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5월호


사회이론 가운데는 유기적 조화를 중시하는 이론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대립과 투쟁을 중시하는 이론이 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론이 전자의 전형적인 예라면,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이 후자의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조화는 사회적 안정과 효율성을 가져다 주는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사회의 문제가 있어도 그냥 덮어주게 되어 발전의 가능성이 약해진다. 반대로 대립과 투쟁은 사회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개혁하는데는 강점이 있지만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서로를 불신하게 만든다. 이것은 개인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과의 인화성과 관계성을 중시하면 그의 잘못에 대해서도 그냥 덮어두고 지나치기 쉽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다 보면 그의 문제를 고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와의 관계는 나빠지기 쉽다. 혹은 심한 경우에는 문제를 고치기는커녕 분쟁과 감정다툼만을 일으켜 상태가 더 악화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관계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덕을 세우는 비판이 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은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떠한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내용만 고려하기 쉽다. 나는 진리를 선포했으니 당신은 알아서 들으라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이유는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한 정확한 지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잘못을 고치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그 내용의 잘잘못 이외에도 몇가지 다른 요소들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what)을, 어떻게(how), 왜(why) 지적하느냐 하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일한 내용도 이러한 요소들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1. 어떤 잘못을 지적할 때 ‘누가’ 그것을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적으로 권위가 있고 그 삶이 성경적으로 인정되는 사람이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것과 그 자신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간혹 목사님들 가운데는 교회의 잘못에 대한 지적에 대해 마음을 닫아 버리는 분들이 있는데(물론 이러한 태도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 이유 가운데는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다. 교회 내에서 별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교회에 별로 기여하는 바도 없는 사람들이 뒤에서 교회가 하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은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비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비판이 얄밉게 보일 것이다.


또 간혹 교회가 썩었다고 떠드는 사람가운데는 그 자신이 바로 교회를 썩게 한 장본인인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의 잘못을 지적한답시고 뭐라고 떠들 때 주님이나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


그러므로 단순한 선포를 위한 비판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잘못을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잘못된 점을 고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영적 자질 향상은 물론이고 교회를 위해 먼저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사랑 어린 지적과 조언을 할 때 그들의 지적은 더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2.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동일한 내용도 언제 그것을 말하느냐에 따라 분명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상대방이 한창 화가 나 있다거나 다른 문제로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는 아무리 그 내용이 옳고 진실한 마음으로 말했더라도 그 지적은 좋은 결과를 얻기가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 좋은 충고가 역효과만 낳게 될 수도 있다.


예수님도 한창 흥분된 마음으로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 ‘이 여자를 돌로 치리이까’ 하고 물어 온 군중들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대답없이 땅바닥에 글만 쓰셨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말한 대답은 그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흥분이 다소 가라앉았을 때, 주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은 큰 효과를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어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할 때는 언제 그 말을 해야 할 것인가를 잘 분별해야 한다. 주식을 사고 팔 때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하지 않는가!


3. 어떤 ‘장소’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때로 대단히 중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인적 잘못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반대로 공동체의 문제점을 공동체 내에서는 지적하지 않다가 다른 모임에 가서 수근수근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또 남편이나 아내의 잘못을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꾸짖는 것도 남편이나 아내의 권위, 그리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조용히 만나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은 그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갈 2장 11절에 따르면, 바울은 대사도인 베드로가 외식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였다. 이것은 베드로의 외식으로 인해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심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 공개적으로 행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는 개인적인 문제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부부간의 잘못에 대해서는 밤에 잠자리에 들어 부드럽게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서로간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이의 시정을 구한다면 가장 효과가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므로 그 시간과 장소를 잘 선택하는 것도 덕을 세우는 지적이 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들이다.


4. ‘무엇’을 지적할 것인가 하는 점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그 지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것인지를 여러 가지로 객관적으로 검증해 보아야 한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어떤 일에 대한 평가나 해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공적인 문제제기를 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사람들의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 자칫하면 한쪽의 관점만을 고수한다든가 혹은 소수의견에 의한 마녀사냥을 하게 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것이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을 때는 그 경중과 또 당시 상황을 다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그 부정적인 측면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 때문에 전체를 비판한다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견될 경우에는 지엽적인 것은 버려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것저것 다 건드리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희석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잘못의 지적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말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글로 할 것인가? 언론매체를 동원해 공개적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교계 내에서만 알 수 있도록 교계의 채널을 이용할 것인가? 팻말이나 플랭카드를 사용하는 시위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기도를 통한 영적 방법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방법들을 동시에 사용할 것인가? 이 역시 문제의 성격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글보다는 말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 상대방에 전달되는 효과가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글로 문서화되는 것이 더 장기적으로 더 큰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또 부모님이나 선생님과 같은 가까운 분들의 문제점을 직접 말로 표현하기 힘들 때는 편지를 씀으로써 큰 효과를 얻은 경우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안에 따라서 적절한 방법을 잘 선택해야 한다.


또 말이나 글로 표현할 때, 표현의 방식이나 표현의 강도도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잘 선택해야 한다. 어떤 내용을 농담조나 냉소적으로 표현한다면 아무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들 것이다. 반대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나치게 일방적이고도 높은 강도로 정죄하거나 혹은 상대방의 완전한 굴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도, 그 의도와는 반대로,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그럴 경우,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거나(강한 성격의 소유자) 아니면 그 사람을 극심한 스트레스와 절망속(여린 성격의 소유자)으로 집어 넣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표현의 강도와 방식도 적절히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도가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경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거기에는 사랑과 기도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잘못을 지적하고자 하는 그 대상들을 위한 기도가 없다면 이는 성경적인 방식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서는 더욱 기도가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6. 성경적 지적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왜’ 라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어떤 잘못을 지적하는 동기와 태도야 말로 그것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핵심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더구나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만일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분명 그들을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공격형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기만족과 스트레스 해소를 가져다 줄지는 모르나 결코 비판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 설령 그 내용이 진리라 하더라도 그 사랑이 없는 진리는 형제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많은 비판들이 이러한 사랑의 동기가 없음으로 인해 덕을 세우기 보다는 결과적으로 분쟁과 반발만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흔히 목도하는 일이다. 특히 스스로 입바른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엇이 옳으냐 하는 것에만 치중함으로써 도리어 덕을 세우기 보다는 다툼과 분쟁만 일으키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특히 한국교회를 개혁하려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은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아파하면서 자기의 살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그러한 비판을 해야 한다.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은 마치 그 부패한 교회의 밖에 있는 의로운 선지자인양 자처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나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면서도 그 민족의 죄를 바로 자신의 죄로 알고 금식하면서 회개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민족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정직한 자신을 부패한 이스라엘 민족과 동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어떤 잘못의 지적이 성경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과거 여러 교회들에서 기독교세계관을 강의하면서 교회나 사람들의 잘못들을 많이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 주님께서는 그러한 나의 지적에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 때 깨달은 말씀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고전13:1) 라는 말씀이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외치는 천사의 말일찌라도 아무런 의미없는 소음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이 진정 사랑의 동기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남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자. 우리가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유는 진리를 선포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고치게 하는데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들의 태도를 생각해 보자. 자신의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이를 수용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더구나 상대방이 위에서 말한 6가지 요소들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해 올 때도 겸허히 그것을 수용하고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만일 별로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 대중 앞에서 아무렇게나 내뱉은 비판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 자신을 고칠 수 있다면, 이런 사람은 정말 위대한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공개석상에서 새까만 후배인 바울에게 책망을 받고도 그것을 겸허히 수용했던 베드로야말로 진정한 위대한 신앙인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