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말이라 분주하다. 한학기 내내 학생들이 열심히 준비한 텀 페이퍼를 채점하여 학생들에게 돌려 주는 과정에서 몇 학생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었다. 학생들은 대화중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여학생들은 잘 운다), 몹시 흥분하며 화를 내기도 하였다 (남학생의 경우 잘 흥분하지만, 이 부분은 남.녀가 비슷하다). 한결같이 나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고 비판도 하였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지만 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공통점 하나를 전에와 마찬가지로 금년에도 발견 하였다. 즉 실라버스 (Syllabus; 강의안) 를 대충 읽음으로 오는 문제인 것이다.
학생들이 텀 페이퍼를 작성할때 범하는 몇가지 실수중 하나는 실라버스를 주의깊게 읽지 않는 것이다. 보통 실라버스 에는 교수의 강의 계획서와 기대 및 텀 페이퍼 작성 안내가 나온다. 교수가 실라버스를 작성할때는 보통 세부적인 계획을 학생들에게 제시 하며, 학생들이 그 계획을 잘 따라 주기를 기대한다. 교수가 실라버스를 작성할때는 그냥 하루아침에 기분에 따라 작성하는것이 아니고 전문분야의 특성과 세상환경의 변화에 따라 학생에게 가장 유익할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고민한 후에 작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성된 실라버스는 매해 마다 조금씩 바뀌어 간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거나, 지난해 도움이 되지 않았던것들, 또 학생들에게 혼돈을 주었던것들을 기억하며 보강해 나가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교수는 학생들에게 가장 유익할 과제를 철저히 검토한뒤 실라버스에 학생들이 반드시 다루어야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는다. 따라서 실라버스는 어떤 점에서 학생들이 충분히 소화해야할 아주 귀중한 자료인것이다. 그리고 실라버스는 어떤점에서 교수와 학생이 맺는 계약서 같은 것이다. 어떤 교수는 실라버스 맨 뒷장에 학생들이 “본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었고, 주어진 계획에 동의함”이라는 내용을 적고 학생들이 서명을 하게 한다.
실라버스를 대충 읽은 학생은 어떤 과제가 주어졌는지 그냥 대충 감을 잡을 뿐이다. 텀 페이퍼 쓸때로 대충 이해한대로 쓴다. 이해는 대충 하였지만, 많은 유학생들의 경우 A+를 받으려고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한학기 내내 고생하며 작성한다. 그리고 혁신적인 생각이 떠오를 경우 흥분까지 해가면서 글을 작성한다. 열심히 정성껏 글을 쓴 학생은 텀 페이퍼를 낼때에 A혹은 A+를 기대한다. 그런데 왠 일인가? A+대신 C, D, 혹은 Redo (다시 써라)라는 결과를 받는다. 경악을 금치 못하고, 흥분해 하며, 더러는 울기도 하며, 분노를 가지고 교수를 찾아 간다. 나는 잠도 많이 줄이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고, 수 많은 책을 참고로 하여 연구하고, 또 걸으면서 음식을 먹으면서도 텀 페이퍼만 생각하면서 고생하였는데 내게 돌아온 결과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학생의 경우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혹시 미국인 교수가 내가 동양인이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하지 않나 의심하면서 분개해 한다.
교수의 반응은 간단하다. 나는 너에게 시카고로 가는 가장 좋은 운전길을 연구해 오라고 하였는데, 너는 뉴욕으로 가는 길을 적어왔다. 그러나 네가 적은 뉴욕가는 길은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방법보다 탁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시카고가는 길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이같은 반응은 실제 교수가 그같은 내용의 과제를 주어서가 아니고, 교수가 쓰라고 한 방향을 무시하고 학생 스스로가 추측하고 생각한 방향으로 글을 썼을때 좋은 점수가 나올 수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지난주 내 사무실을 다녀간 티나의 케이스가 아주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티나는 나의 “여가 철학”이라는 과목을 듣고 있다. 그 수업에는 많은 과제가 있는데 제법 점수의 비중이 큰 과제중 하나는 크리스쳔의 관점을 가지고 여가 (Leisure)의 철학을 논술하라는 것이다. 그같은 관점을 돕기위해 그동안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운 기독교 세계관으로 여가를 바라 볼것과, 성경의 원칙과 여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여가의 관계등에 대한 Guiding Questions도 실라버스는 분명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티나가 준비한 글은 여가의 철학이 아니였고, 치료레크리에이션의 철학이었다. 크리스쳔의 관점도 고려하지 않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었다. 무엇이 티나로 하여금 본 과제의 특성과 빗나간 글을 쓰게 하였을까 이해 보려고 잠시 애써 보았다. 아마도 내가 치료레크리에이션을 주로 가르치는 교수라는 인상 때문이었을까? 본인의 전공이 그것이니 이번기회에 철학적 정의를 해보고픈 개인의 욕망때문이었을까? 어찌하였든 티나는 과제의 요구사항을 철저히 빗나간 글을 쓴 것이었고, 이로 인해 본인이 기대하지도 않던 권총 (F)을 하나 찬 셈이 되었다.
실라버스를 대충 읽는 다른 케이스가 있다. 어제 사무실을 다녀간 캔디스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의 경우가 아주 적절한 실례가 될 수 있다. 캔디스는 페이퍼의 방향은 제대로 잡았지만 교수가 실라버스에 요청한 내용을 철저히 다루지 않았다. 캔디스가 듣고 있는 과목은 치료레크리에이션의 원리라는 과목으로서 요즘 미국의 Health Care System의 Issue에 대한 과제가 있다. 실라버스에는 그 과제에 대한 목적과 요구항목이 구체적으로 적혀있고, 이를 강의실에서 설명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Issue의 선택은 학생이 교수의 동의하에 이루어질 수 있도록 되어져 있었다. 그리고 Issue에 대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 Issue를 자세히 소개 하게 하였고, 선택된 Issue와 관련된 과거 역사적 사실들, 현제의 상황,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적 요소, 연구결과를 중심으로 한 제언등을 다루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항목은 특정 점수를 부여하게 되어 있어서 그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으면 점수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캔디스의 경우 Issue에대한 나의 동의는 받아내었지만 내가 연구하라고 실라버스에 요구한 구체적 항목들은 일부 다루지 않았다. 대신 내가 실라버스에 요청하지 않은 다른 항목들을 아주 장황하게 조사하여 보고 하였다. 요구한 항목중 잘 다루어진 부분은 실라버스에 적힌대로 점수를 받았지만, 다루지 못한 부분은 아무런 점수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본인이 열심히 썻으나, 내가 실라버스에서 요청하지 않은 부분에서는 아무리 훌륭하게 연구하였어도 아무런 점수를 받지 못했다. 받은 점수를 모두 합해 보니 많은 부분에서 점수가 부족하여 결국 캔디스는 권총 (F)을 하나 받아야 했다.
실라버스를 철저히 읽는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주 당연한 것을 소홀히 함으로 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이 있다. 무엇을 만들고 조립할때 그 물건을 만든 회사가 소비자를 위해 만들어 놓은 “매뉴얼”을 보고 그대로 따라 가면 쉽게 조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메뉴얼을 무시하고 나의 꾀와 직감을 가지고 그냥 조립하려고 할때 당하는 어려움이 좋은 예이다. 기본과 당연한것을 무시하지 않고, 조그만 것 일지라도 성실한 크리스쳔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완벽한 실라버스를 만들어 주셨다. 어떤 이들은 그 하나님의 실라버스 대로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무시하고 살아 간다. 또 어떤 이들은 일부는 따르지만, 다른 부분은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간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실라버스 대로 (성경대로) 살아 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추측하고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좇는가? 인생의 실라버스를 충실하게 읽고 주님을 좇아야 할 것이다. 당연한것을 무시하는 삶을 살아 가다가 도착지 (finish line)에 섰을때 나의 달음박질이 헛된것이 되면 어찌할 것인가? 한번 심각히 우리의 삶을 돌아 보아야 할 것이다.
운동 경기를 하는 사람이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월계관을 얻을 수 없습니다 (딤후 2:5; 표준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