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내가 국민학교(그때는 그렇게 불렀다. ^^) 6학년때 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6학년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던 겨울 방학에 다니기 시작한 교회는 내게 특별한 경험이었고 그 특별한 경험을 더욱 더 ‘특별하게’ 만들어준 것은 처음 간 교회 수련회였다. 그 당시 가장 컸던, 그리고 유명했던 금식 기도원에서의 수련회는 내게 충격이었고 늘 선하게만 보이던 교회 여자 선생님의 울부짖던 통곡과 회개의 기도는 내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으며 나로 하여금 두려움 반, 기대반의 교회 생활을 시작하게 했다.
그렇게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3개의 다른 교회를 다녔다. 처음 다녔던 교회에서 두번째 교회로는 어떤 이유였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고 두번째 교회에서 세번째 교회로는 아시는 친척이 목사 안수를 받고 개척을 하시는 바람에 가까이 사는 친척된 도리를 하느라 옮겼었다.
세 교회 모두 소위 동네 교회들이었기에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적응의 과정들을 거칠 수 있었고 또 친척이 담임 목사로 계시던 교회에서는 개척교회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중고등부 회장도 하면서 마치 신앙이 탄탄한 아이처럼 그렇게 착각하며 교회 생활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목사님의 큰 딸이던 누나는 당시 대학 4학년으로 CCC 멤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누나 덕분에 CCC의 행사에도 참석하며(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나름 신앙을 ‘키워’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나 아주 이원론적인 삶을 살았는데(물론 그때는 그런 용어조차도 몰랐지만) 신앙생활이란 주일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당시 많은 고등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사소한 일탈행위를 일삼으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전기에서 믿었던 대학에 떨어지고 후기를 가야하나, 재수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부모님이 제안하신 신학대학은 정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에(물론 지금은 아내를 만나게 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킨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지만..^^) 입학을 하고야 말았다.
내키지 않은 공부를 하려니 결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당시에는 당구장과 술집이 학교보다도 더 친숙한 곳이었고 신앙이 자라기는 커녕 요즘 용어로 Silent Exodus(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에 빗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녀들이 졸업과 동시에 교회/신앙도 조용히 떠난다는 것을 표현한 용어)의 무리에 끼고 말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학대학생이라는 내 겉모습은 교회의 주일학교 선생, 주일학교 총무, 성가대원이라는 자리에서 놓아주지 않았고 나 역시 부모님의 입장, 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교회를 다녔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참을 쓰느냐 하면 당시에 내가 다녔던 교회들, 혹은 나와 같은 신앙의 여정을 겪은 사람들을 찾아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신앙적으로 많이 아프고 고민되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아니 신앙을 넘어서서 인생이란 것에 대하여 근본적인 질문이 많았는데 그 질문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가이드해 줄 사람을 찾질 못했다. 내가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그래서 방황하면서 대학부 모임에 거의 나가질 않았는데도 중학교때부터 알아오던 교회 선배들, 대학부 전도사님들/목사님들은 왜 내게 대학부 모임에 나오지 않는지, 혹은 따로 만나 어떤 고민이 있는지를 물어오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내가 캠퍼스 사역을 시작한 것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젊은이들이 분명 캠퍼스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다. 원래 길을 잃은 사람은 스스로 찾기가 힘든 법이다. 길을 잃고 헤매일 때 누군가 ‘내가 그 쪽으로 이미 가봤는데 아니더라. 이 쪽으로 한번 가봐’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경험한 사람들은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신앙적으로 그리 뛰어나지도 않고, 몇 마디 어줍잖게 알고 있었던 신앙지식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보다는 그저 대학생때의 나처럼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그래서 누군가에게 내 속이라도 털어놓으면 그걸로 시원하겠는데 그 얘기할 사람이 없어서 조용히 울고 있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 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작은 바램을 가지고 캠퍼스 사역을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