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9월

고백컨대, 저는 삶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쓰는 것이 생활에 큰 분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님과 함께 또 사랑하는 이들과 더불어 엮어지는 매 순간순간이 하나 같이 가슴 벅찰 정도로 행복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꼬박꼬박 적어두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스란히 잊어버릴 정도로 흥겹고 신나는 일들이 차고 넘치는 것이 바로 저의 삶입니다. 말하자면 적음직한 삶이지요. 그런 재미난 일들의 연속이기에 제 삶에는 권태란 없습니다. 아내도 저의 이러한 점을 늘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온 시간들을 부지런히 이야기로 변환하는 또 다른 까닭은 “시간은 이야기로 엮일 때 비로소 인간적 시간이 된다”고 말한 리쾨르(Paul Ricoeur)에게 십분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인간적인 시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는 형태가 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니, 학업과 가정의 돌봄이라는 이중고가 있음에도―복상에 원고를 게재하는 여부를 떠나―쉼 없이 글을 쓰는 것은 제 삶이 조금은 나눔직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올 연초부터 이어진 적음직한 날들과 나눔직한 이야기들 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 보았습니다. 읽는 모든 분에게 적음직하고 나눔직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1월 3일 어제부터 내린 눈이 제법 수북이 쌓였다. 이번엔 엄청난 눈이 올 거라고 한다. 이곳은 눈도 많은데다가 나무도 많고 낮은 주택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파트숲인 한국에서는 설악이나 한라에서만 볼 수 있는 멋들어진 설경을 창 밖에서도 비스므레하게나마 맛볼 수 있다. 날이 춥다는 핑계로 해민이를 겨울 내내 좁다란 집에만 가둬두는 것이 대체 미아내서 오늘은 옷을 차려 입히고 같이 베란다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었다. 작다란 베란다에 고인 눈만으로도 눈사람 하나를 낙낙히 만들 수 있었다. 눈사람이 형태를 갖추자 해민이는 제 엄마한테 당근을 달라고 한다. 책에서 본대로 당근을 꽂아 빨간 코를 만들려는 심사다. 브로콜리로 초록색 눈을, 바나나 껍질로 노랗게 웃는 입을 만들고는 드럼 스틱으로 팔을 꽂은 다음 털장갑을 걸고 목도리를 둘렀더니 정말 근사한 눈사람이 되었다. 녹기 전에 사진기에 담아두었다.

평소에는 15불이 넘는 왕립온타리오박물관(Royal Ontario Museum) 관람이 금요일 오후 4시 반부터는 무료이기 때문에 해민이를 데리고 길을 나섰다. 참 잘 해놨다는 말이 절로 나왔고 그 규모만큼 볼거리도 엄청났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것들을 실물로 보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해민이도 신기한 게 많은지 계속 “압바, 엄마, 이것 좀 봐요!”라는 말을 줄곧 해댄다. 이어 박물관 근처에 사시는 박윤만 목사님/황윤정 사모님 댁에 저녁 먹으러 갔다. 차려놓은 저녁도 맛났고 오가는 얘기도 기름졌다.

1월 5일 오늘부터 성산교회 한글권 중고등부를 맡아 첫 설교를 했다. 신학생 출신들도 전도사 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나의 경우는 가만히 서 있는 내게 하나님께서 오셔서 “놀면 뭐 하냐. 예서도 양을 먹여라”고 기회를 가져다주신 경우다. 이를 두고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약간은 재정적인 도움도 되겠지만 그보다는 배운 것을 고여 두면 썩을까 저어하여, 목양을 해가며 책을 펴야 현장에 붙박은 공부가 되리라 생각하여 사역을 하기로 결정했다. 또 이참에 이민 교회와 이민 사회라는 것을 좀 더 깊이 경험하고 배우고 싶다.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많은 통찰과 화두를 던져줄 것이라 믿는다. 오늘 첫 성경공부 시간에는 창세기 강해를 하고,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설교를 했다. 오랜만에 양장(洋裝)을 하니까 몸이 죄이는 것이 꽤나 불편하다. 그나저나 우리 아내는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됐다(으~ 닭살).

1월 7일(禍) 다른 학교로 옮길 것인가, 전공을 변경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멘토(mentor) 교수인 아드리엔느(Adrienne), 학장(dean)인 밥(Bob), 교직원인 팸(Pam), 위클리프(Wycliff)의 브라이언(Brian), 그리고 학교의 여러 친구들까지… 그러고 보니 오늘 참 많은 이의 소리를 들었다. 이런 낱소리들이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공부길을 바꾸고자 하는 심사가 내 욕심의 소리인지, 아니면 주님의 진실한 음성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는 갖가지 소리가 있다. 들을 줄 아는 이에게 이 소리는 선물이다. 오감에 민감한 나이기에 보통 소리에 대한 반응도 아내보다는 내가 더 세심한 편이라도 믿어왔지만 간혹 아내가 나보다 소리에 더 민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시내나 바다가 아닌 화장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예쁘다는 것을 알게 해준 것은 아내였다. 물소리가 듣고 싶은 밤이면 그래서 일부러 세면대에 마개를 막고 수돗물을 아주 살짜기 틀어서 물방울이 오륙초에 한 번씩 똑똑 듣게 만들어놓거나 세면대에 수돗물을 가득 받은 다음 마개를 약간 헐겁게 꽂아서 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내게 하기도 한다. 그렇게 점점 물소리에 익숙해지면 차가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르고 뜨거운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 누리에 60억이 넘는다는 그 사람들의 목소리 중에서 아내의 소리를 찾지 못하는 적은 없다. 무리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아내의 목소리는 헤맴 없이 착착 내 귓바퀴를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느냐로 친밀도를 측정하고, 상대가 내 목소리인지 기연가미연가하면 대번 서운해 하는 것이다. 살다보면 오늘처럼 주님의 소리를 감별치 못할 때가 있다. 그것이 내 육신이 낸 소리였는지, 주님의 음성인지 헷갈릴 적이 있다. 그럴 땐 참으로 당혹스럽다. 얼마나 주님과 가깝지 않았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감별하지 못할까? 자기 목소리를 못 알아본다고 삐치는 연인처럼 주께서도 섭섭해 하지 않으실까?

“나의 영혼아, 잠잠하라. 바람과 물결은 이 땅에 내려와 자신들을 다스렸던 그분의 음성을 아직 기억하고 있도다.”(카테리나 폰 슐레겔, ‘나의 영혼아, 잠잠하라’ 중에서) 바람과 물결도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다스렸던 그 분의 음성을 기억하고 지금도 순종하고 있건만, 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날마다 나와 교제하시기 위해 오늘도 기꺼이 나만큼 낮아지신 그 분의 소리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니 연기독(戀基督, 그리스도를 연모한다)이라는 우리집 가훈 첫 줄이 새삼 무색해진다. 더구나 때로는 아무도 없는 듯한 느낌이 드는 타지에 나와 변두리의 삶을 꾸려가면서 그 분의 음성조차 변별치 못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캄캄하고 섬뜩한 일인가?

1월 17일 오늘은 체감기온이 30도라는데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서 브라이언 월시(Brian Walsh)의 Guided Reading 수업에 들어갔다. 영하 24도까지 내려가던 날도 자전거를 탔으니 뭐 대수랴. 온 몸을 옷가지로 완전무장 해서 칭칭 감은 채 얼굴만 살짝 드러내놓고 자전거를 모는데 그 옷차림이 얼마나 웃긴 줄 모른다(사진기로 박아놓지 않은 것이 아쉽다. 내년을 기대하시라, 하하). 아내는 박장대소를 하며 일명 ‘토론토 패션’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자전거를 타고 온 걸 보고는 브라이언이 “You’re crazy!”라며 놀란다. 이번 학기 읽을거리는 브라이언의 원고로 그 아내 실비아와 함께 쓴 것인데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삶의 세계관을 골로새서를 모색해본 것인데 재미있어 보인다. 집에 오는 길에 크리스티 고아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블로어 정육점에 들러 고기를 샀는데 마침 현찰이 모자라서 학생증 맡기고 외상으로 사왔다. 집에 오는 길은 정말 너무 추웠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이 환하게 맞아주자마자 몸이 단번에 다 녹는 기분이다.

2월 11일 혹시 화면보호기 편지라고 들어보셨나요? 연초부터 아내는 6월에 있을 간호사 시험 준비에 열심이다. 내가 데스크탑을 장악하고 있는 관계로 아내는 대신 화면까지 깨진 늙은 노트북을 켜서 한컴사전으로 단어를 찾아가며 차근차근 연습문제를 풀고 있다. 그런 아내가 기특하고 어여뻐서 어케 격려를 해줄까 궁리하다가 화면보호기 편지를 착안하였다. 화장실을 간다든지 하는 이유로 노트북을 5분 이상 쓰지 않으면 자동으로 화면보호기가 뜨는데 거기에다가 짧은 편지를 적어 넣은‘움직이는 텍스트’를 가동시키면 내 편지가 한 자 한 자 눈앞을 지나가게 되고 상대는 “어, 이게 뭐야?”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하여 이런 내용의 글을 남겼다. “순영, 살림하랴 공부하랴 힘들쟈? 당신이 늘 우리와 함께 있어주고 단 마음으로 섬겨주는 것이 요샌 한결 더 고맙게 느껴지네. 늦게사 철이 드나?^^ 당신은 참 좋은 내 짝이자 동지야. 내내 우리 집 ‘안’의 환한 ‘해’로 남아줘요. 나도 당신만을 올곧게 사랑할 테니” 신혼 초엔 갖은 방법으로 아내를 기쁘게 해주었는데 간만에 풋풋한 방법으로 아내에게 사랑을 전했다.

2월 1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가시화되자 토론토에서도 반전집회가 열렸고 우리 가족도 반전의 목소리에 가세하기 위해 자리에 함께 했다. 다운타운인 던다스 스퀘어(Dundas Square)에는 낮 기온이 15도에 체감기온 30도임에도 8만명이 운집했다. 우리는 피켓이 없어서 누가 두고 간 피켓을 들고 행진했다. 앞면에는 “Canadians say, No to War!”, 뒷면에는 “Stand up to the Empire before it’s too late!”라고 씌어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바로 밑에 캐나다 공산당(Communist Party of Canadian)이라고 적혀 있는 바람에 엉겁결에 공산당원이 되었다(^^ 혹자는 어케 공산당의 피켓을 들 수 있느냐고 따질지도 모르겠지만 자유총연맹의 피켓을 드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해민이는 혹한 데모 3회의 경력자답게 꿋꿋이 잘 버텼지만 아내가 너무 춥다고 야단이었다. 1시간 가량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다가 무등을 탄 채 해민이가 잠든 것이 안쓰러워 오늘은 이만 접고 전철역 안으로 피한(避寒)하였다. 아내는 실제로 손이 벌겋게 얼어서 한동안 굽혀지지가 않았다. 때마침 해민이가 쉬가 마렵다고 해서 항상 상비하고 다니는 쉬통(일명 휴대용 화장실)에다가 쉬를 뉘였다. 노란색 액체가 차 있는 물통이 좀 엽기적이긴 하지만 따끈한 것이 손을 녹이기에는 아주 그만이었다.

전철 안에서도 이곳 캐나다 사람들이 설마 이것을 오줌이라고 생각이나 하랴 싶어 아내와 나는 계속 쉬통을 주물럭거리며 손을 녹이는 대담함을 과시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거대한 쇼핑몰인 이튼 센터(Eaton Centre)에 가자 아내는 언제 힘들었냐는 듯 눈요기(window shopping)를 하느라 룰루랄라 아주 신이 나서 돌아다닌다. 근데 사람들이 우리를 흘낏흘낏 쳐다보는 것이 심상치가 않다. 알고 보니 다음 집회 때 또 쓰려고 피켓을 들고 다녔는데 바로 그 공산당 라벨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었다. 공산당 라벨을 떼고 반전구호만을 남기자 그제야 쳐다보는 이들의 시선이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도 공산당은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 집에 가고 싶은데 아내는 물 만난 물고기가 따로 없다. 이튼 센터 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애들 마냥 오르락내리락 하며 재미를 본 다음, 식원(食園, food court)에서 그리스 음식으로 배를 채운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3월 19일(?) 썩을 놈의 부시와 그의 제국(Empire) 때문에 전운은 고조되고 있다. 몇 개월째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에 대한 감정이입으로 대체 잠이 안 온다. 지난주 가정 예배 시간에 이라크 국민들을 위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마음이 내 안으로 들어온 다음부터 말할 수 없는 탄식이 터져 나오고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은하가 이라크로 갔고 영신이 누나도 뒤를 이었다. 조국의 보수교단이 친미 기도회를 여는 꼴불견을 연출하는 마당에 두 사람이 너무나 귀하고 고운 결단을 내려주어서 고맙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복음주의권에서 자라난 자로서 이 땅과 이 나라에 앞에서 늘 송구스러움만을 느낄 뿐이었는데 두 이 덕분에 이 민족 앞에서 조금은 덜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부디 우리의 기도와 응원을 씩씩하게 즈려 밟고 가길 빈다. 영신이 누나와는 막역한 사이인데다가 양쪽 집 애들이 같이 어린이 뮤지컬을 본 적도 있어 가족을 두고 떠나는 누나의 마음이 중량감 있게 느껴진다. 나 역시 한국에 있었다면 함께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터져 나온다. 아내 역시 한국의 처형과 통화를 하면서 해민 압바는 맘만 먹으면 처자식을 남겨두고라도 갈 사람이라고 한다. 영신이 누나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누나, 잘 다녀와요!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이라크로 떠난다고 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던 요즈음, 누나가 날 대신해서 떠난다고 생각하니 한결 기쁘네. 몸 성히 다녀와요. 임마누엘이라는 단어가 여정 내내 살 속 켜켜이 스며들도록 기도할테니… 토론토에서 총

기독교 우익과 시온주의의 입김 아래 석유 에너지의 확보, 침체된 군수산업의 활성화, 중동지역 재편 등의 노림수, 아니 삼척동자도 다 아는 야욕을 위해 추진되고 있는 이번 전쟁이 만약 터진다면 미국은 필히 몰.락.의.길.을.걸.을.것.이.다. 열방이 야웨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교만해질 때 그 분의 심판을 자초했듯이 미국 역시 저러한 교만으로는 패방의 선봉밖에 되지 못함을 잠언은 확실히 밝히고 있다.

4월 8일(逢) 아내랑 만나지 5,000일째 되는 날이다. 이럴 수가 있나. 인간 박총이 이런 날을 깜빡하고 말다니… 하루가 거의 맺어가는 시점에서야 아내가 보여준 미소로 알게 되었다. 선물도 아무런 축하 의식도 나누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사랑해’라고 5000번 말한 편지를 썼다. 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나의 恩海, 순영! / 우리 만난 지 5000일을 만나 그저 주님께 감사드려요. / 그 오천일 동안 참으로 우리를 괴여 주셨지요. / 우리의 사랑은 그동안 얼마나 자랐는지… / 어찌보면 많이 큰 것 같지만 달리 보면 첫날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깜빡 하고 챙기지 못한 나를 이해해줘요. / 요샌 1일1건 사랑 표현도 거의 못(안)하고 있지만 / (결혼 5년차면 자연스러운 건가? 이벤트보다는 삶에 배인 사랑?!) / 그래도’날’을 챙기는 거야 내 전공이라 생각했는데 / 막상 이렇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 자못 큽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순 없어서 뜨거운 동품을 한 후에 이렇게 이메일을 띄웁니다. / 우리가 만난 뒤로 최소한 하루에 한 번 정도 이상은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 적어도 사랑한다고 생각했을 거라고 믿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5천 번 써봅니다.

짐작하다시피 일일이 다 쓴 것이 아니고 복사 기능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 당신 역시5천 번을 소리 내어 ‘사랑해’라고 읽을 필요까지는 없어요. / 그러나 최소한 10번 정도는 소리 내어 ‘사랑해’라고 읽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복사 기능을 사용해서 ‘사랑해’라는 말을 늘려간 것처럼 / 우리 사이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랑한다는 생각과 말이 습관처럼 ‘자동화’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 오천 번의 ‘사랑해’라는 글은 복사 기능을 사용했지만 / 실제 삶에서의 사랑은 복사 기능이 없는 일일이 손을 사용해 수고로이 쓴 것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이제 곤해서 자야겠어요. / 그럼,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 (중략) ……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아 참, 자정이 넘었으니 한 번 더 써야겠네.

“사랑해.”

4월 16일 어제와 오늘 이틀 간 토론토 근교 오렌지빌(orangeville)에 위치한 생태수양관(ecology retreat centre)으로 피정 다녀왔다. 외국에 와서 처음으로 수양관을 와 봤고 생태수양관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야트막한 야산 사이로 냇물이 흐르는 골짜기에 세워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매번 평평한 곳에서만 지내다가 이른 아침 산이라고 부름직한 곳을 거닐다보니 한결 기쁨이 컸다. 그렇지만 토론토에 온 뒤로는 아직도 나무들에게 한 마디도 듣지를 못했다. 한국에 있을 적에는 나무들의 또렷한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땅이 악인을 토해낸다는 말씀도 있듯이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하다보니 나무들이 나와 대화하기를 꺼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4월 19일 같은 동네에 사는 실비와와 브라이언 선생님 부부가 다 감기에 걸려서 두 딸 메들린과 리디아를 데리고 나와 해민이랑 오후 내내 놀았다. 먼저 시데베일(Cedarvale Park)에 가서 축구를 좀 하고 우리집에 와서 장난감 갖고 놀았다. 역시 애들은 말이 안 통해도 잘 논다. 배가 고플까 싶어 간식을 좀 먹였다. 리디아는 새우깡이 맛있다며 봉투째 제집에 갖고 가서 먹었다. 해민이 녀석은 사내애들하고 놀다가 성이 날작시면 막 치고 박기도 하더니만 누굴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여자애들한테는 늘 신사적이다.^^

4월 22일 해민이 난날이다. 아침에 짜잔~하고 놀래켜 줄려고 아내랑 밤늦도록 풍선불고 카드 쓰고 했더니 피곤하다. 4번째 출일(出日)이라 열네 개의 풍선으로 벽에다가 4자를 만들어 달고 토토로 엽서에다가 축하한다고 썼다. 어제 산 꼬마 케익에 불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엄청난 규모의 중고품 백화점인 밸류빌리지(value village)에서 각각 3불과 1불을 주고 산 농장과 목욕용 배, 그리고 달러마트에서 2불을 주고 산 농장동물세트를 선물로 건넸다. 낮에는 아내가 미역국을 끓여줘서 맛나게 잘 먹었다. 해민이는 늘 우리의 기쁨이요, 감사 제목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토록 사랑스러운 자녀를 주셔서 주님께 늘 고마울 따름이다.

4월 23일 1월달부터 해민이는 뒤뜰과 연못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동시집 <꽃씨 안이 궁금해>를 보다가 연못 그림만 나오면 갑자기 숨이 가빠지면서 물고기랑 올챙이가 헤엄치고, 개구리랑 오리도 같이 사는 연못이 있는 집에 살았으면 좋겠단다. 연못 주위엔 돌멩이도 가지런히 놓여 있고 큰 사과나무가 있어서 사과도 따먹고 나무 위엔 나무집도 지어서 거기에 올라가 잠도 자고 놀았으면 좋겠단다. 아직은 장난감밖에 좋아할 줄 모르는 네살배기가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간절한 바램이 그대로 내 가슴녘에 와 닿는다. 하루는 눈빛을 반짝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연못 타령을 하는데, 이젠 그 소원이 내 마음까지 움직여 함께 기도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해민이의 기도가 응답되어 어제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하우스(한국으로 치면 단독주택)로 간다. 우리 아파트 관리인인 데이빗과 마우이의 집인데 주께서 두 부부에게 은혜를 입게 해주셨다. 돈보다는 집을 잘 관리해달라며 아파트와 거의 같은 임대료만 받기로 했다. 지금 사는 아파트보다 250불 인상된 1100불이 다소 부담스럽기도 한 것이 사실이나 그만큼 값을 하리라 믿는다.

한국에서도 그랬지만 이곳에서도 주님은 늘 후하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지 않은 내가 전도사가 된 것도 기적이라고 하던데 어떤 이들은 10년 이민 생활을 해도 살지 못하는 하우스에 10개월도 안 되어 들어가 사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신비한 일이라고들 한다. 가만 헤아려보면 우리네 삶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다. 단돈 60만원만 갖고 결혼한 것도 신비한 일이요, 유학 와서 이토록 넉넉하게 지내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어디 그것뿐이랴. 아내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만나 10년을 줄곧 사귄 것도 신비요, 결혼해서 이제껏 애틋하게 살고 지고 해온 것도 신비요, 해민이와 같이 사랑스러운 이를 아들로 갖게 된 것도 신비다.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부터가 신비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숲에서 만난 발자국>의 저자 톰 브라운의 말마따나―조금은 다른 의미로 한 말이지만―인간은 자기 앞에 놓인 신비를 먹으면서 세상을 사는 법이다.

이제 해민이가 집안에서 뛰어다녀도 아래층 울린다며 주의를 주지 않아도 되고, 화분만 몇 개 키우던 나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너른 꽃밭과 텃밭도 가꿀 수 있게 됐다. 아내는 살림하는 사람답게 집에 세탁기가 있어서 너무 좋다며 야단이다.

이사를 이틀 앞두고 있는 오늘, 우리 부부가 한 몸 이룬 후 첫 둥지였던 서울 독산동 공군 부대 철매아파트에서 가졌던 그 마음, 장기복무자에게만 지급되던 그 우풍 심하던 아파트가 우리에게 주어진 다음에 “주님, 이 집은 저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뜻대로 사용하소서. 지치고 힘든 이들이 와서 밥을 먹고 쉼을 누리고 기쁨과 힘을 얻어갈 수 있는 곳이 되도록 이 집을 모두에게 열어놓습니다.” 했던 그 마음, 그래서 교회의 후배들과 제자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던 그 시절 그 마음을 다시 지니게 된다. 이제 5월이면 날도 따뜻해질 것이고, 우리집에서 교회 중고등부 아이들과 같이 먹고 놀고 삶을 나누며 그렇게 어우러지고 싶다. 더불어 이웃들과 학교 친구들 등에게도 편안한 공간으로 기억되는 우리집이고 싶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