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5월

1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다가 다시 목회 현장으로 나오니 새롭게 느껴지는 점들이 많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목회자가 처한 입장이 진실을 바로 인식하는 데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자주 확인한다. 목회자의 입장에 오래 있다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현상에 대한 바른 시각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예배에 대한 시각이다. 목회자가 볼 때 예배는 성도들의 영성 생활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에 정성을 다해야 하고, 예배에 대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예배에 이렇게 정성을 다하다 보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성도들에 대해 조바심이 생기는 반면,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믿음이 생긴다.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안전해. 잘 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쉽고, 예배 참석에 부실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뭔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상, 이 느낌은 어느 정도 사실과 일치한다. 확률적으로, 예배에 꾸준히 참석하는 사람들의 영성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영성보다 더 성장하고 성숙될 가능성이 크다. 대단한 영적 수준에 있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예배 참석도가 그 사람의 영적 성숙도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일반론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한 사람의 영성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자주 예배에 참석하느냐는 한 가지 기준에 너무 의지해서는 안 된다. 꾸준한 예배 참여가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고, 예배 참여도가 일상생활의 질적인 변화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흔하지는 않지만, 사정상 예배 참여에 소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와 일상생활의 질은 예배 참석도가 높은 사람보다 나은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반복되는 예배에 항상 정성을 다함으로 감격적인 예배 경험이 일어나도록 하는 한 편, 성도들의 삶 전체를 보고 영성 지도를 하는 폭넓은 목회적 시야를 갖추어야 한다. 오랜 만에 목회를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자주 깨닫고 있다. 문득문득, 내 눈에 자주 보이는 사람은 건강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병들어 있다는 편견에 빠진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 편견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목회자는 예배와 교회 활동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고, 그 결과 성도들도 자신들의 교회 생활에 비례하여 자동적으로 영성이 성장해 간다는 오해에 빠지게 된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이 분리되고 그로 인해 성도들의 종교성은 강하지만 사회성은 갈수록 약화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이러한 오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예배가 무엇인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바른 이해는 바른 삶의 출발점이다. 예배를 바로 알고 바로 실천할 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을 위해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1.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구약의 제사 규정

태초에는 예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태초에는 ‘형식적 예배’가 없었다. 성경의 기록으로 볼 때, 최초의 예배 혹은 제사(1)는 태초의 원형을 잃어버린 후, 즉 아담과 하와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 나온다(창 4:3-5). 그 이전 즉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분리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귐이 항상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사 혹은 예배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중간 중간에 시간을 따로 내어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살아가는 동안 줄곧 사귐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시간을 따로 구별하여 특별한 형식으로 감사를 올리는 제사 형식이 창안되었다. 특별히 짐승이나 곡식을 태우는 제사 의식은 ‘멀리 계신’ 하나님께 그 물질을 직접 드릴 수 없으니 연기로라도 전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련한 몸짓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공적 예배 혹은 제도적 예배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타락한 실존 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상징하는 종교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이르는 족장 시대에 제사는 사적이고 비형식적인 초보적 형태였음이 분명하다. 제사장도, 성전도 없었다. 어디서든 제단을 세우고 짐승을 잡아 바치면 그곳이 성전이 되었고 제사가 되었다. 가장(家長)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미리 마련된 규칙이 없었으므로, 가장은 부모에게서 배운 것을 응용하여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섬기는 하나님은 같은 분이었으나, 그분께 예(禮)를 드리는 제사 형식은 집집마다 달랐을 것이다. 이렇게 집집마다 전해져 내려온 관습대로 드리던 제사가 확고하게 제도화된 것은 모세 시대의 일로 추정된다. 출애굽기 25장부터 40장까지 그리고 레위기 전체에 걸쳐 상세한 제사 규정이 제시되어 있다. 공적 형태의 제사가 어느 한 순간에 완전한 모습으로 출현했을 리는 없다.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출 5:3)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모세 시대 이전에도 공적 제사가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부터 제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사람에 의해 그리고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해야만 유효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스라엘의 제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흠 없음’이다. 레위기를 읽어보면 ‘흠 없는’이라는 어구를 헤아릴 수 없이 자주 만나게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므로 모든 면에서 온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든 규정을 지배했다. 성막의 모양과 배치가 율법 규정에 정확히 일치해야만, 제사장이 규정된 모든 조건에 합해야만, 제물이 규정된 모든 조건에 합해야만, 제사 절차가 규정된 모든 조건을 갖추어야만 흠 없는 제사가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은 흠이 없는 제사만을 받으신다고 믿었다. 레위기에 기록된 것은 원론적인 규정이었으므로 율법 전문가들은 성경의 규정에 바탕하여 새로운 시행 세칙을 꾸준히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흠 없는 제사를 위한 규정들은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흠 없음에 대한 이 지독한 집착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라는 말씀에서 유래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하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히브리어의 ‘거룩'(카도쉬)은 ‘구별됨’을 의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분리됨’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부정(不淨)한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켜야 했다. 무엇이 부정한가? 흠 있는 것이다. 무엇이 흠인가? 흠은 율법이 정한다. 율법에서 흠으로 규정한 것은 모두 부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려면 율법을 연구하여 흠 있는 것을 철저히 가려내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켜야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율법 규정의 발전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흠 없는 사람들이 흠 없음에 이르기 위한 ‘그들만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 장애인들은 육체적인 흠으로 인해 부정하게 취급되어 레위 가문에, 아론 혈통에, 사독 가문 출신(2)이 라 해도 제사장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성전 본체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여성이라는 것도 흠이었다. 그래서 여성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성전 본체 안에서도 여자들만을 위해 구별된 장소에만 머물러야 했다. 제물로 쓸 짐승이 병에 걸렸어도, 야위었어도, 장애가 있어도, 생김새가 좋지 않아도 부정하게 취급되었다. 그 결과, 제사 제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율법 규정에 의해 흠 있는 것으로 판정되면 그 사람은 영영 하나님의 구원을 희망할 수 없는 ‘레 미저러블'(Les Miserables)이 되고 만다.

문제는 그 뿐이 아니다. 흠이 없는 것으로 인정된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흠이 없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특권 의식으로 연결되었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질 수 있는 조건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들은 흠 있다고 인정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고, 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그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택의식은 제사 의식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그들은 흠 없는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거룩해지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다 충족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하나님의 관심사가 그들이 드리는 제사에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리는 것에만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에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그 결과 제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등한히 하는 경향에 빠지곤 했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부정 타지 않기 위해 분별하고 구별하는 일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우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부정에서 자신을 지키는 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항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려 했고, 거룩한 영역을 따로 확보하여 그 속에 안주하려 했다. 이러한 편향된 관심은 그들로 하여금 윤리적인 차원을 소홀히 하도록 이끌었다. 윤리적 요청을 회피하고 정당화시키는 방편으로 제사에 몰두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결과, 종교적인 열심은 강한데 윤리적 차원에서는 파산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들 편에서 보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위선자이거나 속아 넘어간 맹신자다. 성전 안에서의 행동과 성전 밖에서의 행동이 전혀 다른 이중 인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식은 그들에게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해 주었다. 어떤 면에서든 흠이 있다는 사실은 더 각별한 보살핌의 대상이라는 뜻이련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흠이 있다는 것을 ‘부정’ 혹은 ‘불결함’ 혹은 ‘불길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렇게 인식하고 나니, 흠이 있는 물건이나 짐승이나 사람은 동정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차별과 감시와 격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인간들에게도 버림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흠이 있는 물건이나 생명을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런 주저됨 없이 차별하고 정죄하고 멸시하고 외면하였다.




후대의 제사 신학이 드러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제사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가인과 아벨의 첫 제사 이야기(창 4:3-5)와 노아의 제사 이야기(창 8:20-22)가 분명히 보여주듯, 제사 혹은 예배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어내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은혜와 복을 기억하고 감사드리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얻어내려는 수단이 되어 버렸다. 감사와 감격의 제사가 아니라 일종의 종교적 거래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다. 그런데 제사 제도는 마치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흠 없음’의 기준을 만족시키면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확보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내가 제사 의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라고 오해하지는 말기 바란다. 서두에서 말했듯이, 제사 의식은 본래 좋은 것이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상실한 인간에게 있어 제사는 그 사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그분과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시각을 얻고 새로운 마음을 얻는 것은 제사의 가장 좋은 열매다. 모든 절차에 있어 흠이 없도록 요구하는 율법 규정도 본래는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라는 요청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정성을 다하는 것은 예배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절차와 규정을 하나하나 따르면서 마음을 모아간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흠 없는 제물을 바치라는 것도 가장 좋은 것을 드림으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분임을 인정하라는 뜻이니 탓할 것이 없다. 실제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이러한 태도로써 임했을 것이고, 그 결과 스스로를 속이거나 속아 넘어감으로 제사와 삶이 분리되는 잘못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제도화되고 교권화 되고 형식화되는 상황에서 이렇게 영성을 지키고 율법의 본래 정신을 지킬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절대 다수는 이 상황에서 영성을 잃어버리고 체제의 속임수에 스스로 영합하거나 속아 넘어가 거룩한 영역을 지키고 그 안에서 안주하는 데에 부심할 수밖에 없었다.




2.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구약의 제사 비판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선지자들의 예언 운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조직이 지나치게 거대해지고 그 이권이 너무 커진 나머지 내부적인 비판과 견제와 정화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 조직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중세 시대의 가톨릭교회가 대표적인 예다. 이스라엘의 제사 종교가 그랬다. 모든 것이 제사장들에 의해 규정되고 집행되고 처리되다 보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제사 종교는 더욱 타락하게 되었고, 그 타락으로 인해 일반 대중의 영성이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영적 암흑기의 절정에서 예언 운동이 시작되어 이스라엘의 영성을 깨워 일으켰다.


예언 운동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쾌히 밝혀진 것이 없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기원전 721년)하기 얼마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예언 운동은 제사장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던 이스라엘의 야훼 신앙에 새로운 정신을 제공해 주었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성이 새롭게 도약했다. 기독교의 역사에 비교한다면, 예언 운동의 출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 운동에 비유할 만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사 종교의 거의 모든 면을 비판했지만, 특히 일상생활과 구별된 제사 행위가 가장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선지자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들의 종교성을 이렇게 비판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암 5:21-22). 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명령을 주신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절)! 모든 제사 행위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라는 뜻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어조로 남왕국 유다를 향해 하나님의 책망을 전한다. 이사야는 말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이어서 그는 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헛된 제물’이요, 하나님은 그들이 올리는 분향을 ‘가증히’ 여기신다! 매월 첫날에 모여 예배드리고 안식일마다 모이는 것도 ‘가증히’ 보신다(13절)!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 행사를 “견디지 못하겠노라”(13절)고 절규하신다. 그들이 드리는 모든 종교 행사들을 지켜보시기에 하나님은 “곤비해”(14절) 지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제사를 거부하시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지자 이사야가 그 대답을 준다. 그들이 “성회와 더불어 악을 행하고”(13절)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기”(15절)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사를 드리는 그들의 일상생활이 죄와 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제사에는 전심을 다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죄악을 일삼기 때문이다. 종교적 행위를 통해 영성을 키우고 그 영성을 통해 일상생활 전체를 거룩하게 만들어야 했건만, 그들은 종교적 행위를 일상생활에서의 죄악에 대한 도피 수단으로 혹은 거기서 오는 가책을 모면하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랬기에 그들의 종교 행위는 날로 커지고 빈번해졌지만, 그들의 일상생활의 질은 날로 타락해갔다. 제사생활과 사회생활, 종교생활과 일상생활 사이에 높고 두터운 장벽을 쌓고는 제사생활에 몰두함으로 그 위선과 모순을 외면하려 했다.




이러한 영적 타락을 회복하는 길은 제사 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더 관심을 기우리는 데 있다. 아모스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라고 말씀하신다. 일상생활, 사회생활에서 정직하고 의롭고 공정하게 처신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릴 참된 예배라는 뜻이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더욱 명료하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7). 호세아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포괄적이지만 명쾌하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히브리어의 ‘알다'(야다)는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사귀는 것’ 혹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원하시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그분과의 사귐에 들어가 그분의 영으로 변화되어 그분의 뜻을 살아가는 것이다. 제사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활동들은 이러한 전일적(全一的) 영성을 키우는 데 이바지해야만 존재 의미를 가진다.

선지자들은 제사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지적한다. 이 점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충격적인 말씀을 전해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했다(렘 7:22)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그러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담긴 그 모든 제사 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히브리적 어법을 고려하지 않으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반어적 병행법'(같은 내용을 한 번은 부정적으로 또 한 번은 긍정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하는 어법)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런 경우 부정적인 표현을 액면 그대로 ‘절대 부정’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부정적 표현의 의도는 그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려는 데 있다. 그러므로 “번제나 희생 제사에 대해 명령한 바 없다”는 말씀은 “내가 강조한 것이 번제나 희생 제사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긍정문을 보자.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렘 7:23). 마지막 문장에 나오는 ‘걸어가라’는 말은 일상생활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 규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것은 일상생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사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일상생활을 ‘비신화'(非神化)시켰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반쪽짜리 영성을 거부하셨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하시려는 메시지는 제사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말귀를 못 알아들은 것이다.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다른 한 편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알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임을 알고,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거래하려 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를 깨닫고 그 사랑 가운데 살아가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시 51:17)이며 순결한 마음이며 의로운 삶이다. 제사 종교는 바로 이 점에서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제사장이나 일반 대중이나 모두 제사와 율법에 집착한 나머지 일상의 영성을 상실한 것이다. 제사를 일상에서 분리시킴으로 일상으로부터 제사를 몰아냈다. 그 결과, 제사는 제사대로 왜곡되었고 일상의 삶은 그것대로 물화(物化)되고 속화(俗化)되었다.




이렇게 선지자들이 강도 높게 제사 신앙을 비판하고 영성의 회복을 부르짖었지만, 이미 견고한 성을 쌓은 제사 종교는 변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은 언제나 제도권 밖에서 외로이 외치다가 거부와 박해와 순교를 당했고,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은 ‘어용’ 선지자를 고용해 자신들의 치부를 은폐했다. 하지만 예언 운동의 존재는 일반 대중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제도권에서 나오는 ‘체제 옹호적’인 소리만 듣고 순종해야 했던 그들은 예언 운동 덕에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대안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제사 종교의 교권자들은 그들을 더욱 위협하고 옭아매려 했다. (계속)


(1) 구약성경에서 ‘제사’와 ‘예배’는 동의어로 쓰인다.

(2) 율법 규정에 의하면 제사장은 레위 가문 중에서도 아론 혈통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고, 아론 가문 중에서도 사독 계열에 속한 사람에게만 대제사장이 되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로 오면 대제사장직이 정치적 결탁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