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석] 새벽을 열었으니, 다음은 무엇인가?

이코스타 2004년 1월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벽사람 전성기』

(규장, 2003), 오정현 지음, 207, 8천원


지난 가을, 서울 강남 사랑의교회엔 새로운 일이 여러 가지 생겼다. 1978년부터 이 교회를 개척, 성장시켜 온 옥한흠 목사에 이어 25년 만에 그의 애제자 오정현 목사가 새 담임목사가 된 것과, 오 목사가 부임하면서 연일 만당(滿堂)을 이룬 40일 특별새벽기도회(2003. 9. 8-10. 18, 이하 특새)를 열어 교계는 물론 일반 뉴스에서도 다루어지면서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40일간의 특새, 그 기적 같은 부흥의 비밀이 궁금하던’(뒷표지 문안) 터에 신속하게 그 전말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 주는 책이 규장에서 『새벽사람 전성기』란 제목으로 나왔다.



이 책은 새벽 불길, 새벽 축복, 새벽 성령, 새벽 믿음, 새벽 대첩이란 ‘새벽’(at Dawn)으로 시작하는 5개의 큰 주제 아래 오 목사가 전한 18편의 메시지를 나눠 수록하고 있으며, 각 장 말미에 특새에 참석했던 이 교회 성도들의 이런저런 짤막하지만 감동적인 소감과 간증을 ‘새벽 감격우리는 새벽파’란 꼭지로 묶어 소개한다. 이와 함께 규장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챕터별 요약이 ‘새벽 신앙 불멸의 법칙’이란 꼭지로 곁들여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오정현 목사는, 한국교회의 7, 80년대 고속성장을 주도한 1세대 유명 목회자들의 명예로운 은퇴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에 의한 리더십 이양을 제대로 준비하지도, 단행하지도 못한 채 꼼수와 무리수를 두고 있는 일부 그러나 영향력이 적지 않은 대형교회와 단체들이 세습의 오명을 뒤집어쓰면서 한국교회 전체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면서 비교적 건전한 세대 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특히 합동측 교회갱신 운동의 모체요 실질적 본산이며, 교계연합운동에서 제3의 기구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국목회자협의회의 중추적 구실을 하면서 복음주의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교회의 새로운 리더십으로 바톤을 이어 받아서 어떤 목회, 어떤 사역을 전개할 지 전례 없는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부흥회 식 전도를 넘어 교회성장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8, 90년대를 풍미한 평신도를 깨우는 제자훈련으로 유명한 이 교회에 부임하자마자 6, 70년대의 전통적인 목회방식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특새란 뜻밖의 카드를 꺼내 일단 성공을 거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펼쳐질 본격적인 사역을 준비하는 워밍업 훈련으론 제격이었다는 평가와 함께, 그래도 강남기독중산층을 대변하면서 나름대로 균형감을 잃지 않았던 이 교회가 점점 오른편으로 향하는 신호탄 아니냐는 염려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오 목사의 메시지들은 남가주 사랑의교회를 개척하면서 짧은 시일에 대표적인 이민교회로 성장시킨 역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주로 개인 구원의 감격과 대를 잇는 가족의 평안, 그리고 전도와 선교를 통해 교회의 성장을 추구하는 전통적인 보수 신앙에 충실해 특새와 같은 시간대에 전달하는 메시지로 손색이 없다. 문제는, 그것들을 넘어 이미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가 되어 선두에서 이끌고 있는 이 교회가 세대 교체 이후 앞으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에 걸맞는 메시지가 전해지고, 새로운 교회상()을 정립해 나갈 것이냐에 있는데, 이제 새벽을 연 데 불과하기 때문에 좀 더 느긋하게 지켜볼 필요가 있겠다.



한편 이 책에는 ‘새벽기도 로드맵’이란 재미있는 상자 기사들이 군데군데 나오는데,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같은 새벽기도 구호, ‘내 믿음의 전성기를 주옵소서’ 같은 새벽기도 격문, ‘저녁 9시 이후에는 절대로 영화나 TV시청을 하지 말라’ 같은 새벽기도를 위한 몸 관리 프로젝트, 12가지 건강비결, 새벽기도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5가지 습관, 영적 부흥을 위한 9가지 열쇠 등이 그것이다. 그 중에 압권은 171면에 나오는 40일간의 특새에 개근 또는 정근한 성도들에게 수여한 기념 동판으로, 일명 ‘영적 마패’로 불리면서 평강과 은혜 마패, 제사장 마패 같은 위력이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 책과 함께 특새의 현장감을 생생하게 들려주는 테이프를 묶은 오디오북(테이프 4, 1만원)도 나와 있다.


[서재석] 화보로 보고 읽는 루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르틴 루터』

파울 슈레켄바흐·프란츠 노이베르트 지음,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4×6배판/양장/438, 2만원


새해 첫 달을 루터를 읽으면서 시작하는 건 어떨까. 그것도 단지 두꺼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게 아니라 135면에 달하는 풍부한 화보와 함께 보면서 읽는 루터와 종교개혁이라면, 어떤가? 솔깃해지지 않는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루터의 종교개혁 400주년을 기념해 나온 이 책은, 독일에서 초판 10만 부가 완전히 매진되었다. 서문에 밝힌 대로 “이 책 어느 곳에서도 루터를 미화시키려는 시도는 볼 수 없고 그의 결점과 실수가 명확하고 노골적으로 지적”된다는 점에서 일단 점수를 줄 만 하다.


이 책은 21장으로 나눠 서술한 전기, 화보, 주요 문헌자료, 인명·지명 색인 등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독특한 매력 가운데 하나는, 책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384점의 진귀하고 다양한 화보를 보는 재미인데, 회화·도화·동판화·목판화·메달 등에서 저자들이 직접 고른 신뢰할만한 사진 자료들은 이것만으로도 이 책을 구입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나온 책 가운데, 이 정도로 방대하고 풍부한 루터 관련 화보집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루터와 관련된 주요 문헌자료에는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95개조 논제’(1545)를 비롯해 루터의 주요 편지들이 수록돼 있어 쏠쏠하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매력은 화보 못지 않게 방대한 인명·지명 색인으로서, 100면 가까운 분량에 루터 시대 인물 134명과 30여 지명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수록돼 있어, 이 책 한 권이면 여러 가지 다양한 정보와 자료를 습득하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서재석] BBC의 모델, 존 아저씨의 책들

2003/12




1977년 선배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회심을 경험한 나는 그 이후 지난 25년간 수많은 사람들과 책, 모임 등을 통해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아 왔다. 그 가운데는 내 정서와 기질에 맞아 따르거나 본받고 싶은 깊은 감동과 큰 영향력을 준 것도 있지만, 나와는 어째 영 맞지 않아 피하거나 멀리하고 싶게 만든 것들도 있다.


그 가운데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책으로 만난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이다. 존 아저씨라고도 불리우는 이 분의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됐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눈뜨게 된 것 같다.


우연히 접하게 된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문고판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를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 기독교의 베이직(Basic)을 견고하게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애매모호하기만 하고, 아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그저 믿으라고만 하던 죄의 정의, 부활의 확신, 그리스도를 영접(초대)한다는 것의 의미 등이 쉽고 분명하게 정리돼 있는 이 책을 통해 나는 비로소 기독교인으로 입문하게 되었다. 이 책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내수동교회 형제자매들의 신앙고전이 되면서 소그룹 모임 등에서 널리 읽혀지고 이야기되면서 사랑 받는 책이 되었다.


존 아저씨(Uncle John)의 책들은 한 마디로 BBC 신앙을 길러 주었다. BBC는 성경적이고(Biblical) 균형잡힌(Balanced) 기독교(Christianity)의 약자로, 비성경적이거나 부분 성경적인 가르침이 편만해 있고, 아무런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이상하고 왜곡된 기독교를 좋아하는 한국 교회 풍토에서 자란 우리들에게 성경적으로 생각하며 자라 가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신앙이라는 게 내가 알고 영향 받은 어느 하나의 사상과 흐름에 사로잡힌 채 다양하고 폭넓은 이해와 실천에 어색해 하는 균형 잡히지 않은 신앙인지를 쉽게 알 수 있는데, 존 아저씨의 책들을 통해 이런 게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협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영국 성공회 목회자인 존 아저씨의 성경해석과 신학사상은 건전하기로 정평이 나있는데, 특히 그가 책임편집자로 신구약이 거의 완간된 강해설교 BST(Bible Speaks Today) 시리즈는 성경공부와 성경묵상을 훈련받는 청년 시절에 꼭 읽어볼 책들이다. 존 아저씨는 이 시리즈의 산상수훈, 사도행전,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주로 IVP에서 역간되었다)를 특유의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저술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귀로 듣는 설교와 함께 눈으로 읽는 설교의 전범을 꼽을 때 마틴 로이드존스의 책들과 함께 첫손가락에 꼽는 책들이다. 웬만한 주석에 비해 나으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은 구입해 가까이 두고 읽어보자.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God’s New Society)라는 제목이 보여 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잘 풀어 주고 있어 성경 이해는 물론 구원에 대한 이해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


존 아저씨는 설교만 잘 하는 전형적인 목회자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현대 사회 문제와 전도와 선교 등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민하고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슈들과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썼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성경만이 아닌 사회로부터도 이중적인 귀기울임(dual listening)을 해야 할 필요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존 아저씨에 대한 내 관심은 그의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과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성경관찰, 해석, 탁월한 문장에서 영향 받은 바 크지만, 뜻밖에도 그는 전도만이 아닌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함께 강조해 지난 30여년간 복음주의 운동권의 이정표를 세운 로잔언약(1974)을 기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어바나 선교대회를 비롯해 여러 나라의 학생사역을 방문해 말씀으로 돕고 격려한 전도와 선교의 대가이기도 하다.


이제는 80을 넘은 노년기를 살아가는 그의 삶의 궤적을 살펴볼 수 있는 전기도 나와 있는데, 출생에서 1960년까지 전반부 생애를 다룬 작은 글씨에 6백쪽이 넘는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가 쓴 『존 스토트』 같은 전기는 큰 맘 먹고 이 가을밤 한 주간 정도 깊이 빠져 볼만한 책이다. 같은 편집자가 존 아저씨의 50여종의 책들에서 주제별로 발췌해 만든 『진정한 기독교』(Authentic Christianity) 같은 책은 존 아저씨의 신앙과 신학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괜찮은 다이제스트이므로 한 권쯤 구비해 두자.

[서재석] “아는만큼 누리는 예배” 송인규 지음

2003/11




정말 제대로 알고 예배 드려야겠군!








“아는 만큼 누리는 예배” (홍성사, 2003),

송인규 지음, 233, 78백원


 


요즘은 조금 뜸해지고 그 열기가 식긴 했지만,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송인규’란 이름 석 자는 일종의 문화 현상이었다. 그는 여러 책과 강의를 통해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 기독교 세계관(Christian Worldview),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World Christian) 등 당시만 해도 고답적인 신앙 풍토가 만연하던 시절에 신앙 생활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신선한 개념들을 많이 소개했으며, 기독 청년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그의 독자들은 통과의례처럼 그의 책을 탐독하면서 비로소 궁핍한 시대를 넘어 무언가 말할 게 있고, 생각할 게 있고, 따져 볼 게 있는 기독교와 신앙 생활에 입문하게 되었다.



예배에 대한 설교식 에세이


저자로서의 송인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는 번역서와 설교 녹취 위주의 우리네 기독 출판계,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권에서 아마도 본격적인 의미에서 저술 작업(Original Writing)을 해 온 선두 그룹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저자 이전에도 훌륭한 자질을 지닌 한국인 기독 저술가(Korean Christian Writer)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무언가 아쉽고 여전히 가려운 부분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경향이 있었다.



저자의 여러 특장점 중 하나는 본문성경공부에 탁월하다는 것으로, 이는 단순히 성경에 정통하다는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고 비교적 쉽게 그 본문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설과 질문을 적절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IVF를 중심으로 한 그의 선교단체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터인데, 교회나 선교단체를 통해 성경공부를 충실히 해 온 이들이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 교재나 글로 그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줄 아는 이들이 희귀한 상황에서 더욱 돋보이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아볼로 성경공부〉 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3부작 성경공부교재는 시중의 교재들과는 유가 다른 이 말이 꼭 누구에게나 최고의 교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원숙한 면모를 보여 준다.



본지에 오래 연재되면서 평신도 신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정말 쉽고 재미있는 평신도 신학』을 묶어 두 권으로 낸 바 있던 홍성사가 <송인규 교수의 신앙카페> 시리즈를 내기 시작해 그 기획과 구성에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책으로 저자가 사역하는 새시대교회에서 3년 전 이맘 때 10주 연속으로 전한 “예배란 무엇인가?”란 주제별 설교를 독자들을 위해 새로 쓴 설교식 에세이(sermonic essay)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말을 통한 설교와 글을 매개로 한 책이 다르다는 점을 고려하여 모든 표현과 설명을 읽기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고, 일반적으로 간략하고 단순히 전달되어야 하는 설교와는 달리 어떤 주제를 깊이 다루고 필요한 설명을 충분히 할 수 있으므로 설교 때보다 그 내용을 훨씬 자세히 정리”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섬김과 부복(俯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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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키워드


만약 우리에게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 10주 동안 혹은 열 개의 주제로 나눠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주제들을 선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매주 드리는, 하지만 썩 만족스럽지만은 않은 주일예배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 않을까? 저자도 이 문제를 의식하고 열 장 중 2장부터 8장까지 일곱 장을 주일예배의 각 구성요소랄까 순서에 할애하고 있다. 말씀기도찬송신앙고백헌금성례축도가 그것이다. 각각의 의미와 한국 교회 예배에서의 문제점 그리고 보완책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하고, 그 앞뒤로는 예배 본질로의 회복과 생활예배를 다룸으로써 예배에 관한 우리들의 고민과 불만, 무지와 편견, 관행과 전통을 두루 살피고 있다.


1장 “예배, 본질로의 회복”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예배의 키워드는 섬김과 부복(俯伏)이다. 이는 곧 신령과 진정(진리)으로 드리는 예배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진정한 앎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의 중심과 내면, 우리의 심령으로 예배”(23)하는 것을 말한다. 이어서 저자는 현대 예배의 예배 순서와 예배의 본질 또는 태도가 과연 연결이 되고 있는가에 의문을 던지면서 예배 의식 또는 순서로서의 예전(liturgy)의 필요성을 몇 가지 열거한다. 즉 예배에는 어떤 형식 혹은 일정한 틀이 필요하며, 질서와 일치 그리고 통일성을 위해서, 무시할 수 없는 전통으로서, 거룩한 공회(universal church)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예전의 도입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예배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은 예전이 참 예배의 정신을 잡아먹는다는 데 있다”(26). 이후 저자는 이어지는 일곱 장에서 예전 즉 각각의 예배 순서를 하나하나 도마에 올려놓으면서 분석하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은 것들


예배 순서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전체적으로 긍정적이며 따뜻한데, 이는 신학교 교수이자 현실 목회를 하는 처지에서 당연한 것으로 사료된다. 아마도 예배의 다른 당사자인 평신도가 이런 주제의 책을 썼다면 조금 또는 훨씬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은 현재와 같은 예전(禮典)에 별 문제가 없으며, 일부 보완하면 될 거라고들 생각하기 쉽지만, 예배에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성도들의 관점에서 현대 예배들의 예전은 개선의 여지가 도처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자의 해설이나 지적이 그렇고 그런 수구적이며,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정도로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또 대단한 오해이다. 추측컨대 대부분의 교회들은 저자가 논구(論究)하는 바 예전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교묘하게 편의적으로 왜곡해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예배 순서에 대한 자세하고 친절한 교육을 하는 교회가 드물기 때문에 성도들은 알아서 눈치껏 따라가야 한다는 게 입증한다. 그러다 보면 교회를 수십 년 다녀도 예배 각 순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채 습관적으로,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새 신자들에 대한 예배 교육 입문서로 적당하다. 비록 저자는 이 책에 대해 “예배학 입문서나 예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니며, 또 전통적 의미에서의 예배 갱신을 위한 안내서도 아니다”(6)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목회자나 신학생들이면 몰라도 성도들이 쉽고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책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책은 실제적이며 유용한 안내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각 장 말미에 세 개씩 들어 있는 “송인규의 Think and Act”는 내용을 요약하면서 독자 자신의 예배 생활을 점검하고, 개선하도록 도와 주는 질문들이어서 소그룹에서 읽고 나누기에도 적당하다.



예배를 볼 것인가 아니면 예배할 것인가


예배의 여러 순서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저자는 9장에서 예배와 관련된 통념들을 한시 바삐 던져 버리자며 ‘예배를 보다’에서 ‘예배를 드리다’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예배하다’란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 저자는 공적 예배를 구성하는 세 요건으로 예배 정신, 공동체적 질서, 다양한 표현 수단을 거론하면서 “한국 교회의 예배는 예배에서의 공동체적 질서를 강조하고 음악이나 분위기 등 다양한 표현 수단에 대해서는 관심을 쏟으면서도, 정작 그런 것들을 통해 구현되어야 할 예배 정신에 대해서는 경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201)는 통렬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마음의 강퍅함과 미혹에 얽매인 채 위선과 이중성으로 가득 찬 거짓 예배를 연출”하지 않기 위해 피해야 할 왜곡된 마음 상태로 외관주의(外觀, externalism), 형식주의(formalism), 수동주의(passivism), 감상주의(感傷, sentimentalism), 이분주의(二分, dichotomism)를 들며 경계하고 있다(207-9).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우리 각 개인과 한국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깊이 뿌리내린 예배와 삶 사이의 파편화된 분리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활 예배’로 독자들의 시선을 옮기고 있다. 주일 예배와 같은 의식으로서의 예배가 아닌 일상 생활을 통한 예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아직 많이 생소하고 생경하지만, 저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 생활 예배야말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왕과 주인으로 높이는 일임을 알게 된다.



이 책의 배경 자체가 시리즈 설교에서 착안된 것으로, 저자가 친절한 설명과 구체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분은 다소 이론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논리적인 모색을 하는 바람에 단조롭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저자가 붙인 바 ‘설교식 에세이’가 갖는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겠고, 한자가 섞인 개념어를 즐겨 사용하는 기성 세대들의 공통된 글쓰기 습관으로 읽혀진다. 그러나 적어도 이 책을 읽고 예배의 본질과 순서들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면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나 일상 생활 속의 생활 예배를 좀 더 풍성하게 누리는 소득이 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어제나 오늘이나 총론과 원론 수준에만 머물면서 디테일(detail)엔 무디고 약한 우리로선 이런 책을 통해 서둘러 변화와 개선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의식 있는 목회자들이라면 그저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이 책을 읽고 연구하면서 예배의 참된 의미와 예전의 바른 시행을 결심하면 좋겠고, 아울러 특히 젊은 독자들의 일독과 활발한 토론을 권한다.




[서재석] 고든 맥도날드의 책 두 권

2003/11




“역시 맥도날드!



-  맥도날드 목사님의 책 두 권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영장(IVP, 2003), 고든 맥도날드 지음, 홍화옥 옮김, 334, 8천원

원제 Ordering Your Private World


60번 찍고, 20만권 팔린 책



1990년에 초판을 낸 『내면 세계…』는 그 후 60()를 찍고 올 가을에 개정 증보판을 내면서 매력적인 새로운 표지와 IVP 책으론 보기 드물게 넉넉한 본문 디자인(행간이 넓어져 읽기에 좋아졌다는 뜻)으로 독자들에게 또 다시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60(printing)라면 출판사에서 60번을 인쇄해 냈다는 것으로, 출판사마다 다르지만 기독교 서적의 경우 한 번 찍을 때 1천권에서 2천권 정도 찍는 게 보통이고, 이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리스트에 줄곧 들어왔음을 감안할 때 12-15만권 정도 찍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출판사측 보도자료엔 20만권 이상 팔렸다고 한다). 요즘 같은 출판 불황기에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5년간 독자들의 세대를 달리하면서 읽혀왔고, 널리 인구에 회자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한 번쯤은 집어보고 읽어본 책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책을 현대의 고전 또는 우리 시대의 필독서로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은 워낙 많이 알려진 데다가 내용도 탁월해 초판이 나왔을 때 읽고 중간중간 생각날 때마다 펼쳐본 걸 합해 아마 대여섯 번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서른 살을 조금 넘긴 때 읽은 책을 마흔 살을 훌쩍 넘겨 다시 읽으니 감회도 새로웠지만(교회의 소그룹모임에서 이 말을 하자, 어떤 형제는 자신이 스무 살 때 처음 읽었는데, 이제 삼십이 넘어 다시 읽어야겠다고 해서 함께 웃었다), 이제 60대가 된 맥도날드 목사가 큰 틀은 유지하면서 예화를 바꿔 쓴 개정 증보판을 다시 읽으니 훨씬 원숙한 기분이 들었다.



질서정연하지도 않고, 쉽게 삼천포로 빠지신다면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독자라면 거의 누구나 도대체 내면 세계(Private World)란 무엇이고, 그리고 이 내면 세계와 영적 성장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만약 내면 세계가 사적인 영역을 지칭한다면 자연스럽게 외면 세계 혹은 공적 세계도 있을 법한데, 물론 이 책의 관심사는 내면 세계에 모아져 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삶을 재정돈하리라고 결심”(17)하는 것을 내면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우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내면 세계의 질서는 속사람으로부터 변화되는 문제이며, 삶의 내면을 철저하게 정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19). 그가 우리에게 용기를 주는 것은 그 자신이 천성적으로 질서정연한 사람이 아니며, 스스로 일을 잘 알아서 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18). 그가 대부분의 우리처럼 약속한 일을 쉽게 잊어버리며, 쉽게 삼천포로 빠지는 경향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된다. 하긴 질서정연하고 체계적인 생활을 하는 이가 이런 책을 썼다면 잠깐 관심을 보였다가도 이내 질려서 옆으로 밀어 둘 법 싶은데, 다행히 맥도날드 목사님은 엘리야처럼 우리와 성정이 비슷해(5:17 참조) 안심이 된다.



내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더 영적인 영역이며, 선택과 가치가 결장되는 중심부이며, 고독과 성찰이 추구되는 곳”(26-27)이라는 정의는 읽을 때마다 참으로 매력적으로 들린다. 일종의 ‘조종실’이며,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다름 아닌 ‘마음’인 셈이다. 그러기에 “이 시대 가장 격렬한 전쟁터 중 하나이며, 특히 자신을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 자들은 마땅히 이 싸움을 치러야 한다”(29)는 구절은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놀라운 성찰이다. 프레드 미첼이 책상 앞에 늘 붙여 놓았다는 “너무 바빠서 삶이 황무지로 변하지 않도록 주의하라”(32-33)야말로 남이 아닌 우리 자신이 경청하고 실행해야 할 경구(警句)인 것이다. 결국 저자는 “내면 세계 곧 마음을 정돈함으로써 외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견고한 내면 세계를 계발하고 유지하는”(46-47) 삶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관건이 된다는 것을 시종 강조하고 있다.



내면 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


각 장 맨 앞에는 ‘내면 세계가 무질서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이 약방의 감초처럼 나오는데, 이런 감초는 마치 성경암송을 하듯 외워 둘만 하다. 그 중 몇 개를 맛보기로 꺼내보자: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에 있다면,



질서 있는 내면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날마다 결심하기 때문일 것이다.(37)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에 있다면,



나를 재촉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조용히 귀기울이기 때문일 것이다.(79)



내면 세계가 질서 정연한 상태에 있다면,



그리스도 앞에서 홀로 잠잠히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231)


 



대개 책을 읽다 보면, 읽는 스피드에 밀려 이런 숨어 있는 보물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거나 등한히 하기 쉬운데, 읽는 우리는 챕터의 맨 앞에 나와 있어 빨리 다음으로, 본문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저자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런 구절들은 챕터를 다 쓴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 고르고 골라 화룡점정(畵龍點睛)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 습관적으로 스쳐 지나가면 손해겠다. 또한 각 장 말미에는 IVP 책들이 즐겨 쓰는 ‘더 깊이 생각해 보기’ 질문들이 나오는데, 본문을 제대로 읽었는지 확인하는 데도 좋고, 내용을 요약해 주기도 하고, 이 책을 함께 읽는 사람들과 토론하고 나누기에도 좋으므로 건성으로 훑어보면서 넘어가지 말고 자근자근 씹어 먹는 재미를 붙이는 것도 이 책 읽기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한편 IVP는 이번에 개정 증보판을 내면서 본문에 나오는 성경 구절들로 표준새번역 개정판을 사용했는데, 일반적으로 개역성경만 사용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좋은 시도라고 여겨진다. 어떤 번역본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서 책의 분위기와 주독자층을 고려한 결정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기는 바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후반부에 ‘중보 기도’란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오래 전부터 신학자들이 이 말을 문제삼고, 연구한 끝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간과한 채 초판에 이어 계속 사용하고 있다. 워낙 목회자나 성도들을 가릴 것 없이 널리 즐겨 쓰는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둬도 무방하다 싶어서일 것 같긴 하지만, 번역서를 많이 내는 IVP로선 이런 용어를 정비해 나갈 책임이 있지 않나 싶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베푸는 삶의 비밀(IVP, 2003), 고든 맥도날드 지음, 윤종석 옮김, 147, 5천원

원제 Secrets of the Generous Life



부에 집착할 것인가, 베풀 것인가



‘베푸는 삶’이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읽는 사람마다 크게 다를 수 있는데, 대개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제대로 잘 안 되는 데서 오는 묘한 채무감 또는 부채 의식에서 오는 부담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더욱이 이 책처럼 그런 삶의 비밀 운운하는 책제목은 가뜩이나 현실에 쫓기면서 마음 여유 없이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겐 조금은 팔자(?) 좋은 이들을 위한 기부 안내서 같아 보여 가혹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고 그런 목사님이 아닌 맥도날드 목사님이 쓴 책이라면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그 기대가 충족될 것이다. 맥도날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베푸는 삶이란 지갑의 척도가 아니라 영혼의 척도일 때가 더 많다.…베푸는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확실한 믿음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복음의 진보를 위해 자기 소유의 일부를 전략적으로 후히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10-11)…재물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영적인 안전 벨트를 조여야 한다.(110)


서문에서 저자는 이 작은 책에 대해 “대단한 인용문이나 이야기, 설교조의 훈계가 가득 찬 글이 아니다”(12)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탁월한 통찰력에서 나오는 잠언으로 가득한 책이다. “베푸는 자에게 다가오는 유혹이 있다. 큰돈을 베풀면 삶의 다른 부분에서 많은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가려진다는 생각이다.(91) 같은 대목은 “역시 맥도날드!” 하면서 무릎을 치게 만든다. ‘헌금은 이제 그만!(44-45) 같은 글은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글이 아니다.


베푸는 삶과 관련해 경건한 성품, 성실한 청지기, 확고한 믿음, 참된 겸손, 우상을 버림,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이란 6개의 큰 주제에 따라 각각 7-11개의 짧은 글이 이 책의 전부다. 한 쪽이 조금 넘는 문자 그대로 짧은 글이 이어지므로 맘만 먹으면 한 시간 정도에 독파할수도 있는 분량이지만, 기왕에 베푸는 삶에 관심을 갖는 독자라면 그렇게 서둘러 인식하게 이 책 읽기를 시작하고 끝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자원 봉사와 기부 문화가 발달한, 그래서 여유 있는 미국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는 배부른 메시지라 볼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런 패배의식을 갖고 이 책을 경원(敬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맥도날드는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일에 하나님의 마음도 움직인다는 ‘긍휼’(30)과 자신이 나누는 선물 속에 베푸는 자가 성육신해야, 즉 몸이 동참해야 한다는 ‘성육신 신학’(43)에 기초해 ‘전략적 드림, 적절한 관리, 뛰어난 정직성’(37)을 베푸는 삶의 세 가지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맥도날드 식으로 이 책에 대한 짧은 리뷰를 정리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부에 집착하라, 그러면 별 볼 일 없는 삶이 보장될 것이다.(69)




[서재석] “영광의 문” & “전능자의 그늘”, 엘리엇 지음, 윤종석 옮김

2003/11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린 사람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책 두 권















영광의 문(복 있는 사람, 2003), 343, 1만원

엘리자베스 엘리엇 지음, 윤종석 옮김



원제 Through Gates of Splendor

전능자의 그늘(복 있는 사람, 2002), 412, 12천원

원제 Shadow of the Almighty



630일 미국 코스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가는 비행기에서 읽은 포켓판 양장본 영광의 문(Through Gates of Splendor)은 느낌이 남달랐다. 이유는 두 가지였는데,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주인공 중 코스타가 열리는 휘튼 대학 출신들이 있다는 것과, 이 책이 나온 지, 아니 이 책에 나오는 다섯 선교사들이 남미 에콰도르에서 살인부족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지 어언 50년이 되어 가기 때문이었다.



현대 선교의 고전, 필독서



짐 엘리엇, 피트 플레밍, 에드 맥컬리, 로저 유데리안과 비행(飛行) 선교사 네이트 세인트가 에콰도르 정글 깊숙한 한 강변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접근하던 아우카 부족의 창에 찔려 순교한 것은 19561월의 일이었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부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같은 해에 남편의 일기와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의 자매편 격으로 좀더 널리 알려진 전능자의 그늘(Shadow of the Almighty, 작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역시 포켓판 양장본으로 역간)을 집필하던 중에 다른 네 미망인 선교사들의 부탁을 받고 이들 다섯 선교사와 주변의 기록을 엮은 이 책을 먼저 냄으로써 전세계에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알리고 그로써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속출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두 책은 지난 50년 가까이 현대 선교의 고전, 필독서로 널리 읽혀 왔다. 인터넷 영문서점 아마존(amazon.com)에 들어가 Through Gates of Splendor를 검색하면 18개의 짧은 독자 리뷰를 읽을 수 있는데, 그 중 몇몇 리뷰는 이 책을 20년 전, 30년 전에 읽고 최근 다시 읽었다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을 정도로 영어권 기독인들에겐 널리 알려진 책이다. 전도유망한 20대 후반의 헌신된 다섯 젊은이들이 살인부족의 창에 찔려 죽었다는 이 비보는 그 후 세계 각지의 각종 선교대회와 수련회 등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후배들의 각오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언론들도 하나같이 호평을 하고 있는데, Christianity Today 같은 잡지는 “엘리자베스 엘리엇의 기록은 감동적 작품 이상이다. 그것은 복음 증거의 심장박동 자체다.”라는 최상의 찬사를 아끼지 않을 정도이다. (실제로 전능자의 그늘 프롤로그 여덟 페이지만 읽어봐도 이 말이 별로 틀린 말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다.)



그들은 영웅도 순교자도 아닌 그리스도인이었다



무엇이 전도유망한 다섯 젊은이들을 남미 에콰도르의 이름 없는 한 살인 부족에게 나아가게 만들었을까? 이들은 굳이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처자식을 둔 평범한 보통 선교사로서 할 일이 많지 않았을까? 그들은 명성이나 모험을 즐기며 무슨 큰 일을 찾고 있던 걸까? “사람들은 짐 (엘리엇)과 그와 함께 죽은 이들을 영웅으로, 순교자로 칭송했다. 나는 찬동하지 않는다. 본인들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과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이 그토록 크게 다른 일이란 말인가?(전능자의 그늘 초판 서문에서). 저자의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과 선교가 무엇인가를 웅변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증거한다.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할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다.” 짐 엘리엇이 1949년 휘튼 대학에 재학중일 때 남긴, 그 후로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의 결단의 순간에 되뇌어지는 이 유명한 말은 그대로 그들의 삶이 되었다.



이 두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이들 5인의 개척선교와 선교사로서의 삶과 사역도 감동적이고 도전적이지만, 그걸 묵묵히 그리고 성실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그 기록들을 발로 찾아 다니면서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이다. 자신의 삶의 여정, 사역의 순간들, 생각의 편린들을 (누가 보든 안 보든) 그저 일상처럼 적어 내려가는 동안 이들은 또 얼마나 하나님과 살깊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 묵상의 깊이는 아마존 정글의 깊이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 뿐인가.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했듯, 또 그 일기와 메모는 물론, 가족과 친구 등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하면서 옛 기억들을 복원해 내는 동시에 오늘의 독자들이 호기심과 흥미를 잃지 않고 끝가지 읽어 나가도록 붙잡는 성실한 글쓰기는 수작(秀作), 역작(力作)의 견고한 기초를 이룬다. 모르긴 해도 이들이 오늘을 살았다면 니콘이나 캐논 디지털 카메라로 영상 기록을 남기고, 자신들의 홈페이지를 통해 수려한 포토 에세이로 기도편지를 대신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록을 남기고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



여기서 우리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본격적인 선교를 하기 시작한 지 어언 30년이 되고 있고, 지구촌 곳곳의 미전도종족에 이르기까지 만 명이 넘는 일꾼들이 나가 있고, 1세대 선교사들은 이제 은퇴를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선교지 르뽀나 선교사 전기, 자서전, 회고록으로 내세울만한, 권할만한 책들은 극히 미미한 편이다. 시작은 다들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데, 그 후 어떻게 일했더라는 피부에 와 닿는 생생한 기록들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현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선교사들 자신과 단체들, 파송교회들의 일차 자료(기록물)에 대한 인식 부족, 문서 자료에 대한 푸대접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기도 편지는 물론 사역 기록(spiritual journal)에 대한 훈련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듯하며, 사진 자료로 가면 그 희소성은 더해만 간다. 요르단의 김동문 선교사 표현을 빌자면, 아무 근거 없는 알량한 선교보안 의식만 버려도 크게 달라질텐데 말이다.



이것은 비단 선교 뿐 아니라 내로라하는 쟁쟁한 1세대 목회자들의 은퇴를 코앞에 두고 있는 목회 영역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별로 쓸데없고, 그 얄팍한 울타리만 벗어나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이너서클(inner-circle)의 용비어천가 식 찬하(撰賀)나 무성하지, 그들의 인간적, 사회적, 목회적 고충과 분투를 있는 그대로 리얼하고 균형있게 묘사하고 기록해 비단 그 추종자들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에 널리 읽히면서 인구에 회자되는 당대 유명 목회자, 운동가들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은 언제쯤 나올 수 있을지 가히 요원하기만 하다.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남편의 끔찍한 죽음이란 시련을 딛고 쓴 이 두 책은 이런 의미에서 오늘을 사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중의 감동과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짐 엘리엇 선교사들처럼 치열하게 살고, 기록을 남기며, 엘리자베스 엘리엇과 같이 그 기록들을 고르고 정리해 책으로 묶어내는 장인정신에 대해 생각할 때이다.



사족 1. 요즘 나오는 책들은 내용 못지 않게 표지도 신경 써 만드는 게 많은데, 영광의 문은 아마존 정글을 드러내는 듯한 청색과 흑색만을 쓰면서 젊은 다섯 선교사들의 50년 된 활짝 웃는 흑백 사진을 앉혔는데, 마치 정글의 새벽을 여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또 이 두 책은 등장인물도 같고 저자도 같지만, 판형과 번역자(윤종석)도 같아서 일관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좋았다.



사족 2. 다섯 선교사가 죽임 당한 후 살인부족 아우카족은 어떻게 됐는지 그 결말이 궁금한가? 두 책 중 하나만 읽어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