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7 D5] 폐회 예배 스케치

[Kosta 2017 D5] 폐회 예배 스케치

두둥 둥~.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예배입니다.

 폐회 예배는 Kosta 2017 조직위원장이신 김도현 목사님께서 전해주셔습니다.
“이번 주간동안 우리도 세상에 나그네로 보내심을 받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노승환 목사님의 월요일 주제특강, 김성환 목사님의 오전 성경강해를 통해 또 박대영 목사님, 노진산 목사님, 송병주 목사님, 성경공부와 세미나와 상담과 조별 모임과 모은 일들을 통해 깊고 넓게 보내심을 받은 나그네가 누구인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강사님들을 생각해 보니 불법체류자들도 있었고, …  어떤 목사님이 목회자가 이런 집회 와서 은혜 받는 것 참 힘든데 정말 은혜 많이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다가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나서 목사가 그렇게 우는 거 보이는게 부끄러워서 중간에 나오기도 하셨답니다. …”
“너무 쏟아진 말씀들이 많아서 뭘 더 말씀 드린다는게 참 그렇지만 그래도 정리하겠습니다. 나그네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정말 우리는 오늘 당장 세상으로 나그네 여정을 떠나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일” 대신에 “누구”에 집중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우리가 누구인지가 밝혀지면 자연스레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와 거류민’입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의 멜로디를 새로운 가사를 써서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은 세상에서 상상도 하지 못하는 대안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고 욕하다가도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를 거룩한 민족,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확인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다름은 우리가 하나님의 캐릭터에 동화되며 생기는 거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들로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제사장의 기능은 무엇보다 중간에 서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임재와 지식을 열방에 중재하는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며 그들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찾도록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 미션이 이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세상과 하나님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 하나님의 지식과 구원의 복을 중재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제사장은 라틴어로 문자적으로 ‘다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주는 거룩은 세상에서 빠져나와 개인적인 영성의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는 그런 거룩이 아닙니다. 그건 또 세상을 적으로 간주해 싸워 무찌르는 십자군의 영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 베드로는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극단적으로 다르지만, 온전히 맞물려 있는 사람들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코스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가족입니다. 그리스도 몸과 피에 참여하는 성찬 의식은 세상으로 파송되는 코스탄들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광고맨~~. 올해는 얼굴을 보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처음과 끝만을 장식해 주셨습니다. 중간은? 영~하신 인디 광고 우먼께서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인디와 시카고가 함께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젊은 세대를 세워주는 겸손한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코스타의 전통인 악수례로 코스타 2017은 이제 폐막합니다. 악수례를 하는 줄이 줄지를 않습니다. 줄이 진행되다가 중간중간에 멈추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악수만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그 감사와 헤어짐의 섭섭함을 감당할 수 없어 허그하고 악수하고서도 손을 잡고는 놓지 못해서 그렇지요. 서로 너무 사랑하는 모습이 보기에 좋습니다.

[Kosta 2017 새내기 강사] 박대영 목사

[Kosta 2017 새내기 강사] 박대영 목사

박대영입니다저는 전라도 광주에서 광주소명교회를 5년 전에 개척하여 사역하고 있습니다그 전에는 약 10년 간 묵상잡지 <매일성경>의 편집장을 역임했고그 후 5년간은 <매일성경>의 자매지인 <묵상과 설교>의 편집장을 맡고 있습니다그간 신앙서적과 신학서적을 포함하여 21권의 책을 번역했고수많은 책을 책임 맡아 펴낸 출판인입니다<묵상의 여정>(성서유니온), <나만의 성경>(선율), <요한복음 1,2>(두란노) 같은 책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광주에서 <아카데미 숨과 쉼>을 통해 지역의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고 있습니다아내(오차성)와 두 아들(인서, 선재)가 있습니다깊은 해석과 묵상을 통해 조국교회의 강단이 새로워지는 일에 일조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간 유럽코스타(5)와 상해코스타(1), 뉴질랜드코스타(2)는 참석해보았지만 미국은 처음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지체들과 만나는 기대가 있습니다강사들과의 교제나 그분들의 말씀에 매번 큰 도전과 배움을 얻고 있습니다제게 주어진 주제(“나그네로서의 예수님의 삶”) 자체가 오래도록 곰삭이게 하는 테마였기 때문에 준비하는 내내 제 자신에게 좋았습니다코스탄들 앞에 서기 전까지만이라도 생각이 잘 정돈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참 적실한 주제이고요 다양한 강사들을 통해 얼마나 풍성하게 이 메타포가 조명될지 제 자신도 기대가 큽니다지금껏 개인적으로 만나고 상담했던 지체들이 회심도 하고 가끔 연락을 해오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수고로운 일정에도 적잖은 보람을 느낍니다이번에도 그런 절묘하게 예비된 만남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그네된 백성의 삶은 그 자체로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자유의 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 즉 중심을 향하고, 주류를 향해서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많이를 추구하는 삶은 죽음의 문화를 따르는 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서 사는 삶이기 전에 영생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십자가의 방식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나그네 정신을 잃어서 지금 많은 이들을 괴롭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시대 사조를 대변하는 현상입니다. 그런 때에 가장 강대국에 사는 코스탄들이 나그네 의식, 순례 맨탄리티를 가지고 삶으로써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안식과 평화를 만끽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너무 심각해지지 말고 잘 놀다 가십시오. 좋은 친구들 많이 만나고, 좋은 책 소개 받고, 또 좋은 질문 하나 얻어가는 시간 되길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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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러분의 강사님께서 미국 코스타에 처음 오셨습니다. 그분들 중 몇분들을 모시고 인터뷰 형식의 기사를 기획했습니다. 이 기사는 그 일환으로 준비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Kosta 2017 D4] 헌신의 시간

[Kosta 2017 D4] 헌신의 시간

마지막 밤 헌신의 시간은 차분하면서도 뜨겁게 진행되었습니다. 각자 헌신카드를 작성하는 시간을 가진 후 자신의 헌신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알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다른 문화권 사람들을 위해서 2년 이상 전통적인 선교사로, 또는 선교적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시는 분들의 헌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번째 헌신은 “새롭게 예수님을 받아들이시는 분들”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헌신은 “이웃에게 따뜻한 나그네, 세상의 것들을 쌓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 나그네, 착한 나그네, 성실한 나그네”가 되겠다는 헌신이었습니다.

기도와 헌신의 시간을 사진에 담아보았습니다.

 

집회 기간 내 쉬지도 못하고 열정적인 찬양인도를 한 우리 찬양팀.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Kosta 2017 D4] 저녁 설교

[Kosta 2017 D4] 저녁 설교

저녁 집회는 송병주 목사님께서 전해 주셨습니다.

나그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책임질 것 없이 사는 것이 나그네의 소명이 아니라, 나그네의 소명은 이 땅에서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지만, 나그네는 잃어버릴 것이 없기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삶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주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있었고, 비주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항상 주류가 쓰고 있는 듯 하나 하나님은 비주류들, 언저리과 주변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시대를 회복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와 갈등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이사야의 제자들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통파 사독의 후예들이고 이사야의 직속제자들입니다. 단순히 썩은 제사장들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제자들입니다.

이사야의 제자들은 국가신학, 애국신학을 들고 나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고, 다윗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무리 바벨론이 공격해와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적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신다. 앗수르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걱정하지 마라.” 이것을 국가주의 신학, 애국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와 갈등한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선지자들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학파와 갈등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비주류 선지자로 분류되는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가 ‘아나돗의 제사장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다윗 시대의 두명의 제사장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다윗을 도왔던 2명의 제사장이 있었는데, 첫째는 사독이고 둘째가 아비아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사장은 나중에 다윗이 죽고난 다음 다음 왕을 세우는 일에서 갈라서게 됩니다. 아비아달 제사장은 요압장군과 함께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시도했고, 제사장 사독은 선지자 나단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한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은 정적이되고, 두갈래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 정쟁의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의 승리로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리는 일을 주도한 요압장군은 죽임을 당했으나 제사장 아비아달은 죽지 않고 아나돗으로 낙향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삼고 아비아달은 살려주는되신 고향으로 귀향을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어디 출신일까요? 렘 1:1을 봅시다. “벤냐민의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비주류였던 아나돗 출신으로 아비아들 제사장의 후예중인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소명은 위대한 사역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그리고 청년사역을 하면서 항상 유행했던 말이 “어떤 소명을 받았느냐? 넌 비전이 있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비전, 소명 이런 것은 굉장히 위대하고 가치있고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비전, 소명 이런 단어는 항상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히려 소명은 그런 위대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살펴 보는 것처럼 소명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로 부르시는 소명이었습니다. 소명은 위대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으로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염소와 양의 갈림길은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섬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혀 그렇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우게 하며,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고, 헐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병든 자들을 돌보며, 감옥에 갖힌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 바로 왕되신 하나님에게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40절은 이것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염소와 양의 갈림길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잘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어떻게 했느냐를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작다는 것의 최상급이며, 단수형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많은 사람에게 잘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 한명이라도 가장 보잘 것없는 한명에게 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변질되었습니다. 위대함을 추구하느라 한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성경공부가 나쁘다, 성령운동이 나쁘다, 교회 성장운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자를 통해 예수님을 섬기는 법을 잃어버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 성경, 교회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 받은 죄인을 향항 긍휼을 잊었다면 성경공부도 비본질이 되고, 성령은사 체험도 비본질이며, 우리가 세운 교회도 비본질이 될 수 있습니다.


골 1:24은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몬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으로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복음의 일꾼은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주님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바로 너희, 곧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곧 십자가의 길을 내 육체에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가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이유는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물론,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나에게 돌 던진 사람들, 그 땅을 향해 다시 들어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청지기 정신이 바로 나그네로서 선교적 제자도를 실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눅 12:45-47을 읽어봅시다. 청지기는 주인만 잘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청지기라고 부를 때,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주인에게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 종들에게 잘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청지기가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쫓겨나는 이유는 그가 주인에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신학도 시절, 저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리겠다고 결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마음으로 도전하셨어요. “날 위해 목숨을 던지겠다고 하지 말고, 내가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내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드리겠다고 하면 안되겠니?”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일반 종교는 신을 위해 백성이 죽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신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바칩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백성을 위해 신이 죽으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한 ‘미련한 복음’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강한 십자군’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죽여서’ 이루려 하지 말고, ‘죽어서’ 이루어야합니다. 원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수된 것을 소멸시키라고 했습니다. 양들을 위해 생명을 드리겠다는 사람들은 그저 따뜻합니다. 그게 바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제대로 섬기는 길이 종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길입니다.

기억합시다. 온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한 생명에게 시간 쓰는 것이 낭비입니다. 하지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생명에게 시간 쓰는 것이 온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썩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리려면 자기도 더러워지는 것을 하숫물에서 배웠습니다. 그런 자리에 쓰시면 하수도에 흘러가는 물이 되도 감사하겠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많이 하고도 뭘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뭘 많이 하고서도 남는 건 은혜와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염소들은 자신들이 뭘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려놓는 것이 아닌 내려놓게 되는 수동태의 삶입니다.

이삭처럼 우물을 빼앗기면 보복하지 않고 다시 파고, 또 빼앗기고 다시 파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걸어가세요.

[Kosta 2017 D4] 코스탄의 ‘삶의 현장’ 3

[Kosta 2017 D4] 코스탄의 ‘삶의 현장’ 3

목요일 저녁 코스탄의 ‘삶의 현장’에서는 필라델피아에서 사역하시는 이태후 목사님께서 흑인 이웃들과 함께 살고 계신 삶의 현장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life On the uber street and his kingdom

주님과 함께 하는 나그네삶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4:18)

우리가 소망하는 삶은 좋은집에 좋은 차를 타고 안전한 동네에서 편안하게 살면서 지역교회에서 우아하게 섬기는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씩 구제 활동을 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가진채로. 하지만 그 모습은 예수님 생애에 하셨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 포로된자, 눈먼자, 고아, 과부 그리고 세상의 모든 눌린자를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 한없이 낮아 지셔서 십자가를 감당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처럼 세상이 말하는 주변인 이라는 곳으로 스스로 들어 가셔서 내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것이 나에게 한것이다 라고 말씀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실천 하시며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시는 이태후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교수가 되고자 하는 부푼 꿈을 안고 미국 유학길에 오르셨지만 주님은 그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약단속으로 하루에 백명이 넘는 사람이 채포될 만큼 위험한 필라델피아 동네에서 거주 하시며 그들의 이웃이 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그는 순종으로 화답하였습니다.

그의 순종은 우선 빈민가의 쓰레기를 치우고 거리를 깨끗하게 하는 아주 작은 마음의 배려 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쌓여있는 쓰레기를 치우고 또 치우기를 반복하며 마치 이삭의 우물처럼 그는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 빈민가 거리에 화초를 나누어 주며 회복 시키는 작은 기적을 경험하셨고 열린 이웃의 마음은 함께 아이들과 캠프를 진행 할수 있는 기회로 이어져 사회에서 가정에서 소외되어 자신을 주변인 이라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또 인종의 주변인이 다가와 베푸는 사랑은 예수님 이라는 공통분모로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갈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GUN point의 생명의 위협이 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에 더 분명하게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은 이땅에 속한 자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에 대한 소망 이었습니다.

스스로 먼저 이 땅의 주변인 으로써 정체성을 인정하고 깨닫고 그 주변인의 정체성이 다른 세상의 소외된 주변인 에게 다가가가 하는 약점이 아닌 강점임을 인정하며 주변인과 어울리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주변인은 바로 우리였고 이제 우리가 또다른 주변인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그러셨던 것처럼. [기사제공: 박세희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