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5년 2월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의 책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던 평범한 크리스쳔 대학생입니다. 물질과 쾌락을 쫓는 이 세태 속에서도 꾸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제 친구가 요즘 들어 큰 고민에 빠져있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저도 신앙을 가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려움이 많이 있어 이렇게 목사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친구는 교회에서 여러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주로 음악사역을 하는데요. 주일엔 거의 종일 교회에서 지낸답니다. 그는 자신의 그런 직분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정말 열심을 다해 왔구요. 그런데, 얼마 후에 그의 절친한 친구가 주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금 먼 곳이어서 예배를 드리고 가거나 혹은 그곳을 다녀와서 오후예배를 드리는 것도 안될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그 날 그의 사역을 대신해줄 분이 계시다는 것인데….
여전히, 그래도 되는 것인지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는 주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이 교회에서 맡은 직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는 절친한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 친구를 마구 축하해 주고 싶어합니다. 목사님,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정말로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할텐데,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의 홈페이지에 올라온 어느 방문자의 질문이다. 주일 성수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진 미국 교회에서 씨름하는 나로서는 질문을 올린 청년과 그의 친구가 모두 귀해 보인다. 이렇게 뜨거운 열정이 있기에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어 보인다. 동시에, 이 질문은 주일 성수에 대한 한국 교회의 율법적 사고 방식을 선명하게 부각시켜 준다. ‘주일‘에 ‘자신이 속해있는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주일 성수의 ‘세 가지 조건‘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셋 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어기는 상황이 생기면 위에서 토로한 것과 같은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이것이 과연 필요한 고민인가? 이제 신약으로 눈을 돌려 이 문제를 더 논해 보도록 하자.
천하가 성전이요 만사가 제사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님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유대교인이었다! 그분의 어렸을 적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이 많기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경건한 유대교 가정에서 유대교 교육을 받고 유대교인으로서의 영성 생활을 실천하며 성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다는 확고한 증거가 없는 한, 이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나사렛 방문 이야기를 전하면서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4:16)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보듯, 유대교인으로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며, 예수님은 여기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에 대해 예수님은 다른 유대교인들과 의견을 달리했다. 달라도 매우 심하게! 복음서들은 이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중 하나가 ‘밀 추수에 관한 논쟁‘(마 12:1-8//막 2:23-28//눅 6:1-5)이다. 예수님 일행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배를 위해 회당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이 때 제자들은 허기를 면하기 위해 밀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껍질을 제거한 다음 씹어 먹었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이것은 추수와 탈곡에 해당하는, ‘금지된 노동‘이었다. 이 행동이 바리새인들의 눈에 띄었고, 그들이 예수님께 이의를 제기한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두 가지의 예로 답변을 하신다.
첫 번째 예는 다윗이 전투 중에 시장할 때 회막 지성소에 드려졌던 진설병을 가져다 병사들을 먹인 사건(삼상 21:1-6)이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것은,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은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성전에 드려진 떡은 제사장만이 먹게 되어 있었다(레 24:5-9). 그렇다면 왜 다윗의 행동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던가‘ 이것은 ‘그[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신‘(삼상 13:14) 다윗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안식일에 제사장에게만 허락된 일을 해도 율법에 저촉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히브리어로 ‘메시야‘)로서 자신에게도 같은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으셨다.
두 번째로 그분은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제사를 위해 분주히 일하는 것을 예로 드신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에 집에서 회당까지 오고가는 거리 이상을 걷지 못하도록 그리고 회당의 성경 두루마리를 나르는 정도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 규정에 의한다면, 안식일에 성전 업무를 볼 차례가 된 제사장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안식일 율법을 어겼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민 28:9-10). 본질상 그들의 노동은 수고로운 노동이 아니었다. 그것처럼,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이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신다. 이 주장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주목하라! 예수님은 지금의 시간을 안식일로, 지금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을 제사장으로, 당신이 일하고 계신 현장을 성전으로 그리고 당신이 하시는 일을 제사로 비유하고 계시다. 지금 걷고 있는 밀밭이 성전이며, 밀 이삭을 비벼 먹는 행동이 제사라는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진정한 의미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그런 다음, 그분은 두 가지의 혁명적인 선언을 하신다. 하나는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느니라‘(마 12:6)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12:8)는 선언이다. 이 두 말씀에서 드러나듯, 예수님은 자신이 율법의 권위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분명히 아셨다. 오히려 율법 규정을 폐기하거나 수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으셨다. 그것은 제사장이나 예언자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권한이다. 가장 위대한 계시자였던 모세도 꿈꾸지 못했던 엄청난 권한이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던 권한, 그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예수님은 믿었다. 이 발언은 유대교인들에게는 이단적이요 신성 모독적이요 악마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권한을 넘보는 사탄적 음모!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분에게는 하나님과 같아지겠다는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한 결과 그런 권한이 주어졌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국 유대교가 그분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거침‘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대중적 율법 이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성전을 위해 희생되어야 하고 안식일 준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순서를 뒤집어 놓으신다. 성전도 안식일도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 마가복음 저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2:27)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오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2:28)는 말씀은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바꿔 쓸 수도 있다. ‘인자‘에 해당하는 아람어 ‘바 에나쉬‘(bar enash)는 ‘사람‘, ‘그 사람,’ ‘나 같은 사람‘ 혹은 ‘나‘ 등의 의미로 사용되던 관용어였다. 이렇게 풀면, 이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들의 참된 삶을 위해 마련된 것이라는 뜻이 된다. 성서학자들은 여기서 ‘바 에나쉬‘를 ‘인자‘로 번역해야 옳은지 아니면 ‘사람‘으로 번역해야 옳은지를 두고 논쟁해 왔지만, 나는 두 가지 뜻이 모두 있었을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회당 안에서 벌어진 연속된 사건에서 더 잘 드러난다. 밀밭을 지나 회당에 들어가시자 사람들이 손이 마비된 사람을 빌미로 예수님께 논쟁을 걸어온다(마 12:9-14//막 3:1-6//눅 6:6-11). 안식일 규정에 의하면,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냥 두면 죽을지 모르는 심한 경우에만 치료를 허락했다. 따라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고 말씀하시면서 그 병자를 고쳐 주신다. 여기서 ‘선‘으로 번역된 말(‘칼로스‘)은 ‘이로운‘ 혹은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이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또 다른 말씀, ‘그러면 열 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안식일은 모든 사람 혹은 모든 생명을 구속된 상태에서 풀어줌으로 이롭게 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이로운 일을 하도록 마련된 날! 이 일화에 대한 분석 끝에 페르디난드 한(Ferdinand Hahn)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선의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를 원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과 전통에 직면하여 그분은 종말론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드러내셨다.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것은 당시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신 결과다 1)
네 하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일과 평일의 차이를 부정하셨는가? 예수님의 행동을 이런 차원에서 파악하는 것은 그분의 진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는 데서 희망을 보시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태도를 달리하고 삶의 목적을 달리하는 데서 희망을 찾았다. 예수께서 안식일 율법을 표면적으로 위반하면서까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뜻의 핵심을 다음의 유명한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유대교적인 배경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이 말씀이 율법에 관한 것임을 금새 알아차릴 것이다. 유대교에서 ‘멍에‘는 곧 율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까다로운 율법 규정을 지키느라 지친 사람들을 가리킨다. 율법은 참된 쉼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 셈인데, 그것이 왜곡되어 오히려 참된 쉼을 방해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 잘못된 율법 준수는 외적으로는 인생사를 더 고단하게 만들고 내적으로는 영혼을 더욱 황폐하게 만드는 법니다. 예수님은 그 멍에를 벗어놓고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의 멍에는 쉽고 가벼워 참된 쉼을 제공해 줄 것이란다. 여기서 말하는 참된 쉼은 일을 멈추는 쉼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리킨다. 동일한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하면 그 일을 통해 안식과 위로와 평강과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초청은 ‘안식일‘로의 부름이 아니라 ‘안식의 삶‘에로의 부름이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열망했던 그 메누하가 예수님을 따라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삶의 태도를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으로 요약하셨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가리키고, 믿음이란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가리킨다. 불행하게도, 율법 준수는 자주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방해한다. 그것들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그것에 매어 있는 한, 하나님은 관심 밖에 있게 된다. 그것을 벗어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 얼굴을 돌리고 그분과의 살아있는 관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예수님의 멍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의 삶이다. 그 삶을 살아갈 때 종말에 누리도록 예정되어 있던 하나님의 메누하를 지금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있어 모든 날은 동일해진다. 그 사람은 ‘언제나‘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행하면서 하루 하루를 충만하게 살아간다. 그 삶은 결코 생명을 고갈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일할수록 생명력이 더 충만해진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베자 사본 누가복음 6장 4절에 첨가되어 있는 한 구절을 소개해 준다. 그 사본에는 다윗의 진설병 이야기 끝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같은 날에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어떤 사람을 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안다면 당신은 복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모른다면 당신은 불행한 사람이요 율법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월터 윙크는 이 구절이 예수님이 실제로 한 말씀이 아닐 가능성은 높지만 그 사상만큼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2)
. 위의 논의의 빛에서 볼 때, 틀림없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시야로 세상을 보시고 새로운 태도로 인생을 사셨다. 안식일 즉 참된 안식의 날은 이미 와 있다! 천국이 이미 와 있는 것처럼! 이 새로운 세상에서는 천하가 모두 성전이고, 무슨 일이든 제사로 드려질 수 있었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의 구분이 있을 수 없고, 거룩한 장소와 거룩하지 않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땅은 이미 천국이고, 이 삶은 메누하이며, 이생은 곧 영생이 된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매일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셈이며, 어딜 가나 성소를 모독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던 ‘일벌레‘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분의 외형은 그렇게 보였다. 그렇게 오해할만한 말씀을 남기신 바도 있다. 그분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 가에서 한 병자를 고치셨을 때 유대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비판하자, 그분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반응(18절)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께 분노한 것은 안식일을 범했다는 데에만 있지 않았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말씀에 담긴 뜻을 알아챘다. 한 인간으로서 김히 안식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니! 수고로운 노동을 하다가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감히 하나님의 메누하를 넘보다니! 안식일에 나면서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치실 때 하신 말씀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분개한다. ‘네가 하나님이냐‘?
이 말씀들은 예수님의 일이 고된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칠일에 창조하셨다는 메누하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설사 그분이 끊임없이 일했다 하더라도 그 일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소진시키는, 언젠가 멈추어야 할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일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할 거룩한 일,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여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안식 중에 하시는 그분의 일이다. 이 일에 예수님께서 참여하신 것이고, 그 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를 염려하며 동분서주하는 일로부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마 6:33)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삶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 일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전 1:2) 인생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하고 갈 수 있는 인생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를 위해 일을 멈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생을 축하하고 감사하며 하나님의 복을 나누는 ‘안식의 시간‘(‘사밧‘)은 필수 불가결의 요소다. 탈무드는 증언한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이스라엘을 지켰다‘고!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켜 준 것은 그들이 생명은 걸고 안식일을 지켰기 때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안식일의 정신을 지켰기 때문이다. 안식일 정신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의 외형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 주기적으로 외적 활동을 멈추고 전혀 다른 일에 전념하는 것이 안식일의 외형이다. 이 외형이 정신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 정신을 지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안식일 준수가 십계명의 하나로써 천명되었다.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에 관한 세 개의 계명과 이웃에 관한 여섯 개의 계명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것도 매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이웃과의 관계로 이어지는 통로가 안식일 준수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안식일의 외형과 정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그분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대로 안식일 제도를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식의 시간을 지키고 안식의 정신을 지키는 일에는 누구보다 철저하고 진실하셨다.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분은 매 순간 그리고 매일 안식을 실천하셨다. 사람들이끊임없이 찾아와 그분을 뵈려 했고 그분도 요청이 있는 한 정성을 다해 그들을 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일상은 결코 한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간을 구별하여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그분은 잊지 않았다. 그것은 메누하(안식)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매일 매일의 사밧(안식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깊은 산으로 혹은 한적한 강변으로 가서 머무셨고, 이른 아침에도 그렇게 하셨다. 자고 나면 사라지고 없는 선생님을 찾으러 다니는 것이 제자들의 매일의 첫 일과였다.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당신의 말씀을 듣고 눈이 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잔치를 베풀고 삶을 축하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먹보요 술꾼‘이라고 비난했다 3)
. 그분의 삶의 태도는 ‘생산적인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월을 죽이는‘ 한량처럼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소명으로 여기셨다. 축제를 모르는 세상에 축제를 회복하는 것! 마르바 던(Marva Dawn)은 ‘잠시 진행되고 마는 안식일 축제는 우리가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축제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4)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예수님이 자주 베푸셨던 잔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그분은 개인적으로 단순하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사셨으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자주 잔치를 베푸심으로써 인간 삶의 본질에 대해 눈뜨게 하셨다. 그 잔치는 흥청망청 소비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분 자신이 폭식을 즐기는 분도 아니었고, 그분의 동류들이 그럴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조촐한 식탁에서 나누는 의미 깊은 교제가 그분의 잔치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잔치를 베푸는 그 시간이 곧 안식일이었고 그 잔치가 곧 안식일 예배였다. 실제로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릴리 회당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더 이상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분이 돌아다니며 베풀던 잔치는 안식의 정신을 거부하고 배척하던 회당의 안식일 예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거늘
기독교 세계 내에 안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데 큰 공헌을 한 마르바 던은 아주 의미 깊은 용어 하나를 만들어냈다. ‘사회적 안식‘(social rest)이라는 말이다) 위의 책, p. 88. 이 책은 주일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안식일 정신과 실천을 부정적으로 취급해 오던 개신교 세계에 의미 심장한 변화를 일으켰다.
.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social unrest’라는 표현은 흔하게 볼 수 있지만, ‘social rest’라는 말은 거의 볼 수 없다. 마르바 던은 안식의 정신이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사회의 모든 차원에 깊이 스며들어 질적인 변화를 일구어내도록 되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억지같이 보이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훌륭한 저자는 이렇듯 말 한마디로 독자들의 의식을 활짝 열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안식일 정신은 내면에서부터 시작하여 외면으로, 위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사회로, 은밀한 곳으로부터 공개적인 장소로, 조용한 시간으로부터 분주한 시간으로 연장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은 이 점을 잊지 않았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안식일과 축일 제사를 하나님께서 혐오하신다고 대언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 1:15-17).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사 59:3-4).
아무리 자주 멈추어 메누하를 축하하고 나눈다 해도 개인의 내적 경험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것은 개인적인 사치일 뿐이며 하나님께는 가증한 일이다. 그런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바다. 아니, 개인적 경험으로 끝나고 말았다면 진정한 메누하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율법적으로 안식일 규정을 지키고 말았다는 뜻이다. 안식일의 형식을 통해 진정한 안식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복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뭔가 하고 싶은 열망에 이끌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모든 일을 모든 생명에게 이롭도록 섬기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 섬김의 삶이 사회적인 안식을 끌어온다. 이 땅에 요순 시대에 있었다는 태평성대가 온다 해도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할 수 있는 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 땅에 이루도록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지 권한이다.
공적 사역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이 옛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희년의 사건들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공언하신다(눅 4:18-21). 당신의 사역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포로들이 속박에서 벗어나고 눈 먼 사람들이 보게 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절)고 말씀하신다. 이것만을 두고 보면 사회 혁명을 하겠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시작하시는 사역이 개인의 변화로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사회–정치적인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비전을 천명하신 것이다. 그분의 사역 기간 동안 대대적인 사회–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 볼 때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이 세상을 가장 의미 깊게 변화시켜 놓았음을 발견한다. 때로 그분의 가르침을 오해하여 무력으로 사회를 개조시키려는 실수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그분의 정신을 제대로 알고 따른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참된 변화를 만들어 내는데 공헌했다.
여기까지 가야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식일에 대한 이 모든 논의는 한가한 탁상공론이 되고 안식일 정신을 진지하게 실천하려는 모든 노력은 여유 있고 한가한 사람이 누리는 사치가 되어 버린다. 안식일 정신은 인간 삶의 본질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그 본질에 늘 성실하도록 이끌려는 하나님의 배려다. 가난하든 부하든, 한가하든 분주하든, 배웠든 못 배웠든, 이 정신은 참된 인생을 일구는 데 있어 필요 불가결의 요소다.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질문 하나를 소개했다.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안식일의 정신을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체적인 응답을 주기에 주저되었다. 하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그 친구는 다른 사람에게 찬양 인도를 맡기고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해도 주일 성수를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동의할 것이다. 다만, 친구 결혼식에 참여하는 일을 예배처럼 섬기려는 마음 자세가 준비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놀러‘ 가는 것이 되면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물론, 찬양 인도를 선택했다 해도 공명심으로 혹은 제 잘난 맛으로 그 일을 한다면 그것도 역시 주일을 범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어떤 일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택한 그 일을 통해 메누하를 경험하도록 정성스럽게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로서는 아래와 같이 답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 신앙을 실제 생활 속에서 실천할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별하여 그대로 행하면 쉬울 것 같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성격에 반하는 것입니다. 기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이해한 다음 매일 매일의 상황 속에서 정직하게 선택하고 결단해 나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주일에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나누어 곧이곧대로 지키면 수월할 것 같습니다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일 성수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때 그 때의 상황에 맞는 결단을 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물론, 결단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충분히 상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편의대로 합리화시킬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번에 그 친구 분이 내린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한번으로 심판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걸음마를 통해 온전한 걸음을 걷기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지, 한번 넘어졌다고 와서 때리는 분이 아닙니다. 이번에 고민하고 결정을 하시면, 그 결정이 어떤 것이든 앞으로의 신앙적 결정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두 분의 신실한 마음에 찬사를 보냅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의 영혼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며 살얼음판 걷듯 행동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안에서 밝게 뛰어 노시기 바랍니다.
(1) Ferdinand Hahn, The Worship of the Early Church, p. 15.
(2) Walter Wink, The Human Being: Jesus and the Enigma of the Son of the Man (Fortress, 2002), p. 72.
(3)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은 어느 정도 사실을 담고 있는 동시에 거짓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별명이 다 그렇듯이! 이 별명에 담긴 진실은 잔치가 그분의 공적 사역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 편, 이 별명은 그분이 폭식과 폭음을 즐겼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이 별명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의도했던 점이다.
(4) Marva Dawn, Keeping the Sabbath Wholly (Eerdmans, 1989), p. 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