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8월호

내가 알던 어떤 후배 가운데 신앙이 좋은 약사 자매가 한 명 있었다. 그 자매는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새로이 약국 일을 시작하기 위해 기존의 다른 약국을 그대로 인수하기로 하고 대금을 치렀다. 마침 그 약국의 전 소유주도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모든 매매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인수인계를 하던 중, 약국과 관련된 업무를 하던 관공서에서 어떤 공무원이 조사를 나왔다. 그런데 이 사람이 업무가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계속 서성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매는 처음 이런 일을 경험하는지라 ‘왜 그럴까’ 하고 의아해 하고 있는데, 전 소유주가 저것은 이른바 떡값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이 자매는 ‘내가 왜 뇌물을 주어야 하냐!’ 하면서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 소유주가 ‘만일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적당히 돈을 주어야 한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아직도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이 자매를 위해 대신 돈을 집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비단 이 자매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는 일일 것이다.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막상 세상 속에 들어가 살다보면 그것이 너무나도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고민하던 사람들도 점차 순수성을 포기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게 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뭐니 뭐니 해도 손해 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금전상이나 혹은 다른 불이익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두 번째는 나 하나 잘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느냐 하는 패배의식이다. 세 번째는 오늘 예에서 나온 것과 같은 ‘완벽하지 못할 바에야 적당하게 살자’는 자포자기 의식이다. 나는 특별히 이것을 ‘다니엘 콤플렉스’ 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이것에 대해 좀 말해보고 싶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이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었던가 하는 것이 잘 소개되어 있다.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해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3-4)


탁월한 업무 능력에 성실성, 그리고 순수성을 겸비한다면 이보다 더 바람직한 직장인의 모습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일에 능력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흠잡을 일이 없이 정직하고 완벽하게 모든 일을 행하는 이러한 다니엘의 모습이야 말로 모든 세상속의 그리스도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 이 다니엘은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잘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니엘의 훌륭한 모범이 때로는 반대의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니엘은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별종의 사람처럼 인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으면서, ‘나도 다니엘처럼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끼기 보다는 ‘다니엘이니까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야 뭘’ 하는 의식으로 대하게 된다. 그렇다 보니, 이 다니엘의 모범은 나의 삶의 모델이 아니라 거꾸로 나의 현실을 정당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된 자매의 사례는 그것을 단적으로 잘 보여 준다. 그 그리스도인의 경우에 있어서, 다니엘의 모범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어떤 표준이 아니라 거꾸로 그 모든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모든 법과 규범을 지킬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고 적당히 뇌물을 주면서 살자.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게 만드는 전형적인 의식, 즉 ‘다니엘 콤플렉스’이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경험하는 심리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비가 와서 질퍽한 길을 신발이 젖지 않도록 애쓰면서 걷는 사람이 있다. 조심스럽게 걸어왔지만 그러나 곧 한쪽 신발이 진흙 속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그는 나머지 한쪽이라도 지키려고 하기 보다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서 일부러 두발을 다 진흙 속에 넣어 버린다. 그러면서 점차 진흙 속에 걸어가는 것을 즐기게 된다. 그와 더불어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흙탕물을 뿌려 억지로 자기처럼 되도록 만들고자 한다.


이것은 많은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점차 세상과 타협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처음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 속에 들어갔을 때는 신자로서 깨끗하게 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곧 일부의 순수성이 무너지면서 자책감에 빠지게 된다. 그와 더불어 ‘에라 모르겠다, 나는 어차피 다니엘처럼 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 속에 오래 있으면서 이제는 그것을 즐기게 되고, 좀 더 심한 경우는 다른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을 보면 억지로라도 자기처럼 만들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점점 세속화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니엘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절망이 다른 극단으로 흘러버리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는 다니엘처럼 완벽하게 법을 지키면서도 일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대다수의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과연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있다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영역을 좀 더 좁혀서 세상의 법과 규범에 한정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완벽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다니엘처럼 완벽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주님도 우리가 완벽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죄를 전혀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보다는 지은 죄를 고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족하다 하더라도 주님이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가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기를 원하시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자포자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삶에의 노력으로 이어지려면,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완벽함을 기대하시기 보다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올바로 살도록 노력하는 것을 기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올바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네 번째,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것을 숨기려 하거나 혹은 자신의 무능력에 대해 절망하지 말고 그것을 회개하고 곧바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의 죄를 짓고 그것을 숨기려고 하면, 그보다 더 큰 죄를 계속 지을 수밖에 없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불륜을 숨기려다 결국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게 하는 더 큰 죄를 짓고야 말았다. 만일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뇌물을 준다거나 다른 부정한 일을 한다면, 그는 그것이 또 다른 올무가 되어 점점 더 개미지옥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더 큰 죄로 이어지기 전에 그 죄를 회개하고, 때로는 법적인 처벌을 달게 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볼 때 그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를 하면 그를 다시 받아들이려는 수용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을 솔직히 고백하기 보다는 그것을 숨기려고 계속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것을 고백했을 때 오게 될 비난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간혹 언론에 어떤 사람의 과실이나 범법사실이 알려지면, 지나칠 정도로 그 사람에 대한 극심한 돌팔매질이 이어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과실이 언론에 공개된 후 거의 사회적으로 매장되다 시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그것이 두려워 잘못을 숨기려고 제 2, 제 3의 범죄를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정말 습관적이고도 악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실수에 의한 것일 때는 그 죄는 미워하고 분별하되, 나도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는 100가지 일 가운데서 99가지 일을 다 잘 하다가 한 가지를 잘못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 100가지 가운데서 10가지의 잘못을 저지르고도 알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10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1가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그러므로 내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을 안다면 다른 사람의 완벽하지 못함에 대해서도 다소 이해심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나는 기독교세계관을 비교적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성경말씀대로 올바로 살려고 노력해 왔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그것을 완벽하게 다 지킬 수 없음을 느낀다. 그것은 마치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일수록 ‘고백록’이니 ‘참회록’이니 하는 책들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연약함 가운데서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길은, ‘all or nothing’식의 다니엘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서 연약함 가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일 것이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이 나타날 때에는,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그 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 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좀 더 이해심 있으면서도 함께 밝아지는 사회가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