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과 인간이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기초 (2)


3. “문화화(enculturation)” 과정과 세계관의 형성


지난 호에서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한 인간 이해에 기초한다고 하였다. 이 인간 이해라 함은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이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 혹은 집단을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그들의 의식세계 저변에서 작용하고 있는 세계관의 구조와 내용들을 알 필요가 있다.


어느 공동체 혹은 집단이든지 문화는 표층구조와 심층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적 사고와 행동들과 부산물들을 문화의 표층구조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화적 현상의 저변에서 사람들의 습관적인 사고와 행동들을 창출해 주고 지배하는 잠재의식적인 믿음들(assumptions or beliefs)과 가치들(values)과 충성들(allegiances), 그리고 이에 부수되는 감정들(emotions)의 구조를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관은 문화의 심층구조를 가리킨다. 이 세계관은 어느 한 사회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의 어린 시절에 형성되게 마련인데, 어린 시절에 내면의 사고의 구조와 외적인 행동의 양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가리켜서 “문화화(文化化, enculturation)”라고 한다.


3.1. 문화화(enculturation)의 내용


Piaget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perception)은 어린 시절에 그 기본적인 구조가 형성된다고 한다. 인간의 세계 인식이 곧 세계관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선천적인 지식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사고의 구조와 세계 인식의 카테고리(범주)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지만, 그 외의 모든 세계에 대한 이해와 그 내용들은 후천적으로 습득되고 발전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인식하는 첫 번째 것은 “타자(Other)”를 통한 “자기(Self)”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태어나서 젖을 주는 어머니를 가장 편안하게 인식하면서 자기에 대한 개념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자기를 인식하면서 아기는 “관계(Relationship)”라고 하는 개념을 자연적으로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다. 그리고 아기는 크면서 사회적 환경(사람들)과 자연적 환경, 그리고 나아가서 우주적 (혹은 영적) 관계들을 맺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를 어린아이가 홀로 맺어갈 수는 없다. 어린아이는 이제 지각이 자라면서 자기가 속한 사회의 선배(어른)들로부터 어떻게 이러한 주변 환경들과 관계를 맺어 가는가를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사회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과 우주적 환경들의 구성 요소들을 “분류(Categorization/ Classification)”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관계를 적절하게 맺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분류인 것이다. 어느 사회 혹은 집단이 환경들을 어떻게 분류하는가를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그 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과 논리들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하여 어린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약 12-14세 정도까지 이러한 세계인식의 기초를 기존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배우게 된다. 어떻게 사고하는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여야 생존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배움으로써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세계관을 자기 것으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이 형성되는 이 기간 혹은 과정을 문화화(enculturation)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세계관의 내용들을 사람들은 대부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자신의 문화적 사고의 틀(frame of reference, or cultural lens)을 형성하게 된다.


앞에서 약 12-14세라고 하였는데, 이 나이는 흔히 말하여서 사춘기에 접어드는 연령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서 어른이 되기 위한 신체적인 변화를 경험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의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는 과도기 기간(puberty)의 시작을 대충 13세 정도로 본다. 아프리카의 많은 부족들이 아직도 중요하게 여기는 통과의식(passage rites)들 가운데 하나인 “성인식”으로 불리는 initiation ceremony들도 신체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이 나이 때에 행하여진다. 다시 말하여서 enculturation의 졸업식 쯤 된다고나 할까. 신체적으로 성인이 되어감과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그 사회의 정상적인 정식 구성원으로서 모든 문화적인 지식을 갖추고 성인들 틈에서 준성인(semi-adult)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갓난아기에서부터 바로 이 성인식에 이르는 나이까지가 문화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되며, 이 때에 사람들의 세계관의 골격과 내용들의 거의 대부분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화화 과정의 다름이 곧 세계관의 다름과 연결된다. 흔히들 말하는 성장과정이 달라서 갈등이 있다고 하는 말들은 세계관이 다르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다.


3.2. 아프리카 세계관과 미국의 세계관의 비교


예를 들어보자.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가정에서 성장한 아프리카 흑인들의 세계관과 미국의 대도시에서 성장한 미국 백인들의 세계관을 비교하여 보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세계와 우주는 조물주가 창조하였고 세계 혹은 우주는 하나이며 사람들은 그 가운데 하나의 구성원이라고 믿는다. 이들에게 “자연” 혹은 “초자연”이라는 단어의 분류는 무의미하다. 그들의 우주관은 어떤 의미에서는 완전한 일원론이다. 물론 존재물들에 대한 여러 분류가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이 분류는 대립적인 분류이기보다는 조화로운 분류이다. 아프리카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조화 및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하며, 자연의 순리를 거스리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자연에는 온갖 영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전통적인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노출되어 자기가 믿는 바들이 도전을 받게 되기 전까지는 자신의 생각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믿을 것이라고 은연 중에 믿고 있다.


자, 이제 미국의 대도시의 백인들을 보자. 이들은 유신론자들이건 무신론자들이건 간에 세속적인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세계와 우주는 자신이 개척하고 정복하는 만큼 차지할 수 있는, 열려 있는 개척지라고 배운다. 따라서 이들은 성취는 좋은 것이라고 어려서부터 배웠고 이를 위하여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우주는 조화로운 것이기보다는 기계적이라고 믿는다. 우주에는 어떤 과학적인 법칙이 있기 때문에 이 법칙을 알아내면 우주와 세계를 인간의 복지를 위하여 마음껏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주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고 믿는다. 영들과 같은 존재는 과학과 이성에 위배되는 미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과 우주는 인간의 이성의 지배 대상이 된다.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성경의 문화위임명령을 특별히 강조한다. 미국 백인들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부모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교육제도를 통하여 배워왔기 때문에, 자신들과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들의 생각에 도전을 받기 전까지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


또 아프리카 사람들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집단주의이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생각하는 것이 조화이며 선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자연과의 조화라고 하는 세계관과 의미적으로 연결이 되며, 따라서 조화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관점은 대가족제도를 핵가족제도보다 우위에 둔다. 이에 반하여, 미국의 백인들은 개인의 차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은 다른 모든 가치들 위에 개인을 두게 되었고 이것은 개인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존엄성을 인식하고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인주의는 전체의 조화를 깨는 악으로 간주된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지만 나중에 더 다루기로 하고 이제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만나게 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을 잠시 보기로 하자.


3.3. 문화충격과 자민족 중심주의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관의 배경에서 성장해온 아프리카의 흑인과 미국의 백인이 만났을 때 서로 불편해지는 현상을 가리켜서 문화충격(culture shock or culture stress)이라고 한다. 선교사들이나 해외 유학생 혹은 이민자들이 전혀 다른 문화권으로 이사해 갔을 때에 힘든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바로 문화충격의 결과이다. 충격이라는 말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면 “문화충돌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 문화충격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극복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삶의 그 다음 단계가 결정된다. (이에 대하여서는 문화변화 혹은 세계관의 변화를 논의할 때에 더욱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그 동안 자신의 enculturation의 결과로 형성된 세계관의 틀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을 목격하거나 직접 경험하면서,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현지의 문화를 정죄하기가 쉽다. 문화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관의 틀로써 다른 문화권의 내용들을 판단하는 경향 혹은 자세를 가리켜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우리들은 누구나 이러한 자민족 중심주의를 다 갖고 있다. 이를 극복한다 해도 백퍼센트 다 없앨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가 자신들 속에 이러한 경향이 다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 즉 어느 문화권의 세계관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의 한 부분이다. 특별히 자신을 깊이 이해할 때에 비로소,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진정 가능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문화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우리의 자아상과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과연 얼마만큼 성경적인가도 한번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세계관의 구조와 그 기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겠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