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는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

뉴스앤조이(http://www.newsnjoy.co.kr/)에 게재된 기사를 허락하에 올립니다.

김세윤 박사 기고,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한국에서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땅밟기 선교’를 행하는데,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 전쟁’이 아니다. ‘영적 전쟁’은 사단의 나라에 맞서는 것이다. 우리가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을 하는 순간마다, 맘몬이라는 우상을 미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통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통치를 받는 것이 바로 ‘영적 전쟁’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가르치고, 사도들이 가르친 ‘ 영적 전쟁’이다. 

신약 어디에 이교도의 신전을 뱅뱅 도는 방법으로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흔히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돌며 ‘땅밟기’ 했다고 하는데, 그런 해석을 따르는 것은 원시적인 신학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 신약을 두고 왜 구약의 예비 계시로 돌아가서, 특히 여호수아 이야기를 ‘영적 전쟁’의 준거로 삼는가? 왜 그렇게 구약의 이야기 하나에 몰두하는가? 그것도 신학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문자주의에 얽매여서 말이다. 여호수아 식으로 ‘영적 전쟁’ 하고 선교한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교도들 다 죽였듯이 우리도 불신자들을 칼로 다 죽여야 할까? 그것은 과격파 이슬람이 이어받은 “성전’, ‘지하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계시가 가르치는 ‘영적 전쟁’은 전혀 그런 게 아니다.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

‘영적 전쟁’ 따위의 미신이 한국교회에 퍼져 도리어 교회의 건강과 선교를 해치고, 전도의 길을 막고 있다. ‘축사'(요사스러운 기운이나 귀신을 물리쳐 내쫓음)나 ‘땅밟기’ 같은 방식으로 ‘영적 전쟁’ 한다는 사람들에게 왜 그런 식으로 선교하느냐 물으면, 그들은 에베소서 6장 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를 언급하며 ‘영적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에베소서에서 ‘영적 전쟁’을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 가르치느냐 물으면 그들은 대개 묵묵부답이다. 6장 13절 이하를 읽지 않았거나,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인 것 같다. 

‘영적 전쟁’은 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심각한 ‘영적 전쟁’의 전장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매일 대항해야 한다. 그렇다면 ‘땅밟기’ 같은 방식이 에베소서가 말하는 ‘영적 전쟁’일까. 에베소서에는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로마 병정의 무장 상태를 묘사하여 설명함으로써 ‘영적 전쟁’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하지만 허리띠·호심경·군화·방패·검·투구 등 로마 병정의 무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ㅇㅇ의’가 중요한 것이다. 여기 ‘성령의 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풀어 주지 않았는가. 즉 우리가 진리를 굳게 지키고, 의를 행하며, 열심히 돌아다니며 화평의 복음을 전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며, 핍박을 믿음으로 이겨 내는 것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치는 ‘영적 전쟁’이다. 

에베소서는 에베소의 교회에 보내진 서신으로 이해된다. 에베소서 수신인란에 일부 유력한 사본들이 에베소라는 지명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에베소에는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들’ 중 하나라는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그 신전을 돌며 ‘땅밟기’ 또는 ‘축사’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이 있는가? 

한국에 엄청난(선한?) 영향을 끼친 미국의 한 유명 선교학 교수가 10여 년 전 한국의 한 대형 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양국의 그리스도인 다수를 동원하여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 신전 폐허를 밟는 ‘영적 전쟁’을 하였다 한다. 이런 뉴에이지 소설 같은 ‘영적 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래서 터키와 이웃 무슬림 나라들에 복음의 역사가 활발하게 되었는가? 세상에 자유·정의·평화가 증진되었는가? 그러기는커녕 그 직후 저 과격파 무슬림들이 그들식 ‘영적 전쟁'(지하드) 을 벌여 온 세계(특히 서방 기독교 세계)가 전쟁과 테러 공포에 휘말리고, 종교 전쟁, 문명 충돌의 커다란 위기를 맞게 하지 않았는가? 이런 결과를 거액을 들여 그런 ‘영적 전쟁’을 감행한 사람들의 논리에 맞추어 해석하면 우리 하나님이 아르테미스(디아나) 여신에게 패배했다는 것인가? 에베소서는 우리에게 이런 이교도적이고 미신적인 ‘영적 전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곧 믿음 안에 굳건히 서서, 진리를 고수하고, 사랑과 의를 행하고, 성령의 도움으로 화평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다.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

신약의 모든 책들이 다 이러한 ‘영적 전쟁’을 가르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전쟁 언어를 가장 절실하게 사용하며 ‘영적 전쟁’을 말하는 책은 요한계시록이다. 그 책은 교회를 유다의 사자 다윗적 메시아 예수가 소집한 12사단 14만 4,000의 군대라 한다. 그리하여 용·짐승·거짓 선지자라는 사단의 삼위일체에 맞서 거룩한 전쟁을 처참히 치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 책은 사단의 나라에 대항해서 하나님나라가 어떻게 승리하는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군대로 그 전쟁에 어떻게 참여해서 하나님나라의 승리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아시아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하나의 순회 서신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이 있는 에베소 교회에도 보냈고, 사단의 왕좌가 있는 버가모 교회에도 보냈다. 하지만 그 책 어디에도 그 신전들 주위를 ‘땅밟기’ 하고 ‘축사’하는 식으로 ‘영적 전쟁’ 하여 승리하라는 말은 없다. 도리어 요한계시록은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으로, 즉 순교를 무릅쓴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이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로마 황제 체제로 현신화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거짓 복음으로 열방을 미혹하는 사단의 나라에 맞서 여러 도시에 세워진 황제 숭배의 신전을 ‘땅밟기’ 하여 ‘영적 전쟁’ 하라는 가르침은 일언반구도 없다. 그 책은 도리어 강요되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고, 팍스 로마나의 유혹에 도취되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만 진정한 왕이시니 그의 통치 아래서만 진정한 의와 평화와 구원이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여 사단의 거짓 왕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단은 ‘짐승’으로 무력과 압제와 수탈 등의 방법으로 세계를 지배하지만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고 그의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는 삶으로써, 즉 사랑과 자기희생과 진리 증거로 ‘영적 전쟁’을 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당한 어린양’의 방법이고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다. 예수와 사도 바울 그리고 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사랑으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써 신실하게 선포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을 극복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영적 전쟁’이다. 

‘영적 전쟁’의 전쟁터는 우리 실존의 삶이다.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이라는 갈림길에서 사단의 통치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그런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통치는 구체적으로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라는 요구로 온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이중 사랑 계명’으로 요약하셨는데 (막 12:28~34), 사도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이라 했다 (고전 9:21, 갈 6:2). 하나님 사랑의 반대말은 우상 숭배이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한 우상은 불상도, 아르테미스 신상도, 버가모의 사단상도, 신격화된 황제상도 아니라 바로 맘몬이다 (마 6:24, 눅 16:13). 모든 우상 숭배는 파괴력이 있다. 그러나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 우상 숭배의 형태는 바로 돈 또는 재물에 대한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맘몬·재물이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우상 숭배가 부자간 형제간도 갈라 원수가 되게 하고, 사회 계층 간의 불의·불평등·갈등을 낳고, 나라 간 전쟁도 일으키며, 전반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한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그 우상 숭배를 가장 심각히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 육신을 자극하여 맘몬이라는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돈이 우리에게 안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니 돈을 많이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사기도 치고, 바가지도 씌우고, 유해 식품 등 가짜 물건도 팔고, 부실 공사도 하고, 뇌물을 주고받기도 하고, 힘으로 남을 억압하라고도 한다. 이런 사단의 통치에 맞서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성령이 상기시키는 것은 사단의 그러한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를 그리스도의 재림 시 오는 것으로만 가르쳐 먼 미래로 연기해 버리든가, 죽음 뒤 우리의 영혼이 가는 저 위 하늘 어딘가로 밀어 올려 버려, 많은 성도로 하여금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통하여 이미 출범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하셨다. 사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 대행하심을, 즉 그의 성령을 그의 교회에 퍼부어 주시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의 통치의 일꾼 또는 군사가 되어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실현해 가도록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하나님의 통치는 오늘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맘몬 우상 숭배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착취 대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나라)의 법’ 또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물신주의적 탐욕을 배제하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자세로,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고 들에 피는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의 ‘아빠’ 노릇 해 주심을 믿고, 그의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요구로 오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성령은 맘몬 우상 숭배와 이웃 착취를 조장하는 사단의 통치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갈림길을 밝히 보여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일깨워 주심, 인도하심, 그리고 믿음 주심에 힘입어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사단의 통치를 극복하고 ‘성령의 열매들’ (갈 5:22~23 – 사랑, 화평, 관용,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등 도덕적 가치들!), 곧 ‘의의 열매들’을 맺는 것이다. (빌 1:11; 마 7:15~23) 이것이 진정한 ‘영적 전쟁’ – 성령에 힘입어 악령과 싸움 – 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가정 안에서도 서로 사랑함으로써, 직장이나 사업장에서도 정당한 이익만 얻으며 나의 상품이나 서비스로 이웃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하며, 우리 사회 또는 환경 전반에서도 자유·정의·화평·건강이 증진되도록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에 맞서는 ‘영적 전쟁’을 치루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진정한 ‘영적 전쟁’을 한다면, 우리나라에는 하나님나라의 샬롬이 얼마나 크게 실현될 것인가? 그것은 또 전 세계에 얼마나 큰 선교의 효과가 있을 것인가? (마 5:13~16, 벧전 2:9) 


‘땅밟기’는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 

봉은사나 카자흐스탄, 또는 예루살렘에 가서 ‘땅밟기’ 하는 것은 ‘영적 전쟁’이 아니다. 미신, 즉 샤머니즘의 발로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리지어 세를 과시하면서 무슨 도시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외쳐 대거나, 무슨 우범 지대 또는 퇴폐 지역을 ‘땅밟기’ 한다고 해서 그 도시, 그 지역이 ‘성시화’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그릇된 ‘영적 전쟁’의 폐해는 중세 십자군 전쟁이 우리에게 충분한 교훈을 남겼다. 십자군 전쟁이 지금까지도 교회의 이슬람 세계에 대한 선교를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을 똑바로 보라. 11세기 초 부터 200~300년간 서양의 기독교 국가들이 십자가 기를 높이 들고 몇 십만의 군대를 동원해 성지를 중심으로 근동 지역을 ‘땅밟기’ 했다. 그 땅 이곳저곳에 십자가의 기를 꽂고 주께 바친다고 난리를 피운 결과가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성지와 중동 세계의 귀신들을 몰아내고, 이슬람을 박멸하고, 주 예수의 이름만을 부르는 교회로 가득 찼는가. 괜히 기독교 국가였던 비잔틴 제국만 멸망시켰고, 이슬람 터키 제국이 들어서게 했으며, 고대 기독교가 왕성했던 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다 이슬람 땅이 되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도 무슬림은 기독교에 대해 극렬히 적대하고, 교회의 선교를 막고, 기독교 세력이 무엇만 하려 하면 즉각 ‘십자군’ 이름을 대며 저항하지 않는가. 십자군 ‘땅밟기’가 중동 전체를 이슬람화하는데 공헌했다는 역설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많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샤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복음이 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도 못하고,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능력도 갖추지 못한 채, 이른바 선교 열정만으로 무슨 무슨 ‘스탄’이라는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땅밟기’하는 선교의 결과를 보라. 중세의 십자군이 일으킨 역효과가 그대로 나타고 있지 않은가. 봉은사 ‘땅밟기’도 그런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모욕을 당한다”라고 사도 바울이 자기 백성 유대인들에게 한 절규(롬 2:24, 사 52:5)가 오늘 한국교회에도 하는 절규가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의 선교 지도자들은 선교 전략으로 ‘땅밟기’를 주장한다. 몇 년 전 미국 시카고 휘튼대학에서 열린 한인 세계 선교 대회에서도 ‘땅밟기’를 중심으로 한 선교 전략을 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중요한 대회에 모인 신학자·선교학자·교회 지도자·선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선교 ‘전략’을 짰다면, 그것은 놀랍고 슬픈 일이다. 

한국 교회는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일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군 운동의 정신과 승리주의(Triumphalism)에 빠져 있는 듯하다. 몇몇 소수의 힘없는 그리스도인이나 단체들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회개와 갱신의 기미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교회의 구원론은 사실상 구원파 또는 고대의 영지주의의 구원론에다가 중세 가톨릭교회의 공로-상급 신학을 합성하여 놓은 것이고, 그들의 윤리는 세 가지(주일 성수, 헌금, 전도) 하기와 세 가지(술, 담배, 제사) 안 하기로 축약된 바리새적 경건주의요, 그들의 성경 해석은 성경의 ‘정확 무오’ 교리만 앞세우며 문자주의와 율법주의를 주입하는 것이어서, 성도들을 성경의 이곳저곳 본문들을 들이대며 접근하는 갖가지 이단 사설들(예: 여호수아 6장을 들이대는 ‘땅밟기’식 ‘영적 전쟁’, 출 20:4을 들이대는 ‘가계 저주론’)의 쉬운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이며, 그들의 영성은 다분히 샤머니즘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땅밟기’ 선교는 우리 조상들이 정월 대보름에 지신밟기 하던 샤머니즘을 기독교로 포장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교회일수록 진정한 ‘영적 전쟁’은 등한시하면서 예수께서 가장 엄중히 경고한 맘몬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기복 신앙을 열심히 북돋아 많은 성도들을 사실상 사단의 나라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기복 신앙의 ‘가짜 복음’을 선포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많이 벌기를 염원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 때마다, 사실상 그들로 하여금 사단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에 대적하게 하는 것이다. 즉 사단의 나라 군사로서 하나님나라에 대항해 ‘영적 전쟁’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역설이 벌어지는 곳이 지금 ‘영적 전쟁’ 한다는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 “믿음 좋다”는 그리스도인 사기꾼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해야 할 진정한 ‘영적 전쟁’의 제일 전선은 우리 자신의 삶의 현장이요, 제이 전선은 우리 자신의 교회 안인 것이다. (아니, 제일 전선은 우리의 교회 안이고, 제이 전선이 우리의 삶의 현장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그리고 제삼 전선은 사단의 나라의 거짓·불의·억압·갈등에 맞서 하나님나라의 진리·공의·자유·화평을 확대해야 하는 한국 사회인 것이다. 한국 교회의 신학적 성숙 없이 어떻게 이런 진정한 ‘영적 전쟁’을 치룰 수 있을까? 한국 교회가 얼마나 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 얼마나 더 쇠락해야, 회개와 영적 갱신 그리고 신학적 성숙의 운동이 일어날까? 

김세윤 / 풀러신학교 신약학 교수

(이 글은 <뉴스앤조이>의 유연석 기자가 10월 28일 김세윤 교수와 전화 인터뷰하고 녹취한 것을 김 교수가 보완한 것이다.)

[정민영] 전략적 선교자원 한인 디아스포라를 동원하라

전략적 선교자원 한인 디아스포라를 동원하라[footnote]필자는 2002년 1월부로 Wycliffe Bible Translators 국제본부의 Asian Diaspora 동원사역을 맡게 되어 디아스포라 신학 및 선교전략을 정리하기 시작하여 2003년 1월 Denver, Colorado에서 열린Symposium on Korean American Missions Mobilization 200에서 영문초안을 발표했다. 그 글이 계간지한국선교 KM(2003년 봄)에 소개되었고, 한글로 보완한 글이 2004년 Baltimore Forum에 발표되었는데, 본고는 GBT 2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손질한 것임을 밝힌다.[/footnote]

디아스포라[footnote]Diaspor는 헬라어 동diaspeirei분산하다 8:1, 4; 11:19의 명사형으로 원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타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7:35; 1:1,벧 1:1)[/footnote] – 선교의 전략적 자원

구약성경 이후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까지 4세기동안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 그 동안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로고스이신 그분은 말씀으로(in word) 계시하실 뿐 아니라, 역사의 주인으로서 세속사와 교회사를 친히 주관하고 운행하심으로써(in deed) 그 뜻을 드러내신다. 바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한다(갈 4:4). 그리스도가 우연한 때에 아무데나 오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표를 따라 한 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장소와 시점에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에서 오셨다는 말이다. 흔히 ‘중간기’라 부르는 이 시기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어떻게 준비하셨는가?

성서신학자들과 교회사가들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한다. 특히 그리스‐로마제국의 융성과 헬라(Greece) 문화/언어의 확산, 그리고 흩어진 유대인들(Diaspora)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보여주는 빼어난 예들이다. 헬라어의 보급은 신약성경이 기록되어 널리 배포될 환경을 조성했고,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던 로마제국의 교통망과 치안의 확립은 광활한 지역에 복음을 들고 나가는 이들의 자유롭고 안전한 여행을 보장했으며, 흩어진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짓고 구약성경을 가르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God fearers)을 준비시켜 복음과 선교의 교두보를 만들었다[footnote]Franklin(2001)과De Ridde1975:77)를 참조[/footnote]. 예수님 공생애 당시 구원 받은 백부장이라든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영접한 고넬료, 바울이 선교여행 중 찾아간 회당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던 이방인들이 대부분 그 부류에 속한 이들이었다.

결국 디아스포라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 곳곳에 전하려는 하나님의 선교적 계획 성취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도구였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갖는 인종, 언어, 문화적 단일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제3문화 집단이었다.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다면 결코 극복할 수 없었을 문화적 배타성과 폐쇄성, 그리고 율법적 경직성과 ‘장로들의 유전’을 그들은 새로운 환경 덕분에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이방인들 속에 섞여 살면서 그들도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창조된 존귀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 곳곳에 회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반드시 성전이라는 특정장소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으며, 제사장이 없이도 평신도들이 예배와 의식을 집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교적으로 의식이 열리고 생각이 트인 집단으로 변해 사도행전의 역동적 드라마를 가능케 한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초대교회 선교를 위해 디아스포라를 택하신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독특한 언어 문화적 유산을 생각해보라. 그는 로마 시민이자 유대인인 디아스포라 부친에게서 태어났다.[footnote]Latourette1975:6)[/footnote] 그는 소아시아의 헬라 도시인 다소에서 나고 자랐고, 유대인의 언어인 히브리어 및 아람어와 더불어 이방인의 언어인 헬라어에 모두 능통했다. 그는 비록 자신의 혈족인 유대인을 복음화하는 일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지만 (롬 10:1), 자신이 특별히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 받은 사실을 깨달았다 (롬 11:13). 그는 자신이 부름 받은 다양한 사역적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있어서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팔레스타인‐유대 개념, 헬라‐유대 개념, 그리고 헬라‐이방 개념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었다,”[footnote]Verkuyl1978:11[/footnote] 그는 진실로 타문화권 사역에 이상적으로 준비된 사역자였다. 바울뿐 아니라 바나바, 실라, 누가, 마가요한, 디모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루디아, 아볼로 등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선교사들도 그와 같은 디아스포라 출신들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오신 디아스포라 선교사였다. 복음의 원형인 언약(창 12:1‐3)의 본질 역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디아스포라로 부르신 소명이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 그리스도의 지상명령(마 28:18‐20)이 본질적으로 “가라”는 명령인 사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영역을 떠남이 없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방도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자기 백성을 흩으시는 것이다. 마치 농부가 분명한 목표와 의도를 가지고 씨를 뿌리듯[footnote]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사용된 동사가speirei( 13:)인 사실을 주목하라[/footnote]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의 의도적 섭리이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에 예언된 세계선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행 8:1‐4), 그리고 헬라인(이방인)에게 (행 11:19‐26) 디아스포라로 흩어짐으로써 구현되었다.[footnote]두 구절 공히diasparente(8:4, 11:19)가 사용되었다[/footnote]

한인 (아시아인) 디아스포라[footnote]자기네 언어인종적(ethnolinguistic) 근원지를 떠나 타지에 흩어져 사는 한인(아시아인).[/footnote]의 가능성

우리는 지금 역사상 전례 없는 기동성과 이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유학이나 이민 등 능동적 이주뿐 아니라, 전쟁과 내란, 천재지변으로 인한 난민이나 정치적 망명자 등 수동적 이주도 전례 없는 규모로 불어나고 있다.[footnote]참조: 국제연합 산하 UNHCR http://www.unhcr.ch) 자료.[/footnote] 지난 세기만 해도 대부분의 아시아인들은 그들의 인종 언어적(ethnolinguistic) 경계 내에 거주했었다. 한민족도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 갇혀 지냈다. 인종, 문화, 언어적 동질성 면에서나 문화적 배타성 및 폐쇄성 면에서 지구상에 유대인을 가장 닮은 민족이 있다면 아마 한인이 아닐까 싶다. 선교하기에 가장 장애요인이 많은 두 민족인 유대인과 한인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신비한 경륜을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절대자이심이 틀림없다.

한인의 한반도 편중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멀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가깝게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체제가 종식되던 90년대부터라 할 것이다. 일제 36년의 침탈을 통해 오랜 세월 한반도라는 우물에 갇혀 지내던 한민족은 당시 약 2천만을 헤아리던 한반도 인구의 사분지 일 이상이 해외로 흩어지는 민족 대이동 드라마를 연출했다.[footnote]박기호(1999)[/footnote] 그 이후에도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연해주 교포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라든지, 해방 이후 한국동란과 월남파병을 통한 분산, 1965년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가속화된 북미주 이민물결, 중남미 농업이민, 간호사와 광부 중심의 유럽 이주, 외환법 개정 및 해외여행 자유화 및 다양한 형태의 해외투자, 세계화 물결에 편승한 대량 유학바람, 73년간 지속된 냉전체제의 압박, 20세기말 급속한 냉전의 종식과 그에 따른 범세계적 민족이동 등 한반도 안팎의 크고 작은 다양한 사건들이 한민족 분산을 가속시켰다.

동방 ‘은자(隱者)의 백성'(the hermit nation)[footnote]Griffis(1882)[/footnote] 한민족을 긴 동면에서 깨어나게 하시고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으신 하나님의 섭리 이면에는 무슨 뜻이 있었을까? 물론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 때문이었다. 로마제국의 침략을 통해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흩어져서라도 세계를 품고 선교의 과업을 감당하게 하신 ‘선교의 하나님’[footnote]Stott (1999)[/footnote]께서 불과 백여 년 역사를 통해 교회사상 전례 없는 괄목할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를 선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한인들을 강권적으로 흩으신 것이다.[footnote]한반도에 복음이 소개된 후 한민족이 나라를 잃었다는 사실도 이스라엘과 유사한 상황이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을 강타한지 불과 3년 후 한일합방의 치욕을 경험하면서 민족 대이동이 본격화되었다.[/footnote] 현재 약 600백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인 디아스포라의 엄청난 선교적 잠재력을 생각해보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인종에 노출되어 함께 섞여 사는 가운데 자문화 중심적 편견과 아집을 벗어버리고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이상적으로 준비된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민족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인종들에게도 해당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현재 전 세계에는 7천만을 헤아리는 화교들이 흩어져 살고 있고, 인도계 디아스포라가 3천만, 필리핀계 디아스포라가 9백만, 일본계 디아스포라가 3백만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footnote]이것은 그간의 다양한 모임들(Asian Diaspora 전략회의, Ethnic Workers Summit 등)을 통해 입수한 비공식 통계이며 더 정확한 상황과 숫자를 파악하기 위한 전문이 본격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하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현황에 대해서는 윤인진(2004)을 참고하라.[/footnote] 그들은 대부분 본국의 동족들보다 복음에 대해 더 열려있어서 전도와 선교의 측면에서 매우 전략적인 자원인 셈이다.[footnote]심지어 한인 디아스포라도 한반도의 한국인들보다 복음적에 대해 더 수용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 홍은선 (2001).[/footnote]

역사의 수레바퀴에 휩쓸려 우여곡절 끝에 수동적으로 이국땅에 옮겨진 한인동포를 포함하여 자발적으로 이주한 이민과 유학생에 이르기까지 요즈음은 세계 어느 곳에 가든 한인이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1985년 미국에서 시작된 연례 유학생수련회(KOSTA)만 하더라도 이제는 미국과 캐나다를 비롯하여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러시아, 중국, 대만, 일본, 호주, 뉴질랜드,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잘 준비된 선교사들을 심심찮게 배출하고 있다. [footnote]KOSTA website: www.kosta.org[/footnote] 한국교회가 파송한 타문화권 선교사 수가 1만을 헤아린다지만, 600만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 10%만 그리스도인이라 가정해도 그 수는 무려 60만이나 된다. 그들은 언어, 문화적으로 잘 준비된 인력이고 해외 선교현장에 정착해 살고 있는 전략적 일꾼들이다. 그들에게는 비자 문제도 없고, 재정적 지원이 없어도 자비량하며 사역할 수 있다. 그들은 선교지 사회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섞일 수 있는 용모를 가지고 있다.[footnote]서구선교의 입지가 극도로 약화된 21세기에는 여권passport = 국적)보다 여권사진(passport photo = 인종)이 더 중요하다는 흥미로운 언급이 선교계에서 회자되고 있다[/footnote] 그들은 이주한 나라의 비주류 소수계층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선교지 소수민족의 입장을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서구인들에 비해 더 장기적인 헌신을 하는 편이며, 불리한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 수많은 애환을 경험했기 때문에 선교지에서의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다. 대부분의 아시안 디아스포라 사회는 학문적 열심과 전문성에 대한 성취욕이 높은 편이어서[footnote]최근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American Council on Educatio의 조사를 근거로.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는 소수민족, 특히 아시아계 학생들의 수가 1990년대 들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www.nytimes.com/2002/09/23/education/23COLL.html?todaysheadline[/footnote] 선교지 비자 습득을 위해서나 토착교회의 역량을 구축하고 현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측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그들의 시각이 열려 많은 디아스포라 일꾼들이 선교에 참여하게 된다면 남은 과업이 얼마나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완수될 수 있겠는가![footnote]북미주선교신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log) 2002년 연례총회의 주제가“Migration: Challenge and Avenue for Christian Mission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footnote]

급성장하는 2/3세계 교회

오늘날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분포는 세계선교를 위해 우리 시선을 서구교회가 아닌 2/3세계 교회를 주목하게 한다. Barrett & Johnson(2001)의 통계에 근거해 작성된 아래 도표를 보라. 검정막대로 표시된 서구교회는 지난 30년간 18% 성장한 반면, 새롭게 부상하는 비서구교회는 같은 기간에 131%나 성장했다. 수치상으로 볼 때 이 시대는 파랑막대로 표시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 교회가 주도하고 있는데, 그들은 숫자만 많을 뿐 아니라 생동력이 넘치고 핍박과 가난 속에서도 성장한 교회들이다.[footnote]Watters (2002)[/footnote] “지구촌에 12명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산다고 가정했을 때, 북미주에 2명, 중남미에 2명, 아프리카에 3명, 아시아에 3명, 그리고 유럽과 태평양에 각각 1명이 살고 있는 셈이다.”[footnote]Taylor (2001:31)[/footnote] “1800년에는 아마도 1% 정도의 개신교도만이 유럽과 북미주 밖에 살았을 것이다. 1900년에 이르러 그 규모는 10%로 늘었고, 오늘날은 약 2/3의 개신교도 및 구교도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footnote]Jenkins (2002:37). 비서구 세계를2/3세라고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인구나 면적이 전체의 2/3를 차지하기 때문인데, 이 통계에 근거한2/3세계 교라는 표현도 적절한 셈이다.[/footnote]

선교사 파송 추이도 그와 유사하다. “10년 전에는 대략 91%의 해외 선교사들이 서구에서 파송되었으나 2000년에는 그 비율이 79%로 줄어들었다. 대단히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비서구 세계가 파송한 선교사의 수는 3배로 증가했다. (중략) 선교사 파송의 가장 극적인 성장은 한국에서 일어났는데, 그 수는 1990년 2,032명에서 2000년 10,646명으로 늘어났다. (중략) 비서구권 선교사 파송의 두 번째 성장을 기록한 나라는 브라질로 1,08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 다음은 필리핀으로 678명의 타문화권 선교사를 파송했다. 46,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미국은 여전히 현저한 선두를 지키고 있고 지난 10년간 6,000명의 새로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반면에 노르웨이와 스웨덴,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전통적 파송국가들은 해외 선교사의 심각한 수적 감소를 경험했다.”[footnote]같은 책:31‐32.[/footnote]

비전 2025와 아시안 디아스포라 동원사역

Wycliffe Bible Translators와 자매기관 SIL International은 매 3년마다 열리는 국제총회 1999년 모임에서 ‘비전 2025’라는 야심찬 목표를 설정했다. 비전 2025는 늦어도 2025년까지는 아직도 자기네 말로 기록된 성경이 없는 3천 미전도 종족 집단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해주는 일이 최소한 시작되게 하자는 결의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으로 더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두 단체는 오랜 기간 지속해 온 사역적 관행을 과감히 초월해 창의적인 방식들을 도입하고 남은 과업의 완수를 위해 필요한 새로운 자원들을 동원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새로운 패러다임은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와 디아스포라 등 새롭고 전략적인 자원들에 시선을 돌리게 했고, 마침내 라틴아메리카 동원사역(Latin America Initiative)과 아시안 디아스포라 동원사역(Asian Diaspora Initiative) 같은 새로운 전략사업이 출범되었다.

이미 언급한 디아스포라의 전략적 가치를 생각할 때, 비전 2025의 성취를 위해 아시안 디아스포라 교회들을 동원하는 이 새로운 사업은 매우 타당하고 시기적절하다고 본다. 국제 위클리프(Wycliffe International)는 2010년까지 1,000명의 아시안 디아스포라를 포함한 2,000명의 아시아 출신 사역자들을 동원하는 목표를 세웠다.[footnote]우리는201년까지 중남미에서 500명 아시아와 아시안 디아스포라 사회에서00명 아프리카에서80명 그리고 기존의 위클리프 단체들로부터20명의 추가적인 사역자들이 타 언어나 모어母語 성경번역 운동의 지도자로서 위클리프와 함께, 또는 장외에서, 동역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Watters 2002)[/footnote] 이것은 물론 아시안 디아스포라 동원사역만의 목표가 아니라 모든 아시아 위클리프 단체들(한국, 일본, 홍콩,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네팔, 인도), 그리고 아시안 디아스포라가 밀집한 세계의 여러 지역들(북미주, 중남미, 유럽, 호주 등)이 함께 짊어져야 할 과업이다. 지난 반세기동안 북미주 선교사들을 배출하는 주요 통로 역할을 감당한 어바나 선교대회(Urbana Convention)의 아시아계 참석자 비율이 1980년대부터 급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footnote]어바나 선교대회에 참석한 아시아계의 대부분은 영어를 사용하는 Asian Diaspora이었다.[/footnote] 2000년 대회의 경우, 18,818명의 참석자 중 아시아계가 4,895명으로 전체 참석자의 26.1%를 차지했고 [footnote]www.urbana.org/u2000.factsheet.cfm[/footnote] 2003년 대회는 19,086명의 참석자 가운데 아시아계 비율이 27.3%로 늘어났는데[footnote]http://www.urbana.org/u2003.facts.cfm[/footnote] 그들 중 상당수가 타문화권 선교에 헌신한 것으로 알려졌다.[footnote]2000년에는 10,563명(72.71%)이, 2003년에는 10,936명()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World Christian)으로서 선교적인 삶을 살기로 헌신했다[/footnote]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KODIMNET)의 필요성과 시급성

지난 수년간 필자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동원사역의 책임자(International Coordinator)로서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을 방문하고 교제하는 특권을 누려왔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 사회의 엄청난 선교적 잠재력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고, 이 잠자는 거인을 깨워 세계선교의 남은 과업에 투입해야 할 필요성과 시급성을 절감했다.[footnote]Asian Diaspora를 동원하기 위해 현재 제작중인 비디오 프로젝트의 제목이 잠자는 거인 깨우(Waking the Sleeping Giant).이다.[/footnote] 얼마 전 유럽의 한인교회에서 선교세미나를 인도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강의를 그곳의 한인교포 2세들이 4개의 다른 언어(영어, 불어, 독어, 화란어)로 동시통역을 하는 게 아닌가! 그들의 언어 문화적 역량에 감동한 필자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유럽 거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선교 전략적 가치에 대해 역설하였다. 그러나 젊은이들이나 지도자들 공히 별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필자는 그들이 경제적 영세성 때문에 세계선교의 과업을 짊어지기에는 역부족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경제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에 선교를 우선순위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달란트의 분량대로 이윤을 남길 것을 기대하시지, 주시지 않은 것을 바라시는 분이 아니다. 유럽의 한인교회가 비록 경제적으로 영세하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있는 탁월한 인적자원을 세계선교를 위해 내놓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한 달란트를 주시고 다섯 달란트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지 않은가? 유럽과 중남미와 아시아 여러 나라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인적자원을 바치고, 북미주와 호주와 한반도에 있는 교회들이 인적자원과 더불어 물적 자원을 바쳐서 십시일반으로 함께 돕는다면 현 상태로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선교동역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는 지난 2003년 1월 북미주 한인 선교동원 심포지엄(Symposium on Korean American Missions Mobilization)에서 이 문제의 대안으로 세계선교를 위한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KODIMNET: Korean Diaspora Missions Network)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그 구성을 위한 몇 가지 실천방안을 제안하였다.[footnote]이 모임은 Project BGAN (Bringing the Gospel to All Nations) 주최로 2003년 1월13‐15일 Denver, Colorado에서 열렸다. 약 30명의 선교동원가 및 지도자들이 모인 이 심포지엄의 자료는 해당 websitewww.projectbgan.or)를 통해 접할 수 있다.[/footnote] 그 어간에 북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의 선교적 협력과 동역을 도모하고 촉진하기 위한 모임으로 세계선교동역네크워크(KIMNET: Korea Inter‐Missions Network)와 Project BGAN(Bringing the Gospel for All Nations)[footnote]Project BGAN은 일단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동으로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아시안 디아스포라 선교운동으로 발전한다는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website를 참조하라: www.projectbgan.org[/footnote] 등의 네트워크가 출범했는데, 이런 모임을 북미주 KODIMNET으로 보고, 중남미와 유럽, 아시아, 대양주 등 다른 대륙에서도 유사한 네트워크들이 짜여진다면 그 운동들을 잇는 범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가 태동될 수 있고 그러한 시도를 통해 전 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들이 자원과 기회를 공유하며 세계선교의 남은 과업 완수를 위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한편, 세계선교에 한국 젊은이들을 본격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출범한 선교한국 운동은 그간 대회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해외 교민들의 참여가 늘어나자 점차 ‘한반도’로부터 ‘한민족’ 선교운동으로 방향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선교한국 2004 대회 직후인 8월9일, 서울 사랑의 교회 교육관에서 선교한국 주최로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KODIMNET) 발기모임이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 북미주와 중남미, 유럽, 호주,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는 동원사역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현황을 나누고 바람직한 협력방안을 논의한 후 지속적인 협력을 다짐하였다. 이 여파를 타고 지난 9월21‐23일 아르헨티나에서는 중남미 한인교회들의 선교네트워크(LAKOMNET: Latin America Korean Missions Network)가 태동되었고, 다른 대륙들과 나라들에서도 물밑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향후 GBT의 동원사역도 한반도를 넘어 온 세상에 흩어진 600만 한인 디아스포라를 겨냥하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러한 네트워크가 가능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장해물은 집단이기주의적 근시안이다. 개인과 특정단체와 지역교회의 높은 담장을 허물고 세계선교라는 공동목표를 향해 우리의 역량과 자원을 한 주머니에 모을 수만 있다면 남은 과업의 완수는 그리 멀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힘이 더 세지거나 자원이 더 풍부해져야 지상명령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은 과업 완수의 공적(公敵) 1호는 부족한 자원이나 인력이 아니라 협력과 동역의 부재이기 때문이다.

Robb은 David Barrett과 James Reapsome이 공저한 700 Plans to Evangelize the World 의 자료를 인용, 협력 체제의 부재가 세계 선교의 가장 큰 장해요인이라고 밝히면서, 범세계적이고 초교파적인 협력 체제의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남은 과업은 영원히 완수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한다.[footnote]Robb(1993:5)[/footnote]10년 전에 출판된 그 책에 따르면 당시 세계 복음화를 겨냥하여 진행 중이던 프로그램들의 삼분지 이가 각각 스스로를 가장 중심적인 운동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단체나 프로그램과의 유대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해 나가고 있었고, 다양한 단체들과의 실질적인 협력체제 구축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선교단체나 교단은 겨우 4% 밖에 안 되는 형편이었다.

KODIMNET은 지금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좀처럼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던 한국 및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의 새로운 장을 열 수 있는 개념이라 믿는다. 이것은 새로운 대형단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흩어진 개인들과 교회들이 하나님이 주신 자원과 역량을 결집하여 범세계적 선교운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구체적인 예로, 앞에서 언급한 유럽의 한인 2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한반도와 북미주에 있는 교회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재정적 필요를 채워준다면 잘 준비된 전략적 인력이 낭비되지 않고 세계선교를 위해 의미 있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미주에서는 세계한인선교대회(KWMC)와 세계선교동역네크웍 (KIMNET), Project BGAN 등이 북미주 KODIMNET의 중심축 역할을 감당해주면 될 것이고, 한반도에서는 선교한국 사무국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섬겨주고, 중남미는 LAKOMNET이 그 기능을 감당하며, 유럽, 아시아, 대양주는 향후 조직되는 네트워크들이 대륙별 혹은 국가별 KODIMNET을 구축해주면 향후 범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Worldwide KODIMNET)가 구축되어 운영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선교에 헌신한 개인들과 교회들은 이러한 국가별, 대륙별 네트워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원함으로써 이러한 연합 선교운동에 기여할 뿐 아니라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네트워크란 모든 이에게 문이 열려있는 운동으로 누구든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며 유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장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느슨하고 실속 없는 운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실제로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헌신된 인력과 자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위에 거론한 다양한 도우미 단체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단체들과 운동들을 지원하고 협력하는 것은 대단히 효과적인 선교참여의 방편이다.

토의를 위한 질문

  1.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포라의 잠재력을 선교적 동력으로 엮어내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2. KWMC, KWMA, KIMNET, Project BGAN, LAKOMNET, 선교한국을 비롯한 기존 네트워크들 및 운동들을 한 데 엮어 범세계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네트워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3. 이미 앞서가고 있는 북미주와 한반도의 선교 네트워크들이 향후 수평적(다른 대륙들)으로, 그리고 수직적(다른 디아스포라 집단들)으로 확산/확장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참고 문헌

1. 문상철. 2001. The Acts of Koreans: A Research Report on Korean Missionary Movement. Paper presented to Global Congress on Church Ministry and Mission, October 2001 

2. ________. 2001. 
The Status of Missions in Asia: An Overview. Paper presented to Global Congress on Church Ministry and Mission, October 2001 

3. 박기호. 1999. 
한국교회 선교운동사. Pasadena: 아시아선교연구소(IAM)출판부. 

4. 정민영. 2002. 
Engaging the church worldwide in Bible translation. Paper presented to Wycliffe & SIL International Conference/Convention, June 2003. 

5. ________, ed. 2000. Asian Diaspora Initiative Strategy Meeting. Compilation of minutes, the ADI Guidance Team, Dallas, October 2000. 


6. 윤인진. 2004. 
코리안 디아스포라: 재외한인의 이주, 적응, 정체성.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7. 홍은선. 2001. 
Understanding Korean‐American Issues in Missions in Order to Develop New Strategies for Mobilization. M. A. thesis, Biola University. 

8. Barrett, David B. and Todd M. Johnson. 2001. Annual Statistical Table on Global Mission: 2001.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January 2001. 

9. De Ridder, Richard R. 1975. 
Discipling the Nation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0. Franklin, Kirk. 2001. 
Analyze how Paul and his missionary bands used the Septuagint and the synagogues to reach the Jewish Diaspora. How does this impact mobilizing Asian Diaspora in Australia for mission to their original homelands? Unpublished research paper. Melbourne: Tabor College. 

11. Griffis, William E. 1882. 
Corea, the Hermit Nation. 

12. Jenkins, Philip. 2002. 
The Next Christendom: The Coming of Global Christianity. Oxford University Press. 

13. Latourette, Kenneth Scott. 1975. 
A history of Christianity Volume 1: to AD 1500.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4. Robb, John. 1993. “Networking is the way!”,in 
Mission Frontiers, March‐April 1993:5‐7. 

15. Stott, John R. W. 1999. The Living God is a Missionary God.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A Reader , Third Ed., Ralph D. Winter & Steven C. Hawthorne, eds. Pasadena: William Carey Library, pp. 3‐9. 미션 퍼스펙티브: 성경적, 역사적, 전략적 관점에서 본 선교. 서울: 예수전도단. 

16. Szto, Melville. 
Issues and Challenges confronting Asian missions. Paper presented to Global Congress on Church Ministry and Mission, October 2001. 

17. Taylor, David. 2001. 
Operation World 2001… Reveals Emerging Global Trends. Mission Frontiers, December 2001. 

18. Verkuyl, Johannes. 1978. 
Contemporary Missiology .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 Watters, John. 2002. 
Executive Director’s Report to WBTI Convention. Report to Wycliffe International Convention, June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