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2년 2월호

독일의 작가 파트린느 쥐스킨스의 ‘향수’라는 작품을 읽고 나면, 괴기할 정도의 광기를 느끼면서 동시에 강렬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중세 시대가 배경인 이 소설의 주인공의 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향수를 만드는 것입니다. 비천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추한 자신을 볼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지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결한 존재들의 미덕을 열망하게 됩니다. 결국 가장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들을 25명이나 살인하여 그들의 머리카락에서 얻어낸 체액으로 향수를 제조한다는 엽기적인 내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악마적인 발상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매력을 느끼고 공감을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얻고자하는 최상의 선과 미는 인간을 통해 얻어진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그르누이는 왜소하고 추한 외모 때문에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그 천한 직업(가죽 세공)을 인해 경멸 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는 길을 떠나 새로운 일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의 천부적으로 뛰어난 후각은 향수제조업에 더 할 나위 없는 재능과 힘이 되어 줍니다. 비참한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존재들, 천진난만하고 발랄하며 아름답고 상냥한,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고 사랑스런 눈길을 받는 소녀들이 그가 열망을 품는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기형적으로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악취조차도) 자신을 견딜 수 없어합니다. 향기를 발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그가 만든 엄청난 향수를 뿌렸을 때, 그가 살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환호하고 사랑과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것이 자신의 본질적인 냄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그는 다른 종류의 냄새를 자신에게 뿌리게 됩니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들, 곧 탐욕, 분노, 이기심, 질투, 음모, 온갖 사악한 본성들을 혼합해 만든 향수를 뿌리자 사람들이 달겨들어 그를 죽이고 맙니다. 자신의 실존이 악취의 근거임을 깨달은 그가 스스로 파멸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과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최인훈 선생의 ‘가면고’ 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인 왕이 거리를 지나가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이는 얼굴들을 보면 그 얼굴 가죽을 벗겨내는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무수한 얼굴들을 자신의 얼굴 위에 씌여 봤지만 모든 얼굴들은 다 녹아 내려 버리고 결국 자신의 얼굴에서 그 수많았던 얼굴들을 발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향수를 뿌리고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상냥함과 친절함, 고상함과 인자함의 향수를 뿌리고 우아한 말투와 경건한 몸짓을 보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대단한 향수도 영원히 지속되며 나의 실존의 향기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에 여전히 시기와 분노가 끓고 있는데, 조롱과 멸시의 감정이 고개를 내미는데 짐짓 사랑과 격려의 말을 늘어 놓는다면 이 위선은 스스로 금새 싫증나고 지치게 만드는 싸구려 향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생전 처음 받아 보는 사랑과 칭찬 앞에서 그르누이가 더욱 절망하고 비참함을 느끼게 된 것처럼, 맘에 들어 덧씌운 얼굴이 금새 녹아버려 낙담하는 왕의 심정처럼, 가식적이고 인위적인 향수의 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할 뿐입니다.


평화를 위장한 평화가 시대를 다스릴 때 사람들은 숨 막힐 듯한 구속을 느끼며, 경건을 위장한 경건은 고인 웅덩이의 물처럼 언젠가는 악취를 발하게 됩니다. 위정자들의 구호나 미래에 대한 회색 청사진을 보며 희망을 강요 당하는 우울한 시대에도, 비록 고통스런 선택일지라도 진실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나의 실존을 직시할 수 있을 때 나는 허위와 가식을 벗어나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나는 위악한 존재이며 동시에 선한 목적을 가진 존재이고, 내게는 악취를 지울 수 있는 의지와 지혜가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세상에 향기를 더하는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나는 세상에 빛을 더하라는 소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거짓됨을 드러내고 더러움과 죄악을 드러내어 빛의 세례로 정결해 지기를 원하는 이의 권유를 받은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사랑은 흉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와 같은 것처럼(고전13:1), 공허한 모든 행위와 삶은 헛되고 헛된 허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은 무취 담담한 우리를 향기 나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변의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주게 만듭니다. 사랑은 공허한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나의 향기는 이웃을 감화시키며 우리의 향기는 시대를 변화시키는 힘을 발합니다. 사랑은 진실을 구하며 진리를 따르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인위적인 향수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과 전 생애가 향기를 품는 존재가 되길 간구 합니다. 완전히 깨어진 질그릇처럼 다시 빚어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미소가 절로 입가에 머무는 삶 속에서 온유함과 인내를 드러내는 인격들이 이루는 소망의 세상, 진정한 평화와 정의가 성취되는 사회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 하나 하나의 존재가 꽃나무처럼 그윽한 향기를 품는 그런 날을 기다리는 일이 저의 기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