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의 4월이었다. 개혁을 표방하던 의원이
패션으로 승부수를 걸었다. 의원 선서식에 흰색 면 바지, 라운드 셔츠 차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날 고성과 퇴장으로 국회가 정회
되었다. ‘튀는’ 패션의 그 캐주얼 의원은 기존 국회의원 들이 문화 수용의 폭이 좁고 옹졸하다고 지적했고, 양복정장의 기성의원
들은 문화의 품위와 격이 떨어졌음을 한탄했다.
그
기사를 읽으며, 20년 전 80년도 중반 한국에서 어색했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만해도, 한국 남자의 양말은 흰색이어야 만
했다. 미국에서 좀 있었던 영향이었을까? 난 그것을 몰랐었던 것이 문제였다. 적어도 나의 상식에는 검은 색 양복에는 짙은 색
양말이 어울리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장례식이 아닌가? 그런데 방안 모든 남자들 옆의 검은 가죽 성경책, 검은 양복 바지 밑으로
하얀 색 이빨처럼 흰색 목양말들이 가지런히 나와있었다. 그 시위행렬 속에서 새까맣게 반질거리던 나의 외로운 나일론 검정 양말은
영 판 썩은 이빨 빠진 자리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힐끔 나를 보던 눈들… 그때 난 처음으로 소리없이 쏘아대는 ‘눈총’이
그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줄 처음 알았었다.
사
실, 양말과 셔츠 둘 다 서양에서 수입된 복장이 아닌가? 웬만한 일에는 감정 표현이 덤덤한 한국인의 정서가 이렇게 민감히 자극된
이유가 무엇일까? 유니폼이 주는 장점은 전체의 공통 분모 속에 개인의 변수가 함몰될 수 있는 편리함이다. 물론 개인주의적 사고
방식에서는 자기 표현을 막는 장애요 구속이겠지만, 전체의 고양된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도회의
중심가를 활보하는 사람들이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각 종의 상표를 자랑스럽게 드러내어 놓고 다니는 것도, 이런 네임 브랜드가 주는
이미지에 자신이 동반승차 되어있다는 착각 때문 일 것이다.
청교도도 옷가지고 싸웠다
한
국인만 옷가지고 옥신각신 하는 것이 아니다. 청교도가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성복논쟁(Vestiarian
Controversy,1563) 이었다. 이미 1550년에 존 호퍼 (John Hopper)가 주교 임명 시 성복 입기를 거부한
것은 단순한 복장의 문제가 아니라, 청교도와 성공회 사이의 신학적 입장을 포함한 다양한 이슈들이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것이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을 걸친 사색과 논쟁의 결과로 정립된 것은, 청교도 사상과 신학적 이념들이었다. 복식논쟁은 그런
사상의 표현 방식에 따른 당연한 귀결에 불과하였다. 물론 청교도의 성복 논쟁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왕권 강화 정책과 맞물린
정치적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정권 쟁취를 위해서 가외의 의미가 부여되었던 조선의
상복 논쟁 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
래서 한국인의 동질성은 의복에서부터 시작된다. 일단 피부에 와 닿게 하나가 된다는 자극 점이 있어야 된다. 한국인에게 의복은
동질성의 소산, 열매가 아니라, 동질성의 시작이요, 씨앗이다. 동일한 복장은 소속 집단에 귀속하는 의사표시이자 신고식이다.
동질성은 그 다음 하나씩 배워갈 생활의 문제로 남게 될 뿐이다. 목사님 중에 신부님과 같은 복식을 입는 것이 나 개인적으로는
넥타이와 와이셔츠 색깔 고르는 고민을 안 해도 되는 이점이 있을 것이란 이기적인 생각도 하여보지만, 많은 한국 개신교인들이
불편함을 가지는 것도 복식이 단순한 유니폼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이
런 한국인의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올림픽의 붉은 열풍이었다. 붉은 색은 전통적으로 중국인이 선호하는 색이다. 한국의
단풍이 그렇게 붉어도, 한국인의 감각에는 조심스러운 색깔이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로 통하던 나의 어린 시절에는
공산주의와 더불어 붉은 색은 사회적 금기 조항이었다. 그렇던 한국에 붉은 색의 열풍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국의 거리가 붉은
색으로 도배되다시피 하였다. 심지어 미국에 있는 한국계 2세들까지도, 2002년 월드컵 기간에는 붉은 악마의 휘장과 셔츠를 입고
다녔다. 지방색도, 배경도, 세대도, 이념도, 종교도, 언어까지도 더 이상 갈등의 요소가 아니었다. 복장 통일은 한국인이
선호하는 화합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