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월


기적을 끊다


공생애의 거의 전부를 갈릴리와 그 주변에서 보내신 예수님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셨다. 예루살렘–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눈동자’라고 믿어왔던 소위 ‘거룩한’ 도시.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마땅히 그곳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곳에서 완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 도시. 인류 역사의 출발점이요, 종착점이라고 믿었던 그 도시. 온 세상 민족이 심판을 받기 위해 반드시 한 번은 발을 디뎌야 한다고 믿었던 그 도시. 모든 종교인들이 꿈꾸었던 가장 화려한 무대. 모든 분야의 ‘최고’–최고 법정, 최고 제사장, 최고 성전, 최고 성물, 최고 서기관, 최고 제사–가 다 모여 있던 그 도시. 그 곳에 예수님이 드디어 ‘공개적으로’ (1) 발을 디디셨다!


  예언자를 꿈꾸고 메시아를 꿈꾸었던 사람 치고 예루살렘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변방에서 명성을 얻은 후 이 도시에 이르러 메시아로의 등극을 시도했던가? 그들 대부분이 거짓 메시아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메시아의 꿈에 부풀어 이 도시로 향하는 환상가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예수님도 그 중 하나처럼 보였다. 반항적 기질로 가득한 갈릴리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후,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영광스러운 다윗 왕국 재건을 기치로 내세워 메시아로 등극하려는 야심가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은 갈릴리에서 그렇게 자주 행했던 기적을 예루살렘에 이르자마자 ‘뚝’ 끊었다. 기적의 능력을 잃어버린 것일까? 그럴 리는 없다. 기적은 그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출이었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하나님과 더 밀도 깊은 교제를 나누셨을 것이 분명하므로 기적의 능력을 잃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주민들의 불신앙이 기적을 행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일까? 그분이 고향 나사렛을 방문했을 때, 나사렛 주민들이 그분을 믿지 않아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막 6:5)는 기록이 있지 않는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만 생각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간절한 열망을 품고 그곳에 순례 왔던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도 아님이 분명하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기 위해 나뭇가지 하나의 흔들림에도 마음을 다했던 구도자들이 가득했다.


  그러면 뭘까? 결론은 하나다. 예수님 스스로 기적을 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갈릴리와 그 근방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드러내 보여주셨던 그분이 왜 막상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러 기적을 끊으셨을까? 갈릴리에서의 그 모든 활동이 본 무대인 예루살렘에서의 스타 탄생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긴,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당시부터 그분은 기적이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기보다는 멀게 하는 경향이 더 크다는 점을 강조하곤 하셨다. 그분이 기적을 행한 것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무엇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이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여 기적이 일어났다. 그분은 기적을 행해 놓고 자주 종적을 감추셨다. 제자들에게도 그것에 집착하지 말도록 경계하셨다. 하나님과 밀도 있는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기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적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눈이 어두워져 진실을 보지 못한다. 기적을 보고 있는 한, 하나님도 예수님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의도하신 것은 기적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 모아 메시아로 추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의도는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의 의도와 동일했다.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 가운데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 그러므로 그 현존에 눈을 뜨고 그 새로운 세계관에 맞게 살아가라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이요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것을 증언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다. 사소해 보이는 작은 일 하나에도 수천의 군중을 소동시킬 수 있는 예루살렘 같은 도시에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은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정작 들어야 할 복음에 귀 먹게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수 있었다.


이 성전을 허물라!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가장 먼저 유대교의 자랑이었던 성전을 방문하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곳, 이곳을 향해 기도하면 모든 기도를 들어 주마 고 하나님께서 약속했다는 그 곳, 그래서 세계 어느 곳에 사는 유대인이든 기도할 때면 항상 머리를 그쪽 방향으로 향하게 했던 그 곳, 일생 동안 한 번이라도 그곳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죽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의 대상, 이 세상에 그 어느 곳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성소.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당도하셨다.


성전을 둘러보시는 그분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번득이고 있었다. 그것은 꿈에도 그리던 영광의 성소에 왔다는 감격의 표정이 아니었다. 역겨움과 안타까움으로 충만한 이글거림, 바로 그것이었다. 그분의 눈은 성전 바깥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제사장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부정한 결탁을 보고 계셨다. 성전 바깥뜰 한 쪽에 있던 도살장에서 들리는 제물용 짐승들의 울부짖음을 그분은 듣고 계셨다. 성전 바깥뜰을 진동시키는 피비린내와 성전 내부로부터 진동하는 매캐한 살 타는 냄새를 맡으시면서 그분은 무고한 짐승들의 압살 현장을 목격하셨다. 제사장들의 거룩한 몸짓과 평민들의 간절한 몸짓을 보면서 종교 체제에 감추어진 거대한 음모를 목격하셨다. 하나님과 평민들 사이를 중재한다고 나선 대제사장이 오히려 하나님을 막고 서 있음을, 하나님과 만나게 해 준다는 성전이 오히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을 가리고 있음을 보셨다. 가장 거룩하다고 믿어졌던 성전이 오히려 가장 세속적인 ‘도둑의 소굴'(요 2:16)로 변해 있음을 목격하셨다.


이 모든 실상을 보신 후에, 그분은 베다니로 나가 하룻밤을 보내셨다. 아마도 그 거대한 악의 조직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번민하며 기도로 그 밤을 새우셨으리라. 다음 날, 동이 트자 그분은 곧바로 다시 성전으로 향하셨다. 가장 먼저 그분에게 보인 것이 성전 뜰에서 제물용으로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짐승들이었다. 다짜고짜로 그 짐승들을 풀어 흩어 보내신 다음, 반항하는 장사꾼들을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책상을 뒤집어 엎으셨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도 폭력을 휘두르셨다’고 비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육체적인 완력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폭력’은 완력으로써 사람들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것을 두고 ‘예수님도 폭력을 사용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분은 자신의 의도를 표현할 만큼의 ‘시위’를 하는 것으로 행동을 끝내셨다.


뭔가 전하려는 간절한 말이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전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시위’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언로(言路)가 막혔을 때 그 길을 뚫는 방법이 시위다. 이렇게 함으로써 듣고 보기를 철저히 외면하는 사람들에게 할 말을 전한다. 성전 뜰에서 하신 예수님의 행동도 하나의 시위였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행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어떤 일을 위한 수단으로서 행한 것이다. 그것은 오만과 독선에 사로잡혀 진리의 소리에 귀를 막고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선택했던 방책이었다.


유대인 지도자들이 이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아주 위험하고 불순한 의도가 그 시위에 담겨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고 따져 물었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러자 예수님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던지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말에 유대인 지도자들은 어이가 없어 이렇게 대답했다.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2).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최신식의 건축 장비를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당시의 성전 같은 웅장한 건물을 사흘 안에 완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당시 같은 상황에서 이 말이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는가?


내가 다시 세우리라


예수님의 어법은 깊은 생각과 추리가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이 말씀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울수록 그 말씀 안에는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다. 이 면에서도 이 말씀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 성전을 허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성전 건물을 염두에 두시지 않았다. 그 성전이 대표하고 있는 종교 체제를 염두에 두셨다. 성전 바깥뜰에서 행하신 시위가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시 유대교의 예배 의식에 따르자면, 바깥뜰에서 흠 없는 짐승을 사지 못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집에서 기르던 짐승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가져 와도 제사장들의 까다로운 규정을 통과할 수 없었다. 바깥뜰에서 돈주고 사는 것이 가장 속 편한 방법이었다. 또한, 성전에서 헌금을 드리려면 집에서 사용하던 화폐를 환전상에게 주고 (그들이 말하는) ‘거룩한 화폐’로 바꿔야 했다. 그러므로 짐승을 팔지 못하게 하고 환전을 못하게 했던 예수님의 시위는 성전 제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그분이 이 시위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제사를 중지하라. 이 제사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제사를 중지하고 모든 제도와 형식과 조직을 해체하라. 이 제도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렇다고 그분이 무종교를 주창하신 것은 아니다. 그분은 새로운 영성을 제시하신다. 그것이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뜻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친절하게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를 설명해 준다. 그분이 사흘 안에 세우겠다고 하신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참된 성전인 당신 자신의 몸이었다고(요 2:21)!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할 당신의 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그분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너희는 나를 십자가에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보라. 내가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부활한 나의 영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을 만날 것이다. 나의 부활로써 눈에 보이는 성전이 허물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이제 눈에 보이는 성전의 시대는 가고 부활의 영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는 새로운 영성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거룩한 성전을 찾아가도록 가르치는 종교, 거룩한 시간을 어느 하루로 정해두고 그 날을 구별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는 종교,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세심하게 구분하고 차별하는 종교, 그리하여 끊임없이 거룩한 장소와 시간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드는 종교–그런 종교는 무너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열어주고 심화시키기는커녕 반대로 그 관계를 가로막고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과 함께 하는 영성의 시대가 열리면, 그리스도의 영과 교제함으로 우리가 사는 모든 공간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만들고, 모든 세속적인 것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장소와 시간과 사물에게 가까이 감으로써 하나님을 만나려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 내가 선 장소와 시간과 사물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새로운 영성! 일상과 성소를 분리시키는 종교가 아니라, 일상 속에 성소를 만들고 그로써 일상 전체를 성소로 만드는 영성!


이것이 예수께서 세우신 영성의 세계다. 이 영성의 세계를 윌리엄 컨트리맨(L. William Countryman)은 이렇게 설명한다(Living on the Border of the Holy, p.76).


예 수님은 거룩한 것(the Holy)과 일상적인 것을 다시 연결시키신다. 일상적인 삶을 종교의식의 외투 아래 통합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이미 일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존(the Presence)을 존중하는 삶의 방식을 삶으로써! 그분은 병자들에게서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보았고, 이방 여인의 말에서 진리를 들었고(막 7:24-30), 야생화의 덧없어 보이는 영광을 통해 창조자의 충만을 보셨다(마 6:28-30). 그분은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그분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만난 것은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그분은 광야와 저자 거리에서 하나님을 만나셨다.


그 분 자신이 이렇게 사셨고, 부활하여 현존하시는 그분의 영은 우리를 그분과 같은 삶의 방식으로 인도하신다. 그 영성만이 예수께서 그렇게도 자주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일체적인 영적 삶으로 인도할 수 있고, 이런 삶의 방식만이 우리를 참되게 변화시키고 성장시킬 수 있고, 이런 삶의 방식만이 우리에게 참된 의미와 안식과 성취를 가져다 줄 것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죽고 나서 영생의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영원을 경험하고 산다. 이것이 참 종교의 실상이요, 바로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목숨을 거셨던 것이다.


이 교회를 허물라!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오늘의 교회를 보시고 뭐라고 하실까? 혹시나 2천년 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신 그 말씀을 오늘의 교회에게도 하시지 않을까? 너희 교회를 허물라! 너희 예배를 허물라! 너희 제단을 허물라! 너희의 제도를 허물라! 너희의 교리를 버리라! 너희의 교권 제도를 해체하라!


이 말로써 나는 ‘무교회주의자’라거나 ‘급진주의적 혁명가’로 낙인찍힐 위험 선상에 이르렀다. 일생을 교회 안에서 살았고 또한 그렇게 생을 마칠 내가 이런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 가운데 교회는 항상 가장 첫 머리에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교회를 향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빌어 ‘이 교회를 허물라’고 외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교회가 예수님이 허물라고 하셨던 바로 그 성전 종교와 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3). 지금의 목회자는 당시의 제사장과 같이 되어 버렸고, 지금의 예배는 당시의 제사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성도들은 예수님 당시와 똑 같이 죄악으로 물든 교권 제도의 희생물이 되고 있고, 교권 제도는 끊임없이 성도들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게 오도하고 있다.


교회는 예수께서 생명을 내어주고 일으키신 새로운 영성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당시의 어느 종교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영성을 수용할 수 없어 토해냈고 그로 인해 교회가 생겼다. 그런데 그 교회가 어느덧 제도화되고 조직화되고 교리화되어 다시금 자신을 토해낸 그 모체와 같이 되어 버렸다. 만일 초대교회가 오늘의 교회처럼 믿고 살았다면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교회는 예수께서 허물려 하셨던 그 종교의 모습으로 타락해 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의 그 치열한 삶과 모진 고난과 처절한 죽음을 모두 헛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예수님을 잘 섬기도록 교리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영광스러운 성전을 짓는다고 말하지만, 정작 예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을 잘 믿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을 받드는 일 아닌가? 지금 성령을 통해 이끄시는 대로 자신을 열고 새로운 경지로 부단히 나아가는 것 아닌가?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일상 안에 성소를 만드는 삶을 살아감으로 이곳에서 영원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참 제자가 아닌가? 그런 태도를 ‘위험하다’, ‘급진적이다’, ‘모호하다’고 규정하면서 부단히 교리와 법과 형식과 건물을 만드는 우리의 교회! 바로 그것을 허물자는 말이다.


진짜를 세우기 위해 가짜를 허물자는 말이다. 진짜를 얻기 위해 가짜를 부정하자는 말이다. 알짜를 얻기 위해 껍데기를 향해 ‘가라!’고 외치자는 말이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도록 굳어버린 모든 것을 버리자는 말이다. 교회가 참 교회 되게 하기 위해 가짜를 허물자는 말이다. 종교를 넘어 영성을, 교리를 넘어 진리/말씀을, 조직을 넘어 공동체를, 교권을 넘어 참된 권위를, 우상을 넘어 하나님을, 예수의 몸을 넘어 그분의 영을 찾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항상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나라를 살자는 말이다. 우리 삶 전체가 예배가 되게 하자는 말이다.


일상 속의 성소


이제 나는 주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독자들과 함께 일상 속에 성소를 세우는 영성 생활을 모색해 볼 예정이다. 영성 생활의 목적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영성을 우리 생활 안에 누룩처럼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카를로 카레토(Carlo Carretto)의 말로 하자면, “영성이란 생각하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우리의 모든 행동을 거룩하게 만드는 방법을 가리킨다”(Letters from the Desert, p. 90). 지금 한국 교회가 앓고 있는 문제는 누룩이 반죽 안에서 그대로 응고되어 반죽 전체를 썩게 만드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영성 생활은 우리의 삶 전체에 골고루 퍼져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영성 생활이 일상 생활의 특정 시간에 국한되고 영성이 특별한 영역에 갇혀 버림으로써 삶 전체가 변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마치 부풀지 않은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져 버리고 군데군데 곰팡이가 피어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대다수의 영성이다.


내가 이 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내가 알고 경험한 영역에서 내가 깨달은 정도의 개선책을 논하는 데 그칠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이끄시려는 영성의 일부분을 서툴게 서술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부디, 이것이 독자들에게 단서가 되어 각자가 정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이끄시는 더 깊은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어디에 이르더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생각하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빌 3:16). 늘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가시며 이끄시는 주님의 영을 따라 나아갈 것이다. 이 글은, 내 글이 늘 그래왔듯이, 이 과정에 대한 중간 보고인 셈이다.




(1) 나는 예수께서 공생애 이전뿐 아니라 공생애 이후에도 예루살렘에 가끔 들렀다고 믿는다. 이 점에 있어서 공관복음서보다 요한복음서의 증언을 더 비중 있게 본다. 하지만 마지막 유월절 이전의 예루살렘 방문은 신분을 숨긴 채 잠시 들러보는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그 이전의 예루살렘 방문을 생략한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선택은 납득할만하다.

(2)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20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수리되기 시작했다. 이방인이었던 헤롯 대왕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 공사에 공을 들였다. 하지만 정치적 계산에 의해 시작된 공사였고 공사 자체가 방대했기 때문에 자주 중단되었다. 예수님이 활동하실 당시에도 아직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46년 동안 지어졌다는 말은 재건 공사가 시작된 주전 20년부터 따져서 하는 말이다.


(3)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한국 교회 대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다. 참다운 교회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적지 않음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주류가 예수님의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하긴, 참된 교회를 일구기 위해 고투하는 분들이 실은 예수님의 비판을 가장 예민하고 뼈아프게 느끼는 분들일 것이다. 정작 그 비판을 느껴야 할 사람들은 굳어지고 무뎌져 그런 줄도 모르는 채 죽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