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랜튼 코스타가 만난 사람(1) 김상수 형제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지 못하고, 부모님 또한 나를 부르지 못하신다. 부모님은 선천적 청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셨고, 아버지는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특수 목회를 하신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온전치 못하고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나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내 마음 속의 쓴 뿌리로 자리 잡았다. 그로 인해 심한 열등감을 자주 느꼈고,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불안하고 초조했다. 


전혀 오고 싶지 않았던 미국에 오고 나서 나의 고통은 더 깊어졌다. 고난은 각자에게 그 크기 이상의 절대 값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이런 집안의 아이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미국에 왔을까?” 그때 당시에는 잘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항의했고, 분노와 원망을 쏟아냈다.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다. 결국에 내가 스스로 내린 결론은 성공하는 것이었다. 더 강해지고 싶었고, 더 좋은 것을 찾아 나섰고, 성공을 향해 방황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고, 그래야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거라 착각했다.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왜 사는지도 모른 체 상처만 더 깊어져 가고 있을 때, 코스타에 참석하게 되었다. 코스타에서만큼은 그토록 내가 원했던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랬고, 참석하기 전부터 기도로 준비했다.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특별히 저녁집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교만함을 보이셨고, 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릎 꿇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는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느꼈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침묵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아파할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아파하셨고, 내가 울고 있을 때 하나님도 나와 함께 울고 계셨기에 그분은 침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부르짖음에 대답하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나와 항상 함께 계심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제 내 삶의 의문은 하나님이 어디 있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뀌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의 한인 이민자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관점으로 다른 이웃의 심정을 이해하기를 원하셨다. 모두와 함께 나누는 삶을 사는 소망을 가졌고,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웃은 단지 같은 민족인 한국인으로 국한되어있지 않고 다른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제 나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존재하고 생존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와 선한 이웃으로서 존재하고, 이 세상과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생존하는 것이다.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실패하셨지만 진정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성공과 실패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성공이 실패가 될 수도 있고, 실패가 성공이 될 수가 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쫓기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는 인생을 꿈꾼다. 물론 앞으로의 길에도 고난과 아픔이 많겠지만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를 기대하고 기뻐하련다.



* 김상수 형제는 7월 말부터 아프리카의 G국으로 missionKOSTA 를 통해 선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현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옥수정] 코스타 간증문

<코스타 집회 간증
2008년 7월 2일 >  

– 옥수정 – 

제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지 이제 여섯 해가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무려
30년 동안 소위 ‘모태 신앙인’으로, 특히 목사의 딸로
자라면서 교회에서 시키는 것은 모두 지키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교인으로 살았지만, 사실 제 속사람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져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순종적이어서 부모님께서 시키시는 일들을 기꺼이
다 하려고 했습니다. 골수 고신파답게 저희 부모님의
요구 사항 일순위는 주일 성수였습니다. 시험 기간이라도
주일날에는 절대로 공부하면 안되고, 쇼핑하거나 음식을
사먹어도 안되고, 심하게 아픈 게 아닌 이상 주일 예배를
빠져도 안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런저런 요구들을 아무
문제 없이 만족시켰던 저는 부모님과 교회 어른들께
칭찬받는 ‘타의 모범’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된
이후 기독교 신앙에 관한 질문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창조자, 절대 초월자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면 왜 그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어야만 하는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단지 기독교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등등. 부모님께
조언을 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시간이 지나면 그런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 의심과 회의는 어리석은 것이다’라는
식의 무관심에 가까운 부정적 반응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반항아가 되기를 포기하고 어떻게든 그런 고민과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부
시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을 대했을 때, 제
자신이 믿는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게
당연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무엇을 믿는지는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제가 구원받은 자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제 삶에 성령의 열매가
맺힐 리 없었습니다. ‘전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친구들에게 예수님
믿으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힘들어하면서
겨우 순종하는데 남들에게 어떻게 이 짐을 지라고 하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크리스챤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일쑤였습니다. 각종 자격증 시험이 주일에
치뤄지기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 많다고 느꼈고, 그
억울한 마음 때문에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지 않는 다른
크리스챤들을 보면 ‘가짜’라고 비난하는 가시돋힌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대학 입시에서
실패했고, 집안의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워 재수하겠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이 가르치신 종말론
때문에 10년 이상의 먼 미래를 구상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아버님이 권유하신 전문대 야간부를 다니며 낮에는
유치원 보조 교사로 일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요구하셔도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 길이 인정받지 못하는 낮은
자리라고 생각해서 제가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은근한 자부심마저 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
그 결정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종말론을
통해 줄곧 강조하셨던 것처럼92년에 등장하게 된다던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유럽 연합대통령이 결국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고, 제 마음 속엔 쓰디쓴 원망감이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아버님의 종말론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가르침에 제 인생을, 창창한 청년의 미래를
전부 걸었는데 말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버지가 진저리나게 싫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 앉아도 목이 아플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설교하시는 아버지 얼굴을 절대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잘못 들어선 제 인생길이 한탄스러워서,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 때문에 속앓이하면서,
아무도 없을 때면 골목길을 걷다가도 눈물을 쏟곤 했습니다.
 

그렇게 신세 한탄을
하며 반 년을 보낸 후, 아버님 말씀대로가 아니라, 제
자신이 바라는 꿈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고민 끝에 유아교육과 다닐 때 접했던 아동 심리학이
제 인생을 걸고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조금 벌어놓은 돈으로 재수를 해서 목표했던 심리학과에
들어갔습니다.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게 되어 너무나
감격스러웠지만,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과외를 하면서 점점 지쳐갔고, 인생살이의 고달픔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대했던 장학금 심사에서 밀려났을 때, 선배들이
나이많은 후배인 저를 대하기 어려워한다고 느꼈을
때, 과외하느라 학과 공부할 시간마저 부족했을 때,
그 모든 원망의 화살들은 어김없이 ‘아버지’라는
표적으로 날아가 꽂혔습니다. 그렇게 제 인생이 꼬이게
된 것이 모두 아버지의 탓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힘으로 인생을 꾸려가는 것이 너무 버거워
마지못해 사는 심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가슴 속에 담은 채로 유학을 준비하기까지
이르렀고, 그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갈수록 더 웃음을
잃고 찡그린 표정만 짓는 살벌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제 동생이
다른 교회에 나가 그토록 찾고 찾았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제 동생은 그 기쁨과 감격을 혼자만 누릴 수 없어서
내켜하지 않는 저를 설득하여 그 교회로 초청했습니다.
너무나 낯설게도 그 교회 분들은 신앙 생활의 감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며 밤새는 것을 예사로 여길
만큼 헌신적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열정적이고 역동적인
신앙의 원동력이 어디있는지 궁금해졌고, 결국 한 양육자
언니와 일대일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만남을
통해 제가 평생동안 큰 희생을 감수해가며 지켜온 신앙이
실상은 맹목적 신념일 뿐, 어떤 근거나 토대에 바탕을
둔 확신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수도 없이 읽고, 셀 수 없이 많은 설교를 들어왔지만,
성경에 기록된 사건들의 실재성, 그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의
부활이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충격적인 실제 사건이었음에
한번도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절대 일으킬 수 없는 그 부활 사건이 하나님의
실재하심,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심, 그리고 그분이
하셨던 모든 말씀을 신뢰할 수 있음의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 저는 마치 부러지기
일보 직전의 비틀거리는 의자에 엉거주춤 걸터앉아있다가
넓은 침대 위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쉴 수 있게 된 사람처럼
마음이 편안해졌고 정말 기뻤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 언니가 저에게 요한복음을 읽어보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2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을 돌아다니시며
사람들을 만나실 때 무엇을 느끼셨을지,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발견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그 예로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된 사건이 바로 제 눈 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박진감 넘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사람들에게 죄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던 그 현장에 같이 동참하여
예수님 바로 옆에 서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몰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돌려보내신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시며 뭐라 하시는지 말해보라고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진지한 언니의 기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
답을 대충 만들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쓸 만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고, 머리 속이 새하얗게 된 것
같았습니다. 오랫동안 쩔쩔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
그렇게 텅빈 스크린 같았던 제 마음에 마치 타이프라이터가
하얀 종이에 까만 글씨를 투둑 쳐서 새기는 것처럼
딱 하나의 문장이 튀어나왔습니다. “수정아,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

그 대답을 언니에게 말해주는데, 왜 그런지 자꾸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때 제가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도 아니지만, 그
일 이후로는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말은 셀 수 없이 많이 들어왔고
그런 가사의 찬송을 수도 없이 불러왔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옥수정이라는 이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온통 쏟아부으시는 분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십자가의 죽음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아픈 사랑의 고백임을 모른 채,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30년을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저 온 인류 중의 한 사람, 수 백억 분의
일이라는 미미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로지
저를 위해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실 만큼 소중한
그 한 사람임을 깨닫고 나서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행복한
사람
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 제 자신의
힘으로 꾸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꾸역꾸역 짊어졌던
고달픈 인생의 무게, 그리고 어둡게만 보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유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아버님의 얼굴조차 쳐다보기 싫을 만큼
지독하던 그 원망과 미움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원망과 미움이 모두 사라진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롭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남에게는 별 관심도 없이
제 자신의 일만 생각하며 전전긍긍 살았던 저의 좁은
시야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는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자신의 목숨을 부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들로
이 세상이 가득하구나! 그리고, 제 남은 삶을 드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에 쓰임받고 싶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처럼 놀랍고 감사한
새생명의 축복들을 맛보기 시작한 다음 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며 미국에 오긴 왔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왜 이 길을 허락하셨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께서 박사과정 그만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 시장에서 생선팔아라 하셔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종 ‘살기 힘든 이 땅에서 굳이 더 살 필요가 뭐 있나?
하나님 곁으로 빨리 불러주시면 그게 제일 좋겠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기쁨만으로
너무 만족스러워서 이 땅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제게 이 땅에서 살
시간을 더 주시는 이유 중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잃어버린
영혼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가 누리게 된 은혜와
축복에 동참하도록 돕는 것임을 알았지만, 제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것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굳이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은 곧바로
제게 한 영혼을 맡겨주셨습니다.
 

입학하자마자 나가기
시작한 대학원생 성경공부 모임에서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갖는 질문을 계속하는 신입생
한 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가던 중 그 친구가 우울증 때문에 오랫동안 고생했왔고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이 학교에 보내신 이유는 그
친구가 온전한 생명을 되찾도록 돕는 데 있다고 생각했고,
그 확신만을 붙들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한동안은 연구와 수업을 완전히 접고 그 친구에게 붙어
있기도 했고, 지금은 룸메이트로 같이 살고 있습니다.
지난 2년 간 많은 위기가 있었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이는
과정 속에서 결국 제가 그 친구를 돕는데 철저히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년 전 처음으로 그런 무력감과
절망을 경험했을 때, 너무나 힘들고 답답해서 새벽기도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연일 통곡하며 기도하던 중 에스겔이
본 마른 뼈 환상이 생각났습니다. 집에 와서 성경을
찾아보니 에스겔 37장이었습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4-5절)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3-14절)
이 약속의 말씀이 저를 붙들어주는
희망의 빛이 되었습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죽음의
나날을 보내는 그 친구에게 기적처럼 생기 넘치는 삶을
되찾아 주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된 후로 지금까지
그 친구의 상태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담대할 수 있는
평안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친구를 알아온 5년
동안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스케일로 일을 해나가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제가 아무리 원해도 제 힘으로는 그 친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시편 46편
10절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Cease striving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exalted among the nations, I will be exalted
in the earth.”(NASB)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일을 앞에 놓고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임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불안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 그 친구를 돕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고민이 들 때마다 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너는 도울 능력도 없으면서
무슨 궁리를 하고 있는거니? 그럴 게 아니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봐야지! 네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꼭 알려주실거야. 걱정마…’
 

한 가지 더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가슴아픈 것인가였습니다.
한동안 그 친구의 상태가 좋아졌을 때, 다른 친구들과는
즐겁게 어울리면서 정작 저를 멀리했기 때문에 제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어째서 자신을 도우려 애쓰는
저를 무시하고 거부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때때로 서러울 정도로 속상하고 슬펐지만, 결국은 그런
고통의 경험이 제 안에 사랑없음을 깨닫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하는 유익이 되었습니다. 나를 반겨주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만, 나를 무시하고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날카로운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아프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 손에 의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사랑을 닮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며 저도 그 사랑을 품을 수
있게 되길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이후 4년간 확신과
도전, 응답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는 남부러울게 전혀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확신, 감격, 기쁨, 감사, 평안,
열정…30년을 껍데기 크리스챤으로 살면서 절대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한꺼번에 다 얻고 나니 그 희열에 들떠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룸메이트를 돕는 일로 때론
너무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항상 제 편이셨고
또 제 기도에 즉각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저를 하나님께서 크게
치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년 1월, 운전시작하지
얼마 안되서 갑자기 폭우를 만났고, 당황한 마음에
앞차를 들이받아 크게 부서진 그 차가 견인되고 등이
아프다는 운전자는 병원으로 실려가게 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전혀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고가 날 때 하나님은
도대체 뭘하고 계셨단 말인가?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사고가 나는 걸 막지 않으셨나?
이런 회의와 의심이 석 달 넘게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 부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보험회사에서 모든 걸 처리해주길 노심초사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협상에 쉽게 동의하지 않아서 제가
고소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는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돈도 한푼 없는데 어떻게 재판을 치루나, 피해보상하라는
판결이 나오면 학업을 중단해야하겠지 등등, 끝도 없는
고민들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너무나 막막했고 사람들에게는
말하기조차 싫어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 따져보기라도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
 

그래서 새벽기도를 다시
나간 그날의 본문이 스가랴 13장이었습니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스가랴 13장9절) 이 말씀 앞에서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다 저멀리에서 빛이 들어오는 출구를
본 것 같았습니다. 그제서야 제 믿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얕았는지 깨달았습니다. 어려움이 닥치자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심하고, 그동안 누렸던
기쁨과 감사를 모두 잃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들으실 것이라는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의 끝에는 제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
보여주는 결과가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나타날 것이고,
결국 ‘나의 하나님’이 그 어둠의 골짜기를 통과하도록
인도하셨노라고 자랑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넉 달이 흘러가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 답답해하던 중 다시 피해자가 고소할 것 같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최종
결과까지 기다려 보기로 마음을 다잡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이시니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주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이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그 힘든 나날을 버틸 수 있었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고가 난 후로 열 달을
채우고 나서야 해결되었습니다. 그렇게 연단받아야할
만큼 저의 믿음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고, 저의
교만함은 하나님 앞에 심히 가증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 일을 통해 제 믿음이 조금이라도
더 든든해졌기 때문에, 제 교만함이 조금이라도 허물어져서
제가 가야할 낮은 자리에 좀더 가까와졌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해지기 위해 얼마나
더 배워야하고, 변화되어야하는지, 제가 앞으로 가야할
그 먼 길을 흘낏 본 것처럼 조금은 감잡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6년 전 여름, 저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벧전2:9)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제 인생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요5:24) 옮겨주신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제 안에 일으키신 변화는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고
또 감사합니다. 오늘의 저로 바꾸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여섯 해를 보낸
지금도 아직 변방에 있는 것 같아 쉬지 말고 부지런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더 가까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의 변화가 너무나 기대됩니다. 비록
지금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조차
지키기가 쉽지 않음을 절감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하셔서 이루시려는 일이 있다면 제게 이 땅에서
살아갈 날을 더 허락하시고 또 감당할 힘과 능력도
주시리라 믿고 바라며 하루하루 하나님만 의지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양승혜] 코스타 간증문

코스타 간증문

양승혜 

이 자리에 대한 콜링을 받고
가장 많이 망설였던 이유는 몇년 전 하나님께 했던
기도가 생각나서였습니다. 그당시 주님의 다루심으로
엄청나게 굴러다니고 있었을 때였는데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하던 저를 주님의 뒤에 그림자처럼 감추어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나 온 하나님은 늘
신실하셨고,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때가 언제나 제가 기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하니까 주변의
어떤 사람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기도를 했냐고 하더라구요.

터닝포인트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터닝포인트가 된 계기나 또는 그렇게되도록 여러분의
삶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점과 사람이 2명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와 제 여동생입니다.
어머니는 어렸을때 교회를 다녔지만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몇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신론자에 기독교를 예수쟁이라
불렀던 아버지의 오랜 핍박에도 불구하고 10년동안의
기도 끝에 아버지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동생은
딸셋 중 가장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중학교때 예수님을
만나고 대학교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아프리카에
마음을 품고 준비해온 10년만에 지금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고, 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는 남편을 만나 4년여동안
기도한 끝에 남편이 함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집에서 자라났는데도 저는 꿋꿋하게 선데이크리스천으로
30여년을 잘 버텨왔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나누는
대화가 시끄러운 녹음기를 계속 틀어대고 있는 것처럼
듣기싫었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청개구리마냥 자꾸 반대로
튀고싶어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꼬리 두개 달린
원숭이들 틈에 낀 꼬리 한개 있는 원숭이처럼 느껴졌고
나는 정상, 그들은 비정상..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출발

학교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서른을 앞에 두고 바라본 제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허무함에 시달렸고 하는 일마다 계속
잘 풀리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처해지자 어렸을때부터
들어왔던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은 인생의 가파른 절벽 가운데 떨어질 듯 서있다가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혼자 떠나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때 지금까지는 내 멋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하라는 것만 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준비한 후 스웨덴에서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비장한 각오로 말하기를 ‘나를 기다리지
말아라…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된다고 느낄때
돌아오겠다’ 머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운
인생을 기대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달라진 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만나주셨던 그 날 주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교훈련 및 영국유학생활

훈련은 정말 값진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강의를 들으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를 용서했고,
제 안에 무너졌던 나를 주 안에서 다시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9개월 동안 훈련과정을 마치고 주님께서 영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셔서 언어공부를 시작하게되었습니다.
그곳은 저에게 단지 유럽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현장 가운데로 나와 정말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살아보는 또다른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유학생활에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당시
랭귀지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나
취업을 앞두고 언어를 준비하기 위해 온 젊은, 저보다
어린 학생들이 주였습니다. 저처럼 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잘 모르는 노처녀는 그닥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하고 싶은 공부도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제가
했던 일을 다시 하면서 또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목적을 발견하기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랭귀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고…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이 2년동안 저를 그렇게 두셨습니다. 아는
한국사람도 없이, 돈도 없이, 영어도 잘 못하면서 무슨
깡으로 그 시간을 버텨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에 오자마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는 전도대상자들이었고, 특히
학교에 가면 옆자리에 앉은 학생을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었습니다. 제 마음은 가난해졌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가득했으며, 외로웠고,
배고팠으며, 의지할 곳은 주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작은 신문사이지만 취재기자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나름 케리어를 쌓아왔었는데 이 낯선 땅에서
나는 이름도 제대로 불려지지 못하는 웨이츄리스로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결정했던
저에게는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부르심

주님은 그 긴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던 상관없이 나를 당신의 자녀라
부르시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좋은
교회와 사람들을 붙혀주셨고, 돕는자를 보내주셨으며,
잘 곳을 주셨고, 일할 곳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하는 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2년의 시간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은 제가 모세가 아님을 아시고
더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2년뒤 어느
날,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무도
명료하고 또 뜻밖이서 저는 마구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첫째 아~ 드디어 주님이 내게 뭔가를 말씀하시는구나라는
것과 둘째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당시
제게 진짜 뜬금없는 발언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신학을 공부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동생이
선교사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제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잘못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 선교사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너를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팔짝
뛰면서 그런 말씀 마시라고 했었거든요. 갑자기 그
말이 오버랩이 되면서…주님 아니지요? 제가 잘못 들은거지요?
되묻기도 했습니다. 3일 지났는데도 제 마음 가운데
울렁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밥을 먹을때도 길을 걸어갈때도
그저 멍한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 순종의 카드를 들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국에 있는 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단 한번도 내가 선교사가 될꺼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제가 이제는 선교사가 아니면 하고픈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국 귀국 후

제 삶의 목적을 발견한 후,
저는 마치 움츠렸던 개구리가 뛰어오르듯 그 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곳에도 모자란 저의
모습 때문에 무수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했만 하나님은
저와 함께 하셨고 선교사의 길에 대해 확신없는 저에게
차츰차츰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셨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근처 다른 대학 캠퍼스에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 참여하면서 캠퍼스 사역과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훈련과 공부를 마치고
5년이 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때
저는 아마도 당장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는 당돌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셨고, 훈련시키셨고,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주셨으니 길을 여실꺼라는 완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송교회도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나이 많은 여자 평신도 였으며 적어도 파송을 받고
나가려면 또 몇년을 한국교회에서 섬겨야만 했습니다.
길은 막힌 것 같았고, 한국에서 제가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나,  취직을
할까, 결혼도 해야하는데…또다시 현실이라는 이름이
저에게 벽처럼 다가왔고 나는 무엇하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한국의 현실을 받아드려야 했습니다.
그 당시 호주에서 사역하고 있던 동생부부가 아기를
낳고 한국에 들어와있었고, 파송을 받고 아프리카로
나가려고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들의 안정된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또 나는 얼마동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던중 친구의 소개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그곳에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약속을 취소하고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이신 선교사님은 그 집회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강의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타협점들과 선교에 대한 헌신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직장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주님,
이거 한가지는 안돼요 하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보라고
하신 뒤  잠시 시간을 주시고 그것을 지금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직장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데(사실 없었기 때문에)… 나는 뭘까? 고민하다가
주님의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선교’ 순간
저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주님, 선교라뇨? 그것은 주님이 저에게 주신 거잖아요?
저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하겠다고 버팅길때는
떠밀어서 보내놓고, 이제 하겠다고 하니까 하지말라는
겁니까? 제 마음 가운데 심하게 요동치는 혼란의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선교사인 동생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튀겨가며, 오늘 주님이 나보고 뭐라셨는지
알아? 하면서 흥분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흥분된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동생은
침착하게 단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주님이 가지말라면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신이  대학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교훈련을 받던 강의 중에 강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교지로 가기 위해
가방을 다 싸놓았고, 티켓이 손에 들려있으며 이제
집 문을 열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지금 가방을
내려놓고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방에서 나가십시오.

선교에 대한 내려놓음

그랬습니다. 주님은 제가 멈추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3일동안 주님앞에 나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왜이러세요. 지금와서 어떻게 포기해요~하지만
또다시 주님 앞에 순종의 카드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선교를 내려놓았습니다.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흘렸던 눈물들이 2배가 되어 쏟아져나왔습니다.
내려놓겠다고 고백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는데 뭔가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많이 울었던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승혜야~ 너는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는거냐? 내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인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너를 불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부르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내게 비전을 주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주님앞에 회개했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당신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것이 제가 지은바 된 이유입니다.

저는 왜 주님이 저에게 선교를
내려놓으라고 하셨는지 알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제가
선교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자로
있기를 더욱 갈망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되고 하나님을 마음을 닮고자 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그분이 정말 관심있어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깊이 교제하며 그 안에서
자녀된 삶을 누리는 것이요, 또 그렇지 못한 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혼구원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이제 선도
보고 결혼도 하고 지역교회도 섬기며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그러면 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동생을
통해 NGO단체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콜링을 받게 되었습니다.
NGO단체는 타 선교단체와는 달라서 파송교회 없이도
선교지로 나갈 수 있으며,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기때문에 신분상 NGO였지만 실제로는 선교사를
원했습니다. 저에게 조심스럽게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본
나라는 아프카니스탄이었고 그때는 사건이 생기기
3개월 전이었습니다. 한번도 어느 나라를 가겠다고
생각해 놓은 곳은 없었지만 그곳은 뜻밖의 나라였고
그때도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
많던 곳이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을? 네~3일을요.
말씀묵상을 통해 주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승혜야~
니가 갈 수 있겠느냐? 나를 위해서? 저는 제가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이고,
부모님도 걱정하실테고 아직 결혼도 안했고, 한번 가면
5년이라는데, 거긴 너무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고 등등….하지만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질문 앞에 이것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고 그당시 함께
중보했던 가족들 역시 믿음으로 응원해주셨습니다.
결혼도 안한 딸을 다시 위험한 타국으로 보내야하는
부모님이셨지만 어머니는 선교사로 헌신한 딸들은
이미 주님께 드린거다, 살던지 죽던지 주님의 몫이며
어차피 사는 인생,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만큼
영광이 어딨겠냐고 비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생은
막 웃으면서 언니~ 걱정마~ 절대 안죽어. 주님이 그런
영광을 언니한테 주시겠어?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원서를 내도 꼭 가게 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현지에서
함께 동역할 사람의 agreement가 있어야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려놓았을때 다시 주님이 길을 여셨고, 어떤
것이든 제가 순종했기에 주님이 이미 저의 마음을 받으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개월동안 서류준비와
절차를 거쳐 면접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면접날짜가 3번이나 바뀌면서 계속 늦춰쳤습니다. 그러던
중 인터넷을 통해 동생이 우연히 발견한 선교단체 간사
자리에 동생이 직접 원서를 넣어 어플라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없이 면접을 봤는데 (그날이 NGO단체 면접이
취소된 날이었습니다) 붙게되었고, 다시 주님의 뜻을
구하던 중 그 당시 결과를 통보하기 전에 3일동안 미션캠프에
참석하였는데 제가 이곳에서 좀 더 배우고 교회를 섬기며
동역자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3개월 뒤,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터졌고 저보고 그곳에 간다고 미쳤냐고 말했던 사람의
전화가 쏟아지면서 안가길 잘했다는 말을 들었을때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왜 갑자기 다른
길로 저를 인도하셨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서류까지 다 통과하고 거의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왜으로 선교단체 간사로 섬기게 하시는지
그때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결혼 그 이후

사실 서른살에 한국을 떠날때는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기에 결혼에 대한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타국
생활을 하면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한다고
해서 적다보니 20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횟수가
지날수록 리스트가 점점 짧아지면서 한국에 온지 1년동안
무수히 많은 선을 보고 거의 포기 상태로 갈 무렵 단
세가지 기도제목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선교헌신자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에 대상자를 거의 제안하고 있었기에
어려움이 더 많았고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중에 사역자나
선교사 또는 헌신자가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끌리지않았습니다.

저의 세가지 제목은 첫째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예수님이 삶의 수선순위인
사람이었고 둘째, 교제하면서 신앙의 깊이 있는 부분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셋째,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남편을
소개해주신 형제님이 소개 전에 저에게 물으시기를
반드시 선교 헌신자여야만 하냐고 물었을때 저는 꼭
그렇진 않아도 되는데 진짜 크리스천이어야 된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당시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중이었고
저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그를 알게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저에게 보내신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보고싶어져서
결국 미국으로 날아가는 결단을 감행했습니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결혼을
앞두고 계신 자매님들은 귀한 믿음의 형제를 얻기 위해서는
과감한 액션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워낙 이 세계가 형제가 귀한 곳이라서요. ^^; 우리 두사람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그것도 우리가 서로 기도해왔던 배우자를
정말 기가막힌 방법으로 만나게 되었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알게 된지 6개월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이치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동일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의 ‘그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도와 인내로 싸워가며 말도 안되는 배우자상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음으로 주님의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고,
이번 가을부터는 저도 함께 간사로 섬기면서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영국에 있을 때 캠퍼스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학생들에 대한 마음을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상황과 여건때문에 주님이
주신 비전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를 내려놓고 주님앞에서
빼앗긴 사탕때문에 아이처럼 울고있을때 주님이 저에게
약속을 지키실꺼라 말씀하셨고, 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연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제가
있는 이 자리가,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게 주신 선교지임을
확신합니다.    

2008 시카고 코스타 간증문 1

코스타 간증, 간증하신 분의 요청으로 익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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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매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나왔습니다. 제가 무대공포증이 있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지금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은 무엇을 의미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처음에 간증을 부탁 받았을 , 아주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마음속에 자리했던그거 내가 하고싶다라는 생각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서 지금 자리에 오른 순간까지도 저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고 두렵게 합니다. 저의 간증을 이렇게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믿게된 제가 가장 확실하게 하고 있는 경험은두려움입니다. 나는 이제 죄된 본성에 따라 없는 것이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마음이 곳곳에서 감지되기 때문에 제게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쩌면 평생을 걸고 싸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거침없이 살았던 인생과 맞물려 있겠습니다.

지금은 학문을 하고 있지만, 학자의 길을 걸으리란 생각은 하질 못했습니다. 여기 유학생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어릴 적부터 성실히 공부하고 꿈을 키워서 이곳까지 나오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저는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8
할이 우연한 일들이 겹쳐서 이곳까지 나오게 경우라고 있겠습니다. 고등학교
1
학년 때까지 지기싫어하는 성향 때문에 공부를 잘했고 남들 웃기는 일을 좋아해서 전교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반내에서는 인기가 많았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학년이 되면서 친구와 급격히 가까워졌다가 종국에는 절교를 하게 되는데, 시점과 사춘기가 맞물려 매우 혹독한 사춘기의
2
년을 보내게 됩니다. 친구문제로 한참을 방황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가 고등학교
2
학년 말이었는데, 성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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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에서 6등급으로 하염없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3학년에 접어들면서 성적을 올리지 않는한 대학가기도 힘든 성적으로 떨어지게 되다보니, 대학 까짓껏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던 같습니다. 아무리 1학년 때까지 착실히 학교공부를 했다고 해도 그렇게 2년을 숫제 놀았기 때문에 사실 대학엘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수능으로 입시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는데, 새로운 제도의 시행이라 해는 특별히 1차와 2 두번의 기회가 주어졌고 복수지원이 시작된 때였습니다. 그런데, 1 시험이 고등학교 과정 기초부분이 많이 다뤄져서 예상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는 일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친구들과 시험 전전날까지도 재수할까 장사할까 그런 이야기들 하고 그랬던 같은데, 점수가 제가 어울리던 친구들과 너무 차이나게 나온 것입니다. 딴에는 내가 의리를 지키마하고 지원 안하고 같이 재수하마 했는데,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막내이모가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한두군데만이라도 혹시 모르니까 지원하자고 졸라대는 통에 이모가 골라주는대로 아무 성의없이 대학입시원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진짜 기대도 안하고 생각없이 친구들과 놀고 있다가 대학에 붙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건데, 막상 합격소식을 들으니 갑자기 재수하기가 싫어지더군요.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친구들에게 집에서 대학가라고 난리가 났다는 어정쩡한 핑계를 주고서는 대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어설프게 들어가게 되었지만 대학은 제게 바꿀 없는 소중한 수많은 경험을 주고 의식을 성장시킨 장이었음을 부정할 없습니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학업에는 전혀 뜻이 없었고 음악과 영화, 그리고 문화/사회 비평 분야에 재미를 느꼈습니다. 많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자연스레 여행할 기회가 많아지고 여행을 통해서도 세상의 여러가지를 배우고 느낄 일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활동에 매진하는 동안 꿈같던 시간이 흘러 어느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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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 마지막 학기가 되어 졸업이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루는 날이 좋아서 잔디밭에 앉아 신문을 펼쳤는데, 세계의 뇌과학 연구에 대한 특집 연재 기사가 있어서 관심있게 읽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과선배 하나가 제가 잔디밭에 있는걸 보고 인사할 들렀습니다. 슬쩍 보더니 우리학교에도 뇌과학 센터가 생겼으니까 관심있는거면 한번 가서 알아봐라했습니다. 사실 뇌과학이라는 말도 신문보고 알았으니 관심있는 것도 아닌데뭔지도 모르면서도 뇌과학센터라는 말이 근사하게 들렸던 같습니다. 그냥 그래볼까하고 아무 생각없이 센터에 전화를 했는데, 어디에 전화를 누구에게 하는지도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한터라 상대쪽에서 누굴 찾으십니까 하는데 제가 글쎄요 했으니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죠. 뇌과학연구센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전화 받으신 분이 친절하게도 새로오신 교수님이 계신데, 학생을 마침 찾고 있으니 만나보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연락이 닿아 새로 오신 교수님을 찾아 센터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것을 계기로 시작해서 신경과학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되고, 실험실을 떠나 미국에 나오게 되어서도 하게된 공부의 재미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게 됩니다. 뇌기능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고 연구접근 가능한 기술을 익히게 되면서부터 알게되는 것보다 알고싶어지는 것이 많아지니 학문이 주는 즐거움이 이런 것이구나에 미쳐 그렇게 년을 지내오게 됩니다. 어떻게 미국으로 나오게 되었나, 시애틀이었나에 대한 얘기도 한참이 길지만, 결론적으로는 우연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시애틀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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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공부를 하는 것이 삶을 지탱하는 원천이었고, 그렇게 열정을 다바쳐 하루하루를 보낸는 것이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름있는 과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제가 하는 연구들이 다음 연구들의 중요한 기초가 있고,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기술을 들고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서 후학양성에 힘을 보탤 있다면 인생에서 몇가지 쯤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할 있을만큼 제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시애틀에 와서 얼마되지 않아. 우연한 계기로 형제 분을 만나 성경공부를 소개받게 됩니다. 제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 좋아 소개를 받은 것이지 사실은 형제분과 초면에 시간동안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을 했습니다. 그것이 벌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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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일이라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는 기억하진 못합니다희미하게 기억하는 것은 창세기의 창조부분은  여러 신화의 내용들이 뒤섞여있는 형태라는 점에서 단순한 민족 신화에 가깝다는 내용과, 기독교가 종교로서 갖는 배타성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나 합니다. 그런데 논쟁 중간에 분이 자존심을 긁는 발언을 합니다. 제가 몰라도 한참 모르면서 아는 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너무 기초가 없어서 논쟁이 되질 않는다며 번만이라도 공부에 나와서 공부해보고 다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 없겠냐고 하셨죠.
아니오했어야 하는데, 자존심이 건들어지는 바람에
그러죠라고 대답을 것을 계기로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겠다고 입밖으로 내면 해야만 하는 성격탓도 있고, 도대체 내가 모르고 그렇게 말한다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믿음이 없는 상태로 꾸준히 성경을 공부하게 됩니다. 삼년이 넘는 시간을 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성경의 말씀이 크게 마음에 남는다거나 믿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어떻게 이렇게 거짓말같은 이야기들을 믿을 있다는 것인지 더욱 의문스러워지기만 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구절이 바로 창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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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말로 믿을 없는 새빨간 거짓말인 것이었죠.

그래도 한가지 마음속에서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면, 성경공부 때문에 성경을 읽게 되면 읽게 될수록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개념이 마음에 자꾸 걸리적거린다는 점이었습니다. 한번은 성경공부하는 중에 성경책만 펼치면 왠지모르게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되어서 기분이 나쁘다라는 말을 했더니 형제분이 그것이 그러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을 했을 당시에는 막연한 어떤 것이어서 어떻게 생각해봐야 하는건지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뭔가가 마음에서 걸리적거림이 있는건 분명하다 정도였을 겁니다. 그것때문에 처음으로 성경공부 이외에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던 같습니다. 저를 성경공부로 인도하신 분이 다니시는 교회를 따라 나서게 것도 즈음, 그러니까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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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순이었습니다. 설교는 성경공부에서 갖기 힘든 통찰이 있게 하는 같아 좋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교를 듣는 중에 목사님이 요한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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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구절을 잠깐 읊조리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런데 순간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속에 어떤 울림, 마치 보신각 같은 종이 바로 옆에서
하고 울린 것같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돌아서 나오는데 무슨 일인지 앉았던 자리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뭔가 변화가 일어난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이라 도무지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였습니다. 무엇인가 다르다라는 것을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제일 먼저 감지한 다른 점은 성경을 읽을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려고 해서가 아니라, 말씀이 마음에 망치로 내리치듯이 들어오는데 그것은 대단한 경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읽는다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오감을 통해 말씀이 들어온다고 하는 것이 가장 비슷한 묘사가 아닐까 합니다. 성경을 통한 그러한 경험이 날마다 진행되면서 안에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부정할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실로암에서 눈을 뜨게 소경처럼,
이러한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누가 이렇게 하게 합니까?’라고 물을 ,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부정할 없는 대답이 되어 역시
주님, 제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감사의 기도를 올릴 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저에겐 완전한 치유자로서의 주님이셨고, 온전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면 세상을 보게 됩니다. 저는 눈을 뜨면서 처음에 보기 시작한 것들은 어제까지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린 날의 친구는, 문화는, 그리고 과학은 제가 마음을 다바쳐 사랑했던, 무엇과도 바꿀 없던 내가 섬긴 우상이었습니다. 우상들을 위해서 그토록 죽을 힘을 다해 살았던 모습은 당시엔 반짝였을지는 모르지만 영원할 없는 그런 것이었음을 보게됩니다. 그렇게 때는 분명 즐거운 삶이었고 의미있는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안에서 너무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너무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모습을 인식하게 때마다 동시에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제게 있어서 이것은 너무 놀라운 경험입니다. 저는 항상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특별히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억지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나는 살아있다라는 생각을 해보질 못했는데,
나는 살아있다라는 인식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어제까지의 모습이라는 영상과 더불어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잡미묘한 상태를 저는 어떤 말이 형용할 있을지 아직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냥
감동이야 정말‘, 정말 감동입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리신 하나님이셨고, 얼마나 오랫동안 저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셨는지에 대해 느낄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하루하루 풍성해지는 삶을 그냥 받기만 해도 되나, 내가 뭐라고, 내가 뭔가 해야하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이 많이 들지만, 딱히 내가 있는가 말이다 그저 이렇게 주시는 풍요함을 누리는 마리 양으로 살면서 감사할 밖에는

시카고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문득 창문너머 풍경을 보고 있다가 주체할 없는 감동에 사로잡혀서 울음이 터지는 바람에 고생을 했습니다. 된통 했습니다. 저와 오랫동안 성경공부를 같이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그동안 나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구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유추해서 내린 결론이거나 미루어 알게된 그러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깨달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알려 주셨다라고 밖엔 저는 표현하질 못하겠습니다. 저를 오랫동안 대한 분들은 기에 곧잘 눌린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기라는 것은 힘차고 강한 좋은 기운도 있지만, 독기와 같이 남에게 상처가 되는 기운도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기운은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악에 받히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열나게 되면, 스스로도 기를 다스릴 없어서 곤란하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충돌 혹은 대폭발이 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자신의 단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정하기 쉽지않은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저를 경험한 우리 모임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까요? 모습은 예쁘지 않은 모습입니다. 예쁜 사람 사랑하기야 쉽지만, 미운 사람 사랑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명백하게 제게 감동으로 알려주심은 그런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구한 영혼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온전한 하나님을 만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목메어 말을 잇지 못하게 정도로 감동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곁에 두신 하나님, 그렇게 일하신 하나님을 깜냥으로 도저히 측정불능입니다. 경험을 통해 제게 보이시는 하나님은 사랑과 풍요의 하나님입니다. 저는 우리 지체들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것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도 아닌데 정말 거저 받았습니다. 그냥 이렇게 받는 주체할 없는 은혜를 두고 제가 있는 일이라곤 감격에 겨워 엉엉 소리내어 우는 일이 전부입니다. 지금은 제가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고등학교 친구하고 헤어지게 이후로 거의 울어본 일이 없는데 요즘은 하루에도 번씩 목놓아 울게 됩니다. 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심장이 터질듯한 감동 속에서 그러합니다.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어야 일에 대해 저는 어때야 하는가가 제게 수행해야할 남은 명령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연변총각’ K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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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총각’ K 형제


오늘 제가 어떻게 예수님을 어렵게 생각 하던 대로 부터 믿게 되었는지에 거기에 대해서 잠깐 얘기 드리도록 할께요.


저는 사실 대학 가기 전에도 저보고 뭐 하느님 있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었고 저보고 교회에 가자는 사람도 없었어요. 주위에 극소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전혀 나하고 관계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다니는가 했어요. 그랬댔는데…


이해의 편리를 위해서 저희 학교에 대해서 잠깐 소개 하겠어요. 제가 다니는 연변 과학기술대학은요 미국에 원래 계시던 김 진경 총장님께서 중국에 있던 조선족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그런 대학 이예요. 그래서 대부분은 한국이나 혹은 미국에 계시던 교수님들이고요, 학생들이 저와 같은 중국에 있는 조선족 학생들 한 80%와 한족들 20%로 그래서 한 1300명 정도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곳 이예요. 그래서 저는 사실 대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 모르고 갔는데 대학가서 그런걸 알게 되었고요. 그래서 대학을 거기 지원하게 된 것은 사실 그 학교에 가면 영어 잘 배울 수 있대서 그래서 지원했습니다.(웃음)


제일처음 대학가서 학부에서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 옆에 교수님이 식사전에 기도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이 교수님 예수 믿나 보다 하고 저녁에 침실에 와서 침실에 선배에게 이런 얘기를 했댔어요. “이재용 교수님은 예수 믿나봐요.”그랬더니 선배가 막 웃더니만 “예수 안믿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더라구요.(웃음) 그래서 너무 당연한걸 물었나 싶어서 ‘ 아 한국사람은 다 예수 믿나부다’ 그래 생각했댔어요 (웃음).


그런데 첨 지내면서 알고보니까 교수님들이 학생들한테 너무 따뜻하게 대해줘요. 다 큰 학생들이 학교와서 다니는데 어린애들처럼 돌보고 너무 극진하게, 전에 받지 못했던 그런 관심들을 주더라구요. 그리고 저희 학교는요 총장님을 비롯해서 모든 교수님들이 학생들하고 한식당에서 줄서서 함께 식사를 해요. 그게 참 너무 이상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래서 참 너무 그분들이 전에 있었던 그런 학생과 교수관계를 뛰어 넘어서 너무 친한 사이로 그렇게 지내게 되었어요. 모든 교수님들이 다 따뜻하게 대해줬고요, 그래서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예수믿는 사람들은 원래 남을 위해서 봉사하기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왔나부다 하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학교에서 학생들 중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주위에 안 믿던 사람들도 교수님한테 전도받아서 가게 되는데 참 너무 이상하게 생각했댔어요. 그분들이 미국이나 한국 혹은 더 좋은 환경 속에서 돈 잘벌고 잘 살 수 있는데, 여기와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 좋은 것 다 버리고 일하시는 모습이 존경스러웠어요. 너무 우러러 보이구요. 그렇지만 그분들처럼 그렇게 예수믿고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예수 믿으면 돈도 많이 못 버는가 했어요 그분들이 너무 소박하게 살기때문에(웃음). 돈도 많이 못벌고 뭐 나쁜짓 조금만해도 자꾸 가슴이 찔리고(웃음), 좋은 것이라고는 모르겠더라고요. 뭐 옷도 좋은거 입으면 남들 자꾸 눈치 보이고 ‘예수믿는 사람이 뭐 옷도 저래 사치하게 하고 다니는가’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친구들도 가끔 교회 나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하고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나도 한번 교회 가봐야 겠어” 하더라고요. “뭐 교회가 니 가는데냐. 그런델 왜가”했는데, 그 친구는 아침에 못 일어나면 저녁에도 가고 뭐 하여튼 예배는 다니더라고요. 건달처럼 그렇게 다니면서 교회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교수님들도 차츰 지나면서 한 1년쯤 지나면서 교수님들하고 만나서 얘기도 하는 중에 자꾸 하나님 얘기가 나와요. 얘기하다 보면 마지막으로 가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해. 사람이 믿음이 없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데”하는 얘기를, 좀처럼 저한텐 이해되지 않는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시더라구요. 첨엔 왠지 그게 되게 싫었어요. 그래도 교수님 얘기하는데 딴 대꾸는 못하고 그저 듣고만 있었어요. 듣고 말끝나면 돌아오곤 했는데 그런 과정 중에 저와 친한 친구들도 교수님 그렇게 말하니까 “교회 한번 안 가볼래 한번 가보자” 하는데 딱히 가기가 싫었어요. 그런 데를 왜가나 싶었어요. 이상한 사람들이 가나 싶었어요. 뭐가 그분들이 잘못 착각하고 있지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런 생각 하면서 있었는데 한 2학년 땐지 학교 다닌 지 한 1년쯤 되었어요. 침실 선배가 ‘대학부 모임이 있는 데 같이 한번 안 갈래?” 그러더라구요. 친한 선배가 하도 얘기 하길래 거절하기도 그렇고 해서 한번 가봤어요. 대학부 모임이었는데 뭐 찬송 부르고 그런 모임이었어요. 저는 뭐 그런것도 모르고 갔댔는데요. 근데 딱 시작했는데 막 난리가 났어요. 기도하는데 뭐 울고 불고, 학교에서 말도 조용하게 하는 그런 친구들이 정신 나간 것 처럼 막 그러더라구요. 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한 절반 하다 나왔어요(웃음). 뭐 이상한 사람 다 버리는 곳이라고 해서. 그래서 선배도 따라 나오고, 원래 제 성격을 원래 아니까 뭐 딴 얘기는 안하고 그저 웃더라고요. 첨 이니까 혹시 그럴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고 나서는, 그담부터는 누가 교회 가자고 해도 안 갔어요. 이상하더라구요. 저는 저는 교수님들이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드랬어요. 성경에 대해서, 뭐 딴거는 모르지만 그래도 공부 적게 하신분은 아니잖아요. 다 박사까지 공부하시고 했는데 아니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훅 부니까 생기가 들어가서 사람이 됐대요. 아니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요. 너무 이상하게 생각 되었어요. 뭐 모르는 사람은 모르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를 따라간다고 그러지만, 그분들이 모르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보니 너무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 했댔는데…


그런과정에 제가 금년 4월에 몸이 자꾸 아프던 차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는데요 대장암이라는 그런 진단을 받았어요. 지금은 제가 너무 담담하게 이야기 하지만, 사실은 되게 힘들었거든요 그때요. 제가 사는 집에 갔다가 집에서 수술 받고 북경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러 갔댔어요. 항암치료 받으러 북경 가서 제가 교수님한테 알렸어요. ‘결장암이라는 진단 나왔습니다. 잠시는 학교 못가게 될 것 같으니까 교수님 그렇게 알고 계십시요.’ 하고 간단하게 메일 보냈어요. 그러고 한 멏시간 지나니까 제가 집에 있는데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더라구요. 교수님께서 메일을 받아봤더라고 그러시면서 교수님도 아주 괴로워 하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뭐 위안하는 말로 “뭐 거기 어디 교회 없냐”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구요. “교회 있으면 교회나가봐라 하시더라구요.” 남은 막 아파서 속이 불편한데 막 그런 얘기를 하니까 왠 얘기냐고 아픈데 교회가서 뭐 병이 나아요 그런 얘기 하고 싶었지마는 그런 얘기는 못하고 전화 끊었어요. 그날이 수요일인지 그랬는데요 주말에 절 보러 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연길에 학교하고 제가 있는 북경하고 비행기로 두시간 거리예요. 그런데 교수님이 오셨어요. 전 교수님이 오기전에 대략 교수님이 왜 오시는 지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하고 저하고 이틀동안 호텔에 같이 묵었덨거든요. 오시자 마자 성경책을 꺼내 드시더니만 거의 밥먹고, 잠자는 시간 빼 놓고 밤늦게까지 계속 성경 얘기만 하시는 거예요. 요한복음에는 무슨말이 있고, 하나님이 너네 아버지고, 하나님이 너한테 뜻이 있길래 너한테 병을 주고 … 그게 무슨 말인지 당체 이해가 안갔어요. “하나님이 너에 대한 귀한 뜻이 있기 때문에 너한테 병을 주는거다. 그러니까 하나님 영접하면 꼭 낫고..”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저는 그게 되게 싫었지만 참 너무 멀리서 오신 분한테 뭐라고 얘기는 못하고요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어요. 이틀동안 꼬박 저한테 전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었어요. 그런데 실컷 설명하시다가 하나님이 나를 만든 아버지래요, 저보고 영접기도 하라고 하는데 저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저희 아버지 성함이 김**이거든요 한참 얘기 하시다가 “너는 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야 하면서 저보고 승인하래요. 그래서 한참 얘기하시다가 “그래도 너 김** 아들이야?” 하면 저는 “예” 라고밖에 대답 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거 도저히 승인하기가 싫었어요. 무슨 얘긴지도 몰랐고요. 그래서 이틀만에 주일날 교수님이 돌아 가시게 되었어요 학교에 일도 있고 하시니까 해서 왔댔거든요. 그런데 그때까지 제가 뭐 돌아가는 교수님한테 미안하긴 했지만 하는 수 없었어요. 안믿어 지는 거 믿어진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가는 교수님한테 “교수님 제가 생각이 못 바뀌어서 그런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니까 교수님도. 그렇겠지요 기분 되게 서운해 하시고 성나신 것 같아서 “그건 의지로 하는게 아니야” 하시면서 되게 안타까워 하시면서 가시더라구요.


그런 후 한 며칠 지나서 우리 선밴데, 원래 저하고 한 침실에서 지냈고 3학년 위 선배지만 거의 친구처럼 친하게 지낸 선배가 있었어요. 그분도 학교 와서 예수믿었고 북경에서 일하고 계셨어요. 그래 제가 아프다는 소식을 어떻게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한번 만나자고 해서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뭐 그분도 제성격 아니까요 곧바로 대놓고 교회가자 그런 얘긴 안했지만 와서는 이런 얘길 하더라구요. 그때 막 제 얼굴 보니까 힘들어 하는 거 보이겠지요. 그래서 저보고 “니가 지금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좋다면 뭔들 못하겠느냐. 너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믿는데 왜 너는 믿어 보지도 않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반대를 하느냐. 한번 믿기나 해 보고 안 믿어지면 그만둬라.” 그래서 생각한 결과 한번 나가보기로 했어요. 한번 나가보기는 나가보자. 근데 뭐 교회 가서도 뭐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목사님 앞에서 “하나님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하는데 그게 무슨말인지 뭐.. 그래서 형식적으로 그저.. 정말 가기가 싫었어요. 믿는사람들이 하나도 더 좋아 보이는 것이 없었어요. 뭐 친구들 절 전도 했지만 전 “넌 뭐 예수 믿어 봤자 나보다 좋은게 뭐가 있느냐”라고 얘기해 가면서 정말 쪼금 만치도 거기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그랬댔는데 제가 북경에서 교회 두 번 가보고 셋째주에 여기 미국 오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감리교회 원 박사님(원종수 박사님)께서는 우리 학교에 한번 방문 하시고 교수님들하고 연락이 되어서, 교수님들의 도움받아서 여기서 치료 받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저는 여기 오기 전부터 아마 대략 교회 다니는 분들하고 만날 거라고 생각 했었어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까 웬걸.. 만나는 사람들이라고는 다 교회 다니는 분들이더라고요. 그러고 보 금방와서 저한테 너는 교회 다니나 뭐 그런 얘기 묻지도 않고 “주일날이니까 교회 나와, 마중갈께” 뭐 이러고 해서 교회를 가기 시작 했어요. 그렇지요 뭐, 저는 아는 사람도 한사람도 없고 그저 이런 사람 있다는 주소만 들고 왔거든요. 그래 거절하기가 딱해서 교회 나왔어요. 뭐 가고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할수없이 나왔어요. 그런데 두주째 지나도 뭐 교회가서도 들리는 말도 없었고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어요. 참말 가기 싫었지만 그저 겨우 따라 다녔어요.


그랬댔는데. 두주 지나서 제가 코스타를 가게 되었어요. 여러분의 도움으로 또 하나님이 인도하셨는지 등록비도 안내고 등록도 안했는데도 그저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코스타 가서 여러 교수님들 세미나도 듣고 이러는 과정에 제가 이런말을 한마디 들었어요. 제가 예전에 교수님들이 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너무 궁금하다 했잖아요? 근데 어느목사님이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게으른 사람은 자기가 안해서 그렇지 하면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최선을 다 해 본 사람은 인간 능력의 한계를 안다”는 그런 말씀을 들었어요. 저는 그 얘기가 정말 제 머릿속에 와 닿는 것 같았어요. 사흘날 저녁에 김동호 목사님 저녁설교에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여기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온 자가 있다면 일어서라고 했어요. 일어 서면 당신께서 영접기도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한마디 턱 하고 나니까 드문 드문 일어서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저는 다 믿는 사람만 코스타를 가는 줄 알았는데 저같은 사람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 목사님이 ..세번 이야기 하셨어요. 세 번 이야기 하실 때 제가 마지막에 일어 났어요. 저는 전에도 그랬다 시피 안 믿어지는 걸, 뭐 어떤 사람들은 안 믿어 지는데 친구가 가자고 해서 일단 믿어 보자고 했다는데 저는 그런게 도무지 이해가 안갔어요. 생각이 없지 않으면, 왜 남이 일단 믿어 보란다고 믿자고 가는지 몰랐어요. 안믿어 져도 억지로 영접기도 해서 믿는다 하는데 그렇게 믿기는 싫었어요. 제가 일단 교회다니는 것도 아파서 다니잖아요. 그저 바라는게 있으니까 교회 가는거잖아요. 저는 시작은 일단 그렇게 했지만 아픈것을 고치는 그런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신앙은 가지기가 싫었어요, 그런 신앙으로 기도해봐야 하나님이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어요. 그렇지만 코스타가서 제가 일어 났을때 이런 결단이 생겼어요. 이제부터 좀 주인다운 그런 태도로 한번 믿어 보자구요. 그래서 일어나서 하느님 앞에 이렇게 기도 했어요. “하느님 아버지 이제부터는 하느님 믿고 따르겠습니다. 정말로 그게 사실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저에게 믿음을 주십시요”라고 기도 했어요. 그런데 기도하고 나니까 한가지 발견되는게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저는 뭐 하나님 아버지, 형제 자매, 그런게 되게 싫었거든요. 그리고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막 등쳐주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되게 싫어했거든요, 사람들 유혹할라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 했거든요(웃음).


제가 막 전에 한번 대학부 모임을 갔었드랬는데 모 어느 선배가 와서 ‘네가 드디어 나왔구나, 내가 니를 위해 얼마나 기도 했는데’ 하는데 ‘아 난 안믿어요, 안믿는데 그저 한번 나와 봤어요’ 그러면 ‘니가 지금은 싫어 하지만 이담에는 꼭 믿게 될거라’고 모 ‘하나님이 너를 부르신다’니 뭐 이런 얘길 하시더라구요. 그게 되게 싫었댔어요 그런게요.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 봤어요 그때. 그리고 예배끝나고 나오니까 밖에서 막 뭐 ‘born again’ 했느니 ‘happy birthday’니 하면서 막 축하한다고 사람들이 막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영접기도 하고 나왔지만 별 다른게 없었어요. 우리 교수님은 뭐 예수님 영접하고 막 실컷 울고 나왔더니 풀이 파릇파릇 하고 하늘이 파랗고 막 그렇다는데 저는 그런것도 없었어요.(웃음) 그래서 이제 태도만 하나 고치고 한번 믿어보자는 그런마음으로 돌아와서 그리고 교회 다니는 과정에 성경공부도 참가하고 앤아버에 있는 한인교회의 모임이란 모임은 다 갔어요. 뭐 다 여러분들이 막 저한테 열심히 잘 알려주고 그랬어요. 그러는 과정중에 차츰 정말 뭐라고 말을 못하는 그런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뭐 성경도 가끔씩 한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그런 과정에 9월달에 제가 여기와서 처음으로 CT scan했거든요. 그래서 첨에는 병 증세가 되게 안 좋았댔어요. 그런데 9월달에 scan해 보고 난 결과가 아주 좋아서 원래 퍼져 있던 암세포도 하나도 안보이고, 원 박사님도 아주 기적이라면 기적이라는 그런 현상이라면서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해서 그러신다’고 그러시더라구요. 저는 그러면서 참 딱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참 감사했어요 하나님한테요. 저는 교수님들이 전한테 하나님이 널 써주시려고 너에게 병을 주신다 하는 얘기가 너무 이해 안갔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쓰면 고이 쓰지 병은 왜 줘요. 병도 주면 왜 암 같은거 줘요. 그랬댔는데 제가 여기 와서 얼마 안되서 한국에 있던 같은과 친구한테 이런 메일을 받았어요. ‘…전에도 교수님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우러러 보였지만 너(김 *)를 통해서 정말 그렇게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는 그 교수님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어. 도대체 무슨힘이 그분들로 하여금 그렇게 열심히 살 수 있게 하는지, 성경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 싶어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저는 그 메일을 보고 참 많은 걸 느꼈어요.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통해서 많은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참 저는 전에도 그랬다시피 내 머리속에 기적이 안 일어나고 난 절대로 그걸 믿을 수 없다고 생각 했었어요. 그걸 어떻게 믿을수가 있어요? 그랬댔는데 차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그러던 데로부터 설마 그럴까, 아 정말 그럴수가 있을까, 설마 그럴수도 있겠다 하는 데로 부터. (웃음) 지금은 아.. 맞아 딱 맞았어. 내가 승인해 이렇게 되었어요. 저는 결코 그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정말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자에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 가운데 많은 치료 받는 가운데서 정말 진전도 너무 빨리 됐고요, 병치료도 너무 빨리 회복 되었어요. 그래서 치료해주신 의사님도 아주 기뻐 하셨고요,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도다 하시면서 참 기뻐 해 주셨어요. 그럴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참 감사했어요. 아직 뭐 채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확실히 하나님이 제게 뭐가 보여주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래서 그때부터 한 몇 달 지나서 이제 원래 계획했던대로 치료 곧 끝나가게 되거든요.


참 그동안… 너무… 저는 원래 참 예수믿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왜냐면 아 한번 사는 인생에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는지 도대체 몰랐어요. 있는걸 다 즐기고 살아야지 저는 항상 사람은 즐겁게 살아야지 하면서 학교 다닐때 술담배 적지 않게 하고 다녔어요. 공부도 별로 열심히 안했고요. 저는 예수믿는 것이 금욕주의라고 생각했어요. 예수 믿으면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고 그런게 너무 싫었거든요. 그랬댔는데, 저는 기도 하면서 저한테 있는 병치료 해줄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깨끗하게 씻음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제가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정말 마음속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정말 전에 그런 유혹을 가졌던…제가 그렇게 완고하게 고집하던 것으로부터, 정말 마치 기도하다가 눈물흘려 본적있고요, 찬송가 부르다가 기뻐서 웃어본 적도 있어요. 아까전에 우리 불렀지만 ‘형제의 모습속에’ 라는 노래 제가 되게 좋아 하거든요. 왜냐면 제가 언제 8월달인지 언제 한번 성경공부 하는데 그 찬송가를 보게 되었어요. 찬송가 가사가 이렇잖아요.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저는 그 찬송가 가사를 볼 때 우리 학교 교수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참 그분들 속에 보이는 하나님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요. 그래서 몇 달 6개월째 지나는 가운데 이제는 그렇게 가기 싫던 교회가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이젠 주일 되면 ‘아 주일날 원래 교회 가는 가보다’ 그렇게 생각되고 가끔은 주중에 주일이 기다려 지기도 해요. 가서사람들도 만나보고 싶고, 예배도 보고 싶고, 찬송가도 같이 부르고 싶고 그런 마음도 생기곤 해요. 그래서 그동안 하나님 믿는 가운데서 치료받으면서 참 마음속에 많은 평안함도 얻었고요, 하나님이 꼭 고쳐 주실 거라는 그런 확신도 가졌어요. 참 요즘은요 ‘내가 왜 암에 걸렸지’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이유가 딱 하나라고 생각되요. 암이 아니고서는 저하고 하나님하고 붙여놓을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확신이 들어요. 이제는 여기서 단련도 받고, 제가 중국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하나님께서 미국에 이런 환경속에 하나님 믿는 사람만 만나게 해주시고 이런 환경속에서 억지로라도 끌어 주시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는 가기 싫던 교회도 이제는 습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6개월이라는 시간이 하나님 절 단련시켜서 돌아가서 영적으로도 굶지 않게끔 하시는 거 같아요.


제가 원래 간증을 해 달라고 했을때 되게 주저 했댔거든요. 왜냐면 저는 간증을 안해본것도 있지만 예전에 누가 저한테 와서 하나님 얘기를 하면 되게 싫어 했댔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얘길 한다니까 감이 안왔어요. 그래서 주저 했댔는데요, 집에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느님 자랑해야 될 것 같아요, 돌아다니면서. 하나님 자랑해야 기도도 잘 들어 주실 것 같고, 기뻐 하실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어떻게 자랑 잘 했는지 모르지만 들어 주셔서 감사하고요, 여기 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K 형제
연변 과학 기술대학 3학년 K모군이 직장암 판정을 받은 후 미국에 치료차 체류하면서 그 기간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를 치료 후 중국으로 돌아 가기 전(12/16/01)에 나눈 간증문 입니다. 인터뷰의 생생함을 살리기 위해 거의 수정 없이 녹음 내용을 글로 옮겼습니다. 본인의 간곡한 요청에의해 본명을 밝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