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은 어른 목사님들과 같이 미 동부 필라델피아의 한국 식당을 갔다. 어르신 목사님께서 주문하셨다. “여기 식당에 회 덮밥, 빨리
나오지요?” 말 떨어지자 말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도나도 회 덮밥이다. 먼저 와서 멋모르고 다른 것을 시킨 사람들도 슬금슬금 회
덮밥으로 바꾼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었다. 난 그 날 정말 회 덮밥 무드가 아니었다. 아랫배에 살짝 힘을 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냉면 곱빼기! 주문하는 순간, 방안의 체감 온도가 냉랭하게 내려감을 느꼈다. 그 날 냉면은 무척 춥게 먹었다. 미국에서 찍히던
순간이었다.


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이제는 아무도 음식점에서 어른의 눈치를 보면서 주문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 있으면 고지식하고 주체성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자기 구미 당기는 대로 주문을 해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다양성의 강요도 또 다른 종류의 획일성일 뿐이다.


국에 와서 산 지 20여 년이 되지만 지금도 어색한 것은 미국 식당에서 음식 주문이다. 계란 하나를 주문해도 유정란, 노
콜레스테롤 일반계란, 익히는 것도 반숙, 완숙, 노른자 그대로, 노른자 뒤집기, 스크램블드,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는 수도 있다.
후추를 넣어, 말아? 치즈 얹어 줘, 그냥 줘? 토스트는 어떻게, 잼은 어떤 잼, 시럽은 무슨 시럽, 감자는 어떻게, 마치
취조관에게 심문 당하듯 진땀을 뻘뻘 흘린다. 영어가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소소한(?) 것까지 선택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은 세월이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색하고, 때로는 귀찮기까지 하다. 산술적인 선택의 증가가 자유의 확장이 아님을 체득한 셈이다.


약 한국 식당에서, 비빔밥 위에 얹어주는 계란을 미국 식당 주문하듯이 각 손님마다 요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주방장 아줌마에게 뺨
맞고 나오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 식당의 경험이 미국 식당에 뒤진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인의
자유는 주로 식당과 음식의 종류를 선택하는 데 국한된다. 그 이상은 식당의 재량에 맡긴다. 알아서 잘 해 달라는 것이다. 식당과
주방을 믿고 자신의 식탁을 맡기는 것이다. 미국인으로선 대단한 믿음의 결단일 수가 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못 믿을
바에야 왜 식당을 가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자유의 과실
그래서 한국인은 강요된 선택의 확장만으로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선택의 확장까지도, 자유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선택의 자유보다 신뢰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신뢰가 자유에 선행할 때 자유가 자유스럽게 다가온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선택을 존중하여 줘야 할 이유는 그런 임의의 자유를 누리게끔 창조부터 설정하여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는 정도가 아니라 환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 교감을 가져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조의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처음 당부는 동산 안의 각종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큼은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람에게 준 자유의 선택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자유는 열외로 두셨다. 만들어진 사람의 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런
설정을 거부하고 하나님같이 살고자하는 이들이, 오히려 사람답지 못한 모습으로 전락된 모습들이 인간사에 질펀하게 어질러져 있다.
자유가 오염될 때 증가하는 것은 고통의 선택이었다. 한가지 금령은 만가지 자유를 누리기 위한 함축된 경고문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가장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입장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신 사람의 입장에 설 때라는 것을 최소단위의 금령이 상기시켜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