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의 아내로 살아 온 지 벌써 8년이다. 아주 간단한 짐 꾸러미 네 개만 들고, 처음 미국에 발을 내려 놓을 때는, 마치 여행이나 소풍을 온 것 같이 홀가분한 기분이었었다. 그리고 한 삼,사년은 그런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연 수가 많아져 가면서 나에게 들기 시작한 생각은 이제 이쯤에서 이런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혼 때의 군대생활, 그리고 연이어진 유학생활, 난 참 많이도 이사를 한 편이었다. 십일년 동안 아홉번을 이사했으니 말이다. 늘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은, 나쁘지 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무언가 새로 시작한다는 것에는 ‘적응’이라는 부담이 적잖이 있었다. 큰아이는 지금 겨우 4학년이지만, 공립학교를 4번이나 전학한 경험이 있다. 큰 아이에 대해 감사한 것은, 재미있는 성격 덕에 가는 곳마다 친구를 쉽게 많이 사귀었다는 것이지만, 미안한 것은 좋아하는 친구가 생길 적마다, 친구를 추억에 담아두고 이사를 해야 하는 일을 겪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욕구가 나를 심하게 몰아붙일 때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신없이 달려온 유학생 가족으로서의 이곳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심정이 정점에 달할 때마다, 하나님은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도록 하셨다.
셋째 아기를 사산한 것이 벌써 이년 반 전의 일이다. 칠개월을 뱃 속에서 잘 자란 아기를 잃을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해보질 못한 일이었다. 걱정 보다는 호기심과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걸어 들어 갔던 병원의 복도를, 사일 뒤에는 애기 대신 소국화만 한 다발 가슴에 안고 휠체어에 앉아 되돌아 나왔었다. 병원 밖은 막바지 가을의 단풍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내 아기가 죽었는데, 하나 변한 것 없는 사람들의 행복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하나님, 전 참 욕심 없는 사람이에요. 늘 하는 한 가지 기도는 행복한 가정, 건강한 가족이잖아요. 근데, 왜 그것을 가져가세요?… 감사가 되질 않던 기도의 시간들이었다. 태어났지만, 한번도 떠 보지 못했던 눈, 소리 없던 입, 너무 조그맣던 손, 가만히 내 볼을 대 보았을 때 아직도 따뜻하던 작은 볼… 눈에 사진이라도 새겨 넣듯 그렇게, 죽은 아이의 모습을 열심히 보아 두었었다. 쉼표는 한번쯤 숨을 고르고 주위를 돌아 보라고 주셨을 터인데도,난 더욱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쉼표의 타격은 정말 마침표를 찍고 어딘가 정착하고 싶은 열망만을 더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채 일년이 지나기 전인 여름에, 한국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유월까지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지병의 악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또 한번의 이사를 앞에 두고 있었던 난, 짐 꾸리는 일 대신 대기표를 들고 한국을 향했다. 언제 돌아가신다 해도 같은 생각이 들었겠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다행이 아버지의 병은 고비를 넘기고, 호전되어져서,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일주일 후에는 퇴원을 하게 되셨다. 병실에서지만, 결혼 후 처음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흘동안 하루종일 아버지와 같이 있으면서, 참 좋았던 것 같다. 같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경도 같이 읽고, 산책도 모시고 나가고,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실 때는 그 옆에서 나도 누워서 쉬곤 했다. 유교집안에서 자라셔서 표현하시는 일에 약하신 아버지는, 가쁜 숨을 고르시면서도, 내 이야기에 크게 소리 내어 웃으시곤 하셨다. 열흘 후 며칠만 더 있기를 원하시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대기표라서 다음의 가능한 탑승 날짜가 구월 십일이 지난 뒤라는 이야기에, 그때까지 미국에 돌아오지 않고 거기 있을 자신이 없었다. 새로 이사한 집의 짐을 정리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고, 애들이 새로 전학하는 학교에 처음 가는 날, 마음으로라도 의지가 되도록, 엄마가 거기 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반년만 지나면,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는 삼월이 되면, 시댁의 행사로 온 가족이 한국에 다시 나올 예정이었고, 그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자고 그랬다. 아버지는, 내년 봄이면 나올 외 손주하고 체스를 같이 할 수 있도록 연습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때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연장된 생명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열심히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사시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감사의 기도를 눈물로 드렸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연장해 주신 삶은 불과 한 달이 채 되지 않으셨다. 구월에 다시 중환자실에 들어가신 아버지는 끝내 내게 유언 한 말씀 남기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왜 하나님은 아버지가 증거 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셨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을까? 그리 빨리 거두어 가실 거면서, 다시 살았다는 희망은 왜 주셨을까?… 한국을 떠난 세월동안, 부모님들은 늙어 가셨고, 함께 많이 시간도 보내지 못하시고는 돌아가시는 구나 하는 생각에, 날 한국을 떠나게 한, 공부하는 남편이 미워지기도 하고, 미국생활이 서러워지기도 했다. 이쯤에서 쉼표는 차라리 숨 막힘표 같은 것이 되어져 있었다.
셋째 아기의 일주년 날, 내 머리에는 아버지를 추도하는 흰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날 난, 의외로 우리 아이들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만져 보았던 뱃 속 아기의 움직임이 어떠했었는지, 그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웃었었는지, 어떻게 이름을 불러 주고, 노래를 불러 주었었는지,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동생이 지금도 얼마나 그리운지, 이야기들을 하였다. 추수감사절 프로젝트로 터어키 모양의 종이 위에 감사의 내용을 적고, 온 가족이 다 같이 털실을 짤라 꾸몄었는데, 그날이 금요일이었는데, 주일날 아기는 사산되었고, 월요일 날 그걸 들고 학교를 간 큰애는 ‘new baby’란 항목을 읽을 때 ‘in the heaven’을 덧붙여 말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을 기억했다. 외할아버지랑 한국가면, 같이 낚시 가기로 했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다고 섭섭해 하기도 했다. ‘하늘나라 갔다’는 말을 ‘하늘 날아갔다’로 이해해서, 동생이나 외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날개 짓을 하던 둘째 아이는, 일년 새 많이 커서 ‘하늘나라’를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고,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와 동생이 하늘나라에서 만나면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난 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을 추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감사했다. 셋째 아이가 비록 뱃 속에 있는 동안이었지만,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었는지를 생각하며 감사했고, 살아 태어나지 못할 만큼만 계획되어졌던 그 아기를, 이렇게 많은 것을 추억해 줄 수 있는 우리 가정으로 보내주신, 그 아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도 감사했다. 한 달도 채 안된 아버지의 연장된 삶이었지만, 그 허락해 주신 기간을 통해, 열흘이나 함께 지내며 기뻐할 수 있도록 해주신 사랑에도 감사했다.
버거웠던 쉼표들은, 마침표를 향해 정신 없이 달려 가고 있던, 정착을 향한 내 열망에, 감사의 눈을 띄워 주었다. 생명이 참으로 유한하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 뒤에 ‘하늘나라’라고 하는 더 행복하고 큰 축복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쁘게 했다. 사랑하는 셋째 아이와 아버지가 계신 그곳이.
내 집에 도착해서 정착하기 전까지는 이곳은 뜨내기 삶 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이곳의 삶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주신 축복이라면, 지치고 힘든 삶이 아니라, 정말 여행이나 소풍 같이 여유롭고도 짧은 날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했던 천 상병 시인의 <귀천> 한 절이 떠오른다. 처음 시작하던 마음은 ‘어디든 보내시는 곳에 간다’ 였는데, ‘정착’하고 싶은 내 욕심이 그 동안 그걸 덮었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었던가 보다. 정말 마침표를 찍는 날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날일 터이니, 그 전까지는, 난 쉼표를 자주 찍으며, 쉼표 때마다 숨을 고르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살아야 겠다. 더 사랑하고, 더 감사하고, 그 곳이 어디든지 참 행복해 하며 살아야 겠다는 생각과,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진정 내 집에 정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알아 가고 노력해 가야 할 나를 향한 계획과, 내가 누리고 기뻐하며 감사할 축복이, 이곳에 이미 예비 되어져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