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법
상담과 법률
목회자들은 교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과 상담한다. 그 내담자들 중에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정신적 질병을 앓고 있는 내담자들을 상대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중에 그 내담자들이 자살 등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하였을 경우, 교회와 목회자들은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제가 제기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국에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례를 중심으로 상담에 얽힌 법률 문제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사례는 이렇다. 1970년 초에 UCLA에 다니던 넬리(Nally)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천주고 신자였는데 기독교로 개종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맥아더 목사님이 시무하는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그 교회 대학생부에도 참여하였으며 그 교회 부목사로부터 제자 훈련을 받기도 하였고 상담을 받기도 하였다. 그 부목사님은 넬리가 가끔 삶의 부조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심한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978년 후반 넬리는 그의 여자 친구와 교제를 끊은 후 더욱 의기소침해졌고 또 다른 부목사와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은 넬리에게 자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넬리는 1979년 3월경 엘라빌이라는 약을 과도하게 복용하여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목숨은 건지게 되었고 퇴원 후 다시 담임 목사인 존 맥아더 목사와 상담을 하였으며 그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다. 담임 목사는 넬리로 하여금 정신과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정신과 치료를 받지 않았다. 넬리는 다시 부목사와 상담을 하면서 자살하는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 부목사는 그리스도인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빙자한 자살은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그후 넬리는 그의 새로운 여자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하였으나 거절 당한 후 자기 친구의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였다. 넬리의 부모는 그의 아들이 다녔던 그레이스 교회와 그 교회 목사 4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들은 소장에서 성직자들이 그들의 아들이 자살하는 것을 방지해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긴 과오로 말미암아 그 아들이 부당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고 하였다. 이 사건이 소위 캘리포니아 법정을 10여년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유명한 넬리 대(對) 그레이스 커뮤니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목회 상담자들의 역할·의무·한계 등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케 하는 사건이었다.
전문가들이 그들의 전문적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 과오를 저지른 경우 그 전문가들의 과오를 소위 전문직 과오(malpractice)라고 한다. 예컨데, 의사들이 과오로 환자를 오진하여 손해를 입혔을 경우라든지, 또는 변호사들이 소송을 잘못 진행하여 손해를 끼쳤을 경우가 바로 전형적인 전문직 과오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상담 전문가들도 미국의 경우 국가로부터 상담 전문 자격을 받기 때문에 상담가들이 상담을 잘못하였을 경우에도 바로 이 전문직 과오(malpractice)에 해당된다. 넬리의 가족이 그레이스 커뮤니티 교회 목회자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주장하였던 법 이론이 바로 이 전문직 과오였다. 즉, 넬리의 가족은 상담자를 선출하고 훈련하는데 있어서 교회가 과실을 범하였으며 나아가 교회 상담자들은 자기 아들인 넬리로 하여금 더 전문가적 보호를 받으라고 격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 교회의 종교적 교리 교육이 넬리의 천주교적 양육을 무시하였고, 넬리의 선재하는 죄의식, 염려 그리고 우울증을 악화시켰으며, 넬리에게 자살을 한다 하더라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을 넣어 주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에서 주요한 쟁점은 “내담자인 넬리로 하여금 자살을 피하도록 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과연 교회에게 있는가”였다. 만약 교회에게 그런 법적인 의무가 있다면 그런 법적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과실에 대해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그런 법적인 의무가 없다고 하면 윤리적인 책임은 별론으로 하고 법적 책임은 면한다 할 것이다. 법원은 어떻게 판결을 하였는가? 1심 판결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는 그런 법적인 의무가 존재치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넬리 가족이 항소를 제기하였고 2심에서도 같은 쟁점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2심에서는 원고인 넬리 부모의 편을 들어주며 교회에 법적인 의무가 있고 교회는 그 의무를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항소 법원은 교회에 법적주의 의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넬리의 교회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심리적 의존도는 전문 상담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교회내 비전문 상담가에게도 인정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회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다시 교회의 편을 들어 주며 교회에는 책임이 없다고 항소심 판결을 뒤엎었다. 즉 교회 내 비전문 상담자와 그의 내담자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교회 내에서의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는 비상업적이고, 보호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며, 자발적 성질의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 판결로 교회는 상담자 과오에 대한 짐을 덜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교회의 편을 들어주며 자살 위험성이 있는 교인들을 평가하여 병원에 가도록 하여야 할 법적 의무를 목회 상담자들에게 부여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기독교 상담 사역을 보호하여 주었다. 대법원은 만약 교회에 그런 법적 의무를 부여한다면 목회 상담자는 자살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사역을 하기보다는 소송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역을 기피하게 될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소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는 “그레이스 교회는 넬리에게 법적인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소수 의견도 경청하여야만 한다. 이유는 그 교회가 자기 자신들을 우울증과 자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한 전문가라고 넬리에게 소개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자신들의 능력을 과장하여 넬리로 하여금 믿게 만들었다면 교회도 법적인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다. 10여년의 송사 끝에 결국 교회의 승소로 끝나기는 하였지만 교회는 많은 고통을 감수하여야 했다. 이 사건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배워야 할 많은 교훈을 남겨 주는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레이스 교회는 스스로를 과대하여 자신들이 정신 심리를 다루는데 있어 유능하다고 광고를 하였다. 이것이 잘못이었다. 교회는 자신들의 능력을 솔직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있어서는 다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간질병 환자가 어느 교회를 찾아 갔다. 그는 간질병이 너무 심하여 가족들조차도 이제는 지쳐 관심을 갖지 않는 환자였다. 이 환자의 가족은 그를 교회로 안내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그를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개척 교회로 안내를 하였다. 그 교회의 목사 부부는 그를 환영하였고 열심히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를 교회에 기거하게 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때로는 잠을 자지 못하면서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였다. 목사 부부만 그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다 시시때때로 온 교인이 그 환자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었다. 목사 부부 뿐만이 아니라 교인들도 이제는 그로 인해 지치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 이르도록 교회에 속한 누구도 치료를 위해 그 환자를 전문 기관에 보내라는 말을 한 사실이 없었다. 오직 기도로 이 환자를 고칠 수 있다고 온 교인들이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 환자는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그 개척 교회의 목사는 그를 가볍게 때리면서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 날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런데 사체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은 외부의 충격에 의한 것이었다. 결국 그 목사는 구속이 되었고 법의 심판을 받았다. 선한 일을 하다 구속까지 된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상담하는 도중 왜 그 환자를 전문 기관으로 보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그 때는 우리가 어리석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예수님조차도 베데스타 연못가에 있는 많은 병자들 가운데 오직 38년된 병자만을 고치셨다. 그것도 그 치유라는 행동을 통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치유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교회나 교회 사역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