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6월에 청어람에서 했던 유진 피터슨 읽기에 대한 강의를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총 5회에 걸쳐서 연재할 예정입니다. 저는 14년째 기독교 서적을 전문으로 번역하고 있는 번역가 양혜원입니다. 제가 번역한 유진 피터슨의 책은 공역을 포함해서 총 8권입니다. 나열해 보면, 「교회에 첫발을 디딘 내 친구에게」(The Wisdom of Each Other),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Like Dew Your Youth-Growing up with your Teenager), 「현실, 하나님의 세계」(Christ Plays in Ten Thousand Places)(공역), 「이 책을 먹으라」(Eat This Book), 「그 길을 걸으라」(The Jesus Way), 「비유로 말하라」(Tell It Slant), 「부활을 살라」(Practise Resurrection)(공역), 그리고 가장 최근작으로 「유진 피터슨: 부르심을 따라 걸어온 나의 순례길」(The Pastor: A Memoir)입니다. 저는 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고, 그냥 번역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한 저자의 글을 자신의 모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의 것들을 번역가 입장에서 다루어 본 것입니다.

1. Positioning of the Text

 

‘깊은 영성의 소유자’로 종종 소개가 되는 유진 피터슨의 책이 한국에 처음으로 번역, 출판된 해는 1999년입니다. 텍스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 텍스트를 받아들일 만한 토양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등장합니다. 1999년에 그의 책이 처음 소개가 된 후로 약 10년에 걸쳐서 그의 거의 모든 저서가 국내에 번역, 출간됩니다. 독자들이 피터슨의 책을 그렇게 환영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1989년에 ‘경배와 찬양’이라는 곳을 통해서 처음 ‘영성’이라는 말을 접했습니다.(‘경배와 찬양학교’ 1기는 1987년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찬양 집회나 대학부 생활에서 접한 영성의 느낌은, 율법주의에 반하는 것,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일었던 찬양의 바람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율법주의에 대한 반항과도 같았고, 복음이 가져다주는 ‘자유’라든가 ‘영혼의 회복’이라든가 하는 내면적 가치를 많이 추구했습니다. 기존 교회에서 율법주의처럼 지키던 주일성수, 십일조, 교회봉사와 같은 활동들, 소위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보다, 큐티, 침묵기도와 같은, 내면을 살피는 일들이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전두환 정권 이후 학내가 조금 안정되면서 대학교 내에 있던 선교단체들의 활동도 더 활발해졌습니다. 그 결과 선교단체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선교단체와 같은 parachurch를 교회의 범주 안에 넣을 것이냐의 문제였는데요, 선교단체들이 커지면서 주중에 학교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니까, 그러한 충돌이 생긴 것입니다. 역으로 청년부나 대학부가 큰 교회의 경우, 교회가 오히려 선교단체화 되면서 주중에 대학 캠퍼스에서 자체적으로 모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이 무렵부터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리차드 미들톤과 브라이안 왈쉬가 지은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라는 책이 1987년에 출간되었고,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 1992년에 출간되었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 기독교 세계관 책으로는 필독서였습니다.
 
한편 1980년대 중반 무렵부터 사랑의 교회에서는 평신도 운동인 제자 훈련이 본격화됩니다. 1984년에 두란노에서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였던 고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인 「평신도를 깨운다」를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부터 사랑의 교회는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 훈련 지도자 세미나’(일명 CAL세미나)를 시작했고 이 세미나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이면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 혹은 원동력은, 어떠한 식으로든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의 표지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요일에 하는 일이 주중에까지 확장되게 하려는 노력이었는데, 거기에는 개인 큐티가 아주 중요한 몫을 했습니다. 주중에도 늘 말씀과 기도를 함께 할 수 있는 길로서 성도들이 직접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강조한 것이지요. 겉으로 보이는 행위보다, 날마다 큐티로 주님과 대화하고 내면의 관계를 가지는 것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종교적 행위가 아닌, 개인의 ‘영성’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피터슨의 책은 이러한 배경에서 소개가 됩니다. 피터슨이 소개되기 이전에 한국에서 사랑받은 영성 작가들이 있습니다. 리처드 포스터나 헨리 나우웬이 그 예이지요. 그러한 작가들을 거쳐서 피터슨이 국내에 소개가 되었고, 한국 교회 안에 이러한 토양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피터슨의 책은 환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피터슨의 책이 더 일찍 소개가 되었더라면, 예를 들어 그러한 토양이 한창 형성 중이던 80년대나 90년대 초에 소개되었더라면, 현재와 같은 호응은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