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5. 한국의 맥락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글에서 텍스트 포지셔닝을 했는데요, 피터슨의 책이 한국 사회에 들어오는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피터슨은 미국사회의 맥락에서 책을 썼습니다. 그는 미국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한국 사회와 공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구체적인 맥락은 서로 다릅니다. 인격성, 일상성, 인내 그리고 기다림은 미국사회에서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은 미국사회의 것과 다릅니다. 바로 그 지점을 이해해야 비로소 이 텍스트를 우리의 맥락에서 제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번역가의 입장에서 저는 우리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우선은 한국어 어법의 문제입니다. 한국어의 열등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와 관련된 우리 언어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격적 관계의 기초는 I-You관계입니다. 그런데 한국어 용례에서는 안타깝게도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일컫는 2인칭 대명사인 ‘너’가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상대방을 일컫는 대명사는 다 ‘you’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2인칭 대명사를 쓸 수 있는 사이는 동갑내기밖에 없습니다. 한살만 차이가 나도 ‘너’라고 부르면 안 됩니다. 게다가 나중에 사회에 진출하면 다 사회적 직함으로 부릅니다. 번역할 때 이 부분이 문제가 됩니다. 영어로 2인창 대명사 ‘you’를 그냥 ‘너’ 혹은 ‘당신’이라고 그대로 번역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 서열, 직함 등을 찾아서 확인한 후에 그것을 써줘야 합니다.
한국사회는 사람을 이름으로, 나와 대등한 ‘너’로 알려 하지 않고, 즉 인격적으로 알려 하지 않고, 직함에 따라, 기능에 따라, 역할에 따라 알려하는 문화적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언어와 문화와 인간관계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유교질서입니다. 이러한 서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따른 도리와 같은 것이 우리의 외피를 단단히 감싸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지 못하고, ‘자기’로서 자기를 알지 못합니다. 상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을 나와 분리된 고유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나와의 관계에서 이 사람이 나보다 위냐, 아래냐, 높냐, 낮냐, 이런 것을 계산한 후에 관계 설정을 합니다. 이것은 아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러한 서열 관계는 우리가 ‘인격성’을 이해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호칭과 직함이 세분화된 것은 그만큼 그 문화가 위계적이라는 뜻인데, 한국어의 화법은 또한 청자 중심의 화법입니다. 이 말은 화자가 말을 정확하게 전달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청자가 알아서 그 말을 해석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가 ‘오늘 날이 좀 덥네.’라고 하시면, 같이 사는 며느리는 이 말을 그냥 날이 덥다고 하신 걸로 이해하면 안 되고, ‘오늘은 그럼 시원한 콩국수라도 만들어 드려야 하나.’ 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서로가 아주 깊이 통하는 사이에서는 이러한 화법이 다소 시적이고 멋있게 들릴 수도 있지만, 늘 윗사람의 의중을 헤아려야 하는 아랫사람은 적잖은 억압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됩니다. 관계의 피로가 커지는 것이지요.
두 번째 한국 사회의 특징은 ‘탈식민성’입니다. 말이 좀 어려울 수 있는데요,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우리 것으로, 우리의 ‘현실’로 보느냐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1세계 국가들은 이런 고민이 없습니다. 이 고민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의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식민지 시절을 보낸 국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저항하는 ‘우리’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기 위해서 더 ‘우리’다운 어떤 것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해외에 나가면 서구 나라를 갈 때랑, 다른 아시아 국가를 갈 때랑 좀 다릅니다. 서구에서는 우리 자신을 서구 앞에서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너희는 왜 우리와 다르냐’, ‘너희는 누구냐’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대답할 필요를 느낍니다. 서구는 존재 자체로 정당하다면,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 문화는 이렇다, 한국 사람은 이렇게 한다,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아시아 국가를 방문할 때는 다르지요. 특히 동남아 국가 같은 경우, 오히려 우리가 존재 자체로 정당하고, ‘너희는 왜 그러냐’라고 묻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다름’을 나타냅니까? 우리가 우리로서 설명하는 ‘한국적인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외국에 알리려고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이 한복, 농악, 김치, 한옥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은 한복도 안 입고, 농악도 일상적이지 않고, 저는 결혼 16년차지만 김치 담글 줄도 모르고, 한옥은 한옥 마을 가야 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를 설명할 때,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전형화합니다. 이때 놓치기 쉬운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 하나님의 세계」에 보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맞이하는 아침의 풍경을 이런 말로 묘사합니다. “베이컨 굽는 냄새가 코를 자극하면, 이제는 버터를 바른 토스트와 스크램블에그 그리고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자바 산 원두로 새로 내린 커피를 기대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의 일상을 한국 사람답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황을 끌어올까요?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구수한 냄새?” 이럴 때 바로 전형화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사실 저희 집도 아침에 빵을 먹는 날이 많고, 커피는 매일 원두를 갈아서 내려 마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인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와 현실에서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전형화에 빠지면, 우리는 현실의 온갖 다양한 ‘결’과 그 ‘울퉁불퉁함’을 제대로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가 ‘변명적’으로 민족주의를 사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때그때 편리하게, 그건 한국적이지 않다, 서구적이다, 하는 식으로 변명하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사용한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합리적인 것이 반드시 서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합리적인 사람을 우리는, 서구적이다, 정이 없다, 은혜롭지 않다, 하는 말로 비판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미국이 우리의 우상이 되어서, 미국 것은 다 좋은 것이고,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사회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압축적 성장’입니다. 서구에서 몇 백 년에 걸쳐서 이루어낸 것을 우리는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몇 십 년에 걸쳐서 이뤄냈습니다. 피터슨이 미국 사회가 아무리 ‘속도’를 지향하는 사회라고 비판해도, 우리만큼 ‘속도감’을 느끼지는 못할 겁니다. 박민규씨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보면, 유명한 인디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못하는 것이 압축적 성장을 이룬 우리 문화의 특징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대야미도, 6년 사이에 지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지금 대야미는 제가 처음 살던 1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듭니다. 한번 속도에 빠지면 속도를 늦추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지금도 늘 쫓기듯 삽니다. 지금은 절판된 책인데, 김진경 시인의 「삼십년에 삼백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채 경쟁과 성장에 쫓겨서 앞으로만 달리는 것이 지금 우리 삶의 특징입니다.
피터슨이 35년에 걸쳐서 쓴 책들을 우리는 10년 안에 다 번역했습니다. 물론 번역은 필요합니다. 일본의 근대화에 번역이 기여한 바는 책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도 어떻게 보면 압축적 성장입니다. 자신의 토양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는 시간보다 번역이 빠릅니다. 피터슨이 성경을 현대 미국어로 다 번역하는 데에 10년이 걸렸습니다. 박상익 교수는 「번역은 반역인가」라는 책에서 ‘출판사 사장 대학 총장론’을 이야기하는데요,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가 학문적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말입니다.
피터슨이 메시지 성경을 내는 데에는 출판사의 편집자 공이 컸습니다. 출판사의 후원 하에 현대 미국어로 번역된 성경이 나왔습니다. 만약에 한국에서도, 메시지를 수입해서 번역하지 말고, 출판사가 믿을만한 학자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주면서 이 작업을 한국어로 수행하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압축적 성장은 구호와 동원에 익숙합니다. 사람과 세상을 찬찬히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구호가 많습니다. 뭘 자꾸 이루려고 합니다. 압축적 성장은 인격성, 일상성, 인내가 자라기에는 너무도 좋지 않은 토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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