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기독교세계관


오른쪽 표지판을 따라서


지난 주일(7월 22일) 아침, 현재 서울에서 다니고 있는 ‘문을 여는 교회’의 수양회가 열리고 있는 용인 청소년 수련원에 뒤늦게 참여하기 위해 양재역 근처에 있는 서초 구청으로 향했다.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수고하시는 전현철 목사님과 오전 7시에 만나 함께 가기로 약속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전날인 토요일에는 미국에서 같은 교회에 다니던 형제와 자매들이 함께 하는 성경 공부에 참석했었다. 약간 늦게까지 뒤풀이를 한 후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는 PC 방에 들러 ‘미국’으로 이메일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니 벌써 새벽 두 시가 넘고 있었다. 무더위에 흐른 땀을 씻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적어도 여섯 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하는 염려와 함께….


주님의 도우심이었는지 새벽 5시 45분에 눈이 떠져서 적당히 씻고 짐을 챙겨 잰 걸음으로 지하철에 오르니 6시 5분. 양재역까지 가려면 약 한 시간은 잡아야 할 것 같아 일단 5호선을 탄 후 7호선과 3호선으로 갈아타고 양재역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6시 58분. 부랴부랴 서둘러서 서초구청이라 쓰여 있는 출입구를 찾아 나섰다. 출입구에 나와 보니 방향 표지판이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인 오른쪽으로 되어 있었다. 약간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지난 번에 한 번 와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착하니 7시 3분.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주위를 둘러 보니 전 목사님은 아직 오시지 않은 듯하여 마치 나는 정각에 도착한 양 핸드폰을 들고 약간의 여유를 곁들여 전화를 드렸다. 아니나 다를까. 목사님은 오고 계시는 중이고 이제 약 삼 분 후면 도착할 예정이란다. 난 안심하고는 책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이것 저것 정리를 하였다. 계획도 세우고, 써야 할 페이퍼 스케줄도 정하고…. 시계를 보니 7시 15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도착하실 때가 됐는데…. 길이 막히나? 아니면 잘못 찾으시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다시 전화를 드리려다가 운전 중일 지 모른다는 생각에 (요즘은 운전 중에 핸드폰을 받으면 벌금이 많음) 좀 더 기다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기다리는 곳에는 여러 여행사들의 차들이 세워 놓고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여기가 구민회관이지요?”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그 분이 “예, 맞아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까지만 해도 그 물어보신 아주머니께 가서 여기는 구민회관이 아니라 서초구청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었으나 그분이 금새 자리를 뜨시는 바람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으로 앉아 있었다. 동시에 대답하신 아저씨에게도 “그게 아닌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분도 기다리던 차가 도착하면서 막 떠나 버렸다.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피해가며 지하철 안에서 읽던 페이퍼를 마저 읽다보니, 써야 할 페이퍼 제목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것을 수첩에 적어 넣고 나니 시간은 어느 새 7시 40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뭔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서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드렸더니, 전화벨이 한 번 울렸는데 바로 목소리가 들린다.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어디 있느냐고. 우리 둘 다, 서로, 지금 서초구청 앞에 있노라고 자신의 위치를 밝혔다. 이럴 수가 없었다. 둘 중에 하나는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신있게 빨리 이쪽으로 오시라고 요구했다. 그랬더니 당신이 정확하게 서초구청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건물 입구 쪽으로 걸어 가서 건물 이름을 확인해 보니 글쎄 ‘서초 구민회관’이 아닌가? 아뿔싸, 얼굴은 화끈 달아 오르고 어찌 해야 할 지는 모르겠는데 목사님께서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다. 전화를 끊고 나서 본능적으로 여러 생각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우째 이런 일이?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난 7월 6일에서 8일까지 녹색연합이라는 단체와 함께 국내에 있는 생태마을들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 때 출발하기 위해 만난 장소가 바로 서초 구민회관이었는데 그 곳을 서초구청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초구청 안에 구민회관이 있는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가설과 오해로 빚어진 실수임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쩌겠는가? 기왕 벌어진 일인 것을….


목사님과 ‘구민회관’ 앞에서 7시 45분 경에 만나서 박장대소를 하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기다리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나누었다. 목사님도 전날 바쁜 일 때문에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조금 늦게 일어나시는 바람에, 바삐 챙기고 나오다가 지갑도, 주소록도 다 두고 오셨단다. 그래서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하실 수 없었다고 아쉬워 하셨다. 내 전화번호를 알아 보려고 여러 시도를 해 보셨으나 아무도 이른 시간에 전화를 받지 않더라고. 나는 나름대로 마음에서 오갔던 (위에서 적은) 생각들을 이야기하면서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드렸다. 그랬더니 당신도 늦게 오셨고 중요한 것들을 챙기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하시면서 위로하시는 것이었다.


수련회장으로 가는 길 내내 머리 속에서는, 이제까지 살아오는 길목마다 놓여진 표지판들을 무시하고 나름대로의 선입견이나 경험에 비추어 나의 길을 선택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과 두려움이 맴돌았다. 분명하게 표지판은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왜 나는 질문도 없이 왼쪽을 거침없이 선택했을까? 그리고 중간에 기회가 있었는데도 왜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것은 바로 자신의 얄팍한 경험과 기준(심지어는 망각의 늪에서 생겨난)을 절대적으로 믿는 아집과 교만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성경을 읽고 그대로 산다고 해도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의 신, 창조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본래적인 죄성을 벗을 수는 없는가 보다. 결국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가리키는 방향 표지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일진대 나의 이런 모습은 철저한 불신의 소치에서 온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참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분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지 애써 연구하고 알아감이 없이, 좁고 뒤틀어진 가치관과 오염된 생각들로 자신의 삶의 방향과 내용들을 결정하고 남도 훈계해 왔으니…. 쥐 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생각을 우리 주위와 한국교회로 넓혀서 어느 부분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장 심각할까 점검해 보니 역시 종교적인 전통의 영역이 수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는 거의 상식적이거나 성경적인 질문마저도 할 수 없고 또 하지도 않는, ‘신학 지상주의’에 까지 다다른 기독교의 실상을 보게 된다. 신학을 최고로 아는 또 다른 ‘전통’이 이미 ‘우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생각의 범주가 넓어지고 질문의 능력이 싹트기 전 이미 그러한 분위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면서 깊이 없이 생각이 고정돼 버린 것이 중요한 화근이라면 화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질문이나 여과 없이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버리는 형국임을 감안할 때 훨씬 더 그 위험의 수위가 높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교회당에서 시간을 보내며 일을 하는 것은 더 할 나위 없는 하나님의 일이며, 선교라는 이름을 붙이면 무엇을 해도 괜찮으며, 전임 목회자가 되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헌신이며, 가족이나 이웃이 굶어 죽어도 십일조는 반드시 본 교회에 내야만 하는. 이런 국적 모를 전통들이 우리 신자들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다. 본인이 알든 모르든 구조적으로 교묘히. 어쩌면 구조적으로 숨통을 조이는 가해자들 조차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예수님을 죽일 때 손을 씻었던 빌라도는 그래도 양반 중의 양반이 아닐까?


주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흘리신 동일한 눈물로 우리를 향해 외치시고 있는 듯 하다. 우리는 모두 오른쪽으로 난 표지판을 거스르고 왼쪽으로 가고 있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예언서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외치고 있다(이사야 53장 6절). 구체적으로 예배, 헌금, 사랑을 베푸는 것마저 본래의 정신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거나, 아니면 형제들이 피폐해지도록 돌보지 않고 내어버려 두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을 어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습하고 장사터로 만드는 악행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며 무슨 논리로 정당화 할 수 있겠는가? 이사야 선지자는 이 모든 일들을 예언이라도 하듯 주님의 마음을 대변하여 어떠한 헌금이나 제사도 다 가증스럽고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러한 것들이 주께는 무거운 짐이 된다고 선언하며 당시의 시대상을 통렬히 책망하고 있다. 종교적인 행위는 무성하지만 포도주에 물을 섞고, 뇌물을 받아 고아와 과부를 신원하지 않을 정도로 공의가 없어져 살인자들만 난무하다고(이사야 1장 전체). 예수님도 당시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당시에 통용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해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이 책망의 촛점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십일조가 형식에 빠져서 율법의 핵심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렸다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단언컨대 우리의 실상이 구약 이스라엘의 시대나 예수님의 시대 상황보다 그 타락의 정도가 결코 덜 하지 않다. 화려한 예배당과 그 속에서 연주되는 거룩한 음악, 세련된 설교, 그리고 어떤 지방 자치 단체들보다 풍부한 예산, 바쁘게 돌아가는 모임과 헌신의 약속들. 그러나 정작 교회 안에 참된 의와 인과 신이 있는가? 형제됨이 살아 있는가? 과연 크리스천 개개인들의 삶의 현장에서 정직과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가? 대교회는 장사터로 변해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고, 지난 90년 대 초반부터 불거져 나온 교회의 부패와 사회 속에서 저질러지는 굵직 굵직한 해악의 중심에는 어김 없이 내노라 하는 크리스천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음을 떠올리면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악함에서 한 발짝도 멀어져 있지 않은 공범자임을 자인할 때, 많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꾸짖으며 외친 세례 요한의 음성이 무섭게 들려 온다 –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마태복음 3장 7절-10절)


느헤미야는 성벽을 중수하고 나서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으고 학자 에스라를 모셔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게 한다(느헤미야 9장).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듣는 도중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회개가 일어나고 결국 그 회개가 이스라엘 전체의 공통된 삶의 전환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이방 백성과의 통혼 금지이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백성들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율법과 그에 깃든 정신을 어그러 뜨렸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와 예배도, 동족 간의 사랑도 모두 저버리게 된 악한 현실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성의 지도자로서 느헤미야의 업적은 성벽의 중수는 물론 더 더욱 백성들의 마음에 율법, 즉 하나님의 마음을 심어 놓은 것이 백미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첨단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모양과 형태는 다르지만 핵심은 전혀 다르지 않은) 우상 숭배의 악함이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회복하는 일, 이것 보다 더 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이는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보여준 율법의 회복에 달려 있다. 곧 그 옛날 루터가 외쳤던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의 정신이 우리 개신교의 양보할 수 없는 근간이라면, 우리는 온 정신을 모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을 성경 대로 연구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절대의 믿음과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로 말미암아 회복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통해서만 인간과 자연의 참된 회복을 이룰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성경과는 다른 종교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십자가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바꿔가는 참다운 회복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단지 교회당과 종교 조직과 연관된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아니 우리의 생각이 닿고 노동하는 그 모든 영역들을 하나님의 신앙으로 되살려 내는 작업. 주께서는 그것을 우리로부터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주께서 성령과 성경을 통해 오른쪽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오른쪽으로 가는, 지혜롭고 순결한 신앙의 결과로서 드려지는 삶의 예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