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2년 2월호
기독교는 과연 환경파괴의 주범인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
요즘 방학을 이용하여 그간 가르치던 학생들과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성경과 기독교를 마치 환경보존에 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고 심지어는 진화론적인 입장마저 고수하면서 생태적인 입장은 반 기독교적인 입장임을 암암리에 시사하고 있다. 그간 환경을 공부하면서 읽은 많은 책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보면서,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환경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조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창세기 1장에 근거하여 제기되고 있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환경파괴와의 관계성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많은 학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대한 해석을 통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성이 환경파괴의 근본적인 원인제공을 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다분히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자구해석에 깊이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이 구절의 앞 뒤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창세기 기자는 1장 2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시고 공중의 새와 땅 위의 것들과 바다에 사는 고기들을 다스릴(have dominion over) 수 있게 하실 계획을 기록하고, 27절에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1장 28절에서는 지으신 사람에게 하나님의 창조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곧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며 땅에 충만하여 땅을 정복할(subdue) 것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의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라고(have dominion over). 여기까지만 읽으면 앞에서 말한 대부분의 환경 학자들의 의견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자연보다 우월한 지위를 주어서 잔인하게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게 한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본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본 고는 창세기 1장 26절-28절, 2장 15절에 나타난 주요 단어의 어원과 전후문맥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 문제를 보다 분명히 하고자 한다.
어원적으로 26절의 ‘다스리다’는 28절의 ‘다스리다’와 같은 단어로서 (radah)라고 하는데 미완료시제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스리다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우리말이 가지고 있는 절대자의 지배나 통치의 개념보다는 전지하고 전능한 입장에서 사물을 통찰하고 그에 맞게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더 문제시 되는 단어는 바로 ‘정복하다’로 번역된 (kabash) 로서 단어 자체로만 보면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보인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정복자들의 잔인함과 폭력성이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장 문맥 전체와, 같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2장 15절과 그 외 관련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살펴보면 위와는 좀 거리가 있는 시각을 볼 수 있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당신을 닮은 인간을 만드셔서 그로 하여금 지으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하는 것이 그 주된 요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것이 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을 닮은 존재로 만드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스스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에는 잘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구약과 신약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당신께서 지으신 세상을 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셨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세상을 구속하시기까지 하신 세상의 보호자이심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간혹 구약에서 나타나는 냉정하고 몰인정한 것 같은 모습은 모두 다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결국 세상을 바로 다스리시기 위한 채찍의 손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존재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질문 자체가 다른 것으로서 창세기의 구절들을 인용하여 성경의 잘못과 기독교의 잘못을 논해서는 안 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하다는 단어가 다분히 전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표현상의 문제라고 보여진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참된 평화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투적이고 잔인한 표현은 뭔가 원어적인 표현을 영어나 우리 말로 옮기는 데 어색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이 단어가 쓰인 다른 성경을 찾아 보니 이 말은 다른 민족과 당신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무릎 꿇게 하는데 쓰이고 있다(역대상 17:10, 시편 47:3, 이사야 45:1, 다니엘 7:24). 바로 어그러진 관계, 즉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새롭게 하고 정돈하는 의미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 향한 죄악을 이기고 주께 돌아가는 것을 촉구하는 장면에서 사용되기도 했다(미가 7:19). 즉 이 단어는 무언가 행위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권위적인 모습에 쓰이기 보다는 관계적이고 질서를 나타내는 데에 쓰이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을 보다 더 잘 뒷받침해 주는 곳이 바로 창세기 2장 15절에 설명된 에덴에서의 인간의 역할이다.
창세기 2장은 천지창조사역의 완성, 안식일, 에덴 동산 완성, 인간 창조의 구체적인 과정 묘사 등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나서 인간을 에덴에 들여 보내시면서 일하고 돌보는 역할을 지정하신다. 그렇다면 동사로 되어 있는 이 두 단어는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 이 단어는 바로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의 다스리다와 정복하다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기에 아주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첫번째 단어인 ‘일하다’로 번역된 단어인 (abad) 는 동사로서 serve, work, worship의 뜻으로 쓰이고, 명사로는 servant, worshippers, labor 등의 용도로 쓰이고 있다. 위의 예들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첫번째 권한은 바로 에덴 동산에서 노동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편 하나님과의 관계는 섬기는 자, 즉 예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가를 규명할 때 사용되는 소중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노동이 곧 예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돌보다’로 번역된 단어인 (shamar)는 동사로써 keep, observe, heed 등의 의미로 쓰이고 명사로써는 keeper, watchman 등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용례에 근거하여 보면 두 번 째로 아담에게 부여된 직책은 에덴동산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에덴동산의 관리를 위임 받은 아담은 후에 에덴의 모든 생물들의 이름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으니 가히 하나님을 닮은 제2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두 단어에 대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연(세상)에 대한 권한이 혹자가 지적하는 파괴자로서, 폭압적인 전횡을 휘두르는 압제자로서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하신 세상(환경)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원리 그대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의 관리를 위임 받은 존재로서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노동을 함으로써 위임자를 예배하며, 자연과의 관계가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아닌 사랑과 헌신과 섬김의 관계임을.
내용이 이러할진대 인간이 과연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할 권한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이미 지배와 정복의 패러다임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더 더욱 성경의 창세기가 환경을 파괴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주장은 아주 근시안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질서와 조화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신다.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에게 당신께서 애지중지 만드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이것은 아마도 자연과 인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인간의 섬김과 돌봄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인간은 자연을 돌보고 일함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수직 수평의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역학 구도에는 인간이 하나님과 자연의 중간에 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인간의 위치가 적어도 인간의 타락 전에는 잘 유지되었으리라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대로. 인간의 타락이 기록된 창세기 3장 이후에는 2장까지의 기록과는 상반된 내용들이 기록되고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고 사람과 자연이 관계가 깨어지고 자연과 자연의 관계도 역시 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으로 해석할 때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 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자로서, 자연에 대한 관리자로서.
이러한 시각은 오히려 깨어진 환경을 보듬고 돌보는 데에 적극적인 자세를 제공해 준다. 자연을 사랑해야 할 대상, 섬기고 아껴야 할 대상, 아니 몸을 드려 희생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환경보존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강한 힘을 제공할 수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렇다면 왜 이 문제가 기독교 국가의 후손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 작금의 기독교가 처해 있는 문제가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상 성경 자체를 볼 때는 모순을 발견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면에서 너무나 많은 모순과 괴리를 보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성경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없이 남들이 한 얘기를 옮겨 적다 보니 이러한 우를 범하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본질적인 책임은 문제를 지적한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 크리스천들의 오만과 불순종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라도 좀 더 겸손히 성경이 말하는 진실과 우리의 상식과 이성이 밝혀내고 있는 사실들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고 고쳐가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는 환경에 대한 크리스천의 자세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