들어가며 결국은 우리의 술 안하는 습관을 그들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요즘은 억지로 권하는 일도 기를 쓰고 거절하는 일도 별로 없는 걸 보면 쌍방이 술 문제에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셈이다.)


그러나 문득문득, 나에게 이렇듯 술을 마시기 싫어할 뿐 아니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 것이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지독히도 술을 좋아했던 과거를 가진 나로서는 가끔은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하여 중방측 영도들이 강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시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그들을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그들을 대하며 그들 역시 속히 술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할 뿐이다.


몇 년 전 결국 고혈압으로 쓰러져 돌아가신 중방 측 부총장 강의석 선생이 생각난다. 고령에다 혈압으로 고생을 하면서도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던 그 분을 대할 때면 안쓰러운 감정이 몰려오곤 하였는데…. 언젠가 그 분과 함께 상해로 출장간 일이 있었다. 늦은 밤 단 둘이 남게 된 후, 틈을 타서 내가 어떻게 술을 끊을 수 있었는가를 이야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앙 간증을 하고 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참 놀라운 것은, 술잔을 기울이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 양반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술자리에서 내게 대한 태도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외부 인사와 더불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경우, 내가 또 술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을 미리 알고서는 아예 예비지식이 없는 제 삼자들을 향해 웃으며 “저 친구는 우리가 몇 년 동안이나 먹이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독종이야, 독종—. 그냥 우리끼리 하세” 하며 다른 이들이 나에게 술을 권하지 않도록 방패막이의 역할을 해 주는 따뜻함을 보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그에게 전한 복음이 과연 그의 영혼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하나님만 아실 일이다.


(2)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깝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세월들이었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회상해 보면 텅 빈 강의실의 창가에 서서 데모대의 외침과 최루탄 연기에 휩싸인 교정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다가 어둠이 깔리면 학교 근처의 싸구려 주점에 삼삼오오 몰려 앉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무리들 가운데서 묵묵히 술잔을 기울이던 어두운 모습만이 떠오른다. 캠퍼스 내에서는 내 삶을 전부 바쳐 외쳐댈 만한 어떤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짙은 안개 속에서 휘날리는 연 꼬리를 바라보듯 진리와 사랑의 끝자락을 찾아 허공을 헤매는 생활을 하며 술잔만 축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10.26에서 5.18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시국에 대학 생활을 해야했던 사람으로서 술꾼들이 항상 토로하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시대적 변명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 나의 음주 행각은 그 이상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것 같다. 선천적으로 아무리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체질이라 끝까지 남아서 마지막 술잔까지 다 비우고야 일어나는 습성이 붙다보니 결국 온 몸이 알코올에 깊이 찌들어 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술이 어느 이상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 속 깊숙이 감추어 놓았던 날카로운 비수들이 내 입술을 통해 쏟아져 나오곤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것을 즐기며 찾아오는 술친구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적어도 술좌석에서는 항상 인기가 있었고, 그것이 내가 술을 탐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 나의 술 행각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는 아래 글을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가 ‘선험적 술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무리 마셔도 알코올에는 무감각한 이상체질의 소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자신의 주량을 제대로 측정해 볼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았다. 술기운이 가져다 주는 일시적 흥분을 그가 미처 맛보기도 전에, 그의 앞에는 팔방으로 기울이고 엎드린 채 무절제한 쾌락 이후에 들어가야만 하는 침묵과 고통의 세계로 침잠해 버린 시체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면, 그는 술자리에서 방금 전까지 침 튀기며 오가던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와 철학사상과 민중해방의 부서진 말 부스러기들을 어지러운 탁자에서 쓸어 모아 쓰레기통 속으로 처 넣으며 전우의 시체들을 유가족에게 운구하는 힘겨운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어깨에 매고 호송 차량으로 운반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보름달이 휘영청 드리우고 있던 자정 녘의 대문 앞에서 탈춤을 추는 기묘한 자세로 엎드려 취면(醉眠)에 빠진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간신히 집안으로 끌어들인 후, 어머니로부터 어렴풋하게 들었던 한탄 섞인 이야기의 내용을 기억해 내었다.


그의 가계(家系)는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이 나는 그런 족보를 지닌 가계였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 그 이전은 그냥 미루어 짐작토록 하라 – 온 동네가 알아주는 모주꾼으로서 한평생 풍류를 즐기며 취해서 다니다가 말년에 술기운에 실족하여 동네 다리에서 떨어진 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고 하였다. 그를 이어 그의 증조 할아버지는 조선말 국운이 기우는 것을 한탄하며 망국 이후에는 일체 문밖 출입을 안하고 술만 퍼 드시다가 마침내 술독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는 그 대목을 특히 좋아했는데, 술독에 빠졌다는 표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퍼내기 위해 큰 항아리 속을 거꾸로 더듬다가 처박히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돌아가셨다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표현이 지니는 이중적 묘미를 상실할까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종의 돌연변이가 발생했는데, 그의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나타난 두 분의 형제가 일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분이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본즉, 그 형제는 어린 시절 당신들의 어머니가 – 그러니 그에게는 증조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 지아비의 술 행각 때문에 너무나 고생하는 것을 뒤에서 눈물겹게 바라보다가, 우리 형제는 평생 입에 술을 대지 말자는 비장한, 일종의 도원결의(桃園結義) 같은 것을 했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 두 분은 술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내외 학계에서도 유명한 학자들이 되셨다는 것이었다. 특히, 이 대목에서 그의 어머니는 그러니 너도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앞으로 얼마든지 뛰어난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계를 통해 흐르는 술의 계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는 윗대에서 한 박자 쉬었던 여세를 몰아가며 4형제가 사회 각층에서 알아주는 거포로서 맹활약을 벌이게 된다. 물론 그의 아버지 역시 당신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당신이 학자의 길을 포기하면서까지 술꾼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던 뼈 아픈 시대 상황, 즉 6.25 전쟁과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술 권하는 사회에 대한 변명을 술기운이 오름에 따라 벌겋게 늘어 놓곤 하였다. (자전소설 중 발췌)



그 당시에 나는 일주일에 닷새 가량을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되니 거의 체력이 닿는 데까지 마셨던 것 같다. 그나마 며칠씩 건너뛰는 날은 평소에 폭음을 하던 연고로 술병이 나서 쉬었을 따름이다. 그런 동안에도 나는 끊임 없는 술의 예찬가였을 뿐 아니라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고는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술 마시는 것 자체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내가 그토록 술을 퍼부어 대었던 것은 내 마음 가운데 커다랗게 뚫려있는 공허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한때 교회 생활을 통해 천국의 안식을 맛보았던 나에게는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의 마음처럼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가슴 속의 텅 빈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한 무렵에도 이미 나는 알코올 중독의 초기적 증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매일 저녁 술을 마셔야만 정신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온몸 구석 구석에 퍼져 있던 알코올 기운이 빠져 나가면 갑자기 찾아 오는 무력감과 초조감이 엄습하였고 손이 떨려서 커피 잔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체력의 소진으로 인한 불면증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어쩌면 그와 같은 고통이 교만할 때로 교만해져 있던 나를 절망이라는 벼랑 아래로 내몰아 치기 시작하였고, 망각 속에 까마득하게 밀려나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을 어슴프레 다시 떠올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예수 믿는 아내를 만나 내 생활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회복되어가던 무렵, 나는 지독하게 술 권하는 한국 사회를 떠날 수 있는 행운을 잡게 되었고 그것을 아쉬워하는 술꾼들의 마지막 고별주의 세례를 온 몸에 뒤집어 쓰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던 내가 미국 생활 3년 만에 완전히 예수쟁이로 돌변하여 돌아오니, 과거의 추억을 싸 짊어지고 내가 돌아오기만 학수고대하던 술친구들의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고 때로는 실망을 너머 조롱과 분노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떠올리면 곧바로 술을 연상하던 그 친구들이 한결 같이 의아해 했던 것은 어떻게 그토록 좋아하던 술을 안 마실 뿐 아니라 아예 마시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단순히 술을 마시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강권함에 못 이겨 조금이라도 마시게 되면 내 몸이 전혀 그것을 받아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 역시 변해버린 내 자신의 모습이 그저 놀랍고 신기하여 곰곰이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술을 안 마시게 된 것이 내가 믿게 된 종교의 계율을 지키기 위하여 마시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은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로서도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도행전을 읽던 중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세례를 받고 거리로 몰려나온 성도들의 갑작스런 변화를 보고 사람들이 새 술(new wine)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장면을 접하고 문득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결국 내가 술을 못 마시는 체질로 바뀌어 버린 것은 내가 전혀 다른 종류의 새 술에 취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예수 안에서 성령 세례로 완전히 취한 상태로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과거에 그토록 목 말라 하던 옛 술이 필요치 않을 뿐 아니라 더 이상 효력을 발생할 수도 없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제 내가 마신 새 술은 취기가 없어질 때 마다 자꾸 마셔야만 하는 옛 술과는 달리 내 뱃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솟아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취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보니 문득 다시 한 번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나는 오직 술 취한 상태에서만 온몸에 열이 날 뿐, 술이 깨고 나면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마치 냉혈동물처럼 다시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던 것이 내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온몸의 체온까지도 따뜻하게 바뀌어 버린 것을 늘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것은 이제 내 안에 오셔서 항상 함께 계신 성령께서 새 술의 기운으로 더운 열기를 늘 발하고 계신다는 물리적인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8절)는 말씀처럼 세상의 좋다하는 어떤 술도 채울 수 없었던 내 영혼의 갈증을 예수라 하는 새 술이 완전히 채워 주었으며, 내 몸 속에 쌓여 있던 옛 술의 온갖 노폐물들을 다 몰아내고 진정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치유해 주셨던 것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도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던 이방인들의 말은 어떤 의미에서 옳았던 것이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말하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 12-3)

[정진호] 우리들의 사랑으로

코스탄 현장 이야기


우리들의 사랑으로


지난 12월 15일 저희 대학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함께 모여 찬치를 벌인 YUST 가족 연말 축제가 있었습니다. 그 공연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장장 3시간이나 진행된 공연이 숨죽이며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직원 자녀들의 깜찍한 중국 경극 춤에서부터 대학생들의 현란한 현대무과 조선무용, 창작극, 합창, 난타, 기악 밴드부, 한국 교환학생들의 감동적인 워십 댄스와 우즈벡-카작-러시아에서 온 고려인 유학생들의 놀라운 스텝 댄스, 영어권 회화 선생들의 기발한 ㅎㄴㄴ 찬미 스킷과 중방 교직원들의 공산당 찬미 혁명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가장 인기를 끌었던 교직원과 사모님들이 함께 어우러져 연출한 쇼킹한 댄스무대, 등… 국제화 대학의 특색과 21세기의 퓨전 감각을 최대한 살린, 어느 하나도 놓치기 아까운 절목(프로그램)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특별히 이번 공연은 그 동안 매년 진행되던 학생회 주최의 세속 축제와 아내가 주도하는 조금은 성스러운(?) 작은 음악회가 하나로 어울어져 성과 속의 만남을 이루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무대도 학교 강당에서 벗어나 연변 예술극장의 큰 무대로 옮겨서 전체 교직원과 학생들이 한마음으로 만날 수 있도록 계획이 되었습니다.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보이지 않는 많은 영적 어려움들이 숨죽이는 기도 가운데 해결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공연 전체가 아내의 작품(결국은 하나님의 작품이었지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뒤에는 프로그램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고 연출한 그녀의 손길이 닿아있었습니다. 축제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학생들과 교직원들로부터 격려와 감사가 가득한 연말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신입생 중에서는 그날 밤 자신들이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황홀한 분위기 속에서 마치 천국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고 고백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문화의 황무지와 같은 이곳에 찾아와 개간을 시작한 지 8년만에 그 열매들이 이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아내의 남모르는 수고와 눈물들이 서려 있었습니다. 아내의 첫 수업의 충격과 답답함…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음표는 한번도 본 일이 없고, 소학교 때 도레미파솔 대신 1,2,3,4,5 숫자로 표기된 노래를 배운 기억밖에는 없다는 아이들… “우리는 골(머리) 속에 음악 세포가 없어서 안돼요.” 라고 고개를 흔들던 그들을 붙들고 도레미를 가르치기 시작한 이래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어야 했는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행가를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의 비참한 심정… 그러나, 바하를 치던 손으로 과거에 한번도 쳐본 일이 없던 찔레꽃, 소양강 처녀 같은 흘러간 유행가를 피아노로 치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의 얼굴에서 조금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힘을 얻던 일…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 노래가 해바라기라는 가수가 불렀던 “사랑으로”라는 노래였습니다. 그런데 부르다 보니 그 노래의 가사가 마치 연변으로 찾아간 우리들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아 그 노래를 무슨 복음성가나 되는 것 같은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일…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 노래에 감정을 실어서 피아노로 치기 시작하자 닫혀있던 아내가 먼저 마음이 열리면서 감동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네…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 가사를 부르며 학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칠 때 아내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감동과 은혜로 결국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마음이 학생들에게 전달이 되자 아이들의 얼굴에서 감정이 일어나고 빛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이 노래는 연변과기대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들에게 제 2의 교가처럼 불려지며 모든 행사 때마다 한번은 불러야만 하는 마침의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연말 축제도 마지막에 전 가족이 다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마주잡고 흔들며 “사랑으로”를 부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올 해 2002년에는 개교 10주년을 맞이하는 큰 잔치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제 연변과기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게된 “사랑으로” 노래를 기념하며 해바라기를 초청할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눈물이 서린 지난 8년… 특별히 많이 힘들고 가슴이 아팠던 중국에서의 첫 겨울을 회고해 봅니다.



<중국이라뇨>


중국이라뇨? 나 같은 사람이 중국에 가다니요? 하나님, 세상에 이런 법이 다 있습니까? 우리보다 훨씬 더 믿음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가 가야 합니까? 더구나 저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는데… 교회에서 반주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제가 왜 그곳에 가야합니까?


매일 아침 눈물로 외쳐대며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쓰던 것이 엊그제 일 같은데…, 어느새 나는 이곳 중국에 와 있다. 그리고 흰 눈으로 뒤덮인 이 황량한 시골길을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몇 시간을 이렇듯 하염없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기도로써 그분께 항거하려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이 가련하게 떠오른다. 애초부터 승부가 뻔한 게임이었는데…, 그 때는 왜 그렇게 힘겹게 버티려 했는지…, 그분의 내려치심을 당하기까지 고집을 부렸던 얍복강가의 야곱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그토록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면, 나 역시 고집을 꺾지 못했으리라. 지금도 힘이 들 때마다 이곳에 오게 한 책임을 물어 남편에게 퍼붓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나를 친히 부르셨다는 사실을… 내가 단지 부르심을 받은 남편을 따라만 와야 했다면, 아마 나는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허물어지고 나서…,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한동안 오히려 후련하였다.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것들을 그분의 힘에 의존해서지만 잠시라도 놓고 보니 홀가분하기까지 하였다. 남들이 놓지 못하는 것을 버렸다는 것 때문에 약간은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놓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사역지에서는 조금은 무뎌질 줄 알았던 내 자아가 내 욕심이 내 이기심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만 같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왜 이리 힘들게 반항하려 하는지?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조금씩 죄여 들어오는 포위망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일이며 내가 이곳에 온 까닭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나는 제발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정말 가기가 싫었다. 집 바깥으로 나가는 것조차 싫었고 더욱이 그렇게 먼 곳으로 혼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니엘을 핑계삼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가지 말게 해 달라고…, 그런데 나는 또 져서 이렇게 떠밀려 가고 있는 것이다. 차창밖에 보이는 눈 덮인 벌판이 너무나 시려서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뜨거운 희뿌연 서리가 시야를 가렸다.


처음 그 곳에 가던 날, 그 전날 하루종일 치마고리를 붙들고 울며 따라다니며 가지 말라고 졸라대던 다니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사내 녀석이 왜 그리 눈물을 짜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심으로 불쌍한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아직 이곳에 적응도 채 못한 아이를 두고 하루종일 타지에서 보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히기도 했다. 그런데 웬 주책인가? K부장을 따라 W교회에 들어가자 내 격한 감정은 사정없이 나를 휘몰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를 기다리고 모여있는 수십 명의 예비 반주자들 앞에 세워지고 누군가가 내 소개를 하는 동안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 없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하나님 어쩌자고 이 못난 사람을 이곳까지 부르셔서 사용하시나이까?


동북 3성의 처소 처소에서 교회 반주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그들.., 내가 치는 피아노 건반의 한음 한음에 감격하며 내 말을 경청하는 이들.., 나는 그들로 인하여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내 못된 감정이 비비꼬이며 울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이 고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지금쯤이면 한창 크리스마스 프렐류드 준비로 바쁘고 연말의 풍요로움을 누리며 지낼 때가 아닌가? 힘들었던 교회 성가대의 연말 행사 준비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그 무렵이었다. 작년 2월 세종 문화 회관에서 화려한 독주회를 마치고 포항으로 돌아온 직후, 남편을 내게 첫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떠나자고…, 그 때가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하필 그때 남편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로 나를 당황케 했었다. 그리고 설마 했던 그의 말이 현실이 되어 나는 지금 피아노의 ‘도’ 음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이들 앞에서 딩동거리며 목청을 돋우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주님! 당신이 진정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나에게 오르간 음악을 배우게 하시고 그토록 자랑스럽게 당신을 위해 봉사하게 하신 후에 왜 나를 이곳까지 끌어내리시는 것입니까? 아마 나는 다시는 옛날 그 자리고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때로는 그와 같은 상상이 현실 자체보다도 더욱 나를 무섭게 짓누르며 힘들게 만든다.


교회에서 전도원들과 함께 하는 식사, 불결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식생활에 속으로 눈살을 찌푸려 보지만, 그들의 티 없이 묻어나는 정성과 사랑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움츠러든 나는 얼굴에 헛웃음을 가득 채운 채 감사하게 밥술을 뜬다. 혼자만 깨끗한 체 온갖 깔끔을 떨며 유난을 부리던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마 이 장면을 보면 까무러칠는지도 모른다. 구토가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가며 말로만 듣던 그들의 화장실 문화를 체험한 후, 인력거를 타고 논두렁길을 빠져나온다. 사람이 다 채워질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버스에 올라앉아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면,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간다. 어제 산을 넘는 눈길에서 버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뻔 하였던 순간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아찔해진다. 정말 중국이란 곳은 내가 싫어하던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갖추고 있는 곳이다. 평소에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샘통이다 하고 놀려대기 딱 알맞은 곳이다. 누더기를 걸친 냄새나는 남자들이 하나 둘씩 올라타서 옆자리를 빽빽이 채워가더니, 마침내 버스가 떠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곳 사람들은 버스만 떠나면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담배를 붙여 물고 꾸역꾸역 매운 연기를 뿜어대는 것이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무릎을 시리게 하는데, 창문은 어떻게 연단 말인가? 아예 눈을 감고 있자니 통곡을 하고픈 심정이다.


침대에 누워 하루의 일을 돌이켜 본다. 이렇게 안락한 침대에 내가 누워 있다는 것이 좀처럼 실감이 가지 않는다. 이곳은 바깥과는 무관한 별세계인 것만 같다. 한국서 쓰던 물건들은 거의 다 싸들고 왔고, 몸살이 날 정도로 오기를 부려가며 한국서 살던 집과 유사하게 꾸미려고 안간힘을 쓴 덕분에 집안에만 있다보면 잠시 잠시는 중국에 와 있다는 것을 망각하기도 한다. 다 버리고 왔다고 하였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안팎으로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이렇듯 안식할 수 있는 것은 이 편안한 침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그분께 감사한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의 품에 돌아올 수 있도록 매순간 동행하신 그분의 자애로운 숨결을 비로소 느끼며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든다. 부활의 새 아침을 고대하면서….(1994.11.30)


중국에서는 아내를 “애인동무”로 부릅니다. 한국이나 미국서 계속 살았다면 아내를 그저 “집사람” 혹은 “wife”로 생각하며 그렇게 살았을 나에게 중국으로 오는 바람에 이제 평생을, 마치 연애할 때 서로 다투기도 하고 토라지기도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아내를 “애인”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하신 것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내가 돕는 배필에서 이제는 동역자로 함께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