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고통을 이해하는 또다른 줄기,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주는 도전
90년대 말을 기점으로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 복음주의 진영 안에 수년에 걸쳐 뜨거운 감자와도 같이 논의가 되고 있는 신학적인 논쟁을 소개한다. Open Theism, 이른바 열린 신론으로 불리우는 신학적인 주장이다. Facebook에 존재하는 열린 신론을 논의하는 이들의 페이지에 가보면(http://www.facebook.com/
1) God and creatures enjoy mutually-influencing relations
2) the future is partly open and God does not fully know or settle it
3) love is uniquely exemplified by God and is the human ethical imperative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많은 이에게 논쟁의 물꼬를 터준 것은 2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일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
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하시고 미래의 결과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인간사의 미래를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상호적인 관계를 통해 미래의 결과가 결정될 수 있도록 미래의 결과를 아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이제껏 이해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성품과는 맞지 않는 새로운 주장이었기에 많은 신학자들의 반론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시카고 트리니티신학교의 D.A. Carson 교수가 쓴 “What does God know and When does He know it?”이란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진영의 시각으로 보면 아직까지 열린 신론은 우리가 미처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어쩌면 지나치게 인간적인 각도에서 편의를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않은지 주의와 경계를 띄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신학자들의 논쟁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각기 나름의 성경적 밑바탕을 제시하면서 주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 각각의 주장과 성경적인 예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양쪽의 주장을 공부하면서 개인적인 견해로 이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 교리적인 틀에 갇힌 하나님에 대해 암기하는 수준으로 살다가, 이제는 좀 더 진지한 자세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저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말할 수 있겠다.
여전히 저는 열린 신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3월11일에 일본 동부에서 일어났던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의 피해현장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은 거대한 재난이나 이해할 수 없는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열린 신론이 말하고 있는 주장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열린 신론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신학자 중에 그렉 보이드라는 사람이 쓴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저에게는 복음 전도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이제는 신학자이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이 29번 동안 서신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마침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내용이 담겨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 선물할 수 있는 좋은 책이 될 것이다.
(http://www.yes24.com/24/
오늘은 그 책에서 한 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고난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 무신론자인 아버지가 갖고 있는 질문을 접근하는 아들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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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지진과 기근을 일어나게 하시는 게냐?
그렉에게
너와 무슬림 학자와의 토론회가 잘 끝났다니 매우 기쁘구나. 할 수 있으면 테입을 하나 구해 보내주렴. 비디오테입을 보내주면 더 좋겠다. 꼭 보고 싶구나.
너의 지난번 편지를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아주 여러번 읽어야 했단다. 네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톨릭교회에 다니던 시절에 하나님에 대해 배운 많은 것과 반대되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는 내가 늘 생각해왔던 것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는 성경의 권위자가 전혀 아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미래를 아는 분으로 나와 있지 않느냐? 네 견해가 전통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단 인정하마. 그 전통적 견해라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하지만 너의 견해가 그저 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궁금하구나.
어쨌든 너는 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지 않도록 미리 보장할 수 없는지 상당히 적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오직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자유에 대한 너의 견해로도, 하나님의 지식에 대한 견해로도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또다른 심각한 난점이 있다. 어떤 악들은 사람들의 자유스러운 결정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이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직접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인데 왜 기근, 지진, 산사태, 에이즈, 기형아 등등과 같은 것들을 만들어내시지? 분명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자유의지에도–하나님의 자유의지를 제외하고는– 비난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오직 사랑이시라면, 자신의 피조물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니?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1989년 5월11일
너를 매우 사랑하는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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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버지께
지난번 편지에 늦게 답장을 드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이곳 베델대학에서 학기말을 지내느라 정말로 정신이 없었답니다. 먼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이라는 문제를 다루고 그 다음에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악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 볼께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에 따라 결정하는 미래의 일과 행동에 대해 모르신다는 견해는 저만의 생각이 아니며, 상당히 많은 신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사람들이 내릴 자유로운 결정들에 대해 미리 알지는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들에 의해서건 하나님 자신의 뜻에 의해서건 미래의 어떤 일들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로운 행동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완전히 공개된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만 공개되어 있는 셈이지요. 심지어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창조에는 감수해야 할 모험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 견해가 성경에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신학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하기로는 이 견해는 매우 성경적이에요. 세세한 것들을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따분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지만 저는 성경속에서 하나님이 미래를 어느 정도 개방적인 것으로 여기시면서 사람들과 상호작용한다는 것을 보게 되지요. 미래는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심지어는 새로운 상황들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바꾸시기까지 합니다(출32:14; 삼상 15:11; 렘 18:7-10; 26:19를 보세요). 하나님이 미리 모든 사건들에 대한 고정된 청사진을 가지고 계셨다면 물론 이런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방적인 견해는 보다 ‘인간적인’ 것입니다. 저의 견해로는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더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미래 전체를 알고 통제하는 하나님이라는 견해는 제가 판단하기로는 성경적인 것이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철학의 산물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자연재해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런 재앙들에 대해 직접 책임이 있다는 의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세가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
첫째로, 저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고통과 고난은 자연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로 인한 결과이며, 심지어 대부분의 자연 재해들로 인해 일어난 고통조차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모습을 유지했더라면 최소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기근에 대해 생각해 보지요.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굶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 분야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식량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자신들이 필요한 양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필요한 이상의 많은 식량을 쌓아놓고 있는 것뿐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미국인들은 세계 인구의 7%밖에 안되지만 세계 자원의 절반 이상을 소비합니다. 평균적으로 후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덜 소비하는 반면, 선진국 국민은 필요량보다 더 소비한다고 합니다.
또 정치적 전쟁이 없었다면 얼마나 많은 ‘자연적’ 악이 예방될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세요(이디오피아의 비극은 분명 예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군비 경쟁이 없었다면, 세계 자원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면, 돈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해 투자할 만큼 충분히 마음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심지어 방글라데시의 홍수들조차 환경과 복지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저는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중 많은 것이 언제나 자연적인 악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악한 마음들에서 생겨나는 것이지요.
둘째로,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이 모두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보다 못하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여러가지 한계와 불완전함이 있어 보이지요?
예를 들어, 우리를 받쳐주는 바위는 발끝이 채여 넘어질 정도로 단단하고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우리가 그것을 뚫고 떨어질 정도로 얇아야 하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주는 물은 그 안에서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합니다. 세상은 이처럼 각각의 특성에 의존하여 유지되게끔 되어있기에 합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책임있는 존재들이 그 안에서 살 수 있지만 어떤 환경에서는 그러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합니다. 실로, 어떤 피조물의 긍정적인 특징이 다른 환경에서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특징이 되는 거지요.
따라서 실재가 지니는 한계들은 실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것을 본래적인 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매사가 그렇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뿐이지요. 저는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만물의 제한되고 독특한 특성과도 아주 조화롭게 지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피조된 세상의 제한적인 특징 때문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래 창조된 대로 완벽하게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도 아닌 듯이 보이는 몇몇 자연적 악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예를 들어, 기형아들은 어느 것으로도 설명이 안됩니다. 유신론자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제 세번째 사항을 살펴볼께요.
아버지! 성경대로라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의지를 가진 것만은 아닙니다. 우주에 살고 있는 수많은 영적인 존재들은 사실은 물리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가 물리적 현상을 이해하는 관점으로 보면 말이지요. 이런 생각이 아버지에게는 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이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견해라는 것은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셔야 될 거에요.
이런 존재들을 성경에서는 ‘천사들’ 혹은 ‘마귀들’이라고 부른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흰옷을 입고 하프를 연주하는 날개 달린 존재나 붉은 뿔이 달리고 쇠스랑을 들고 있는 괴물을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성경에는 그런 바보같은 개념들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답니다. 그들은 또한 ‘정사’와‘권세’라고도 불리지요. 그 말은 구체적인 실체이기 보다는 ‘영적인 세력’이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줍니다.
어쨌든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이해는 이러한 실체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자유로우며, 또한 그들 중 일부는 그들의 자유를 악을 위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영적 세력들, 굳이 말한다면 ‘마귀들’은 지금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것에 대적하는 전쟁 상태에 있으며, 지구는(아마 다른 곳에서도 역시) 그들의 전쟁터입니다. 성경에는 이들의 사랑할 수 있었던 잠재력이 인간의 잠재력을 훨씬 능가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여 그들이 악을 행할 수 있는 잠재력 역시 훨씬 더 컸습니다. 아버지께서도 들어 보셨겠지만 사단은 한 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 중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루시퍼’였습니다. 그 말은 그가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희석되지 않은 악입니다. 그는 우주적인 규모의 히틀러입니다! 그의 영향과 또다른 ‘마귀들’의 영향력은 엄청납니다.
그래서 기독교적 견해로 보면, 세상은 외부의 세력에 의해 문자 그대로 포위공격을 당하고 있는 셈이죠. 오늘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전한 악의 세력이 있습니다. 더이상 창조주만이 유일하게 영향을 미치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세상은 한 편으로는 그처럼 아름답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점차 더 악몽과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선과 악의 충돌 한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란 무관심한 채 내버려 둔다고 해서 그냥 아름다워지지는 않지만 우리가 선한 계획을 좇는 한 악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세상이 전쟁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노르망디작전처럼 사탄의 일제공세를 받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아시겠지만 전쟁터에서는 온갖 종류의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지요. 그런 상황에서 모든 것은 잠재적인 무기가 되고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희생자가 됩니다. 그래서 전체 우주는 혼란 상태에 빠져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롬8장).
저는 이러한 마귀적 세력들이 자연을 어떤 식으로 왜곡시키고 압박하는지를 다 알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 진상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필연적인 한계들 또한 사람들이 악한 의지에 호소함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모든 악은 이와 같은 존재들의 의지 때문이라는 것을 깊이 확신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전쟁으로 인한 사상자인 셈이지요.
아마 이 마지막 주장은 소화하기 다소 어렵다고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저도 분명 한 때 그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저에게는 성경이 참이라고 생각할만한 무수한 이유들이 있거든요.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영의 세력만 봐도 오직 사랑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자연적 악’이 함께 양립할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저에게는 또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이유들이 있답니다. 언젠가 아버지의 질문들에 대답할 뿐 아니라 이러한 긍정적인 사항들 역시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반응을 기대할께요.
1989년 5월29일
소망을 가지고, 그렉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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