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


“한국교회가 지역사회나 이웃에 기여한 것이 무엇이 있냐?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채우는 것이 기독교인들이다.”
“성경과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한국의 기독교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권위적인 집단이 교회다”
“한국의 기독교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손끝만큼도 없다.”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10여 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 제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기독교인(여기서는 개신교인 만을 의미)들이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어느 정도 이미 예상했던 현실이었지만, 막상 한국 땅에서 직접 경험해 보는 한국사회의 시선은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정말 왕따라는 단어처럼 한국교회의 현 위치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왕따’란 알다시피 ‘왕 따돌림’의 준말입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왕 따돌림, 곧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이지메’로 시작된 청소년들 사이의 ‘왕따’처럼, 힘센 한국사회가 힘없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일방적으로 괴롭히고 따돌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기에는 힘이 세져버린,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 단체가 되었습니다. 다르게 보자면 한국사회내의 불의와 잘못된 흐름을 향해 왕따를 선포하며(?) 이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개혁할 수 있는, 그런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결국 왕따 당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위치에 있음에도, 한국사회는 왕따 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체념한 듯한 눈길로 한국교회를 향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는 듯 합니다.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제가 볼 때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왕따 당할 행동을 너무나 골라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는 교회 관련 기사나 방송을 보면 한국사회의 이러한 시각을 단면적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좀 잊혀지겠다 싶으면 여지없이 교회나 기독교 선교단체?학원?재단과 관련된 도덕적, 정치적 문제들이 언론에 등장합니다. 목사, 장로, 집사, 신학생이라는 직위를 가진 사람들의 개인적인 치부 또한 심심지 않게 등장하여 비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의 낯짝을 붉게 만듭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언론매체들이 한국의 대다수 기독교 언론들처럼 마냥 친 기독교적인 언어로, 은혜롭고 덕스럽게만 한국교회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사나 방송이 나간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의견란을 찾아가면 한국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는 왕따 문화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올려져 있는 글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기독교를 성토하는 시민들의 체념 섞인 글들인데, 문제는 기사화 된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글들을 자주 엿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마치 네티즌 개개인이 지난 수년간 한국 기독교로 인해 많은 상처와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단군상 철폐 논란이나 교회세습문제 때도, 작년 초 월드컵을 앞두고 한 보수적인 기독교 연합회에서 ‘붉은 악마’를 ‘하얀 천사’나 ‘붉은 호랑이’로 바꾸자며 개명운동을 벌이는 중에도, 올 1월과 3월 두 여중생의 죽음을 추도하는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반공 이데올로기적 집회를 연달아 가지는 가운데서도, 한국교회는 인터넷 상의 각종 게시판에서 엄청난 무시와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글들을 읽다보면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며 내가 믿고 따르는 종교가 이렇게도 한국사회 속에서 신망을 잃었는가 하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도대체 어쩌다가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이런 평판을 받는 신앙 공동체가 되었는지, 그동안 왜 우리는 이러한 세상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뿐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이 모두 타당하거나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개중에는 상당히 주관적인 잣대를 가지고 일방적으로 한국교회를 재단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비아냥거림이 틀렸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솔직히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지난 20-30여 년 간 한국교회가 주변의 이웃들보다는 교회 공동체 안의 자신들에게만, 그리스도인의 내적 성숙보다는 오직 외적인 고속성장에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보다는 축복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구원받느냐?”(“How to be saved?”)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두었지, 성경이 구원받은 자에게 변함 없이 강조하는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것이냐?”(“How to live as a Christian?”) 에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그리고 왕따는 결국 이러한 편식된 흐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왕따를 당하는 또 다른 이유


“원래 기독교인들과 논쟁하면 싸움밖에 되지 않는 이유가 있죠. 논리 내 세우다 안 되면 결국 하는 말이, “넌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고 말하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떤 소리도 악마의 소리”
“왜 기독교인들이 말을 잘 하는 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비 기독교인들과의 대화를 서로의 입장과 생각을 나누는 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꼭 이겨야 되는 말싸움의 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듣기보다는 으르렁거리며 결사적으로 덤벼들죠.”
<언론사 홈페이지의 독자 게시판에서 부분 발췌한 글들>



하지만 이러한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단순히 세상(?) 언론을 통해 전해진, 일부 부조리한 기독교인들의 행실, 곧 ‘삶과 괴리된 신앙’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그것은 현재의 왕따 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한국교회는 ‘삶과 괴리된 신앙’으로부터 ‘삶과 함께 하는 신앙’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값싼 복음이 아닌 값진 복음으로 만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양성해야 하며, 이것이 이 왕따에서 자유해지는 근본적인 접근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후기 현대주의적 사회의 특성을 올바르게 파악함으로서 그 특성에 맞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론적인 접근 또한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우리가 빛을 내고 맛을 내야될 이 세상을 바로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개혁해 나가는 동시에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의 특성과 변화를 깨달아, 이에 맞게 효과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이리 왕따를 하는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상하면서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게시판에 올려진 냉소적인 글들을 챙겨 읽고, 또 비 기독교인들과 지속적인 대화의 시간을 갖다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은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한국교회의 부조리일지 몰라도, 내면적으로 비 기독교인들이 우리를 향해 참으로 답답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의 일방적이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세(attitude) 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은 도대체 말이 안 통하는, 꽉 막힌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혀를 차며 우리를 더욱 왕따 하는 것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의 시각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꽤나 고집 센 대화상대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견이나 주장은 철저하게 챙겨 밝히면서도 상대방이 이야기 할 차례가 되었을 때는 좀처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그런 매너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마치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과 같은 자세로 비 기독교인들과 대화합니다. 물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비록 “적은 누룩”과도 같은 상대방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이를 방치하면 엄청나게 부풀어올라 우리의 신앙을 뒤흔들 수 있기에, 될 수 있는 한 이런 이교도(?)들과는 상종하지(대화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깨어 경계하는(?) 자세로 대화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경우에 목회자님들이 우리를 그렇게 교육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의식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잘 대화하지도 않을 뿐더러, 혹 하더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진지하게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비 기독교인들과 접촉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사회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그들만의 리그’속에 정신 없이 빠져 있는, 배타적인 존재들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한국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드러낼 수 있는 우리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접촉점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의 영혼들이 구원받기 원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접촉점이 있어도 진지하게 비 기독교인의 입장을 알려고 하지는 않고 무턱대고 “내 말부터 들어 보라”고 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열겠습니까?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과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눌 때야 염려할 것이 없겠지만, 행여나 상대방이 한국교회 내의 뜨거운 이슈(단군상 철폐, 교회세습, 기복주의, 교회권력, 헌금 등)나 자신이 속한 교회나 선교단체의 문제점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순식간에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에게 틈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들어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우리의 주장만을 내세울 때가 많습니다. 행여나 들어줘도 성실하게 들어주지 않습니다. 좀 들어주다가도 아직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느니, 지금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느니 하는,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기독교적 용어를 써 가며 상대방의 말을 자릅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대화를 통해 서로가 유익을 얻기보다는, 이기기 위한 말싸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상호교환 되는 대화가 아닌 일방통행 식의 대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득보다는 더 많은 실을 안겨 주게됩니다. 짧게 보면 그 순간의 ‘억지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지 몰라도, 길게 보면 결국 기독교를 왕따 할 또 한 명의 적대자를 양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제목의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제목이 “꼴통들과 뚜껑 안 열리고 토론하는 법”(뿌리와이파리, 2003)인데,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인 철학자 슐라이허르트는 현 서구사회의 대표적인 꼴통들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을 선택하고 이들과 대화하면서도 이성을 잃지 않고 토론하는 법을 책에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눈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도대체 대화가 안 통하는 ‘꼴통’들이고, 이들과 대화할 때는 감정 상할 일이 많다는 말입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 ①열린 마음으로 진실하게 들어주는 것


“이러한 종류(성경말씀에 입각하여 이웃사랑을 실천하는)의 유니테리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정통 신앙은 정통, 혹은 바른 교리라고 불릴 가치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참된 관용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정직한 신앙을 허용하고 참아 주는 것이다” (p, 186) (우찌무라 간조,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홍성사)


“4월 하순에 어떤 유물론에 조예가 깊은 친구의 예방을 얻어 연일 논의를 계속 하였다. 우리와 같이 태만하고 편협한 자에게 이처럼 동과 서가 멀고 적과 백이 다른 것처럼 전혀 다른 세계에 호흡하는 친구를 주어, 애씀이 적고 배움이 많은 기회를 주시는 섭리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혹은 서로 ○○하며 혹은 서로 냉정에 돌아갔으나 대체로 그는 많이 말하는 편이요, 나는 대부분 듣는 편이었다” (김교신, 성서조선 1934년 6월)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 빌립보서 4:5)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했던 70, 80년대에는 근대주의 사회의 특징처럼 명제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또 이원론적인 자세로 교회가 사회현상에 접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교회가 애매모호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진리를 명확하게 선포하면서 이 진리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분명하게 질타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 시대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또한 명확하고 분명한 진리를 듣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해체주의(Deconstruction)와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근간으로 하는 후기 현대주의에서는 개개인간의 인간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상대방이 옳아도 내가 믿기 싫으면, 내가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의 내용(text)보다 이 진리를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개(present)하는 소통(communication)의 지혜입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어차피 여러 진리(종교)들을 접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진리들 중에서 내가 믿는 기독교적 진리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납득시키려면, 진리의 내용 못지 않게 이 진리를 전달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진리의 홍수 속에 있는 이상, 진리끼리의 대결구도를 통한 끝없는 대립과 갈등보다는 이 진리를 소개하는 방식에 사람들은 더 호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후기 현대주의 사회에서 대결구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정의하는 방법이 근대주의처럼 대결구도를 통한 명제적, 논리적 승리를 통해서가 아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주는(listening) ‘소통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 자세 말입니다. 나중에 자신이 말할 기회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단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믿고, 왜 그것을 신봉하는지, 어떤 부분에 있어 우리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들어줘야 합니다. 설혹 우리의 신앙 관으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억울한 비판이나 지적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진지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나아갈 때, 상대방도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배울 수 있겠다는 마음 밭이 그들 안에 조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인은 진지한 대화를 통해 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고, 반대로 비 기독교인은 진지하게 들어주는 우리의 자세를 통해 복음을 향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통의 지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관용’이라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우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자세(manner)가 요구됩니다.



종교 다원주의적 사회 구조 속에서 그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을 향해 벽을 쌓으면서 대결만 하는, 비관용적인 자세로 일관해 왔습니다. 다른 비 기독교인들이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우리 식의 신앙적 잣대를 고수하며,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잣대로 세상에 반응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의견이나 관점을 존중해 주지 않게 되었고, 또 목소리를 내더라도 사회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주장만을 일삼으며 결국 왕따의 또 다른 원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하고 이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 나가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지켜 나간다는 것이 곧 비 기독교인의 의견이나 입장을 일체 들어주지 않는, 인정해야 할 것도 인정해 주지 않는, 그런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신앙자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적 관용이란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입장과 관점을 허용해 주고 참아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용은 먼저 나와 다른 종교관?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진지하게(attentive) 들어주는(Listening)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음 달 주제: 후기 현대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지혜
②자신의 신앙을 정중하게 소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