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간증문

양승혜 

이 자리에 대한 콜링을 받고
가장 많이 망설였던 이유는 몇년 전 하나님께 했던
기도가 생각나서였습니다. 그당시 주님의 다루심으로
엄청나게 굴러다니고 있었을 때였는데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하던 저를 주님의 뒤에 그림자처럼 감추어달라고
기도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만나 온 하나님은 늘
신실하셨고, 언제나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때가 언제나 제가 기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내셨습니다.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하니까 주변의
어떤 사람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기도를 했냐고 하더라구요.

터닝포인트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터닝포인트가 된 계기나 또는 그렇게되도록 여러분의
삶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을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시점과 사람이 2명 있었는데 저희 어머니와 제 여동생입니다.
어머니는 어렸을때 교회를 다녔지만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몇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신론자에 기독교를 예수쟁이라
불렀던 아버지의 오랜 핍박에도 불구하고 10년동안의
기도 끝에 아버지를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여동생은
딸셋 중 가장 열심히 교회를 다녔는데 중학교때 예수님을
만나고 대학교때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아프리카에
마음을 품고 준비해온 10년만에 지금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고, 선교에 대한 비전이 없는 남편을 만나 4년여동안
기도한 끝에 남편이 함께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집에서 자라났는데도 저는 꿋꿋하게 선데이크리스천으로
30여년을 잘 버텨왔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이 나누는
대화가 시끄러운 녹음기를 계속 틀어대고 있는 것처럼
듣기싫었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면서도 청개구리마냥 자꾸 반대로
튀고싶어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늘 꼬리 두개 달린
원숭이들 틈에 낀 꼬리 한개 있는 원숭이처럼 느껴졌고
나는 정상, 그들은 비정상..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출발

학교를 졸업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서
인생을 살아왔는데 서른을 앞에 두고 바라본 제 인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인가, 허무함에 시달렸고 하는 일마다 계속
잘 풀리지 않는 어려움 가운데 처해지자 어렸을때부터
들어왔던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은 인생의 가파른 절벽 가운데 떨어질 듯 서있다가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혼자 떠나 예수원이라는 기도원에 갔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그 때 지금까지는 내 멋대로, 내가
하고픈 대로 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하라는 것만 하며 살겠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년 동안 준비한 후 스웨덴에서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서른이었는데
한국을 떠나면서 비장한 각오로 말하기를 ‘나를 기다리지
말아라…버티고 버티다가 도저히 안된다고 느낄때
돌아오겠다’ 머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새로운
인생을 기대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달라진 나, 지금까지
내가 알아왔던 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만나주셨던 그 날 주신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교훈련 및 영국유학생활

훈련은 정말 값진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강의를 들으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를 용서했고,
제 안에 무너졌던 나를 주 안에서 다시 세워가기 시작했습니다.
9개월 동안 훈련과정을 마치고 주님께서 영국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셔서 언어공부를 시작하게되었습니다.
그곳은 저에게 단지 유럽의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훈련을 마치고 현장 가운데로 나와 정말 예수의 제자가
되었는지 살아보는 또다른 훈련의 장소였습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한 유학생활에 살인적인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당시
랭귀지를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나
취업을 앞두고 언어를 준비하기 위해 온 젊은, 저보다
어린 학생들이 주였습니다. 저처럼 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잘 모르는 노처녀는 그닥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하고 싶은 공부도 없었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제가
했던 일을 다시 하면서 또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목적을 발견하기까지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랭귀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고…하나님은
아무 말씀 없이 2년동안 저를 그렇게 두셨습니다. 아는
한국사람도 없이, 돈도 없이, 영어도 잘 못하면서 무슨
깡으로 그 시간을 버텨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국에 오자마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에게는 전도대상자들이었고, 특히
학교에 가면 옆자리에 앉은 학생을 어떻게 전도할 수
있을까 늘 생각했었습니다. 제 마음은 가난해졌었고,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이 가득했으며, 외로웠고,
배고팠으며, 의지할 곳은 주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작은 신문사이지만 취재기자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나름 케리어를 쌓아왔었는데 이 낯선 땅에서
나는 이름도 제대로 불려지지 못하는 웨이츄리스로
산다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진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에 따라 나의 정체성을 결정했던
저에게는 큰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부르심

주님은 그 긴 침묵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하던 상관없이 나를 당신의 자녀라
부르시는 사랑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저에게 좋은
교회와 사람들을 붙혀주셨고, 돕는자를 보내주셨으며,
잘 곳을 주셨고, 일할 곳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하는 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2년의 시간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주님은 제가 모세가 아님을 아시고
더 긴 시간을 기다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2년뒤 어느
날, 주님은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무도
명료하고 또 뜻밖이서 저는 마구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첫째 아~ 드디어 주님이 내게 뭔가를 말씀하시는구나라는
것과 둘째 너무나 황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제게 신학을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당시
제게 진짜 뜬금없는 발언이었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신학을 공부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고, 동생이
선교사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터라 제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잘못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는지…사실, 그 일이 있기
전에 제가 섬기고 있던 교회 선교사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너를 선교사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팔짝
뛰면서 그런 말씀 마시라고 했었거든요. 갑자기 그
말이 오버랩이 되면서…주님 아니지요? 제가 잘못 들은거지요?
되묻기도 했습니다. 3일 지났는데도 제 마음 가운데
울렁증이 가라앉지 않았고, 밥을 먹을때도 길을 걸어갈때도
그저 멍한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 순종의 카드를 들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영국에 있는 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단 한번도 내가 선교사가 될꺼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제가 이제는 선교사가 아니면 하고픈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한국 귀국 후

제 삶의 목적을 발견한 후,
저는 마치 움츠렸던 개구리가 뛰어오르듯 그 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곳에도 모자란 저의
모습 때문에 무수히 많은 눈물을 흘려야했만 하나님은
저와 함께 하셨고 선교사의 길에 대해 확신없는 저에게
차츰차츰 분명한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셨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근처 다른 대학 캠퍼스에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에 참여하면서 캠퍼스 사역과 제자훈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훈련과 공부를 마치고
5년이 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했을때
저는 아마도 당장 선교사로 나갈 수 있다는 당돌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부르셨고, 훈련시키셨고,
부르심에 대한 확신도 주셨으니 길을 여실꺼라는 완전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송교회도 없었고, 결혼하지 않은
나이 많은 여자 평신도 였으며 적어도 파송을 받고
나가려면 또 몇년을 한국교회에서 섬겨야만 했습니다.
길은 막힌 것 같았고, 한국에서 제가 설 자리는 없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나,  취직을
할까, 결혼도 해야하는데…또다시 현실이라는 이름이
저에게 벽처럼 다가왔고 나는 무엇하나 가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멍하게 한국의 현실을 받아드려야 했습니다.
그 당시 호주에서 사역하고 있던 동생부부가 아기를
낳고 한국에 들어와있었고, 파송을 받고 아프리카로
나가려고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들의 안정된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또 나는 얼마동안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러던중 친구의 소개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날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주님께서 제 마음 가운데 그곳에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약속을 취소하고 그곳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강사이신 선교사님은 그 집회가 직장인을
대상으로 하는만큼 강의는 현실 가운데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타협점들과 선교에 대한 헌신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내려놓지 못한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직장이든, 가족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주님,
이거 한가지는 안돼요 하는 것이 있다면 생각해보라고
하신 뒤  잠시 시간을 주시고 그것을 지금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직장도,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데(사실 없었기 때문에)… 나는 뭘까? 고민하다가
주님의 나즈막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선교’ 순간
저는 뒤통수를 얻어 맞은 사람처럼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주님, 선교라뇨? 그것은 주님이 저에게 주신 거잖아요?
저는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하겠다고 버팅길때는
떠밀어서 보내놓고, 이제 하겠다고 하니까 하지말라는
겁니까? 제 마음 가운데 심하게 요동치는 혼란의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선교사인 동생에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을 튀겨가며, 오늘 주님이 나보고 뭐라셨는지
알아? 하면서 흥분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흥분된 모습과는 달리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동생은
침착하게 단 한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주님이 가지말라면
말아야지’ 그러면서 자신이  대학때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선교훈련을 받던 강의 중에 강사님이
그러셨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선교지로 가기 위해
가방을 다 싸놓았고, 티켓이 손에 들려있으며 이제
집 문을 열고 출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님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중에서 지금 가방을
내려놓고 가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이 방에서 나가십시오.

선교에 대한 내려놓음

그랬습니다. 주님은 제가 멈추기를
원하셨습니다. 저는 3일동안 주님앞에 나와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왜이러세요. 지금와서 어떻게 포기해요~하지만
또다시 주님 앞에 순종의 카드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선교를 내려놓았습니다.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동안 흘렸던 눈물들이 2배가 되어 쏟아져나왔습니다.
내려놓겠다고 고백하고 나니 마음은 편해졌는데 뭔가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많이 울었던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승혜야~ 너는
왜 나를 신뢰하지 않는거냐? 내가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인
것을 모르느냐? 내가 너를 불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나를 부르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내게 비전을 주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주님앞에 회개했습니다. 선교사가 되는 것이 저의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알아가고 당신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것이 제가 지은바 된 이유입니다.

저는 왜 주님이 저에게 선교를
내려놓으라고 하셨는지 알것 같았습니다. 주님은 제가
선교를 위한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자로
있기를 더욱 갈망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알게되고 하나님을 마음을 닮고자 한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됩니다.
그분이 정말 관심있어하고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과 깊이 교제하며 그 안에서
자녀된 삶을 누리는 것이요, 또 그렇지 못한 자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영혼구원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이제 선도
보고 결혼도 하고 지역교회도 섬기며 구역예배도 참석하고
그러면 되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던 중 우연히 동생을
통해 NGO단체를 방문했다가 그곳에서 콜링을 받게 되었습니다.
NGO단체는 타 선교단체와는 달라서 파송교회 없이도
선교지로 나갈 수 있으며, 복음이 들어가기 어려운
지역이기때문에 신분상 NGO였지만 실제로는 선교사를
원했습니다. 저에게 조심스럽게 갈 수 있겠냐고 물어본
나라는 아프카니스탄이었고 그때는 사건이 생기기
3개월 전이었습니다. 한번도 어느 나라를 가겠다고
생각해 놓은 곳은 없었지만 그곳은 뜻밖의 나라였고
그때도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해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
많던 곳이었기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을? 네~3일을요.
말씀묵상을 통해 주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승혜야~
니가 갈 수 있겠느냐? 나를 위해서? 저는 제가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이고,
부모님도 걱정하실테고 아직 결혼도 안했고, 한번 가면
5년이라는데, 거긴 너무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고 등등….하지만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질문 앞에 이것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네!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후 가족들에게 이야기했고 그당시 함께
중보했던 가족들 역시 믿음으로 응원해주셨습니다.
결혼도 안한 딸을 다시 위험한 타국으로 보내야하는
부모님이셨지만 어머니는 선교사로 헌신한 딸들은
이미 주님께 드린거다, 살던지 죽던지 주님의 몫이며
어차피 사는 인생,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는다면 그것만큼
영광이 어딨겠냐고 비장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생은
막 웃으면서 언니~ 걱정마~ 절대 안죽어. 주님이 그런
영광을 언니한테 주시겠어?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원서를 내도 꼭 가게 된다는 보장이 없었고 현지에서
함께 동역할 사람의 agreement가 있어야하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려놓았을때 다시 주님이 길을 여셨고, 어떤
것이든 제가 순종했기에 주님이 이미 저의 마음을 받으셨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몇개월동안 서류준비와
절차를 거쳐 면접만을 남겨놓은 상태였는데 이상하게
면접날짜가 3번이나 바뀌면서 계속 늦춰쳤습니다. 그러던
중 인터넷을 통해 동생이 우연히 발견한 선교단체 간사
자리에 동생이 직접 원서를 넣어 어플라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별 기대없이 면접을 봤는데 (그날이 NGO단체 면접이
취소된 날이었습니다) 붙게되었고, 다시 주님의 뜻을
구하던 중 그 당시 결과를 통보하기 전에 3일동안 미션캠프에
참석하였는데 제가 이곳에서 좀 더 배우고 교회를 섬기며
동역자를 만나기를 원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3개월 뒤,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터졌고 저보고 그곳에 간다고 미쳤냐고 말했던 사람의
전화가 쏟아지면서 안가길 잘했다는 말을 들었을때
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하나님이 왜 갑자기 다른
길로 저를 인도하셨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서류까지 다 통과하고 거의 가는 것으로 확정이 된
상태에서 왜으로 선교단체 간사로 섬기게 하시는지
그때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결혼 그 이후

사실 서른살에 한국을 떠날때는
주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기에 결혼에 대한 마음이 별로 없었는데 타국
생활을 하면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리스트를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기도해야한다고
해서 적다보니 20개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횟수가
지날수록 리스트가 점점 짧아지면서 한국에 온지 1년동안
무수히 많은 선을 보고 거의 포기 상태로 갈 무렵 단
세가지 기도제목만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선교헌신자를
만나야한다는 생각에 대상자를 거의 제안하고 있었기에
어려움이 더 많았고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중에 사역자나
선교사 또는 헌신자가 있었지만 이성적으로 끌리지않았습니다.

저의 세가지 제목은 첫째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예수님이 삶의 수선순위인
사람이었고 둘째, 교제하면서 신앙의 깊이 있는 부분을
나눌 수 있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셋째,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남편을
소개해주신 형제님이 소개 전에 저에게 물으시기를
반드시 선교 헌신자여야만 하냐고 물었을때 저는 꼭
그렇진 않아도 되는데 진짜 크리스천이어야 된다고
대답했었습니다. 그당시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중이었고
저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예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는데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그를 알게되면서 여러가지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저에게 보내신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보고싶어져서
결국 미국으로 날아가는 결단을 감행했습니다.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 결혼을
앞두고 계신 자매님들은 귀한 믿음의 형제를 얻기 위해서는
과감한 액션도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워낙 이 세계가 형제가 귀한 곳이라서요. ^^; 우리 두사람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그것도 우리가 서로 기도해왔던 배우자를
정말 기가막힌 방법으로 만나게 되었고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알게 된지 6개월만에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이치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동일한 성령님으로 인해 우리가
서로의 ‘그사람’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고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도와 인내로 싸워가며 말도 안되는 배우자상이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음으로 주님의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한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캠퍼스 사역을 하고 있고,
이번 가을부터는 저도 함께 간사로 섬기면서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영국에 있을 때 캠퍼스 사역에 대한
비전을 주시고, 학생들에 대한 마음을 주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상황과 여건때문에 주님이
주신 비전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를 내려놓고 주님앞에서
빼앗긴 사탕때문에 아이처럼 울고있을때 주님이 저에게
약속을 지키실꺼라 말씀하셨고, 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연을 만드시지 않습니다. 제가
있는 이 자리가, 이 사람들이 지금은 제게 주신 선교지임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