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
중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때때로 공산당에 가입한 학생들과 친해지는 일이 종종 있게 된다. 자라면서 공산주의자라면 무조건 나쁜 사람이라고 의식 교육을 받아왔던 반공 세대인지라, 처음에는 마음 한 구석에 그들을 향한 왠지 모를 거부감과 배척 심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 교수에게 잘 보이려고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는 얄팍한 학생들보다는 신실하게 공산당에 충성하는 학생들이 오히려 정직하며 믿음성이 가는 재목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더러는 공산당에 평생을 바쳐온 나이 든 중방 영도 중에는 도무지 예수 믿는 우리가 따라가기 힘든 인격과 합리성을 지닌 존경스러운 분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위해 봉사하며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살아가기를 가르치는 공산주의의 가르침이 기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결코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을 세운 마르크스 자신이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으니 그 뿌리가 맞닿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공산당원이었던 인물로서 소학교에서부터 가르치며 숭상하는 뢰봉(雷鋒), 열악한 산간지역에서 티벳인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숨진 공번삼(孔繁森)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 희생의 삶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의 교과서적 인물로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하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세워져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기준을 능가하도록 삶으로 부딪혀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만일 그들 앞에서 그런 모습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된 사람들이기도 하다.
(1)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 일로 길림성의 수도인 장춘(長春)시에 출장을 갔다가 K 대학에 있는 조선족 교수 S씨를 방문했다. 그는 일전에 여름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우리학교에서 계절학기 과목을 한 과목 맡아 강의를 한 적이 있었던 분이었다. 마침 내가 방문한 그 시각에 S 교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기계공학과의 교직원들을 상대로 매주일 있는 공산당 정치학습을 가르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교무실과 같이 여러 교수들이 함께 쓰는 사무실에서 따끈한 중국 차를 마시며 한참을 기다리니 S교수가 들어왔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마치 오랜 친구가 찾아온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출장에 관련된 도움을 잠시 받은 후, 우리는 곧바로 저녁 식사를 위해 함께 시내로 나왔다.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식당에서 푸짐한 진짜(?) 중국 요리를 시켜놓고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조선족 학자들이 그러하지만 그들에게는 험난한 민족의 역사를 지켜온 선조의 후예라는 강한 자존심이 있다. 그러나 한편 그들도 약한 인간인지라 한국에서 찾아온 우리들에게는 선진국에 대한 동경심과 더불어 경제적 열등의식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에 여간 해서는 진심을 털어놓는 대화를 나누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S교수는 성품이 소박하고 일단 우리학교에서 한달 이상을 한솥밥을 먹었던 과거가 있는지라 비교적 격의 없이 대할 수가 있었다. 더구나 술이 한두 잔 들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요즈음 자신이 가정에서 처한 가장으로서의 딱한 처지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S 교수는 중국이 개방되기 이전에는 교수로 평생을 공산주의에 헌신하며,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의 권위를 세우며 비교적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방 이후에 아내가 밖에 나가 장사를 하더니 대학 교수인 자신보다 돈을 더 잘 벌기 시작했고, 점차 자신의 위치가 돈밖에 모르는 자식들 앞에서 손가락질 받는 못난 가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괴로움 때문에 요즈음 자신이 심한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 자기와 가까운 친구가 느닷없이 성경책을 한 권 가져다주며 읽어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 그 책을 만지는 것도 겁이 났는데, 차츰 궁금한 생각이 들면서 과기대에서 만났던 교수들의 얼굴이 생각나더라는 것이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에서 도무지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지 궁금했었는데, 내친김에 자기도 교회를 한번 나가볼까 고민을 하고 있던 중 때마침 내가 찾아오자 너무 놀라고 반가웠다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을 나에게 붙여주셨음을 깨닫고 그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런데, 술기운이 조금 더 오르더니 그는 우리 학교를 방문하던 시기에 자신이 받았던 충격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 학교에서 한달 간 가르치는 동안에 중국에 그런 대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학생들의 표정과 웃음이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중국 아이들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도 잘 모르는 자신에게 깍듯이 인사하며 지나다니는 학생들이나 외국서 온 교직원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심지어는 자신보다 한참 연배가 위인 노교수들 조차도 자기를 보면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지나가는 모습이 도무지 중국의 다른 대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처음 며칠간은 S교수는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대로 피우던 담배꽁초를 복도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다녔는데, 가만 살펴보니 복도가 휴지 하나 없이 깨끗하더라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나가던 다른 교수가 허리를 굽혀 담배꽁초를 주워 휴지통에 버리는 모습을 뒤에서 보고 난 이후에 이분이 마침내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본질상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여러 모순들을 공산주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과도 현상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종교 역시도 인간의 발전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일종의 결핍 현상이며, 공산주의 세계가 도래하면 자연히 도태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S교수는 자신이 젊은 시절부터 그토록 열렬히 신봉하고 배웠으며 지금까지 가르쳐 오고 있는 공산주의 이념이 바로 이 학교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또한 이 학교를 움직이고 있는 외국 교직원들이 모두 자원 봉사자로서 중국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모든 영화를 버리고 온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놀라움은 가중되었다. 자신이 우습게 여기고 비판하여 왔던 기독교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교직원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항상 기쁨과 웃음에 찬 생활들을 하며 서로 돕고 아끼며 살아가는 모습들이 바로 자신이 지난날 그렇게 꿈꾸었던 공산주의 사회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패한 공산당의 모습에 염증과 회의를 느껴오던 그가, 자신의 청춘을 바쳐 신봉했던 공산주의 이론이 실천되고 있는 현장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S교수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과연 자신들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의 신념과 공산주의 이론이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그가 도달한 한가지 결론이 있었다. 취중에 그가 고백한 내용은 이러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이 있고, 공산주의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것밖에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날 우리는 늦게까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차 시간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2)
연변 과학 기술 대학에서 북한을 돕기 위해 진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관련되어 북한 과학자들이 대여섯 명씩 방문하여 학교 기숙사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가는 일이 더러 있었다. 북한이 바로 인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비극적 분단 역사의 족쇄를 찬 채 건너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가슴에 안고 지내던 우리 교직원들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스스로 찾아온 그들을 향해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대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 체제가 다르고 사상이 다른 세계에서 온 그들에게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다. 잘못하면 그것이 모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들이한 그들의 입장을 어렵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편하게 대화할 방법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김진경 총장의 제의로 시작한 것이 “밥 먹이기 릴레이 작전”이었다. 더러는 보름씩 또는 한 달씩 머물다 가는 그들에게 교직원 가정에서 돌아가며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식사를 초대하여 풍성한 음식으로 융단 폭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그 첫 스타트는 우리 집에서 시작되었다. 즉흥적으로 일을 잘 벌이는 김 총장이 북한 손님들에게 남조선 동무 집에서 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의를 하고서는 돌연 우리 집으로 쳐들어 온 것이었다. 토요일 오후 두 시경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받으니 “당신 말고 애인동무 바꿔.”하는 김총장 특유의 카리스마가 튀어나왔다. 귀한 손님들을 모시고 갈 터이니 저녁상을 잘 차려 놓으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내가 시장으로 이리저리 총총걸음을 오가며 황망히 움직여 겨우 저녁상을 마련하자 곧이어 김총장 내외와 함께 빼빼 마른 북한 사람 다섯이 들이닥쳤다. 학자들 사이에는 항상 그들을 감시하는 지도원 동무가 한 사람 끼어 있기 마련이다.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약간은 겁먹은 표정으로 우리 집에 들어오던 그들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조선 괴뢰 집에 오니 기분이 어때요? 하하하…” 하며 긴장된 분위기를 일부러 흩뜨리는 김총장의 유머에도 여전히 조심스레 숟가락을 움직이며 말이 없던 그 얼굴들… 그들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식사 후에 아내가 오르간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르간의 페달을 신기한 듯 웃으며 구경하던 그들이 귀에 익은 가락이 흘러나오자 곧 얼굴이 풀어져서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까지 부르는 감격을 맛보았다. 김진경 총장은 북조선 동무들이 아무 격의 없이 우리 남한 형제의 가정을 방문하여 이렇듯 화기애애하게 함께 식사를 나누며 즐긴 것은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일일 것이라며 감개무량해 하였다.
손님이 떠나고 난 후 뒷정리를 하던 우리 부부는 집안에 걸어놓았던 십자가가 사라진 것을 알고 순간 깜짝 놀라 긴장하였다. 알고 보니 북한 손님이 온다니까 그 당시 소학교 2학년 짜리 아들 다니엘이 겁을 먹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벽에 걸린 십자가를 떼어내어 자기 침대 이불 속에 감추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였었다. 그러나, 분단의 오랜 장벽도 같은 민족의 언어를 타고 흐르는 촉촉한 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바늘구멍 같은 틈새를 타고 얼어붙은 감정의 실낱같은 물줄기가 녹아 흐르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서로 간에 막혔던 담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결국 함께 어울러져 “고향의 봄”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외쳐 부르는 감격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제3국에서 남한 사람과 접촉만 하여도 큰일 나는 줄로만 알던 그들이 우리의 가정들을 속속들이 방문하여 함께 웃으며 음식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통일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게 한 민간 외교의 쾌거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특별히 오간 이야기조차 없다. 그냥 우리의 전통적인 예절로서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였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마 사모님들은 쌀을 씻으면서도 기도를 했을 것이다. 말은 안 하였을지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인 가정의 사는 모습을 통하여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매끼마다 기도하며 식사하는 우리들을 통해 어쩌면 식탁 가운데 함께 하신 예수를 그들이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학교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 그들이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벽이면 교수와 학생들이 어울려 운동장을 뛰는 모습들…, 활짝 핀 얼굴로 웃으며 지나가는 복도의 학생들…, 매일같이 뷔페 식으로 누구나 마음껏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 그곳에서 교수와 학생이 항상 함께 줄을 서서 밥을 타고 웃고 이야기하며 식사하는 식탁의 풍경들…, 그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는 부러움과 충격의 장면들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정해진 한 달이 지나고, 돌아가야만 하는 아쉬운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을 때, 사랑의 집이라 일컬어지는 기숙사 식당에서는 그들을 위한 마지막 환송 만찬이 베풀어졌다. 사모님들이 정성껏 마련한 선물들을 한아름씩 받고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들은 인사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돌아간 후에 뜻밖에도 그들 중 한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진 고백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공산주의가 완성된 사회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