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관심은 한국인이 신앙, 인생, 세계와 사람들을 접근할 때에 어떤 특색이 있느냐는 데 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의 신앙 형태가 한국인이라는 기본 틀 안에서 움직인다는 자 인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이해하고, 그 문화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어떻게 제자리를 잡아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특정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숙제이다.


리는 우리 속에 들어와서 사는 다민족, 또 우리가 찾아가서 섬겨야 할 다민족에게 한민족은 어떤 특징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하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복음이 어떻게 오염된 민족의 모습들을 정화시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언약의
천국백성의 모습으로 승화시켜 가는지 담담히 정리 해 볼 이유가 있다. 그 과정적 어색함과 초라함까지라도 말이다. 복음은 겉치레로
감싸왔던 선비의 도포자락을 세마포 흰옷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수가 그 일을 한다. 진짜 백의 민족이 탄생하는 것이다.

씨는 땅을 먹고 자란다


릴 적 출옥성도 손 양원 목사님의 옥중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인 재판관이 손 양원 목사님께 ‘어째서 내선일체로 다른
기독교인들과 같이 일본적 기독교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손 양원 목사님은 대답하기를, 일본은 조그만
간장 그릇 같은데, 기독교는 천지 만한 바윗돌이다. 그런데 이 간장 종지 같은 그릇에 바윗돌을 담으려 한다면 어떤 것이
깨어지겠는가? 그래서 일본의 노력은 풍비박산으로 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한다. 복음이 씨앗이라면, 민족성과 문화는 그
씨가 먹어야 할 토양이다. 씨는 땅 속에 들어가도록 심겨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씨는 씨고 땅은 땅이다. 그 씨가 토양을 먹으면
생명이 자라난다. 반대로 토양이 씨를 먹을 때에는 토양만 커졌을 뿐이다.


국인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받아들인지도 구교 200년, 신교 100년의 역사가 지났다. 세계 선교사의 유례 없는 성공사례로
자찬하지만, 너와 남의 집을 가릴 것 없이 곳곳에서 한국 교회의 오염된 문화, 지도자, 교인들이 쏟아낸 오물도 세계에 그득하다.
그리고 그 배설되는 오염에도 한국인 적인 공통점이 있다. 대단한 저력이다.


리의 방심을 타고, 한국적 기독교가 부정적인 줄기를 타고 형성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반만년 민족을 괴롭혀왔고
병들게 했던, 독특한 한국적 병폐가 교회 안팎을 둘러싸고 옴짝달싹도 못하게 얽어 매고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말하는
소리에 선지자적 권위도, 지혜자적 혜안도 상실하게 되었다. 장독 안을 맴도는 메아리처럼 그런 하릴없는 구호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유기농장 대한민국


렇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이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누가 8장). 하나님의 밭도 유기농업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풍성한 유기농 거름을 자체 생산하는 민족이다. 생명을 주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가 한국인의 문화와 민족성을 거름처럼
먹어야 한다. 토양은 한국인의 토질인데, 피어나는 것은 예수의 꽃이 되어야 하고, 맺히는 것도 예수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
그래야 세계교회와 역사에 누(累)가 되지 않고, 보탬과 유익이 되는 자리 매김을 할 수 있다. 반만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세계역사가 조용한 주목을 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한민족을 사랑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면, 이보다 더 이상 귀한 대우가 어디
있겠는가?


가 존경하는 목사님의 사모님은 자신을 예수 향기로 소개한다. 그 분과 목사님은 성년이 되어서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와는 무관하게 지어졌을 수향이라는 이름을 예수 향기로 전환시키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이름의 본뜻을 예수가 살려준다.
예수의 마음이 한 민족의 심성을 먹어서 예수의 향기가 나는 인격과 공동체로 민족이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주의
창조물로서 주어진 우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알아 가는 잣대와 시각을 성경 속의 복음에서 찾아야 한다. 민족혼 속에 이미
들어와 계시는 예수의 복음 이야기를 캐내어야 한다. 수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 향기는 전달자의 인격과 삶을 통해 전달된다.
그래서 성경기록도 전달자가 기계적으로 책을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인생에 일어난 사건들과 그런 와중에 일어난 깨달음과
계시들이다. 그래서 기록자들을 알면 성경이 보이고, 성경이 보이면 기록자의 세상이 느껴진다.

성경도 유기농을 한다


경이 다른 경전들과 다른 특징은 다른 종교에서 내세우듯이 전면에 내세워서 미화하는 인물들이 없다. 성경은 그들을 미화하기를
철저히 거부한다. 지극히 사적이라 할 수 있는 치부와 오점들을 가릴 것 없이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된다. 일반 세속의
기준으로 따지면 혹독한 유명세를 치르는 것이다. 안면이 뜨거워서 감히 다루기가 힘든 주제들을 성경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놀라운
기독교의 진리는 그런 흠을 가진 인물들을 가지고 역사와 나라를 펼쳐나가는 신의 고집이다.


자가가 십자가인 것은 예수의 몸이라는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는 십자가는 사형장의 형틀에 불과할 뿐이다. 혐오스러운
부패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일그러진 고통의 현장이다. 예수는 여기에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씨앗이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완벽의 중압감에서 개인 뿐 아니라 민족정기를 해방시킨다. 낮은 땅에 처하는 자는 그만큼 높고 큰 하늘을 머리 위에 지고 살아 갈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개인이 모자란 점이 있듯이 민족도 마찬가지다. 완벽한 척 하느라 애쓰지 않아도 된다. 우리의 완성은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복음은 개인뿐 아니라, 무리도 민족도 인류도 온전한 회복을 하여주시는 명약이다. 그게 신약과 구약이
아니겠는가!


제 한민족은 십자가의 완벽한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로마병정도, 철새처럼 바뀌지만 있는 동안에는 한껏 폼을 잡는 권력자들,
비아냥거리는 구경꾼의 무리, 이들을 부추기며 군중 뒤에 숨어있는 종교 기득권자들,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무기력한 제자들, 통곡하는
여자들, 그리고 예수 흉내를 내어서 같이 십자가에 달려있는 인물들, 그리고 해골의 곳이라는 골고다라는 장소까지 이제 한편의 대
드라마가 펼쳐질 준비가 다 갖추어 졌다. 각본도 완성되어 있고, 연출과 감독까지 준비가 되었다. 이제 그 십자가에 예수 마냥
자신의 생애를 던져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질 주인공의 자리만 비어있다. 한 민족이 그 주인공이 될 자격을 성경은 이렇게
알려준다:


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고린도전서 1:2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