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0월

1.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뜻에 맞는 대로 하였다. (사사기 21:25)


사 람이 사람으로부터 존 귀히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버려지는 모습은 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는 이미 삶의 전 영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가정이라고 해서 더 이상 예외가 아니며,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통 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한 해 동안 한국에서 남녀 30만 6573 쌍이 결혼하고 14만 5324 쌍이 이혼 해 결혼대비 이혼 건수는 47%에 달하였다고 한다. 유명인사들의 무분별하고 잦은 만남과 헤어짐 같은 일들을 굳이 거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통 남녀 두 쌍이 결혼하는 동안에 한 쌍은 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많은 자녀들은 안정된 가정의 울타리를 잃은 채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상처받기 쉬운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사회는 어떠한가? 친구가 근무했던 비교적 잘 알려진 한 회사에서는 호황을 맞아 투자가 늘어나는 가운데 고용 인원을 크게 늘렸다가 불경기를 맞아 다시 인원을 감축했는데, 그 부서의 근로자 수가 처음의 100 명에서 200 명의 단계를 지나 다시 100 명으로 되돌아온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 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한 개인은 필요에 따라 언제라도 취해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소모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과거에는 가정 다음으로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되어주곤 하였던 학교에서도, 이제는 스승과 제자 및 동료 간의 사이가 치열한 경쟁 가운데 언제든지 이익을 좇아 떠나거나 버릴 수 있는 모습으로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랑 가운데 주님의 각 지체를 형성하여야 할 교회 공동체에 있어서 조차도, 때로 서로 미워하며 분열하는 모습은 어지러운 세상의 축소판에 다름 아닌 것으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2.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느냐? 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가 서로 배신하느냐? … (말라기 2:10)


신 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원하는 우리들의 삶은 아마도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들과는 무언가 다른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비록 외면적인 모습이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손 치더라도 본질적인 측면에 있어서라면 우리라고 과연 얼마나 안심할 수 있을까?


예 를 들어, 혹 미래의 배우자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며 준비는 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영혼 자체보다 더 중요한 현실적인 가치를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이 또한 내 마음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면… 만일 외모, 돈, 명예 등의 어떤 현실적인 가치가 그 사람의 존재를 존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면, 그 가치가 사라지는 때에는 그 사람 자체의 가치 또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또, 외형적으로 안정적인 결혼생활의 모양새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서로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사랑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그 경우에, ‘네가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질책을 우리의 가정은 피해갈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 생활은 하고 있지만, 목회자나 리더가 단지 내 뜻대로 나를 기쁘게 해주지 않고 있다고 해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그를 버리고 떠날 기회만을 찾고 있다면… 반대로, 목자로서 주님의 양을 돌보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만큼 나의 제자가 되지는 않고 있다는 이유로 마음 속으로 그 사람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인해 버리고 있다면… 이런 가운데에서라면, 나 스스로의 영광 받음을 위하여 사역하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또, 지금 이 순간 누군가와 동역 자로서 함께 일은 하고 있지만, 그 만남 자체에 긷든 주님의 섭리와 그 영혼의 존귀함에 대하여 감사하고 있기보다는 그가 수고하고 성취한 정도에 따라서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상대방을 재평가하고 있다면… 나의 유익과 목적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취하고 버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 떤 사람이 나의 뜻과 달리하는 때에, 나의 감정상 어떤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때에, 또는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 나의 유익과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상충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의 뜻과 감정과 유익 때문에 이번만은 상황 상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을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는 생각이 우리 마음 안에서 때때로 정당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모든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근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이유 있는 사유들이 하나하나 모아져서, 때로 우리 자신들은 희생자가 되기도 하고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가 보고있는 것과 같은 세상의 거시적인 모습들을 함께 만들어 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3.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 8:7) /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인 간은 다 죄인이다. 나도 죄인이다. 우리 중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하여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구원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 그러므로, 누가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틀렸고, 용납될 수 없으며, 가망이 없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다윗의 범죄 함과 베드로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와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주신 주님이시기에, 연약하여 넘어지기 쉽고 어리석어 그르치기 쉬운 나 같은 사람과 객관적인 실패와 실수를 입증 받은 저 사람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분 안에서의 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지으셨고 우리 모두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생각할 때, 이러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은 나의 것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임을 믿게 된다.


하 나님의 능력과 사랑 안에서 회복과 역전의 소망을 가지고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은 그들의 아픔을 내 것처럼 이해하고자 하는 긍휼어린 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늘 그렇듯 말처럼 쉬운 일일 수 있었다면, 그 누구도 관계와 인간성의 파국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놓아서는 안 되는 것을 놓지 않는 과정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고뇌와 눈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혼 생활에서 파경을 겪은 부부의 대부분은, 많이 인내하였고 관계와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 소용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이혼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교회가 분열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이 주는 모진 언사와 불합리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힘겨워하는 가운데 갈등하며 기도하고 신음하다가 그 지경에까지 갔겠는가? 따라서, 나에게 주어진 상황적인 한계와 감정상의 한계를 껴안은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할 것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다는 일은, 끝이 안 보이는 듯한 막연한 느낌을 안고 기도하는 가운데 눈물로써 몸부림(struggle)쳐야 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 나님은 야곱을 불러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삼으시는 언약을 세우시면서 야곱에게 새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 스스로가 칭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이 축복 받은 자도 아니고 권능 있는 자나 거룩한 자도 아닌 씨름하는 자 (이스라엘: 하나님과 더불어 씨름/struggle하는 자) 이었음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되어져야 할 우리의 모습과 현재의 우리의 모습 사이에서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몸부림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바로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의 정체성으로 여겨주고 있으신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바라볼 때, 각양각색의 어려움 가운데서 주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고자 씨름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은 어쩌면 불완전한 우리가 진실한 의미에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삶의 제사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버릴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삶의 위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들 역시 우리에게는, 우리 앞에 예비되어 있는 고뇌와 눈물 가운데에서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 스스로의 영적 진보를 이루는 기회이기도 한 셈이다.


4.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11)


때 때로 세상 가운데서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하곤 하는데,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만약 이 땅 위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았는데 나만 홀로 죄 가운데서 구원받지 못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도 마찬가지로 나 하나를 위해서 그 희생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감당하러 오셨을까? 성경에는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대답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마 18:12) 그렇다! 주님은 설혹 나 하나만이 구원받지 못하고 남겨졌다 하더라도,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로 두신 채 이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으러 오셨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을 직접 지으신, 그러므로 지어진 이 세상 그 자체보다 더 귀하신 예수님께서, 단지 내 한 영혼을 건지시고자 자신을 죽음 가운데로 내몰아 가셔야 할 이곳으로 말이다. 이렇듯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은, 때로 버림받은 모습이 되어 눈물짓고 있는 나를 향하여 말할 수 없는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마음이고, 사람을 버리는 자가 되지 않고자 눈물 가운데 고뇌하고 있는 나에게 오셔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그 마음이며, 때로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임에도 다른 이를 더는 사랑하지 못하고 이제 버릴 수밖에 없는 나를 향하여 안타까움으로 눈물 흘리고 계시는 마음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로써만은 충분히 환영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쓸모 있음을 인정받는 일에 사활을 걸어왔다. 너무도 치열하고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에, 영혼 이전에 유익과 성과를 구하였고, 내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으로의 일이나 사역에 상대방도 동참하기를 구하였으며, 경제성이나 기여도, 수고함 등의 외면적이고 가시적인 가치에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세상에서 같은 모양으로 다가오는 냉정한 시선들에 그대로 노출된 채,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때로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먼저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라는 현실의 유혹에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기도 하였다. 이토록 이 세상의 가치 체계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이기에, 이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조차도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의 의미나 내 입장의 당위성으로 승부하려 하며, 신앙 인으로서의 섬김의 순간들 가운데에서조차도 나를 중심으로 하려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러나, 이제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는 가운데, 같은 시선으로써 또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기 원한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듯, 사람이 또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 세상을 꿈꾸어본다. 천국은 아마도 이미 그러하리라.


부모가 ‘내 뜻대로 가지 않는다’ 하여 그 자식을 버리지 않는…


자식이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 하여 그 부모를 버리지 않는…


친구가 ‘나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다’ 하여 친구를 버리지 않는…


남녀가 ‘이젠 내 감정이 다하였다’ 하여 서로를 버리지 않는…


동역자가 ‘실수하였다, 잘못하였다’ 하여 동역자를 버리지 않는…


목양자가 ‘나를 높여주지 않는다’ 하여 주님의 양을 버리지 않는…


성도가 ‘인간적인 부족함이 많다’ 하여 목양자를 버리지 않는…


스승이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제자를 버리지 않는…


제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하여 스승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 업적이 적다, 재주가 적다, 가진 것이 적다, 성품이 부족하다 하여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마음에서 끊어버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람 앞에서 “의리”를 목숨처럼 중히 여길 수 있는…


배신의 쓴 기억 때문에 사람을 믿어주기에 인색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의 모든 가능성을 보면서 실망되어도 또 믿어주고 배신해도 또 속아주어 마침내는 하나님 앞에서 정금처럼 “함께” 서는…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일들 가운데서, 내 마음 안에 한 번 모신 주님께의 관계 또한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