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라덴의 죽음과 숨겨진 역사 2


 


     앞의 글에서는 빈 라덴의 죽음을 계기로, 과거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진행된 미국의 비밀 작전의 역사와 영향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역사의 의미와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함의의 살펴보려고 합니다. 냉전기 미국의 개입과 그 결과를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이라는 정치학자의 ‘블로우백(Blowback)’입니다. 블로우백은 원래 CIA 내부 용어로, 비밀 작전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해로운 결과가 아군에게 미치는 것을 설명하는 단어였습니다. 찰머스 존슨은 이 개념을 통해, 비밀리에 진행된 CIA 작전이 결국 9.11테러와 탈레반, 알카에다의 형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합니다. , CIA가 미국의 필요에 따라 훈련시키고 무장시킨 아프간 극단주의 이슬람세력이 결국 9.11테러와 미국에 대한 위협이라는 일종의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i]
                                              찰머스 존슨과 그의 책 ‘블로우백’


     9.11테러가 발생한 후, 당시 부시 대통령은 그들은 왜 우리를 증오하는가 (Why do they hate us)?”라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유를 증오한다 (They hated our freedom)”이라고 스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 9.11테러 공격은 선을 상징하는 미국이 누리는 번영과 자유를 시기한 악의 세력이 일으킨 사건이며, 테러와의 전쟁은 선악간의 투쟁이라는 말이지요. 이에 대해 찰머스 존슨은 앞에서 소개한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왜 우리를 증오하느냐구요? 그에 대한 답은 바로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 파월, 아미티지, 1980년대에 아프간에서 역사상 최대의 비밀 작전을 수행했던 그들이 아주 자세하게 답해줄수 있을 겁니다. 오사마 빈 라덴은 노리에가나 후세인 처럼 한때 미국의 가까운 협조자로 있다가 이제 공공의 적이 된 인물들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ii]


     모션캡쳐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 베오울프(2007)를 보면, 영웅 베오울프는 괴물을 물리쳐 왕의 자리에 오르고, 외적과 괴물로 부터 왕궁을 지키는데, 결국 왕국을 위협한 최후의 괴물은 전쟁의 과정에서 베오울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를 비유로 사용한다면, 소련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죽이기 위해 미국은 작은 괴물들을 만들어 내었는데, 소련이 사라진 지금 이제 자신이 만들어 낸 괴물들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과거 범죄조직의 일원이었다가 손을 씻은 후,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정체를 감추고 살아가던 주인공에게, 계속해서 과거의 인물들이 찾아오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다시 폭력을 사용해 악당들과 싸우지만, 그 과정에서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은연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폭력성이 전염되 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 역시 미국의 역사에 대한 은유로 읽을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베오울프(2007)’
                                                     영화 ‘폭력의 역사(2005)’


     물론 테러의 원인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고 모든 책임이 미국에게만 있다는 주장도 당연히 지나친 생각이겠습니다. 미국의 정책과 상관없이도 반미감정을 내세우고 테러를 일삼는 집단이 나타날 수도 있겠고, 헌팅턴이 주장 했듯이 지하드와 같은 근본주의 이슬람의 영향도 중요한 요소이겠습니다. 그러나 앞의 역사를 살펴보았듯이 테러와 반미감정의 일정부분은 과거 미국이 냉전기에 뿌린 씨앗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빈 라덴 사살 이후 미국의 한 복음주의 목사님이, 기독인으로서 누군가가 죽은 것을 기뻐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만,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빈 라덴은 자신이 뿌린 악의 씨앗의 열매를 거둔 것이며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한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쓴 글을 보았습니다. 빈 라덴이 수천명의 민간인이 살해된 9.11 테러의 주범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는 미국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습니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오늘날 미국이 경험하고 있는 국제관계상의 문제들, 특히 테러와 반미감정은 상당부분 냉전기에 미국이 뿌린 씨앗의 열매로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미국 시민들은 미국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하는지 몰랐을 지라도 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할 때의 일인데, 같은 사무실에 있던 나이가 많으신 미군 특무상사 (Sergeant Major) 한분이, 9.11테러 이후 아프간 전쟁이 한창이던 2002년 경 제대를 해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이분과 우연히 함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분은 자신이 80년대에 아프간에서 스팅어미사일 교관으로 무자헤딘을 훈련시켰었다고 하면서, 그 무기로 지금 탈레반과 알카에다가 미군을 공격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럴수가 있냐고 한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했지만, 속으로 그럼 극단주의 무슬림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킨후에, 소련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이용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그 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손떼고 떠난 미국의 정책은 잘한 것인가 묻고 싶었죠.


 


     물론 이런 비판은 미국안에서는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부분이고, 까딱하면 반미주의자나 극단주의자, 혹은 비미국적인 발언으로 공격받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내부 경선 주자 중 한명이었던 하원의원 론 폴(Ron Paul)은 미국 내에서 고립주의를  주장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중 하나인데, 미국의 무분별한 해외 개입을 중단해야한다는 입장에서, 위에서 말한 찰머스 존슨의 블로우백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아프간전과 이라크 전을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뉴욕시장이었던 루디 줄리아니를 비롯해서 다른 후보들은 그렇다면 9.11 테러의 책임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냐그런 발언은 비미국적이고 용납할수 없다고 펄펄 뛰며 론 폴에게 발언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iii] 


 


     조지 부시를 비롯해서 미국 보수인사들이 보이는 중요한 특성이, 반성적 사고가 부재하고, 쉽게 미국 스스로를 으로 미국의 적을 으로 등치시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기독교적인 수사들을 들으면 언뜻 기독교적인 냄새가 나지만, 결국은 성경적인 생각도 아닐 뿐더러, 복음전파에 엄청난 해악을 끼친다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가져옵니다. 사실 성경은, 외적으로 행해지는 악도 있지만, 내적 반성이 없이 스스로 선을 자처하며 문제를 외부로 돌려 자신은 변하지 않고 상대방만 변하라고 하는 태도 자체가. 더 심각한 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처절한 비판을 보면 이를 잘 알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미국 남부에서 상당수의 보수 기독인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이해를 하겠는데, 미국 역사의 어두운 면들 인디언 학살, 흑인 노예제와 인종 차별, 베트남 전쟁과 최근의 이라크 전쟁 등등 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도 반성적 사고가 없이 무조건 미국은 옳았다라는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깊은 실망감을 느낀적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관점과 반성적 사고의 부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문제의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 테러리즘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결정에 결정적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많은 비판을 받은 것도, 결국 테러리즘을 포함한 국제 갈등의 원인을 문화와 종교의 문제로 환원시킴으로서, 이슬람 문화와 종교의 폭력성에 테러의 근본 원인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주장이 반드시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중요한 요소들인 과거 미국의 외교정책에 오점들, ,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 지원의 문제,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패권정책, 중동국가들의 비민주성과 그러한 독재정부와 미국의 유착관계 등을 간과하는 것이 상황을 심각하게 오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경우 단순화는 쉬운 답을 제공하지만, 본질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단순화된 사고와 신학이 끼치는 폐해들을 우리는 미국과 한국의 교회들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헌팅턴 교수



                                              헌팅턴 교수의 책 ‘문명의 충돌’
     그동안 중동에서의 미국의 정책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목표들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동시에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해 석유를 확보해야 하고, 또한 미국의 최우선순위인 이스라엘의 이익과 안보를 보장해야 하고, 이러다 보니, 실제로는 수많은 독재정부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겉으로 미국의 가치(민주주의, 인권, 경제발전)를 내세웠지만, 사실은 미국의 이익(냉전에서의 승리, 석유이익확보, 이스라엘 지지, 테러와의 전쟁)이 더 중요했고, 이러한 괴리는 아랍인들에게 심각한 환멸과 반미감정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입니다. 부시정부는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었던 대량살상무기와 알카에다와의 연계가 발견되지 않자, 후세인이 독재정부이기 때문에 침공이 합리화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미국은 자신의 다른 동맹국들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 이집트, 요르단, 쿠웨이트 등등도 침공해 민주화를 시켜야 했겠죠. 앞에서 말한대로, 파키스탄은 최근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긴 했지만, 군부와 ISI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독재국가에 가깝고 테러와의 전쟁 내내 쿠테타로 집권한 무샤라프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상황은 민주주의의 기준에서 최악에 가깝고 일종의 중세시대에 가까운 상황인데, 정당이나 헌법조차 없을 뿐더러, 여성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개종을 하게 되면 국가가 목을 베거나 국외로 추방할 권리가 있을 정도 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많은 기독인들이 이제 선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라크 전쟁은 잘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우디를 지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우디가 최대의 산유국이고, 유가안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석유 결제를 달러로만 하기로 합의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국은 중동의 안정과 이스라엘의 안보라는 이름으로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의 독재정부를 지지해 왔습니다. 이집트에서 시민들이 무바라크에 대항하는 시민혁명을 일으켰을 때 미국이 이를 선뜻 지지하지 못한 이유이지요. 무엇보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잔혹한 점령정책과 인권유린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함으로서 아랍인들의 공분을 사 왔습니다. 결국,이슬람의 문화와 종교가 근본 원인이라는 헌팅턴의 주장은 단순한 설명을 원하는 미국인들에게 쉽게 지지를 받고, 과거의 정책에 대한 불편한 양심을 잊어버리게 해줄 수는 있겠지만, 테러리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다는 생각이 듭니다. 귀에 듣기 좋은 얘기를 하는 일종의 거짓선지자인 셈이지요
 


     사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테러조직이 중동의 시민들의 삶과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말 그대로 공포(Terror)와 분쟁만을 안겨주었을 뿐이고, 아랍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강화시키고, 진정한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가로막은 역할 밖에 한 것이 없지요. 예를 들어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는,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제 중동에서도 시민혁명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테러리즘은 힘과 지지를 잃어갈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상당히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iv]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러리즘이 이제까지 지속 되어 온 것은, 미국의 중동정책에 내재한 모순으로 인한 반미감정이 워낙 극심하고, 그것이 테러리즘에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왜 그러한 반미감정이 일어나는가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도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엄청난 무기와 첩보전을 통해서도 테러리즘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빈 라덴이 사살 된 후, 미국 언론에서 진행된 또 하나의 논쟁은 바로 고문의 효용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특히 폭스 뉴스를 비롯한 미국의 보수 언론들은, 오바마가 정치적으로 유리해진 상황을 못견디고, 이를 깎아내리기에 바빴는데, 특히 과거 부시정부의 인사들을 불러다가 고문을 허용했던 것이 빈 라덴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논리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전 부통령 체니, 전 국방부장관 럼스펠드, 그리고 법무부에서 일하면서 고문과 관련해 법률조언을 했던 버클리대 법과 교수 존 유 (John Yoo)등을 불러다가 인터뷰를 했는데, 특히 존 유 교수는 아부그레이브와 관타나모 기지에서 고문이 허용되도록하는 문서를 작성하고, 테러리스트에게는 제네바 협정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하여 상당한 비판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최근 폭스 뉴스의 마이크 허커비 쇼에 출연한 그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비난을 받았지만, 고문의 효과가 빈 라덴의 사살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했고, 호스트인 허커비도 고문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계 미국인인 존 유 교수가 고문이라는 국제법에도 위반되고 인권을 유린하는 정책을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도 안타깝고, 아무리 보수인사라지만 남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인 허커비가 자신도 고문의 중요성을 지지한다고 하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v] 같은 보수 정치인이긴 하지만, 베트남 참전시 포로가 되어 5년동안 잡혀서 고문을 경험했던 존 메케인은 다행히도 고문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재확인했습니다.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라라는 성경의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존 유교수의 사진



                 존 유 교수를 전쟁범죄로 기소해야한다고 비난하는 시위자들의 모습


     고문이 빈 라덴의 위치 파악에 얼마나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지는 아직 논란이 있습니다. 정말 그렇게 고문이 도움이 되었다면, 부시 정부는 두번의 임기가 끝나도록 왜 빈 라덴을 잡지 못했고, 이라크 침공을 비롯해 왜 그렇게 처참한 정보의 실패를 거듭했는가에 대답을 해야하겠죠.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주었더라도 그런 방식을 통해 과연 테러리즘을 해결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엄청난 군사력에도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이라크전쟁에서도 수렁에 빠저 헤어나오지 못하고 제2의 베트남전이 되고 있는 것은 왜입니까? 모두가 정당성(legitimacy)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소련과 구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진 것을 보면, 고문과 도청이 아니라 그 무엇을 해도, 정당성이 없는 싸움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잘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정당한 목적과 더불어 정당한 수단이 도입되어야 장기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생각합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을 보면 이스라엘 특수조직이 검은 구월단의 테러에 보복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의 지도자들을 역시 테러를 통해 암살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데, 결국 테러는 테러를 낳을 뿐이며, 암살된 테러 조직의 지도자들은 더욱 악독한 인물들로 교체되고, 테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인간성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영화 뮌헨(2005)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이 오늘 테러조직들의 뿌리가 된 것을 살펴보면, 손쉬운 문제 해결을 위해 도입한 불법적인 수단들은 결국 언젠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냉전기에 공산주의 소련을 저지하는 것은 어느정도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모든 것을 합리화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고, 오늘도 테러리즘을 저지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모든 수단을 합리화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니체는 괴물과 싸울때는 당신이 괴물과 닮아가지 않도록 주의하라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사단의 시험도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정당성을 이야기 하면 현실주의자들은 순진한 이상주의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는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정책이나 전쟁이라도 정당성이 없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당성이 국내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담보하고, 국제적으로 동맹국들의 지지를 담보하며, 분쟁 지역에서 현지인들의 지지에 결정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 이후 미국인들도 “winning hearts and minds”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배우게 되었죠. 이러한 정당성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정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제정치와 관련된 논의를 들어보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요, 많은 미국의 기독인들도 하나님이 아닌 미국의 번영과 안보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우상으로 섬긴다는 것은 번영과 안보가 궁극적 가치가 되어 다른 가치들과 충돌할때 최우선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서는 고문도 괜찮고 도청이나 납치, 암살도 괜찮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의보다 국가 안보가 중요하다는 말외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다소 미국에 대한 비판적인 주장을 하면, 기독인들 중에서는 마음이 불편한 분들이 꽤 있으실 줄 압니다. 흔히 미국에 대한 입장은 친미냐 반미냐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갈라지는데, 저는 미국이 하는 것은 언제나 옳고 정의로우며 미국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친미, 그리고 미국이 곧 모든 악의 근원이며 미국을 반대하는 것이 곧 정의라는 반미도 기독인의 입장이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러이러 하다라고 말한다면, 벌써 객관적인 판단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지요. 기독인들은 미국이든 한국이든, 거리를 두고 하나님의 정의의 차원에서 지지할 것은 지지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이 일치한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그 두가지가 충돌할 때, 우리가 국가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를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아닌 국익을 신으로 섬기는 것이지요. 성경은 이를 우상숭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절대화를 상징하는 금신상앞에 절하기를 거부했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 처럼, 모두가 옳다고 믿는 부분이라도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라면 과감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기독인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도해 봅니다. 설령 단기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목적과 수단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것이 궁극적으로 정의와 생명, 평화의 길이라는 것이 성경과 역사가 말하는 교훈이라고 믿습니다.


 


나오며


 


      빈 라덴이 사살된 것으로 이 글을 시작했지만, 빈 라덴의 죽음 자체에 글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은 것은, 이제는 빈 라덴 개인이나 그의 죽음 자체가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빈 라덴이 더 이상 테러를 계획하지 못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기독인으로서 한 개인의 불행한 죽음을 축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의 그를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로 즉결 사살 한 방식에도 문제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 이후 공포심을 이용해, 정당성 없는 이라크전쟁을 밀어부친 부시 정부가 거짓말로 점철된 임기를 보냈다는 것과 비교한다면, 적어도 빈 라덴을 추적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오바마가 상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대로, 드러난 현상인 테러의 배후에 있는 미국의 과거 정책을 반성하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비롯한 중동의 평화와 민주화가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테러리즘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i]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 Chalmers Johnson, ‘American Militarism and Blowback: The Costs of Letting the Pentagon Dominate Foreign Policy,’ New Political Science, Volume 24, Number 1, 2002, p.23-25



[ii] 2004년에 버클리대에서 진행된 찰머스 존슨의 인터뷰(Militarism and the American Empire)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oOjYteh-ZRs )



[iii] 2007년에 진행된 폴과 루디 줄리아니간의 토론은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QrwKr_b4Lg )



[iv] 지난 5 5 CNN 에서 진행된 마이클 무어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CkOSgSsNXwM )



[v] 허커비와 교수의 인터뷰는 다음 링크에서 직접 보실 있습니다. (http://video.foxnews.com/v/4683623/huckab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